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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허생전 - 소설^토정비결(下-31)

지함은 송도를 떠나 한양으로 가는 중에도

임꺽정에 대한 생각에만 골몰했다.

송도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도 지함은 하늘을 거스를 방법이 없을까

온갖 술수를 다 짚어 재보았지만

마땅히 쓸 만한 수를 찾아내지 못했다.

천기를 거스르는 것,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왜 하늘은 행사만 할 뿐 대화를 나눌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인가?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나라의 운명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하늘은 왜 그 주체인 인간의 의견은 한번도 묻지 않는 것일까?
지함은 고개를 떨구고 땅바닥을 바라보며 힘없이 걸었다.
그가 임꺽정에 대한 예의로,

그렇다 그것은 예의였다,

병법에 뛰어난 전우치를 군사로 천거하여

임꺽정을 보좌하라고 일러놓기는 했다.

그렇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천기를 거스를 능력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사람은 하늘의 뜻을 알 수는 있어도 그 뜻을
바꿀 능력은 없기 때문이었다.

전우치가 아무리 사람이 싸우는 병법에는 능하다 하더라도

하늘이 개입하여 움직이는 비밀스런 계략에는

당해낼 수 없을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임꺽정은 앞도 보지 않고 돌진만 하는 성격 아닌가.
임꺽정은 성미가 워낙 불 같아서 현실과 거리가 너무 멀고,

아무 관련도 없어 보이는 미래쯤은 상관도 안 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런 틈새를 놓치지 않고 어느 시점엔가 불쑥 끼어들 것이다.
또 한 가지 지함의 심기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이 있었다.
임꺽정이 거사를 일으킨 해는 기미년(己未年,1559).

다음해는 경신년(庚申年, 1560).

천간(天干) 경년(庚年). 바로 조선 민족에겐 마(魔)와 같은 해였다.
조선은 본래 축인간방(丑寅艮方)에 있는 갑목국(甲木國)이다.

그래서 세세 년년에 십 년마다 한번씩 경년(庚年)을 만나면

국기(國基)가 시끄러워졌다.

왜냐하면 갑경(甲庚)은 칠살편관(七殺偏官)으로 금극목(金克木)하니

충(沖)이 되는 천기의 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지함의 머리 속에서는 경(庚)의 해가 주욱 흘러갔다.
가깝게는 경오년(庚午年, 1510년)에 삼포왜란이,
경진년(庚辰年, 1520년)에는 극심한 수해가 있었다.
경자년(庚子年, 1540년)에는 전라도에 민란이 일어나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몹시 할퀴고 지나갔다.
멀리는 이방원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 끝에 정권을
탈취한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도 경진년(庚辰年,1400년)이었다.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여 고려의 뿌리를 뽑아내고자

한양으로 천도한 경오년(庚午年,1390년)도 그렇다.
그런 때문인지 임꺽정은 거사 당해에 송도를 비롯한 북도(北道)를 휩쓸고,

작년 경신년에는 경금(庚金), 신금(申金)이 겹쳐 한양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신유년(辛酉年, 1561)인

올해 약금(弱金)인 신(辛)과 유(酉)가 와서 기세가 꺾여가고 있고,
임술년(壬戌年, 1562)인 내년에는 임수(壬水)가 수생목(水生木)하여

갑목(甲木) 국운을 도와 임꺽정은 종말을 맞게 될 터였다.
"형님, 지금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송도를 떠나면서부터 지함이 워낙 입을 굳게 다물고 있자

정휴가 계속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금기(金氣)를 모으러 가네."
"그래서 오랑캐의 솥단지를 벗지 않으십니까?

더운 날씨에."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햇볕은 한여름 못지 않게 따가웠다.

내리쬐는 햇살에 솥단지가 달구어졌는지

지함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땀은 비오듯이 흘러내리는데,

지함은 솥단지를 벗지 않았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쑥덕거리면서 지나갔다.
필시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지함은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땀을 훔치면서 한양길을 밟아나갔다.
"형님,

금기를 모아서 무엇에 쓰시게요?"
"실은, 돈을 모을 생각이네."
"예? 돈은 벌어서 어디에 쓰시게요?"
"돈이 기 아닌가?

백성에게 직접 가 닿는 생기(生氣)는 곧 돈이네.

내가 임꺽정의 일로 마음이 불편하긴 하네만

그건 그가 역천(逆天)을 했으니 그런 것이고,

나는 하늘의 이치대로 할 것이네."
"과연 금기로 다스려질 일입니까?"
"그건 두고 보세."
세 사람은 더위를 피해 길가의 주막에 잠시 들어가
시원한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일행이 다리를 뻗고 그늘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더벅머리 총각이 헐레벌떡 주막으로 달려들어오더니
지함을 보고는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무슨 일이오?"
지함이 총각을 일으켜세우면서 묻자,

총각은 지함이 쓰고 있는 솥단지를 달라고 애원했다.

"아버님이 병석에 누운 지 삼 년이 지났건만 차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 아버님 꿈에 솥단지를 쓰고 지나가는 사람이 주막거리에 들를 터이니,

그 솥에다 밤과 대추를 넣은 약밥을 지어 먹으면

효험이 있으리라고 누가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믿지 못하고 있는데,

선비님이 마침 주막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염치 불구 달려왔습니다."
그러면서 총각은 가지고 온 새 갓을 지함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지함이 껄껄 웃으면서 솥단지를 벗어 총각에게 건네주었다.
"부친의 병은 틀림없이 낫게 되네.

서둘러 가지고 가서 약밥을 지어 드리게."
지함은 총각이 가져온 갓을 쓰고는 다시 한양길에 올랐다.
지함 일행이 한양에 이른 것은 벌써 더위가 한풀
꺾여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 때였다.
한가위가 얼마 남지 않아서 한양으로 이르는 길가마다
누렇게 넘실대는 나락이 풍성했다.

임꺽정에게는 군량으로 쓸 양식이 잘 익어가니 반가울 테고,
조정에서는 조정대로 몇 년 동안 기근과 질병이 쓸고 지나간 뒤에

찾아온 풍년이니 반가울 것이었다.


지번의 가회동 집은 지함의 처와 아들 산휘가 지키고 있었다.

형 지번은 일가를 이끌고 임지로 떠나 있었다.
지함은 오랜만에 부인 이 씨를 따뜻하게 대했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이불 속에서 지낸 날을 손꼽으면 몇 날 되지 않았다.

지함은 그걸 속죄라도 하듯 부지런히 집을 고치고

아들 산휘를 말동무 삼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지함은 며칠 동안 방안에만 틀어박혀

일체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남궁두도 조용한 방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책조차 손에 잡히지 않는 정휴만이
심심한 마음에 소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정휴는 한강 넘어

봉은사로 몇 차례 바람을 쐬고 오기도 했다.

절은 낙엽이 굴러다녀도 쓸어줄 사미승 하나 없었다.

늙은 중 몇몇이 요사채 마루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경전을 외는 건지

염불을 하는 건지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을을 알리는 소슬바람이 서쪽에서부터 조금씩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그제서야 지함은 방에서 나와 남대문 거리를 몇 차례 나갔다 왔다.

그러면서도 정휴와 남궁두에게 동행하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지함은 거의 매일 남대문 거리로 나가 하루종일 있다가 돌아오면서도
무엇 하나 사들고 오는 법이 없었다.
정휴나 남궁두는 지함이 하는 일이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는 않았다.

정휴는

지함이 남대문을 나다니는 동안 고려 말 진각(眞覺)국사 혜심(慧諶)이 편찬한

<선문염송>을 펼쳐놓고 선사들의 옛 시절을 감상하였고,

남궁두는 풍수지리서인 <청오경(靑烏經)>을 꺼내놓고 파고들었다.
아무 일도 없이 무료한 하루하루가 지난 십수 일 뒤,

드디어 지함이 괴나리 봇짐을 쌌다.

그러나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설명은 없었다.

정휴와 남궁두는 지함이 하는 양을 보고 따라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일 떠나세."
지함이 두 사람에게도 짐을 꾸리라고 했다.
"형님, 지금 떠나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임꺽정이 송도까지 완전히 점령했다네."
"추이를 더 보시지요."
"그런 뒤에는 늦네.

양기가 가장 승한 하지에 겨울의 음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음기가 가장 승한 동지에 여름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네."
"그러면 임꺽정은 패망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까?"
"두고 보세."
가을 바람이 제법 쌀쌀해져,

간혹 찬 북풍이 밀려오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큰사랑과 내별당 사이에 서 있는

나무 몇 그루가 붉고 누런 잎을 우수수 떨구었다.
큰사랑의 문마다 붉은 단풍빛이 번져올랐다.
"그동안 여러 모로 생각을 해보았네.

임꺽정,
송도를 떠나오면서 내내 그가 머지 않아

망나니의 칼을 받고야 말리라는 예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단 말일세.

그이 한 사람이 죽고 사는 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소동을 피우는 것은 아닐세.

이 나라 백성을 질병과 가난과 무지에서 건져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떠나버릴 민중의 영웅호걸이 아쉬워서 그렇다네.
그는 가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이어야 옳지 않겠는가.

조선 백성은 조선 백성이 살려내야 한다네.
일찍이 북창 선생께서 이웃 중국과 일본을 드나들면서
외국의 문물을 많이 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 끝에 '불쌍한 것은 조선 백성일 뿐'이라고 하셨다네.
질병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의원은 보이지 않고

탐관오리가 남아 때 아닌 주색잡기나 즐기고,
관리들은 훈구파니 사림파니 하면서 당파 싸움에만 몰두해

백성이 굶어죽는지 얼어죽는지 거들떠보지도 않네.
조정 대신이라는 사람들은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니

이발기발(理發氣發)이니
하면서 정사는 돌보지 않고 공론만 일삼고 있네.
이토록 불쌍한 백성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양반이란 사람들은

저희만 고고하고 잘 나서 평민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천민 대하기를 짐승처럼 다루니...

양반이라고 해서 신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닐세.

힘께나 쓰는 자의 눈에 나면 오늘까지 양반이었던 사람도

내일에는 뉘집 종이 되어 삽사리 신세가 되고 만다네."
정휴가 고개를 뚝 떨구면서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정휴의 가슴에 젖어 있던 고뇌를 지함이 대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임꺽정이 앞장서서 뜯어고치겠다고

목숨 걸고 일어났던 것인데 시운(時運)이 좋지 않네.

뿐만 아니라

하늘의 도수(度數)에도 나와 있질 않으니
도대체 하늘은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하늘이 하는 일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나는 하늘이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네.
내 공부가 하늘의 높은 뜻을 알기에는 부족한 듯하이.

어쨌거나 나는 저 불공평한 하늘을 향해 벌떡 일어서기로 했다네.

내게서 친구를 앗아가고,
사랑하는 이도 앗아가는 운명을 짜놓은

저 가혹하고 냉엄한 하늘을 크게 거스르기로 했네."
정휴와 남궁두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문 밖에서는 벌써 열세 살이 된 아들 산휘가

노래를 부르면서 지함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어나고 몇 해 뒤에나 겨우 아버지 얼굴을 대하고,

몇 해 걸러 한번씩 찾아오는 아버지였건만 산휘는 무던히도 지함을 따랐다.
산휘는 큰사랑 옆 돌화단을 오르내리며

노랗게 물든 버드나무잎을 주르르 훑어 땅바닥에 흩뿌렸다.
"형님, 그래서 어떻게 일을 도모하실 겁니까?"
정휴가 궁금하여 물었다.

지함은 천정을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신에 찬 얼굴이었다.
"집에 돌아온 후 천문도 살피고,

앞으로 이삼 년간 국운을 쭉 뽑아보니 할 만한 일이 하나 생겼다네.
내가 하늘을 직접 쓸 것이네."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직접 쓰시다니요?"
남궁두가 물었다.

그러자 지함은 나지막한 소리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마치 역적 모의를 하는 두목이 계책을 발표하는 것처럼

은밀하고 조심스런 목소리였다.
"천기는 가슴 속에만 묻어두어야지 입으로 발설하면
그만 힘을 잃고 만다네.

내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고,

내가 하라는 대로 나를 도와주기만 하면 되네.

자네들이 저절로 내 뜻을 훔치게 되더라도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말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예. 명심하겠습니다."
정휴와 남궁두는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정휴는 지함의 계획이 뭔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지함,

그가 꾀하는 일은 자신의 명리를 위한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부귀도 아니었다.

임꺽정,
그가 하던 일을 잇는다고 했을 때

벌써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함의 발걸음은 수원을 지나 용인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들 산휘의 부름도 뒤돌아보지 않고,

멀리서 눈물 훔치는 부인 이 씨도
돌아보지 않고 지함은 그저 구름이 흘러가듯 한양을 빠져나갔다.
정휴는 지함이 안 진사라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리라고 짐작했다.

정휴는 한번도 안 진사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지함에게서 자주 얘기를 들어 안 진사란 이름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지함은 안 진사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상공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곤 했다.
"상공업은 백성의 피를 힘차게 돌게 할 수 있는 핏줄일세.

피가 잘 돌아야 사람도 건강하듯이 나라 살림도

백성의 살림도 상공업이 번성해야 튼튼해지는 것이라네."
용인으로 가는 길의 들판에서는 농민들이

가을 추수로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었다.

논두렁마다 볏단이 줄지어 쌓이고,

어린아이에서부터 허리가 꼬부라진 늙은이까지 들에 나서서

벼포기를 붙들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가을철에는 죽은 송장도 꿈지럭한다더니 정말 바쁜 모양이었다.
해마다 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먹고,

다시 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먹고,

그러면서 나이를 먹고,

때가 되면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가는 백성들.

정휴는 지칠 줄 모르고 서로 맞서는 하늘과 인간의 싸움이

저토록 치열한 것인가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들녘을 지났다.

안 진사는 반색을 하며 지함 일행을 맞이했다.

10년 만의 해후였다.
사랑에 앉자마자 안 진사는 지함을 붙들고 하소연부터 했다.

정휴와 남궁두는 안 진사와 지함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여보게,

내가 더 큰부자는 되었지만 골칫거리가 하나 생겼다네.

군수고 목사고

수원, 용인, 안성, 이천 등지로 내려오는 벼슬아치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어야 한다네.

이 자들이 내 피를 빨아먹고 있지.
바로 종양일세.

피가 잘 흘러가다가 이 자들만 만나면 뭉쳐서는 구린내 나도록 썩어버리니

이를 종양이라고 아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짜버리십시오."
"그랬으면 오죽 좋겠나.

그러다가는 나까지 요절난다네."
"정히 심하게 구는 자가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직은 그렇게 심하지 않으니 도울 것까지는 없네.
아직은 크게 곪지 않았으나 앞으로는 나도 모를 일이로세.

요즈음에는 나도 사병을 기르고 있다네.
워낙 재산이 불어나니까 나도 이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네.

돈으로 따지자면 수원이라도 사겠네."
"큰일날 말씀,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을 하시면 큰일납니다.

아직 상공업의 중요성을 모르는 조정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당장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고 오랏줄을 던질 것입니다."
지함이 팔을 내저으며 안 진사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 나서 지함은 나지막한 소리로 안 진사에게 일렀다.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차제에 짚어둘 말씀이 있습니다.

안 진사님께서는  을축생(乙丑生)이시고,
무인원(戊寅月) 무신일(戊申日) 계해시(癸亥時)이니
제가 태어난 다음해 즉 무인년(戊寅年)부터

서서히 운이 트기 시작하여 이제는 큰부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용신(用神)을 극하는 목화(木火)의 해가 오면

크게 몸을 구속할 일이 있을 터인즉 미리 알고나 계십시오.

인사(人事)란 천사(天事).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늘의 뜻이 크게 움직이므로
뜻대로 풀리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운명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해도 내가 짓고,

내가 거두는 것이니 누굴 탓하고 누굴 부러워하겠습니까?"
안 진사는 점잖게 수염을 쓸어올리면서 짐짓 웃음을 짓긴 했으나

심기는 편치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지함이 하는 얘기이므로 소홀히 흘려들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제가 필요한 데가 있어 돈을 빌리러 왔습니다."
"돈을?

얼마가 필요하길래 빌린다는 소릴 다 하는가?

웬만하면 내가 그냥 줌세."
"좀 큽니다.

십만 냥이 필요합니다."
"십만 냥이나?

자네 십만 냥이 얼마나 큰 돈인 줄 알고나 하는 말인가?"
안 진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놀라기는 정휴와 남궁두도 마찬가지였다.
지함은 안 진사에게 임꺽정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돈의 용도를 설명했다.
"제가 구월산 임꺽정을 압니다."
"난리를 일으켰다는 그 산도적 말인가?"
"진사 어른께서 가리키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긴 합니다만 산도적만은 아니올시다.

탐관과 오리를 내쫓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떨쳐 일어난 사람입니다.

굳이 도둑 적(賊)자를 붙여야 한다면 의적(義賊)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허이,

큰일날 소리 그만 두게.

자네야말로 큰일날 얘기를 막 하는구먼,

허허허."
"그렇지만 그는 종국에 가서 죽음을 받습니다.
초반에 그를 따르던 백성들이

돈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임꺽정조차 몰라보게 되고 맙니다.

백성들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그걸 내주면 당장에는 좋아하지만 욕심이 점점 커져서

임꺽정에게 더 큰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임꺽정은 끝내 그걸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그의 난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관군이 강해서가 아니라

백성이 약해서입니다."
"당연하지.

난이 성공할 리가 있겠나?"
"그러나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난을 일으키겠습니다."
"무슨 소리?

그래,

난을 일으킬 자금으로 쓰자고 십만 냥을 달라는 겐가?"
안 진사도, 정휴도, 남궁두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함이 난을 일으키겠다니 도대체 상상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설마 하면서도

안 진사와 정휴,  남궁두는 지함의 대답을 기다리며 잔뜩 긴장하였다.
"난리라고 다 같은 난리가 아닙니다.

저는 백성들 가슴 속에 불을 한번 질러볼까 합니다.

십만 냥으로 백성들 가슴팍에 시원시원한 물길을 내줄 요량입니다."
"점점 모를 소리..."
안 진사가 눈을 꿈벅거렸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돈과 재물을 좀 모으겠다는 것입니다.

그걸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팔자를 고쳐줄 작정입니다."
"돈 준다고 다 팔자가 고쳐지나?"
"물꼬를 터주겠다는 것이지요.

제가 무슨 재주로 마른 하늘에서 빗물을 받을 것이며

씨앗도 뿌리지 않고 추수를 하겠습니까?

진사님께서 빌려 주시는 십만 냥은

마른 하늘에 비구름이 몰려들도록 하는 데 쓸 것입니다.

저는 순리대로 할 것입니다.

순리를 거역하는 것은 처음에는 아무리 좋은 일로 보여도
결국은 좋은 결과가 나오질 않습니다."
정휴와 남궁두는 그제서야

지함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헤아릴 수 있었다.

안타깝게 임꺽정을 바라보던 그가 할 일은 뻔했다.

지함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크고 지극했던 것이다.
"탐관오리의 재물을 원래 있던 자리,

제자리에 가져다 놓겠다는 것입니다.

몽둥이나 칼을 들고 빼앗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재물을 들고 오도록 할 것입니다.

양반들이 쓰는 물건만으로 장난을 해볼까 합니다."
"장난?"
"장난이라면 장난이지만 제게는 커다란 모험이올시다.

의술 경험이 없는 제가 큰의원이 되어
우리나라 곳곳에 맺혀 있는 종양을 터뜨려

피가 잘 돌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즉 백성들에게서 혈세를 거두어 뭉쳐둔 돈,

국록을 사기로 차지해 빼앗은 돈을 모조리 거두어

다시 강물처럼 시원하게 흐르도록 해줄 참입니다.

그저 돈이 제대로 잘 돌도록 해주는 것이
백성을 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건 맞는 말일세.

탐관오리들은 햇빛을 가려 저 혼자만 쬐려 하고,

냇물을 막아 제 논에만 물을 대려고 하고 있네.

이처럼 탐관오리의 손갈퀴가 크고 넓다네.

그러니 상공업이 일어나야 하는 것일세.
탐관오리가 막은 햇빛이 온 누리에 고루고루 퍼지고,
그들이 따돌린 물길이 제 줄기를 찾아 흘러갈 수 있도록 해야 하네."
"그렇습니다.

상공업이 제대로 일어나야 억울하고 배고픈 백성이 줄어듭니다."
"그렇지.

그래야 백성들이 일한 만큼 차지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어디 그런다고 다 잘 살 리야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제가 더 자세하게 돈을 쓸 요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함은 안 진사에게 자신의 계획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난리를 일으키겠다던 말처럼 그는 비장하게 말했다.
물론 그것도 난리의 한 종류였다.

반드시 창칼을 들고 날뛰어야 난은 아닌 것이다.

역질이 크게 돌거나 태풍이 한바탕 휘몰아치는 것도 난리로 볼 수 있고,
해마다 계속되는 흉년도 난리인 것이다.

가뭄이나 홍수는 하늘이 부리는 조화로

인간의 창칼로는 막아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함은 한양으로 흘러들어가는 한강물을 막아

다른 곳으로 물길을 트는 것과 다름없는 엄청난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강물을 막는다면,

그러면 그 강물을 어디로 흐르게 하겠다는 것인가?

백성들이 사는 곳으로,

작은 논 마지기로,

농부들이 목숨을 의지하고 사는 땅으로 흘려보내려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쓰는 물산은 안 진사 어른께서 하시는 흐름대로 두고,

오직 탐관오리나 양반들이 좋아하고 아끼는

사치스런 물산만을 막을 작정입니다.

이것을 난이라고 눈치챌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므로..."
"그렇긴 하네만 나는 흐름을 막는 장사는 해보지 않았네.

오히려 내가 하는 것은 뭉친 것을 풀어주고,
한 지역에서 모자라는 물산을 다른 지역에서 모아 보내주는 정도이네.

자네가 하겠다는 상법과 근본이 서로 다르지.

허나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하겠다니,

또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니 내 기꺼이 도와줌세."
안 진사는 그 자리에서 십만 냥을 마련해 내주었다.
안 진사가 부자이긴 했으나

십만 냥은 안 진사에게도 대단한 거금이었다.
지함의 말을 들으면서 정휴는 의문이 생겼다.
이지함은 분명 물산이 어떻게 흘러다니고 있는지
소상히 파악해 놓고 있었다.

돈의 흐름쯤은 앉아서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쯤 남대문쪽에 백만 냥이 모여 있을 거라는 둥,

아니면 제주도 안에는 통틀어 삼만 냥밖에 돈이 없다는 둥

물산과 돈의 흐름을 훤히 꿰고 있었다.

경제라면 지함은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안 진사의 돈을 빌리지 않아도

지함은 얼마든지 돈줄기를 찾아내

심을 박아 돈을 빨아올릴 수 있었다.
십만 냥이 적은 돈은 아니긴 하지만,

지함의 능력이라면 십만 냥을 모으는데

일 년도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지함은 굳이 안 진사에게 와서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정휴의 궁금증은 얼마 후에 풀렸다.

그것을 따로 묻자 지함이 웃으면서 알려주었던 것이다.

지함은 아무 데에나 심을 박고

돈을 빨아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휴의 머리 속으로 <홍연진결>을 짓던 화담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형님, 화담 선생님이 부촉하신 말씀이 있었지요?"
"들켰구먼.

자네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네.

자네 생각대로 난 화담 선생님의 뜻에 따라 백성을 위한 책을 쓰겠네."
"그렇다면 책을 쓰셔야지 왜 자꾸 돌아다니십니까?
벌써 화담 선생님과 이별하시고도 몇 해 동안이나 주유를 하셨잖습니까?"
"그거야 미진한 데도 많고,

안 가본 데가 있으니 부지런히 보고 들으려고 그랬던 것일세."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책을 쓰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네.

내가 아직 젊으니 더 알아볼 일이 있고...

이 일도 다 화담 선생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니 걱정 말게나."
"그래서 장사를 다니면서 민심을 살피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시장 바닥만큼 민심이 철철 넘쳐흐르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나중에는 내가 모은 물산을 삼개나루로 가지고 가서

팔도에서 모인 장사꾼들을 두루 만날 것일세."
"삼개나루에서요?"
"삼개나루라면 팔도의 배가 다 드나드는 곳이고
물산이 모두 모이는 곳일세.

그런 곳에는 갖가지 운명을 가진 사람이 몰려 있을 테고,

그곳이 민심을 살피는 데 아주 좋은 장소라네."
"형님, 벌써 거기까지 보고 계시는군요.

저는 그저 임꺽정의 흉내나 내시려나보다 하고 걱정했는데..."
"허허허. 미안허이."
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받아든 지함은 우선 안 진사의 창고를 하나 빌었다.

그러고는 안성과 용인에서 나는

유기와 대추, 밤, 배를 모조리 사들였다.

한결같이 아주 실하고 좋은 일등품만을 샀다.

지함은 그것을 창고에 재워두고는 길을 떠났다.
대추와 밤이라면 젯상에 주로 오르는 것으로

가난한 백성들이야

구경하는 것으로도 족할 만큼 귀한 물산이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잔칫상을 차려도 그렇고,

젯상을 차릴 때도 꼭 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추석이 지난 시기였다.

지금 당장은 별 문제가 없으나
설날이나 대보름이 되면

품귀 현상이 일어 값이 껑충 뛸 것은 불문가지였다.
안 진사는 지함의 의도를 대강 알아채긴 했으나

규모가 너무 커서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