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는 마음(don’t know mind)으로
정진하십시오”라며
영어로 “What is this(이뭣고)?”라는
화두(話頭. Great question)를 주었다.
그 순간부터 묵언은 시작됐다.
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3/11/09/2003110970260.html
사람에 따라 각기 자아관은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자아관을 꼽으라면
나는 네 가지 차원의 보편적 자아관을 제시한다.
첫째 부정적 자아관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야.’
‘항상 별 볼일 없는 사람이야.’
‘나는 왜 키가 160센티밖에 안 될까?’
‘나는 왜 영어를 잘 못할까?’ 하고
자기를 늘 마이너스적으로 생각하는 자아관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사람은 열릴 운세도 열리지 않는다.
운세가 열리는 법은 간단하다.
부정적인 자아관을 긍정적인 자아관으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무엇이든 마이너스적으로 인식되는 순간,
바로 그 뒤에 ‘그러나’를 붙여버리면 된다.
‘그러나’ 묘약이다.
예를 들어
‘나는 왜 영어를 못할까?’
그러나 ‘굿모닝은 할 수 있지 않아.’
‘나는 하는 일마다 왜 이 모양이야.’
그러나 ‘커피 하나는 잘 타잖아.’ 하고
부정적인 인식이 드는 순간 바로 그 뒤에
‘그러나’를 붙여버리면 부정적인 자아관은
순식간에 긍정적인 자아관으로 바뀌어버린다.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산시비산 수시비수(山是非山 水是非水,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더라)
산산수수(山山水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할 때
마지막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처럼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끝내는 묘하게 현존하고 있는 묘한 있음,
그때의 자아가 바로 묘유적 자아관이다.
반야심경에서는
그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공즉시색 할 때의 색이 바로 묘유적 자아관이다.
부처님 품안 따뜻한 가정 ====== 붓다월드 (buddhaworld.org)
평등한 출발선, 결승선은 어디인가?
출발선에 대한 고민과 함께 결승선의 고민도 필요하다.
경쟁의 승패를 통한 격차가 너무 큰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어지면
이는 다시 출발선의 차이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격차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되도록
적절한 정책 개입이 이뤄져야 한다.
서구 복지국가 시스템의 의미를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며,
결과가 정의로운 사회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기회 평등’, 당신은 누리고 있습니까?. [IDEA2050_017] 출발선이 같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 | by LAB2050 | LAB2050 | Medium
평등과 공평이란 단어들은 우리들 생활 속에서 서로 비슷한 말로 많이 쓰여진다.
그러나 두 단어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린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얼마전 SNS에서 본 그림 두 장을 소개하려 한다.
이 그림들은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아주 명확하게 구분해 정의하고 있다.
www.koreatimes.com/article/20160726/1001321
경쟁국들은 이처럼 정부와 기업이 2인 3각으로
경제 활성화에 올인하고 있는데 우리는 딴판이다.
‘기업=적폐’라는 낡은 도그마에 빠져 얽히고설킨 규제로
기업의 발목을 잡고 선거 표심을 의식해
기업과 노조를 갈라치기하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비틀고 있다.
실제로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이날 내놓은 기업인 인식 조사를 보면 기업 10곳 중 9곳이
우리 사회의 반기업 정서를 직접 느끼고 있어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K산업, 글로벌 타깃 되는데…선거만 보는 정부 (sedaily.com)
English 버젼
What is equity? In the simplest terms,
it means fairness,
which is not necessarily the same thing as equality.
엘리트 교육은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만이
경쟁에 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믿는다.
교육의 평등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는 수준으로 해결된다는 믿음은
교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차별적 요소를 차별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게끔 한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요즘에는 흑인들도 학교 다니는데 차별이 어디 있냐!’고 외치는 이유다.
교육은 개인의 출발선을 맞추는 것만으로 공정성이 보장될 수 없다.
모두가 학교를 다니고,
모두가 같은 과목을 배워서 평가를 받아도
개인의 경쟁력에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변수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
교사의 오늘내일 감정도 다르고
학생의 오전오후 심리도 천차만별이다.
개인을 흔드는 요소는 무수하다.
계층, 성별 등에 따른 세상의 선입견은 둘째 치더라도
가정사, 질병, 주변관계 등이
사람마다 동일한 상황일 수 없으니 흔들림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니 교육 결과는 기회가 균등한들,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규정될 수 없다.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10132051015
‘평등’과 ‘균등’의 차이
그렇다면 ‘균등하게’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선 ‘균등’이란 평등을 의미하지 않고 공평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 해야 한다.
예를 들면
평등은 아이나 어른이나 동일하게 같 은 양의 먹을 것을 주는 것인데,
공평은 아이에게는 아이에게 필요한 만큼의 먹을 것을 주고
어른에게는 어른에게 필요 한 만큼의 먹을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렇게 중요한 이념적 문제를 소홀히 다루고 있으며
오로지 평등을 지고지선의 가치로 보는 정치나 정부 등
권력기관의 레토릭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
www.m-economynews.com/mobile/article.html?no=25439
천(陳) 교수는 역경을 강의하면서 주역이 중국철학의 뿌리이며,
공자가 죽을 때까지도 붙들고 있었던 책이라고 하더군요.
강의 내용이 이해가 안 되었지만,
난해한 주역의 전체를 흐르는 핵심은
‘궁즉통(窮則通)’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너무도 잘 아는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주역을 대표하는 줄 몰랐습니다
어떤 일이나 처한 상황이
궁극(막바지, 가장 끝)에 이르면 변(變)하고(窮則變,궁즉변),
상황이 변하면 길이 열리며(變則通,변즉통),
그렇게 통하면 오래 간다(通則久,통즉구)는 설명이었습니다.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이 아홉 글자는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살다 보면 100% 확신이 들었는데 생각지 못한 암초에 부딪히기도 하고,
반대로 어렵던 일이 수월하게 풀리기도 합니다.
비록 수월한 일이라 해도 매일 매일은 긴장과 고난의 여정이지요.
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14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을 때,
창피하죠.
그런데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바로잡으며 깨달음을 얻을 때,
참 보람찹니다.
제겐 ‘궁즉통(窮則變)’이라는 말이 그랬습니다.
‘궁하면 곧 통한다’,
즉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사람 죽으란 법 없다’는 정도의 의미로 알고 있었죠.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알고 보니
‘궁’자와 ‘통’자 사이에는 글자가 하나 숨어있더라고요.
바로 ‘변할 변(變)’자 입니다.
news.joins.com/article/19463782
소크라데스 ^ 無知의 知 - 공자 ^ 不之爲不知(부지위부지) - 세상이 와 이카노! - 狗腎도 모르민서! (tistory.com)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였다.
(I know that I know nothing)
Say's Law
판로설(販路說) 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장 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 1767~1832)가
자신의 저서에서 펼친 주장으로, 흔히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Supply creates its own demand)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與 '소급은 헌법 위배'라더니…보선 앞두고 지지율 하락에 초강수 (sedaily.com)
두 개의 비슷한 그림이 있다.
두 개의 그림엔
담벼락 넘어로 벌어지는 야구 경기를 구경하려는 가족 세 명이 보인다.
한명은 아빠로 보이고 그리고 6학년쯤 돼보이는 큰아들,
마지막으로 유치원쯤으로 보이는 막내아들이
나란히 서서 야구 구경을 하려 한다.
당연히 이 세 명은 키 차이가 나고
담벼락은 키가 큰 아버지 빼고는
아들 둘의 시야를 막고 있다.
자.
이 두 개의 그림 중의 어느 것이 평등을 이야기하고
어느 것이 공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첫번째 그림,
세 명 모두 상자 하나 위에 올라간 그림은 평등을 이야기한다.
세 명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각각 개인의 차이엔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결과는 각각 다르다.
두번째 그림은 공평을 이야기한다.
개인의 차이에 맞춰 주어지는 기회가 달라진다.
얼핏보면 균등해 보이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러나 후에 모두가 같은 결과물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난 이런 의미에서 공평이란 말이 평등이란 말보다 더 좋다.
평등은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라는 허울 좋은 말로
또 다른 불평등을 만드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youtu.be/8cNz9awcVqg?list=RD8cNz9awcVqg
흙수저 - 끊어진 希望^사다리 - (+)자금 출처 조사 - 곰곰히 생각하니! - 너의 希望은 무엇! - 태산이 높다 하되!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