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高麗人)은
1863년 최운보 등 함경북도 경원 지방에 살던 13가족 60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당시 러시아의 영토였던 연해주 지신허 마을에 첫 정착을 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계절농업 형식으로 농사철에
두만강을 넘어 농사를 짓던 조선인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고려인 역사는 이 때를 시발로 한다.
이후 매년 조금씩 이주하는 조선인 인구가 늘어나다가
1869년 `기사흉년' 당시
한꺼번에 6천여명의 함경도민들이 집단 도강을 한 이후
연해주는 고려인 정착지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됐다.
첫 이주후 20년만인 1880년대 중반,
연해주의 고려인 인구는 공식 집계만 1만100여명이었고,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인구를 합하면 3만명이 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러시아인 8천300여명 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다.
고려인들에 의해 연해주 지역의 땅이 경작지로 바뀌었고,
한반도 국경지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잇는 도로도 놓여졌다.
<고려인> ① 대륙 진출의 개척자들 | 연합뉴스 (yna.co.kr)
창문 없는 짐칸은 심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가을께 출발한 열차는 겨울이 다 되어서야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열차 안에서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여정이 길어질수록 차에서 내릴 때마다
사람을 땅에 묻는 게 일상사처럼 이어지곤 했다.
좌절감과 절망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 완전한 체념에 빠지고부터는
처음 열차에 탈 때 가졌던 최소한의 자의식이나 체면치레도 사라졌다고 한다.
열차 내부에 여기저기 흩어진 오물과 대소변을 곁에 둔 채
짐승처럼 먹고 자면서 무조건 버티는 길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총 18만 명 정도가 이주행렬에 올랐는데,
그중 25,000-30,000 명 정도가 도중에 사망했다.
끔찍하고도 두려운 참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지 않을 수 없다.
1937년, 애도받지 못한 비극 — 고려인 강제이주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 DiverseAsia (snu.ac.kr)
1910년을 전후해서는 애국지사의 망명과 이주가 줄을 이어
연해주는 만주의 북간도와 함께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08년 최재형·이범윤·안중근·이위종 등은 연추에서 ‘동의회’를 결성했고,
이듬해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는
왼손 무명지를 끊어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이 맹세는 안 의사에 의해 1910년 봄 여순 감옥에서 지켜졌다.
이범진·이준·이상설·이위종은 잊을 수 없는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들이다.
이범진 초대 러시아 공사는 헤이그 밀사를 발 벗고 후원했다.
1906년 이준·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도록 했고
그의 아들 이위종도 합류시켰다.
연해주는 한반도와 가장 인접한 지역으로 고대로부터 한민족 역사의 무대였다. 이 지역의 고대사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동연방대학 박물관에는 BC 1만5000년 전 구석기 유물이 있다. 이후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이곳은 고조선의 역사 무대였고 그 뒤를 부여·고구려가 이어받았다.
고구려는 668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나 698년 발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중국 사가들은 만주와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고대민족에 대해 시대별로 숙신(愼), 물길(勿吉), 말갈이라고 부르다가 발해 멸망 후에는 그 땅은 여진(女眞)으로, 그 사람은 여진족으로 불렀다. 이 연해주 땅이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연해주에서는 발해 유적지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연해주에는 발해와 항일투쟁의 숨결 살아 숨 쉰다 -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co.kr)
1937년 8월 21일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연해주에 정착해 살고 있던 고려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강제 이주는 일본과 소련의 관계 악화가 원인이었다.
1933년에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이 수립되고
독일에 히틀러 나치 정권이 등장하자,
소련은 동서 양 전선에서 협공당할 위협에 직면한 채 극도의 긴장에 휩싸였다.
바로 그해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일본과 소련 간 군사 충돌도 발생했다.
앞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시베리아에서 적백(赤白) 내전이 벌어졌을 때부터 고려인 강제 이주의 씨앗을 뿌려졌다.
이미 고려인 사회는
볼셰비키 적위군과 연대해 백군에 반대하는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또 친일 고려인들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점령한 연해주와 시베리아 철도 인근에서 백군을 돕고 있었다.
1922년 내전이 끝나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자
일부 고려인의 친일성향은 러시아인에게 큰 앙금이었다.
소련은 고려인의 자치주를 거부,
이는 1937년 강제 이주의 원인이 됐다.
결국 일본과 소련의 갈등 사이에 낀 고려인들은
양측의 군사적 충돌 과정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고려인 강제이주 수난사, 그 현대사는 누가 지웠나? (pressian.com)
<고려인> ② 같은 뿌리, 그러나 다른 삶 | 연합뉴스 (yna.co.kr)
중국은 이른바 ‘동북공정’을 내세워
발해 유적지에 철의 장막을 쳐놓고
발해가 당나라 변방의 소수민족인 말갈(靺鞨)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강변한다.
러시아는
당나라와는 무관하게 말갈족이 세운 극동의 첫 독립국가라고 하면서
은근히 영유욕(領有慾)을 내비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학계는 독립국가이기는 하나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라는 이중구조설을 퍼뜨린다.
강역을 놓고도 우리는 연해주는 물론 아무르 강 중류까지로 주장하나,
러시아 측은 연해주의 한카 호(興凱湖) 북쪽을 조금 넘는 선으로 본다.
이렇게 우리의 정통국 발해는
오늘날까지도 그 수난의 역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 치욕의 역사를 더 이상 연장시킬 수는 없다.
이젠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귀감을 얻어
발해사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오롯하게 밝혀냄으로서 왜곡과 변조를 막아야 한다.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35) 초원으로 뻗은 발해의 초피로(貂皮路) - 경향신문 (khan.co.kr)
<고려인> ③ `코리안 드림'과 蘇연방 시대의 향수 | 연합뉴스 (yna.co.kr)
네오 :: 러시아 연해주도 발해의 영토였다 - 한경 (tistory.com)
<고려인> ④ "강제이주 과하게 덧칠됐다" | 연합뉴스 (yna.co.kr)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 의지의 한국인들 상세보기|한국과의관계주 카자흐스탄 대한민국 대사관 (mofa.go.kr)
[박찬석 칼럼] 아랄해의 비극 (yeongnam.com)
아랄해: 인간의 불편한 간섭이 만든 자연재해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소비에트 연방시절인 1954년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중 하나인 카라쿰 운하(Karakum Canal)가 착공했다. 운하 건설사업은 스탈린이 죽고 일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더디지만 작업을 계속해 1988년에 완공되었다. 운하 중간에 거대한 인공호수도 만들었다. 총길이 1,375km의 운하는 연간 13㎦의 물을 사막에 공급했다.
사막지대는 면화 농장으로 변했고, 2011년에 이 나라의 원면 생산량은 110만톤으로 세계 9위의 생산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 운하는 부실하게 건설되었다. 물이 운하를 흐르면서 누수되거나 증발된 양이 30~70%가 되었다. 수도 아시가바트는 물을 풍족하게 쓰게 되었지만, 아랄해로 들어가는 물이 부족해졌다. 한때 세계 4위의 큰 바다였던 아랄해가 쪼그라드는 비극의 주 원인이 이 운하에 있다.
아랄해의 파괴는 수리적으로 체르노빌 사건에 해당한다.
중앙아시아 사막지대에 물길을 돌려
백색황금이라는 원면을 생산하겠다는 계획은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생태계를 파괴하고 말았다.
소련의 공학자들은
중앙아시아를 적시는 사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의
두 개 강의 물줄기를 바꾸어 옥토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아랄해는 2000년대초 전체 호수 유량의 3분의2를 상실해
두 개의 작은 호수로 바뀌었다.
염분 농도가 너무 심해져 번창했던 어업은 몰락하고
호수바닥이 드러나면서 진흙뻘이 되어버렸다.
호수에서 발생하는 독성 잔류물질이
공기를 타고 관개 농지에 덮쳐 면화 농사를 망쳐버렸다.
여름은 더 더워지고 겨울은 더 추워졌다.
소련은 환경을 완전하게 무시했고,
결국은 1991년 붕괴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생산성은 더욱 떨어졌다.
두 세대만에 호수의 95%가 사라졌다.
[물의 반격] 투르크멘 운하가 초래한 아랄해 비극 - 아틀라스뉴스 (atlasnews.co.kr)
한국에서 처음 온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요.
이렇게 드넓게 펼쳐진 땅덩어리를 처음 보니까요."
연해주 현대 농장'을 책임지고 있는
현대자원개발의 김용진 상무가 기자의 표정을 보고 무심히 던진 말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넓은 평야가 대부분 놀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해주의 전체 농지는 70만 ㏊다.
개간 가능한 땅이 300만 ㏊인데
비해 불과 20% 남짓만 경작이 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연해주 최대의 농업지역으로 꼽히는 우스리스크에서
중·러 국경이 있는 항카호수 부근까지 가는 한시간 30여분 동안
펼쳐져 있는 끝없는 지평선은 모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었다.
하지만 실제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은 언뜻 눈으로 봐도 얼마 안돼 보였다.
인구 5천만인 우리나라의 전체 경작지가 180만 ㏊인 것과
비교하면 170여만명이 거주하는 연해주의 농경지가 우리의 두 배 가까운 규모인 셈이다.
150년전 우리 선조들이 기아와 학정을 피해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나온 곳.
그들은 곡괭이와 호미만 들고 이 너른 땅을 일군 연해주 농업의 선구자들이었다.
처음 고려인들이 연해주 땅에 들어섰을 때
오랜기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토양은 기름졌다.
우리 선조들은 그 땅에서 보리, 귀리, 옥수수, 콩 등을 심어 큰 수확을 거뒀고,
벼농사를 짓기에는 적절치 않은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쌀 재배에도 성공했다.
드넓은 농경지와 윤기흐르는 옥토.
그 신천지에 대한 희망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후에도
오랜 기간 고려인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후 고려인들에게 다시 연해주를 찾게한 이유가 됐다.
<고려인> ⑤ 연해주의 미래, 한반도의 미래(끝) | 연합뉴스 (yna.co.kr)
'지구 최악 환경재앙' 말라붙은 아랄해···영상으로 보니 - 중앙일보 (joins.com)
발하슈호로 향하는 지류인 Ili 강은
중국 북서부 신장 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흐른다.
발하슈호는 반은 소금이고,
반은 담수로 이미 산업 오염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Ili 강의 물을 너무 많이 사용해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인구 성장, 농업, 산업, 중국 서부 지역의 도시화와 함께
중국의 물 사용은 증가하고 있다."라고 Akcura는 설명했다.
중국 이리강 개발에 피해 입는 카자흐스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은 자국 내 발하슈호에 흘러드는
중국 이리강의 수질과 수량 때문에 중국과의 갈등이 심각해지는 양상이다.
카자흐스탄 동부에 위치한 발하슈호는
면적이 1만9000㎢에 달하는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담수호이다.
발하슈호는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발원하는 이리강에서 물의 70~80%를 공급받는다.
이 나라 최대도시인 알마티 등 인구의 3분의 1은
이리강과 발하슈호의 물에 의존하여 산다.
그런데
2000년 이후 발하슈호는 심각한 물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중국과 카자흐스탄은
2000년에 물을 공유하며 물 관리를 위해 상호협력한다는 협정에 서명했지만,
무용지물이라고 서방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학자들은
발하슈호의 운명이 무분별한 개발로 거의 사라진 아랄해(Aral Sea)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나일강·중국 이리강… 또 다른 화약고 댐이 위험하다 - 주간조선 (chosun.com)
신장.위구루 - 타클라마칸사막 ^ 구게왕국 - 와칸 회랑. 아프카니스탄 - 혜초. 고선지 장군 (tistory.com)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19세기 러시아(당시 소련)가 동진 정책으로 얻은 영토를 개척하면서
그 땅의 활용과 항구의 필요성, 군사적 요충지로 떠오르며 그 필요성이 부각됐다.
1891년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3세의 칙령으로 공사에 들어갔고,
1904년 러일전쟁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916년 모든 구간을 개통했다.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는데,
이들이 탄 열차가 바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였다.
당시엔 음식이나 화장실 등 열차 내부의 위생 환경이 나빠
이동 중 목숨을 잃은 이들이 많았다. 주로 노인들이었다.
지금은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곳곳에
‘고려인(현지에선 까레이스끼라 불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50만 명의 한인 2세, 3세, 4세들이 많다.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이주 당할 때 타기도
러시아 사람들이 흠뻑 빠진 한국의 도시락 라면
도시락 라면(팔도)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객이라면 꼭 먹어봐야 하는 필수 음식이 됐다.
언뜻 단조로워 보이는 횡단열차 여행에서 뜻밖의 즐거움은 바로 네모난 도시락 라면이었다.
어릴 때 많이 먹었지만 지금은 수없이 많은 라면 중 하나가 된 그 라면이
러시아에선 가장 인기 있는 인스턴트 음식의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을 줄이야.
도시락 라면은 횡단열차의 필수품이라 불린다고 한다.
혹시라도 미리 챙기는 것을 깜빡하더라도
중간중간 멈추는 역 플랫폼에 내려 매점에서 쉽게 살 수 있으니 걱정 안해도 된다.
이 도시락 라면(팔도)은
1990년대 초
부산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던 러시아 선원들에 의해
러시아 내에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았던 1998년
러시아는 모라토리엄(국가부도)을 선언하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 처했다.
상당수 해외 기업들은 러시아 철수를 선언하는 상황에서도
도시락 라면을 만든 한국의 '팔도'는 계속 러시아 생산 시설을 가동하겠다고 하면서
'의리를 지킨 회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면서 더 큰 사랑을 받게 됐다고 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면 도시락 라면을 반드시 맛 보시라.
뜨거운 연기와 함께 애국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후루룩~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 꿈과 현실 사이에서 (hankookilbo.com)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는 러시아의 이국적 풍경 (hmgjournal.com)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볼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건
내 아버지 레파토리
그 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고향생각 나실때면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아버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번 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건
내 어머니 레파토리
그 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남은인생 남았으면
얼마나 남았겠니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번 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白頭山石 摩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頭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두만강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