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전염병이자 전염병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는 ‘천연두’는
지금은 완전히 정복되어 사라진 질병으로 분류되지만
창궐 당시, 세계적으로 3억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고열과 두통, 전신 발진 등의 증상이 수반되고 간신히 살아남아도
얼굴에 흉한 곰보 자국을 남기는 병으로 악명 높았죠.
서양 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많은 환자가 발생했는데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서도 천연두에 의한 피해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부터 20세기까지 몇 번의 대유행기를 반복하며
인류의 재앙으로 여겨졌던 천연두가 지금은 어떻게 사라지게 된 것일까요?
제너가 우두 접종법을 발견하기 이전에도
동양에서는 비슷한 면역법이 조금씩 시험되고 있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진물을 건강한 사람의 코에 묻혀 균을 침입시킨 후
면역성을 생기게 하는 ‘인두법’(人痘法)이 실험 중이었는데요.
물론 이 방법은
안전성이 떨어져 제너의 우두법처럼 널리 퍼지지는 못했습니다.
이후에는 천연두 환자의 옷을 입거나
고름의 딱지를 간 가루를 들이마시는 등의 방법들도 생겨나게 됩니다.
정조 시대 실학자 정약용은 홍역 치료법을 쓴 저술서 ‘마과회통(麻科會通)’에서
당시 중국에 소개되고 있던 제너의 우두법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 시기에 정약용은
이미 우두를 실험적으로 실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9세기 초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평안도, 황해도에서 어린아이의 팔에 침으로 작은 상처를 만든 후
우두즙을 닿게하면 예방 효과가 있고
강원도에서는 이미 팔에 접종하는 방식의
우두종법이 실시되고 있다는 소문이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는 당시 천주교 관계자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우두법을 실시하던 것을 듣고 우리나라에까지 퍼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러나 후의 서양문물, 양의학 탄압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우두법은 더 이상 뿌리내리지 못하는 현실을 맞게 됩니다.
1867년, 우리나라에도 종두법이 보급되어
수많은 천연두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던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의 에드워드 제너라 불리우는
조선 말기의 학자 지석영의 노력 덕분이었죠.
그는 스승인 박영선으로부터
일본의 우두법을 전해듣고, 치료법이 적힌 <종두귀감>이라는 책을 보며
스스로 천연두 치료에 대한 기술을 배워 나갑니다.
당시 부산에서 개원한 일본 병원을 찾아가
실습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우두법에 대한 관심은 컸는데요.
이후 처가에 들러 장인의 허가를 받아
2살짜리 처남에게 우두를 시술하고 실험에 성공하게 됩니다.
바로 한국 최초의 우두 성공 사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얻어온 우두약인 두묘(痘苗)가 떨어지자
그는 직접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보다 본격적으로 우두법에 대해 연구합니다.
하지만
우두를 배워 조선에 보급시키는 것을 탐탁치 않아하던
일본군에게 여러 차례 방해를 받기도 했는데요.
다행히 사태가 진정되고
전라도 어사인 박영교의 부탁을 받아 전주에 최초로 우두국을 설치하게 됩니다.
우두법 기술이 정식으로 인정받고
정부 사업으로 확대되는 첫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우두신설’이라는 최초의 서양의학서를 펴내고
국가적으로 종두규칙을 제정케 해
전국 어린이들의 우두 접종을 의무로 만들어 많은 생명을 지키는 데에도 한 몫을 했습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제너의 우두법을 최초로 보급하여 의학계에 큰 공을 남긴 지석영은
1세기만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전염병인 천연두를 완전히 물리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탄압, 종교적 미신 등 때문에 우두법을 정착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간 지석영은
우리나라 개화기의 진정한 과학자이자 선구자입니다.
blog.naver.com/basic_science/220658265166
아즈텍인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들 역시 빙하기 때 베링해협을 건너
아시아에서 넘어온 몽골리안들의 후손인 것은 분명하다.
이 몽골리안들의 후손들은
북미와 남미 곳곳에서 대부분 부족 공동체를 이루고
수렵과 채집단계의 경제를 영위하였다.
초기 농경단계에 들어간 집단들도 있었지만
이는 보충수단이었을 뿐
아메리카 원주민 대부분은 수렵과 채집으로 대변되는 삶을 살았다.
소년시절의 코르테스는
새로이 생겨난 에스파냐의 후원으로 아메리카를 탐험하고 돌아온 콜롬버스와
다른 탐험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을 그만두었고
고향에 돌아와 새로이 발견된 대륙으로 건너갈 기회만 노렸다.
그러다
먼 친척인 히스파니올라(현재의 아이티)총독인 니콜라스 오반도 카체레스의 후원을 얻어
1504년에 히스파니올라로 건너간다.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한 18세의 코르테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원(莊園)을 얻음과 함께 조그마한 도시의 관리가 된다.
이어 1506년부터는
당시 총독인 오반도를 따라 히스파니올라의 미개척 지역을 정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면서 전쟁경험과 행정경험을 동시에 쌓게 된다.
에스파냐의 아즈텍 정복 전쟁(1) (naver.com)
“그들의 사슴이 병사들을 태우고 앞으로 나왔다.
병사들은 면갑(綿甲)을 입었고
손에는 가죽 방패와 쇠로 된 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검(劍)은 사슴들의 말에 걸려 있었다 (…)
이 사슴들이 뛸 때는 큰 소리가 난다.
마치 돌덩이의 비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
발굽으로 땅을 딛으면 땅에 큰 상처와 구덩이가 생긴다.
발굽이 닿는 곳마다 땅이 마구 갈라진다...”
에스파냐의 아즈텍 정복 전쟁(2) (naver.com)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10141619001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바다 구멍인
‘그레이트 블루홀’의 각 침전물 층은
수세기에 걸친 기후 변화 과정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연구팀은
‘기록의 보고’와도 같은 블루홀 속 침전물을 조사하여
800~900년 사이 극심한 가뭄으로
강수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시기가 마야문명의 쇠퇴기와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 결과는 저널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소개됐다.
이처럼 마야문명의 멸망이 기상이변 탓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면,
지구 환경을 급속하게 변화시키고 있는
현재의 인간 활동도 마야문명 멸망을 재연시킬 수 있다.
요즘 지속되는 폭염이 던지는 이상기후
묵시록이 그 경고일지 모른다.
m.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521100008
역사를 바꾼 질병 ^ 천연두(2) - 南美 잉카제국 멸망 - 우두(牛痘) 백신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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