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서역 개척으로 유명한 두 인물을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전한 시대의 장건입니다.
장건은 한 무제의 명으로 대월지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중간에 흉노에게 잡혔다가 고생 끝에 한나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실크로드를 개척하게 된 것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Exl5xWvwnlo
반초는 후한 때의 인물로,
원래는 문인이었지만
흉노의 침입에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군인의 일을 택했습니다.
반초는 이후 서역 지역 50개 나라를 복속시키며 맹활약을 합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dymg98&logNo=220744570998
고대의 실크로드가 새롭게 복원되고 있다.
중국과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을 잇는 최초의 화물수송 열차인
‘실크로드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현대판 실크로드’가 구축되고 있다.
실크로드 고속 화물열차는
최근 컨테이너 32개를 싣고 중국 저장성 이우시를 출발해
1만399㎞를 달려 14일 만에 이란 수도 테헤란에 도착했다.
이 고속열차는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슈하바트 등을 거쳤다.
화물열차만 한 달에 한 번씩 운행하지만
앞으로 승객수송 열차도 운행될 예정이다.
화물열차는 시속 120㎞,
여객열차는 250~300㎞까지 운행이 가능하다.
https://week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C03&nNewsNumb=002402100013
실크로드 교역로는 중요한 세가지 루트가 있는데
돈황에서 타클라마칸사막의 북측을 통하는 서역북로(西域北路)와
남쪽의 서역남로(西域南路),
중국남부에서 인도, 페르시아만, 홍해를 거치는 바닷길이 그것이다.
그 중 하나인 돈황에서 타클라마칸사막의 북측을 통하는 서역북로(西域北路)는
투루판에서 2개의 루트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우루무치, 이닝 등 천산산맥의 북측을 도는 천산북로(天山北路)로서
카자흐스탄, 북부초원지대를 통하는 루트가 있다.
또 하나는 쿠챠를 통하는 천산남로(天山南路)로,
카스에서 서역남로와 합류하여
사마르칸드 같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를 지나간다.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09/06/341430/
‘실크로드’라는 말은
독일 베를린대학교 지리학자인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1905)이 처음 사용했답니다.
중국의 여러 지방을 다녀보고 1877년 펴낸 다섯 권의 책 <차이나 China>에서
비단이 중앙아시아와 서북 인도에 수출된 길을
‘자이덴 슈트라세’(‘Seiden’은 비단, ‘Strasse’는 길이란 뜻이다)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사막길, 초원길, 바닷길 중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많은 콘텐츠를 가진 길은 ‘사막길’입니다.
장건의 사막길은 ‘오아시스로’라고도 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들을 이어 난 길이기 때문입니다.
몇 개월을 가는 긴 길인데 물과 휴식처,
말을 갈아탈 수 있는 터미널이 중간 중간에 없다면 여행은 불가능하겠죠.
오아시스 도시(국가)가 발달했으니 당연히 풍부한 이야기가 있고
지리적 역사적 특성에 적합한 문화도 꽃 피웠을 것입니다.
실크로드는 단순히 ‘길’이 아니라 인류 역사 자체라는 것입니다.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9
사막이 확장되면서 룰란(Loulan) 시가지의 잔해들이 실크로드의 흔적처럼 서있다.
룰란 지역의 고대 묘지인 시아헤 묘지(Xiaohe Tombs)에 대한 발굴은 2004년 시작됐다.
룰란 왕국은
고대 실크로드 남쪽 루트와 북쪽 루트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위치해
5세기까지 번성했던 무역국가였으나 5세기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
시아헤 묘지에서는 수많은 미이라와 유물들이 발견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들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살았던 최초의 인류들일까?
이들은 어느 인종이고 어디에서 왔을까?
어떻게 이들은 이 황량한 사막에 적응할 수 있었을까?
최근의 연구들은
동양과 서양이 이미 4천 년 전에 문화교류와 무역활동을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의 40% 이상은 숲으로 덮여 있었고,
현재 사막인 곳들도 대부분 타림강의 물길이 흐르던 곳이었다.
https://youtu.be/fioQnWyjmXE?list=PLk1KtKgGi_E5vDnSvwqJB38umxqrH-7GI
고대 실크로드 중 천산남로에 위치한 오아시스 왕국 ‘호탄(Hotan)'은
대승불교를 전파한 초기 중심지로 알려져있다.
보석교역으로 축적한 부를 불교예술 작품 창작에 집중했던 이 왕국은
그러나 지금은 문명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불교도시인 단단위릭(Dandan-Uilik)의 잔해는
20세기 초 영국 탐험가 오렐 스타인(Aurel Stein)경에 의해 발굴됐지만
강한 바람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 때문에 다시 묻혔다.
https://youtu.be/gFSLYuo5Kuo?list=PLk1KtKgGi_E5vDnSvwqJB38umxqrH-7GI
명사산(鳴沙山)은 돈황 시내를 굽어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사막이다.
저 멀리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이곳에 와 멈춘 다음
수만 년 동안 시간을 보내며 사막을 만들어 냈다.
동서 40킬로미터, 남북 20여 킬로미터,
해발 1715미터의 사막 산으로
바람이 불 때 소리가 난다고 하여
명사산(鳴沙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월아천(月牙泉)은
바로 명사산 아래에 있는 남북 방향으로 길이 100여 미터,
동서향으로 약 25미터(월아천의 규모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르다.
아마도 이것은
시간이 가면서 월아천의 규모가 점점 작아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깊이 2미터의 초승달 모양의 호수다.
명사산에서 월아천을 내려다보면
사막의 오아시스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알 수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12353
실크로드의 칭하이 성(청해성) 지역은 해발 3,500미터의 고산지대다.
이 지역의 실크로드는
수도인 서녕에서 시작해 광활한 차이다무 분지를 가로질러
칭하이 호수와 산맥의 서쪽을 통해
타클라마칸 사막의 밀란에 있는 남쪽 루트와 연결된다.
이 길은
티벳족과 몽골족같은 유목민 부족의 영토를 지나간다.
이 길은
황하강의 서쪽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남쪽 실크로드의 대체 루트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칭하이 호수 서쪽 지역에 위치한 도란의 고대 대형 무덤들에서
동서 무역의 증거인 비단 350점과 다른 물건들이 발굴됐다.
이것들은
이 길이 과거에 교역을 위한 정규 루트로도 사용됐다는 것을 증명했다.
https://youtu.be/54CaMYwf1Rg?list=PLk1KtKgGi_E5vDnSvwqJB38umxqrH-7GI
둔황은 세계자연문화유산인 모가오(莫高)굴로 유명하다.
4~13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이 석굴에는
492개에 달하는 석굴과 수많은 조각, 벽화들이 잘 보존돼 있다.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서 발견됐다.
신라 시대인 723년께 혜초는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다.
그는 해로를 통해 인도로 가서 4년간 여행을 한 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실크로드를 통해 장안으로 돌아와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히는 위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1VHSSP6V7E
高仙芝(고선지) 장군 루트 - 와칸 회랑(Wakhan Corridor) ^ 연운보 勝戰 - 사마르칸트 Paper(紙) (tistory.com)
실크로드 중심 교차로였던 카슈가르는 20세기 초반,
영국과 러시아 두 제국의 경쟁터였다.
‘대단한 게임(Great Game)’으로 알려진 이 두 제국들간의 권력투쟁은
실크로드 탐험을 지원함으로써
지도위의 빈칸을 채워 나가는 경주처럼 진행됐다.
두 국가는 파미르 고원까지 탐험을 위한 길을 열고
타클라마칸 사막까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스벤 헤딘, 오렐 스타인 같은 탐험가들은 이런 기회를 재빠르게 활용했다.
이들의 탐험활동은 첩보활동을 방불케 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수많은 보물들이 있다고 영국정부에 보고한 사람은
티벳승려로 위장한 인도요원이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키플링은 그의 소설 Kim에서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때 비로소 ‘대단한 게임’은 끝이 났다” 라고 묘사했다.
https://youtu.be/kE9RNJ5hVA0?list=PLk1KtKgGi_E5vDnSvwqJB38umxqrH-7GI
실크로드는 중국을 벗어나면 서역(西域)을 통과해야 한다.
서역은 중국과 유럽 사이의 중앙아시아 일대로,
지구상의 육로 네트워크 중 가장 험한 지역이었다.
실크로드는 험준한 산맥과 사막이라는 지형적인 장애물과 함께
언어가 다른
여러 독자적인 민족 집단의 영역을 통과해야 하는 장애물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나타나 흉기를 휘두를지 모르는
거칠고 난폭한 투쟁의 역사가 실크로드에서 이뤄졌다.
당 현종(685~762)은
재위 기간(712~756) 동안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자녀를 두었다.
그중에 역사에 기록된 자녀는 셋째 아들과 열여덟 번째 아들이다.
셋째 아들은 현종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숙종이다.
열여덟 번째 아들 수왕은
순번에서 짐작할 수 있듯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수왕은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 태어나 일찌감치 황위 계승권에서 벗어난,
여러 왕자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열여덟 번째 아들이 화제에 오르내리는 것은 ‘치명적인 사랑’ 때문이다.
양옥환(719~756)이 그 주인공이다.
빼어난 미모와 함께 춤과 노래 실력을 겸비했던 양옥환은
열일곱 살에 수왕을 만나 왕자의 비(妃)가 된다.
양옥환이 왕자의 부인으로 6년째 살던 해,
현종은 애첩을 잃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현종의 환관 채홍사는
중국 전역에서 황제의 밤을 위로할 만한 미인을 수소문한다.
그러던 중 수왕의 아내가 절세미인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채홍사는 교묘한 구실을 붙여 양옥환을 현종의 주연에 데뷔시킨다.
양옥환은 현종이 연주하는 현악기에 맞춰 멋진 춤사위를 선보였다.
50대 후반인 현종은 첫눈에 스물셋 양옥환에게 반하고 만다.
뭐든 할 수 있는 가공할 권력을 지닌 황제였지만
양옥환은 아들의 부인이었다.
사랑에 눈이 먼 현종은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양옥환을 화산으로 보내 도교의 도사로 입문시킨다.
도사가 되면
속세의 삶은 다 지워지는 것으로 여겨진 사회적 통념을 이용했다.
대신 아들에게는 다른 여자를 소개해주었다.
현종은
도사를 모셔와 가르침을 받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붙여 양옥환을 궁으로 끌어들였다.
4년 뒤
스물일곱 양옥환은 귀비로 책봉된다.
이렇게 하여 양귀비가 세상에 등장했다.
그때부터
현종의 총기가 흐려지고 당제국은 기울기 시작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됐다.
http://m.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442100031&ctcd=C09
천산남로에 있는 쿠차(Kucha)는 7세기까지 번성한 오아시스 왕국이었다.
불교국가였던 쿠차왕국의 부는
“키질 천불동“이라는 “숨겨진 타클라마칸의 보물”들을 만들어냈다.
인도유럽인종이 대부분이었던 쿠차왕국의 사람들은
청색 안료를 많이 사용해 신비한 푸른 색깔의 벽화로 유명하다.
북쪽의 유목 민족들과 동쪽의 중국 한나라 왕조 사이에 놓여있던 쿠차왕국은
항상 두 세력 간의 전쟁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중국으로 끌려간 한 왕족 출신의 승려가 있었다.
쿠차 왕국의 쿠마라지바(구마라십)는
중국으로 가 불교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평생 평화의 메시지를 설파했다.
이때 전해진 불경 경전은
지금도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 사용된다.
한때 한나라 군대에 의해 배교자가 되기도 했던 이 승려의 극적인 삶은
실크로드가 단순한 상품교역로가 아니라 ‘문화와 사상의 길’이었음을 나타낸다.
https://youtu.be/rvyIEKDLLvM?list=PLk1KtKgGi_E5vDnSvwqJB38umxqrH-7GI
“실크로드는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었다”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20세기 초반 독일, 영국, 러시아, 일본 등은
베제클리크 천불상(Bezeklik Thousand Buddist Caves)에서
귀중한 그림들과 다른 유물들을 닥치는대로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은
11세기 중앙복도벽에 그려진 최상급의 위구르 불교 벽화들을 몹시 탐냈다.
이 벽화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맹세한다는 뜻을 가진 불교용어
‘프라니디(Pranidhi)'를 나타내는 것으로
풍부하고 선명한 색깔로 15명의 거대한 부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독일, 일본등의 발굴팀들은
이 벽화의 일부를 벽에서 잘라내 자신들의 나라로 보냈다.
https://youtu.be/9Lg9hLYeMmw?list=PLk1KtKgGi_E5vDnSvwqJB38umxqrH-7GI
14세기에 발생한 전염병(Plague Pandemics)은
초원의 길(Stepp route)과 실크로드(Silkroad)따라 더디게 전파되어
20여년 어간에 유럽을 초토화시켰다.
이 전염병이 바로 그 유명한
대흑사병(大黑死病, Great Black Death)이다.
흑사병의 세균(Bacteria)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가 원인균으로
이에 감염된 쥐의 혈액을 먹은 벼룩이 사람의 피를 빨면서 병을 옮겼다.
이 균에 감염된 사람은 약 6일간의 잠복기를 지나
흉부의 통증과 기침,
각혈,
호흡곤란,
고열을 호소하게 되며,
대부분 의식을 잃고 사망하였다.
내출혈로 인해 생기는 피부의 검은 반점 때문에
흑사병이라 하였다.
이 흑사병은
당시 몽골제국 원나라(Yuan Dynasty, 1271~1368)에서 시작되었다(M. W. Dols).
1334년 후베이성(Hebei Sheng)에서 흑사병이 번져 인구 90%가 사망하였다.
그 후 1348-54년 동안
장시성과 산시성, 후난성, 광둥성, 광시성, 허난성, 쓰이위엔, 몽골지역으로 번졌다.
당시 중국 인구 약 1억 2천만의 약 30%에 달하는 사람이 사망하였다.
고려 제29대 충목왕(1345~1348)이 1348년에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아마도 흑사병이였을 것이다. 한반도에까지 흑사병이 퍼졌던 것이다.
후베이의 흑사병이 실크로드따라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
텐센산맥(Tian Shan)을 넘어 이슥쿨(Issyk-kul)의 네스토리안 공동체까지 옮겨갔다.
그리고 또 다른 방향은 초원의 길을 따라 크림반도까지 전이되었던 것이다.
http://m.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431
이탈리아 반도 동쪽에 위치한 손바닥만한 도시국가인
“베네치아 공국(The Most Serene Republic of Venice, 지금의 베니스)”이
강력한 해군을 구축해
“오스만 터어키 (Osman Turkey)”를 통해 들어오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면서
16세기까지 400년간 전성기를 누렸음은 잘 알려져 있지요.
오랜세월동안 유럽인들은
향신료의 원산지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베니스에 향신료를 판매했던 아랍상인도
중간공급책에 불과해 알지 못한데다,
당시 유럽인의 세계관으론
동방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으니 감을 잡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14세기 중순,
유럽에서만 35백만명의 희생자를 내게한
“흑사병 (black death)”유행 이후의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향신료의 수요를 급격히 증가시키고
급기야는 15세기 말부터 향신료는
전유럽의 군주들과 모험가,
무역상들의 피를 끓게하는,
그로인해 세계역사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상품이 됩니다.
흑사병의 유행중 발생한 사망자의 대부분이 기층민중이었던
“농노(serfs 혹은 villains)” 였던지라,
이들를 기반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의 중세 “봉건제도(feudal system)”는 붕괴하고
농민이 없어 경작을 못하게된 경작지는
인력소요가 적은 “목초지”로 변경되어 축산업이 성행하게됩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유치한시절 이었던지라,
겨울이 가까우면 사료를 구할 길이 없어
가축을 대량 도살하여 고기값이 폭락하고,
봄엔 도살할 가축이 없어 폭등하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도살한 “육류”를
장기저장하는 방법이라곤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외엔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 그런 저장육들은 당연히 맛이 없었지요.
당시 기록중에
장기보관한 염장육을 먹는게 고역이었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그러니 역한 냄새가 나는 염장고기를
그나마 먹을만하게 해주는( palatable)
“향신료”의 수요가 15세기 무렵부터는 폭증 할 밖에.
근대사를 돌이켜 보면
15세기부터 시작된 “대 항해시대 (great voyage period)”는
유럽이 아시아를 추월하고
과학문명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향신료가 그 시대을 여는 동기를 제공했으니
세계역사 발전에 “스파이스(spice)”를 쳤다고나 할까요?
대항해 시대의 동기를 부여해 준것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The Million 혹은 The Travels of Marco polo)” 입니다.
https://blog.daum.net/offshore-process/9
世界史를 바꾼 대표 植物 - 후추. 감자. 사탕수수 Story (tistory.com)
천산북로는 이른바 ‘스텝 루트’라고 알려져 있다.
고대 유목민들은
이 길을 이용해 말을 타고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 질렀다.
최근들어 이 지역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들이 이뤄지고 있는데,
1997년에는 카자흐스탄 국경 부근에서
4-6세기 것으로 보이는 유목민 얼굴 형상의 황금마스크가 발견됐다.
비슷한 황금유물들이 흑해 북쪽 해안에서
카자흐스탄과 몽고까지 이어진 스텝 루트 인근의 여러 장소에서 발견됐다.
스텝루트 대부분을 장악했던
‘우순(Wusun)족’은 수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들을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고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끝을 연결하는 지름길을 제공하는등
일종의 ‘실크로드 특급’의 역할을 했다.
이 개념은
오늘날 항공노선들이 이용하는 개념과 유사한 것이다.
그들의 속도와 참을성 때문에
이 유목민 부족은 ‘바람의 민족’으로 불려졌다.
https://youtu.be/H5goGrW6s3A?list=PLk1KtKgGi_E5vDnSvwqJB38umxqrH-7GI
http://news.imaeil.com/Society/2013110511394421488
오스만투르크 ^ 터키 - 돌궐(투르크) ^ 징기스칸 - 고구려 유민 (tistory.com)
돈황은
실크로드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유명한 지역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돈황 북쪽 석굴들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지난 20년 동안 유적발굴이 조용히 진행됐다.
최근 들어
수많은 불교 경전들과 48구의 유골등이 이곳 북쪽 석굴에서 발굴됐다.
시신들과 함께 묻힌 장신구들을 통해 이들의 직업은 승려들과 화가들,
그리고 전쟁에서 죽은 하급 장교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막고굴에는 훌륭한 벽화 예술작품들이 장식돼 있지만
북쪽 석굴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가난하고 이름없는 사람들이 묻혀 있을 뿐이었다.
이 북쪽 석굴에서 발견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북쪽 석굴과 막고굴은 정확하게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돈황 석굴이 진정한 고전역사를 대표한다면
북쪽 석굴은 특히 돈황의 일상생활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https://youtu.be/EKanMIzHxFo?list=PLk1KtKgGi_E5vDnSvwqJB38umxqrH-7GI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 스탄 5개국 중 유일하게 석유와 가스가 없는 국가이다.
대신 수자원이 풍부하다 보니
수자원을 이용해 전력을 생산해 주변국에 수출을 한다.
해발 3000m 이상에서 흐르는 강들이 있어
하나의 강줄기에 댐만 여러 개 만들어 놓으면 효율적으로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한 번 흐른 물이 첫 번째 댐에서 전력을 생산하면 버려지지 않고
그 아래에 있는 여러 댐에서도
같은 물에 의해 전력을 생산할 수 있으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우리나라의 지형에서는
하나의 강줄기에 여러 개의 댐을 설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전력 생산을
주로 수력발전소에 의지하다보니 미세먼지도 없는 쾌적한 나라이다.
실크로드 초원길 키르기스스탄, 그리고 수자원 - CIStoday
비단길 - 실크로드(3) - 中共 ^ 一帶一路 (tistory.com)
西遊記^1(1회~ 5회) ^ 삼장법사 ^ 대당서역기 - 부처님 손바닥 ^ 손오공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