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멜 장군이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패배하였 던 가장 큰 이유는
보급품의 원활한 지원이 되 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보다 오히려 영국군이
독일의 암호기인 에니그마 (Enigma)의 다양한 코드를 푸는데 성공함으로 서
북아프리카에서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군은 독일군 각각의 선박의 선적과 출항,
목표항구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와는 반대로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물자 보급품만을 기다리고 있던 롬멜은
선박들이 지중해에 침몰 하는 것을 마냥 보고만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정보전에서 독일은 연합군에 패했던 것이다.
정 보를 가진 쪽이 승리한다는 평범한 원칙이 증명 되는 것이다.
이집트로 향하는 이탈리아 군
무솔리니는 더이상 히틀러의 선전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히틀러의 전쟁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것만 같았다.
독일의 대규모 항공기는 연이어 영국 본토를 포격했다.
유럽 본토에서는 대표적인 중립국인 스페인과 스위스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연합국에 가담한 그리스와 자유 프랑스만이 전쟁을 이어갔다.
무솔리니는 영국과 프랑스가
반반씩 나눠가진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차지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이들의 첫번째 목표는 이집트였다.
무솔리니가 이집트를 첫번째 목표물로 삼은데는 이유가 있다.
이탈리아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반도다.
알바니아 합병 역시 그리스 침공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부터 공략하기엔 부담이 따른다.
그리스가 제법 강한 나라임과 더불어 자신들의 함대를 그리스로 향하게 된다면
지중해에 있는 모든 영국 함선의 집중 공략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고 있었기에 이집트까지 확보하게 된다면,
지중해 동쪽 절반을 완전히 차지하고,
이 병력을 그리스에 집중한다면 쉽게 확보 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물론,
그리스보다 이집트의 국력이 더욱 약한 것이 한 몫 했다.
이탈리아의 선제 공격
이탈리아는
이집트 침공을 위해 넘어야 할 한가지 걱정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영국령 몰타 섬이었다.
시칠리아 섬 바로 아래 위치한 몰타 섬은
연합국이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몰타 섬에서 출항하는 전투기는
이탈리아 본토를 코앞에 두었기에 이탈리아 입장에선 큰 걱정거리였다.
이탈리아 공군은
선전 포고를 시작한 직후인 6월 11일 몰타 섬에 대한 폭격으로
자신들의 참전 소식을 전세계에 알린다.
blog.daum.net/mybrokenwing/381
38대의 폭격기와 12대의 전투기는 몰타의 수도 발레타를 폭격했다.
이탈리아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한 연합군은
몰타에 대한 구원은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단 3기의 이탈리아 글래디에이터에 당하면서
영국 공군은 치욕을 당한다.
영국은 6월 21일 호커 해리케인은 몰타에 배치시켰다.
호커 해리케인은 상당히 강력한 함선임에 틀림 없었으나
몰타의 방공망은 너무나 열악했다.
영국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만큼
영국의 도움이 없이는 몰타의 방어는 힘들어 보였다.
이탈리아는 발레타 항구에 지속적으로 폭격을 가했고,
항상 긴장상태에 놓인 몰타는
그저 영국의 구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역시 독일과의 일전으로 많은 병력을 활용하지 못했던 때라
몰타의 미래는 어두웠다.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이 본격화 되었던 8월에 이르러서
영국은 몰타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영국은 몰타에 대규모 함선을 배치시켰다.
몰려드는 이리떼
이 당시 독일이 점령한 크레타와 북 아프리카 사이의 항로는
“폭탄 골목(Bomb Alley)”이라 불리었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떠나는 즉시,
독일 공군기들이 달려들어 각종 폭탄과 어뢰들을 퍼부어댔기 때문으로
이 호송 함대의 운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MW-11 선단은 알렉산드리아를 출항한 직후부터
추축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고 초기 공격은 순양함과 11척의 상선에 집중되었지만
이후에는 닥치고 공격 대상이 되었다.
비거러스 작전(Operation Vigorous) 중 영국 해군은
총 다섯 번의 방향 전환을 하였고 6월 15일 이른 아침,
그 첫 번째 반전을 하며 선단은 동쪽으로 뱃머리를 향했다.
바로 그때,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데르나(Derna)에서 출격한 독일 해군의 고속 어뢰정,
E-보트(E-boat)들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어뢰정 S56의 어뢰 공격으로 경순양함 뉴캐슬(Newcastle)이 대파되고
구축함 헤이스티(Hasty)는 S55에 의해 홀라당 격침되었으나
독일 고속정들의 피해는 전무했다
(과달카날에서는 미군 고속정에 일본 해군이 작살나고
지중해에서는 독일 고속정에 영국 해군이 떡이 된다..-_-;;)
blog.daum.net/mybrokenwing/382?category=1471879
하푼 작전으로 전달된 보급품의 물량은 누가 봐도 현저히 부족했고,
특히 유조선 켄터키의 침몰로 몰타의 영국 공군기 항공유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으며
전쟁 수행을 떠나 생존 부분에 있어서도 석유의 부족은 치명적이었는데
당시 몰타는 식수를 해수를 여과하여 얻고 있었으며,
여과 장치의 전력원은 당연히 석유였으므로 석유가 없다는 것은
몰타 주둔 영국군과 주민들이 굶어 죽기 이전에
식수 부족으로 죽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blog.daum.net/mybrokenwing/383?category=1471879
국경을 넘는 이탈리아 군대
이탈리아의 원수 로돌프 그라치아니의 지휘 아래
총 12개의 사단이 이집트 국경을 넘었다.
이들의 목표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쳐서 수에즈 운하를 차지해
인도양까지 세력을 넓힐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집트 수비대보다 4배나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이탈리아는
이집트에서의 낙승을 예상했다.
수많은 탱크와 오토바이 그리고, 수송 차량이 지중해 연안을 달리고 있었다.
이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이집트 해안 수비대는 이탈리아 군을 전혀 막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전차들 앞에서 그들의 전력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보병 부대가 전차 부대의 뒤를 따랐지만,
굳이 합류할 필요가 없었다.
전차부대 만으로도 이집트의 수비대는 초토화 되고 있었다.
이들은 겨우 이틀만에 130Km를 달렸다.
이들이 멈춘 곳은 시디 바라니라는 해안 도시였다.
영국군은
타란토 공습에 이어 마타판에서도
확실히 자신들의 지중해에서의 우위를 가져왔다.
이탈리아는
또 다시 해군 전력은 영국보다 열세에 놓여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나 라이트 포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틀은 크레타 섬이라는 지중에 한가운데의 훌륭한 요새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지리적 이점들이
영국의 지중해에서 재해권 장악을 유리하게 가져갔다.
반대로
이탈리아 역시 지중해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지중해 상실은 곧 이탈리아 본토 침략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꼴이다.
결국 이탈리아는 지중해 장악을 위해서는
그리스와 크레타 섬 확보가 중요하다고 깨닫는다.
adrian0220.tistory.com/214?category=785909
영국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왜나면 그들이 목표로 했던 만큼의 물리적 성과는 이루지 못했다.
손실비율로 보아도 상당한 이득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2대의 항공기와 4명의 조종사를 잃었지만,
이탈리아 전함 3대의 손실을 가져왔다.
훗날 1대는 현역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나머지 2대는 반년간의 전력 공백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조종사 4명의 손실은 뼈아팠다.
크지 않은 물리적 성과에 비해 전략적 성과는 상당했다.
절망적이었던 연합군들은 한숨 돌렸고,
역시 지중해에서는 아직 영국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탈리아가 쉬고 있던 시간동안
영국은 자신들이 아직 전쟁을 수행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연합국에 참가한 모든 나라들에게 알릴 필요성이 있었다.
항복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던
이집트와 그리스에게 다시한번 영국의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추축군 야간 공격기대의 뇌격과 폭격으로
상선 엠파이어 호프(Empire Hope)와 듀칼리언(Deucalion)이 순식간에 침몰하였고
또 다른 상선 브리즈번 스타(Brisbane Star)는 용골이 부러졌지만
그래도 끝까지 자력으로 몰타까지 도달할 수는 있었다.
한편, 이 야간 항공 공격 당시
두 척의 이탈리아 잠수함 알라기(Alagi)와 브론조(Bronzo)가
이 공격에 가담했는데
이것들은 지네가 영국 상선단을 공격,
앞서 설명한 전과들을 기록했다고 보고했고
(서로 전과를 놓고 투닥거리다 나중엔 흐지부지..)
알라기가 발사한 어뢰에 순양함 케냐(Kenya)가 대파되었다.
blog.daum.net/mybrokenwing/386?category=1471879
'사막의 쥐 (Desert Rats)'는 영국 제7기갑사단(British 7th Armoured Division)의 별명이며,
토부룩 방어전에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 제9사단 (The Australian 9th Division)의 별명은
'토부룩의 쥐 (Rats of Tobruk)'였다.
blog.daum.net/mybrokenwing/387?category=1471879
하지만 물자와 연료,
새로운 전투기가 공급되며 몰타의 방공 능력이 향상되어
더 이상 추축군에 의한 공략이나 굴복이 어렵게 되면서
몰타는 계속 영국의 지배 하에 유지되었고
이는 이후
북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반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로 작용하게 된다.
몰타가 포위된 상황에서도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추축군의 수송선 35%가 도달에 실패했는데,
몰타에 대한 재보급이 이루진 직후인 9월에는
100,000톤에 이르는 추축군 수송선이 침몰되었고
여기에는
엘 알라메인을 공격 중이던 롬멜에게 보내질 연료 24,000톤도 포함되어 있었다.
blog.daum.net/mybrokenwing/389?category=1471879
제 13 군단의 사령관 인 브라이언 호록스 경은
몽고메리의 지도력하에 구축 한 방어의 "수밀성"에 대해 매우 확신했습니다.
그는 공격 시작에 대한 보고서를 받기 전에 잠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영국군은
독일군 사령부에 대한 허위 문서를 성공적으로 심었습니다.
8 군 참모장 인 드 Guingan 장군은
방어 군 8A 전선 후면의 지형에 대한
완전히 왜곡 된 그림이 제작 된 로드맵 제작을 명령했습니다.
지도는 자동차로 독일 지뢰밭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몇 개의 점핑 지뢰를 폭파하여 차를 손상 시켰고
정찰대는 후퇴하여 적에게 행동 할 기회를주었습니다.
독일인 "동료들"이 차를 수색하고 그 안에서지도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공격 계획의 기초를 형성하고
독일 로드맵 작성을위한 모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가짜 문서는 Alam el-Khalfa 전투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Rommel은 자신의 탱크와 차량이 필요한 연료를 공급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까지
공격을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El Alamein 작전에서 영국 제 8 군의 주요 기동 형태는
한 부문에서 적의 방어를 뚫고
이 공격을 심층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하는 정면 공격이었습니다.
공세 전은 약 60km였다.
군대의 작전 구성은 두 개의 제대였습니다.
군대 구역의 주요 타격은
전선의 좁은 구역에서 한 군단의 군대에 의해 전달되었습니다.
돌파구의 폭은 6.5km였다.
영국 사령부는 대규모 기갑 부대를 만들어 적을 쫓는 데
상당한 비율을 달성 할 수있었습니다.
추격은 영국군의 평균 전진 속도로
하루에 최대 25km까지 진행되었습니다.
80 일 만에 제 8 군은 적군의 심각한 저항없이
엘 알라 메인에서 트리폴리 지역으로 2,000km 이상 행진했습니다.
전투 경험에 따르면 기동 부대는
주 보급 기지와 격리 된 사막 작전 장에서 장거리를 다닐 수 있습니다.
모래와 더운 기후는 기갑 및 동력 부대의 사용에 장애물이 아닙니다.
엔진과 군사 장비의 내부 메커니즘에
모래가 들어 가지 않는 특수 커버와 필터,
모래에 묻히지 않은 탱크 트랙은
오프로드에서도 장갑차와 차량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했습니다.
www.youtube.com/watch?v=Ynx_MpX3Hfg
몽고메리의 군기. 사기 및 급식. 위생관리가
롬멜을 이겼다.
롬멜군 : 사막의 아무데나 응아... 파리로 인한 이질균에 감염자 속출...
몽고메리군 : 파고 묻었다.
dbr.donga.com/article/view/1206/article_no/4859/ac/magazine
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만 영화 ‘카사블랑카’ 줄거리:
때는 1941년,
2차 세계대전으로 시끄러운 유럽을 등진 망명자들은
리스본으로 가는 비자를 얻으려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몰려든다.
카사블랑카에서는 한때 열정적으로 세상을 위해 싸웠으나
사랑과 세상에 배신당하고 냉소적으로 변한 미국인 릭이 꽤 큰 술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지역을 경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들르는 이 술집에서는
출국 비자가 비싼 값에 팔리고 손님들을 상대로 도박도 이뤄진다.
그러나 누구와도 가까이 하지 않고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있던 릭은
한때 파리에서 사랑했던 여인 일자와 마주친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체코슬로바이카의 저항군 지도자인 빅토르 라즐로가 있었다.
릭이 독일군에게서 빼앗은 통행증을 갖고 있음을 안 라즐로와 일자는
그에게 통행증을 내줄 것을 요구하지만 릭은 그 요구를 거절한다.
그러나 일자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자
릭의 분노와 배신감도 잦아든다.
릭은 다시 한 번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일자가 무사히 리스본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출처 : 월드투데이(http://www.iworldtoday.com)
photohistory.tistory.com/17702
www.youtube.com/watch?v=ntl2-W1Oi8I
패튼 장군은 두 손에 금반지를 두 개씩 끼었고,
그의 장화는 언제나 윤이 날 정도로 반짝거렸다.
그리고 허리에는 흰 손잡이의 38구경 회전식 권총이 늘 붙어 다녔다.
이 권총은 패튼 장군의 상징으로 인정되어
무게 있어 보이는 장군의 인상과 더불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흰 상아 손잡이 권총을 허리에 차고 늠름하게 선 장군의 모습은
실로 서부의 멋쟁이 사나이를 연상시켜 부하들을 즐겁게 했다.
패튼은 1940년에 준장(准將)으로 진급하여 제2기갑여단장이 되었고.
이듬해 소장이 되어 사단장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제1기갑군장이 되어 명성의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1942 년, 프랑스의 침공(노르망디)을
제 2의 정면으로 착수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설득 된
미국의 지휘관들은 Axis 군 대륙을 개간하고
미래의 남유럽 공격을위한 길을 준비한다는 목표로
북서 아프리카에서 착륙을 수행하기로 동의했다 .
연합군 입안자들은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기를 원했고
그 지역을 방어하는 비시 프랑스 군의 정신력을 결정해야만했다.
이 숫자는 약 12 만명, 항공기 500 대, 군함 몇 개입니다.
맹방의 일원이었던 프랑스 인이 영국과 미군에 발사하지 않기를 바랬다.
반대로,
프랑스 해군에 큰 피해를 입힌 메르 엘 케비르 (Mers el Kebir) 에 대한
영국의 공격에 대한 프랑스의 분노에 대한 우려가있었습니다.
현지 상황을 평가하는 데 도움이되도록
Algiers의 미국 영사 인 Robert Daniel Murphy는 정보를 수집하고
Vichy 프랑스 정부의 동성애 회원에게 다가 가도록 지시 받았다.
머피가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장군의 전반적인 명령하에 착륙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작전을위한 해군은 Andrew Cunningham 경 제독에 의해 이끌려 질 것입니다.
www.youtube.com/watch?v=Z_OzK0hML0M
토치 작전은 영국이 이탈리아령 리비아를 점령한 상태에서
아프리카에 미국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상륙이 시작된 건 1942년 11월 8일이었다.
미군은 비시 프랑스군의 저항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기대와 달리 카사블랑카와 오랑에서는 프랑스군의 저항이 있었다.
특히 카사블랑카에서 미군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전투함들과 공군의 지원을 통해서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반면 알제리에서 무장 레지스탕스의 봉기와 함께
대부분의 프랑스 지휘관들이 전향을 해서 피해 없이 상륙에 성공했다. [나무위키]
이 상륙작전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군이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화가 나서 자치를 보장받았던 프랑스 남부를 바로 점령해버렸다(안톤 작전).
이 과정에서 프랑스 해군 함대는
나치에게 배를 내줄 수 없다며 자침시키거나 도주하여 연합군에 합류하였다. [나무위키]
원래 "연합군은 토치(횃불) 작전을 통해
1943년 2월까지 튀니지를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이 항복한 것은 5월 13일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연합군은 토치 작전으로 상륙시킨 부대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부터 영국 제 8군까지 동원해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야 했다.
이 시기에 영국 왕립 해군은 토치 작전뿐만 아니라
제8군을 위해 엄청난 보급 물자를 수송해줌으로써
10월 23일에서 11월 5일 사이에 걸쳐 벌어진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 제8군이 승리를 거두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또 1943년 1월~5월에 연합군은 추축국 화물선 500여 척(56만 톤)을 격침시키면서
북아프리카 추축군 보급 사정을 크게 악화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南美^Afric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를 바꾼 질병 ^ 천연두(2) - 南美 잉카제국 멸망 - 우두(牛痘) 백신 (0) | 2021.04.26 |
---|---|
역사를 바꾼 질병 ^ 천연두(1) - 南美 아즈텍 멸망 - 우두(牛痘) 백신 (0) | 2021.04.05 |
섬전쟁(3) ^ 포클랜드 전쟁 - 英國 ^ 대처 수상 (0) | 2021.03.14 |
아프리카 沙漠 철도 - 키니네^말라리아 - 탐험^特許 - 땅 따먹기 - 中共^일대일로 - 赤보석^나미브 沙漠 (0) | 2021.01.15 |
카리브海- 버뮤다 삼각지대 (0) | 2020.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