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일이네."
"인사(人事)가 아닐세."
남궁두와 전우치가 정휴를 위로했다.
그러나 정휴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화담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숨까지 몰아 한자 한자 써낸 책,
그것을 주인에게 전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든 귀신의 조화이든,
어쨌든 정휴 자신의 잘못이었다.
정휴는 용서를 구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 더 서글펐다.
화담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지함은 그 사실을 모르는 채
지금 어느 지방을 지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년 삼월이나 되어야 지함을 만날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정휴는 계룡산 고청봉 용화사로 돌아왔다.
전우치와 남궁두는 신원사 계곡으로 떠나갔다.
용화사 주지 혜명(慧明)은
마침내 정휴의 행자 생활을 면제시켜주었다.
벌써 오래 전에 명초에게서 받아두었던 도첩을
이제야 인정하였던 것이다.
절 살림은 전보다 훨씬 넉넉해져 있었다.
윤원형의 누이로서 어린 명종을 대신해 섭정하는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를 보호한 덕분에
산골 구석의 사찰까지도 그 덕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휴는 오랜만에 아침 저녁 예불에도 참석하며
중다운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과 저녁으로 두 번에 나누어 참선 수행에도 힘을 썼다.
그러는 중에도 불에 타버린 <진결>이 눈에 어른거려
마음이 흔들리곤 했으나 애써 물리쳤다.
그래도 정 마음이 잡히지 않을 때에는 명초 방장이 읽던
<벽암록(碧巖錄)>이나 <조주록(趙州錄)>, <선문염송>
같은 화두집(話頭集)을 펴놓고 읽었다.
울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안거(冬安居)가 시작되었다.
추운 겨울철에 중들이 한 곳에 모여서 수행을 하는 동안거,
정휴는 정식으로 중이 된 이후 처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동안거 기간인 음력 10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중들은 일체 외출을 하지 않고 좌선하면서 수행만 했다.
정식으로 중이 된 정휴는 연일 지게를 지고
고청봉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울력에서 아주 빠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목하니 시절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동안거가 끝났다.
석 달이 삼십 년이나 되는 듯 긴 시간이 지난 것이다.
화담이 말한
임자년(壬子年, 1552) 삼월 여드레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결>이야 불에 타 없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지함을 만나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말만이라도 전해야 했다.
전우치, 남궁두도 계룡산 생활을 정리하고,
지함의 문하에 들어가기 위해 용화사로 왔다.
삼월 초하루가 되어 세 사람은 마침내 송악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동안 비어 있었을 산방 청소도 하고
지붕도 고치면서 지함을 기다리기로 했다.
화담 계곡에 오르니 멀리 산방이 보였다.
"아니, 연기가 오르지 않는가?"
남궁두가 산방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과연 산방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아지랑이가 하늘로 오르듯이 하늘거리는 연기에
정휴는 봄을 느꼈다.
"형님이 벌써 돌아오셨나?"
"어서 가보세.
아무리 화담이라고 한들 설마 지함이 돌아올 날짜까지 정확히 맞출려구?"
전우치가 말했다.
정휴는 연기를 피운 사람이 지함이든 아니든
화담 산방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반갑기만 했다.
세 사람은 서둘러 산방으로 올라갔다.
"누구시오?"
산방에 이르자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함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정휴라는 중입니다."
잠시 후 목소리의 주인공이 문을 열고 나왔다.
박지화였다.
"저는 이지함 선비를 잘 아는 계룡산 용화사의 중입니다.
작년 봄에 여기에 들렀다가 화담 선생님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아, 정휴 스님.
이야기는 진작 많이 들었소.
그런데 또 그 소리를 듣는군."
"예? 무슨 말씀을..."
"화담 선생님이 작년 봄에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두고 하는 말이오.
내가 추석 때까지 화담 선생님을 뫼시고 주유를 다녔는데,
이곳 사람들은 작년 4월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원..."
"아,
그렇다면 지함 형님 하고 함께 다니신 바로 그 선비님이시군요."
"그렇소만..."
"그런데 어떻게 혼자서만?"
"지함은 아직 안 돌아왔소.
나는 돌림병에 걸려 몸이 쇠약해져서
개마산(蓋馬山)까지 갔다가 중도에 돌아왔고,
지함은 계속 주유를 더 하기로 하여 길을 갈랐소."
"그랬군요..."
"그건 그렇고,
도대체 화담 선생님이 어떻게 되었다는 건지 속 시원히 말 좀 해보시오."
"제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지요."
"안으로들 드시오. 밖에서 이럴 게 아니라..."
박지화는 정휴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야기를 다시 재촉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요?
화담 선생님이 봄에 돌아가셨다니...?"
"선생님은 여기 송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작년 사월 초닷새 청명일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청명일이면 화담 선생님은 우리와
한양 가회동 이지번 선비 댁에 있었는데..."
박지화가 어리둥절해 하며 말을 이었다.
"그 후로도 화담 선생님은 우리와 내내 같이 여행을 하셨소.
화담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은 팔월이었소.
경주 박 진사 집에 머물고 있을 때였지요.
기력이 쇠하여 더이상 함께 주유를 할 수 없다는
서찰을 남겨두시고 종적없이 사라지셨지요.
그런데 그 화담 선생님이 청명일에 이미 돌아가셨다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려.
분명 팔월까지는 우리와 함께 다니셨단 말이오.
그런데 청명일에 돌아가셨다니,
그렇다면 우리가 귀신하고 같이 돌아다녔단 말인가요?
도대체 선생님이 돌아오신 때가 언제였소?"
"작년 이맘 때였습니다.
세 분이 여행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오셨습니다."
"추석 지나고 돌아오신 게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박지화가 한번 더 물었다.
"그렇습니다.
삼월 열흘인가 열하룻날인가,
그때였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오.
정말 화담 선생님께서 여기 돌아오신 게 그때였는가...?"
"그렇다니까요.
돌아가신 날짜가 분명 청명일이었다니까요."
박지화는 넋을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정휴가 거짓말을 할 리도 만무했다.
그렇다면...?
박지화는 지난 봄과 여름 내내 함께 여행을 한
그 화담이란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더럭 의심이 솟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소.
음식을 잘 드시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박지화는 화담과 함께 여행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걸음도 우리보다 날래셨고... 그렇지.
호랑이를 만났을 때도 그랬지.
그때도 정말 이상했어.
우리에겐 금방 잡아먹을 듯 기세등등하게 대들던 그 무서운 호랑이가
선생님을 보더니만 슬슬 꽁무니를 빼더란 말야..."
박지화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선화(仙化)한 몸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거로군."
박지화가 눈을 감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이구 선생님!
천수(天壽)를 다 잃고 지수(地壽)로 사신다더니
그마저 끊어지니 영영 가셨군요."
박지화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이미 몸을 빠져나간 혼(魂)을 잡고
백(魄)으로 다니셨던 것입니다.
저도 오죽하면 화담 선생님의 묘까지 파보고 확인했겠습니까."
"그런 일까지 있었소?"
"박 선비님이 지금 화담 선생님의 임종 날짜 때문에 혼란스럽듯이
저도 작년 여름에 제 손으로 파묻었던 화담 선생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결국은 묘를 직접 파보고 확인까지 했지요."
정휴는 지난해에 겪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화담 선생님께서 지함에게 책을 남기셨다구요?"
정휴의 얘기를 듣고 있던 박지화가 물었다.
"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함이 내년 삼월 여드레 유시에 돌아올 것이니 그때 이 책을 꼭 전하라,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정휴는 화담에게서 전해 받은 <홍연진결>을
지함에게 전하기 위해 겪었던 고초를 박지화에게 소상히 말해주었다.
"고생하셨소이다."
"고생을 했으면 보람이 있어야 되는데,
그만 그 <진결>이 타버리지 않았습니까?"
"<진결>이 타버렸다구요?"
"저희가 고생고생해서 울진에 있는 어떤 주막에 이르러서 보니까
형님은 이미 주막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저희가 형님이 묵었던 방에 들어가니까
바로 그 방안에 있는 화로 안에 그 책이 재로 화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떠난 다음에 바로 당도했었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걸 형님이 태우셨다니..."
"그 책이 화담 선생님이 쓰신 것이 확실합니까?
책 제목이 다르던데...
그 책 제목은 <신서비해>였소."
"제목이야 뭐로 둔갑했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화담 선생님이 쓰신 그 <홍연진결>이었습니다.
저희가 타다 남은 종이를 보았습니다.
틀림없이 그 책이었습니다."
"어허, 이 노릇을 어쩐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곧 지함 형님께서 돌아오실 텐데,
할 말이 없습니다."
정휴가 난감해 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체 그걸 왜 태우셨습니까?"
"말도 마시오.
그 책 때문에 나나 이지함 그 사람,
목이 날아갈 뻔했습니다.
그 책을 가지고 있던 아이의 부친은 칼에 찔려 죽었지요."
박지화는 울진에서 겪었던 일을 정휴에게 말해주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그걸 불지르셨군요."
"그렇구말구요.
그 책을 계속 지니고 있다 보면 어떤 목숨이 더 사라질지 모르는 판국이니
태워 없애야 했지요."
"아이구,
그렇지만 화담 선생님께서 지함 형님께 꼭 전하라던 책인데...
그 책을 책 주인이 태워버리다니..."
"주인이 자기 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불을 지른 셈이군..."
"저는 지함 형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다만 사실은 사실대로 알려야겠기에..."
잠시 뒤 마음을 가다듬은 정휴는
박지화에게 화담 선생의 주유에 관해 하나하나씩 물어갔다.
두륜산에서 왜 다른 길로 빠졌는지,
지리산 산천재에는 가지 않겠다고 서찰까지 보냈다가
왜 갔는지,
정휴는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면서 정휴는 화담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겪었던
그간의 고초를 박지화에게 털어놓고,
박지화는 박지화대로 울진까지 갔던 노정을 차례로 이야기했다.
"홍성에서는 왜 갑자기 배를 타고 해남으로 떠나가셨습니까?"
"선생님이 그리 하자고 하셨소.
갑자기 바다로 나가자고 하시더니 막무가내로 어선에 올라타셨소.
우리도 어리둥절했지요."
"말씀을 듣고 보니,
일부러 저를 따돌리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를 만날까봐 피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듯한 해석이군요."
"두륜산을 넘어서는 왜 곧장 오시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밤새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허탕만 쳤습니다."
"그것도 화담 선생님 때문이오.
두륜산을 넘어 화순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선생님께서 갑자기 길을 바꾸어 해사로 향하셨소.
아마도 스님 일행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신 모양이오."
"그러니 만날 리가...
그래서 저희는 지리산에는 반드시 들르시리라 짐작하고 앞질러 갔더니
화담 선생님의 서찰이 와 있습디다.
몸이 불편하여 한양으로 돌아가시겠다는 내용이었지요."
"선생님은 내내 우리보다 더 건강하셨소.
한번 아픈 적도 없었소.
진지를 한 끼도 안 드셨는데도..."
"그러면 그때도 일부러 저희를 따돌리려고
거짓으로 편지를 쓰신 거로군요."
"그런 것 같소."
"나중에 남명 선생이 화담 선생님의 깊은 뜻을 설명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희는 약 오르고 분해서 속이 터졌을 겁니다."
"그래,
남명 선생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화담 선생님은 현신이었답니다.
이미 육신을 잃어버린 혼백이 지기를 받아 돌아다니는 거라구요."
"화담 선생님이 현신하셨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괜찮게요.
울진에서 그 책이
잿더미로 변한 것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낙담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이 책을 바꿔놓기까지는 했는데,
지함 형님이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만
태워버렸으니..."
"우리는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소."
"화담 선생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이제 혼백이 다 흩어졌으니 다시 현신해서 책을 지으실 수도 없고...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함이 오면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에 함께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정휴 일행은 타버린 <홍연진결>에 대한 걱정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송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황진이가 홀연히 산방에 찾아왔다.
"저어,
박지화 선비님을 찾아왔습니다."
박지화가 놀란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천하의 황진이가 그를 찾아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황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지함 선비께서 지금 임꺽정이라는 산적에게 잡혀 있습니다.
산적들은 저를 먼저 풀어주는 대신에 이 선비를 잡아놓았습니다.
곧 계책을 써서 뒤따라오시겠다고 했지만 걱정이 되어서 왔습니다."
황진이는 초췌한 행색이었다.
옷은 해지고,
얼굴은 창백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오히려 그의 아름다움을 더 해주는 것 같았다.
전에 보았을 때는 양반가 후원에 피어 있는 화사한 모란 같더니,
지금은 들에 피어 있는 한 떨기 들꽃마냥 청초해 보였다.
"이지함을 만났소?"
"예.
한동안 같이 다녔습니다."
"그래요?"
"그러다가 구월산에서 저 먼저 내려오는 길입니다.
이 선비는 여드레까지 산방에 오지 않으면
박지화 선비께 말을 전해도 된다고 했는데,
제가 마음이 급해 미리 왔습니다."
"내 당장 놈들을 요절내야지."
박지화가 흥분하여 분기를 돋구자 황진이가 손을 저어 말렸다.
"고정하십시오.
이 선비께서 여드레가 되기 전까지는 걱정 말라고 하셨습니다."
"걱정을 말라니요,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지 모르는데...
당장 가서 구해야 합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보시옵소서.
소녀, 물러가옵니다."
이야기를 마친 황진이는 다시 산방을 떠나갔다.
박지화는 지함이 걱정되어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박지화가 좌불안석이 되어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여드레가 되었다.
화담 계곡에는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미 춘분이 열흘여 지난 뒤라 봄빛이 푸룻푸릇해졌다.
하늘에는 종달새가 높이 날고 나비가 나풀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가자 박지화는 오기는 다 틀렸다며 더욱 불안해 했다.
"난 선생님 묘에나 다녀오겠소."
지함이 돌아오지 않으면 날이 밝는 대로 당장 구월산으로 달려갈 기세로 박지화가 말했다.
드디어 화담이 말한 유시(酉時)가 되었다.
"저길 보게. 선생님 말씀이 틀림없잖은가!"
계곡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지함이었다.
처음에는 아지랑이가 아른거려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휴는 곧 그가 바로 지함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형님!"
정휴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지함을 맞았다.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지함이 환히 웃으며 정휴의 손을 잡았다.
"작년,
형님이 길을 떠나신 직후에 금강산을 떠나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예 있었단 말인가?"
"화담 선생님을 뵙고는 다시 공주 용화사로 갔습니다."
지함은 화담이 보이지 않는 것에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전우치와 남궁두를 가리키면서 누군지를 물을 뿐이었다.
"예,
계룡산에서 수도하던 도인들인데 산방 소식을 듣고는 저를 따라왔습니다."
"화담 선생님은 이미 선화하셨는데,
늦으셨구려."
"아닙니다.
이지함 선생님의 고명을 듣고 왔습니다."
"내게도 고명이라고 할 만한 이름이 있소?"
"형님,
전우치는 병법에 남달리 관심이 많은데
지리, 천문을 더 배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남궁두,
이 사람은 역학을 오래도록 연구하여 제법 앞길을 볼 줄 안답니다."
"볼 줄만 알아서는 술(術)에 머물게 되오.
그런 술을 잘못 쓰면 안 배우니만 못하다오."
"그래서 감히 가르침을 청하러 왔습니다."
두 사람이 지함에게 큰절을 하면서 제자로서 예를 올렸다.
"병법에 관심이 있는 것은 그럴 듯합니다만..."
지함이 전우치를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함은 지리산 산천재에서 만난 다른 두 사람을 생각했다.
정개청, 서치무. 그리고 정휴를 따라 나타난 두 사람,
전우치와 남궁두. 이들 모두가 화담이 불러모으는 인연임에 틀림없었다.
지함은 두 사람을 산방에 입실토록 했다.
그때 박지화가 화담의 묘소에서 돌아왔다.
"지함, 용케 돌아왔군.
반갑네, 반가워.
그래, 몸은 무사한 거고?"
"잘 다녀왔습니다.
형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네.
그건 그렇고,
그래 어떤 도적떼에게 잡혀 있었나?"
박지화는 지함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며칠째 굳어 있던 얼굴을 폈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도적의 무리라고 해야 헐벗고 굶주린 유랑민들이 대부분이어서
포악하기는 하나 기운이 약하지 않습니까?"
"자초지종을 말하게.
답답하이."
"구월산 근처 안악을 지날 때 마침 날이 어두워
어느 양반가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날 밤에 도적들이 몰려와 그 집 재산을 다 털어갔습니다.
이 도적들이 객방을 들여다보더니 황진이를 보고는
얼굴이 반반하다고 생각했는지 산채로 끌고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이튿날 제가 산채로 달려갔습니다."
"제발로 도둑의 소굴로 들어갔다고?"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개마산에서부터 쭉 함께 다닌 여잔데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어야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박지화, 정휴, 남궁두, 전우치는 귀를 바짝 세우고 지함의 무용담을 들었다.
지함은 도적들이 숨어 있다는 구월산으로 단신 잠입했다.
그러나 산채에 다 들어가기도 전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도적들에게 붙잡혔다.
도적들은 사냥에서 노획한 산짐승 다루듯
지함을 산채 마당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지함을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도적 한떼가 산채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지함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인두(人頭) 세 개가 툭 떨어졌다.
"하하하하."
벽력 같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도적떼의 우두머리가 말등에 올라탄 채
손에 묻은 피를 바지춤에 썩썩 문지르며 껄껄 웃고 있었다.
그는 몸집도 거한인데다 눈알이 부리부리하여
과연 도적의 수장다운 면모가 있었다.
"네놈들은 무얼 털어왔느냐?"
"예,
안악의 양반집을 털어 쌀 닷섬하고 금 한 관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두목이 좋아하는 물건도 가져왔습니다."
"그게 뭐냐?"
그러자 졸개들이 나무를 엮어 짠 창고로 들어가더니
한 여인을 끌고나왔다.
황진이였다.
황진이와 지함의 눈이 마주쳤다.
황진이는 지함이 그곳에 묶여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곧이어 황진이는 얼른 시선을 거두어갔다.
아는 체를 하면 지함에게 해라도 끼치게 될까봐서였다.
"핫핫핫.
물건 하나 제대로 골라왔구나.
어디 보자."
두목이 말에서 내리더니 황진이의 저고리 고름을 꽉 움켜쥐고 단숨에 잡아뜯었다.
그러자 하얀 젖무덤이 봉긋 튀어나왔다.
"그 여자한테 손대지 마랏!"
지함이 소리를 질렀다.
"뭐얏!
이 녀석이 어느 안전에서 발악이야.
죽고 싶어?"
졸개 하나가 지함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욱!"
"더러운 양반 새끼!
백성들에게 들러붙어 피땀이나 빨아 쳐먹고 사는 거머리!"
졸개 몇이 더 달려들어 지함을 마구 짓이겼다.
"왜 이리 소란한가?"
그때 산채 쪽에서 노인 하나가 걸어나오면서 물었다.
몸집이 작고 깡마른 사람이었다.
그러자 두목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사부님,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네.
그런데 이자들은 왜 여기까지 끌고왔는가?"
"저년을 잡아왔다는데 이놈이 제발로 기어왔습니다."
"당장 죽이지 않고?"
"조금 더 있다가 두 연놈을 한꺼번에 죽여 없애겠습니다."
두목이 졸개를 불렀다.
"얘들아,
이놈은 나무기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저년은 찬물에 헹궈서 방에 던져넣어라."
"예."
졸개들이 두 패로 나뉘어 지함과 황진이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곧 지함은 나무기둥에 거꾸로 매달리고,
황진이는 계곡 쪽으로 끌려갔다.
졸개들이 황진이를 끌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사라지자
사부란 자가 두목에게 말했다.
"화담 소식은 알아봤는가?"
"예.
벌써 작년 봄에 죽었답니다."
"죽었다고?"
"예. 틀림없습니다.
송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데요."
"할 수 없군."
화담이라는 소리에 지함의 귀가 번쩍 열렸다.
"화담 선생을 말하는 자,
나 좀 보시오."
돌아서서 산채쪽으로 걸어가던 사부란 자가 우뚝 멈추어 섰다.
"화담 서경덕이라면 내 스승인데,
그대는 누구시오?"
"화담의 제자라고?"
"그렇소.
작년에 화담 선생님을 모시고 팔도를 주유했소."
"뭐라고?"
"지난해에 화담 선생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까지 함께 다니다가
선생님은 경주에서 송도로 돌아가시고,
난 계속 주유를 했소."
"핫핫핫.
저놈이 모가지가 아까워 말을 꾸며대는구나.
이보게, 임꺽정.
화담은 틀림없이 작년 봄에 죽었겠다?"
"옛.
화담 선생은 작년 사월에 죽었답니다."
"그런데 팔도를 주유했다고?
이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렷다!
지체말고 저놈의 목을 치게."
"바쁠 것 없습니다."
그때 계곡으로 끌려갔던 황진이가 졸개들의 어깨에 들려 올라왔다.
물에 흠뻑 젖어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년을 방에다 집어던져 이불로 덮어놓거라."
졸개들이 황진이를 들고 산채로 들어가자
사부란 자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가더니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년도 목을 잘라야 하네."
"아무렴요."
임꺽정이라는 두목은 허리춤을 풀면서 산채로 뛰어들어갔다.
한낮이 되어서야 두목이 방에서 나왔다.
사부란 자는
그때까지 마당에서 조바심을 내며 서성거리고 있다가 두목을 채근했다.
"자, 빨리 연놈들을 처형하고 풍천, 율은 쪽으로 가세."
"사부님. 급하실 것 없습니다.
이놈은 며칠 더 여기다 잡아놓았다가 쓸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년은 본시 기생이라니 살려보내야겠습니다."
"살려둔다고?"
"예. 기생까지는 죽이지 않겠습니다.
양반놈들 모가지만 자르기로 맹세했잖습니까?"
"끄응."
사부란 자가 불편한 심기를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
곧 황진이가 방에서 나왔다.
그러자 황진이를 본 두목이 졸개를 시켜 지함의 결박을 풀라고 했다.
"이 선비님.
저를 구하시겠다고 여기까지 오셨더랬나요?"
"그렇소."
"제가 선비님을 두목에게 잘 말해 놓았으니
일단 염려 놓으십시오.
저는 양반이 아니라고 풀어준답니다."
"알았소.
내가 여드레까지는 송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거든 박지화 형님께 전갈을 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두목은 졸개 하나를 붙여주며
황진이를 산아래 마을까지 내려다 주고 오라고 명령했다.
황진이가 산채를 내려가자 두목이 지함을 불렀다.
산채로 들어가 마주 앉은 두목은
지함에게 정중하게 용서를 구했다.
"몰라 뵈서 미안하오.
그러나 화담 선생은 분명 작년 봄에 돌아가셨다니 그 이야기는 하지 마소.
그 여자 방중 솜씨에 반해 내가 그대를 살려주기는 했소만
우리 사부에게 밉보이면 큰일나오.
알겠소?"
"사부란 사람이 누구요?"
"정해량(鄭海良)이라는 도사요.
김종직의 문인이었는데 무오사화 때 유배갔다가 도망쳐
그뒤로 쭉 도가 수련을 하신 분이오.
화담 선생하고는 잘 아는 사이라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도적의 소굴에 있느냐 이거지요?
핫핫핫.
그건 내 사부에게 물어보시오.
나같이 무식한 산도적이 무얼 알겠소?"
두목이 껄껄 웃더니 밖으로 나갔다.
곧 사부란 자가 들어왔다.
"자네, 바른 대로 대게.
누군가?"
"난 화담 산방의 학인이오.
알아보고 나서 사실이 아니면 죽여도 좋소."
"흐음."
"그런데 노사께서는 왜 그렇게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시오?"
"..."
"무오사화 때 당한 것을 양반들한테 분풀이하시는 겁니까?
힘이 없으니까 무지몽매한 도적떼를 꼬드겨서 양민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것이오?"
"함부로 말하지 말게.
자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걸 모르나?"
정해량은 위압적으로 칼을 뽑았다.
"그만두시오.
노사께서 무얼 바라는지 알고 있소.
도적떼를 길러서 장차 역성 혁명을 꾀하려는 것일 터!"
"뭣이?"
정해량이 칼끝을 지함의 목에 대었다.
"백성들이 잘 살 수 있게 된다면 역성 혁명인들 마다하겠는가?
이 나라가 지금 백성이 살 수 있는 나라던가?
조선 천지가 굶어 죽는 백성 투성인데
양반이란 자들은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고,
배가 튀어나와서 잘 걷지도 못하는 형편 아닌가."
"그러면 양반만 죽이면 나라가 잘 된다는 말이오?
노사의 꿈은 무엇이오?
역성 혁명이 아니라면 한낱 산도적일 터!"
"그만하게.
내 나이 이제 오십이 넘었으니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
이제서 무엇을 도모하겠나?"
"분풀이라면 잘못 하고 있는 것이오.
하려거든 정말로 백성 편이 되어 하시오.
도적이 아니라 군대로 기르시오."
"무엇이?
자네가 내게 역성 혁명을 가르치려는가?"
"저 두목의 사주를 대주시오."
지함이 워낙 단호하게 말하자
정해량은 두목인 임꺽정의 사주를 대었다.
"군사를 일으킬 만한 재목이오.
장차 기미년에 군사를 일으키면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경기도 일대를 모두 장악하게 될 것이오."
"그것 참 반가운 말씀이오."
"그의 운수는 그렇게 시작해서 삼 년은 갈 터이니 그것을 잘 쓰시오."
"너무 짧소이다.
하기야 삼 년씩이나 끌 일이 아닐 터..."
"노사께서 사사로운 원한만 청산한다면
정말로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오이다.
이대로 두면 앞으로도 저자는
사람만 죽이고 재물이나 빼앗는 도적의 무리로 남을 것이나,
노사께서 가르침을 주신다면 의적이 되거나
백성들이 기다리던 군주가 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자 정해량은 칼을 거두어 칼집에 도로 넣고는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장차 기미년이 되어 노사의 뜻이 바로 선다면
내가 임꺽정을 도울 군사(軍師)를 한 명 보내든가
내가 오든가 하겠소."
"고맙소."
그렇게 해서 지함은 임꺽정의 소굴을 벗어나 무사히
송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박지화가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황진이가 자네 목숨을 건졌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함이,
자네 어떻게 선생님 안부는 묻질 않는 것인가?
벌써들 이야기를 다 했나?"
"아닙니다."
정휴가 박지화의 핀잔을 대신 받았다.
"자네,
선생님 소식은 궁금하지도 않은가?"
"형님도...
이미 산방 아랫마을에서 들었습니다.
곧 산소에 올라가 뵙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우리와 함께 다닌 분이 선화하신 몸이었다는 것도 들었는가?"
"예,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걸세.
참, 통 믿겨지지 않는 일 아닌가?"
"선생님께서 저희를 그렇게 아끼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네.
아 참, 정휴 스님.
지함에게 전하려던 책 이야기를 하게.
미안해 할 것 없네.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일이니..."
박지화가 <홍연진결> 이야기를 꺼내자
정휴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휴는 낙담한 마음으로 지함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면 내가 태운 책이 선생님께서 부촉하셨던 그 책이란 말인가?"
이야기를 듣고 난 지함이 정휴에게 반문하였다.
"예. 죽을 죄를 졌습니다."
"어쩌겠는가?
이미 불에 타버린 것을...
할 수 없는 일이니 잊게나."
지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형님, 죄송합니다..."
"아니네.
지화 형님 말씀이 옳으이.
이제 와서 이미 잿더미가 된 책에 미련을 둔다고 별 수가 생기겠는가.
그만 두고 선생님 산소나 일러 주게."
정휴가 앞장섰다.
"형님, 다녀오겠습니다."
지함이 박지화에게 말하자 전우치, 남궁두도 따라나섰다.
"저희들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게나."
정휴가 앞장서고,
두 사람은 지함의 뒤를 따랐다.
지함은 화담의 산소에 이르자 송악을 둘러싼 좌우 산세를 살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명당입니까?"
"이 자리는 명당이 아닐세."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으로 치면 단전(丹田)의 자리라네.
대개 자궁의 형상을 한 곳을 편안하고 다복한 자리로 치는데,
이런 단전 자리는 여간 해서는 시신이 견디지를 못하지.
기가 너무 뭉쳐 있어서 뜨거워서 그렇다네.
그래서 사람들이 꺼리고 피한다네.
웬만한 사람은 이런 자리에 묻히지도 못한다네."
"그렇습니까?"
"송도에는 원래 풍수(風水)의 풍을 가두는 산은 많지만 수는 없다네.
그런데 이 자리는 좀 특별한 데가 있어."
"무슨 말씀이옵니까?"
"이 세상의 조산(祖山)은 곤륜산(崑崙山)이라네.
그리고 조선의 종산(宗山)은 백두산(白頭山)일세.
또한 이 땅의 근간을 이루는 뼈대가 백두대간(白頭大幹)일세.
저 곤륜산에서부터 달려와 백두산에서 한번 소용돌이친 지기(地氣)가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다가 머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평양일세.
그리고 그 기운이 직통으로 뻗치는 곳이 바로 이곳 송악일세."
"그런 다음에는 어디로 흘러갑니까?"
"한양으로 흘러간다네."
"그 다음에는요?"
"계룡산,
그 다음에는 가야산,
그 다음에는 전주,
전주에서 다시 송악으로 돌아오게 된다네.
그리고 지기가 머무는 곳마다
다시 또 흘러가는 기의 길이 따로 나 있다네."
"땅의 기운도 살아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이치로 옛 조선이 평양에 도읍을 두었고,
고려 왕조가 송도에 도읍을 정했고,
조선 이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네.
참위를 즐기는 자들이,
계룡이 다음 왕조의 도읍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도
다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거라네."
"그런데 화담 선생님은
왜 명당에 몸을 뉘지 않고 이곳을 택하셨을까요?"
"그야 화담 선생님이기 때문이지.
이 자리는 범인에게는 명당이 아니지만
화담 선생님 같은 분에게는 명당이라네.
진정 큰 명당은 바로 이곳이란 말일세.
이 자리야말로 팔도를 두루 지나다니는
지기(地氣)를 끌어모을 수 있는 자리라네."
"팔도에 다 통하는 자리라구요?"
"그렇다네.
조선의 경락(經絡)이 이 한 자리에 닿아 있다네."
"그런데 왜 경주에서 지기를 잃으셨습니까?"
"이 자리를 흐르는 지기는 경주에서 돌아오게 되어 있네.
그 위로는 다시 돌아왔다가 딴 방향으로 내려가야 하네."
"형님, 풍수를 듣긴 했으나 잘 알지는 못합니다.
도대체 풍수와 기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자네들, 앉아 보게.
내가 풍수를 말해줌세.
풍수(風水)란 생기를 품은 바람과 물을 끌어모으는 것일세."
"바람과 물에도 기가 있다구요?"
"천지간에 충만한 것이 기라네.
그렇다면 그러한 기가 어떻게 돌아다니겠는가?
하늘에서는 바람을 타고 움직이고,
땅에서는 물을 타고 흐른다네."
"생기(生氣)는 무엇입니까?"
"먹지 않아도 배 부르고 절로 힘이 솟는 기운일세.
기가 뭉쳐 있는 것이지.
그래서 이러한 생기를 얻기 위하여
장풍득수(藏風得水)란 말이 생겨났고,
이를 줄여 풍수라고 하네."
"바람을 막으려다 보니까 산이 필요한 것이군요."
"맞네.
바람 막는 것은 산이 제일이라네.
바람을 막아 모으고,
어떻게 지니는가에 따라 산을 달리 부른다네.
그래서 북쪽에 있으면 현무(玄武)요,
동쪽에 있으면 청룡(靑龍)이요,
서쪽에 있으면 백호(白虎)요,
남쪽에 있으면 주작(朱雀)이라고 하는 것일세.
이 네 산을 신(神)이라고 하여 사신(四神)이라고 부르는데,
문제는 이 산들이 골고루 있지 못하는 데 있다네.
한쪽이라도 터지면 아무리 바람을 잘 막아도 새어버릴 것 아닌가?
결국 생기를 머금은 바람을 얼마나 잘 머금느냐가 풍의 기본이라네."
"그렇게 보면 송도는 어떻습니까?"
"송도는 사신이 잘 버티고 있으므로 큰 강이 없어도 충분한 것일세."
"한양은 큰 강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한양은 본디 서쪽이 터져 있는데 물길이 지나가면서
그쪽으로 빠지는 생기를 막기도 하고 보충하기도 하므로
길한 것으로 여긴다네."
"그러면 수는 어떻게 생기를 나르고,
그것을 어떻게 끌어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바람(風)이 하늘의 기운을 실어나르는 것이라면,
물(水)은 땅의 기운을 실어나르는 것일세.
그러므로 풍이 약할 때에는 수를 불러야 하네."
"풍이 약하다는 것은 산이 약하다는 말씀일 터인데,
산을 어떻게 나눕니까?"
"산에도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행이 작용하므로
아무 물(水)이나 끌어들여서는 안 되네.
산은 24방위로 나누어 24산을 두고,
이 24산을 다시 오행으로 나눈다네."
"24산이 무엇입니까?"
"자 계 축 간 인 갑 묘 을 진 손 사 병 오 정 미 곤
신 경 유 신 술 건 해 임
(子癸丑艮寅甲卯乙辰巽巳丙午丁
未坤申庚酉辛戌乾亥壬)이라네."
"오행으로는 어떻게 가릅니까?"
"신경유신건(申庚酉辛乾) 다섯 산을
금산(金山)이라고 하네.
인갑묘을손(寅甲卯乙巽) 다섯 산을
목산(木山)이라고 하네.
축간진미술곤(丑艮辰未戌坤) 여섯 산을
토산(土山)이라고 하네.
해임자계(亥壬子癸) 네 산을
수산(水山)이라고 하네.
사병오정(巳丙午丁) 네 산을
화산(火山)이라고 하네."
"그렇게 나뉜 다섯 가지의 산을 어떻게 물로써 보충합니까?"
"금산(金山)은 사방(巳方)에서 물이 흘러와
인갑묘(寅甲卯) 쪽으로 가는 게 좋고,
목산(木山)은 해방(亥方)에서
신경유(申庚酉) 쪽으로 흘러가는 게 좋고,
수산(水山) 토산(土山)은
신방(申方)에서 사병오(巳丙午)쪽으로 흐르는 게 길하다네.
화산(火山)은 인방(寅方)에서
해임자(亥壬子) 쪽으로 흐르는 게 좋은 것일세.
이 물의 종류도 일곱 가지가 있어
칠수(七數)라고 부른다네.
칠수로는
진룡수 승룡수 수룡수 조룡수 요룡수 호룡수 현무수가 있네."
"명당 하면 여인의 자궁 형국을 주로 잡는 이치는 무엇입니까?"
"땅의 생기라면 음기인데,
그게 어디서 나오겠는가?
그와 같은 이치라네."
"그래서 그렇군요."
"풍수가 기 철학을 근거로 마련된 것임은 오늘에야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 하나로 세상을 모두 재려 해서는 안 되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형님,
화담 선생께서
선화하신 몸으로 여행을 다니셨다니,
대체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눈으로 직접 보질 못해서 그런지 통 믿겨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풍수 이야기를 꺼낸 것일세.
서쪽에 있는 동산(銅山)이 무너지면
그 산에서 난 구리로 만든 종(鍾)이
다 운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는가?"
"그야 동쪽산에 불이 나면 서쪽산에 구름이 인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그렇다네.
화담 선생님의 묘자리는 팔도를 흘러다니는 기의 길목일세.
그래서 화담 선생님은 비록 혼백이 몸을 떠났어도
그 지기(地氣)의 흐름을 타고 혼백을 움직이셨던 것일세.
그러나 선생님의 지기가 경주까진 갔으나
그 이북으로는 뻗치지 못해서 <신서비해>를 내세웠던 것일세."
"그렇다면 <홍연진결>을 지킬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말했네.
그런 이치로 미루어보면 선생님이
그 책 <홍연진결>을
함부로 불에 타도록 두실 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터인즉."
"그렇다면?"
"내 그 책 내용을 다 알고 있다네."
"예?"
"그때 내가 다 읽었다네.
화담 선생님이 내게 전한다는 말씀을 그 안에 서 다 읽었다네."
"그렇습니까?
역시 화담 선생님은..."
"그러니 다시는 미안해 하지 말게."
"그런데 책은 왜 태우셨습니까?"
"책을 태운 것이 아니라 종이를 태웠네.
책은 이미 내 머리 속에 들어가 있네."
"그래도 선생님이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쓰신 책인데..."
"자네 아직도 불법의 골수를 들여다보지 못했구먼.
화담 선생님이 내게 남긴 것은 종이도 먹물도 아니네.
강을 건너려면 뭐가 필요한가?"
"그야 배가 있어야지요."
"강을 다 건너면 배는 어떻게 하는가?
계속 끌고 다니는가?"
"아닙니다.
버려야지요."
"책도 그와 마찬가지일세."
정휴는 머리를 숙였다.
"결국 화담 선생님이 형님에게 책이 돌아가도록 만들어두셨군요?"
"그토록 크게 배려해 주셨다네."
"그렇다면 왜 책의 제목을 굳이 <신서비해>라고 바꾸셨을까요?"
"<신서비해>라는 책은 따로 있네."
"예?"
"내가 불에 태운 것은 <홍연진결>이고,
<신서비해>는 화담 선생님이 주인에게 돌려주었네."
"주인이라니요?
남사고란 그 아이 말씀이십니까?"
"그 책을 쓴 분 말일세."
"그 책을 쓰신 분요?
지리산에서 살았다는 참숯구이 말씀이십니까?
도유라는 선사께 그 <신서>를 전했다는?"
"바로 맞았네.
선생님께서는 그 참숯구이에게 <신서>를 갖다 주었다네."
"그분을 만나셨습니까?"
"만났네."
"어떤 분이셨습니까?"
"내가 울진을 떠나서부터 무엇을 했는지 말해주겠네.
박지화 형님께서 말씀을 안 하시던가?"
"아직 못 들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 뒤의 일을 말해주겠네."
지함은 무정을 만나서 운곡사에 갔던 이야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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