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烽燧)는 횃불[烽]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시절의 통신시설입니다.
봉수를 군사 목적으로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였지요.
봉수는 산꼭대기에 만드는 것이고
연대(煙臺)는
바닷가에 만드는 것으로 임무는 같지만 이름이 서로 다릅니다.
봉수와 연대에서
평시에는 불이나 연기를 1개,
외국 배가 나타나면 2개,
그 배가 뭍(육지)으로 가까이 오면 3개,
뭍으로 침범하면 4개,
싸우게 되면 5개를 올리는 “5거법”을 썼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잘 볼 수 있도록 밤에는 횃불을 밝히고,
낮에는 연기를 피웠으며,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려 불이나 연기로 통신할 수 없을 때는
봉군(봉수 군사)이나 연군(연대 군사)이 달려가서 연락을 했지요.
또 봉수와 연대 주변 백 걸음 안에서는 봉화로 잘못 아는 것을 막으려고
무당의 굿이나 마을 제사 등을 못하게 했습니다.
출처 : 법률저널(http://www.lec.co.kr)
조선 시대까지 지금의 핸드폰은 '봉수'였다 - 핸드메이커(handmaker) (handmk.com)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는 급한 소식을 전할 때 여러 가지 방법을 썼다.
불을 피워서 불빛이나 그 연기로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말을 달려서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으며,
사람이 편지를 가지고 걸어가서 전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봉화는 가장 빨리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봉화는 불빛과 연기로써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낮에는 불을 피워 연기를 내고,
밤에는 불빛을 내어서 신호하였다.
평상시에는 봉화 한 개를 올려 아무 일이 없음을 알렸다.
그러다가
외적이 나타나면 2개,
국경에 가까이 오면 3개,
국경을 넘어오면 4개,
싸움이 벌어지면 5개를 올려서 알렸다.
만일 구름이 많이 끼거나 바람이 몹시 불어서
봉화를 올리지 못할 때에는
봉군들이 가까운 봉화대로 차례로 달려가서 알렸다.
높은 산에는 봉화대가 설치되었고,
산에서 산으로 연결되는 전국의 봉화망은
모두 서울의 목멱산(지금의 남산)으로 집중되었다.
한편, 파발은 보다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문서를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파발에는 말을 이용하는 기발과
사람이 걸어서 가는 보발의 두 종류가 있었다.
기발은 25리마다,
보발은 30리마다 참을 두었는데,
참은
걸음이 빠른 사람 대여섯 명과 잘 달리는 말을 대기시켜 교대하는 곳이다.
오늘날에는
우편과 전화, 전보 등이 있어서
옛날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빨리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위성 통신의 발달로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도 동시에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N서울타워에서 서북쪽으로 살짝만 발길을 돌리면,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烽燧臺)를 만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이 남산, 옛 이름으로 목멱산 봉수대가 5개가 있었으며
전국 국경의 비상상황이 집결되는 곳이었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남산타워가 위치한 남산 꼭대기에 있었지만,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남산 정상부가 통째로 날아가면서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남산 뿐만 아니라
현재 남한지역에 남아있는 옛 봉수대 지역 근처에는 TV송신탑이 위치해있다.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TV송신탑 옆엔 왜 꼭 '봉수대'가 있을까? - 아시아경제 (asiae.co.kr)
출처(봉화^봉수) : https://m.blog.naver.com/sunheassi/221056962907
제1로 : 함경도 경흥 → 강원도 → 경기도 → 양주 아차산봉수
제 2로 : 동래 다대포 → 경상도 → 충청도 → 경기도 → 성남 천림산 봉수
제 3로 : 평안도 강계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무악 동봉수
제 4로 : 평안도 의주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무악 서봉수
제 5로 : 전남 순천 → 충청도 → 경기도 → 서울 개화산 봉수
북발은
서울에서 강원을 거쳐 경흥에 이르는 코스를,
남발은
서울에서 충청을 지내 동래로 이르는 코스를,
서발은
서울에서 황해를 거쳐 의주에 이르는 코스를 일컬었는데
이 중 중국과 연락이 주로 이뤄지는
서발만 말을 활용한 기발이었고
북발과 남발은 보발이었음.
봉수 – 조상들의 통신 네트워크 | 과학문화포털 사이언스올 (scienceall.com)
서을근교 봉수대 : https://blog.daum.net/kcyun3/18349469
남산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풍수지리상 남쪽을 지키는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었다.
당시 이름은 목멱산이었지만
도성(都城)의 남쪽에 있으니 남산으로 더 많이 부른다.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된 것은 조선 세종 5년(1423)이다.
봉수는
병조(지금의 국방부)의 요청에 따라 남산등성이를 따라 모두 5곳에 설치되었다.
이는 전국에서 출발하는 다섯 갈래의 횃불 종착역이 남산이며,
도착하는 위치가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목면산 봉수대 : https://m.dailian.co.kr/news/view/359923
조선시대의 우역제도와 찰방 -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상세보기 - 우표로 보는 세상 - 한국우표포털서비스 K-stamp (epost.go.kr)
파발은
서발(西撥), 북발(北撥), 남발(南撥)의 3발로(三撥路)로 조직되었다.
서발은
기발(단 간로는 보발임)로서 의주에서 한성까지 모두 41참 1050리였고,
북발은
보발로서 경흥에서 한성까지 64참 2300리였고,
남발도
보발로서 동래에서 한성까지 31참 920리였다.
기발로 달릴 경우
서발은 2일이 걸렸고,
북발은 4~5일이 걸렸으며,
남발은 1~2일이 걸렸다.
파발제는 봉수제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대체 통신수단으로 도입되었던 것인데,
두 제도 사이에는 장단점이 있었다.
봉수제는
경비가 적게 들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정보를 연기와 횃불에 의해 전달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전할 수 없었다.
반면에 파발제는
경비가 많이 들고 전달 속도가 느렸으나
문서로 전달하기 때문에 자세한 보고를 할 수 있고 보안을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봉수제와 파발제 -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상세보기 - 우표로 보는 세상 - 한국우표포털서비스 K-stamp (epost.go.kr)
https://www.dogdrip.net/dogdrip/177161588
봉화대가 있는 산을
봉화산,
망산(망보는 산),
우산(牛山: 소의 눈처럼 크게 뜨고 보라는 의미),
상산(上山: 높은 산)이라 부른다.
또한 봉수와 관련된 마을 이름도
봉림, 봉수, 봉덕, 봉두, 봉전, 봉오 등이 있어
여수는 최전방 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봉수(烽燧), 근세 이전의 핫라인 - 남해안신문 (nhanews.com)
“대칸의 사자가 칸발릭(북경)을 출발하면
어느 길을 택하든지 40km마다 ‘쟘’이라고 부르는 역을 만난다.
‘쟘’은 역사(驛舍)라는 뜻이다.
…어떤 역사에는 말 400마리가 사절용으로 언제나 준비돼 있다.
…길도 제대로 없고 민가도 여관도 없는 외딴 시골을 지나는 경우에도
어디서나 역사가 세워져 있다.
단지 그 간격이 좀 길어져서
하루의 이동거리가 40~50km 아닌 56~72km가량일 뿐이다.
…정말 이 제도만큼 대규모의 것은 일찍이 볼 수 없었다.
…이런 역참들에는 사절을 위해 모두 30만 마리 이상의 말이 상비돼 있다.”
[제536호][몽고의 길] 동서양의 운명을 역전시키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21 (hani.co.kr)
봉수는 연대의 설치지역에 따라
경봉수(京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 등으로 구분된다.
경봉수는
중앙봉수로 서울 목멱산에 있었고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도 했다.
연변봉수는 해안지대에 위치했으며
내지봉수는 내륙지역에 위치하는 것이다.
연변봉수에는
연대를 쌓고 연대 위에 화기 등 각종 병기와 생활필수품을 간수했다.
내지봉수는 연대는 쌓지 않고 연조(아궁이)만 설치한 것이 많다.
봉수대의 해발 높이는 주변 지역에 비해 높은 데 위치하고 있다.
연변봉수는 대체로 해발 300m 이하이지만
내지봉수는 해발 400m 이상이 많다.
주변 지역에 산지가 많을수록 봉수대의 해발 높이가 높아진다.
하지만 봉수대의 높이가 높을 경우
봉화군이 근무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부실화될 우려가 더 크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고대 로마제국은
거미줄 도로망을 연결하여 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했습니다.
몽골 제국은
1279년 서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했습니다.
역참(驛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초원지대를 말달리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 몽골족은 도로대신
‘역참(驛站)’을 통해 신속하게 군사를 움직여 영토를 넓히고 관리했습니다.
‘역참 위에 몽골제국이 있다’라고나 할까요.
실제로 몽골제국의 유럽원정군 파발마의 속도가
하루 350km였다고 하니 케사르의 로마군단병 행군 속도의 10배였군요.
하루 350km를 달린 ‘역참 위에 몽골제국이 있다’ < 지금 한겨레에선 < 지금 한겨레에선 < 기사본문 - 한겨레:온 (hanion.co.kr)
당시 몽골인들이 열심히 도로를 건설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물론 기존의 도로를 정비하고 보수한 흔적은 있지만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도로 주변에 가로수를 심는다든가 도적떼의 출몰을 막는다든가 하는 것이지,
제국의 역량을 기울여 체계적인 도로망을 건설했다는 기록은 없다.
흥미롭게도
제국의 교통을 위해 그들이 건설했던 것은 도로가 아니라 역참이었다.
칭기즈칸의 뒤를 이어 제2대 군주가 된 우구데이는
자신의 3대 치적 가운데 하나로 역참제의 확립을 꼽을 정도였다.
엄청나게 확대된 제국의 각 지점에서 자신의 수도가 있는 카라코룸까지
신속하게 교통이 가능할 수 있도록,
중요한 노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역참을 배치한 것이다.
이 역참을 몽골어로는 '잠(jam)'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간단한 숙박시설, 수레나 말, 필요한 식량 등이 준비되어 있었고,
'잠치(jamchi)'라 불리는 관리인이 운영했다.
물론
요즈음의 여관처럼 아무나 돈을 내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공무로 여행하는 전령이나 관리 혹은
외국의 사신들에게만 사용이 허가되었고,
이들은 반드시 패자(牌子)라는 증명을 보여야만 했다.
[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18)역참제, 유라시아를 연결한 유목교통망 (hankookilbo.com)
부산의 봉수대는 어디에 위치하였을까.
계명산봉수는 지금의 범어사 동북에 있었고,
황령산봉수는 지금도 양정동의 황령산에 유적이 남아 있으며,
간비오봉수는 장산 줄기의 남쪽 봉우리로서 해운대쪽이다.
지금도 산정에 유적이라고 추측되는 것이 발견된다.
구봉봉수는 초량 뒷산으로 유적도 일부 남아있다.
오해야항봉수는 아마도 지금의 적기.용당동 일대가 오해야항으로 추측되며,
후면의 산정에 봉수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범일동 앞에 있었던 섬으로 매축 공사 때 없어진 것이라는 설과
신선대 동방 산상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설 등이 있다.
응봉봉수는 두송산에 있었는데,
지금의 다대포 마을 북쪽에 있는 연봉이 두송산이다.
석성봉수는 지금의 천마산이 석성산으로서,
여기에 봉수대가 있었던 것 같다.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25) 봉수대 - 부산일보 (busan.com)
몽골제국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정복지가 생겨날 때마다
사방 백리 간격으로 역참을 설치하여 정보 소통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렇게 설치된 수천 개의 역과 역은
광활한 대지를 하나의 그물코로 묶었다.
위대한 칸의 전령들은 역과 역 사이를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달렸다.
그리하여 칸의 명령이나 보고사항을 신속하게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적보다 정보전에서 월등히 앞섰다는 논리다.
정답은 바로 역참의 운영원리 차이에 있었다.
고대 중국을 비롯한 농경국가의 역참은
중앙과 각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를 따라 거미줄 형태로 설치되었다.
그것은 중앙 집중 원리에 충실한
‘선(線)의 체계’였다.
반면 몽골제국의 역참은
도로가 없는 초원과 사막에 바둑판처럼 설치된
‘점(點)의 체계’로 구축되었다.
몽골제국의 프로토콜 정보망은 당시 중세인들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가져왔다.
우선 그것을 지배한 초원의 정복자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줬다.
그리고 주변의 피정복민에게는 더 많은 ‘공포’를 전달해주었다.
그렇다면
거대한 세계체제(world system)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복자의 전리품’일까,
아니면 피정복민을 떨게 하는 ‘공포’일까?
이제 우리는
정보화 사회로 인하여 빚어지는 여러가지 철학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몽골제국 통치 기반은 ‘점 중심 정보네트워크’ - 조선일보 (chosun.com)
17. 이메일의 종말(Email is Dead) (brunch.co.kr)
http://blog.jandi.com/ko/2020/06/01/email-ou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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