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妓生이 ‘삶의 일부’였지만,
기생은 선비가 ‘生의 전부’였다
선비와 기생의 관계는 상호의존 관계지만,
서로 간의 의존도는 판이하다.
이를테면 선비의 기생에 대한 의존도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이지만,
기생의 선비에 대한 의존도는 총체적이고 전면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비는
기생을 여흥이나 놀이의 수단으로 보고 있지만,
기생은
선비를 삶의 기반 내지 생활의 발판으로 본다.
절실하게 말하자면
선비는 기생이 없으면 쓸쓸하고 재미없을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활동하고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다.
그러나 기생은
선비가 없으면 존재 의미를 잃게 되고 생활 터전을 상실한다.
이러하기에 선비와 기생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지만,
상대방에 대한 의존도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출처 : 조선의 선비와 기생 : 월간조선 (chosun.com)
음풍영월(吟風詠月)의 뜻은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흥취를 자아내어 즐겁게 시를 짓고 논다는 의미이다.
비슷한 말로 음풍농월(吟風弄月)이라고도 한다.
즉
선비들이 기생을 데리고 계곡 가에 가서 술을 마시며
시를 쓰며 놀고 있는 모습을 눈에 그리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단순하지가 않다.
시를 짓고 놀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상상하듯이
시를 계곡 가에서 노래 부리며 주태를 부리는 그런 노는 모습이 아니라
시를 짓고 조용히 앉아서 시의 뜻을 읊조리며 고요히 놀고 있는 모습이다.
시경(詩經)에 근거하여 시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선 시대에는
시는 단순히 선비들의 놀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유교 정신의 교육이요 훈련이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 중요한 사회적 가치였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논밭에서 땀 흘려 일하는 농부로서는
음풍영월(吟風詠月)은 분명 신선놀음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농부들의 즐기는 농요에 담긴 해학이나
골계미와 같이 선비들에게도 그 나름의 미학이 있었다.
吟風弄月(음풍농월) 뜻
바람을 읊고 달을 보고 시를 짓는다는 뜻으로,
시를 짓고 흥취(興趣)를 자아내며 즐김
‘남(南) 논개, 북(北) 계월향’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나라를 구한 기생으로 계월향을 높게 평가하지만
사실 김응서가 계월향을 이용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옛 연인을 만나 기뻐하기도 잠시,
원수의 애첩이 됐다는 고백을 여자에게서 들었을 때
남자는 지조를 지키지 못한 그녀를 크게 원망했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계월향이 연인의 탈출을 돕기 위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응서가 서둘러 빠져 나가기 위해 계월향을 죽였다는 설화도 전해온다.
계월향 초상화에는 그녀 관련 일화가 자세하게 적혀 있는데
여기에 둘 다 성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계월향의 청으로 김응서가 칼을 뽑아 그녀를 죽였다고 기록돼 있다.
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6/12/891233/
연광정(練光亭)은 덕암(德岩)이라는 수백 척 절벽위에
날아 갈듯 솟아 있는 정자이다.
연광정은 성종(成宗)때 평안감사 허굉(許굉)이 지었다는데
규모나 건축미가 크고 뒤어난 걸작품이다.
일찌기 임란(壬亂)때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이
왜장(倭將)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강화담판(講和談判) 한 장소가 여기며
나라가 위급지경에 처하자 일개 기생의 몸으로 적진 속으로 숨어 들어가
왜장을 죽이고 순국절사(殉國節死) 한 평양명기 계월향(桂月香)이
평소 즐겨 찾던곳이 바로 여기다.
그 연광정 다락에서 굽어 보는 풍광이야 어찌 다 필설로 다하랴 !
능라도와 백은탄이 한눈에 들어 오고 왼편으론 대동루(大同樓)요
오른편엔 읍호루(읍濠樓)가 지호지간(指呼之間)인데
밤낮없이 용용한 대동강 위에는 사시장철 놀잇배가 무수히 떠 있다.
김삿갓이 그 곳을 지나치려니 시장하던차에
고소한 기름냄새를 맡고 도저히 그냥 갈수가 없어
체면불구 하고 머리를 숙이며
지나가던 과객에게도 전병 몇장만 얻어 먹게 해 주십시요 하니.....
50쯤 되어 보이는 노기가 지금 시회가 막 끝나서 일어 나려던 참이었는데
남은 전병이 석장뿐이니 허물치 말고 자셔 주시요, 하는데 그 말품이 제법 공손 하다.
전병 석장을 게눈 감추듯 모두 먹어치운 김삿갓은
고마움에 이렇게 수작을 걸었다.
즐거운 시회에 불청객이 훼방을 놓아 죄송 하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뜻에 답례로 시 한수 적어놓고 가겠소이다... 하며
일필휘지로 써 갈기니 내용인즉 이러하다.
鼎冠撑石小溪邊 (정관탱석소계변)
솥을 돌로 괴어 놓은 개울가에서
白粉淸油煮杜鵑 (백분청유자두견)
흰 가루를 기름에 튀겨 전병을 부치네
雙箸挾來香滿口 (쌍저협래향만구)
젓가락으로 집어 넣으니 입에는 향기가 가득하고
一年春信腹中傳 (일년충신복중전)
한 해의 봄소식이 뱃속에 전해 오네
義巖 부인 ^ 진주 論介(논개) - 평양 義妓(의기) ^ 桂月香(계월향) - 滅私(멸사)^진충보국(盡忠報國) (tistory.com)
[펌] 기생과 권번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280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17_0030_0010_0010
황진이는 송도의 명기이다.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서 그 명성이 한 나라에 널리 퍼졌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명사(風流名士)'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그대가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하는데 따를 수 있겠소?”라고 물으니
벽계수는
“당연히 그대의 말을 따르리다”라고 답했다.
이달이 말하기를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했다.
벽계수가 그 말을 따라서
작은 나귀를 타고 소동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들게 하여
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탄 후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니
황진이가 과연 뒤를 쫒았다.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가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
나귀에서 떨어졌다.
황진이가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랑일 뿐이다” 라며 가버렸다.
벽계수는 매우 부끄럽고 한스러워했다.
靑山裡碧溪水 청산리벽계수...-황진이-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친정집에서 슬픈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우동은
마침내
한 지아비에게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이름을 현비로 개명한다.
그리고
유감동처럼 창기로 행세하면서 자유분방한 남성 편력을 벌인다.
어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녀와 통정하려는 남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고,
어우동에 대한 이야기는 장안의 화제가 된다.
「성종실록」은
그녀가 정욕이 남달랐던 여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편에게서 쫓겨나 친정집에 머무르던 어우동을
타락의 길로 이끈 것은 계집종이었다.
계집종은
어우동에게 아전 오종연이란 사람을 소개한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이후의 「실록」은
어우동이 먼저 유혹하거나 혹은 유혹당하기도 하면서
오종년을 시작으로
방산수 이란,
수산수 이기,
전의감생도 박강창,
이근지,
내금위 구전,
생원 이승언,
학록 홍찬,
서리 감의향,
밀성군의 종 지거비 등과 관계를 맺은 사실을 열거하고
이외 수 십명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어우동과 여종은 길가의 집에서 오가는 남자를 점찍었는데,
여종이 “아무개는 나이가 젊고,
또 아무개는 코가 커서 주인께서 가지실만 합니다”라고 말하면
어우동은 “아무개는 내가 맡고,
아무개는 네게 주겠다”며
남성들을 분배했다고 한다.
평보세상 :: 짜릿한 감동과 어우동 (tistory.com)
유명한 조선시대 기생 BEST 6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조선시대 기생들의 피임과 화장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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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자 “‘개딸’에 환호하는 민주당, 슈퍼챗에 춤추는 유튜버같아” - 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