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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박수 두무지 - 소설^토정비결(下-29)

"그 다음에는 어디를 가셨습니까?"

정휴가 그 다음의 행적을 재촉했다.
"깜짝 놀랄 인물을 만났네.

자네도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느끼는 바가 많을 것일세.

아울러 내가 지금 왜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고..."
지함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지함 일행은 서설이 바람에 날리는 무천(無天)재를 넘어 개마고원에 올랐다.

백두산 남서쪽,

함경도의 갑산(甲山)에 머리를 두고

평안도의 강계(江界)에 다리를 뻗은 거대한 산 개마고원.

높은 데는 2천 미터,

낮은 곳도 1천 미터가 넘는 개마고원은

사방 2천 리나 되는 엄청나게 덩치가 큰 산이었다.
개마고원에는 아스라한 지평선이 진눈깨비에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 개마고원에서도 우뚝 솟은 천지봉(天地峰) 밑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우우우···우우···"
절규하는 목소리가 봉우리쪽에서 흘러내려왔다.
바람소리가 워낙 거세서 무슨 소린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하늘과 맞붙을 듯한 흐린 날씨에 진눈깨비까지 뒤섞여 절규하는 느낌만은

가슴을 저리며 다가왔다.

인적 끊긴 고원에 절규하는 목소리,
마치 저승으로 가는 길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지함과 박지화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걸었다.
두 사람은 솜두루마기를 구해 입긴 했지만 막막한
고원에 불고 있는 세찬 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진눈깨비에 젖은 두 사람은 잔뜩 웅크린 채 바람을 헤치고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저승의 강가에서 술을 판다는 노인네처럼,

막막한 고원에 갑자기 흐린 불빛 하나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걸음을 조금씩 빨리 했다.
불빛의 정체는 산기슭에 붙은 자그마한 통나무집 주막이었다.

주모는 지함 일행이 마루에 다 오를 때까지도 방문을 열지 않았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박지화가 짐짓 역정 섞은 목소리를 문틈으로 밀어넣었다.

찬바람이 계속 몰아치는데도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한참을 소리지르며 서성거리자

그제서야 늙은 주모가 왼손으로 비녀를 매만지면서 방문을 열었다.

아마도 낮잠을 잤던 모양이었다.

사냥하기에도 힘이 드는 노쇠한 개처럼

몸이 몹시 무디어 보이는 노파였다.
"원,

이 한겨울에 나다니는 사람도 다 있슴메?

겨울엔 별 희한한 일도 다 많슴.

얼마 전에는 웬 젊은 아낙이 지나가더니..."
주모는 엉금엉금 나오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내 곧 객방에 불을 지필 테니 우선 안방에서 몸을 녹이심메."
지함이 뭔가 말을 건네려고 마루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다가 이내 돌아섰다.

이 산골 주막에서 별식을 따로 구할 수는 없을 것이고

어차피 차려주는 그대로일 뿐일 걸 이내 알아챘던 것이다.
박지화와 지함은 군불을 지펴 뜨끈뜨끈한 안방으로 들어가 몸을 녹였다.

산중이라서 흙으로 바른 벽은 도배도 하지 않은 채 누런 황토칠을 한 그대로였다.
"누가 저리 구슬피 노래할까?"
몸이 녹자 지함이 먼 서쪽 하늘에 시선을 보내며 탄식처럼 말했다.

박지화가 이내 말을 받았다.
"뭐, 사냥꾼이나 약초꾼이 심심풀이로 한소리 뽑은 게지."
"글쎄,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기가 심상치 않던데요."
그때 주모가 소반 하나를 받쳐들고 나타났다.
"산간이라서 머루주 담근 것 하고 산채 조금 있슴메.

우선 한 순배 돌리시면 그 안에 국밥을 짓겠슴."
통고를 마치고 돌아가는 주모를 박지화가 불러세웠다.
"그런데 주모,

아까 주막으로 오는 길에 저 산에서 누가 크게 울고 있습디다.

누군지 혹 아시오?"
박지화의 물음에 주모가 부엌으로 향하던 걸음을 되돌리더니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그이가 두무지(杜無之)라는 유명한 박수 아님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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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수는 무당의 종류나 질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당 가운데 성별에 의한 명칭에 불과하다. 박수의 기원에 대해서는 한자어의 박사(博士)·박수(拍手)·복사(卜師)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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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삼 년째 산중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가끔 곡소리를 내기도 하고 있슴."
"아니 산중 기도를 삼 년씩이나 하고 있단 말이오?"
이번엔 지함이 물었다.
산중 기도는 무당들이 때때로

신기(神氣)를 더 받기 위해 하는 일종의 수련이었다.

지함은

무당들도

중이나 도사들처럼 산속에서 따로 수련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며칠씩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지만

이렇게 몇 년씩 기도를 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무당 박수가 신기를 돋우려고

산중에 들어가 며칠씩 산신 기도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년씩이나 한다는 이야기는 초문이올시다."
지함이 놀라자 박지화가 말을 질렀다.
"그런 소리 말게나.

옛적 배달족이 번영하던 신시(神市)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더군.

지금의 도사(道士)나 선사(禪師)가

수십 년 두문불출 수행에만 힘쓰듯이,

옛적에는 무당 박수들도 그렇게 수행했다네.

<유사(遺事)>에 나오는 화랑이며 왕이
거의 다 그런 무당과 박수의 이야기란 걸 알지 않는가."
"그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면 산중의 그가 옛 시절의 그런 박수란 말입니까?

그런 수행자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군요."
그러자 지화가 대답하기 전에 주모가 먼저 말을 받았다.
"아 글쎄,

나라에 큰 변고가 닥쳐올 거라며
신명(神明)들 하고 담판을 벌이는 중이라잖슴?"
"담판?

천지신명하고 담판을 하다니?"
지함이 주모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물었다.
그때 사립문 밖 느티나무에서 새 울음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몸이 녹자 새소리도 시원스러운 듯이 들려왔다.

산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문풍지를 치고 갈 때마다

방바닥이 더욱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주모가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내야 잘 모르는 이야기지만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슴.

그 양반이 지리산에서 숯을 굽다가 올라왔다는데

함경도에서는 제일 가는 유명한 박수아님둥.

그저 척 얼굴만 보고도

지나온 일 하며 다가올 일까지 훤히 그려낸다고 함메.

그래 두만강 건너 여진족장도 한 차례 다녀간 적이 있고,
만주에서도 큰부자들이 더러 운을 보기도 했다고 함메."
지함은 눈을 번쩍 뜨고 주모의 말을 놓치지 않고 새겨들었다.
"그런데 삼년 전인가,

어느 날부터

그 박수는 도통 사람들과 왕래를 끊고 신당(神堂)에만 박혀 있었슴메.
한밤중에 마당에 나가 한바탕 천문을 읽은 탓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큰 귀신이 덧씌었다고도 함둥.
이따금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있었는데,

'우리 백성이 무슨 대죄를 졌길래 그런 큰벌을 내리십니까?'
하고 신장(神將)들에게 따지더라고 함메."
"나라에 무슨 변고가 있으려나?"
박지화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두어 달 신당에 꼼짝 않고 들어가 있던 박수는

곧장 저 산 천지봉으로 들어갔슴.

기도를 한다나 하면서리..."
주모가 빈 술병을 보더니 말을 끊고 일어서서 부엌으로 나갔다.
지함은 두무지가 기도한다는 산을 바라보았다.

벌써 겨울이 시작되었으니

산중에서 혼자 겨울을 나려면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었다.

이 만한 추위라면 얼어죽기 십상 아닌가.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로써

한 인간의 운세를 감정하는 것은 지함도 이미 자신을 얻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주를 세우지도 않고,

운성(運星)을 뽑지도 않고 사람의 운명을 척척 감정한다는 것은
아직 요령부득의 먼 일이었다.

혹 관상(觀相)이나
수상(手相),

또는 족상(足相)으로

운명을 감정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하나 사주에 비하면 확률이 몹시 떨어지는 일이었다.
두무지라는 사람,

그 박수는 분명 사주도 관상도 아닌 다른 방법으로

운명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을 거라고 지함은 생각했다.

지함은 따뜻한 아랫목에 다리를 뻗고 벽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화담한테서 배운 바에 따르면,

국운이란

땅덩어리에 12지 열두 동물을 차례대로 배치하거나
역상(易象)을 배열해서 보는 것이었다.

조선은 간(艮)괘에 속하는 것이고,

조선을 지지로 보면 쥐에 속하며,

오행으로는 갑목(甲木)에 속한다.
그밖에 천문으로 국운을 살피기도 하는데,
나라에서도 관상감이라는 곳을 두어

별 하나를 조선과 연결시켜 국운을 점치기도 했다.
배운 바에 의해

간혹 국운을 짚어볼 때마다 지함은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서 무정이란 젊은 중하고 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역학도 천문도 배우지 않은 두무지는 무엇을 통해

세상의 기를 읽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신명이라니,

그것은 공부를 하지 않고도
세상의 기와 자신의 기를 합치시킬 수 있다는 뜻인가?
주모가 술병에 과실주를 가득 담아왔을 때에야 지함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지함이 박지화에게 말했다.
"형님, 두무지라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 엄동설한에 어떻게 산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더구나 난 몸도 편치 않지 않은가.

그만두세."
"아닙니다. 형님께서 못 가신다면 저 혼자서라도 가겠습니다."
"자네가 어디 말린다고 포기할 사람인가.

그러게나.
난 그만 송도로 돌아가겠네.

몸도 좋지 않고,

화담 선생님도 그립고.

백두에 오르고는 싶네만 겨울이 깊어지니 다음에 가야겠네."
아닌 게 아니라 박지화는 무리를 하여 개마산까지 온 것이었다.

돌림병을 앓고 난 이후 쇠약해진 몸은 힘든 여행 때문에 쉽사리 회복되질 않았다.

지함도 그런 박지화가 안쓰러웠던 차라

송도로 먼저 돌아가겠다는 박지화의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튿날 박지화와 이별한 지함은 즉시 산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주막에서 산 옥수수와 고기가 들려 있었다.
산에서는 전날 들리던 목소리가 계곡을 타고 다시 흘러내려왔다.
천지봉에 오르는 길은 험난했다.

길도 따로 없는데다가

바위가 날카롭고 삼림이 우거져 헤치고 나갈 곳이 없었다.

한나절을 꼬박 걸어서야 마침내 지함은 산꼭대기 천지봉에 올랐다.
천지봉에 오르니 토굴이 하나 보였다.

두무지라는 박수는 그 토굴 속에 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허연 수염으로 뒤덮여 있어

좀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옷 대신에 걸친 짐승 가죽 때문인지

마치 늙은 짐승 한 마리가 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서 오세요,

이 선비님."
두무지 옆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황진이였다.
"뉘시오?"
두무지가 지함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이지함이라고 합니다.

천하를 주유하던 중 이곳을
지나다가 선사(仙師)의 기도 소리를 바람결에 들었습니다."
"화담이 보냈군."
"예?"
"자네 스승 화담 말일세."
"예?"
"그만 놀라게."
"화담 선생님은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그 사람, 죽고 나서야 만났지.

내가 팔도의 산신들을 두루 만나러 다니다가

지리산에서 잠시 그 귀신을 만났다네.

그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네를 보내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
"그러면 제가 여기 올 것까지도 알고 계셨단 말씀입니까?"
"그쯤이야 손바닥 뒤집기지."
"선생님도 귀신입니까?"
"예끼, 이 사람아.

멀쩡하게 살아 있네."
"춘추를 여쭙겠습니다."
"여쭙게나."
"춘추가 몇이십니까?"
"백스무 살이네."
"예?"
"운주사 이야기 들었지?"
"예."
"내가 원래 그 나무꾼일세."
"예?"
"그만 놀라게.

놀랄 일도 참 많네그려."
"이게 안 놀랄 일입니까?"
"이 땅에는 나 말고도 도인들이 수없이 많다네.
화담 같은 이는 드러난 사람이고

나 같이 숨어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나중에 한번 더 세상을 돌면서 산을 쭉 돌아보게.

생기가 뭉쳐 있는 곳마다 도인들이 숨어 있을 것일세."
"그런데 선사(仙師)께서는 왜 천불천탑을 쌓다 그만두셨습니까?"
"미륵에게 속았어."
"미륵에게 속다니요?"
"그거 쌓는다고 이 세상이 바뀌나?"
"그래서 그만두셨습니까?"
"아니네.

나는 어느날 이 나라에 찾아드는 검은 구름을 보았지.

미륵이 오는 세상을 준비하다가

나는 미륵을 맞이하기도 전에 그걸 먼저 보았어.

살아남는 자가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어."
"그래도 미륵에게는 따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미륵이 쌓도록 시킨 것은 그런 불상이나 탑이 아니었어.

마음 속에 쌓는 것이지

땅 위에 돌을 세우라는 것이 아니었다네."
"저도 화담 산방에 돌탑을 쌓고 나서야 입실했습니다."
"그거야 자네 마음에 쌓인 때가 많아서였겠지.
나한테는 신심이 모자랐기 때문에 그 일을 시켰던 건데,

천불천탑을 쌓기도 전에 나는 내 일을 마쳤지."
"그러면 지족 선사는?"
"그 무지한 자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게지.

탑을 쌓는 게지 어디 중생을 위해 쌓는다던가!"
"그래서 그 뒤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지리산에서 숯을 구우면서 도를 닦았지.

그러다가 접신(接神)을 해서 박수가 되었다네."
"미륵도 만났다면서 접신은 새삼스레..."
"미륵은 너무 크거든."
"여기는 왜 오셨습니까?"
"준비를 하게."
두무지는 지함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황진이를 돌아보며 말을 던졌다.

그러자 황진이는 무구(巫具)를 챙겼다.
"밥을 지어놓게.

자넨 나를 따라오고."
두무지는 무의(巫衣)를 입으면서

황진이와 지함에게 말했다.
두무지는 황진이가 챙겨준 무구를 들고 토굴을 나섰다.

지함도 그를 따라 토굴 뒤쪽의 산을 타고 올라갔다.
두 사람이 올라간 곳은 벼랑끝이었다.

그 벼랑 끝에 수백 살도 더 되어보이는 소나무가 꿋꿋하게 서 있었다.

그 소나무가 바로 두무지가 기도를 하는 신목(神木)이었다.
두무지는 무구를 신목 아래 제단에 차려놓고

벼랑 쪽으로 가 바람을 받으며 섰다.

지함도 그를 따라 벼랑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계곡에서 불어오르는 바람이 드세어 발을 붙이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지함은 바람에 밀려 몇 번이나 뒷걸음질을 쳤지만
두무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벼랑에 버티고 서 있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발을 내디디면 어디이겠는가?"
두무지의 말이 바람소리에 섞여 지함의 귀를 툭 치고 지나갔다.
지함은 두무지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내디디면 어디인가?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두무지는 그걸 묻는 것이 아닐 터였다.
지함은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산이 칼같이 뾰족한 봉우리를 받쳐들고 서 있었다.
음산하고 괴기스런 바람소리가 벼랑을 타고 자꾸만 밀려 올라왔다.
"이 책을 보게."
두무지가 품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지함의 발 앞으로 던졌다.
"무슨 책입니까?"
겉장에 <홍연진결>이라고 씌여 있었다.
"<신서비해>라네.

화담은 자네에게 자기 책을 전하려고 내 책을 빼돌렸다더군.

어차피 자네가 보아야 할 책이니

다른 사람에게야 보일 필요가 없었겠지."
지함은 두무지가 던진 책을 집어들었다.
지함이 책을 읽기 시작하자

두무지는 두 팔을 번쩍 쳐들더니 무가(巫歌)를 부르기 시작했다.

 

천지에 음양(陰陽)을 세운 이여,
제물 바쳐 받들어야 할 신은 누구시오!
생기를 주고 힘을 주고
온 백성이 받들어 따르는 신명이여!
그대는 불사(不死)를 말하나
그대의 그림자는 죽음을 부르네.
그대는 그대의 위력으로 숨을 쉬며
두 발 달린 것과 네 발 달린 것을 모두 지배하네.
제물 바쳐 받들어야 할 신은 누구시오!
이 백성을 해치지 마소서.
땅을 낳고 하늘을 낳고

눈부신 해를 낳고 물을 낳은 그대여!
······

"아직도 읽고 있는가?"
어느새 두무지가 무가를 마치고 지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을 든 지 벌써 한참이 지나 있었다.
지함이 마침내 책을 내려놓았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그 책 속에는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때로부터 앞으로

오백 년 동안 일어날 일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사실이 아니면 뭣하러 힘들여 그런 걸 썼겠는가?"
"이렇게 처절하게 우리 조선땅이 유린당하고,
백성이 다치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이 듭니까?"
"그래서 내가 신명들에게 기도하고 있는 것 아닌가."
"무엇을 빌고 있습니까?"
"비는 게 아니라 하늘과 싸우고 있어."
"하늘과 싸운다구요?"
"왜 우리 조선에만 이렇게 큰 재난이 와야 하는 것인지,

그것 때문에 신명과 싸우고 있어.

나는 이곳에서 신명과 싸우기를 삼 년이나 했네.
이젠 자네가 도와 줘야 한다네."
"예?"
"자네의 학문은 깊이로 보자면 이제 더 갈 곳이 없네.

다만 하늘에 통하는 학문이 되어 있질 않으니 그것이 단점일세."
"그러합니다."
"그 책에 나오는 재난을 자네가 막아주어야 하네.
내가 자네에게 하늘을 보는 힘을 주겠네.

자, 신목 밑에 쌓인 눈을 치우세."
두무지는 그가 신목으로 지목한 거목 밑으로 가서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지함도 두무지를 거들어 눈을 말끔히 치웠다.
"여보게,

나는 오늘밤에 이곳에서 큰 굿을 할 걸세.
자네가 <신서>를 보았으니

이제 그 책은 자네에게 있는 것이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는 이곳에서 신명과 싸우기를 삼 년이나 했네.
그러나 신명들은 내 말을 듣질 않아."
"왜 안 듣습니까?

원래부터 안 들어줍니까?"
"아니지.

보통 굿을 하면 신명은 시시콜콜 다 말해주지.

그러나 이 문제만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싸우고 있는 거지.

말 좀 하라고 신명들에게 윽박지르고 있는 거라네.

자, 토굴로 내려가세.

굿을 준비해야지."
두무지가 앞장서서 바람처럼 산을 내려갔다.
지함이 두무지를 따라 힘겹게 산을 내려와 토굴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는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있었다.
산간에 나지도 않는 반찬이며 고기,

그리고 떡까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자, 주유중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터이니 잘 먹어두게."
지함은 오랜만에 따끈한 고깃국에 술까지 얼큰하게 마셨다.
"선사(仙師)님, 접신이 뭡니까?"
"신명들이 사람을 부려 저희들 일을 도모하는 것이라네."
"그러면 무당이나 박수는 신명이 부리는 일꾼입니까?"
"그렇다네."
"그러면 저 같은 사람도 접신할 수 있습니까?"
"뭣하러 자네가 접신을 하나?

자네 혼자서도 잘 해나가는데.

무당이나 박수는 제 인생을 묻어두고 신명을 위해 사는 것이라네.

자네의 학문은 곧 신명에 이를 것일세.

그렇다면 그게 접신이지 따로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그래도 천문, 지리, 역학을 한자 공부하지도 않고
앞을 훤히 내다보신다면서요?"
"그게 어디 내가 보는 것인가?

신명이 내다보는 것이지.

그래서 내가 이제야 제 정신을 차리고 신명과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일세.

이제 비로소 나는 신명을 벗어나 나를 찾은 것일세."
두무지는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사람이 제 힘으로 노력하지 않고 귀신이나 모시려 하고,

도를 이루기 어렵다고

환단이나 만들어 먹으려 하고,

단전에 뜸을 뜬다 어쩐다 하면서

영기를 모은다고 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일세.

사람이 사람의 몸을 입었으면 사람 사는 대로 살아야 하네."
날이 어두워지자 세 사람은 신목이 있는 곳으로 다시 올라갔다.

두무지는 무구를 챙겨들고 황진이는 제물을 들었다.
신목에 이르자 두무지는 장고와 징을 내려놓고
적색, 청색, 황색의 백면포(白綿布) 조각을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이윽고 주렴이 완성되었다.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주렴이 펄럭거리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두무지는 무복(巫服)으로 남색 쾌자를 한 활옷을 입었다.

홍천익(紅天翼) 같은 옷에

팔소매가 색동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끝동은 백색이었다.

그리고 몸통 전체가 적색으로 허리에 주름이 잡혀 있고,

앞가슴에 한 자쯤 되는 옷고름이 달려 있었다.
두무지가 두건을 매자 황진이가 바닥에 앉아 북을 두드렸다.

황진이가 치는 북소리에 맞추어

두무지가 파수를 치고 난 다음 벌떡 일어나서

대신칼을 오른손으로 집어들더니

신목 주변을 연신 찌르면서 뛰어다녔다.
황진이가 무가(巫歌)를 선창하자

두무지가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사방은 깜깜해져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두무지는

지함에게 다가와 신칼을 마구 휘두르며 노래를 불렀다.
이번에는 두무지가 북채를 잡고 빠르게 두드리자
황진이가 일어나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지함은 그때 묘한 기분을 느꼈다.

뜨거운 불덩이가 핏줄을 타고 마구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정수리에 불꽃이 이는 듯하더니

뭔가 팍 터지는 기분이 들며 온몸에서 흥이 절로 솟았다.
지함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황진이의 춤에 맞추어 발을 구르고 팔을 뻗쳤다.

두무지는 징과 북을 요란스레 두드리면서 두 사람을 자극했다.
그렇게 얼마나 춤을 추었을까.
어느 순간 두무지가 북을 메고 징을 치면서

벼랑 쪽으로 가더니

북과 징을 벼랑 아래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곧 징이 바윗돌에 부딛쳐 떨어지는 소리가 계곡에 울려퍼졌다.
황진이와 지함은 그제서야 춤을 거두고 숨을 골랐다.
"자, 두 사람은 이제 내려가게.

이제부터는 나 혼자서 해야 하네."
황진이는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리고 돌아섰다.
지함은 황진이를 따라 어두운 밤길을 더듬으면서 토굴로 내려갔다.
두무지가 기도하는 소리가 밤새 들려왔다.

음성이 어찌나 처절한지 지옥에서 울려오는 울부짖음 같았다.
지함과 황진이는

두무지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지나온 얘기를 했다.
"송도를 떠나서는 어디로 가셨었소?"
지함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여기저기 떠돌았습니다.

천하의 남성을 다 만나볼 생각이었지요."
"여자의 몸으로 여간 힘들지 않았을 터,

우리 같은 남자들도 힘들었는데..."
"양반들이 즐비한데 제가 힘들 게 뭐가 있겠어요?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요."
"도대체 그대는 알 수 없는 여인이오."
"여인은 생각할 자유도 없습니까?

저도 도를 닦고 팔도를 주유하면서

문사 도사들과 어울려

시회도 열고
도화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허나,

여자의 길을 누가 막아놓았습니까?"
황진이가 당찬 목소리를 모아 지함에게 말했다.
"두무지 선사(仙師)는 어떻게 찾아왔소?"
"한량들과 어울려 금강산으로 사냥을 따라나왔었지요.

그러던 중 한 대감이 숲속으로 저를 데리고 가서

제 몸을 취하려는데

어디서 호랑이가 나타나

그 대감을 발로 쳐내고

저를 입에 물었습니다.
그 뒤로는 혼절하여 까마득하게 모르고,

뒤에 눈을 떠보니 여기였습니다."
"호랑이한테 물려왔다구요?"
"그 호랑이는

두무지 선사가 데리고 있는 녀석이었습니다.

제가 눈을 뜨니 두무지 선사가 저를 내려다보면서

당신이 시킨 일이라면서 놀라지 말라고 하셨어요."
"왜 그랬답디까?"
"오랫동안 기도를 해와서 기력이 많이 쇠진해졌답니다.

그래서 양기를 보충해야겠는데
금강산에 있던 저의 음기를 보셨답니다.

그래서 저의 강한 음기로

선사의 양기를 격발시키려고 한 것이랍니다."
"재미있는 말이오만..."
"그 뒤 선사는 제가 완전히 기운을 차리자

딱 한번 저를 취하셨습니다.

그 뒤로 저는 선사님을 따라 굿을 할 때마다

무구를 갖춰 드리고 북을 쳐주었지요.
그러다 보니 무가도 익히게 되었고...

아마 제게도 무당기가 있는가봅니다."
"내가 보아도 그런 것 같소."
"그런데 두무지 어른은

이 선비가 오기 전에

저더러 큰 굿을 준비하라고 하면서

음식을 마련해다 주었지요."
"그러면 두무지 선사는 내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이오?"
"그렇지요."
"그래서 진수성찬을 차려드린 거랍니다."
"허, 참."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새벽이 되자 토굴에도 가느다란 여명이 스며들었다.
그때 황진이가 갑자기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신음을 했다.
"왜 그러시오?"
지함이 놀라서 황진이를 일으켜세웠으나

황진이는 고통이 멈추지 않는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동안 격렬하게 몸부림을 하던 황진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선사님이, 선사님이..."
그러면서 황진이는 토굴을 뛰어나갔다.
황진이는 미친 여인처럼 신목이 있는 곳으로 뛰어올라갔다.

밤 사이에 눈이 많이 내려서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황진이는 미끄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면서 비틀비틀 올라갔다.
지함도 황진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신목이 있는 곳까지 겨우 올라갔을 때,
신목은 눈을 하얗게 뒤집어 쓴 채

계곡에서 불어오르는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저기..."
황진이가 신목을 가리켰다.

지함은 눈을 들어 신목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에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호랑이오."
"두무지 어른의 호랑입니다.

그 위쪽에..."
황진이가 다시 손가락을 들어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나뭇가지 밑에

커다란 눈덩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지함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두무지임을 알았다.
호랑이가 두 사람을 보더니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함이 황급히 달려가 눈을 털고 보니 역시 두무지였다.
두무지는 신목에 목을 맨 채 죽어 있었다.

그가 늘 빌던 신목에 목을 매어 스스로 죽은 것이었다.

그랬듯이 두무지는 하늘을 향해,

신명을 향해 울부짖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신목에 매달린 두무지의 시신이 세찬 바람에 흔들거렸다.
지함이 힘겹게 시신을 끌어내리자

저고리 안가슴에 꽂아두었던 서찰이 툭 떨어졌다.

지함은 서찰을 펴보았다.

- 하늘이 내 말을 듣지 않는군.

내가 하늘에 직접 올라가 따지리라.

왜 이 순박한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가를...

기도 가지고 안 된다면
신명들한테 가서 싸울 수밖에.

기다리고 있게.
자네에게 돌아오겠네.

어디선가 호랑이의 포효 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지함은 꽝꽝 얼어붙은 두무지의 시신을 두고

토굴로 내려가 도끼와 불쏘시개를 들고 올라왔다.
지함은 두무지가 목을 맨 신목을 도끼로 패기 시작했다.

지함은 며칠 동안 계속 장작을 패서 높다랗게 쌓고

두무지의 시신을 올려놓은 다음 불을 질렀다.

두무지는 지함에게 빚을 남기고 떠나갔다.
백성들에게 닥쳐오는 검은 구름을 막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그 원을 지함의 가슴에 고스란히 안겨 놓고.
<신서비해>에

적혀 있는 커다란 환난을 내 힘으로 어쩌란 말인가.
지함은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