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중순이 되어 오도록 지함 일행은 한양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정휴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이제 <홍연진결>을 잃어버린 것은 둘째 치고
화담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살아 있다면
그까짓 책을 잃어버렸든 태워버렸든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죽었다면…
정휴는 거기까지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형님, 송도로 가서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습니다.
여기서는 더 기다려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게나. 올 사람이 아닌 듯하이."
지번도 정휴를 말리지 않았다.
남궁두와 전우치도 정휴를 따라 길을 나섰다.
정휴는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송도로 갔다.
남궁두와 전우치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정휴는 빨리 걸었다.
그야말로 한달음에 송도에 이른 정휴는 곧장 화담의 집으로 달려갔다.
"저, 정휴올습니다."
화담의 부인이 마침 집에 있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화담 선생님의 묘를 파보아야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 무슨 해괴한 말씀이오?
돌아가신 분의 묘를 파겠다니?
부관 참시라도 하겠다는 거요?"
"화담 선생님이 살아계시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선생님이 살아서
여행하시는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원 살다 보니 별 소릴 다 들어보는구먼.
영감님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그러우.
이 염천에 다 썩었겠구려."
"제 손으로 묻었잖습니까?"
"그렇지요.
나도 보았잖구요."
"그러니 더 미칠 노릇입니다.
제가 홍성에도 가보았고,
해남, 지리산, 한양을 다 가보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화담 선생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화담의 부인은 아들을 불렀다.
곧 화담의 아들이 달려왔다.
"아니,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아버님이 살아계시다니요?"
"하여튼 가보십시다."
"그래도 그렇지,
아들인 제가 아버님을 몰라뵙고
다른 분의 시신을 아버님이라고 했을까봐 그러십니까?"
"아이고, 저도 답답합니다.
남궁두, 자네가 말씀 좀 해드리게나."
정휴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쾅쾅 쳤다.
남궁두가 화담의 아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저희도 처음에는 정휴의 말을 믿고
화담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돌아가셨습니다."
"글쎄 그 말은 정휴한테서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화담 선생님을 보았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모를 말씀이외다."
"그러니 정휴 스님이 이렇게 답답해서
화담 산방까지 달려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답디까?"
"보았다는 사람만도 벌써 여러 명이 되고,
지리산에서는 남명 선생께 편지까지 보내셨습니다.
몸이 불편해서 들르지 못해 미안하다고 쓰신 서찰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한두 사람이 본 게 아니랍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함께 가서 우리 눈으로 확인해 봅시다."
화담의 아들은 괭이와 삽을 헛간에서 꺼내와 어깨에 둘러메었다.
정휴 일행은 화담의 아들을 앞세우고 화담 계곡으로 올라갔다.
흥분한 일행의 걸음은 뛰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그들은 정휴와 화담의 아들이 직접 썼다는 화담의 묘로 갔다.
"이 묘일세. 여기에 화담 선생님이 묻혀 계시다네."
정휴가 손가락으로 묘를 가리켰다.
전우치와 남궁두가 괭이와 삽을 잡았다.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화담의 묘를 팠다.
찌는 듯한 삼복 더위라 조금만 몸을 놀려도 땀이 비오듯 흘렀다.
한참 만에 관이 나타났다.
"열어 보게."
정휴가 전우치에게 말했다.
전우치가 관 뚜껑을 힘껏 잡아당겼다.
"휴우."
정휴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관에는 죽은 화담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뜨거운 여름날이건만 시신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썩기는 커녕
오히려 얼굴에는 산 사람처럼 핏기까지 도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죽어서 땅밑에 묻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됐습니다.
조심해서 묻읍시다."
화담의 시신을 다시 땅 속에 묻으면서 정휴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동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의심하더라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전우치와 남궁두, 이 두 사람만큼은
이제 더 이상 화담의 죽음을 부인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묘지에서 내려오는 정휴의 가슴은 다시 답답해졌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봤다고 증언한
그 화담이란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사람들이 모두 입을 맞추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휴는 한양 지번의 집에 있을 때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만 돌려놓고
그토록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둘러댄단 말인가?
세상이 다 광대 놀음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전우치와 남궁두가 시신을 직접 확인했다.
화담의 아들도 보았다.
그렇다면 화담이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화담을 보았다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었다.
"정휴. 우리 지리산으로 다시 가보세."
전우치가 제안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네.
거짓말이라도 이상한 것이 있네.
홍성에서 자네가 그곳에 가니까 화담이 사라졌다고 했네.
그리고 해남에서도 우리가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까
일행은 영 다른 길로 빠져버렸네.
그리고 지리산에서도 마찬가지였네.
이건 뭔가 이상한 일이네.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만 일부러 하고 있는 것이네."
"나도 그런 생각이 드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걸세.
우치 말대로 지리산으로 다시 가세.
남명 그 양반이 무언가 말을 해줄 것일세."
남궁두도 전우치의 말에 찬성했다.
정휴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무리 먼 길을 가더라도 화담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다.
그 수수께끼의 발단이 <홍연진결>에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책을 훔쳐내기 위하여 누군가가 일부러 거짓말을
퍼뜨리고 다닌 것일 수도 있었다.
정휴는 지리산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가세. 끝까지 가서 밝히세."
"이제는 우리 두 사람도 정휴 자네의 말을 믿으니 힘을 내게."
전우치가 정휴를 위로했다.
정휴는 전우치, 남궁두를 대동하고 또다시 지리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울주를 떠난 다음날, 화담 일행은 경주에 도착했다.
경주는 그래도 염병이 창궐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울주만큼은 아니었으나 경주도 염병으로
꽤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했다.
죽음이 휩쓸고 간 흔적이 역력하긴 했으나
살아남은 백성들은 또 쉽게 죽음을 잊어가고 있었다.
추석 명절을 눈앞에 두고 대목장이 열린 경주는 제법 혼잡했다.
경주에서 소문난 선비 박철환은 화담 일행을 반가이 맞아들였다.
박 진사의 창고에는 빈 곳 하나 없이 쌀로 가득 차 있었다.
창고 앞을 들락거리는 쥐도 통통한 게 여간 기름져 보이지 않았다.
박 진사는 화담의 고명을 들었다며 음식을 잔뜩 내왔다.
지함과 박지화는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으로
주린 위장을 채우고 밀린 여독을 풀어낼 수 있었다.
박 진사 일가는 양반집답게 청결히 지낸 덕분인지
염병 피해 없이 무사히 여름을 넘긴 모양이었다.
박 진사는 염병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랏님이 어떻고 영의정이 어떻고
풍문으로 들었을 한양 소식에만 열을 올릴 뿐이었다.
"요즘 좌의정 박순 대감이 선비들 입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그이가 뭘 잘못한답디까?"
화담이 응대했다.
"아니오.
화담 선생님의 제자시라면서요?"
"그렇소."
"그런데 화담 선생님 제자들은 이학보다는 기학을
중시해서 삼강 오륜 알기를 짚신짝 보듯이 한다는데,
사실입니까?"
"신주단지처럼 여기지 않는 것은 사실이올시다."
"그런 학문의 폐해를 짐작이라도 하셨습니까?"
"백성을 삼강오륜의 그물 속에 가두는 것보다는
드넓은 바다에 풀어놓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오."
박 진사는 그뒤로도 몇번 화담을 물고 늘어지는 질문을 더 던졌다.
그러나 화담은 일일이 대응하기도
귀찮은지 어느 순간 손을 내저으면서 자리에 누웠다.
"내가 노구라서 몹시 피곤하오.
나중에 더 이야기를 합시다."
일행중 누구도 박 진사와 대작할 기분이 아니어서
술자리는 일찍 파작을 했다.
아쉬운 눈치로 박 진사가 물러가자 박지화는 심가가 뒤틀렸는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백성은 염병으로 죽고,
굶어 죽어 들에 일할 사람도 없고,
백성들의 곳간에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데
양반집 창고에는 백성보다 살찐 쥐들이 득실거리는구나."
박 진사는 곧장 사라져 버렸다.
박지화의 말을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듣고서도 대꾸할 염치가 없어
못 들은 척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호화로운 금침에서 잠을 잔 지함은 잠자리가 뒤숭숭해서
깊이 잠들지 못해 이리저리 뒤척이다 일찍 잠이 깼다.
그런데 화담이 보이질 않았다.
박지화는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다.
"형님, 아침입니다."
지함이 어깨를 흔들어 깨우자 박지화는
겨우 눈을 뜨고 지함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염병이 내게 옮았는가보이…"
"예?"
지함은 얼른 박지화의 몸에 손을 대보았다.
열이 높았다.
그런데도 박지화는 오한이 들어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틀림없는 염병이었다.
"형님,
가만 계시면 제가 약을 지어올 터이니 걱정 마시고 기다리십시오.
그런데 화담 선생님은 어딜 가셨지요?"
"…글쎄 나도 모르겠네.
저기… 저게 뭔가?"
박지화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서찰인 듯한 종이가 접혀 있었다.
"서찰인 것 같습니다."
화담이 누웠던 이부자리가 곱게 개켜져 있고 바로
그 옆에 서찰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지함은 화급히 그것을 펼쳤다.
- 자네들과 여행을 끝마치고 싶었네만 더 이상
지기(地氣)를 모을 수가 없구먼.
나 먼저 가네.
자네들은 이 땅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보고 천천히 돌아오게나.
이것이 영영 이별일 터이네만 사람 사는 매일매일이
이별이며 또다른 만남인 것이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사람으로 태어나
이런 좋은 인연을 맺고 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이.
내게 구애 받지 말고 천천히들 돌아오게나.
주유를 그만두어서는 제자의 도리가 아니네. -
지함과 박지화는 멍하니 서로를 마주보았다.
"도대체 왜 갑자기 떠나신 것일까?"
박지화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형님,
아무래도 스승님께서 더 사실 수가 없어서이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떠나신 것 아니겠나?"
지함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르침을 주시려고 그토록 애쓰셨건만 나는 아직도
도를 깨우치지 못하고…
흑흑흑."
"지함, 그만 하게.
이미 예정된 일이 아니었던가.
어서 송도로 돌아가면 선생님을 뵐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박지화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지 않아도 빨개진 얼굴이 더 붉어졌다.
화담은 지함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북창이 길을 열어주고 화담이 맞이한 도의 세계.
이제 그를 이끌던 스승 한 분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로써 지함은 세상을 홀로 살아가야 했다.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화담,
그 분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토록 나를 아끼고 이끌었던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정을 줄 수 있는 것인가.
박지화는 숨을 죽여 울고 있었다.
"형님, 선생님 말씀대로 계속 주유를 하십시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더 가나?
차라리 선생님을 따라 돌아가는 것이 더 낫겠네."
"아닙니다. 그 병은 곧 낫습니다."
"자네가 귀찮아졌네."
"형님두.
잠시 진정하시고 더 누워 계십시오."
화담이 떠난 사실이 두 사람에겐 몹시 서글펐다.
그러나 앞에 닥친 염병을 물리치는 게 더 급했다.
아침 햇살이 떠올랐는지 창호지가 밝게 비쳤다.
얼마 뒤에 아침상이 들어왔다.
어제 저녁상과 전혀 다른 차림이었다.
꽁보리밥에 된장국,
그리고 김치가 전부였다.
주인 박 진사가,
엊저녁에 박지화가 중얼거린 말을 듣고
무언가 느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화담이 남긴 편지로 받은 충격도 잠시 잊어버리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그런데 밥상을 들이민 하인배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방문을 기웃거리며 미적거리고 있었다.
"무슨 볼 일이 있는가?"
"저, 아침 자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진사 어른께서 전해드리라는 말씀이 있어서…"
"말해 보게."
하인배는 재촉을 받고서도
두 손을 비비며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괜찮으니 말해보게."
"저… 진사 어른께서 쥐새끼 살찌울 양식은 있어도
돼먹지 않은 떠돌이들 배 채워줄 양식은 없다,
초라한 행색을 불쌍히 여기는 너그러운 마음에서
베푸는 음식이니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먹어라,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하인배가 내미는 것은 엽전 한 냥이었다.
하인배는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얼굴을 마주보고 있던 지함과 박지화는
느닷없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웃음을 거둔 박지화가 말했다.
"우리도 이렇게 전하더라 일러 주시게.
감사히 받아먹었으니 세상의 진리를 하나 알려드리겠노라고.
곳간의 곡식은 무덤으로 지고 갈 수 없는 것,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평생 동안 쌓은
공덕뿐이라고 말씀이네.
삼척 동자도 다 알고,
떠돌이 불한당조차 아는 진리를 이 집 주인 나리만 모르고 있는 듯하여
한 냥 받은 감사의 마음으로 이르는 것이라 전하게."
"형님, 우리는 밥이나 먹읍시다.
이왕 나온 것이니 맛있게 먹어야지요.
우리가 먹으면 이 쌀이 우리의 혼백을 살찌울 것이나
이 집 주인이 먹으면
육신의 배가 불러 급기야는 그의 명을 줄일 것 아니겠소."
박지화가 더 열을 내니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그 모습을 들여다본 하인이 한 걸음 물러섰다.
"혹 염병이…?"
"아닐세.
먼 길을 오다보니 몸살이 조금 난 것일세.
물러가게.
아침만 들고는 길을 떠날 터이니."
하인이 물러가자 지함은 밥상 앞에 앉았다.
"같이 먹으면 자네까지 옮을 걸세.
난 밥하고 국을 따로 먹겠네."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침 찬바람이 불어올 철이니 염병이 기운을 잃게 됩니다.
곧 나을 것이니 염려마십시오."
식사를 마치자 두 사람은 짐을 꾸렸다.
방을 나서려는데 밖이 갑자기 소란해졌다.
두 사람은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마침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던 하인이 있어 지함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예,
간밤에 창고지기 한 놈이 종년을 꿰차고 도망갔습니다.
도망만 갔으면 괜찮은데
육 년근 홍삼 백여 뿌리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진사 어른의 심기가 편치 않습니다.
벌써 사람을 풀어 뒤를 쫓고 있습니다마는…"
"제 몸 하난 끔직히 아끼는 작자로군.
오죽 못되게 굴었으면 하인이 상전의 재산을 훔쳐 도망갈까?"
박지화가 고거 잘 됐다는 듯이 침을 퉤 뱉으면서 말했다.
지함이 무슨 생각이 있는지 하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창고지기와 계집종의 부모는 아직 여기 있는가?"
"예, 박 진사가 문초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입을 다물고 있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답니다."
"그러면 자네가 가서 도망간 창고지기의 부모에게
도망간 두 사람의 사주를 물어오게.
간밤에 든 선비들이 그러더라고 박 진사에게 이야기해야 하네."
두 사람은 다시 행랑으로 들어갔다.
"자네 무얼 하려고 그러는가?"
박지화가 못마땅하여 물었다.
"밥을 얻어먹었으니 밥값을 하고 가야지요.
제가 범인을 잡아놓겠습니다."
"아니 도망가는 걸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도망간 사람까지 자네가 잡아다 바치겠다는 것인가?"
"생각이 있습니다.
일단 형님은 다시 방에 들어가 누워 계십시오.
며칠 더 묵을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필시 쫓겨날 게 뻔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하인이 돌아왔다.
"어렵게 알아냈습니다.
그것도 불지 않아 관에 알리기만 하고 부모는 풀어주겠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말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선비님께서는 이걸 어디에 쓰시렵니까?"
"내 쓸 데가 따로 있네."
하인이 물러가자 지함은 한참 동안 사주를 들여다보았다.
박지화는 무슨 일이 나기만 하면 사주를 들여다보는 지함이 신기한지
연신 땀을 훔치면서도 지함을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지함은 박 진사에게 갔다.
박 진사는 얼굴이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아직들 안 떠나셨소?"
"신세를 졌으니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게 객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끄응."
박 진사는 아직도 분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진사 어른 사주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건 왜 물으시오?"
"범인들을 반드시 잡아올리겠습니다."
"못 잡으면?"
"못 잡을 리가 없습니다."
"젠장, 무얼 보고 믿는가?"
"오늘중으로 잡아올릴 터,
박 진사님의 사주가 필요합니다."
박 진사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사주를 불러주었다.
한참 동안 생각을 하던 지함이 말했다.
"진사 어른,
그 창고지기는 동쪽으로 갔습니다.
동쪽에 나무가 많은 곳이니 산을 찾아보십시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움직일 것입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찾아내시면 됩니다."
지함의 말을 들은 박 진사는
얼핏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인들을 불러모았다.
남아 있던 하인들이 다 모이자 진사는 빨리 뒤를 쫓으라고 시켰다.
"동쪽이면 필시 용수마을이나 분재말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그놈이 말보다 빠르지는 못할 터이고,
관을 피하고 낮을 피하느라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무가 많은 곳이라-.
그렇지.
지금 벌목을 하고 있는 산이 있다.
벌목 더미 사이를 샅샅이 뒤져보아라."
박 진사의 말이 끝나자 하인들 중 세 명은
말을 타고 달려나갔고 나머지는 뛰어나갔다.
"제 말씀을 믿는 것입니까?"
"이 다급한 판에 믿고 아니 믿고가 어디 있겠소.
내, 연놈을 잡으면 주리를 틀어서 혼쭐을 낼 터…"
"저희 때문에 심기가 편치 않으셨지요?
형님이 워낙 입이 험한 분이라서…"
"흥."
"그래서 제가 사과도 할 겸 그놈들을 잡아들일 생각입니다.
보십시오.
곧 잡혀올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인들은 박 진사 집을 떠난 지 한 나절이 지나자
인삼을 훔쳐 달아난 창고지기와 계집종을 붙들어 왔다.
"벌목꾼들이 지어놓은 산채에 숨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지함의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기는 했으나
반신반의하고 있던 박 진사도 놀라는 눈치였다.
잡혀온 창고지기는 고개를 툭 떨군 채 무릎을 꿇었다.
밧줄을 잡은 하인의 손에는 그가 훔쳐갔던
홍삼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다른 하인들이 벌써 형틀을 내어다 놓고 창고지기를
그 위에 비끌어매고 있었다.
그러자 지함이 박 진사에게 말했다.
"진사 어른.
저 아이는 홍삼을 도둑질하는 게 급했던 게 아니라
계집종을 데리고 도망치는 게 급했었습니다.
혼인을 누가 막았습니까?"
지함의 말에 다른 하인들과 식솔들이 모두
박 진사를 흘끔 돌아보았다.
"잠시 들어갑시다."
박 진사가 지함과 함께 사랑에 들자 하인들은 밖에서 웅성거렸다.
창고지기는 형틀에 팔자로 단단히 묶였지만
이를 악물고 사랑채를 노려보았다.
계집종은 그 옆에서 손이 뒤로 묶인 채 고개를 땅바닥에 떨구고 있었다.
"무슨 뜻에서 물으시는 게요?"
박 진사가 자리에 앉았다.
"저 창고지기 사주를 보았는데 아주 성실하고 마음씨가 착한 사람입니다.
틀림없이 나중에 진사 어른을 크게 도울 인물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그래서 더 분이 났던 거요."
"저 아이는 재물에 욕심도 없는 아이입니다.
재물에 탐이 났다면 왜 하필 홍삼 몇 뿌리를 가져갔겠습니까?
평소에 그렇게 진사 어른의 신임을 받았으니
값 나가는 물건을 얼마든지 보아두었을 게 아닙니까?
저 아이에게는 계집종만 주면 됩니다.
그런데 도망까지 친 걸 보면 뭔가 피치 못할 사연이 있는 듯합니다."
"그렇소.
저 계집종이 내 침소에 몇 번 들었소.
장차 첩으로 둘 요량이었소.
그런데 어느새 저 녀석하고 눈이 맞았는지…
젊은 것들이란 그저."
"그랬었군요. 그
러면 어르신께서는 저 아이들을 혼인시킬 뜻은 없습니까?
제 소견으로는 저 아이들을 혼인시키는게 좋을 듯 합니다.
그래만 놓으면 저 아이들도 잘 살겠지만
진사 어른에게는 둘도 없는 심복이 되어 섬길 것입니다."
"끄응."
박 진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작은 것을 주어 큰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남의 일에 상관 마시오.
저놈들을 잡아준 건 내가 사례하겠소."
"사례를 받자는 것이 아니올시다.
만일 계집종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진사 어른의 장인이 아시게 되면 어쩌려구 그러십니까?"
"뭐요?"
"보아 하니 부인의 덕이 몹시 크더군요."
"···"
"장인 어른께서 반드시 큰 벼슬을 하실 것이고,
그분의 눈에 나시면 좋을 게 없습니다.
지금쯤 부인이 알고 있을 것이고,
진사 어른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나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박 진사는 할 말이 없었다.
모두 사실이었다.
박 진사의 장인은 근동의 세도가였다.
그의 말 한마디면 박 진사가 쌓은 재물도 명성도
한낱 모래성이 될 수도 있었다.
박 진사로서도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안방에서는 그의 부인이 눈에 불을 켜고 바깥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사랑 마루로 나갔다.
박 진사가 곤장을 들고 있는 하인에게 소리쳤다.
"저놈에게 곤장 열 대를 치거라."
하인배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두런거렸다.
주리를 틀어도 시원치 않을 죄인에게
겨우 곤장 열 대라니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들이었다.
곤장을 들고 있던 하인도 다시 한번 박 진사를 바라보았다.
"열 대라고 이르셨습니까,
어르신네?"
"그러하니라."
이상하게 생각한 건 곤장을 맞고 있는 창고지기도 마찬가지였다.
주인이 애첩으로 삼으려고 점 찍어둔 처녀를 데리고 도망간 죄인.
주인 마음대로 하인을 공공연하게 사형하는 시절이었으므로
죽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창고지기는 잡혀올 때만 해도 이젠 죽었구나 하고 자포자기했었다.
박 진사댁 하인들도 다 그렇게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곤장 열 대는 잠깐만에 끝났다.
싱겁다는 듯이 곤장치는 하인이 땅바닥을 곤장으로 두어 번 툭툭 쳤다.
"저놈을 끌어내리고 저년을 올려라."
창고지기가 형틀에서 풀려났다.
그 자리에 함께 도망쳤던 계집종이 묶였다.
"곤장 다섯 대를 치거라.
끝나거든 두 연놈은 사랑으로 들거라."
박 진사는 곤장 치는 것도 보지 않고 사랑으로 들어갔다.
박 진사를 따라 사랑에 든 지함은 박 진사를 칭찬했다.
"대인의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가 말씀은 그렇게 드렸지만 들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어야 한다-.
맞는 말씀이오.
내가 그것을 보여주리다.
고맙소."
박 진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들어오너라."
내내 눈을 감고 있던 박 진사가 인기척을 느끼고 밖을 향해 말했다.
곧 문이 열리더니 창고지기와 계집종이 들어왔다.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그리고 너도 내가 부르거든 다시 오너라."
박 진사가 밖에 대기하고 있는 하인들과 창고지기에게 지시했다.
그들이 물러가자 계집종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죽을 죄를…
흑흑흑."
박 진사는 고개를 들어 천정을 응시했다.
지함은 한 켠에 물러서서 그런 박 진사를 바라보았다.
계집종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마침내 박 진사가 입을 열었다.
"너 도리에게 묻는다.
창고지기 희동이 녀석이 그리 좋더냐?
희동이하고 도망칠 만큼 같이 살고 싶었느냔 말이다."
도리라는 계집종이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
"희동이가 널 호의호식시켜 준다더냐?"
"그렇지는 않사오나…"
"않사오나, 뭐냐?"
"서로… 그리워하는… 사이입니다.
저는 그이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진사 어르신을 뫼시는 것이 싫다는 것이 아니오라
전 그저 창고지기 희동이를 보면 저절로 즐거워집니다."
계집종은 떠듬떠듬 변명했다.
"나를 만나면 기분이 나빠지더냐?"
"그렇지는 않았사오나…"
"그러면 희동이 녀석하고 혼인하고도 내 방에 들겠느냐?"
"혼인만 시켜주신다면…"
"저런 발칙한 것."
박 진사의 얼굴에 분기가 탱천했다.
"진사 어른."
지함이 듣다 못해 박 진사의 말을 끊었다.
"그만 하면 이 아이의 심중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혼인을 하고도 진사 어르신의 수청을 들겠다고 하겠습니까?
여보게, 자네 도리라고 했던가?"
지함은 계집종에게 고개를 돌렸다.
"예."
"진사 어른께서 자네의 사주를 놓고 앞으로 운세를 살폈네.
자네가 아직 젊은 혈기를 가지고 있어 희동이라는 창고지기와
좋아지낸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네.
박 진사 어른은 그 정도 앞날은 훤히 내다보시는 분일세.
허나 자네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시어
짐짓 모르는 체 해두었던 것인데,
자네는 마침내 진사 어른을 배신하고 도망까지 쳤네."
"배신이 아니오라…
그저 멀리 떠나 살고 싶었습니다. 진사 어르신 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옵니다."
"알고 있네.
진사 어르신께서 생각해 두신 바도 있네.
그러니 어르신께서 하시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앞날은 저절로 풀릴 걸세.
진사 어르신,
창고지기를 부르시지요."
"알았소.
여봐라,
밖에 누가 있으면 희동이를 불러오거라."
밖에서 '예' 하는 소리가 났다.
오래지 않아 희동이가 사랑으로 들어왔다.
창고지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어르신, 죽을 죄를 졌습니다.
은혜를 몰라 뵙고…"
"네 죄를 알기는 하는 거냐?"
"하오나…"
"하오나 뭐냐?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다.
너도 이미 도리 저년이
그간 내 처소에 드나들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예, 벌써 아는 일이옵니다."
"그런데도 저 아이가 좋았더란 말이냐?"
"예."
"앞으로 계속 내 처소에 들게 하더라도 변하지 않고 좋아 지낼 것이냐?"
"그래서 밤을 도와 내빼려 했사오나 갈 데도 없고…"
"알았다.
이년은 너하고 혼인만 시켜주면 앞으로도
계속 내가 부르면 수청을 들 수 있다고 말했다.
너도 용납할 수 있겠느냐?"
"혼인을 시켜주신다고요?
예,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하오나, 하오나…"
창고지기 희동은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 짓고 있던
계집종 도리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알았다.
그만들 그치거라.
희동아."
"예."
희동이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대답했다.
"도리야."
"예."
도리도 모기소리 만하게 대답했다.
"내가 너희들을 혼인시킬 터이니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살거라.
방금 한 소리는 내 그냥 던져본 말이니 괘념치 말고.
내가 날을 따로 잡아 알릴 터이니 그리 알아라."
두 사람은 박 진사에게 넙죽 절을 했다.
사랑을 물러나면서도 두 사람은 연신 절을 해대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지함이 박 진사에게 말했다.
"저, 진사 어른.
며칠 더 묵으면서 진사 어른의 고담준론을 들었으면 합니다.
팔도를 돌고 있지만 진사 어른 만한 선비를 뵙기가 여간 난망이 아닙니다.
여지껏 인물다운 인물 하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무슨 과한 말씀을.
그런 말 마시고 며칠이고 더 묵으시오.
내 옹졸했소.
양약인 줄 모르고 입에 쓰다 하여 뱉어 버리려 했었소."
박 진사는 지함에게 두둑한 전대를 내밀었다.
이로써 지함은 박지화의 약값도 얻게 되고,
며칠 더 묵을 수도 있게 된 것이었다.
"길을 가다보면 요긴하게 쓸 일이 있을 터이니…"
"고맙습니다.
마침 동행이 원로에 지쳐 몸살을 앓아 의원에 가야 했는데…"
"내 의원을 불러드리겠소."
박 진사는 자청하여 의원을 불렀다.
의원이 행랑에 들자 지함은 의원을 잡고 말했다.
"의원님, 우선."
지함은 박지화를 보이기도 전에 의원을 먼저 앉혀 놓았다.
그리고 박 진사가 내주었던 전대를 그에게 내보였다.
의원이 전대 안을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랐다.
"아니, 웬 돈을 이리 많이?"
"내 말을 들으시오.
우선 의원님 사주 좀 불러주시오."
"사주는 무슨 사주를 대란 말이오.
난 환자가 아니오,
난 병을 고치러 온 의원이올시다."
"그러니까 필요합니다.
이 병은 조금 급합니다.
의원과 환자의 사주가 서로 맞지 않으면 치료가 힘듭니다."
의원은 이상하다는 듯 주저하다가
지함이 내미는 종이에 사주를 적어냈다.
지함이 한참동안 사주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어, 이 돈을 받으시오.
그 대신에 다른 의원을 보내 주시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날 놀리는 거요?
의원을 불러가지고는 환자는 보이지도 않고
사주 하나 적으라고 해놓고는 돈을 주어 이제 그만 가라니…
원 이렇게 해괴한 경우가 다 있나?"
의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지함이 내미는 돈을 홱 뿌리쳤다.
"내 별 거지 발싸개 같은 사람을 다 보겠네."
지함은 하는 수 없이 박 진사에게 가서 다시 청을 놓았다.
"아니, 그 의원을 돌려보냈다구요?
그이가 이 근방에서는 제일 용하다는 의원인데요."
"그분보다 조금 못해도 괜찮습니다.
혹 마흔한 살이나 마흔일곱 살 된 의원이 있으면…"
"거 참,
의원을 의술로 보지 않고 나이로 따지다니…
병을 잘 본다고 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그이는 남의 집 밭이나 붙여먹는
농사꾼이지 의원을 내놓고 하는 이는 아니올시다."
"괜찮습니다.
나이만 맞으면 불러주십시오."
그날 저녁,
의원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지함은 역시 사주를 부르라고 하여 박지화의 사주와 맞추어보았다.
"의원님, 됐습니다."
지함은 전대를 풀어 의원에게 내놓았다.
"웬 돈을 이렇게 많이?"
"이 돈이면 밭뙈기를 좀 살 수 있을 거요.
이분의 병을 반드시 고쳐주시오.
이 환자는 지금 염병에 걸려 있소."
"염병이라구요?"
의원이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놀라지 마시오.
별 일은 없을 거요.
이런 병이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없어지는 것이고,
또 이분은 오늘 처음 증세를 보인 것이니 곧 치료가 될 거요."
"허나, 약이 없소이다.
염병에 걸리면 의원도 어쩌지 못합니다."
"의원님은 이 환자를 누를 기가 충만합니다.
걱정마십시오.
환자 곁에서 수발만 잘 해줘도 병이 나을 것입니다."
의원이 난처해 하자 지함은 전대를 더 깊숙히 밀어
의원의 무릎 사이에 찔러넣었다.
"의원님은 금기(金氣)가 있어야
생하는 기운이니 이 돈이면 기운이 날 겁니다.
어떻게 해보십시오."
"해보기는 하겠습니다만…"
의원은 전대를 받아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또 이 환자의 병을 발설하지 말아야 합니다.
객지라서 갈 데가 따로 없습니다."
"알았소이다.
힘 닿는 데까지 해보리다."
의원은 한편으로 약을 짓는다,
병 구완을 한다 하면서 부지런히 박 진사의 집을 들락거렸다.
그러나 약재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선비님, 약 구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혹 있다 하여도 염병에 드는 약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의원님.
제가 무슨 약 무슨 약이 어디어디에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제 말씀 좀 들어보십시오.
이분이 지금 부족한 것은 적(赤)과 흑(黑)입니다.
그러므로 약재도 이 두 가지 빛깔을 생하는
청색과 백색이 들어 있는 약이 잘 들을 듯합니다."
"청재와 백재라, 그렇게 막연하게…"
"더는 모릅니다.
그렇게만 아시고 찾아보십시오."
의원은 의원대로 의약서를 뒤지고 여기저기 약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 사이에 지함은 손수 박지화의 뒷치닥거리를 해주었다.
다행히 박지화의 병은 더 이상 깊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열이 계속 나고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박지화가 몸져 누운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이보시오, 이 선비."
박 진사였다.
박 진사는 지함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행랑문을 열었다.
그는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있는 박지화를 보았다.
"염병을 여기서 앓고 있는거요?
내 집에서 나가시오."
박 진사는 문을 쾅 닫았다.
"진사 어른."
지함이 뒤따라 나왔다.
지함은 대답도 하지 않고 사랑으로 들어가는 박 진사를 따라갔다.
"진사 어른.
아직 염병은 아니올시다.
설사 염병이라고 해도 아직은 초기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밀양재를 넘으면서 염병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거두고 죽은 사람들을 태우다가 그렇게 된 듯하나,
이미 가을이 문턱입니다.
더 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만 두시오.
오늘중으로 내 집을 떠나주시오.
그 의원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오."
박 진사는 이미 박지화의 병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의원을 불러 호통을 치고
지함 일행을 쫓아내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형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 집을 나갑니다."
지함은 박지화를 등에 지고 박 진사 집을 나왔다.
지함이 박지화를 업고 몇 발짝 떼어놓기도
전에 박진사 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박 진사가 행랑채를 아예 불질러 버렸던 것이다.
지함이 박지화를 메고 한참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창고지기 희동이였다.
"선비님, 저 좀 보고 가십시오."
창고지기 희동은 단숨에 달려와 보따리 한 개를 내밀었다.
"저어, 약입니다.
그 의원이 저를 불러 몰래 전해주었습니다.
이 약만 먹으면 틀림없이 낫게 될 거랍니다."
"고맙네."
지함은 박지화를 내려 바닥에 뉘고는 희동이가 내민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보따리를 풀어보니 약재가 골고루 섞인 첩약이 묶여 있었다.
"바로 이거야.
색깔만 보고도 알 수 있지."
"예?"
"아닐세.
약을 두고 이른 말일세.
약 이름도 모르고 효능도 아는 게 없지만
이 약재들 빛깔을 보니 제대로 지어진 것 같네."
지함은 약재를 다시 묶어 허리춤에 달고는 지화를 들쳐업었다.
"저어, 선비님.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고맙긴.
그대로 두면 자네가 박 진사에게 잡혀 죽게 될 판이었다네.
그렇게만 알게."
"제가 죽을 운이었는데 어떻게 살았지요?"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네.
살려고 난 운명이지 어떻게 죽을 운명이었겠나?
자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
난 서둘러 길을 가야겠네.
거처라도 잡아야 약을 끓이지 않겠나."
"그러면 머지 않은 곳에 빈 집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십시오."
"어딘가?"
"예, 저를 따라오십시오."
창고지기 희동은 지함 일행을 빈 집으로 안내했다.
지함은 박지화를 방에 내려놓고 불을 지폈다.
희동은 나갔다가 한참만에 다시 돌아왔다.
손에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먹을 것이옵니다."
희동이 보따리를 풀었다.
"전 그만 갑니다."
"고맙네."
지함은 음식을 챙겨 박지화에게 먹였다.
그러고 나서 나무를 준비하고 그릇을 어렵게 구해다가 약을 달였다.
박지화는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지함이 약을 달여 먹이기를 사흘을 한 끝에 박지화가 겨우 눈을 떴다.
그러고도 다시 사흘이 지나자 박지화는 혼자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됐습니다.
이제 병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곧 완치될 것입니다."
지함은 박지화의 옷가지를 삶고 물을 데워 몸을 깨끗이 씻겼다.
벌써 엿새째,
지함은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박지화의 곁에서 병 구완에 매달렸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박지화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형님이 빨리 나아야 계속 돌아다니지요.
선생님도 안 계신데…"
먹을 것은 창고지기 희동이 끼니마다 날라왔다.
박 진사 몰래 갖다주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박지화는 벌떡 일어났다.
몸이 다소 불편할 것이 뻔했지만
박지화는 오기를 부리다시피 하면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박지화가 지함을 향해 물었다.
"화담 선생님의 임종이 멀지 않은 듯합니다.
돌아가서 가시는 모습을 뵙는 게 도리이긴 한데
여기에서 장도를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행을 계속하라는 선생님의 간곡한 부탁도 있으셨고…"
"선생님이…
시키신 대로 마저 가는 게…
옳은 듯하네."
"허나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스승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우리끼리만 돌아다니자니.
게다가 형님 몸도 불편하시고요."
"나는 걱정말게…
원래 몸이 튼튼하니…
곧 괜찮아질 걸세…
어차피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니…
가는 동안에 생각해보세."
박지화는 그 뒤로는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어 갔다.
워낙 튼튼하기도 한 몸인 데다가 도가 수련을 많이 한 덕분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동해안으로 발길을 잡았다.
늘 셋이 걷던 걸음이라 돌아볼 때마다 허전했다.
게다가 지함이 박지화를 부축하고 가는 걸음이라서 더욱 쓸쓸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오랜만에 맡는 바닷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
26. 신서(神書)
---------------------------
찌는 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정휴 일행은 걷고 또 걸었다.
온갖 고생을 다 해가며 세 사람이 지리산 산천재에
도착한 것은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인 팔월이었다.
산천재에 올라가자 조식이 글을 읽고 있었다.
정휴는 다짜고짜 조식에게 따지고 들었다.
"화담 선생님이 이곳을 다녀가셨다면서요?"
"오, 화담을 찾아왔던 그 스님이로구먼.
거 안됐구먼.
그대들이 한양으로 올라간 바로 뒤에 화담이 산천재로 왔었다네.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그냥 가기가 섭섭해서 억지로 왔다고 했네."
정휴가 전우치와 남궁두를 돌아보았다.
조식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정휴는 믿었다.
"선생님, 우릴 속이시는 겁니까?
그 책을 훔치고 우릴 쫓아내시려고 거짓을 꾸몄지요?"
"무슨 소린가?"
"화담 선생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같이 가서 직접 화담 선생의 묘를 파보았습니다."
말을 끝내면서 정휴는 조식의 서탁 위에 있는
벼루를 냅다 집어서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벼루가 박살이 나버렸다.
"그 책을 내놓으십시오.
그 책이 탐이 나서 저희를 속이셨습니까?"
"어서 내놓으시오."
전우치와 남궁두가 합세해서 붓통을 내팽개치고
방석을 집어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그 소란으로 산천재가 발칵 뒤집혔다.
다른 학인들이 몰려와 세 사람을 붙잡았으나 워낙
힘이 장사라서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그만 하고 내 말 좀 들어보게."
"무슨 할 말이 있소.
책을 내놓지 않으면 산천재에 불을 싸지르겠소."
"글쎄 내 말을 들어보라니까.
내가 다 말해주리다."
그러자 정휴가 씩씩거리면서 조식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너희들은 물러가고 정개청이 너만 남거라."
학인들이 수근거리면서 물러가자 조식이 천천히 말을 했다.
"내 다 말하지.
화담은 물론 죽었네."
"그러면 선생이 말씀하시는 화담은 누구란 말씀입니까?"
"물론 그것도 화담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계속 저희를 놀리시려는 겁니까?"
"들어보게.
화담은 천수를 다 해서 죽었다네.
그를 지키던 태사성을 보게.
이미 빛을 잃었다네.
그를 지키던 천기(天氣)가 사라졌으니 그의 죽음은 어쩔 수 없다네.
그러나 그는 도학의 대가,
이 조선 땅에서 손꼽히는 대학자요 선인이라네.
자네도 혼백(魂魄)이 어떻게 흩어지고 모이는지 알 터,
그이는 혼쯤이야 마음대로 드나드는 재주를 가졌다네.
그런 그가 그대로 죽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지기(地氣)를 모아 혼백을 다시 일으켰다네.
화담은 그의 몸을 이루었던 송도 땅의 기운을 빌어
백(魄)을 돋구어 혼을 잡아 놓은 거지.
그러나 그 지기도 머지 않아 사라질 것이니 화담의
혼백도 곧 흩어지고 말 것일세."
"···"
"그런데 화담은 이지함이란 제자를 몹시 아껴서 뭔가 더 가르칠 게 있었다네.
그런 다음에 그가 지은 책을 읽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었는데
그만 자네가 중간에 끼어든 게지.
그래서 이지함이 공부를 마치기 전에는 그 책을 볼 수 없도록
자네들 앞길에 훼방을 놓은 것이라네."
"그러면 남명 선생께서 그 <진결>을 훔친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정휴가 조식에게 묻자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산천재의 학인 정개청이 입을 열었다.
"제가 훔쳤습니다."
"뭐요?"
"화담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서찰로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소?"
"선생님이 다시 받아가셨소.
그 뒤는 나도 모르오."
정휴는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머리 속이 휑하니 빈 듯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정휴는 정신을 가다듬고 사건의 전말을 하나씩 꿰어보았다.
한참 만에야 정휴는 자초지종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제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이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정휴가 머리를 숙이고 조식에게 사죄를 청했다.
멋도 모르고 덩달아 산천재를 박살내는데 합세했던
전우치와 남궁두도 머리를 숙였다.
"알았네. 그러나 자네들이
화담 선생의 현신을 보고 싶을 터인즉 지금 곧 밀양재로 가게나.
화담이 그곳을 지나고 있을 것일세.
이지함 선비에게 책이 전해졌는지도 확인해 보고…
어쨌든 <홍연진결>을 지함에게 전해주기로 화담과 약조한 당사자는
자네이니 자네가 알아서 그 약조를 지키도록 하게."
정휴 일행은 곧바로 산천재를 나왔다.
정휴는 화담의 현신을 보고 싶었다.
도대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서 움직이고 있는지 그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것은 전우치나 남궁두도 마찬가지였다.
지리산을 내려오면서부터 정휴 일행은
주막마다 들러서 화담 일행의 행방을 물었다.
"며칠 전에 지나갔습니다."
돌림병이 휩쓸고 지난 지역까지 들어가 물었다.
그러나 번번이 대답은 똑같았다.
"며칠 전에 지나갔습니다."
세 사람은 화담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더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경주 바로 옆 감포에서부터 바닷가를 따라오른
지함과 박지화는 팔월도 저물어갈 무렵 울진에 도착했다.
들판의 벼는 황금빛으로 일렁이고 오른편으로
가없이 펼쳐진 동해 바다는 눈이 시린 쪽빛이었다.
화담이 떠나간 이래 두 사람은 조금씩 말을 잃어갔다.
왼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한 적도 있었다.
죽을 병에서 가까스로 회복한 박지화는 건강이
썩 좋지 않은 상태여서 패기가 예전만 하지 못했다.
지함은 길을 걸으며 그다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눈을 열어 눈앞에 새롭게 펼쳐지는
경치를 영혼에 새겨넣을 뿐이었다.
벌써 바람은 제법 시리게 불고 한여름 푸르렀던
신록이 스산하게 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직 석양도 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일찌감치
주막을 찾아들어갔다.
멀찍이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자그마한 주막이었다.
누가 먼저 말을 한 것도 아니건만 오랜 여행으로 익숙해진 두 사람은
마음이 하나가 된 듯 서로를 읽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발길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마당에 내놓은 평상에 걸터앉을 때까지도 입담좋게
생긴 주모는 연신 무슨 얘긴가를 손님들과 주고받는
바람에 지함 일행이 들어서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그 책에 무슨 비결이 있길래?"
"글쎄 세상 일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비결이 다 적혀 있답니다. 그 책 한 권이면 먼훗날의 일도
손바닥 보듯이 다 알 수 있다는 거지요."
손님들 서넛이서 술상을 가운데 놓고 떠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젊은 중도 끼어 있었다.
"주모."
박지화가 주모를 부르자 주모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고 아는 체를 하면서 달려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시우?
우선 요기할 것부터 주시오."
그렇지 않아도 어디 말 붙일 곳을 찾고 있던 주모였다.
주모는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일하는 아이에게 뭐라고 이르고는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지함과 박지화에게 다가왔다.
"아, 글쎄. 선비님들,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어린애 하나가 이상한 책을 가지고 왔답니더."
"어디서요?"
"아, 불영사(佛影寺)라예."
"불영사라니?"
"불영사라면 울진에서는 다 압니더.
그 아이가 어려서부터 그 절에 자주 다니면서 스님들과 놀기도하고
밥을 얻어먹기도 하면서 다니더니 글쎄 이상한
책을 하나 얻어왔다지 뭡니꺼."
"무슨 책인데요?"
지함이 호기심이 잔뜩 발동하여 물었다.
"사람이고 나라고 앞일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책이랍니더."
"그 책을 준 스님은 지금 어디 계신데요?"
역시 지함이 물었다.
"떠돌이 스님이랍니더.
곧 세상을 뜨게 된다면서 몰래 숨겨놓고 지내던 그 책을
그 아이에게 넘겨준 것이랍니더.
아이구, 음식이 나오는 모양이구먼."
주모는 다시 부엌 쪽으로 뛰어갔다.
"그런 일이야 허다한 것 아닌가?
너무 기대하지 말게나.
자네는 그저 비서니 신서니 하면 사족을 못쓰는 게 탈이야."
박지화가 짐짓 지함을 나무랐다.
지함도 머쓱하여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체로 신서(神書)니 비서(秘書)니 하고 소문난 책들을 구해 보면
소문과 다르기 일쑤여서 지함은
아직 제대로 된 책은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니 대체 무슨
책이길래 저리들 호들갑인가 하고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요기를 하고 봉놋방에 들자 마침 방 안에 있던 젊은 중이 한마디 했다.
"제가 그 책을 보았소이다."
"그래요?"
지함이 반가워서 그 중에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소승은 무정(無情)이라고 합니다.
불영사에서 하안거를 하고 동안거를 하려고 해인사에 갔다가
그냥 오는 길입니다."
"그래요?
저희는 송도에서 온 사람들이올시다.
유람다니는 중이지요."
"유람이라.
저희 불가에서는 그것을 운수(雲水)라고 말하지요.
구름따라 물따라 흘러다니면서 훌륭한 선지식(善智識)도 뵙고
좋은 도반(道伴)도 만나 도화법담(道話法談)을 나누지요."
"그 책을 보셨다니,
어떤 책입니까?"
"불영사에 있을 때
도유(道遊) 노사께서 신서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도유 노사께서는 입산하기 전에 도가에 몸을 두고 있었지요.
지리산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신인(神人)을 만나 그 책을 받았답니다."
"신인이라면 신선을 말함이오?"
"도유 노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신인은 평범한 숯장수였답니다.
지리산에서 참나무 숯을 구워다가 구례장에 내다 파는 분이었답니다."
"숯장수요?"
"예. 미륵 현신을 만난 뒤에 세상의 이치를 통하여
그 신서를 쓰게 되었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렇다면 화순 운주사의 그 나무꾼?"
지함이 머리를 갸웃거리자 박지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나무꾼이 운주사를 떠난 뒤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선화(仙化)하신 모양이로군."
그러자 젊은 중이 말했다.
"어쨌든 도유 노사께서는 그 신서를 받아 이곳 불영사로 돌아왔지요.
이후로 늘 신서에 매달려 한탄만 하시더랍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늘을 원망하며 사시다가
몇 해 전에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그때 그 신서를 남사고란 어린 아이에게 주었답니다.
저도 그 노사를 뵌 적은 한번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조선의 앞날이 소상히 적혀 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재난이 계속 일어납니다."
"어떤?"
지함과 박지화는 바짝 긴장하여 무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이 너무 많이 다칩니다.
미륵경에 이르기를,
석가불 시대가 지나고 미륵불 시대가 오려면
그 사이에 말법 시대가 도래하게 된답니다.
이제 그 말법 시대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말법 시대에는 기근겁,
질병겁,
도병겁의 삼재(三災)가 끊임없이 일어난답니다.
굶어죽고 병에 걸려 죽고 전란에 죽는
세 가지 재난이 끊일 새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그런 시대란 뜻이오?"
박지화가 물었다.
"그렇지요.
벌써 이 나라에서도 사화다 염병이다 해서 해마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경에 나오는 말법이 그뿐입니까?"
"아니오.
말법 시대에 들어서면 해도 달도 빛을 잃게 된답니다.
하늘의 천문이 어지러워져 제 자리를 잃게 됩니다.
땅이 꿈틀거리고 물이 말라버립니다.
때 아닌 폭풍우가 몰아치고 여름에 눈이 내리고
겨울에 매미가 울어댑니다.
굶어 죽는 자가 끊이지 않고
위정자는 눈이 멀어 백성을 돌보지 아니합니다.
괴이한 질병이 한번 지나가면 주검이 산처럼 쌓입니다.
전쟁이 계속되어 이유없이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마침내 절이란 절은 다 파괴되고 중마저 살해되어
부처를 모실 법당도 없어지고 법당에 예불 드릴 중도 없어집니다.
도가 완전히 끊기게 됩니다."
"그게 조선에 일어날 일이란 말씀이오?"
"조선에 일어날 일로 이런 게 있더이다.
하늘에서 불이 날아 떨어져 인간을 태운다.
십 리를 가도 사람 하나 만나기 어렵다.
방이 열 개나 있어도 그 안에 사람 하나 없다.
불이 만 길에 퍼져 있으니 사람의 흔적은 멸하였다.
신장(神將)들이 날아다니며 불을 떨어뜨리니
조상이 천이 있어도 자손은 하나가 겨우 사는 비참한 운수로다.
괴상한 질병에 걸려 죽어가니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도다.
하늘에서 내린 이름 없는 괴질로 죽는 시체가
산과 같이 쌓여 그 핏물이 계곡을 이루리라."
무정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지함은 너무도 놀라서 물을 말도 찾지 못하였다.
"함께 바닷가에나 나가지 않겠나?"
답답한 듯 박지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혼자 다녀오시지요.
저는 좀 쉬겠습니다."
"쉬기는.
그 아이를 찾아가볼 셈인 게지."
박지화는 뒷짐을 지고는 주막을 나갔다.
무정은 불서(佛書) 한 권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지함은 주막을 나왔다.
아이의 집은 주막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부모들은 고기를 잡으러 간 건지 아니면 들에 나간 건지 아이
혼자 빈 집 마당에서 수숫대를 꺾어 그걸 밀고 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지함은 사립문 밖에 서서 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랫동안 아이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늘그막에 아이를 귀여워하다 비서(秘書)까지 전해주고 갔다는
노스님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다 그런 것인지-.
아이가 노는 모습은 마치 스님들이 수도하는 모습처럼 경건했다.
인기척을 내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아지경에 빠진 듯 놀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무런 사심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들 산휘의 얼굴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얼굴이 가까이에 있는 듯 선명히 떠올랐다.
피붙이라곤 달랑 그 아이 하나뿐이건만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산휘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갑자기 아득하기도 했었다.
안명세, 민이,
그리고 억지 혼사를 하고 나서는 그렇게까지 아득한 일이
또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봉선사 생활을 마치고 집에 들렀을 때 아들 산휘를 보는 순간,
그리고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이 가슴을 찢는 듯 했었다.
산휘는 커다란 장애였다.
그러나 지함은 훌훌 다 떨치고 화담에게 갔었다.
가끔 아들 산휘의 얼굴이 머리에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지함은 머리를 흔들어서라도 더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내, 산휘,
이 두 사람을 생각하면 지함은 언제나 힘이 쭉 빠졌다.
그러면 또 도가 뭔지,
사는 게 뭔지 싶어 기분이 침울해져서는
박지화가 뭘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아이 남사고는 제 부모와 함께 살면서 천진스럽게,
아이답게 행복하게 놀고 있지 않은가.
아이는 수수깡으로 만든 작은 달구지 같은 것을
마당 이 켠에서 저 켠으로 왔다갔다
밀고 다니는 놀이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 즐거운 표정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지겨운 표정도 아니었다.
지함이 무심하게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열 살이나 됐을까.
얼핏 보면 더 어리고 더 천진해 보이기도 했고,
어찌 보면 운주사의 지족처럼 달관한 모습 같기도 했다.
아무튼 오랫동안 아이를 지켜보고 있으려니
지함은 마음이 훤히 열리는 느낌이었다.
"얘야."
세 번쯤 부르자 그제서야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십니꺼?"
낯선 사람에 대해 전혀 낯을 가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네가 불영사 스님에게서 책을 얻었다는 그 아이냐?"
"예. 그렇십니더."
"이름이 무엇이냐?"
"남사고입니더."
말투는 제법 어른스러웠다.
"그래, 그 책에 뭐라고 적혀 있던가?"
남사고는 이지함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책을
들고나와 지함에게 내보였다.
부모들이 글을 읽지 못해서인지 그 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따로 깊숙히 간직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책은 두꺼운 가죽으로 표지를 엮고
속은 보통 한지로 만든 필사본이었다.
표지에는 <신서비해(神書秘解)>라고 붉은 주사로 씌어 있었다.
"이 책을 내가 보아도 되겠느냐?"
"아무도 보여 주지 말라고 했심더.
겉만 보는 건 괜찮십니더."
"누가 보여 주지 말라던?"
"어떤 할아버지가예."
"왜?"
"사람이 다친답니더."
"이 책을 본 사람이 누구누구냐?"
"동네 사람들이 다 보았십니더.
또 얼마 전에 어떤 할아버지가 와서 보여달라캐서 보여 주었습니더."
"그래? 너는 이 책이 뭔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더."
아이는 지함에게 보였던 책을 얼른 넘겨받고는 계속
수수깡 달구지를 밀고 다녔다.
"너 몇 살이냐?"
"아홉 살입니더."
"글은 알겠지?"
"예."
"이 책은 읽었느냐?"
"아닙니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예."
"너,
이후부터 이 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말아라.
이 책을 더 보여주면 큰일 나니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었다가 나중에 크거든 보도록 해라.
그리고 누가 그 책을 보자고 하면 어떤 손님에게 주었다고 말해라.
알아 듣겠느냐?"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커졌다.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예."
"지금 곧 숨겨라.
나는 한양에서 온 이지함이라고
하니 잘 기억해 두었다가 한양에 오거든 나를 찾아오너라.
그때 내게도 보여 다오."
"나쁜 책입니꺼, 좋은 책입니꺼?"
"아직은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책을 나쁜 사람에게 보이면 큰일이 일어난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
부모님에게도 숨겨야 한다.
반드시 네가 직접 읽을 수 있을 때까지는 책을 꺼내지 마라.
알아 듣겠느냐?"
"예."
"내 이름이 뭐라고 했지?"
"지자 함자 아니십니꺼."
"바로 그렇다.
잊지 말거라."
아이는 얼떨떨해 하면서도 사람이 죽는다는 말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어린 남사고는 <신서비해>를 들고 뒷곁으로 통통거리며 뛰어갔다.
잠시 후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뛰어온 남사고는 몇 마디 나눈 말에
지함을 완전히 믿어버린 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무도 못 찾을 곳에 꽁꽁 숨겨두었지예."
지함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잘 했구나.
네가 스무 살쯤 되거든 잊지 말고 그 책을 찾아 보도록 해라.
노스님이 너를 매우 아끼신 모양이로구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님은 내 동무였습니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우리 어무이 아부지도 절더러 바보라고 놀리기만
했는데 스님은 안 그랬어예."
"사람들이 왜 너를 바보라고 놀렸지?"
"지는 아이들하고 노는 게 재미없십니더."
"그럼 뭐가 재미있는데?"
"하늘도 구름도 별도 바다도 재미있십니더."
아이가 불쑥 지함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가 데려간 곳은 뒤란의 장독대였다.
아이는 지함의 손을 잡은 채
그 중 가장 커다란 장독 위에 달랑 올라가 앉았다.
"여기가 제 자리라예.
지는 여기 앉아서 밤새도록 별을 봅니더."
"별은 왜?"
"노스님이 그러셨십니더.
별은 조상의 눈이랍니더.
조상들은 후손들에게 하늘의 비밀을
몰래 말해주느라고 매일 눈을 깜박거리는 거라예."
"그래서 무얼 보았느냐?"
"오늘 밤엔 조기 지 머리 위에 북극성이 뜰 거구,
저쪽 나뭇가지 위에서 샛별이 떠서 아침이면
이쪽 추녀로 빠져나가지예."
아이는 영롱한 눈으로 석양이 져오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잔바람이 아이의 머리를 흐트리며 살짝 비켜갔다.
"노스님이 있을 땐 하루종일 숲속에 앉아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흘러가는 걸 보았십니더."
"바람을 보다니?"
"스님이 그랬십니더. 모든 것은 있고도 없는 거라구예."
"네가 그 말을 아느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비님이 여기 있다 가버리면 있고도 없는 거 아닌교.
그렇지 않십니꺼?"
지함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나는 이제 가봐야겠다.
내 말을 잊지 않았겠지?"
아이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서글픈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있거라.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게다."
지함은 아이를 장독 위에서 내려놓았다.
골목길을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아이는 또다시 수수깡 달구지를 밀며 마당을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지함은 주막으로 돌아왔다.
박지화가 마침 주막의 다른 손님하고 고누를 두다가
지함이 들어오는 걸 보고 물었다.
"그래, 그 책은 보았는가?"
"아닙니다.
벌써 없어졌습니다.
뭐 신통할 리가 있습니까?
산중에 박혀있는 중이 뭘 안다고…"
"그렇지 뭐.
그런 말을 어디 한두 번 들었나?
이쪽으로 말을 두지요."
박지화는 금세 고누에 정신이 팔려 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주막의 초가 지붕 위로 둥근 박 두 개가 보기 좋게 열려 있었다.
보름이 막 지난 달이 조금씩 이지러지고 있었다.
이튿날 길을 떠나려는데 갑자기 어린 남사고가 주막으로 뛰어들었다.
"선비님, 선비님.
큰일났십니더.
아부지가 칼에 맞았십니더.
책도 없어졌어예."
"뭐라고?"
지함은 아이를 따라 단숨에 달려 아이의 집으로 갔다.
남사고의 말대로 아이의 아버지는 칼을 맞은 채 쓰러져 있었다.
"아는 대로 말해라."
"아부지 혼자 집에 계셨는데,
서당에 갔다 와보니 아부지는 저렇게 칼에 찔려 돌아가시고…
흑흑흑.
책도 없어지고…
흑흑흑."
남사고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말했다.
지함은 시신을 살펴보았다.
목 부위에 칼에 찔린 자국이 선명했다.
단 한번에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아 예사 솜씨가 아닌 듯했다.
"내가 다녀간 뒤에 누가 왔었느냐?"
"아무도 안 왔심더."
"낭패로군."
그때 포졸 두 명이 들어섰다.
"누구냐?"
포졸들은 지함과 박지화를 보고 냅다 창을 겨누었다.
"지나가는 길손이오."
박지화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길손?
너희들이 책을 훔쳐다가 횡재를 보려 했구나.
당장 오랏줄을 받아라."
포졸들은 다른 것은 알아볼 것도 없다는 듯
두 사람을 꽁꽁 묶어 관아로 끌어갔다.
지함과 박지화는 관아 뜰에 엎드려 현감의 문초를 받았다.
"죄인들은 듣거라.
너희가 사람까지 죽이면서 책을 빼앗았다고?
그 책이 얼마나 귀한 책이길래 사람까지 죽이고 빼앗는단 말이냐?"
"우리는 모르는 일이오."
"여기 포졸들이 직접 보았다는데 무슨 말이냐?"
지함과 박지화를 잡아온 포졸 둘이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칼을 씌워 하옥해라!"
현감은 더 이상 문초도 하지 않고 옥사에 두 사람을 집어넣으라고 명했다.
범인이 따로 잡히지 않는다면
두 사람은 영낙없이 망나니의 칼에 목을 바쳐야 할 판이었다.
포졸들이 두 사람을 끌고 옥사로 갔다.
무거운 칼이 지함과 박지화의 목에 걸렸다.
박지화는 몹시 초조해서 숨까지 가쁘게 쉬고 있었건만
지함은 태연하기만 했다.
"여보게, 지함.
여기서 꼼짝없이 죽을 판인 모양일세.
어서 한양에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해야 하지 않겠나?"
"아닙니다.
내일쯤 제가 자수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자네가?"
"무슨 말씀? 아닙니다.
범인은 따로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자네가 자수를 하나?"
"그래야 범인을 잡습니다.
제가 자수를 하면 형님은 죄가 없으므로 곧 풀려날 것입니다."
"나 하나 풀어주려고 그러는가?"
"아닙니다.
나가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무언가?"
"풀려나거든 남사고 그 아이 부친의 사주를 적어다 주십시오."
"그건 또 무엇하려고?
이미 죽은 사람인데.
우리 목숨이 중하지 않은가?"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자,
이 돈은 형님이 가지고 계시다가 포졸을 매수할 때 요긴하게 쓰십시오."
이튿날 두 사람은 다시 현감 앞으로 끌려나갔다.
현감이 문초를 시작하자 지함이 즉각 시인하고 나섰다.
"내가 그랬소이다.
그 책이 탐이 나서 그저께 밤에 몰래 주막을 나와
그 아이가 사는 집으로 가서 책을 빼앗았소."
"사람도 네가 죽였으렷다!"
"그렇소.
들킨 김에 내처 칼까지 들이댔소.
이 사람은 모르는 일이니 풀어주시오."
"아니, 자네가,
자네가 사람을 죽였단 말인가?
그까짓 책이 무에 그리 소중하다고 사람까지 죽였단 말인가?"
"형님,
그 책 한 권이면 팔자를 뜯어고칠 수 있습니다.
앞날이 속속들이 죄다 나와 있는데 정승인들 부럽겠소?"
"옳거니!
네 놈이 그래서 사람까지 죽이며 그 책을 훔쳤구나.
여봐라!
저 놈을 당장 족쇄까지 채워서 하옥시켜라.
곧 참수를 하리라."
지함이 칼을 쓰고 차꼬에 채여 하옥되는 사이
박지화는 포승이 풀렸다.
박지화는 곧바로 남사고에게 찾아갔다.
"저 놈도 한 패 아이가?"
장사를 막 치른 동네 사람들이 박지화를 알아보고 달려들었다.
"미안합니다.
우리는 범인이 아닙니다.
곧 범인을 잡아 누명을 벗겠습니다.
만일 범인이 잡히지 않으면 그때 가서
우리 목숨을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제 아우가 옥사에 잡혀 있습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눈빛을 풀지 않았다.
박지화는 남사고를 찾았다.
지화는 남사고를 만난 적이 없었으나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 몸에 상복을 입은 남사고가
제 발로 박지화에게 걸어왔던 것이다.
"네가 남사고냐?"
"예.
이 선비님하고 같이 다니시는 분이십니꺼?"
"그렇다마는 이 선비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잡혀 있단다.
범인을 잡지 못하면 그 선비가 대신 죽게 된다."
"그라모 어떻게 범인을 잡십니꺼?"
"이 선비가 네 아버지의 나이와 생일을 알아오라고 했다.
어머니에게 여쭈어 사주를 알아 달라고 하거라."
"어무이는 지금 실신하여 깨어나지 못하고 있십니더."
"그러면 네가 아는 대로라도 알려주려무나."
"지는 알지 몬하고 어무이만 아십니더."
"알았다.
네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시는 대로
아버님 사주를 받아적어 내게로 가져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이 선비가 억울하게 죽는단다.
너도 믿지? 이 선비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예.
아부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무이가 누굴 보았답니더.
헐레벌떡 사립을 뛰쳐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는데 키가 작더랍니더.
이 선비님은 키가 크시잖십니꺼?"
"그렇구나.
키가 크다.
그밖에는?"
"뛰어가는 게 여간 날래지 않았답니더."
"음. 알았다.
나는 주막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아버님의 사주를 알아내는 대로 달려오려무나."
박지화는 주막으로 돌아갔다.
박지화가 주막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땅거미가 질 무렵 남사고가 달려왔다.
"그래, 알아냈느냐?"
"예, 여기."
"음, 알았다.
애썼다."
"그런데 선비님.
이걸 어디에 쓰시려구 그러십니꺼?"
"나도 모른다마는 이걸 이 선비에게 전해야 한다.
내가 얼른 옥에 다녀오마."
박지화는 곧바로 관아로 달려갔다.
그러나 살인범이라고 면회가 되지 않았다.
박지화는 관노 하나를 잡고 쪽지를 부탁했다.
"이걸 살인죄로 잡혀 있는 이지함이라는 사람에게 전해주시오."
물론 쪽지와 함께 엽전 몇 닢도 건네주었다.
관노는 엽전을 보더니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 있으면 내게 전하시오.
여기에서 기다릴 테니."
관노는 두말 없이 관아로 들어갔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관노가 다시 나왔다.
"선비님,
나이가 스무한 살이고 칠월 칠일생인
사람이 누군지 찾아보랍니다."
"스무한 살에 칠월 칠일생이라…"
"스무한 살이야 우리 관아에도 많이 있고,
칠월 칠석이라.
옳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포졸 하나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뭐라고?"
"그런데 그건 알아서 어디에 쓰시려구요?"
"알 바 없네.
그 포졸이 어디에 사는가?"
관노가 말을 하지 않고 우물쭈물했다.
박지화는 동전 두 닢을 집어 관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제서야 관노는 그 포졸이 사는 집을 알려주었다.
포졸이 사는 곳은 주막에서도 멀리 떨어진 마을이었다.
박지화는 단숨에 그곳까지 달려갔다.
마침 그 포졸이 집에 있었다.
"여보시오."
포졸은 박지화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애써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 하였다.
"무, 무슨 일이오?"
박지화는 더 볼 것도 없이
그 포졸의 목덜미를 꽉 움켜잡고 방으로 집어던졌다.
박지화가 포졸의 배에 올라타 목줄기를 쥐자
포졸은 캑캑거리면서 발버둥쳤다.
지함이 스물한 살에 칠월 칠일생을 찾으라고 할 때에는
필시 그가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것이라고 박지화는 믿었던 것이다.
"네 놈이 남 씨를 죽이고 책을 훔쳤겟다!"
"으으윽."
포졸은 신음소리만 내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박지화는 목뼈가 부서져라 하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마, 말하겠소."
"오냐, 어디 한번 털어놓거라."
"실은 현감 어른이 시켜서 한 일이오."
"현감이?"
"그 책을 한양에 있는 정승에게 상납하려구요.
벼슬을 사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사람까지 죽이느냐?"
"현감이,
만일 들키게 되면 죽여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으렷다!"
"예."
"너만 알고 있느냐?"
"아니오,
형방도 알고 있습니다."
"네가 살고 싶다면 꼼짝 말고 예 있거라."
박지화는 포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몸을 꽁꽁 묶어서 헛간에 숨겨놓았다.
"내가 곧 올 테니 그때까지 찍 소리 말고 있거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목뼈를 부러뜨리겠다."
벌써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박지화는 다시 관노를 불렀다.
관노는 옥에 들어갔다가 곧 돌아왔다.
"이걸."
관노가 쪽지를 내밀었다.
'사람들에게 그 포졸이 직접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풀려납니다.'
박지화는 엽전 몇 닢을 관노에게 던져주고 곧 남사고를 찾아갔다.
남사고의 집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선비님."
"그래, 범인을 잡았다."
박지화가 범인을 잡았다고 말하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래, 범인이 누구인교?"
"예, 지금 제가 잡아놓았습니다.
함께 가서 그 자를 잡읍시다."
박지화가 앞장서자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뒤를 따랐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그 포졸의 집으로 몰려들어갔다.
박지화는 헛간에 숨겨두었던 포졸을 끄집어내었다.
사람들은 소문을 들었는지 점점 더 모여들었다.
"네 입으로 네가 말하거라.
누가 시켰느냐?"
박지화는 포졸의 입에 물린 재갈을 뽑아냈다.
"저어, 저…"
"말하래이!"
마을 사람 하나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현감 어른이…"
포졸은 훌쩍거리면서 현감이 시킨 사실을 낱낱이 불었다.
뜻밖의 사실에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관아로 갑시다!
가서 현감에게 직접 알아봅시다."
누군가 제의하자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관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관아로 몰려가자 박지화는 포졸의 결박을 풀었다.
"너는 이 길로 이웃 현으로 달려가서
그쪽 현감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이 위태롭다.
여기에 이대로 있다가는 현감이 너를 진범으로 몰아갈 것인즉."
포졸이 헐레벌떡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 박지화는 관아로 향했다.
관아는 성난 백성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황한 현감은 일단 이지함을 풀어주고 책을 내놓았다.
"사실은 그 포졸 놈이 이걸 훔쳐와서는 내게 주었소.
난 모르는 일이오. 포졸 놈이 그 짓을 하다니."
"책을 당신이 가지고도 억울한 사람을 붙잡아두었소!"
박지화가 소리를 지르자 현감은 몹시 당황하여
변명을 계속 늘어놓았다.
"보시오.
저 책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오."
"무슨 얘기요?"
"글은 한자로 되어 있지만 도저히 뜻을 풀 수 없는 책이오.
소문과 영 다른 책이란 말이오.
이 책은 남 씨가 가지고 있던 책이 아니오."
"뭐라구?"
현감이 서둘러 책을 내놓았다.
지함은 그 책을 받아 남사고와 박지화를 데리고 주막으로 갔다.
"무정, 무정 스님.
어디 갔소?"
"여기있소."
무정이 그때까지도 봉놋방에 있었다.
"아직 안 떠나셨구려."
"선비님들이 잡혀 갔다 해서 선뜻 떠나지 못하고 지켜보았소."
"이리 오시오.
이 책이 스님이 보셨다는 그 신서요?"
무정은 지함에게서 책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겉장은 맞는데…
이상하군요.
이건 비결로만 되어 있소이다.
내가 본 <신서비해>는 비결은 아니었소.
우리네도 알아볼 수 있는 글로 쉽게 적혀 있었소."
"내가 볼 때에는 이 책이었소.
그렇다면 그 전에 책이 바뀌었단 말인가?"
이지함이 박지화를 돌아다보았다.
"남사고야.
이 책을 본 사람이 누구누구라고 말했었지?"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한 차례 보았고요,
그 다음에는 어떤 할아버지가 찾아와서 보여주었습니더."
"그리곤?"
"그 다음에는 선비님이 보셨십니더."
"나는 겉장만 보았었지.
너도 기억나지 않느냐?"
지함이 남사고에게 물었다.
"예. 맞십니더.
제가 스무 살이 되면 보라고 하시믄서 금방 돌려 주셨십니더."
<신서비해>가 바뀐 것이었다.
겉표지만 그대로 있고 알맹이는 전혀 다른 책이 된 것이었다.
"그 노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네가 잃어버린 <신서비해>를 찾을 수 있다."
"아는 노인도 아니고 어떻게 찾소?
혹 다시 오기나 한다면 몰라도.
책을 훔쳐간 사람이 다시 올 리는 없고…"
무정이 아쉬운 듯 방을 나갔다.
남사고도 방을 나가려 했다.
"가려고?"
"그럼 어떻게 합니꺼?
잃어버린 책을…"
"이거라도 가져가거라."
"싫십니더.
가짜를 갖다 무에 씁니꺼?
어무이까지 돌아가시면 안됩니더."
"그러면 이 책은 태워버리자.
이 책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치면 안 된다."
지함은 가짜 <신서비해>를 펴보았다.
온통 알아볼 수 없는 비밀스런 내용으로 꽉 차 있었다.
"그까짓 것은 보아서 뭘하나?
어차피 가짜라는데…"
박지화가 자리에 벌렁 누우면서 말했다.
그래도 지함은 한장 한장 넘겨보았다.
남사고는 그러는 지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함은 다시 첫장을 펴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응?"
지함이 눈을 번쩍 뜨더니 책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왜 그러는가?"
지함은 잠시 아무 말없이 책을 들여다보았다.
"가짜라도 뭘 써놓은 것인지는 봐야 하는데 도통 읽을 수가 없습니다."
"도적놈이 진짜를 빼가려고 아무렇게나 써놓은 것이네.
볼 필요도 없네."
"누군가 그저 아는 글자는 죄다 끄적거렸군요.
순서도 없이."
"태우지 않으실 겁니꺼?"
"옳지. 너,
나가서 주모에게 화로 좀 갖다 달라고 하렴."
남사고가 밖에 나가더니 한참 만에야 화로를 들고 들어왔다.
"광에 깊이 둔 걸 꺼내왔심더.
많이 기다리셨십니꺼."
"아니다.
그새 한번 훑어보았다.
쓰잘 데 없는 잡문이다."
"그만 태우게."
"그러지요.
끝장까지 다 넘겼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써놓았으니 그럴 듯하여
포졸도 현감도 가짠 줄 금세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지요.
처음 넘기는 순간엔 저도 깜빡 속을 뻔했으니까요."
"선비님, 지가 불을 붙이것십니더."
"사람 잡은 책이니 이런 책은 태워 없애야 한다.
이런 책이 항간에 돌면 사람이 여럿 다친다.
우리도 여기에 더 머물다보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만 떠나야겠다."
지함은 책에 불을 붙여 화로에 던졌다.
책은 화로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지함과 박지화는 남사고를 돌려보내고는 주막을 나와 길을 떠났다.
마침 무정도 길을 떠난다면서 주막을 나왔다.
멀리 관아에서는 계속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게, 범인을 어떻게 알았는가?"
"남 씨는 바로 그 시에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범인은?"
"남 씨의 명을 끊을 사람은 그 포졸이었습니다."
"그게 다 정해져 있단 말인가?"
"정해진 게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하는 거지요.
기를 알지 못하니 기에 눌려 사는 것일 뿐입니다.
하늘이 시킨 건 아니랍니다."
"그런들 어떻게 풀려날 줄을 알았는가?
현감이 계속 뒤집어씌우면 그만일 텐데."
"현감은 수에 약합니다.
수란 백성의 소리입니다.
그것도 홍수처럼 밀려오는 수에는 금세 기가 빠지고 맙니다."
"허허허."
두 사람은 껄껄 웃으면서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그 밤을 밟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정휴 일행이었다.
경주부터는 박지화의 병으로 지함이 빨리 걷지 못한 탓에
세 사람이 바싹 따라붙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기(地氣)가 떨어진 화담의 현신이 사라지면서
지함, 박지화 두 사람은 며칠이나 지체했었다.
정휴 일행은 주막에 들어가 지함의 소식을 물었다.
"그 손님들 저녁 나절에 떠났십니더."
그러자 정휴가 당장 발걸음을 돌렸다.
"가세.
빨리 가면 따라갈 수 있을 것이네."
"늦었네.
어차피 이 선비님도 멀리 가진 못하실 걸세."
"그러세.
오늘은 쉬세.
이제 화담 선생님의 현신도 사라졌으니 이 선비를 뵙는 것은 시간 문젤세."
전우치와 남궁두가 몹시 피곤했던지 서로 맞장구를 쳤다.
하기사 걷기에는 너무 어두운 밤이었다.
정휴는 하는 수 없이 주막에 들기로 했다.
"이게 뭐지?"
방에 먼저 들어간 남궁두의 말이었다.
"뭔데 그러나?"
정휴가 방으로 들어갔다.
"이건?"
남궁두가 화로에 타다 남은 종이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이건 자네가 잃어버린 그 <홍연진결>에 있던 글자일세."
정휴가 들여다보니 그건 틀림없는 화담의 글씨였다.
"맞네. 틀림없네.
그렇다면 이 책이 불에 탔단 말인가?"
정휴는 황급히 주모를 불렀다.
"주모! 주모!"
주모가 헐레벌떡 달려나왔다.
"왜 그러십니꺼?"
"이 방에 누가 있었소?"
"손님들이 찾던 그 선비들이 묵었는데예…
와 그라시는교?"
그렇다면 그 책은 이지함이 태운 것이 분명했다.
"마, 그 책 때문이사 여럿 다쳤제.
이 선비라카는 양반 목이 날아갈 뻔 했십니더."
"무슨 일로요?"
주모가 신이 나서 저간의 사연을 미주알고주알 고해 바쳤다.
"그래서 큰일 날 책이라고 안 태웠는교?"
"아이구, 저런."
정휴가 장탄식을 했다.
"이젠 영영 끝났네.
화담 선생의 말씀만 믿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아이고."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정휴는 이튿날 남사고란 아이를 찾아갔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 책을 받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너 그 책을 어디서 얻었더냐?"
"그 책은 다 태웠십니더.
이젠 없십니더."
남사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까지 앗아간 책에 관해 다른 사람들이 와서 또 묻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안다.
그 책을 처음에 어디서 얻었느냐구 물었다."
"<신서비해>요?"
"<신서비해>?"
"그 책 이름이 그랬십니더."
"그래?"
"불영사 스님이 주셨십니더."
"불영사 스님?"
"예."
"어떤 분인데?"
"도유 노스님이라예."
"그래."
"그런데 책을 도둑맞았십니더.
이젠 없십니더."
"불에 태웠다면서 도둑을 맞았다니."
"진짜는 도둑을 맞고,
가짜를 태웠십니더.
우리 집엔 이제 진짜고 가짜고 아무것도 없십니더.
들어가보이소."
"가짜?"
"선비님들이 그래 말했심더.
어떤 노인이 그렇게 바꿔친 거라예."
"노인?"
정휴는 짚이는 게 있었다.
화담의 얼굴 생김새를 남사고에게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분이 맞지?"
"예. 맞십니더."
정휴는 또 답답해졌다.
남사고가 말하는 노인이 바로 화담이었던 것이다.
정휴한테서 빼앗은 <홍연진결>을
지함에게 전해 주기 위해 책을 바꾸어쳐 가면서
남사고란 어린 아이에게 부촉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정작 주인이 알아보지도 못하고 태워버렸다니.
정휴는 난감했다.
이제는 이지함을 따라가는 일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난 그만 계룡산으로 돌아가겠네.
일은 이미 다 글러버렸네."
전우치와 남궁두도 맥이 빠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세."
정휴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답답하고 땅을 내려다보아도 답답하기만 했다.
'연재物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를 훔치다 - 소설^토정비결(下-28) (0) | 2020.07.31 |
---|---|
세월에 지는 사람 - 소설^토정비결(下-27) (0) | 2020.07.30 |
돌림병 - 소설^토정비결(中-24) (0) | 2020.07.30 |
날개 잃은 해동청 - 소설^토정비결(中-23) (0) | 2020.07.30 |
미륵불이 가사를 벗어 던진 사연 - 소설^토정비결(中-22) (0) | 2020.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