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甲申政變) 또는 갑신혁명(甲申革命)은
1884년 12월 4일(음^10.7)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이다.
진압 후, 갑신난 또는 갑신전란으로 불리다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이를 '갑신혁명당의 난'(甲申革命黨의 亂)이라 불렀다.
ko.wikipedia.org/wiki/%EA%B0%91%EC%8B%A0%EC%A0%95%EB%B3%80
구한말의 반일과 친일은 지금 잣대로만은 평가하기 어렵다.
당시 조선을 근대화하고자 했던 개화파 전략가들은,
신흥 강국 일본을 이용하려는 ‘전략적 친일’
혹은 ‘용일(用日)’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이 전략이 성공하는 관건은 두 가지였다.
개화파 세력이 일치단결하여 강한 정치력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일본이 침략 야욕을 전략적으로 자제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이뤄졌어도 개화파는 성공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개화파는 단결하지 못했고,
일본은 개화파를 배신했다.
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1/02/02/Y6PY6WM25FEEDOU4BEF2R32VTE/
1894년 7월 초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일본의 지원에 의해 추진된 조선의 개혁 운동.
정치, 경제, 군사, 법률, 사회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넓은 범위의 개혁이었다.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불리기도 하며 총 2차례에 걸쳐 개혁이 이뤄진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추진된 제 3차 개혁은
을미개혁으로 따로 분류한다.
일단 '갑오년'은 아니니까.
삼국간섭을 전후하여 일어났다.
namu.wiki/w/%EA%B0%91%EC%98%A4%EA%B0%9C%ED%98%81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고
청나라는 1894년 5월 5일 군대를 아산만에 파병한다.
이에 질세라 일본은
텐진조약에 규정된 파병통보가 없었음을 근거로 5월 7일 일본군도 파병한다.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자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5월 8일 화약(和約)을 맺은 다음 청·일 양국에 퇴군을 요구 했으나
청과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오히려 다음날인 5월 9일 2차 본진을 인천으로 파병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에게 개혁을 권고하고 있었고
7월 여러차례 개혁안을 조선 정부에게 보내왔다.
한편 조선 정부는 6월 11일 교정청을 설치하고
자체적으로 개혁을 시도하려 했기에 이를 거부하였다.
일본은 6월 21일 새벽에 기습을 감행하여 전투 끝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서울 내의 조선군 병영들도 공격하여 이들을 제압하고
무기, 탄약을 모두 빼앗아 사실상 수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대원군을 불러들여 내부쿠테타로 위장한다.
이후 6월 23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청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120餘年前 조선 반도 外勢 각축戰(2) - 靑日戰爭(1894) - 시모노세끼 조약(1995)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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