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論介) -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전북/장수, 인물여행) 조선의 의(義)인 논개 그리고 계월향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사랑의 불 - 한용운
산천초록에 붙는 불은 수인씨가 내셨습니다.
청춘의 음악에 무도하는 나의 가슴을 태우는 불은
가는 님이 내셨습니다.
촉석루를 안고 돌며 푸른 물결의 그윽한 품에
논개(論介)의 청춘을 잠재우는 남강(南江)의 흐르는 물아.
모란봉의 키스를 받고 계월향(桂月香)의 무정<無情)을 저주하면서
능라도(綾羅島)를 감돌아 흐르는 실연자(失戀者)인 대동강(大同江)아,
그대들의 권위로도 애태우는 불은 끄지 못할 줄을
번연히 알지마는 입버릇으로 불러 보았다.
만일 그대네가 쓰리고 아픈 슬픔으로 졸이다가
폭발되는 가슴 가운데의 불을 끌 수가 있다면
그대들이 님 그리운 사람을 위하여 노래를 부를 때에
이따금 이따금 목이 메어 소리를 이루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남들이 볼 수 없는 그대네의 가슴 속에도
애태우는 불꽃이 거꾸로 타들어가는 것을 나는 본다,
오오 님의 정열의 눈물과
나의 첫 감격의 눈물이 마주 닿아서 합류(合流)가 되는 때에
그 눈물의 첫 방울로 나의 가슴의 불을 끄고
그 다음 방울을 그대네의 가슴에 뿌려 주리라.
시) 만해 한용운(韓龍雲) – 계월향에게, 사랑의 불 (tistory.com)
타임머신 > 국가기록원 NEWSLETTER 제87호 (archives.go.kr)
[숨은 진주를 찾아서] 우리는 논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 필통기사 | 청소년문화공동체 필통 (ifeeltong.org)
1972년 2월 전북 장수군에서는
전북문화화재위원인 오치황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의암사적보존위원회가 결성됐다.
그해 3월부터 1975년 사이에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일대에 6회에 걸친 탐문조사와 더불어
논개의 숙부인 주달무의 13대손인 마을주민 주규상씨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논개 묘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고,
오치황 위원장은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의 논개 묘라 전해 내려오던 묘를 논개의 묘로 확정, 발표했다.
이듬해인 1976년 1월 의암사적보존위원회는
논개의 출생지 명분을 이유로
장수 의암사 경내 이장을 위해 함양, 화순, 진주를 방문해
사적 고증 추진과 함께 묘소이전 신청을 문화공보무에 했다.
하지만 문화공보부에서는 ‘쌍방간 협의 문제’라며 반려했다.
한편 진주시는 논개 묘의 진주성 안으로 이장을 추진했다.
같은해
1970년부터 1년간 함양군수를 역임했던 김상조 경상남도 문화재 전문위원은
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으나 고증자료 미비로 반려됐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제28대 함양군수로 부임한 최낙건 전 군수가
장수군의 오치황씨로부터 논개묘 이장 요청을 받았다.
최 전 군수는 당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논개가 태어 난 곳은 장수고,
순국한 곳은 진주,
죽어 묻힌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함양인데,
여기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고 역사의 순리가 있다고 판단,
오치황씨의 이장 요청을 거절한 뒤 논개 묘 성역화사업을 추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방지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신안주씨 문중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운구를 반장하여 방지마을 앞산에 안장하는 것을
당초부터 반대하였다는 구전이 세세손손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유인즉
조선조 유교사회에서 기생을 천시하고 후실을 박대하는데,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문중의 수치고 망신이라며 자손대대로 숨겨왔다는 것이었다.
이에 최낙건 전 군수는 신안주씨 문중을 찾아
“이제는 현대사회가 되었으니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설득해
1988년 10월 신안주씨 문중에서
‘유인 신안주씨 논개지묘’라는 상석을 설치했다.
동시에 최경회 장군의 상석도 설치했다.
이듬해
도비1억원을 지원받아 1990년 토지를 매입하고 봉분을 쌓고
논개가 칠월칠석에 순국했다고 77계단을 만들고,
의병반장비를 건립하는 등 1단계 성역화사업을 완료했다.
진주 촉석루와 논개의 숨은 이야기 :: 세팍타크로 라이프 (sepaktakraw.life)
논개가 심었다는 장수 군청 의암송 - 문화유산칼럼 - 이야기 - 문화유산채널 (k-heritage.tv)
死後 4백년 만에 족보에 오른 「義巖夫人」
육십령은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道界)인데
옛날엔 도적과 맹수가 많아 최소한 60명이 작당해야만 넘을 수 있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 험한 고개다.
서상면의 면소재지인 대남리에 이르면 「논개묘」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1km쯤 들어가면 금당리 방지마을이 있고
마을 입구의 산중턱에 논개묘가 자리잡고 있다. 논개 묘의 상석(床石)에는
「유인(孺人)신안주씨논개지묘」라고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위쪽 묘소의 상석에는
「충의공 증(贈)좌찬성 행(行)경상우병사 해주최씨 경회(慶會)지묘」라고 쓰여 있다.
이 묘역은 4백년간 방치되어 왔다가
1987년 함양군 그리고 신안주씨·해주최씨 문중에 의해 확장·단장되었다.
그러면
장수사람인 논개와 화순사람인 최경회가 왜 함양땅에 묻혀 있을까?
『진주성에서 패전하고 흩어졌던 전라도 출신 의병들이
진양(晉陽)벌의 지수(智水)목 남강 하류에서 논개와 최경회의 시신을 수습했답디다.
의병들은 한여름 2백20리 길을 왜병을 피해 가며 두 시신을 운구하여
논개의 고향 가는 길목이며 의병들의 창의지인 덕유산의 자락인 이곳에 묻었대요.
논개부인은
기생으로 오해를 받아 그 시신이 고향에 못 갔다고 합디다』
논개의 후손으로서
방지마을에 사는 주규상씨(68세)의 말이다.
주규상씨에 따르면
방지마을은 원래 신안주씨의 집성촌으로
그의 15대조이며 논개의 조부인 주용일도
장수로 이주하기 전에는 방지마을에서 살았다.
그러면 방지마을 신안주씨들은 「논개」를 어떻게 대접했을까?
『기생이라고 하는 바람에 조상의 얼굴에 먹칠했다고 묘소를 돌보지 않았는데
1958년 장수사람 20여명이 찾아와 제사를 올린 이후
방지마을에서도 벌초도 하고 관심도 기울여 왔습니다』
방지마을의 논개묘는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채
근 4백년간 방치된 까닭에 오늘날 「전(傳)논개묘」의 취급을 받고 있다.
최근 논개묘로 고증해 달라는 함양군의 요청을 받은 경성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는
논개묘가 방지마을에 있다는 구전이 있고 신안주씨와 해주최씨 문중에서
「논개묘」로 인정하고 있는 만큼 이를 뒤집을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부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면 논개의 시가쪽인 해주최씨 문중에서는 논개를 어떻게 인식해 왔을까?
『WIN』 역사인물탐구팀은 남해고속도로를 통해
최경회의 고향인 화순으로 진입하여
우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최재양(崔在襄)씨를 만났다.
해주최씨인 그는
『해주최씨세보』 그리고
『일휴당실기』 『최씨육의록』(崔氏六義錄)의 영인본 등
최경회 관련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해주최씨세보』 최경회 조(條)를 보니까
그의 첫부인 나주김씨와
재취부인 여흥민씨는 모두
조정으로부터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칭호를 받았다.
정경부인이라면
종1품 문·무관의 정실부인에게 내리던 봉작이다.
정실부인 둘에 이어
「의암부인 신안주씨」는 「부실」(副室)로 기록되어 있다.
「의암부인 신안주씨」가
해주최씨의 족보에 오른 시기는 1975년부터였다.
그 당시 해주최씨 문중에서는
「의암부인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거쳐
다수의견에 따라 족보에 올렸다고 한다.
논개가 최경회의 측실이라는 사실은
1905년 송병선이 지은 『동감강목』(東鑑綱目)에서도
이미 「慶會妾 論介 誘倭將 游南江中巖石上 抱倭將墮水而死」
(경회의 첩 논개가 왜장을 유인하여…)
라는 기록이 있는 만큼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개가 기생이었다」는 오해로 인한 물의는 최근에도 빚어졌다.
예컨대 최근 모 공영TV방송의 프로그램 『역사추리』에서
논개를 황진이와 같은 기생으로 설정했다고 해서
신안주씨 문중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려고
칠월칠석날 잔치를 벌이면서,
조선인은 오직 기생만 출입을 허용한다.
19세였던 주논개는 부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변장하고
촉석루 연회장에 들어가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투신한다.
그녀는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는 적장을 강에 밀어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미리 열손가락에 반지를 낀 채 적장 게아무라 로쿠스케와 춤을 추는 척하면서
깍지 낀 손으로 허리를 끌어않고 남강으로 몸을 던져 적장과 함께 순절한다.
이런 주논개는 어떤 충절인사에 못지않은 열사요, 의사다.
그러나 논개의 순국 사실은 입으로만 전해오다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으로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이 나옴으로써
기생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다. 그
때문에 ‘기생의 정열을 표창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들의 공훈을 수록한 『동국신속삼강행』에도 누락되고 만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정에서는
그녀의 순절을 높이 찬양해 예문관에서 ‘의암’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진주 촉석루 곁에 사액 정문을 지어 그 넋을 위로·추모하게 했다.
이에 따라 투신한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고,
영조 16년(1739)부터
국가 지원을 받아 의암 부근에서 제를 올릴 수 있게 되었으며,
현재 경남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다시 200년이 흐른 뒤 조정에서는 특전을 내려
태어난 주촌마을 입구에 정려(旌閭)를 세웠고, 1997년에 복원했다.
의암부인 주논개는
기생이 아니었으므로 의기(義妓)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관계기관에서는 하루빨리 근거를 찾아 이를 바로잡고
임진왜란 충신·효자·열녀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의기(義妓)논개’ 표현 바로잡아야 - 울산제일일보 (ujeil.com)
논개(論介)의 사실을 맨 먼저 기록한 이는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다.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野譚)』(1621)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맨 앞 「인륜편」 ‘효열’대목에
논개관련항목 보기에 관한 사실이 실렸다.
유몽인이 진주를 찾아왔던 동짓달은
논개와 진주성 사람들이 목숨을 바친 지 겨우 너 댓 달이 지난 때였다.
진주성싸움의 참혹한 모습이
살아남은 사람들 머리와 가슴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을 것이다.
유몽인의 기록은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적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유몽인이 한문으로 적은 논개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
만력(萬曆) 계사년에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의 장수로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맞서 싸웠다.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얼굴과 매무새를 아리땁게 꾸미고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 위에 서 있었으니,
바위 밑은 바로 깊은 강물 가운데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여러 왜병들이 바라보고 좋아했지만 모두들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는데,
홀로 한 장수가 나서서 곧바로 다가왔다.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니 왜장도 그를 꾀면서 끌어당겼다.
드디어 논개가 그 허리를 끌어안고 물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아름다운 충절의 여인 논개 - 디지털진주문화대전 (grandculture.net)
‘촉석루의 세 장수는 한 잔 술을 들이키며 강물을 가리키며 웃네.
강물은 도도히 흘러가는데 저 물결 흐르는 한 혼도 죽지 않으리.’
최경회 본처 김 씨가 병환 중일 때 논개가 수발을 들었고.
그리고 김 씨가 죽기 전에 내가 죽으면 논개를 내 뒤에,
부인으로 맞이하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런 인연으로 김 씨가 죽고
1590년 최경회가 마지막 관직인 담양 부사로 임명이 되자
논개를 부실로 맞아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됩니다.
최경회 족보 해주최씨 세보에도
논개는 의암 부인 신안주씨로 이렇게 올라와 있고요.
그리고
최경회 문집인 일휴당실기에도 논개는 부실로 나오고 있습니다.
[무등의 아침] 왜장 안고 남강 투신한 논개는 기생 아닌 의병장 최경회 부인 (kbs.co.kr)
조성은과 윤지오에게 배울 점 4가지 : 월간조선 (chosun.com)
논개 역사적 일대기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이 뭐꼬!(What is this!) ^ 삼손(Samson)의 머리카락 - 31計(美人) - 마타하리(黎明.여명) - 傾國之色(경국지색) - 프락치 (tistory.com)
조선의 선비와 妓生(기생) - 義妓 ^ 論介. 桂月香 - 詩妓 ^ 黃眞伊(황진이) - 娼妓 ^ 어우동 - 吟風弄月(음풍농월)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