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알라메인 전투
북아프리카 카잘라 전투에서 토부르크의 방위선을 돌파한 롬멜의 전차군단은 1942년 6월 18일에 토부르크를 포위했다. 하지만 이집트 침공도 병행되었기에 전차부대만으로의 돌파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독일공군의 지원 하에 보병과 포병에 의한 공격을 주체로 안전을 확보한 후 전차대를 돌입시키는 작전으로 롬멜은 영국군을 무력화시키고 21일에 토부르크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것은 영국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기에 영국군은 이집트 영내 오지인 엘 알라메인에 최종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엘 알라메인을 점령했지만 이미 북아프리카의 주요 군항들은 추축국에게 점령단한 상태라 수송선에 의한 지원은 불가능했는데 만약 이집트까지 정복당한다면 중동의 산유지대는 독일군의 손에 들어갈 것이 뻔했다. 또 소련 남부에서도 독일군 A군 집단이 코카서스를 공격해 소련의 유전지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본격적인 참전을 결정해 랜드리스 법(무기제공, 수출법안)에 의해 영국군은 미국에게서 300량 이상의 M4 중전차와 대량의 항공기를 지원받았다. |
엘 알라메인 전투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롬멜군단의 북아프리카 파병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영국의 처칠조차 존경해 마지않았던 그의 능력이나
그를 위해 목숨 바치기를 꺼리지 않았던 아프리카군단(DAK) 장병들의 겸허한 진술,
히틀러 암살 기도에 직접 간여하진 않았지만
나치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냈던 ‘착한 독일군’의 대표 격이었던 로멜에 대한 인상은,
그의 비극적 최후와 더불어 독일,
아니 제2차 세계대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로멜은 단순히 뛰어난 전략가나 전술가라는 군사적 평가를 넘어
조국에 대한 애정과 부하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치열한 전장 가운데서도 틈날 때마다 자신의 가족에게 보낸 진중한 서신을 통해
그가 얼마나 참된 인간상에 근접했는지를 조명할 때만이
그의 진면목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로멜은 부하가 실수했을 때 지나치게 나무라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다.
필요 이상의 질타는 부하로 하여금 나중에 거짓 보고를 하게 만들 우려가 있고,
그렇게 되면 지휘관은 상황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서거 70주년, 재조명 받는 '사막의 여우' 롬멜 - 중앙일보 (joins.com)
엘 알라메인 (El Alamein) 2002년 이탈리아 (stevenh.co.kr)
영국은 버나드 로 몽고메리를 보내 롬멜을 상대하게 했으며
몽고메리는 남은 영국군을 재편성하며 방어에 전념했다.
이때 몽고메리는
패배주의에 찌들어 롬멜을 찬양하던 부하들을 마구 갈궈댔고
사상자까지 나올 정도로 지옥훈련을 통해 부대의 사기와 능력을 올리는 한편,
후방에서 빵빵한 지원을 받아 8군의 규모를 점점 불려나가고 있었다.
독일 공군 제27전투비행단의 정찰기가
150마일(=약 240Km) 속도로 8군 진지 주위를 돌고나니 10분이 걸렸다고 한다.
한편 롬멜은 상황이 더 안좋았다.
일단 계속되는 진격으로 영역은 많이 확보했으나
보급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깊숙히 진격하는 바람에
보급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토르북을 점령함으로써 보급유지가 가능하리라 기대되었으나,
토브룩 항 자체의 능력 부족과 더불어
토브룩이 연합군 공군의 직접적인 작전권 내에 있었기에 오히려 역효과만 불렀다.
영국 공군과 해군이 더욱 기를 쓰고 추축군 보급선단을 작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몰타가 중간에 떡하니 버틴 덕분에 상황이 점점 악화...
(그런데, 그 몰타를 공략할 여력을 빼돌린 건 다름아닌 롬멜 본인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리비아는 쓸만한 유전을 개발하지 못했으며,
정유시설도 없다시피 한 상태였으므로
모든 유류는 안그래도 석유가 부족한 독일 본국에서 지중해를 건너서 보급받던 실정이었다.
이로 인해 롬멜은
더 이상 북아프리카 전쟁이 길어지면 보급이 후달리는 독일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
전 병력을 이끌고 엘 알라메인을 공격한다.
이를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라 부르는데,
여기서 몽고메리는 공세를 취하지 않고
독일 기갑부대를 방어선으로 끌어들인 뒤 격파함으로써
추축국의 진격 능력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후퇴하면서, 롬멜은
"비열한 작자가 나와서 싸울 생각은 안하고 캠핑이나 치고 있다니!"라고
몽고메리를 욕했다고 한다.
출처 : 엘 알라메인 전투 - 리그베다위키 (rigvedawiki.net)
엘 알라메인 (El Alamein : The Line Of Fire : 2002) 자체자막 (wedisk.co.kr)
제8군 사령관 클로드 오킨레크 대장은
이 곳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롬멜 원수와 격전을 벌였지만
이 곳까지 밀려난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고
그 후임으로 몽고메리 중장이 임명되었다.
부임 초기 몽고메리 중장은 철저한 원칙주의를 고수하며 군기를 잡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런 군대로 독일군과 맞선다면 백전백패일 뿐이다"
"군기가 빠진 군대는 이미 전투의 반을 패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전사하더라도 멋지고 폼나는 시체가 되는 것이 우리 영국군의 자랑이자 전통이다"
이러한 몽고메리의 지침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고 병사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우선 병사들의 소총과 기관총 등 기타 화기들은 항상 반들거리는 상태로 손질되어 있어야 했고
( 아무리 사막에서 총기 손질을 자주 해야 한다지만 반들거릴 정도면 무슨 의장대입니까? )
장교들은 항상 다림질을 해 칼줄을 세운
( 휴가용 정복 아님 의장대? 어차피 위장무늬 전투복이 아니니 큰 문제는 없다지만
요즘 이 다림질 덕분에 전투복의 적외선 위장 코팅이 손상된다고 난리다.
필자는 군복무 시절 지급받은 A급 전투복을 제외한 나머지 전투복 ━
자비로 구입한 것 등을 포함한 ━ 들은 다림질을 안했지만 )
전투복 바지를 착용하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식사 시 식탁에는 깔끔하게 풀을 먹인 식탁보를 씌우고
번쩍거리는 포크와 나이프를 반듯하게 열과 오를 맞춰 정렬시켜 놓지 않으면
몽고메리 중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런 것을 어쩌다 한번이 아닌
온종일 분주하게 예하 부대의 숙영지를 시찰하며 닥달하니
앞서 언급한대로 병사들의 불만이 장난이 아닌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곧 몽고메리 중장은
기존의 애칭인 "몬티" 외에도 "신병 교육대 선임하사"( 이건 좀 양호 ),
"주임원사"( 요것도 좀 양호 ),
"잔소리꾼 시어머니",
"군기 반장" 등등의 별칭을 보유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불만을 내뱉을 시간도 없이
병사들을 혹독한 훈련으로 몰아넣은 몽고메리 중장의 지시였다.
영국 본토 및 미국의 렌드리스로 공여된 각종 중장비와 신병들은
독일군을 압도하고도 남을 전력이었지만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이들 전력을 가지고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진 독일 전차병들에게 달려드는 것은
오히려 독일 전차병들이 좋아할 일이었다.
여기에 본국의 처칠 수상은
하루라도 빨리 반격을 감행하라고 독촉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만한 전력을 보내줬는데 장군은 도대체 뭐하고 있는 것이오?
본국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승전보가 당도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엘 알라메인 전투 그러자 몽고메리는 딱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제8군 지휘관을 교체하십시오"
( 이 한마디에 처칠 수상 항복 )
그러는 동안 양군의 상황은 극과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는 동부전선의 상황으로 인해
모든 신품 전차와 장비,
신병의 배분 순위에서 열악했던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 비해
영국 제8군은 미국의 렌드 리스로 인한 물자 보급 및 제공권,
제해권을 장악한 자국 공군과 해군 덕분에
보급 물자를 가득 실은 수송선이 도착해 물자들을 부려놓을 수 있었다.
이 당시 증원된 전차들 중 가장 믿음직스러운 것은 역시 미국제 M4 셔먼 전차였다.
M3 그랜트의 75mm 주포의 성능에 만족하고 있던 영국군 전차병들은
아예 회전포탑에 이 포를 기본으로 탑재한 셔먼을 구원자로 여겼다.
여기에 몽고메리는 기만전술을 구사해
독일군 정찰기의 눈을 속였다.
마치 전쟁영화 촬영준비와 같은 대규모 개조 작업이 제8군에서 행해졌다.
목재와 천으로 제작된 가짜 전차들이
독일군으로 하여금 공세의 시점을 남쪽으로 오인하도록 하기 위해
남쪽 방어선에 배치되었고
그 후방에는 탄약과 연료로 오인하도록 하기 위한
빈 탄약상자 및 나무 궤짝들이 산더미처럼 야적되었다.
텅빈 연료 드럼통을 용접해 이어붙인 가짜 송수관들이
이 위장 공세 시점까지 무려 30km나 이어졌고
이러한 작업을 촬영한 독일 정찰기들은
이 곳이 공세의 시점인 것으로 오판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진짜 공세시점에서는 대규모 개조작업이 이뤄졌다.
모래 벌판에 깊숙히 판 참호 속으로 전차와 야포들이 이동되어 위장되었고
이동하는 전차에는
캔버스 천과 덮개,
합판 등을 이용해 트럭처럼 보이도록 제작된 특수 덮개가 씌워졌다
( 요즘 전쟁영화 촬영현장을 상상하시면 될 듯 )
물론 전차들이 이동해간 자리에도
널판지와 캔버스 덮개로 제작된 가짜 전차들이 배치되었다.
https://m.cafe.daum.net/binidad/Pzu6/24?listURI=%2Fbinidad%2FPzu6
일명 덩케르크 철수작전이라고 불리는 ‘다이나모 작전‘은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진행됐습니다.
사나운 파도와 폭격 속에서 군사들을 태우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무기와 장비까지 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군사장비와 중장비들은
프랑스 덩케르크 땅에 버리고 올 수 밖에 없었는데요.
연합군은 각종 차량, 화포 등은 물론이고
소총이나 기관단총 같은 개인화기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철수를 서둘렀습니다.
독일군은 이렇게 덩케르크에 남겨진 장비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사실 독일군은 제2차 대전 당시 전쟁에 참여한 그 어느 국가보다도
적국의 노획 무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러 국가들을 침략해서 빼앗은 무기로
다시 그 적을 상대로 전투에 임하는 국가가 바로 독일이었다고 해요.
(ex. 북아프리카 엘알라메인 전투)
독일군이 덩케르크에서 노획한 영국군의 무기와 장비들
역시 추후 독일군의 침공 작전에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특히 가장 많이 활용된 장비는 영국제 모리스 트럭인데요,
덩케르크에서 다수의 모리스 트럭을 노획한 독일군은
이 차량을 전쟁에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이후 북아프리카 전선부터
크레타 전선,
노르망디 전역까지
거의 대부분의 전선에서 활용되었습니다.
"덩케르크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며
단 10일 만에 무려 33만명이 넘는 병력이 탈출에 성공하는 기적을 이뤄냈지만,
전쟁에 필요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장비를 잃은 영국에는
겨우 2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예비 장비만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영국군은 이 작전으로 무기와 장비를 잃었지만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군 병력을 지켰습니다.
덩케르크에서 무사히 귀환한 33만여 명의 병사들로 항전의지를 다지며
추후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영화 속 방산이야기(덩케르크 편)-영국군이 남기고 간 무기는 어떻게 됐을까? :: 한국방위산업진흥회공식블로그 (tistory.com)
북아프리카 카잘라 전투에서
토부르크의 방위선을 돌파한 롬멜의 전차군단은
1942년 6월 18일에 토부르크를 포위했다.
하지만 이집트 침공도 병행되었기에
전차부대만으로의 돌파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독일공군의 지원 하에
보병과 포병에 의한 공격을 주체로 안전을 확보한 후
전차대를 돌입시키는 작전으로 롬멜은 영국군을 무력화시키고
21일에 토부르크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것은 영국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기에
영국군은 이집트 영내 오지인 엘 알라메인에 최종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엘 알라메인을 점령했지만
이미 북아프리카의 주요 군항들은 추축국에게 점령단한 상태라
수송선에 의한 지원은 불가능했는데
만약 이집트까지 정복당한다면 중동의 산유지대는 독일군의 손에 들어갈 것이 뻔했다.
또 소련 남부에서도 독일군 A군 집단이
코카서스를 공격해 소련의 유전지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본격적인 참전을 결정해
랜드리스 법(무기제공, 수출법안)에 의해
영국군은 미국에게서
300량 이상의 M4 중전차와 대량의 항공기를 지원받았다.
당시 롬멜의 전차군단은 연전연승했지만
추축국도 말타에서 공습해오는 연합군 항공기의 공습에 의해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남아있는 전차는 독일제가 90량,
이탈리아제 구식전차가 130량으로 나머지는 포획한 전차들이었다.
롬멜에게 있어서 가장 궁핍했던 것은 연료와 탄약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탈리아군 총사령부와 공군사령관 알베르트 켓셀링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와 15,000톤 이상의 연료를 수송하기로 약속했지만
수송선이 도착하는 벵가지 항구에서 전선까지는 약 900km,
토부르크 항에서 전선까지는 약 450km라는
원거리의 보급선이란 점에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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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d-Lease 프로그램은
히틀러의 발아래 놓인 유럽에 맞서 싸우던 영국뿐 아니라,
대륙 건너편에 있는 소련이 반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Lend-Lease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지원된 물자는 완전 공짜가 아니었고,
영국의 핵심 과학기술, 미군 해외 주둔지 제공,
전후 차관 등으로 대금을 지불했고,
이는 미국이 냉전과 함께 군사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天兆國^USA(1) - 世界大戰 - Lend Lease - 미국 原主民 - JP 모건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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