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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돌림병 - 소설^토정비결(中-24)

송도를 떠난 지 어느새 반 년이 지나고 있었다.

길은 산비탈을 돌고 강을 건너며 끊어질 듯 말 듯 하면서도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대기가 한여름 막바지 더위로 후끈 달아올라 한 걸음 옮기는 것이
천근 만근되는 태산덩이를 들어옮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화담은 전혀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더위에 지친 지함과 지화를 다독거리며 길을 재촉했다.

 

http://blog.daum.net/munjoolle/247

 

영남알프스 가지산 등산코스 (석남사 원점회귀 코스)

영남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경남, 경북, 울산광역시에 걸쳐 솟아있는 가지산 산행을 석남사에서 시작하였다. 가지산 정상(1241m) 전경 약 5년 만에 다시 찾은 석남사 원점회귀 산행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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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천재에서 산청쪽으로 내려와 그 걸음에 합천, 창녕을 거쳐

사뭇 달리다시피 강행군을 해온 사람 같지 않게 씩씩한 발걸음이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투혼일는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땀도 안 흘리십니까?"
화담은 여름 땡볕에 몇십 리를 걸으면서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묻는 박지화의 옷은 아랫도리까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비틀어 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화담은 잠시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내달리듯 빨리 걸었다.
여름이라서 좋은 낯으로 객을 받아들이는 집이 없었다.

양민들 집에는 이미 보리마저 거의 다 떨어진 뒤끝이라

피죽 한 그릇 얻어먹기도 힘들었다.

여름 손님은 죽어 뱀이 된다는 속담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지함과 박지화는 여행하는 동안 살이 내려 그야말로
뼈다귀에 살가죽으로 도배만 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화담은 먹는 것이 거의 없는데도

떠날 때 모습 그대로 화색이 돌았다.
밤이 저물었다.
조금 전에 지나쳐 온 마을에서 비어 있는 헛간이라도 빌렸으면

지친 다리를 쉴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기어이 더 걷자는 화담의 말을 따르다보니

인적도 없는 산중에서 밤을 만나고 만 것이었다.
천황산과 가지산이 잇닿아 있는 태백산맥의 마지막 자락,

가지산의 남쪽 끝부분인 밀양재 부근이었다.
지리산 만큼 깊지는 않아도 높이가 천미터에 가까운

고개 꼭대기에서 밤을 만났으니 오도가도 못할 처지였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밀양재.

나그네들이 대낮에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는 고개였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일행이 스무 명쯤은 될 때까지
주막에서 기다리다가 함께 고개를 넘어간다고 했다.
이런 말을 미리 들었으니,

아무리 담대한 대장부라도 간담이 서늘해질 판이었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지함은 머리카락이 쭈빗쭈빗 섰다.
어디선가 늑대가 울었다.

여운을 남기듯 울음소리를 길게 끌면서.
그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이름 모를 산새들이
음산하게 울어대었다.

어두운 숲이 이러한 산짐승들의 울음소리에 일렁였다.
맨 뒤에서 걷는 지함은 자신의 발자국 소리조차
섬뜩섬뜩하게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가 자신을 뒤따라오는 인기척 같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컴컴한 어둠이 매번 낯선 얼굴로 지함의 두려움을 키웠다.
그동안 집요하게 지함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희수라는 여인,

해사에서 보낸 하룻밤 기억이 씻은 듯 달아났다.

지함은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연약한 짐승이 되어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박지화도 마찬가지였다.

지함이 뒤를 돌아보느라
잠시 걸음을 늦출 때마다 지화도 두려움으로 핼쑥해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이렇게 밤새 걸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디 바위 밑에서라도 밤을 보내지요."
마침내 박지화가 화담에게 청했다.
내처 걸을 것만 같았던 화담은 웬일인지 박지화의 청을 쉽게 받아들였다.

화담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둘러보더니

길을 조금 벗어나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캄캄한 어둠 속인데도 덩쿨이 우거져 있는 숲을 헤치며

익숙한 길을 가듯 거침없이 나아갔다.
얼마 후 세 사람이 간신히 밤이슬을 피할 수 있을 만한

작은 바위굴에 다다랐다.
굴에 들어선 화담은 털썩 주저앉았다.
"선생님, 이곳에 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박지화가 궁금기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화담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하루종일 쌩쌩하게 걸어온 것으로 보아

기력이 쇠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보게, 지함.

불이라도 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박지화가 몸을 움추리며 지함에게 말했다.
"여름에 불은 무슨…

그냥 자도 그리 춥지는 않겠습니다."
지함은 불이고 뭐고 피곤해서 그저 빨리 눈을 붙이고 싶었다.
"추울까봐 하는 말이 아닐세.

호랑이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호랑이는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지만 불에는 기겁을 한다네."
"그렇군요.

그런데 형님, 불을 피우실 줄 압니까?"
"해본 적은 없네만…

일단 불이 잘 붙을 만한 가랑잎 하고 마른 나무를 좀 구해보세."
화담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눈을 반쯤 감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지함과 박지화 두 사람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굴을 나섰다.
한창 물이 오른 여름나무들이라 불이 쉽게 붙을 만한

마른 나뭇가지를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
초승달이 떠 있기는 했지만 숲이 우거져

달빛을 가린 탓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마치 바람이 살랑거리듯 조심스런 소리가 먼 발치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지함은 바싹 긴장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박지화가 소리를 질렀다.
"저, 저기…"
장승처럼 굳은 박지화가 간신히 입을 떼고 신음을 냈다.
박지화가 보고 있는 쪽을 돌아본 지함도

박지화처럼 온몸이 굳었다.

마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시퍼런 불꽃 두 개가 저만치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몸집이 거대한 호랑이었다.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만 아니었다면 커다란 바위로 여겼을 것이다.
호랑이는 소리없이 나뭇잎을 밟으며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오줌보가 꽉 찬 것처럼 터질 듯한 긴장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호랑이는 두 사람의 코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 크고 불타는 눈으로 두 사람을 계속 응시했다.
박지화가 지함을 뒤로 밀며 한발짝 물러섰다.
호랑이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흐린 달빛 속에서도 날카로운 어금니가 번쩍 빛을 냈다.
순간,

세상을 뒤엎을 듯 우렁찬 호랑이의 포효가 들려왔다.

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메아리가 이 산 저 산을 치며 수없이 반복해 울려왔다.
그 기세에 눌려 지함은

자기도 모르게 호랑이를 쏘아보던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였다.

휘익, 바람소리가 났다.

지함은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누군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 바람에 박지화와 지함은

뒤로 밀려 엉덩방아를 찧고 나자빠졌다.
화담이었다.
화담은 두 사람 앞을 가로막고 서서 호랑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순간, 숲속이 고요해졌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화담과 마주보고 있던 호랑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함과 박지화 두 사람이 정신을 차렸을 때,

화담은 어느새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숲은 여전히 어두웠다.

늑대의 울음도 산새의 울음도 그친 숲은 태고의 적막 속인 양 고요했다.
풀숲을 헤쳐가는 화담의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함이 몸을 추스려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박지화는 땅에 주저앉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지함이 박지화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박지화는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박지화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뭐가 말씀입니까?"
"선생님 말씀일세.

평소하고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글쎄요.

뭔가 이상하긴 합니다만…

뭐 짚이는 게 있으십니까?"
박지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모르겠네.

나도 모르겠네."
"언젠가 처음 화담 산방에 갔을 때 선생님이

산새와 얘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만…

선생님은 세상 미물들과도 기가 통하시는 건지도 모르지요."
박지화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은 나무를 구하러 갔던 것도 잊어버리고
화담의 뒤를 따라 굴로 돌아왔다.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니 그냥 편히 자게나."
화담은 차가운 바위에 풀을 한 겹 깔고 모로 누워 있었다.
지함도 자리를 잡아 몸을 뉘었다.

생사의 기로에 직면해 바짝 달아올랐던 긴장이 풀리자

몸은 당장이라도 땅속으로 가라앉을 듯 무거워졌다.

그러나 좀체 잠이 오질 않았다.
지함은 굴 바깥에 아득히 높이 있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무수한 별이 더러는 영롱하게,

더러는 어둡게 반짝이고 있었다.
지함은 태사성을 찾아보았다.

지함은 낮게 신음을 냈다.

태사성은 거의 기력이 다 한 상태였다.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존재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다.
화담의 별, 태사성.

그 태사성이 빛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면

화담의 목숨 또한 막바지에 이른 것이다.

생명의 힘이 저토록 미약한데 화담이

여기까지 강행군을 해 왔다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서 여행을 마쳐야겠구나 하고 다짐하며

지함은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누군가 지함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한가닥 햇살이 새어들어
지함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몹시 피곤했던 모양이구만.

흔들어 깨워야 일어나니.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지화는 깜깜 밤중일세."
어느새 일어났는지 화담이 정좌한 자세로

지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함은 정신이 들자 어젯밤 태사성을 본 기억이 났다.
"선생님. 여행을 그만 두고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러자 화담이 빙그레 웃었다.
"태사성을 본 모양이구만.

괜찮네.

아직 더 버틸 힘이 있으니…

이왕 시작한 여행이니 힘 닿는 데까지 가보기로 하세.

조금이라도 더 세상을 보고 싶네."
화담의 말투는 자신있었다.

더 이상 이견을 내세우며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지화나 깨우게나.

이제 슬슬 떠나보세."
아직 잠이 덜 깬 지화를 채근하여 세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났다.

얼마 안 가 밀양재 마루턱에 다다랐다.
멀리 골짜기에 마을이 아스라히 내려다 보였다.

워낙 인적이 드문 길인지 고갯마루를 넘어오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아침을 거른 배가 요동을 쳤다.
이번 여행 내내 두 끼를 찾아 먹으면 잘 먹는 축에 들었다.

어쩌다 한양 소식에 굶주린 가세 좋은 양반집이나 만나면

간신히 배를 채울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때문인지 때가 조금 지나자 뱃속은 곧 잠잠해졌다.
화담은 퍽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저러다 길거리에서 임종을 맞는 것은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의 의사가 그토록 확고하니 지함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밀양재를 거의 다 내려섰을 무렵,

허름한 주막이 하나 나타났다.

대낮인데도 문에 빗장이 질러져 있었다.
이상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주막집 문을 두드렸다.

요기나 하고 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아예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태양은 벌써 머리 바로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오가는 사람이 없어서야 주막이나 온전하겠나.

좀더 가보세."
아쉬운 마음으로 박지화가 한번 더 문을 두드리며 주모를 불렀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일행은 할 수 없이 점심도 거른 채 곧장 밀양재를 내려갔다.
잠시 후 왼편 가지산 자락에 자그마한 절이 멀찌감치 보였다.

비구니들만 수도한다는 석남사였다.
화담은 비구니들만 있다는 곳을 들어가기가 민망한지 잠시 머뭇거렸다.
"어떻습니까.

남자라고 해서 설마 객을 내치겠습니까?"
활달한 박지화가 성큼 앞장서서 길을 잡았다.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자 넓진 않지만
제법 물이 깊은 계곡을 가로지른 돌다리가 나타났다.
계곡은 꽤 깊었다.
젖빛 바위 사이사이를 맑은 계곡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가지산 정상으로부터 내리뻗은 계곡은 수천 년을 두고 물길을 잡아왔을 터였다.
바위마다 모난 데라곤 하나도 없이 둥글둥글했다.
오랜 세월 동안 흐르는 물에 갈고 닦인 때문이었다.
석남사는 계곡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법당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결에 한가로이 흔들리며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스님, 스님. 계십니까?"
여전히 풍경소리만 들릴 뿐 아무도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지나던 객이올시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던 지함이 대웅전 앞에 멈추어 섰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지함은 법당문을 열어보았다.

여름인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향불조차 타오르지 않는 법당 안은 대낮인데도 어두침침했다.
"선생님, 여기도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모양인데요?
향불도 꺼진 지 오래 된 것 같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가는 곳마다 문을 닫아 걸었으니…"
화담도 머리를 갸웃거렸다.
"내 참. 하루종일 쌀 한 톨 구경할 수 없게 될 모양이구만."
박지화가 툴툴거리며 되돌아섰다.
"어? 그런데 저기 저 사람은 혼자 뭐하는 거지?"
기암괴석이 줄지어선 계곡을 따라 얼마나 내려왔을까,

앞장 섰던 박지화가 앞을 가리켰다.
계곡 건너편으로 가로질러 나무다리 위에 포졸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병든 닭처럼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포졸이 화담 일행을 발견하고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오. 어디들 가는 길이오?

여기는 통행을 못 합니다."
"우리는 팔도를 주유중인 송도 선비들이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길을 막고 그러시오?

어디 산적이라도 나타났소?"
박지화가 물었다.
마흔쯤 되어보이는 포졸은 힘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문도 못 들으셨소?"
"무슨 소문 말이오?

밀양재에서 주막을 안 들리고 곧장 오는 길인데…"
"말도 마시오.

근동에 염병이 퍼져서 난리라오."
"염병이라니요?"
"경주서부터 옮아온 염병이 벌써 경상도 사방으로 퍼졌다오.

온 데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바람에 시체를 치울 손마저 달리는 형편이라오."
주막이며 석남사가 비어 있더니 이미 염병이 거기까지 휩쓸고 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러고 있소?"
박지화가 또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묻고 나섰다.
"염병이 퍼진 곳에 사람 통행을 막으라는 포도청 지시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오.

원래는 열 사람이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나만 남았소."
"당신은 왜 도망가지 않았소?"
"나마저 도망가버리면 멋 모르고 이 지방으로 오는 사람들이 다 병에 걸릴 것 아니오."
"그런데 왜 그리 힘이 없소?"
"며칠 전까지는 저 건너에 있는 마을에서 자고 밥도 얻어먹었소이만

저기도 병이 퍼져서 밥을 굶은 게 벌써 사흘째요."
"쯧쯧."
박지화가 혀를 찼다.
"거 답답한 양반일세.

당신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남 걱정이 되오?"
"먹고 살기가 막막해서 포졸이 됐소만,

맡은 일은 책임져야 하지 않겠소?"
사흘이나 굶었다는 포졸은 따박따박 말대답은 잘도 했다.
"거 참 앞뒤가 꼭꼭 막힌 양반일세.

우리야 아무것도 몰랐으니 이 길로 들어섰소만…

소문이 이미 널리 퍼졌다면 더 올 사람도 없을 게요.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현명한 일일 것이오."
"집에 돌아가 봤자 우리 집 식솔들도 모두 원귀가
돼 있을 거외다.

예서 죽으나 게서 죽으나 뭐가 다르겠소.

당신들이나 왔던 길로 돌아가시오.

죽어도 여기서 길을 지키다가 죽을 거요."
그제야 박지화는 잔뜩 근심스런 얼굴로 화담을 돌아보았다.
"선생님, 어떻게 하지요?"
"나야 살 만큼 산 사람이니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자네들이 알아서 결정하게나."
화담은 슬쩍 자리에서 물러나 이미 염병이 돌았다는 개울 건너 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염병이 돌고 있다는데 어찌 갈 수 있겠나.
돌아가세.

아쉽기는 하네만 어쩌겠나."
박지화의 걱정이 아니더라도 지함 역시 망설이고 있었다.

몸이 오랜 여행으로 몹시 허약해져 있었다.
그 몸으로 전염병이 돌고 있는 곳을 무사히 지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염병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싶은 욕망도 있긴 했으나

병에 대한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그러나 이때 민이 생각이 떠올랐다.

민이는 정순붕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  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팔뚝을  잘라다가 베개 속에 넣어두었다고 들었다.

민이는 하루하루 염병에 걸려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지함이 민이 생각으로 잠시 멍하니 있을 때

화담이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사람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어허. 죽음이 그리도 두려운 것인가.

왜 이 먼 길을 떠나왔던고.

이 땅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진실을 구하려는 욕망도 죽음 앞에서는 뒷걸음질치고 마는 것인가?

염병은 이 땅의 병이 아니고,

염병에 걸린 백성은 이 나라 백성이 아니던가?

포졸 하나도 제 책무 때문에 이토록 목숨을 내놓고 길을 지키고 있는데,

세상을 구하겠다는 사람들이…"
화담의 탄식이 두 사람의 가슴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지함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화담은 죽음을 앞두고 힘든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두 제자를 가르치고 일깨우기 위한 고행임을
그제야 지함은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함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박지화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박지화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가시지요."
그제야 화담은 빙그레 웃으며 뒤돌아섰다.
세 사람은 염병이 퍼졌다는 경상좌도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졸이 길을 막고 나섰다.
"여보시오, 선비님들.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괜찮소.

우리라도 가서 환자들을 살펴보리다."
"그러시면 선비님들까지 다 병에 걸려 살아남지 못합니다."
"고맙소. 포졸 나리.

허나 우리라도 가서 사람들을 거두겠소."
포졸은 하는 수 없이 길을 비켜 섰다.
"정 가시려거든 이름자나 남기고 가시오.

누가 죽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겠소?"
"허허. 이름은 남겨 무엇하겠소.

한 세상 살다가면 그만인 것을…

당신이나 몸조심하시오."
더 이상 말할 힘도 없는지 포졸은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는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처처에 저런 인물만 있어도

나라꼴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으련만…"
화담이 안타까운 듯 포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런 이의 운명은 감정할 수도 없다네."
"어째서 그렇습니까?"
"운명에 맞서 저렇게 의연한 이는 하늘도 비켜가는 법이지."
"운명을 극복하는 것은 스스로 의지를 갖는 것입니까?"
"그렇지.

제가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을 스스로
끌고가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힘도 미치지 못한다네."
화담 일행은 주린 배를 감싸안고 인적이 끊긴 길을 따라 울주로 향했다.
해가 기울 무렵 산등성이 아래에 지붕 몇 채가

산새집처럼 깃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녁 연기가 오르는 집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을도 이미 염병이 휩쓸고 간 모양입니다."
"어쨌든 가보세."
아까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던 박지화가 용기
충천해서 직접 마을로 들어가보자고 성화였다.
작은 징검다리를 건너자 장승 한 쌍이 세 사람을 맞이했다.
마을은 한적했다.
어느 마을에서나 사람보다 먼저

객을 반기는 그 흔한 삽사리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깨끗해 보이는 집으로 들어섰다.
"주인 계시오? 주인장, 주인장!"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박지화는 가까운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노인네가 썼던 듯 곰방대가 놓여 있는 방은 역한 냄새만 풍길 뿐 텅 비어 있었다.
"아이구, 이런, 쯧쯧…"
방문마다 다 열어젖히던 박지화가 안방문을 열더니 코를 감싸쥐고 돌아섰다.
지함도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젊은 부부와 아이 둘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벌써 숨이 끊어졌는지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이들이 부모보다 조금 늦게까지 숨이 붙어 있었던 듯했다.

이미 죽은 에미의 품으로 파고든 자세였다.
시체는 모두 살 한점 없이 깡말라 있었다.
쇠파리들이 시커멓게 달라붙어 그나마 남아 있는 살을
파먹은 시체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일을 어쩌지요?"
지함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난감했다.
화담은 턱을 고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단 시체를 불태우세."
"예? 불태우다니요?"
"염병이란 것이 본시 열이 끓는 것 아닌가?
의술이야 잘 모르네만 도의 이치란 무엇이나 매한가지인 법.

본시 산불이 거세면 맞불을 놓는 법이고,

양기가 지나치면 더 강한 양기로 기를 누르는 법일세.

열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니 그 열로 열을 죽여 없애버리잔 말일세."
그제야 지함과 박지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를 옮기는 것도 문제였다.

보는 것은 웬만큼 참을 수 있었지만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와 들끓는 파리는

비위가 뒤틀려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

이왕 들어온 김에 시체나 치워주고 가자고 작정은 했지만

세 사람은 선뜻 손을 대지 못했다.
한동안 고심하던 지함이 성큼성큼 대문 밖으로 나갔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마을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바로 옆집은 더욱 끔찍했다.
죽은 지 사나흘 되어 보이는 시체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썩어 있었다.

시체마다 온갖 벌레들이 시커멓게 들끓었다.

방안에는 진득진득한 송장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온 동네에 시체가 널려 썩어가고 있었다.
마을을 돌던 지함은 기어이 토역질을 하고 말았다.
지함은 시퍼런 감이 조랑조랑 매달린 감나무 기둥을 붙잡고 웩웩거리며 토했다.

악취와 끔찍한 정경을 보고난 탓이었다.
언제던가,

처형당한 안명세의 목이 종로거리에 내걸려 있는 모습을 보고

뱃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억이 지함의 오장육부를 더 자극했다.
지함은 노란 물이 나오도록 토하고 또 토했다.
하루를 꼬박 굶어서 토할 것도 없는데 구역질은 그치질 않았다.
지함은 구역질을 하면서도 마을을 계속 돌았다.
어떤 집의 대문을 들어섰을 때였다.
어디선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끔찍한 주검만이 가득 찬 마을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지함은 구역질이 저절로 멈추었다.
지함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 안에 뼈밖에 남지 않은 여자가 홀로 누워 있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머리를 땋아내린 걸 보아 아직 출가하지 않은 처녀인 모양이었다.
"무… 물…"
아직 정신이 남아 있는지 처녀는 물부터 찾았다.
지함은 당장 우물로 뛰어갔다.

정신없이 두레박을 끌어올려 물 한 바가지를 들고 달려가던 지함은

방문 앞에 다다라 멈칫 했다.
불은 불로 다스려야 하는 법일세…
화담의 말이 머리 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지함은 뒤란에서 바싹 마른 잔솔가지를 주워다 불을 지폈다.

생전 불 한번 피워본 적이 없어 부싯돌을 수십 차례나 부딪친 끝에

간신히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잔솔가지는 금세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지함은 부지런히 물을 길어다 가마솥을 채우고 물을 펄펄 끓였다.

그리고 부엌에서 놋그릇을 가져다 끓는 물에 집어넣고 삶았다.

그리고 삶은 그릇을 꺼낸 다음 끓는 물을 떠내 찬 우물에 담구어 식혔다.

지함은 식힌 물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처녀는 머리가 불덩어리인데도 덜덜 떨고 있었다.
지함은 처녀를 일으켜 안아 물을 먹였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아나는지

처녀는 거센 힘으로 물 그릇을 움켜쥐고 벌컥벌컥 마셨다.

급하게 너무 많이 마시면 체할까봐 물 그릇을 잡아당기자

처녀는 우악스럽게 달려들어 물 그릇을 나꿔채갔다.
물 한그릇을 순식간에 다 마셔버린 처녀는 다시 기진해서 누웠다.

그러나 물을 마시기 전보다는 생기가 많이 올라 있었다.
지함은 처녀가 잠이 든 것을 본 뒤 일행에게 달려갔다.
"선생님, 선생님!"
화담과 박지화는 동네 어귀에 장작으로 단을 쌓고 있었다.

시체를 태울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있습니다.

산 사람이 있습니다."
지함의 말에 화담과 박지화는 일손을 멈추었다.
세 사람은 온 동네를 샅샅이 뒤져 산 사람을 찾아냈다.
그래서 이십여 호쯤 되는 마을에서

아직 숨이 붙은 사람 여섯 명을 찾아냈다.

건강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화담 일행은 깨끗한 집을 골라 환자들을 그곳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병의 경중을 살펴 방 세 칸에 나누어 눕혔다.

그런 뒤에 방마다 불을 지펴 방을 덥혔다.
환자들의 용태를 살핀 박지화와 지함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뭇더미 위에 시체들을 얹어놓고 불을 붙였다.

땅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을 땅으로 되돌려 보내지 못하고

한줌 재로 화하게 하는 것이 안되긴 했다.

그렇지만 병이 더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벌써 주위는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지함과 박지화는 불이 꺼지지 않도록 시체를 배분해서 태웠다.

주검을 사르는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제각기 다른 세월을 살아왔을 사람들이

장작더미 속에서 함께 타올라 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시체를 다 태우고 났을 때 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화장을 끝낸 지함과 박지화는 환자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화담은 의원처럼 능숙하게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자, 자네들도 요기를 해야지.

그렇게 몸을 혹사했다가는 자네들도 원귀가 되고 말겠네."
환자들 수발로 정신이 없었을 텐데,

어느새 화담은 지함과 박지화가 돌아올 시간까지 맞추어

밥을 지어놓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화가 피식 웃음을 터뜨려놓고는

얼른 그 웃음을 거두었다.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하군요.

이런 경황중에도 웃음이 나오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치 저까지 시체가 되어

불 속에 던져진 기분이었는데…

선생님이 손수 밥을 지으셨다니까 웃음이 나지 뭡니까?"
화담도 빙그레 웃으며 밥상을 들이밀었다.
"신기할 것 없네.

죽음이란 태어날 때부터 바로 옆에 있는 것,

짧은 생명에 취해 그것을 잊고 살아갈 뿐.

자, 들게나."
병이 옮을 것을 저어하여 익히지 않은 반찬은 올리지 않았다.

찬이라곤 배춧잎 건더기가 몇 개 둥둥 떠 있는 짠 소금국뿐이었다.
지함과 박지화는 맛있게 밥을 먹었다.

여행하는 동안 거친 반찬에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시장이 더없는 반찬 노릇을 해준 까닭이었다.
지함은 정신없이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러고 나니 지함의 가슴에 슬그머니 비애감이 스며들었다.
조금 전에는 시체를 불질렀고 지금 옆 방에서는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서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맨 첫집에서 시체를 보았을 때 같은 참담한 비애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이렇게 서로 무심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체득한 데서 온 비애였다.

그렇다.
세상은 이렇게 저마다 제 운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이미 불타버린 시신들도, 옆방에서 신음하고 있는 환자들도,

지함 자신도…
마당 곳곳에 피워올린 모깃불 연기가 온 집을 감쌌다.

연기가 너무 지독해서 눈이 다 아릴 지경이었다.

벌레들이 다른 병을 옮길까봐 화담이 피운 것이었다.
세 사람은 마루 한 켠에 앉아 우두커니 모깃불을 바라보았다.

화담은 가끔 마당에 내려가 모깃불이 꺼질세라

뭉게뭉게 연기를 품으며 타고 있는 풀더미를 살폈다. 

"애석한 일일세.

기의 흐름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해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가다니…"
"기의 흐름을 모르다니요?"
박지화가 물었다.
"기의 흐름.

올 여름에 염병이 창궐하리라는 것쯤은 봄부터 알 수 있었다네."

"그걸 백성들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러게 답답한 거네.

인간의 육신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허물이라 할지라도 그 무상함 때문에 더욱 귀중하고 간절한 것일진대…"
화담의 탄식을 들으며 지함은 언젠가 화담이 했던 말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막 여행을 시작했을 무렵,

그러니까 산천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할 때였다.

그때 화담은 지난 겨울의 수기가 약해서

올 여름엔 질병이 돌 거라고 크게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이 또한 오묘한 기의 흐름 아닙니까?

어찌 인간이 그것을 거스를 수 있단 말씀입니까?

겨울의 수기가 약해 여름에 전염병이 돌고,

그로 인해 수많은 목숨을 잃는 기의 흐름을 하찮은 인간이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씀입니까?"
"좋은 질문을 했네.

나도 요즘에서야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네.

기의 흐름이 단순히 그저 흐르는 것만이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일세.
인간사에서 시간이 한쪽으로 흐르듯 기의 흐름도 그런 것일 테지.

발전을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네.
시간도 기도 모두 한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세.
지금 닥친 고통이야 어쩌겠는가?

눈앞에 닥친 죽음은 어느 누구도 어찌 할 수 없다네.

그것이 기이며 세상사의 비정함이지."

COVID^19

말을 마친 화담은 두 사람에게 들어가 자라는 손짓을 보냈다.
"선생님께서도 푹 쉬십시오.

저희야 아직 젊으니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난 조금 있다 들어가겠네.

혼자 생각할 것이 많구만."
하루종일 걸었던데다 밤을 꼬박 새워 일을 한 탓에
두 사람 모두 몹시 지쳐 있었다.

두 사람은 방바닥에 머리가 닿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했다.

동창이 훤히 밝은 아침이었다.
해가 서켠으로 살짝 비켜섰을 때에야 두 사람은
꿈도 없던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화담은 환자들에게 먹일 죽을 끓이고 있었다.
한여름에 뜨거운 불 앞에 앉아 있는데도 별로 더운 기색이 아니었다.

어느 사이 모깃불까지 손을 봤는지 
대낮인데도 모깃불이 여전히 숨막히게 타오르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자네들은 괜찮은가?

자네들까지 덜컥 앓아 누우면

다 늙은 노인네 혼자 어찌 할 도리가 없으니 조심들 하게나.

끓이지 않은 음식은 절대로 입에 대지 말게."
그러면서 말끝에 화담은 서너번 짧게 혀를 찼다.
"스무 집 뒤주를 다 뒤졌는데도 쌀 한 가마가 채 안 되는구만그래.

염병으로 죽지 않았어도 굶어죽을 팔자들이었겠네."
"그러면 선생님께선 아예 주무시지도 않으신 겁니까?"
"자네들 먼저 죽 한 그릇씩 비우고 나서 환자들에게 좀 먹이게나."
놀라서 묻는 말에는 대답도 없이 화담은 죽사발을 내밀었다.
"선생님도 잡수셔야지요."
"나는 벌써 한 그릇 비웠네."
화담의 건강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기운이 철철 넘쳐나는 듯 했다.
세 사람은 죽을 그릇에 나누어 담아

각자 몇 개씩 들고 환자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철,

방에 군불을 지펴서 문을 열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치밀어 숨이 막혔다.

게다가 환자들이 내뿜는 숨까지도 덥기만 했다.

그런 방에서 언제 전염될지 모르는 염병 환자들을

일일이 부축해 음식을 먹인다는 것은 생사를 건 모험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주검을 본 탓인지

지함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죽을 먹은 환자들은 조금씩 기력을 되찾았다.
환자들이 입을 떼기 시작하자 화담은 의원부터 물었다.
"여보시오, 근처에 의원이 있소?"
"예. 저기 저 집이 의원집 아닌교.

그이도 죽었을 낍니더."
"알았소."
화담은 의원집에 가더니 한참만에 이것저것 약재를 들고 와서 달이기 시작했다.

지함은 무슨 약이 무슨 약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화담은 환자별로 약재를 따로따로 배합해 달여 먹였다.
"아니, 선생님. 약도 지을 줄 아시는가 보군요."
지화가 약 짓는 스승의 모습을 처음 본다는 듯이 물었다.
"처음이네."
"예? 그러다가 어쩌시려구요."
"어쩌긴.

이 땅의 지리와 물산을 눈여겨보면 이 정도야 알 수 있지.

지리에 따라 물산도 다른 법,
지리에 따라 사람의 성정도 다르게 된다네."
"그야 그렇겠지만 병하고야…"
"아니네.

조선에서 생긴 병은 조선에서 나는 약으로 다스려야 하네.

당귀는 본래 봉화, 울진, 평창, 삼척, 양양, 정선, 태백에서 잘 나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나지도 않을 뿐더러 나더라도 약효가 떨어진다네.
무슨 이치인가?

그 땅에 흐르는 기운이 그 약성에 맞게 깃들어야만 되는 까닭일세.

아무 데서나 그 기운이 나는 게 아니지.

그 약성을 만드는 기운은 그 지방에만 있는 걸세."
"선생님,

그러면 그 지방의 물산을 보면 지리를 알 수 있고,

지리를 알면 물산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지함이 끼어 들었다.
"아무렴.

지리를 알면 물산뿐 아니라 인물도 알 수 있고,

인물을 보면 그 사람이 난 지리를 알 수 있지.
조선의 백성을 보면 조선의 지리를 알 수 있고,
중국인을 보면 중국의 지리를 알 수 있고,

왜인을 보면 왜의 지리를 알 수 있다네."
"그래도 어떻게 약을 지으십니까?

약성이 다 다른 법인데…"
"약이란 그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이 엉키어 맺힌 것.

그 약초가 난 땅을 보면 약성을 알 수 있다네.
원래 약성이란 공중에 무한히 널려 있는 법일세.
햇살이 충만한 것과 같다네.

기를 마시면 음식은 먹지 않아도 된다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내내 아무것도 잡숫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네만 곧 알게 될 걸세.

하여튼 태양에서 빠져나오는 기를 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제게 맞는 것을 받아들이네.

그래서 약성이 강한 것을 약초라 이름하는 것.

그 약초가 띠는 빛깔을 보고도 약성을 알 수 있다네.

붉은빛을 띤 약초,

검은빛을 띤 약초,
노란빛을 띤 약초…"
"간지(干支)가 그런 물상(物象)을 이루는 것입니까?"
"그렇지.

그것을 보는 것이 의약(醫藥)의 기본일세."
"그렇게 알아가지고는 어떻게 조제를 합니까?"
지함이 다시 물었다.
"환자를 살펴야지.

이 지방에 나서 자라온 몸들이니 이 눈으로 다 보인다네.

사람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디가 실하고 어디가 허한지 알 수 있지.

이 지방에 나는 약초에 뭐가 있는지 아는가?

당귀, 천궁, 길경, 작약, 지황 같은 것이 있네.

내가 그것을 미루어 보고,

또 산천을 둘러보았고,

그리고 이 사람들을 보았으니 그쯤은 짐작할 수 있고말고."
"선생님께서 보신 우리나라의 지리와 물산은 어떠한 것이었는지요?"
"그걸 보자고 나온 것 아닌가?

그러나 내 명이 경각에 달했으니 내가 다 말해줌세."
화담은 팔도를 나누어 그 지방의 지리와 인물을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지함과 박지화에게 이야기했다.
어느 지방의 흙은 모래이고,

어떤 지방은 진흙이고,
또 어떤 지방은 어떠 해서 물산이 다르고,

인물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지함은 화담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지나온 경기, 충청, 전라, 경상의 지리와 물산을 돌이켜보았다.
어쩌면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땅이건만

그렇게 성질이 다를 수 있을까 싶었다.

사람 얼굴이 모두 제각각이듯이 땅의 얼굴도,

물산의 얼굴도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병도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이치로 다스려야 한다네.

<황제내경(皇帝內經)>에 보면

역리를 안 후에 의술이 있고

의원은 음양으로써
질병을 다스린다(易知然後醫術 醫者必求於陰陽)고 나와 있지 않던가.

 

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C%A0%9C%EB%82%B4%EA%B2%BD

 

황제내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제내경 소문의 디지털 사본. 《황제내경》(중국어 간체자: 黄帝内经, 정체자: 黃帝內經)은 2000년 이상 동안 중의학의 근본적인 자료로 취급된 고대 중국의 의

ko.wikipedia.org

 

인체란 우주와 다를 바 없는 소우주라서 의원은

환자를 천문(天文)보듯 해야 하며,
또 지리를 보듯 해야 하는 것일세."
"사람의 몸을 어떻게 관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천문 지리를 보듯 하여도 달리 볼 게 있을 것입니다."
"오장 육부를

음양 오행의 행성으로 따져 보면 되는 것은 자네도 잘 알 것 아닌가?"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장(五腸)을 보면
간이 목성(木星)이요,
심장은 화성(火星)이요,
지라는 토성(土星)이요,
허파는 금성(金星)이요,
콩팥은 수성(水星)입니다.

오부(午腑)로 보면
쓸개는 목이오,

소장은 화요,

위는 토요,

대장은 금이오,

방광은 수입니다.

그리고 눈은 목이오,

혀는 화요,

입술은 토요,

코 는 금이요,

귀는 수입니다.
힘줄은 목이요,

혈맥은 화요,

살은 토요,

살갗은 금이오,

뼈는 수입니다.

이로써 인체의 오행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체는 밤하늘의 별처럼 복잡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네."
"신체에 생긴 질병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우선 신체를 감별하는 것에 사주가 있네.
용신(用神)을 세우는데,

용신이란 사람에게 힘과 기를 계속 주는 하늘의 기운을 말하는 것이니,

 

이로써 부모, 형제, 처자의 길흉을 보고

오장육부의 건강을 살필 수 있게 된다네.

그러고 나서 사상(四象)을 보고
오운육기(五運六氣)를 60갑자로 살펴

60종으로 나누어 보면

그 허하고 실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라네.

사주 용신에는 무려 51만 종이 있으니
그만큼 사람마다 다른 체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세."
"쌍동이는 얼굴도 같고 목소리도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도 다릅니까?"
"다르다네.

일각이 달라도 다른 것이네.

세상에서 똑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은

상원(上元), 중원(中元), 하원(下元)의

세 갑자가 지나는 180년 만에 한번 나오게 되는 것이니

그만큼 같은 사람은 없는 것이네."
"그렇게 많은 종류의 사람,

그 많은 질병을 어떻게 다스립니까?"
"명의(名醫)는 약을 여러 가지 쓰지 않는다네.
명의일수록 단방(單方) 치료를 잘 한다네.

많아야 세 가지 약재 정도일세.

명의가 된다는 것은

사주를 한 치의 틈도 없이 정확하게 감정하여

병인(病因)을 찾아내고,

그 병인을 제거하는 약재를  

정확하게 쓰는 눈을 가진다는 것이라네."
"약은 어떻게 써야 합니까?"
"약재에도 오행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좋은 약도

어떤 때에는 독이 되니 함부로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네.

오행이 서로서로 생하는 약이기도 하지만

또 서로 극하는 독이기도 한 이치와 같다네.
어떤 병에는 약이 되는 것이

어떤 병에서는 독이 되니
약 한번 잘못쓰면

오히려 중병을 얻게 된다네."
"사람의 운명을 감정하는 것도

의원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옵니까?"
"바로 그렇다네.

내가 그 말 한마디 듣자고 여기까지 너스레를 떤 것일세.

그것이 사람의 운명을 감정하는 까닭일세.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병인을 찾아내어

가장 알맞은 약재로 처방하여 병을 없애는 것,

그것처럼

사람이 가진 마음의 병도 깨끗이 치료해야 하네.

자네가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일세.
진단만 하고

처방을 하지 못한다면 의원이 아니지."
"명심하겠습니다."
"허허허. 자넨 명의가 될 걸세."
이야기를 마친 화담은 껄껄 웃으면서 약을 달였다.
지함과 박지화는 화담이 달인 약을 환자들에게 차례로 먹였다.
꺼지지 않을 듯 맹렬하게 타오르던 태양도 점차 그러들기 시작했다.

이미 입추도 지나 처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환자 여섯 명이 모두 살아났다.

그러나 누구 하나 살아남았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의식이 들고 이제는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다음,

여섯 명은 모두 한결같이 눈물을 흘리며 장탄식을 했다.

그들에게는

그 폐허 같은 땅을 딛고 살아나갈 희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질곡의 운명을 다시 헤치고 목숨줄을 잇는 것이

얼마나 힘겨울 것인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난 이가 원망을 하든 고마워하든

화담 일행으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었다.
다음에 살아갈 일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떠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맨 처음에 지함이 발견한 처녀가 그 중 회복이 가장 빨랐다.

화담은 그 처녀에게

앞으로 이리저리 대처하라고 일러주고 또다시 길을 떠났다.
팔월 보름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염병이 휩쓸고 간 경상도 일대는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들판의 곡식은 돌보는 이가 없어도
햇살에 영글어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간혹 들판에 나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눈에 띄었으나 모두 비쩍 말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