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희망의 언어다.
정신적 재탄생의 언어이기도 하고.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지속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언어이기도 하다.
바울도 예수께서 그렇게 하나님 편에 영적인 몸을 입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식의 부활관은
불교의 열반과도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통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부활관과 불교나 원불교의 세계관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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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도 예수님처럼 새벽에 열반에 이르셨다.
예수님이 기존의 유월절의 의미를 완벽하게 현재,
미래의 의미로 전환시킨 것처럼
부처님도 열반을 통해 지복과 기쁨을 얻는 것을 추구하셨다.
이는 기독교 신앙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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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換生)은
윤회(輪廻)사상과
관련된 민간신앙을 바탕에 깔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 죽어서 소나 개나 말로 태어날 수가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금전에 인색하였던 부자는
죽어서 구렁이로 태어나고
적선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산짐승은
죽어서 사람으로 환생한다.
그러한 환생관념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신분계층의식을 반영하여
천민이 죽어 왕족으로 태어나고
왕족은 천민으로 태어나는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의 윤회설로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무마시킨다.
그러한 믿음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원초의식과 고대종교 심성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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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Karma)은
축적의 뜻을 제행 무상(諸行 無常)으로,
윤회(samsara, rebirth)는
제법 무아(諸法 無我)로
각각 해석해보면 엄격한 의미에서는
불교사상으로 보기 어렵다(반야심경 참조)고 하셨으며,
해탈이라는 대자유를 이상으로 하는 불교는
신선하다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는
깨달음을 이상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佛, Buddha),
그 깨달음의 내용이 법(法, Dharma)이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공동체가 승(僧, Sangha)이라면서
깨달음의 내용인 법(法)에 대해서는
존재의 실상인 업의 생성과 소멸은
12연기를 바로 이해하면
해탈과 열반 또는 이고득락할 수 있고
현세에서의 극락 정토 구현이 가능함을
유식 사상과 금강경 및 신심명의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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