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
山은 山이요! 물(水)은 물(水)이로다! - 심우도(尋牛圖)^반본환원(返本還源) - 개원절류(開源節流) (tistory.com)
https://jbk1277.tistory.com/1422
東邦(동방) ^ 고려(高麗)에서 해가 떠야 中國이 밝아진다! - 나옹(懶翁)선사 ^ 靑山은 나를 보고 (tistory.com)
24시간 부처님께 1만배를 하고 나서 받은 좌우명은 ‘속이지 마라’였다.
원택스님은
당시 그 좌우명이 너무 싱거워서 솔직히 실망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몇 달후
그는 당신의 말씀을
‘남을 속이지 마라’로 해석하면 쉬워 보이나
‘자기를 속이지 마라’로 해석하면
평생 지키기 힘든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성철스님이 원택스님에게
‘속이지 마라’를 좌우명으로 내릴 때는
누구(무엇)를 속이지 마라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속이지 않는 것이 되는지,
주시고 싶은 말씀이 많을 텐데
왜 ‘불기(不欺)’라는 말을 주시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원택스님은
스스로 무엇을 속이지 마라는데 대한 대답을
‘자심(自心)’이라고 터득한 것이다.
‘불기자심(不欺自心)’은
당초 성철스님의 ‘불기(不欺)’에
원택스님의 ‘자심(自心)’이 합쳐져 세상에 나온 것이다.
원택스님은 해답을 얻었지만
필자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갖고 있다.
무엇을 속이지 마라는 것인지,
누가 누구를 속인다는 것인지, 속일 것은 있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속이지 않는 것인가가 그것이다.
불기자심(不欺自心) - 불교신문 (ibulgyo.com)
가장 감명 깊은 가르침으로 ‘불기자심(不欺自心)’을 꼽았다.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가르침이 가진 의미는 깊다.
남을 속이는 것을 넘어
자신까지도 속이지 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남에겐 독하고
나에게 관대한 것이 사람들의 성정이다.
그래서 자신을 속이지 않기란 쉽지가 않다.
불기자심(不欺自心) < 김형규의 불설과 언설 < 2020 연재모음 < 지난연재 < 기사본문 - 법보신문 (beopbo.com)
[여적]불기자심(不欺自心) - 경향신문 (khan.co.kr)
'자기를 속이지 마라' - 퇴옹당 성철 탄신 100년 특별전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원택 스님은
“당시엔 스님이 3천배를 시키는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명백해진다”고 했다.
그는
“스님은 산중에 머물렀지만 절친한 도반들이 종정과 총무원장을 했기에,
종단 정치판과 브로커들의 장난질에 큰스님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잘 알았다”며
“권력과 돈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3천배라는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보았다.
욕망을 채우려는 아만 때문이 아니라
욕망을 없애는 방식으로 취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이 ‘3천배’ 조건으로
대통령과 재벌 오너들도 스님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1978년 구마고속도로 개통 때 해인사를 찾았지만,
성철 스님이
“세상에선 대통령이 어른이지만
절에 오면 방장이 어른이므로 3배를 안 할 바에야 만나지 않는 게 낫다”고
큰절로 내려오지 않아 만남이 무산됐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훗날 금융사기사건으로 구속된 ‘큰손’인 장영자·이철희씨 부부를 만나주기만 하면
그들이
한국 불교 불사를 다 책임져 줄 것이라는 일부 스님들의 권유에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3천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522490.html
“백련암으로 40여 년 전 큰스님을 처음 친견하였을 때
힘들고 힘든 ‘(3000배)절 돈’을 내고 받은 좌우명이 ‘속이지 마라’였습니다.
처음에는 ‘남을 속이지 말라’고 해석하여 실망이 컸었는데,
나중에 다시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해석을 하고서는 큰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자기 몸을 이기지 못하면 절대 큰일을 하지 못한다’고
삼천배하며 지친 신도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도 지금까지도
큰스님의 좌우명을 지키지 못하는 못난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부대중 여러분,
큰스님의 당부처럼
자기 몸을 이겨서
자기를 속이지 않는 사람이 됩시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큰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당신의 출생지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를 찾아 나섰다.
다행이랄까 산청은 서부경남쪽이라 큰 눈은 잦아들었다.
미루지 않고 예정대로 나서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은 순례의 길이다.
그 길이 날씨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없는 게 아닌가.
그 길은 또한 나 스스로 정한 구도의 길이다.
그러니 더욱이나 딴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성철스님의 생가는
지금 옛 모습을 살려 복원해 놓았고
그 터에 절을 지어 겁외사(劫外寺)라 하고 있다.
① 생가 - 겁외사 - 불교신문 (ibulgyo.com)
終身不退
성철스님의 시자인 원정스님에 따르면
사부대중이 성철스님을 뵙고,
증표로 글씨를 써 달라고 하면 스님은 그냥 써 주는 데,
낙관도 없이 건네주면 대중은
“낙관을 찍어야 누가 썼는 지 알 수 있다”며 졸라도
스님은
“글씨란 걸어놓고 보면 되는 것이지 낙관이 별 것인가?”라며
괘념치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終身不退’ 글씨는 성철스님이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終身不退란
수행자는 도를 이룰 때 까지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다부진 각오이기도 하고,
학생은 한 눈 팔지 않고 공부하기를,
가장은 가정 일에 충실하며,
직장인은 업무를 성실하게 다루며
‘초심을 잃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출처 :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
큰스님은 게으름과 사치를 몹시 싫어했다.
백련암 원주 일을 맡고 있는 원구 스님이 하루는 큰스님 공양을 마친 뒤
바리때 곁에 놓인 이쑤시개를 무심코 버렸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그 이쑤시개는
큰스님이 10년이나 쓰던 것이었으니 맞아도 싼 셈이었다.
원순 스님이 사승의 밑씻개를 치우러 변소에 들면
늘
사각형으로 가지런히 개켜 쌓인 화장지를 볼 수 있었다.
“똥보다 중생의 마음이 더 더럽지 않느냐‘는 가르침이었다.
원구 스님이 기리는 사승의 모습은
'말하는 방법보다 침묵하는 방법을 가르치신 분’이다.
큰스님은 늘 생식으로 일관했는데,
밥 한 숟가락에다 들기름에 오래 절인 검정콩과 솔잎가루를 섞어 들었다.
이같은 소식과
때운 검정고무신 그리고 기운 법복은 백련암의 오랜 전통이 되었다.
자기가 사승한테서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은 아둔한 제자였을 거라는
원통 스님은,
백련암 시절에 등에서 지게 벗을 날이 없을 만큼
울력할 때는 야단치신 의미를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소리를 통해 말씀을 깨우쳐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큰스님은 욕설도 곧잘 했다.
원순 스님은,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마른 하늘에 벼락치듯 불호령을 내렸지만
“이 쌍놈의 자석들아’
'신자 밥만 축내는 빌어먹을 놈들’같은 욕설 속에도
돌이켜보면 깨우침을 위한 복선이 깔려 있었다고 말한다.
흔히
임제종의 가풍을 얘기할 때는
종문의 대표적인 본분수단으로
임제의 '할’(喝, 꾸짖음)과
덕산의 '봉’(棒, 방망이)에 견주어 말한다.
원융 스님은
서산대사가 ≪선가귀감≫에서
임제 가풍에 대한 '임제종을 알고자 하는가.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치고
평지에 파도가 이는도다’라고 한 말을 인용해 설명한다.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853
https://m.blog.naver.com/ymv25ans/220452434220
https://blog.daum.net/bolee591/16155373
https://blog.naver.com/cbg6218/22270871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