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대구잡이 항구 뉴포트의 유대인은 1,200명으로,
항구 전체 인구의 20%에 달했다.
그들은
네덜란드에서 그랬듯이 대구 처리와 소금 절임을 분업화하고 표준화했다.
그리고
철저한 품질관리와 서비스로 전국적인 유통을 장악해 이를 기업화했다.
이는 네덜란드에서 그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절임대구는 날개 돋힌듯 팔려나갔고,
덕분에 이윤이 많이 남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 어업으로 부를 축적한 ‘대구 귀족’들이 생겨나면서
유대인 부자들도 많이 탄생했다.
http://www.healthumer.com/news/articleView.html?idxno=2383
바이킹은 일찍이 먼 바다로 나가 생선을 잡았는데
그중 가장 놀라운 일은 대규모의 대구 떼를 발견한 일이었습니다.
이 대구 떼를 따라 북미로 몇 차례나 항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의 해안까지 바이킹의 이동 경로와
북대서양 대구 서식지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이킹의 항해로는 정확히 대서양산 대구의 영역과 일치합니다.
이렇게 대구 서식지를 따라 바다 위에 길이 만들어졌고
대구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이킹들은
진작부터 북유럽의 바다에서 대구를 잡아 주요 단백질 자원으로 삼았고
대구가 나지 않는 여름철에는
겨울철에 미리 대구를 바람에 말려 무게를 줄인 후
두꺼운 나무판자처럼 만들어 긴 항해 기간 동안 식량으로 사용했습니다.
실제 9세기 경 바이킹족은
이미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에 말린 대구를 가공하기 위한 공장을 세웠고
북유럽으로 수출까지 했다고 합니다.
https://out-of-curiosity.tistory.com/22
18세기에 들어서 대구 무역의 중심지였던 뉴잉글랜드는 국제적인 상업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지중해 시장에 판매해 큰 이익을 챙겼으며,
저급한 물건을
서인도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식민지에서 값싸게 착취한 노동력으로 일군 산업형 농장)에 팔았다.
그곳의 노예들은
질 낮은 절인 대구로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버텼다.
결과적으로 대구는 노예무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민족 이동과 노예무역에 영향을 미친 대구는
국가 간 어획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도 부추겼다.
18세기 영국은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식민지인들의 반발은 미국 독립혁명으로 이어졌다.
1782년 영국과 미국의 평화 협상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 역시 미국의 대구잡이 권리였다.
아이슬란드는 영국과 1958~1975년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세 차례에 걸쳐
‘대구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200마일 영해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끝났고,
국제 해양법상 경제수역이 200마일로 결정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40307000559
간을 맞춘 쌀밥 위에 동그랗게 얹어진 신선한 생선살.
‘스시’만큼 미스터리하고 변화무쌍한 음식은 없다.
수천 년 전,
세계에서 가장 역겨운 냄새가 나던 아시아의 썩은 물고기가
오늘날 세계인이 사랑하는 패스트푸드로 탈바꿈한 데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한 조각 스시를 따라가는 2천 년의 긴 시간 여행-
그 속에서 아시아 농경문화의 비밀과
물고기를 향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만나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APWn3WRr5YA
니기리즈시는 도쿄의 전통요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다이쇼 시대(大正時代, 1912~1926)의 대지진으로 인해
도쿄의 스시 장인들이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하면서
에도마에즈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식량난 해소를 위하여
음식점들의 영업이 일시적으로 금지되던 와중에도
스시집만은 쌀 1홉으로 스시 10개를 만드는 조건 하에 운영이 허락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 내에 스시 전문점이 급증했으며,
당시의 스시 크기가 오늘날 스시의 기준이 되었다.
스시의역사 / 스시의기원 / 초밥의기원 / 초밥의역사 / 스시/초밥/사시미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대구는 미국과 유럽에서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특히 미국을 일으킨 생선으로 불린다.
보스턴에 있는
매사추세츠 주의사당 건물 입구에 나무로 조각한 대구가 걸려 있을 정도다.
보스턴은 대구때문에 탄생한 도시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구는 서해는 물론 남해와 동해에서도 잡힌다.
서해 대구는
남·동해 대구와 성장과 번식 등 생태가 다소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평양에서 서식하는 남·동해 대구와 달리
서해대구는 서해에 냉수대가 생성되며 들어왔다 갇힌 대구가 토착화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서해 대구 어획 해역은 전북 군산 어청도 인근에서 인천 연평도 사이이며,
크기가 동·남해안 대구보다 다소 작아 ‘왜대구’로도 불리기도 한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348537
한국스시(초밥)과 일본스시(초밥)의 차이점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여기는 南太平洋(S-Pacific Ocean) ^3 - 사모아 참치 원양어업 쇠퇴 ^ 철수 (tistory.com)
스시의종류 / 초밥의종류 / 스시의 종류 / 초밥의 종류 / 스시/초밥/사시미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생명 40억년의 비밀 3부 - 경계의 모험가들(漁類) 상륙(1~5) (tistory.com)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성금요일.
이날은
1년 중 스페인 전역에서 대구 소비가 가장 많은 날이다.
여기에는 오래된 비밀이 한 가지 숨어있다.
수도사는 물론 일반인들 역시 속죄와 참회의 뜻으로
고기 대신 생선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4세기경부터 시작된 금요일의 어식문화는
전 유럽에 걸쳐 엄청난 생선수요를 만들었고 이후 양어기술과 어업의 발달,
그리고 신대륙의 발견까지 가져왔다는데...
2천 년 유럽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그리스도와 물고기!
그 신비하고도 흥미로운 이야기 속으로 초대한다.
유럽인들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기리기 위해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진 금요일이면 고기 대신 생선을 먹었다고 한다.
이것이 유럽 국가들이 어업 강국이 된 비결이라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먹었던 물고기 중 세계의 역사를 바꾼 것은 대구와 청어 였다.
소금에 절여 바짝 말린 대구는 최고의 저장식품으로
원양 항해를 가능케 함으로써 신대륙 발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정착한 초기 이주민들의 주요 산업도 대구잡이였다.
https://blog.daum.net/koh914/18350196
청어, 역사 바꾼 물고기 이야기(1): ‘금요일의 물고기’, 유럽의 패권을 결정짓다
발트 해에서 행해졌던 스코네의 청어어업과
북해에서 행했던 네덜란드의 청어어업은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마그누스와 베르메르의 두 그림이다.
마그누스의 그림에 보이듯이
스코네에서는 해변에 몰려드는 청어를 연안에서 잡아 해변으로 운반하여 그곳에서 염장했다.
파도가 잠잠한 내만형의 청어어업이 행해졌던 것이다.
이에 반해 네덜란드는 연안으로 몰려드는 청어를 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풍파가 격렬한 원양으로 나가 조업했다.
네덜란드 어선은
청어를 쫓아 셰틀랜드 제도에서 스코틀랜드, 영국의 연안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이것을 ‘거대한 어업(Great Fishery)’이라고 불렀다.
네덜란드는 먼 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어선에서 바로 염장했다.
벤켈소어의 염장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정된 조업과 염장을 위해서는 선박의 개선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출현한 것이 ‘부스(buss)’라는 청어잡이 전문선박이었다.
「델프트의 풍경」에서 보았던 낡은 두 선박이 바로 ‘부스’이다.
실물이 전해지지 않은 오늘날,
베르메르는 ‘부스’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http://www.webzinesean.kr/html/main/view.php?idx=247&keyword=&keyfield=&s_category=
드넓은 강과 푸른 대양을 오가던 물고기들의 죽음과
운명 뒤에 감춰진 수만 년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시작한 여정-
물고기 사냥의 긴장과 흥분, 감동을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
전 세계 24개국에서 아름다운 자연과 낯설고 경이로운 풍경들을 독창적으로 담아냈다.
찰나의 물고기 잡이를 스펙터클한 영상으로 승화시킨 HD 수중초고속촬영,
스틸카메라 60대를 연결하여 사용하는 정지입체동영상
타임슬라이스(Time-Slice), 케이블캠(Calbe Cam) 등 첨단 촬영이 바로 그것이다.
기나긴 제작의 여정을 마치며 던지는 질문 하나.
인간은 물고기 없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가볍고 질기고 공짜”…
세계 30개 최빈국서 새끼 고기까지 씨 말려
주민들이 모기장으로 잡아내는 물고기의 절반 이상은 어린 고기였다.
모기장으로는 아주 작은 고기까지 걸리기 때문에
모기장을 한 번 끌 때마다 잡는 물고기의 양은
전통어구를 이용해 하루 잡는 양(하루 2.4㎏)의 절반 이상인 1.4㎏이었다.
한 번 그물질에 수백 마리의 물고기가 걸리는데,
대부분 길이 2㎝ 미만이었다.
https://www.hani.co.kr/arti///917018.html
인류 문명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물고기들의 대서사시(1) - 참치. 청어. 연어 - 염장고기(Corned Beef) (tistory.com)
https://www.youtube.com/watch?v=_vnA9Pkj9YM
https://m.blog.naver.com/jahaiek/150183329522
https://brunch.co.kr/@paxcom/73
https://vibary.tistory.com/867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061114.010220744040001
남획과 해수 온도 상승으로 1970년대 중반 대구 씨가 말랐다.
대구 한 마리가 60만~70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다행히 꾸준한 치어 방류사업 덕분에 2000년대 들어
대구가 진해만으로 돌아왔다.
대구와 함께 이 지역에서 대구를 활용해 만들어 먹던 전통음식도 돌아왔다.
'약(藥)대구'다.
보통 대구를 말릴 땐 배를 갈라서 활짝 펼친다.
그래야 빨리 마르고 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약대구는 배를 가르지 않는다.
알을 꺼내 소금에 절인 다음 다시 대구 배 속에 집어넣고 소금을 친다.
그렇게 건조대에 내걸고 겨울 내내 3~4개월 꾸둑꾸둑 말린다.
대구 몸통을 용기로 활용해 만드는 일종의 어란(魚卵)이다.
대개 소금만 쳐서 말리나,
과거 진해에서는 진간장과 각종 약재를 대구 안에 넣고 말려서
독특한 향과 함께 주황빛이 도는 약대구가 특산품으로 이름나기도 했었다.
외포수협 중매인 공경일씨는
"약대구는 옛날에 대구가 흔할 때에도 부잣집에서나 먹던 귀한 음식"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다른 단백질이 없었잖아요.
아프고 난 뒤에 약대구의 알과 살을 분리해서 머리와 몸통은
물 붓고 푹 끓인 건곰을 만들어 보신용으로 먹었죠.
그래서 약대구라고 불렀겠죠.
알은 부잣집에서 귀한 손님 오시면 조금씩 잘라서 술안주로 내기도 했고요."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logourhome&logNo=70152055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