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袁世凱)의 대처 방식은 고종(高宗) 폐위 음모다.
그는 고종을 우롱했다.
그의 ‘조선대국론(大局論)’은 기고만장이다.
“조선은 본래 중국의 속국이다.
중국을 버린다면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이다.”
그 말은 시진핑의 역사인식과 어울린다.
“시진핑 주석이 말하길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하더라(2017년 미·중 정상회담, 트럼프 대통령 공개).”
2021년 문 정권은 시진핑 방한에 매달린다.
그 발언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은 대미 외교에 승부를 걸었다.
미국 수도 워싱턴에 공사관을 개설했다(1888년).
위안스카이의 억지는
영약3단(另約三端·세 개의 약속) 요구.
조선 외교관의 위상은 초라해졌다.
그의 겁박과 경멸은 거침없다.
“조선은 파주(破舟·부서진 배)다.
부국강병을 논하는 소인배를 임용하면 변란을 초래할 것이다.”
조선 조정의 저항의지는 빈약했다.
민초들이 봉기했다.
1894년 봄 동학혁명이다.
사태는 청일전쟁으로 번졌다(7월).
위안스카이는 조선을 탈출했다.
중국은 한반도 종주권을 잃었다.
그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이양자 교수의 시각은 선명하다.
“일본 이토 히로부미 이전에 위안스카이가 망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위안스카이 협박, 조선 근대화의 황금 기회 봉쇄하라…한국 외교의 반면교사 - 중앙일보 (joins.com)
https://m.blog.naver.com/china_lab/221056397834
요즘 주류계급에서 “친일파” 외치면 욕이다.
물론
일본의 식민 지배로 겪은 수난과 고통의 역사를 잊을 순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선의 망국을 일본 때문으로 돌리지,
그 전에
청나라가 중화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역사는 잘 모른다.
1876년 개항 뒤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근대화에 매진할 수 있는 천금같은 시기가 있었다.
그 때 식민지 종주국보다 더한 간섭과 이권 탈취로
마지막 개혁 기회를 빼앗아선
조선을 망국으로 떠민 나라가 중국이었다.
우리 집권세력의 내로남불을 보고 왕이가 배웠는지,
운동권 청와대가 중국공산당에서 내로남불을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일본 식민 지배의 만행은 후벼 파면서
중국의 악행에는 과거 현재 불문하는 것이 기막힐 뿐이다.
법과 제도에서 법치와 인권을 무시하는
중국 모델을 격하게 따라가는 데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https://www.donga.com/news/dobal/article/all/20191228/98993073/1
高宗도 모르는 고종길(道) ^ 아관 파천길(俄館播遷道) 복원 - 千兆國 가즈아! - 난 몰라! ^ 여측이심(如厠二心) (tistory.com)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중국에서도 평판이 안 좋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민주 헌정의 싹을 짓밟고 황제를 자칭한 인물이다.
중국 대륙은 그 이후 민주 헌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에서 그의 묘소도 둘러봤는데
비석에 ‘대총통 원세개지묘(大總統 袁世凱之墓)’라고 적혀 있다.
위안스카이(袁世凱)는
23세에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조선으로 건너간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그는 중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20대의 대부분을 조선에서 보냈다.
그는 권세가의 딸인 안동김씨를 둘째 첩으로 들이는데,
김씨는 정실인 줄 알고 출가했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의 몸종으로 따라온 이씨와 오씨마저 위안스카이가 첩으로 들어앉히면서
첩의 서열에서도 나이 많은 이씨한테 밀렸다.
졸지에 셋째 첩이 된 김씨는 낙담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조선 첩 3명에서 낳은 아들과 딸은 32명 중 15명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10115620
원세개는 조선을 중국의 식민지쯤으로 생각했다.
그는 청나라의 영향력 하에 묶어놓고자
조선의 독자적인 경제발전을 훼방했다.
조선의 전기·우편 사업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 외국차관을 받는 일도 방해했다.
조선 경제를 청나라에 예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외교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조선이 구미 열강에 외교관을 파견하는 일도 저지하곤 했다.
사사건건 조선의 발목을 잡는 게 그의 임무처럼 보일 정도였다.
원세개는 심지어 고종 폐위까지 추진했다.
고종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미국에 도움을 구했지만
미국이 외면하자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1884년에 러시아와 국교를 체결해 국제사회를 놀라게 한 고종은
청나라의 견제 속에서도 러시아와 비밀리에 접촉했다.
1886년에 이런 움직임을 포착한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고종을 폐위시키고 조카 이준용을 추대한 뒤
대원군이 섭정을 하도록 한 다음에 조선을 합병하자'는 건의를 제출했다.
훗날 이토 히로부미가 했던 일이 원세개가 먼저 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종 모욕하고 도주, 세계적으로 이름 떨치고 급사한 남자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우리나라 국민들이 미국·일본에 대해서는 그렇게 결기를 보이면서,
중국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신적 배경을 찾는다면 조선시대 500년 동안
중국을 정치적·문화적으로 숭배하고 살아온 기억 때문이겠지요.
그것은 중국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또 외교가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북한과 보조를 맞추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현 집권세력이 기본적으로 북한에 민족적 정통성이 있고,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여기다 보니 한마디로
‘종북굴중혐미반일(從北屈中嫌美反日)’로 흐르고 있는 거죠.
집권세력의 이런 몽환적(夢幻的) 통치 때문에
대한민국은 지금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아니라
‘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최진석 “애국의 國은 대한민국… 나라 파괴한 이들 애국자라 불러선 안돼” - 조선일보 (chosun.com)
[한국 속 중국] 위안스카이가 집안에 남긴 여인들과 2세, 3세들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일본의 지원을 배경으로 帝制運動(제제운동)을 강력 추진해 나간 위안스카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인 1915년 5월에
일본 측이 제시한 21개조를 받아들여 조야의 격한 비난을 자초했다.
그는 이듬해인 1916년 1월에 ‘중화제국’의 황제를 칭하며
연호를 洪憲(홍헌)으로 바꾸었다가 반발이 거세지자 곧바로 이를 취소했다.
그는 황제 즉위 직후 안팎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자 초조한 나머지
녹용탕과 인삼즙 등 갖가지 滋養劑(자양제)를 과다 복용한 것이 화근이 되어 자리에 누웠다.
병명은 요독증이었다.
이해 6월 6일 새벽에
강심제 덕분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이런 말을 남긴 뒤 숨을 거두었다.
“그가 날 해쳤다.”
그가 죽으면서 언급한 ‘그’는 과연 누구일까.
지금까지도 ‘그’를 둘러싼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이런 것이다.
“난세의 간웅인 그는 죽으면서까지 술수를 부린 것이다.
그는 애매한 이 한마디로 자신을 황제에 즉위토록 종용한 뒤 이내 배신,
자신을 파멸로 이끈 자들을 싸잡아 질책한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오랫동안 간교한 처세술로 나라를 망친 國賊(국적)으로 매도되어 왔다.
이런 평가는 중국이 공산화한 이후 더욱 강화됐다.
그러나 개방화 이후 변화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위안스카이의 무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조기에 열강에 의해 분할되었을 공산이 컸다는 분석이 논거로 제시됐다.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811100069
마지막 공녀들(위안스카이 에게 바쳐진 3명의 조선여인)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8월,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지배 중이던 산둥반도의 칭다오를 점령합니다.
이듬해에는
중국의 주권을 위협하는 내용의 21개조 요구를 중국 정부에 제출했지요.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조약 중 일부를 승인했어요.
위안스카이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 군벌 세력도 1918년 일본과 비밀협정을 맺었어요.
중국 내에서 일본군의 자유로운 군사행동과
군사기지 설치 등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차관(借款)을 제공받기로 했죠.
1차 대전이 끝나자 중국은
전후(戰後)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 승전국(연합국) 자격으로 대표단을 파견했어요.
중국이 1차대전 막바지에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거든요.
중국 국민은 그동안 열강에 빼앗겼던 이권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어요.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패전국들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승전국들끼리 나눠 가지는 자리가 되고 말았지요.
오히려 전쟁 전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이권은
열강의 승인 아래 일본이 가져갔어요.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19/2020051900396.html
1915년 5월 9일
위안스카이(袁世凱) 중화민국 총통이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수락하였다.
중국인들은 이 날을 ‘국치일’로 부른다.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국가들은 동 아시아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이 때를 틈타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적극화하였고
이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 바로 21개조 요구이다.
1914년 8월 23일 독일에 선전포고한 일본은
중국 정부에게 중립지역을 정하여
일본군이 중립지역으로 상륙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위안스카이의 승낙을 얻어 일본의 대군이
산둥(山東)성 룽커우(龍口)와 라이저우(萊州)에 상륙하여 남으로 진군,
11월 7일에
지난(濟南), 칭다오(靑島)와 그리고 자오저우(膠州) 일대의 철도까지 점령하였다.
https://blog.daum.net/gusan0579/8009442
위안쟈리우는 화교 물리학자다.
그는 청말 민국초의 정치가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손자였다.
부인인 우젠슝(吳健雄)은 미국이 원자탄을 제조했던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 물리학자였다.
위안쟈리우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인물로 과학적인 성취가 대단했다.
아마 그가 노벨상을 받았다면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최초의 노벨상을 받은 인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의 할머니가 한국인이었고 안동 김씨였기 때문이다.
안동 김씨 할머니를 둔 中 물리학의 권위자 - 현대일보 (hyundaiilbo.com)
청의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는
1915년 일본의 굴욕적 21개조 요구에 굴복했다.
그는 중국사에서 욕을 먹는 송宋의 진회秦檜같은 자였다.
그는 1911년 손문孫文이 세운 중화민국을 뒤엎고 황제가 되려했다가 실패하자
분통이 터져 죽은 엉뚱한 자였다.
원세개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러온 청군의 요직으로 와서 조선을 노략질했다.
청군이 조선에 온 것은 민비 등이 불렀기 때문이다.
민비는 결국 왜적에 찔려 광화문에서 불 살려 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을 망쳤다.
원세개는
흥선대원군을 붙잡아 청에 보냈고 한양의 요지에 진을 쳤다.
중화민국이 한일합방 전에도
중국 대사관과 명동의 요지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1992년 한중수교 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를 승계하였다.
1884년 천오백의 청군을 끌고 2백의 일본군을 제압하여 갑신정변이 무너지게 하였다.
조선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천금 같은 개화의 지사들을 잃었다.
1886년 원세개는
조선이 청 외교관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준칙3단을 고종에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1895년 을사보호조약 이전부터, 조선 외교권을 빼앗았다.
http://kor.theasian.asia/archives/295599
우리나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서울시 중구 명동 금싸라기 땅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군의 주둔지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대한민국 정부 출범 직후
가장 먼저 국교를 체결한 중화민국(대만)이
현재의 건물을 지어 1992년 국교를 단절할 때까지 대사관으로 사용했다.
대만이 철수하고
중국대사관이 입주하면서 땅과 건물 주인이 중국으로 바뀌었다.
http://m.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52100001
한국 이미 중국땅이다무섭게 사들이는 붉은자본 | 한국경제TV (wowtv.co.kr)
https://unikorea.go.kr/nkhr/news/editorial/?boardId=bbs_0000000000000068&mode=view&cntId=53986
망월사(望月寺) 지장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금은 지장보살을 모신 기도공간이지만,
본래 천중선원에서 정진하던 선객들이 내려와 밥을 먹고 쉬던 공양간이었다.
이름도 선적인 풍취가 깃든 무위당(無爲堂)이다.
무위당 편액 위로 ‘寺月望’라고 쓴 편액이 나란히 걸렸다.
뜨악하게도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의 글씨다.
편액의 좌측엔
‘주한사자원세개(駐韓使者袁世凱)’
우측엔
‘광서신묘중추지월(光緖辛卯中秋之月)’이라는 글귀가 세로로 쓰였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1099
靑日전쟁배상금 : 2억냥
청나라 稅入 : 0.9억냥/年, 稅出 : 0.8억냥/年
日本의 近代化(3) - 메이지 유신 - 청일전쟁.러일전쟁^勝 - 배상금^富 (tistory.com)
https://blog.naver.com/cbg6218/22312512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