향신료(Spice) 찾아 3만 리
12~13세기 십자군전쟁으로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이 싸우면서 Spice 로드가 크게 위축되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이슬람권에서 들여오는 향신료는 양이 턱없이 부족했고 가격도 비쌌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튀르크제국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뒤
향신료에 엄청난 세금을 붙여 가격은 더 뛰었다.
유럽 각국이 직접 향신료를 구하러 나서게 된 배경이다.
근대사 초기는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유럽 열강들의 각축전으로 출발했다.
인도네시아의 몰루카제도에 첫발을 디딘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유럽 서쪽 끝에 위치했고,
이슬람 지배를 오래 받으면서
기술적으로는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앞서 있었다.
‘항해왕’ 엔히크 왕자의 후원 아래
15세기 국가 사업으로 대항해에 나서며
먼저 인도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은
계속 동쪽으로 나아가며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다.
이에 자극받은 스페인에서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3척의 배를 이끌고
남미의 최남단 마젤란해협을 돌아 태평양을 횡단했다.
이듬해 3월에는 필리핀을 거쳐 몰루카제도에 도착해
포르투갈과 반대로 서쪽을 도는 항로를 개척했다.
마젤란은
필리핀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에스파냐로 귀환해 세계 일주를 완성했다.
이후 몰루카제도는 포르투갈이 독차지했고,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향신료 무역의 독점권을 잃게 된 오스만제국은
홍해 함대를 인도양에 파견해
인도양의 포르투갈 무역 거점들을 공격했다.
설상가상으로 포르투갈은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이슬람 세력에 패해
국왕이 전사하는 위기에 처했다.
이 틈을 비집고 스페인이 향신료 무역을 잠식했다.
급기야 1580년
스페인 왕이 포르투갈 왕을 겸하는 병합 상태가 1640년까지 이어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s 영국 동인도회사
16세기 말에는
유럽 항로를 장악한 해양 강국 네덜란드가 향신료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1602년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다국적 기업인 동인도회사(VOC)를 설립했다.
VOC는 국가가 아닌 투자자들의 자금으로 운영하면서도
국가로부터 군사 행정 권한을 위임받은 사실상의 정부 기구였다.
VOC는 영국 동인도회사(EIC)보다 2년 늦게 설립됐지만,
자본금 규모는 거의 10배에 달했다.
네덜란드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158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기에
처음에는 영국과 우호적이었다.
두 나라의 동인도회사는 향신료 무역의 첨병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 항로를 쟁취하는 데도 공동보조를 취했다.
1620년대에
네덜란드가 차지한 인도네시아에
EIC(영국^동인도)) 상인들이 진출했던 연유다.
영국은
포르투갈의 인도 항로를 탈취해 후추 무역에 나섰지만,
값비싼 정향과 육두구는 네덜란드가 독차지했다.
네덜란드는
1641년 말레이반도 끝자락의 말라카항까지 점령했다.
네덜란드는 향신료 독점으로 17세기에 호황을 누렸다.
네덜란드는
2차 영국-네덜란드전쟁의 대가로
육두구 산지이자 반다제도의 작은 화산섬인 룬섬을 지키는 대신
뉴암스테르담(뉴욕)을 영국에 넘겼다.
향신료에 국가 역량을 집중했지만 이는 훗날 오판으로 드러났다.
18세기 들어 향신료 재배지가 확대되자 가격이 폭락한 탓이다.
반면 영국은 동인도제도에서 밀려나 인도 공략에 치중했다.
인도는 엄청난 노동력에다
면화 후추 커피는 물론 아편까지 재배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양념이 어떻게 금보다 비쌀 수 있을까 | 생글생글 (hankyung.com)
15-16세기 유럽시장에서 향신료중
“정향 (clove)”, “육두구 (nutmeg)” 및 “메이스(mace)”의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팔려,
후에 “네덜란드”인들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할때,
무역상은 평균160배의 이익을 남겼답니다.
거래량이 훨씬많은 “후추(pepper)” 조차 같은 무게의 은값보다 비쌌다는군요.
그 당시엔 금과 은의 가격차가,
지금과는 달리,
많지 않아 은도 매우 귀중하게 취급되었지요.
그러니 ‘동방 견문록”이 널리 읽힌후
모험가들과 항해자들이 얼마나 설레었겠나를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12세기중엽,
배에는 “키(rudder)”가 장착되었고
나침반도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15세기 경에는 3개의 마스트를 장비한 범선이 만들어 져
초보수준 이지만 원양항해가 가능해졌지요.
흑사병(페스트)은 1348년 중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이베리아반도,
독일,
폴란드로 파급되어,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들어가,
이듬해 말에는 영국 전역을 덮치고
스칸디나비아반도도 침범했다.
그 결과 유럽은 인구의 3분의 1을 잃었다.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숫자인가는
지난 세계대전에서 군인사망률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본과 독일의 정규군의 전사자를 보면,
패전이라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군인의 사망률은 20% 전후이었다.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는 것은 거의 패닉상태로 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그 후 150년간
인구가 늘지 않고 노동력이 부족하여,
봉건영주의 직영지 경영이 곤란하게 되어,
봉건제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중동에서도
14세기에 인구의 3분의 1이 역병으로 죽었다.
역병사에서 이름을 낸 미국의 역사가 매크르니에 의하면
흑사병의 기원은 몽골이 중국의 운남지방에 침입한 것이 계기이다.
중국의 인구는
1200년 무렵 추정 1억2천3백만에서
1400년경 추정 6천5백만으로 반감되었다.
원제국은 1368년에 망하지만
그 직전인 1354∼55년의 2년간에
중국 각지에 흑사병이 극심하게 창궐해
인구의 3분의 2가 죽었다는 보고도 있다.
흑사병 약으로 찾은 향신료(香辛料)
이렇게 해서
14세기 중엽의 유라시아대륙 사람들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역병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찾은 것은 약이었다.
가장 효능이 있다고 믿은 것이
동남아시아산 호초(胡椒=후추)·향신료(香辛料)였다.
중세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의 일상생활을,
당시의 15만 통에 이르는 편지들을 근거로 묘사한 ‘푸라-트의 商人’에,
14세기부터 15세기 초두에 사용되었던 약에 대한 기록이 있다.
http://www.jayo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42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2/07/434934/
https://blog.daum.net/cgan14/5824
https://brunch.co.kr/@kleine/120
향신료 역사(1) - 인도네시아 - 육두구와 정향 (tistory.com)
흑사병 치료제 찾아 바다로…제약산업의 시작
흑사병은 제약 산업,
나아가 인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게 된다.
흑사병 특효약으로 소문난 육두구를 찾기 위해
유럽 각국이 경쟁적으로 모험에 뛰어들며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근대 들어
흑사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세균의 존재를 발견했고
이는 항생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흑사병이 창궐할 당시
사람들은 병의 전파경로를 ‘냄새’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최대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을을 돌며 환자를 돌보던 ‘흑사병 의사’들은
까마귀 부리와 같은 길쭉한 마스크에
온갖 향신료를 집어넣어 냄새를 차단했다.
대표적인 향신료였던 ‘육두구’ 수요가 늘어난 이유다.
문제는 당시 유럽에서 육두구를 구할 수 있는 경로는
적대 관계였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지배하는 중동지역에 한정됐다는 점이다.
흑사병으로 육두구의 수요가 높아진 데 반해
공급이 달려 육두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당시 육두구 가격은 금보다 비쌌다.
유럽 국가들은 서쪽 바다로 눈을 돌렸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희망봉을 돌아 세계를 일주한 마젤란 등
모험가들이 육두구를 찾아 세계를 누볐다.
대항해 시대의 시작이다.
모험가들의 노력은
육두구 산지 인도네시아를 발견하는 결실을 맺게 된다.
유럽은 19세기까지도
흑사병의 치료법은커녕 원인조차 규명하지 못했다.
흑사병의 공포는 유럽에 만연했다.
흑사병의 공포에서 인류를 해방 시킨 사람은
세기의 라이벌인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와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다.
파스퇴르의 업적은 포도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포도주가 발효 도중 상하는 일이 반복되자 원인을 연구한 끝에
‘세균’의 존재를 알아낸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코흐는
세균의 개념을 확장해 몸에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봤다.
코흐는
탄저균, 결핵균, 콜레라균까지 잇따라 발견하며
세균학사에 한 획을 긋는다.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289046625770560&mediaCodeNo=257
지중해 패권 쟁탈…전쟁은 수익성 높은 장사였다 | 생글생글 (hankyung.com)
스페인 무적함대란?
16세기 경 지중해와 대서양을 누비던
스페인의 해군을 지칭하는 영예로운 이명인데요
사실 이 함대의 정식명칭은 '그란데 이 펠리키시마 아르마다',
해석하면 '축복받은 함대'라고 합니다.
당시의 스페인 해군은 이미 무적함대로 통용되기 전부터
스페인 해군은 지중해를
이끌던 주요 함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가를 5세 시기에
튀니지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를 쳐부수고
결정적으로 펠리페 2세때 1571년 오스만의 주력 함대를
레판토 해전에서 박살을 내면서
이때부터 무적함대라는 명예로운 명칭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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