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高仙芝) 장군.
고구려 유민 출신(父: 고사계.高舍鷄)으로
당나라 군대를 이끌었던 그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특히 그가 최초의 동서양 전쟁으로 불리는
‘탈라스 전투’의 총사령관이었고,
결과적으로 종이 전파 등
동서 문명 교류에 역할을 했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 PD저널(http://www.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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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의 부임지는 안서도호부로 지금의 신강위구르지역이다.
쿠차와 호탄, 카라샤르를 오가며
고선지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수없이 지났을 것이다.
타클라마칸은 ‘돌아올 수 없다’는 뜻으로 한반도의 1.5배에 달하는,
세계에서 사하라 사막 다음으로 큰 사막이다.
사막의 길을 훤히 꿰며 달렸을 고선지.
그런 고선지를 구당서는 [용모가 곱고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있다.
고운 용모의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소발률국 정벌에 나서 대승을 거두며 중국 대륙의 신예로 떠오른다.
https://m.blog.naver.com/zerosij/60160706887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6679
https://blog.daum.net/naganchun/3470
서양인들은
고선지(高仙芝)라는 인물을 발굴해 높이 평가했다.
10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
헝가리 출신의 역사학자인 오렐 스타인은
고선지를 카르타고의 장군인 한니발,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을 뛰어넘는 위대한 군인으로 평가했다.
중국 측 사료의 기록처럼 유민 2세대인 그는
신조국과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 기량을 발휘했다.
하지만 끝내는 패배자로서,
배반자로서 처형을 당했다.
그의 삶 속에서 고구려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005313641g
고선지 장군의 가장 큰 승리는 와칸 계곡의 연운보에 있다.
와칸 계곡은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의 남단부에 위치한
너비 2km, 길이 241km에 이르는 좁다란 협곡이다.
곰, 시라소니, 표범이 사는 위험지대로 중국, 파키스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과거 구 소련이 매장한 지뢰 제거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하는 위험구역으로,
지뢰를 피하기 위해 일부 지역은 촬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국경수비대의 저지로 촬영이 중단되기도 하는 어려움 속에,
취재진은 연운보의 위치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죽음의 계곡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 와칸 계곡을
최초로 KBS 취재진이 촬영에 성공.
당시 토번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연운보의 위치를 확인했다.
고선지가 연운보에 주둔한 토번을 함락시킴으로써
당나라는 토번의 기세를 꺾게 된다.
지금은 티베트로 중국 자치구에 속해있지만
당시 토번은 그 영향력이 대단해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였다.
고선지는 전략적 요충지인 연운보를 점령함으로 인해
당나라가 토번의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고 그 자신도 명성을 얻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o8KvpvdSTIQ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zerosij&logNo=60160715478
고선지는 당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더욱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다.
이슬람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
당시 이슬람은
우마이야 왕조가 지고 입바스 왕조가 새롭게 집권함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있었고 그 동쪽엔 당나라가 버티고 있었다.
751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서양이 맞부딪힌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탈라스 전투다.
동서양 최초의 전투에서,
고선지는 당나라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아
10만 대군을 이끌고 탈라스 대평원으로 진군한다.
현재 중앙아시아는 대부분의 지역이 이슬람 영향권이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가 있기 전까지 중앙아시아는 불교가 강성했다.
고선지가 탈라스전쟁에서 패함으로 인해,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고선지가
세계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은 그뿐 만이 아니다.
제지술을 아는 중국포로들이
압바스 왕조의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힘으로 인해
제지술의 전파가 전 세계로 이뤄져,
유럽 문명에는 르네상스를 일으켰고
코란과 성경이 보급됨으로 인해
전 세계에 종교와 문화의 교류를 가능케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Qki7s0Q-D8
포로가 된 제지공은
아라비안나이트
도입부에 나오는 유명한 도시 사마르칸트로 보내졌다.
최초의 제지공장이 생겼고
명품 ‘사마르칸트 종이’가 탄생했다.
이후 종이는 중동과 유럽으로 널리 퍼져 문명의 토대가 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3398174#home
https://m.blog.naver.com/zerosij/60161298121
당나라와 사라센 제국 사이에는 실크로드를 둘러싼 전투가
탈라스(Talas) 지역에서 있어 왔습니다.
포로로 사로잡힌 타슈켄트(石國) 왕이 처형된 것을 계기로
다시 전쟁이 벌어지고 당나라 현종(玄宗)은 751년에 정벌군을 일으켰으며,
사라센 제국 역시 군대를 일으켜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751년 4만 명의 아랍-투르크 군대가 당나라 영토로 진격했으며,
오늘날의 키르기즈스탄(Kyrgyzstan)에 있는 탈라스 강에서
고선지(高仙芝) 장군의 군대와 맞섰습니다.
당나라군은 주로 보병이었으며 아랍-투르크 기병에 허를 찔렸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여 겨우 몇 천 명만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사라센 기록에 따르면
투르키스탄 지방 탈라스강 근처에서 벌어진
이 ‘탈라스강 전투(Battle of Talas)’의
많은 포로 중에 포함되었던 제지 기술공들이
아라비아인들에게 제지술을 전파하였습니다.
http://hobbitwizard.com/archives/207
https://m.blog.naver.com/china_lab/221188694344
제국의 무덤 ^ 아프카니스탄의 歷使 - 와칸회랑(Wakhan Corridor) - 바미안 大佛은 어디에! - No.1 ^ 양귀비 (tistory.com)
카일라스 山(Mt' Kailas. 須彌山수미산) - 神들이 사는 聖山 (tistory.com)
동·서방의 고대 사서에 따르면,
이 도중 그들은 가는 곳마다 자신들의 왕조를 창조하며
현지인들과 통혼하기도 하고 현지화 하기도 하고
오늘날 튀르크민족 국가들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에 정착했다.
서쪽에서 시작하자면
이집트·터키·이란·시리아·투르크메니스탄·러시아. 타지크스탄 공화국·
아제르바이잔·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몽골리아·투바공화국 등이다.
과연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일까?
이 사실을 고대 사서에 적힌 그들의 행방 기록,
그들의 후손들이 남긴 선조들의 족보,
그들이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그 후손들에게 생긴 얼굴 및
외모의 변화에 관한 기록 등 3가지를 통해 알아본다.
이처럼
고구려 왕가와 그 유민들이 서방으로 간 사실의 단서는
우선 고구려가 건재한 시기에 고구려와 돌궐 간의 친선관계에서도 발견된다.
[수서(隋書)] 돌궐전은
동돌궐의 계민카간(啓民可汗, Yami Kaghan)이
고구려 사신과 자기 장막 안에서 만나고 있을 때
불시에 방문한 수 양제가 이를 보고
“돌궐과 고구려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고 전한다.
이 수(隋)나라 때 고구려와 돌궐의 친선관계는 이후에도 지속됐다.
앞서 [구당서]에서 확인했듯 고구려가 망하자
보장왕의 가문 일부와 그 속민이 동돌궐로 간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또 동돌궐의 마지막 카간인 힐리카간(頡利可汗)은
보장왕과 손자, 손녀를 혼인시킨 사돈관계였다.
힐리카간은 계민카간(啓民可汗)의 셋째 아들로,
당나라 정관 4년(630) 이정의 공격을 받아 항복한다.
당나라의 두우(杜佑)가 편찬한 정치서인 [통전(通典)]은
‘고려왕 막리지 고문간(高麗王 莫離支 高文簡)’이
계민카간의 아들인
힐리카간의 증손녀 아시나 부인(阿史那 夫人)과 혼인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고문간은
당시 고구려 땅인 요서(遼西, 오늘날 요녕성)로 돌아와
‘요서고려국왕(遼西高麗國王)’ 관직을 받았다고 한다.
고(高)씨 성을 쓰고 “고려왕 막리지”라는 관칭을 쓰며,
그가 활동한 연대가
발해 초대왕인 대조영(698년~ 719년 6월)이 죽기 4년 전인 715년임을 보아
고문간은 고장의 손자로 추정할 수 있다.
고문간의 부인 아시나는
동돌궐 묵철카간(默啜可汗, 바가투르카간)의 딸이고,
묵철은 오늘날 몽골에 그 비문이 남아 있어
유명한 빌게카간(Bilge Kağan)과
퀼테긴(Kül Tigin, 684~731)의 작은 아버지이다.
아시나 부인은 이 둘과 4촌 형제자매다.
이 [통전] 기록은
[구당서]에 나오는 “고려의 옛 왕가와 유민은 돌궐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고씨군장은 사라졌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고구려 왕가와 그 유민들은 돌궐에만 정착한 것이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몽골, 카자흐스탄,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유럽의 문턱인 동로마제국은 물론,
서남으로 이란과 사우디를 거쳐 심지어 시리아와
이라크를 지나 이집트에 이르렀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구당서]가
“돌궐로 간 고구려 왕가와 유민”이라고 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남긴
자신들의 선조에 관한 족보(族譜, 페르시아어: Shejere-name, 곧 ‘나뭇가지 책’)이다.
곧 서방 사서가
“튀르크인”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남긴 자신의 선조들에 관한 기록이다.
‘돌궐로 간 고구려 왕가와 유민’의 후손들은
서쪽으로 이동해 간 350년간 중앙아시아 일대에 여러 왕조를 남겼다.
이때 자신들이 편찬한 역사서에
통치자(‘칸’ ‘술탄’ ‘샤’)의 족보 형태로 기록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튀르크사’로 알려진 여러 왕조 군왕들의 족보이다.
https://m.cafe.daum.net/kphpi21/7FFr/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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