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오늘은 이만 하고 내려가세."
지함은 이야기를 마치고 산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박지화에게 화담 산방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에 우리 산방 같은 곳이 한 군데쯤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의 장래를 예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학문이 짧은데 어떻게 학인들을 가르치겠는가?
자네가 해야 하네."
"형님,
저는 행(行)이 부족합니다."
박지화는 극구 사양했으나 결국 그러마고 약속했다.
"그게 선생님의 뜻을 기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네는?"
"저는 따로 할 일이 좀 있습니다."
박지화는 산방을 다시 열었다.
화담 서경덕의 명성이 남아 있어서인지 학인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며칠 뒤 산방으로 지함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다름 아닌 황진이였다.
황진이는 예전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이 선비님,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말을 이곳 학인들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산방의 학인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두 사람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황진이는 지함에게 예를 갖춘 뒤 화담의 산소로 가서 절을 했다.
두 사람이 산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가마 한 채가 산방으로 급히 들어왔다.
가마꾼들은 황진이를 찾았다.
송도 유수가 보낸 가마였다.
"요즈음 시벗이 한 분 생겼답니다.
이 선비님,
다시 오겠습니다."
황진이는 송도 유수가 보낸 가마에 올라 산방을 내려갔다.
학인들은 구경거리가 너무 쉽게 없어져 섭섭해 했으나
지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황진이가 산방을 떠난 지 두어 경이 지났을까,
가마 한 채가 다시 산방으로 올라왔다.
가마꾼들 뒤로 관원 두 명이 따라와 지함을 찾았다.
그들은 지함을 보더니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는 송도 유수의 전갈을 알렸다.
"유수께서 선생을 뵙자고 하십니다.
지금 놀잇배에 계십니다.
그리고 박지화 선생님도 함께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함이 의아하여 그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송도 유수가 뉘길래 나를 부른단 말이오?"
"부르는 게 아니고 정중히 모셔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수님의 호는 면앙정,
함자는 송자 순자입니다."
"면앙정 송순?
아,
그분이... 알았네.
내 형님께 말씀드리지."
지함은 박지화에게 그 말을 전했다.
박지화도 반기는 기색이었다.
두 사람은 가마에 나누어 타고
면앙정이 화류를 즐기고 있다는 박연폭포로 갔다.
"어서 오시오."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멀리서 알아본 송순이 소리쳤다.
송순의 옆에는 황진이가 앉아서 가야금을 뜯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황진이한테서 그대들이 산방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매우 반갑소."
지함이 박지화와 함께 화담을 모시고 전국을 주유할 때
전라도 담양에서 만났던 바로 그 송순이었다.
그들이 면앙정을 다녀간 뒤,
송순은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북경으로 가는 진문사로 뽑혔던 것이다.
명을 다녀온 송순은 궐내 옥당에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종과 맞닥뜨리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지난 가을이었다.
명종이 화분 하나를 송순 등 여러 신하가 일하고 있는 옥당으로 보내왔다.
그러자 송순이 이에 답하여 당장에 시를 지어 바쳤다.
풍상이 섯거친 날의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곶이온 양 마라
님의 정을 알괘라.
송순은 일약 이 시조 한 수로 명종의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송순은 명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고
벼슬길도 순조로워졌던 것이다.
"자, 한 순배씩 돌립시다.
하하하."
송순은 술병을 집어들어 두 사람에게 따라주었다.
박지화와 지함은 술잔을 받아 마셨다.
"역시 면앙정을 나오신 게 잘 하신 거였군요."
박지화가 술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그럼, 그럼.
그래서 이렇게 천하절색도 만나게 되었으니
늙은이 말년 운수가 활짝 핀 것이라우."
"그러믄요.
회춘하시고 벼슬 오르시니 남부러울 게 뭐 있겠어요?"
황진이가 송순의 수염을 쓸어올리면서 말했다.
지함은 그런 황진이를 바라보면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이 선비는 왜 한 말씀도 없으시오?"
지함은 잘 차려진 잔칫상을 보면서
굶주린 백성들의 부실한 밥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송순과 함께 호탕한 웃음을 마음껏 웃어제끼는 관리들을 보면서는
임꺽정과 정해량을 생각했다.
송순의 옆에 앉아서 교태스런 웃음을 흘리고 있는
황진이를 보면서는 박수 두무지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지함의 머리는 온갖 상념으로 얽혀들었다.
이 나라 백성은 누가 구할 것인가.
임꺽정 같은 도적인가?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왕인가?
아니면 시절 모르고 무사안일하게만 지내는 관리들인가?
지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송순이 그걸 보고 지함을 나무랐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는가?
잔치에 왔으면 흥겹게 놀아주시게."
그러자 지함이 정색을 하고 송순에게 대답했다.
"지척에 임꺽정이라는 도적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장차 큰 도적떼로 자랄 것이니
유수께서는 미리 방비를 하십시오.
때가 좋지 않습니다."
"으음.
자네다운 소리로군."
"농담이 아닙니다."
"그까짓 도적 몇 놈이 준동한다고 무슨 일이 나겠는가?
나는 여기서 한두 해 있으면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유수님,
유수님은 기미년이 되면 틀림없이 송도유수로 다시 오시게 됩니다.
그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이보게.
내 나이가 몇인데 그때 가서 또 송도유수를 한다고 그러나?
설사 그런다 한들 유수 한 사람이 무슨 일을 크게 하겠는가?
자, 그런 걱정은 그만두고 술이나 마시세."
마침 회갑연을 맞은
송순의 대부인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한양에서 온 묘기와 가희가 다 모여 있는 가운데
황진이가 송순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이 늙은이를 용서하게.
그동안 고생만 해온 내 마누라에게 자리 한번 마련해주는 것일세.
하하하."
좌중이 떠들썩하더니 황진이가 일어서서
옷자락을 여미고는 술 한잔을 쪼르륵 마셨다.
그러고는 노래를 불렀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소리를 따라 흐르는 노랫소리에
하객들은 넋을 잃었다.
높고 낮음은 물결이 치는 듯했고,
맑고 부드러움은 불빛보다 더 했다.
"유수님, 나중에 후회하지 마십시오!"
지함은 자리에서 일어나 산방으로 돌아갔다.
송순이 뒤에서 몇 차례 불렀으나 지함은 뒤도 돌아다보지 않았다.
산방에는 지함을 기다리는 손님이 있었다.
"접니다. 기억하실는지..."
"어서 오게."
북창의 아우 정작이었다.
정작의 나이 벌써 스무 살,
어른티가 제법 났다.
"많이 성숙하였구먼.
그런데 웬일인가?"
"웬일이라니요?
선비님께서 몇 해 더 있다가 오라고 하셨잖습니까?"
"허허허. 그랬던가?
그렇지만 선생님은 이미 선화하셨으니 안됐네그려."
"화담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맞군요.
박복한 인연을 탓할 수밖에요.
화담 산방 소식은 이미 한양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지금 산방을 맡으신 분도 훌륭하신 분이니 입실토록 하게."
"예."
정작이 산방에 입실하고 나자,
산방은 예전처럼 활기를 띠었다.
박지화와 지함이 번갈아가면서 학인들을 지도하였다.
학인들이 늘어나 정휴, 전우치, 남궁두, 정작 말고도 다섯 명이 더 있었다.
화담 산방이 문을 연 지 사 년째 되던 병진년(丙辰年, 1556),
여름이 다 가던 어느날,
구월산에서 사람이 찾아와 지함을 만나고 돌아갔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함은 전우치를 따로
불러 뭔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날로 전우치는 산방을 떠났다.
지함은 정휴와 남궁두 등 산방 학인들에게 전우치를
구월산으로 보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 다음, 지함도 행장을 꾸렸다.
"볼 일이 있어 떠나겠네."
"무슨 일이십니까?"
정휴가 놀라서 물었다.
"이로써 내 보림(保任)이 끝났네.
이제 할 일이 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껏 잠룡(潛龍)으로 계셨던 것입니까?"
"이제 내가 나설 때가 된 것이네.
이 땅에 태어나 목숨을 부치는 사람들이 제 운명을 스스로 감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주는 책을 지을 것이네."
"운명을 밝히는 책을 쓰시겠다구요?"
"그렇다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팔도 주유를 해야 한다네."
"저희도 데리고 가주십시오."
"아닐세.
이 일은 나 혼자라야 제대로 할 수 있다네.
내가 내 눈으로 보고 기록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
전국 팔도의 지리, 물산, 인물, 천문, 풍수 등을 차근차근 관찰해야 하네.
저번에 팔도를 주유했다고는 하나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만 보았지,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닐세.
내 공부가 끝나거든 자네들에게도 가르쳐줌세.
내가 다녀오는 동안 자네들은 산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게나.
정휴, 자네는 절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지화 형님을 도와드리게."
"여기 머물겠습니다."
"그러시게.
송악사에 적을 두고 산방 일을 도와주면 좋겠네."
"그러지요."
서운해 하는 정휴를 남겨 두고
지함은 홀연히 화담 산방을 떠나갔다.
전우치는 구월산으로 향했다.
황해도 구월산 산적 임꺽정.
그는 도적의 우두머리로서 만족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왕조를 무너뜨릴 야망을 갖고
도적의 무리를 강력한 군대로 키워나가고 있었다.
임꺽정의 군사는 기왕의 산적 말고도
군적에서 도망쳐 나온 군사를 비롯하여
탐관오리에 쫓겨 고향을 도망쳐 온 농민,
그리고 큰 전염병 끝에 해먹을 일이 없어
여기저기 떠돌던 유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월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운기(雲氣)가 점점 뚜렷하게 하늘에 퍼져 있는 것이 보였다.
산적들의 사기가 매우 충천해 있었던 것이다.
전우치는 구월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망기(望氣)를 했다.
임꺽정 군대의 기를 살펴 몸을 의탁할지,
의탁한다면 어떻게 의탁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라는
지함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지함은 구월산으로 떠나는 전우치에게 이렇게 일렀었다.
"내가 기론을 말하였으니
자네는 능히 군사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일세."
"기를 병법에 어떻게 쓰리까?"
"사기(士氣)를 다스리는 게 군사(軍師)가 할 일이네.
적의 기가 발흥하고 감퇴하는 시기를 간파해서
잘 대처하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네.
격기, 이기, 여기, 단기, 연기의 다섯 가지 방법으로 다스리게."
"어떻게 다스립니까?"
"군사를 통합하여 병력을 집결시킬 때에는
사기를 격발시키도록 해야 하네.
싸움터로 나설 때에는 사기를 날카롭게 해야 하네.
적진을 마주해서는 사기를 북돋워
군사 스스로 떨쳐일어나도록 해야 하네.
싸울 날이 정해진 때에는
결단을 하는 기를 높여야 하네.
마침내 싸움이 시작되면 사기를 지속시키는 데에 힘써야 한다네."
"장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마다 기를 올바로 잡아야 하네.
장수 한 사람의 기가 제대로 잡히면
그 기가 군사들에게 두루 확산돼 의심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네.
그렇게 되어야 적과 싸워 이길 수가 있는 것이라네."
"장수나 병졸은 어떻게 골라야 합니까?"
"제왕의 기는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황색일세.
그러므로 천자가 행차할 때에는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도 알 수 있다고 하네.
그리고 현인의 기는 오색을 고루 갖추고 사방으로 넓게 퍼지네.
장수의 기는 살기로 뻗친다네.
마치 불꽃이 일거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네.
병졸의 기에는 승군의 기가 있고,
패군의 기가 있네.
운기가 하늘까지 닿아 있거나 불꽃처럼 서리면 승군의 기요,
말라서 흩어진 것 같고 불꺼진 재 같으면 패군의 기로 보네."
"적의 기를 한꺼번에 볼 수는 없습니까?"
"그게 망기(望氣) 아닌가?"
"그런 병법은 처음 듣는 말입니다."
"신비롭게 전해오는 병법이네만,
이것이야말로 병법의 극치라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장수는 반드시
음양가(陰陽家)를 거느리고 다닌다네.
음양가로는 천문에 능한 자 세 명,
지리에 능한 자 세 명 해서 여섯 명을 두네."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원래 망기를 잘 하는 사람은
머리 위로는 수백 리,
거리로는 이천 리,
내려다보는 쪽으로는
삼천 리에 걸쳐 서려 있는 기를 본다고 하네."
"기의 모습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운기(雲氣)가 짐승의 형상을 하면
그 아래에 있는 군대가 이긴다고 하네.
운기란 나라에
부역이 있으면 백색을 띠고,
토목 사업이 있으면 황색을 띠네.
또 운기가 서로 만날 때에는
낮은 것이 높은 것에 이기고,
날카로운 것은 네모난 것에 이기네.
운기가 움직여서 색깔이 청백색이 되는 것은,
그 밑의 장군은 날쌔고 사납지만
부하 병졸은 비겁하다는 것일세.
그리고 운기의 뿌리가 크고 앞쪽으로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아군과 적군의 사상자가 서로 맞먹을 것이라는 조짐이네.
또한 운기가 청백색이면서 앞이 낮은 것은 싸워서 이기며,
앞이 빨갛고 높게 되어 있는 것은
전투에서 패할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이네."
"그같이 알면 백전 백승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지인 삼재를 고루 다스리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다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어려운 것이라네.
그렇게 알고도 안 되는 게 인사(人事)라네."
"무슨 뜻인지요?"
"임술년이 되면 하늘이 임꺽정을 칠 걸세.
신유년에는 산채를 떠나게.
어차피 칼로써 백성을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이라네."
"그렇게 패배가 뻔한 싸움에 왜 저를 보내십니까?"
"하늘의 일에는 지고 이기는 게 없다네."
"그렇다면 왜 죽는 사람이 생기고 다치는 사람이 나옵니까?"
"다 제 업이라네."
"선생님!"
"사람이 살다 간 자리에는 그 사람이 남긴 자취만 남네.
하늘로 가지고 갈 것은 그것뿐이라네.
몸뚱아리는 필요가 없으니까 땅에다 묻어두고
혼만 올라가는 것이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게.
자네는 죽을 때가 아직 멀었으니.
다만 망기를 소홀히 하지 말고 반드시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서 스스로 처신토록 하게."
지함은 그렇게 말하면서 전우치를 밀었었다.
황해도 땅에 들어선 전우치는 곳곳에서 임꺽정의 자취와 맞닥뜨렸다.
어떤 관청은 임꺽정 무리의 습격을 받아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백성들의 지탄을 받아오던 어떤 탐관오리의 집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임꺽정의 산채가 구월산 어디에 있는지
인근 백성이라면 다 알고 있었으나
관헌들은 감히 거기까지 추적하지 못했다.
그러나 벼슬 부스러기조차 만져보지 않은 전우치는
임꺽정의 무리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전우치는 물어물어
임꺽정의 사부 정해량의 산채를 찾아 들어갔다.
절과 암자가 곳곳에 있었다.
삼림이 무성하여 산적 무리가 은신하기에는 알맞은 산이었다.
전우치는 용연폭포를 지나 정해량의 산채에 들어섰다.
폭포에 이르자
어느새 길목을 지키고 있던 산적들이 달려나와 전우치를 에워쌌다.
전우치는 산적들에게 정해량을 만나러 온 사연을 얘기하고
정해량의 거처로 갔다.
정해량은 지함이 보내서 왔다고 하자
전우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전우치는 지함이 써준 서찰을 정해량에게 내보였다.
"역시 약속을 지키는군.
난 허언인 줄로만 생각하고
벌써 잊고 있었는데
정말로 사람을 보내주었구먼.
그래,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전우치라고 합니다."
"오시느라 고생 많았소.
이 선비께서 병법에 능한 제자 한 분을 보내겠다고 하시더니
참말로 약속을 지켰소이다."
"저희 스승님께서 벌써 약조를 하신 일입니까?"
"그렇소."
"이제 군사 선생도 오셨으니
우리 싸움은 끝난 거나 다름없게 되었소."
"그리 고마워 할 것 없소이다.
조정이 아무리 썩었기로서니 아주 죽은 것은 아니오.
그러니 그리 자신해서는 안 되오.
보아하니 군사의 힘이 꽤 큰듯한데,
앞으로 어찌 할 생각이시오?"
"군사의 힘을 좀더 기르고,
군량미를 좀더 비축해 놓은 뒤에
난을 일으킬 것이오.
황해도 백성은 벌써 거의 다 우리 편이 되어 있고,
평안도, 함경도 주민들도 우리 군사를 환영하는 분위기요.
자, 여기서 조금 계시면 임꺽정에게 보내드리리다."
"백성들이 몹시 좋아하는 것은 제가 오는 길에 이미 보았소이다.
허나, 이것을 알아둡시다.
지난 해에만 해도 5월에
전라도 달양포에 왜구가 쳐들어와
양민을 무수히 해치고 양식을 빼앗아가는 을묘왜변이 있었소.
그 왜적들이 영암에 다시 쳐들어온 것을
우리 수군이 물리쳤소이다.
또 6월에는 제주에 쳐들어온 왜선 40여 척과
완도에 앞바다까지 침입한 왜선 28척을
우리 관군이 용감히 싸워 물리쳤소.
이렇게,
나라를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라를 지키는 것이오.
나라가 있고 난 다음에야
바로잡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난을 일으키더라도
진정 백성을 위해서 한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오.
그것을 임꺽정에게 알려주십시오."
"곧 직접 보게 될 터이니 군사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시오.
난 이제 늙었고,
임꺽정을 가르치는 것도 이것으로 그칠까 하오.
그대를 임꺽정에게 보이고 난 뒤 수도에만 전념할 생각이오.
이 산은 원래 단군이 은퇴하여 도를 닦던 아사달산,
그만한 정기가 아직 있다오."
"병법이라면 제가 힘 닿는 데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떠나시기 전에 임꺽정의 무리에게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흐트려서는 아니 된다는 점을 깊이 심어주십시오."
"고맙소.
그대가 온 것이 백만대군을 얻은 것이나 진배 없구려."
"백성을 위하는 싸움이라니 제가 적극 도울 참입니다."
전우치는 정해량의 소개로 곧 임꺽정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임꺽정의 산채로 거처를 옮겼다.
그 뒤 정해량은
산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도가 수련에 들어가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기미년(己未年, 1559년) 3월,
임꺽정은 황해도에서 난을 일으켰다.
그의 군사는 수월하게 황해도를 점령하고 송도까지 장악했다.
송도부터 한양까지는 말로 달려 한나절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임꺽정이 황해도에서 처음 난을 일으켰을 때
한양에서는 토벌대를 조직한다,
장수를 선발한다 하고 떠들썩했지만
막상 군사는 모이지 않았다.
장부상에 허위로 기재된 이름이 태반이라서
실제로 나오는 군사는 그 숫자의 몇분의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를 조직한다고 시간을 끄는 사이
임꺽정은 바로 코 앞의 송도까지 차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송도가 임꺽정의 수하에 들어가고
한양마저 먹히느냐 마느냐 경각에 달려 있는 시기에
지함이 화담 산방으로 돌아왔다.
신유년(辛酉年, 1561) 늦여름이었다.
박지화와 정휴, 남궁두, 정작이 달려나와 반가이 맞이했다.
송도를 떠난 지 다섯 해 만에 돌아온 지함은 행색부터 기괴했다.
머리에는 솥을 뒤집어쓰고
여름인데도 거렁뱅이처럼 누비 적삼을 걸치고 있었다.
"형님, 머리에 웬 솥을 쓰고 계십니까?"
"오랑캐들이 사는 모양을 구경하다보니
이 솥이 쓰고 다니기가 좋게 생겼길래 한번 써보았네.
나그네에겐 아주 그만이라네.
닳지도 않고 때가 되면 솥으로 걸어 밥을 지을 수도 있고."
"다른 뜻이 있겠지요?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고 하겠습니다."
"하하하.
상(相)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었네.
헌데,
내가 본시 금기(金氣)가 부족하지 않던가?"
"그래서 솥을 머리에 쓰셨다구요?"
남궁두가 웃음이 터질 듯 볼을 부풀린 채 물었다.
"아이구, 형님두.
그걸 쓰니까 늙어보이십니다."
정휴가 깔깔 웃었다.
지함의 나이가 어느새 마흔다섯이 되어 있었다.
"자네,
어디를 그렇게 한없이 쏘다니다가 돌아왔는가?"
그 사이에 부쩍 늙은 박지화가 지함을 반갑게 맞이했다.
"안 간 데 없이 다 돌아다녔습니다.
흙을 모조리 만져 보고,
물맛을 일일이 보았습니다."
"이제 조선 천지는 훤히 꿰뚫었겠구먼.
그러고도 발바닥이 성하던가?"
"그래도 아직 튼튼합니다.
산방에는 별일 없나요?"
"별일 없다니?
임꺽정 무리가 송도를 손아귀에 넣는 바람에 학인들이 모두 떠나갔다네.
우리야 본래 벼슬이나 재산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으니 무사하네만..."
박지화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형님,
전우치가 임꺽정 무리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휴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지함은 짐짓 못 들은 척하며 정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아직도 여기에 있었나?"
그러자 박지화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정작,
이 친구는 진사시를 거쳐 성균관에 잠깐 있다가 이리로 돌아온 것일세.
조정에서 아버지의 죄과를 들어
이 친구를 내치려 드는 사람들이 많은가보네.
그래서 연일 술타령만 하고 있다기에 내 이리로 불렀네."
박지화의 말에 정작이 소리없이 흐느꼈다.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하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자네는 자네일세.
아버지의 인생까지 자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네.
누가 뭐라 하든 소신대로 살아가면 되네."
지함이 정작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었다.
"자네,
그렇게 너스레만 떨 게 아니라 그동안 소득한 바를 좀 꺼내 보이게."
박지화가 침통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너무 많아서 말씀을 채 드릴 수 없습니다.
말씀을 다 드리자면 일 년 열두 달은 꼬박 이야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편히 쉬게나.
원로에 얼마나 여독이 깊겠나."
"예. 형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정휴만 남았다.
"정휴."
"예."
"자네에게는 내가 어디를 갔었는지 말을 해야 하겠네."
"너무 길어서 말씀으로 다 못하신다면서요?"
"그래도 자네에겐 해야지.
나는 조선만을 돌아다닌 게 아닐세."
"예? 그럼 중국이라도 다녀오셨습니까?"
"물론 중국도 갔지.
그런데 나중에는 내가 어디를 갔는지도 모르네.
나라 이름도 모르고 고을 이름도 모르고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세상에 있다가 왔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걸세.
자네에게도 이렇게만 말해놓겠네.
나도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으니..."
"참 형님도."
"그러나 이것만은 들어두게.
이 세상은 나라마다 사람도 다르고 산천도 다르다네.
세상 천지가 다 조선같이만 생겼고,
세상 사람이 다 조선 사람처럼만 생겼다고 생각하면 안되네."
"형님,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그만 하세.
내 가슴에나 묻어둘 이야기들일세."
지함은 그 뒤로
그가 다섯 해 동안 다닌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지리를 그가 보았고,
또 아무도 보지 못한 인물과 물산을 보면서 돌아다녔던 것이다.
지함이 산방에 돌아오고 며칠 후,
지함의 소식을 들은 황진이가 산방으로 찾아왔다.
황진이는 여염집 여자들처럼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이 선비님, 돌아오셨군요."
"오랜만이오. 그
런데 여기는 웬일이오?"
"저,"
황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저, 잠시 의탁 좀 하려고 왔습니다."
"의탁을?"
"예.
임꺽정의 무리가 워낙 험하게 날뛰어서."
"그러면 피난을 온 것이오?"
"예."
"임꺽정과 이미 아는 사이가 아니오?
그런데 굳이 몸을 피할 것까지야..."
지함은 의아한 마음에 캐물었다.
황진이의 태도가 전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하다가 마는 표정이 역력했던 것이다.
"알기야 하오나...
그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립니다.
전에 잡혀갔을 때 저를 마치 물건 다루듯 하지 않았습니까.
선비님을 구해낼 생각이 아니었다면
저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그자와 한방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황진이의 얼굴빛이 발갛게 되었다.
그때 겪은 수치심 때문인 것도 같았고,
아니면 다른 마음이 숨어 있는 것도 같았다.
"그자도 그 후엔 많이 바뀌었을 것이오.
그때는 그저 도적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나,
지금은 백성을 생각하는 의적의 수장이 되어 있을 것이오."
"그래도 그자는 싫습니다."
황진이는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참, 면앙정 소식은 알고 계시오?"
"이 선비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지지난 해 기미년에 면앙정께서 송도 유수로 다시 오셨더랬습니다."
"역시 그랬군.
그래, 면앙정은 지금 어디 계시오? "
지함이 송순의 안부를 물었다.
"송도를 산적들에게 빼앗긴 죄로 파직당하고 낙향해 계십니다.
건강이나 상하지 않으셨는지 걱정됩니다."
"그 양반, 쉽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오."
"사람 앞일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그런 이치가 있다오."
지함은 산방 별채에 황진이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황진이가 물러가자
박지화가 지함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인,
자네가 돌아오기를 몹시 기다리는 눈치였다네."
"저를요?"
"우리 산방에 몇 번이나 올라왔었다네.
그때마다 언제쯤 돌아오신다고 했느냐,
그동안 무슨 전갈은 없었느냐고 자세히 묻고 돌아가곤 했다네."
"무슨 일로 그랬을까요?"
"글쎄. 우리에겐 통 속내를 비추지 않더군.
그냥 궁금해서 묻는다고만 하더군.
아까 무슨 말 없었는가?"
"별 말 없었습니다.
임꺽정 얘기 좀 하고,
면앙정 소식을 좀 들었을 뿐입니다."
"그것뿐이었나..."
박지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진이는 한동안 화담 산방에 머물렀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산책하러 잠시 계곡 언저리를 거닐을 뿐,
하루종일 별채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가끔 거문고를 뜯는 소리가 새어나올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황진이가 지함을 뵙기를 청했다.
"이 선비님, 저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황진이의 눈빛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무슨 뜻에서 하는 물음인지 모르겠소이다."
지함은 뜻밖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저를 어찌 생각하시느냐구요?
한갓 기생으로만 보십니까,
아니면..."
황진이는 뒷말을 흘렸다.
"어찌 그렇게만 보겠소?
나는 그대를 좋은 도반으로 여기고 있었소."
"도반... 저에겐 과분한 말씀입니다."
황진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곤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지함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것뿐이시옵니까?"
그러나 지함을 바라보는 황진이의 눈은 자신이 없었다.
예전의 도도하고 당차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무언가를 애원하는 듯,
갈구하는 듯 간절한 표정이었다.
"그렇소. 그것뿐이오."
지함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함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황진이의 마음을.
지금의 황진이는 지족 선사를 유혹하던 때의 도발적인 여인,
화담을 찾아왔을 때의 당돌한 여인 황진이가 아니었다.
오랜 그리움,
오랜 기다림을 안으로 삭이고 있는 조선 여인 황진이였다.
미모도,
재능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심성 여린 여인일 뿐이었다.
지함은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지함의 가슴에는 여인의 그리움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황진이의 길은 지함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지함은 또다시 행장을 꾸렸다.
황진이가 달려와 물었다.
"선비님, 어디로 가실 것인지요?"
"할 일이 있소.
산적들이 하는 일을 나도 좀 할 참이오."
"임꺽정이 하던 일이라면 사람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것인데..."
"그 재물을 어디다 씁디까?"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누어준다는 말은 들었지요.
그럼 선비님께서도 산적질을 해서 가난한 백성을 도우실 참인가요?"
"하하하. 그게 아니오.
나는 장사를 해서 재물을 모을 것이오.
그리고 그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오.
어차피 부자들 주머니를 터는 것이지만,
나는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도록 장사를 하겠다는 말이오.
그런 다음에는 임꺽정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처럼
나도 그리 할 것이오.
다만 나는 무턱대고 나누어 주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 재물이 그 사람을 오랫동안 살찌우게 할 약이 되지 않는다면
그가 그 자리에서 굶어 죽는다 해도 주지 않을 것이오.
임꺽정이 지금은 백성들의 박수를 받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소?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부자가 부자인 데에는 역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오.
이성계가 일어나 고려 왕조를 밑에서부터 뒤엎어 놓았어도
백성은 변함이 없었던 것처럼,
임꺽정이 베푸는 것도 아무 보람이 없는 일이오.
나는 백성들에게 재물만 나누어 주려는 것이 아니오.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오."
지함은 멀리에서 들려오는
임꺽정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서 말했다.
"그럼 어디로 가실 건가요?"
"정한 데는 없소.
여기저기 다닐 것이오."
"그러면 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게 있는 돈을 드리지요, 선비님."
"아니오.
그 정도 돈은 걸어가면서도 모을 수 있오.
용인에 있는 안 진사한테서 깨친 바도 있고,
그동안 우리나라의 물산을 보아둔 게 있어서
이제는 어디에 돈이 뭉쳐 있는지 훤히 보인다오.
그 뭉친 것을 풀어 없는 곳으로 흐르게 해야지요.
돈은 사람의 피처럼 돌고 돌아야 나라가 건강해지는 것이오.
돈이 잘 흘러야 백성들이 근심을 덜 수 있다오.
돈이 바로 기요,
기를 다스리는 일이 도인의 일인 것이오."
"저는 어찌 하면 좋을까요?"
"아마도 이번 해만 넘기면
송도가 곧 잠잠해질 것이니 크게 염려하진 않아도 될 것이오만..."
"그러면 얼마간 더 산방에 머무르다 떠나겠습니다."
황진이는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떠나다니?"
"기방에 머물기엔 너무 많은 나이,
이제 떠날 때가 되었지요."
"허나, 그만한 미모면 아직..."
"아닙니다.
물러날 때가 이미 지난 듯합니다.
그래선지 세상사가 다 시들합니다.
가야금을 뜯어보아도,
시를 읊조려보아도,
춤을 추어보아도
마음 한구석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황진이는 면앙정 대부인의 회갑연에 참석한 뒤로
다시는 그런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시를 좋아하는 풍류객들과 어울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송도에는 황진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미 오래 전에 이곳 송도를 떠날까 했었지요.
그러나,
선비님을 한번 뵙고는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실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래, 어디로 가실 작정이오?"
"정한 곳은 없어요.
송도를 떠나겠다는 생각밖에...
떠나게 되면
기생 황진이는 이곳 송도에 버려두고 가렵니다.
보통 아녀자가 되어 바깥 세상으로 가렵니다."
"잘 생각하셨소."
지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치없는 말씀이오나..."
황진이가 다음말을 꺼내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꺼리지 말고 말씀해보오."
"뭇남자의 손을 많이 탄 깨끗지 못한 몸이오나,
그래도 저를 마다하지 않는 평범한 남정네가 있다면,
그의 아낙이 되어 여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황진이의 얼굴에는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마냥 초연한 빛이 흘렀다.
지함은 그런 황진이의 말에 침묵으로 동조를 해주었다.
이튿날, 지함은 박지화에게 산방을 다시 떠나야겠다고 말했다.
"정휴와 남궁두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러게나. 이번엔 어딜 가려나?"
"조선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살펴놓았으니
이번에는 일을 좀 해야겠습니다."
"무슨 일을?"
"배우고 깨친 바가 있다면 마땅히 그것을 써야지요.
형님, 건강하십시오."
지함은 정휴, 남궁두와 함께 산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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