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화 형님과 내가 무정을 따라서 울진을 떠났지."
"무정이라구요?"
"무정이라고, 울진에서 만난 중이 있다네.
그 중이 불영사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해인사로 동안거를 하러 가다가
중도에 그만 두고 제 절로 돌아간다고 하더군."
"해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지요."
"그게 아니었다네."
"그럼 왜 그랬답니까?"
"깨우쳤다는 거야."
"깨우쳤다니요?
견성(見性)했다구요?"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5943
"그렇지.
오도송(悟道頌)까지 있더군.
난 불가의
깨달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네.
그래서 무정이 지내고 있는 묘향산 운곡사(雲谷寺)라는 절에 함께 갔지."
"그래서 깨달음의 정체를 알아내셨습니까?"
"천천히 들어보시게.
내가 두 이야기를 모두 해줌세.
진리를 구하는 길과,
그것을 펴는 일 두 가지를.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두게."
지함과 박지화가 무정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오르는 동안
단풍이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였다.
일행이 멀고 먼 길을 걸어 묘향산에 이르렀을 때에는 추색이 깊어졌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등줄기를 밟아 오른편으로 동해를 굽어보며
소백산, 설악산, 금강산을 지나 묘향산까지 닿은 것이었다.
벌써 시월.
화담과 함께 송도를 떠난 지 일곱 달이 넘었다.
돌림병을 앓고 난 박지화는 몸이 쇠잔해져 예전만큼 기운차게 걷지를 못하였다.
들녘은 가을빛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가을빛.
가을은 금(金)의 계절, 금은 아름답다.
그것도 황금빛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가을은 애처롭고 쓸쓸하고 힘이 없다.
아무것도 추진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잘 보존하였다가 봄을 기다리는 것뿐.
가을은 무엇을 시작할 수 없는 계절이다.
지함은 선대의 지혜가 모인 역학을 머리 속으로 곰곰이 따져가며 들길을 걸었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앉은 마을은 보기에도 척박한 곳이었다.
그저 사는 사람들끼리 목숨 부지하며 간신히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정도였다.
"물산이 없어."
박지화가 강원도의 산천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고래로 토질이 모래투성이고 높은 산이 많아서 농사가 잘 될 리 없었다.
게다가 중앙에서 너무 멀다 보니 조정의 지시도 잘 닿지 않고,
그러다 보니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심하여
양민의 숫자가 자꾸 줄어드는 지방이었다.
지함과 박지화는 북쪽으로 길을 잡아 묘향산을 타고 부지런히 올라갔다.
산꼭대기에는 벌써 단풍이 다 타서 잎이 지고 있었다.
산 위에서 내달려 몰아쳐오는 바람이 이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산으로 오를수록 추위는 점점 더 심해져 삭풍이 옷깃을 파고 들었다.
앞장선 무정은 두 사람을 묘향산 운곡사로 인도했다.
"비록 말법 시대라서 중들이 얻어맞고 절간이 불타기는 하나
진리는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소이다.
내가 불영사에 있다가
동안거를 하러 해인사에 가는 길에 좋은 경험을 했소이다."
"동안거를 하지 않고 떠나오셨다고 했지요?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A%B1%B0
왜 떠나오신 거요?"
박지화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무정은 그 사연을 말했다.
무정도 어려서는 다른 양반집 자제들과 어울려 서당에서 과거 준비를 했다.
향시를 무사히 마친 뒤에 대과 시험을 치러 한양에 갔다가 낙방했다.
그 뒤에,
연줄이 없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합격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벌써 조정 관리들의 부패가 심해져서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결국 무정은 과거 공부를 포기했다.
당시의 정치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급제시킬 사람을 미리 정해놓고 형식적으로만
과거 본다는 방을 내붙였다.
바로 윤원형의 세력이 기고만장하던 시절이었다.
과거를 포기한 무정은 친구들과 함께 호남 지방 유람에 나서,
지리산의 화엄동과 칠불동 등을 돌아보았다.
절마다 둘러보고 거기에서 유숙하면서 반 년을 보냈다.
광활한 대자연의 정적 속에서
처음으로 공소(空巢) 선사의 설법을 들은 그는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조계의 법맥을 이었다는 벽송 지엄의 수제자인 금산(金山),
바로 지금 그들이 가고 있는 운곡사의 방장 금산 선사를 만났던 것이다.
"자네의 기골을 보니 맑고 수려하여 보통 사람이 아닌 듯 싶네.
벼슬길은 속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중에도 있다네."
무정을 처음 대했을 때 금산이 한 말이었다.
"산중에는 어떤 벼슬이 있습니까?"
"심공과(心空科)라는 시험이 있다네."
"심공과요?"
"마음을 공(空)에 돌려 속세의 명리를 영원히 끊어버리는 것일세.
https://www.youtube.com/watch?v=S9COX-5Ks2k
서생(書生)으로는 비록 백 년을 지낸다 해도 얻는 바는
다만 공허한 이름뿐이라는 걸 명심하게.
진정한 벼슬은 산중에 있다네."
금산은 속세의 과거 급제 말고
공(空)을 깨우치는 공부를 하여 그것에 급제하라,
즉 견성 성불(見性成佛)을 하라고 일렀던 것이다.
그러나 휴정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무엇이 심공과에 급제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금산은 눈을 꿈쩍꿈쩍 해 보였다.
말로 할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진리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금산은 그렇게 했던 것이었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 많다네."
그러면서 금산은 <전등록>, <선문염송>, <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법화경>, <유마경>, <반야경>
등의 경전을 내주면서 말했다.
"자세히 읽어보고 짚이는 데가 있거든 찾아오게."
무정은 여러 경을 탐독하였지만 아무리 읽어도
글자에만 얽매이게 되고 가슴만 답답해질 뿐이었다.
다만,
알지 못할 곳에 엄청나게 커다란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무정은 그 세계에 과감히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큰 벼슬을 얻으리라고 작정했다.
무정은 마침내 스스로 은도를 잡고 머리칼을 잘라버렸다.
"차라리 중이 되어 일생 동안 천대를 받을지언정
맹세코 공맹(孔孟)의 노예는 되지 않겠다."
당시로서 중이 된다는 것은 여간 큰 용기를 갖지 않고서는 어려웠다.
자칫하면 유림에게 잡혀 뭇매를 맞았고,
군졸에게 붙잡히면 승복을 벗고 군대에 끌려가야 했다.
어쩌다 세도가의 눈에 띄면
하인으로 잡혀들어가 죽도록 일만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도 양반 자제인 그가 입산을 결심했던 것이다.
바로 정휴와 같은 길에 들어섰던 것이었다.
나이도 정휴와는 두어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그 후 휴정은 금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식으로 불가에 입문하였다.
그리고 운곡사에서 농사도 짓고
부역도 나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 불영사 도유 스님이 여는 하안거 법회에도 몇 차례 참석하였고,
올해에는 해인사 선방에 가서 동안거에도 참여할 참이었다.
그런데 해인사를 가는 길에 감성촌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마을이 고요하여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느닷없이
'낮에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대오각성을 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낮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림자 없는 나무의 그늘을 보았네
무덤 앞 석상(石像)이 껄껄 웃고
나귀띠를 가진 사람들이 몰려와
손뼉을 치고 춤을 추네.
하늘에 꽃비 내리고 감로수가 땅을 적시니
이제야 대장부 할 일을 마쳤네.
"어떻습니까?
저희들 승가(僧伽)의 말이라서 잘 들리지 않으시겠습니다."
"아니오.
그 말을 알 수 있소.
낮닭이 우는 소리에 세상 이치를 다 깨우치셨다?
알 만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누구한테 이야기하셨습니까?"
지함이 물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소.
그래서 해인사 동안거를 그만두고 운곡사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스승님께 인가를 신청해야지요."
"혼자 깨달은 건 인정되지 않는가요?"
"진리란 보편타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반드시 선지식한테서 인가를 받아야만
깨달음을 인정해줍니다.
저 홀로 깨달은 사람 가운데는 삿된 길로 빠진 걸
스스로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꽤 있거든요.
그걸 경계하는 것입니다.
허허허."
"맞소.
나도 깨달았다고 생각을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화담 선생님께 가기만 하면 묵사발이 되곤 했소이다."
박지화가 껄껄 웃었다.
"누구나 낮닭 우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깨닫는 것은 아닐 테고,
그 오도에 얽힌 사연이 있을 듯하오만..."
지함이 궁금해서 물었다.
"허허허.
오도 사연이랄 것이 뭐 있습니까?
제가 한번은 불영사 가는 길에 어느 주막에 들렀는데,
그 집 주인이 간밤에 꾼 꿈 얘기를 해주더이다.
저도 마침 꿈을 꾸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만 이상한 생각이 듭디다.
이 시를 들어보시지요."
주인이 손님에게 간밤의 꿈 얘기를 하자
손님도 주인에게 자기가 꾼 꿈을 얘기하네
이제 얘기하는 그들
역시 꿈 속의 두 사람
"꿈,
나는 공을 찾아가는 길이었지요.
공을 찾아가는 길에 꿈을 만났고
낮에는 잘 울지 않는 수탉이
목청을 길게 뽑고 울어제끼는데
갑자기 내 고향집이 생각났소.
진리가 그처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을..."
휴정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을 나누지 않고 묵묵히 길을 었다.
묘향산 운곡사로 가는 길은 제대로 나 있지 않았다.
깊은 오지라서 신도들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농사를 지어가며
공부에만 전념하는 스님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관아가 있는 곳에서 산길로 오십여 리나 떨어져 있어
관원의 등쌀도 심하지 않았다.
협곡 이십 리로 된 끝자락에 아담한 운곡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절 아래에 마을조차 없어서 몹시 적막했다.
세 사람은 길을 재촉하여 운곡사로 올랐다.
이때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고작 일 년도 안 된 여행인데 지함은 마치 자신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길을 따라 끝없이 걸어오기만 한 것 같았다.
화담이 홀로 떠나버리고
박지화가 염병에 걸려 여행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로
한때 고민하기도 했으나
지함도 박지화도 다시는 그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는 느낌이었다.
눈발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눈앞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눈보라가 사람을 호린다고 하더니
정말 세 사람은 한동안 길을 잃고 이리저리 해맸다.
처음 송도를 떠날 때였다면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걷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인 것처럼 담담하게
눈보라 속에 파묻힌 길을 찾아 전력을 다해 나아갔다.
길을 잃은 공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전혀 생기지 않았다.
무정이 앞장서서 간신히 운곡사에 이르렀을 때는
아직 대낮인데도
함박눈이 쏟아지는 바람에 천지사방이 어두컴컴했다.
방안에 불을 밝혔는지 그림자 둘이 문에 어른거렸다.
"차라는 것은 정성이란다.
정성이 깃들어야 차맛이 잘 우러나는 법이야."
불을 쓸 때 노랗고 흰 불을 가려 쓰고,
물빛이 세 번 변할 때까지 온도를 높이라는
노승의 말이 문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리고 다기는 이렇게 뜨거워진 찻물을 고루 따라서
따뜻하게 데워놓아야 차가 제대로 우러나게 되는 법이지."
무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합장을 했다.
곧 방문이 열리더니 이가 다 빠진 노승이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왔는가?
동안거에 들어가라고 선방에 보냈더니 왜 그냥 돌아오는고?"
"갈 필요가 없어서 돌아왔습니다."
"갈 필요가 없다니?"
"깨달은 바가 있어 감히 인가를 청하러 돌아왔습니다."
"그런가?
오늘 밤에 법의를 입고 목욕 재계한 다음 내 방으로 들게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분들은?"
"송도에서 온 박지화입니다."
"저는 이지함입니다."
노승이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일어나 합장을 했다.
"어서 오시오.
이런 누추한 암자에 웬일로?"
"무정 스님하고 불영사 근처에서 만나 내내 같이 오는 길입니다."
금산은 일행을 요사채로 이끌었다.
조금 전에 금산에게서 차 달이는 법을 배우던 시자승은
찻물을 뜨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법당 뒤로 뛰어갔다.
그곳에 샘이 있는 듯했다.
시자승이 나무 소반에 찻잔을 받쳐들고 들어와
무릎을 꿇고 녹차 넉 잔을 따랐다.
금산은 찻잔에서 찻물이 우러나오는 모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정의 한소식을 점검할 선문답을 준비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터였다.
그날 밤 조실에서는 금산과 무정의 선문답(禪問答)이 있었다.
스승 금산은 제자의 깨달음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날카롭게 캐묻고,
제자 무정은 낱낱이 고했다.
이튿날,
지함과 박지화가 잠에서 깨어나 아침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섰을 때
무정은 벌써 나무를 한 짐 해가지고는 계곡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아니,
인가를 못 받으셨소?"
"받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일을 이루어내시고는 설법 한번 없습니까?"
"예.
원래는 깨달은 사람이 하나만 나와도 인근 사찰에서
대중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법회를 여는 게 상례라 하나,
시절이 어수선하여 그렇게 하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진리는 변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일부터 하십니까?"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한끼 밥을 먹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저는 한끼도 먹지 말아야 했을 것을
여태껏 공짜로 먹고 살아왔습니다그려.
이 목숨이 그대로 빚이로군요."
지함이 이렇게 말하자 무정은 껄껄 웃었다.
무정은 나뭇짐을 헛간에 풀고 지게를 세워놓았다.
"빚은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것은 다 자기가 갚는데 빚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에게 빚지고 자기에게 갚는 것이니 이 얼마나 공정한 이치입니까?"
"그렇지만 우리 같은 양반네들은
평생 하는 일도 없이 배불리 먹고 살지 않습니까.
밥만 축내는 밥버러지들이올시다."
"양반이라고 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국사도 일이니 농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지요.
마음의 밭을 가는 것도 일이고 백성을 가는 것도 일입니다.
백성을 깨우치는 일이
우리네 중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 제일 큰 일이지요.
사실 시주를 청하고 불법을 전해 주면서 먹고 사는 게 옳은 건데
여기는 시주를 받을 수 없는 오지라서 하는 수 없이 농사를 직접 짓고 있습니다.
신도들을 만날 기회가 적으니 부처님 전에 죄를 짓는 것이지요.
이곳 현은 시주는커녕 우리가 시주를 해야 할 판입니다.
탐관오리, 탐관오리 하지만
도둑도 있는 데서 훔쳐가야 도둑질이지,
없는 곳에서 빼앗아 가면 그건 살인입니다.
우리 절에서 어떤 스님이 저희가 먹고 남은 음식을 갖고
현에 나가 나누어주다가 관헌에게 붙들려 갔지요.
그 길로 도첩을 빼앗기고 군사로 징집되었답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878
함부로 나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백성을 깨우치겠습니까?"
무정이 세상을 비관하자 지함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스님,
눈앞의 것만 보시면 되겠습니까?
중생을 모두 구제할 방도를 찾으셔야지요.
이제 상구보리는 되었고 하화중생이 남은 일 아닙니까?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0820
하하하."
"아이쿠,
한 대 맞았습니다.
그런 선생께서는 어떻게 하화중생을 하시렵니까?"
"하화가 아니올시다.
저는 아직 도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중생과 함께 도를 이루어나가야 하는데,
본시 배운 게 없어서 내놓기가 영 부끄럽습니다.
아는 거라곤 역학밖에 없으니
역학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어야지요."
"사람의 운수를 봐주는 것이야
당장의 고통은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치료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전생 업보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제가 깊이 공부하지 못해서 다 깨치지는 못했지만
몇몇 사람의 사주를 보면서 그럴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윤회,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706
그걸 사주로 알아내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업보를 밝혀내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떠돌이 기질이 많은 나 같은 사람은
무언가 그에 맞는 전생 업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떠돌이 기질을 억제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걸 통해서 무엇을 풀어내야 할 것인가를 말해주어야 합니다.
도화살이 있는 여자에게
행실을 바르게 하라고 아무리 말로 이른들 먹혀들겠습니까?
https://socrazy.tistory.com/63
말은 귓전으로 흘려 듣고
머슴 녀석들 사타구니만 바라보게 되지요.
그런 사람에게는 본인이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스스로 극복해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보여야 합니다.
사주팔자는 기(氣)이지만
그것을 다스리는 인간의 의지는 이(理)입니다.
스님은 이를 가르치십시오.
제가 돌아다니면서 기를 가르치겠습니다."
"하하하.
재미있는 말씀이십니다.
아주 지당한 말씀이기도 하구요.
허나 중생무변(衆生無邊)이란 말씀도 못 들으셨습니까?"
중생은 끝도 없이 많아서 다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서원도(誓願度)올시다.
허허허."
지함이 익살스럽게 무정의 말을 받아넘겼다.
지함의 마음은 정말 그러했다.
끝까지, 고통받는 백성이라면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구해야 한다는 큰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올라 계곡에 아침 햇살이 깃들기 시작했다.
하긴
이런 난세에 물 맑고 바람 소리 그윽한 산사에서
온갖 시름 다 잊고 구도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그것도 대단한 복이리라고 지함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함의 머리 속에는
이번 주유중에 보았던 백성들의 굶주림, 아우성,
염병으로 죽어나간 처참한 시체들의 형상이 들끓고 있었다.
지함의 머리에 문득 운주사에서 보았던
미륵불상이 선연히 떠올랐다.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9927
미륵불은 중생을 탓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내쫓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고뇌에 빠져 있었다.
미륵불은 그래서 과연 무엇을 찾아냈을까?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지함은 턱을 괴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눈보라가 무섭게 몰아쳤다.
방문이 덜컹거리며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옷깃이 펄렁거렸다.
눈을 반쯤 내리감은 지함의 모습은 마치 미륵불 같았다.
바로 운주사의 고뇌하는 반가사유상을 닮은 듯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0%98%EA%B0%80%EC%82%AC%EC%9C%A0%EC%83%81
"두 분 선비님들.
이미 <신서>를 보셨으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우리나라에는 머지 않아 병겁이 찾아들 것입니다."
무정이 말했다.
"그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나 아직 눈에 확연히 들어오질 않습니다."
"그러나 곧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저희 같은 승려는 어떻게 그런 병겁을 막아내야 할지 걱정입니다."
"그래서 오늘밤에는 제가 금산 선사께 선문답을 청할까 합니다."
"이 선비께서요?"
"그렇습니다."
"허허허.
그거 좋은 생각이십니다."
박지화는 지함이 장난을 하는가보다 하고 넘겨버렸지만
지함은 정말로 금산에게 선문답을 청했다.
그날 밤,
무정이 했던 것처럼 지함도 목욕 재계하고 금산의 방에 들어갔다.
"깨달음이 있소?"
"있습니다."
"그것 좀 이리 주시오."
"뭘 말씀이십니까?"
"깨달음이 있다면서요?"
금산이 지함을 공격했다.
그러자 지함이 지지 않고 방어를 했다.
"이미 선사께 드렸습니다.
제 것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자유자재라서
선사께 있다가 제게 오기도 하고,
제게 왔다가 선사께 도로 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놈을 꼭 잡아서 얼굴을 보리다."
"제가 잡아드릴까요?"
"혜가라는 이는 도를 구하려고 팔뚝을 잘라 달마에게 바쳤는데,
선비는 내게 무엇을 주겠소?"
"이미 다 주어서 드릴 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함이 응수를 하자 금산의 눈썹이 치켜올라가더니
또 비수같은 질문이 떨어졌다.
"그렇게 말하는 그 입은 아직 남아 있지 않소?
그 입을 내게 바치시오."
"부처의 입을 틀어막으면 중생이 고통스럽습니다."
지함은 벌떡 일어나
방장에 있던 불상을 내려앉히고
헝겊으로 부처의 입을 동여매었다.
"이만하고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겠습니다,
선사님."
"예끼, 이 사람!"
"스님,
법랍만 많았지 순 땡초이십니다!"
"법당은 우람한데
부처는 어디로 놀러갔는가!"
금산이 다시 역공을 했다.
"하하하.
이 부처는 활불(活佛)이라서
법당에는 답답해서 있지 못하고
팔도를 주유중이올시다."
"자네의 공부는
상(象)을 모아가는 격물치지법(格物致知法)이네만
나는 상(相)을 자꾸 버리기만 하는 진공법(眞空法)일세."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132
http://www.brahmanedu.org/hanguk/books/heart/books_heart_vods_summary.html
진공법(眞空法)
지함은 그 말에 잠깐 멈칫했다.
상을 자꾸 버린다,
지함은 그동안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밝히려고만 했지
무엇을 버릴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함의 등줄기에 불이 났다.
어느새 금산의 주장자가 등줄기를 내리치고 있었 던 것이다.
"하하하! 하하하!"
주장자를 얻어맞은 지함이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 높여 웃었다.
"무정이 들어오너라."
금산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서 숨을 죽이면서 두 사람의 문답을 듣고 있던
무정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많이 늙었나 보다.
도둑놈을 매질해서 내쫓으려 했는데
이 도둑놈은 매를 맞으면서도
내 물건을 훔쳐갔다.
아이고,
평생을 지켜온 보물을 잃고 나니 내 마음이 다 시원하구나."
무정이 빙그레 웃었다.
지함은 기가 생하고 멸하는 이치,
오고 가는 두 이치를 하나로 묶어냈던 것이다.
분별심을 버렸던 것이다.
박지화는 무슨 말인지 앞뒤 연결이 잘 되지 않아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지함은 금산에게 한 차례 큰절을 올렸다.
그로부터 지함은 금산,
무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정은 이미 <선가보감(禪家寶鑑)>,
<도가보감(道家寶鑑)>, <유가보감(儒家寶鑑)> 세 권을
저술할 만큼 학식이 높은 중이었다.
도화 법담이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세 사람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아침해가 뜨는 줄도 알지 못했다.
지함과 박지화는 운곡사에서 보름을 묵었다.
헤어지는 날 무정과 금산 두 중은 몹시 서운해 했다.
그러나 무정이 써서 내민 글 넉 자를 읽고
두 사람은 호쾌하게 웃으면서 길을 떠났다.
무정이 써서 보인 글자는
'회자정리(會者定離)'였다.
만나는 순간 이미 헤어짐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www.youtube.com/watch?v=tjYrk3i0L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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