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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날개 잃은 해동청 - 소설^토정비결(中-23)

 

화담은 담양 가는 길로 들어섰다.
지함과 박지화는 묵묵히 화담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에게는 모두 낯선 길이었다.

그렇지만 화담은 이미 가 보았던 길인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한나절을 꼬박 걷고만 있던 화담이 다음 목적지를 말했다.
"이번에는 면앙정에 가세.

만난 지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면앙정이라면…?"
박지화가 오랜 침묵으로 근질근질해진 입을 열었다.
"송순을 일컫는 말일세."
"조광조 대감이 발탁했었다는 송순 그 사람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전에 얘기하지 않았었나?

내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직강(直講)으로 있던…"
"예. 그 뒤 낙향하여 산천재에 머물렀다고 하셨지요?"
지함도 끼어 한마디 여쭈었다.

길만 오래도록 걷는 것도 따분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면앙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자연과 세월을 음유하고 있다더군.

호도 면앙정이라 붙이고…"
벌써 초여름으로 접어든 날씨는 잠시 머물러 쉬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도 막상 걸음을 떼기만 하면 등허리에 땀이 배어 나왔다.
일행은 어느 마을 입구에서 다리를 뻗고 넉넉하게 쉬었다.

지함과 박지화의 콧잔등에 땀이 송송 배어 나왔다.

그런데도 화담은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지함은 화담의 도력이 깊어서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미심쩍게 생각되는 구석이 있기는 하였으나,

달리 알아볼 도리도 없었다.
한양을 떠난 이래 벌써 여러 차례 본 것이라서 이제는 그리 큰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나그네를 반기는 듯 느티나무가 푸른 잎을 살랑거렸다.

밑둥이 장정 열 사람은 있어야 다 두를 만큼 큰 나무였다.
조광조(趙光祖),

중종을 앞세워 연산군을 몰아낸 유신(儒臣)의 한 사람이었던 이학(理學)의 거두.

그가 막강한 권력으로 급진 개혁을 주도한 것이 화근이었다.
무오, 갑자 두 해의 사화로 영남 지방의 사림들이 날개를 잃었을 때여서

자연 조광조를 위시한 기호 출신 사림들이 세력을 잡았다.

이때 지함의 형 지번도 벼슬길에 나갔었다.
조광조가 이끄는 기호 사림들은 정주학(程朱學)에 지나치도록 충실하였다.

이 말을 반대 입장에서 해석하면 정주학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바로 이 점이 조광조를 실각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정주학에 심취한 그는 절의(節義)보다 인의(仁義)를 존중했다.

그래서 향약(鄕約)을 실시하고 소학(小學)을 널리 보급했다.

균전제(均田制),
공납제(貢納制)를 실시하여 경제 정의를 실천해 나갔다.

그리고 하은주(夏殷周) 3대를 이상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군주의 교화에 역점을 두었다.
조광조는 왜 급진 개혁을 서둘렀던가.

그것은 연산군 시절,

타락할 대로 타락한 사회와 군주상에 그 원인이 있었다.

연산군의 포악성은 말할 것도 없었고,
국가의 토지가 훈신에게 편중되어 백성 간에는 빈부의 격차가 극심했다.

또한 나라가 어지러우면 으레 세제(稅制)가 문란하기 마련인데

이때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율곡의 지적에 따르면 조광조는 지나친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하은주 삼대라는 이상을 너무 급히 실현하려 조바심을 내었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과 당파를  

무조건 소인배라고 몰아붙이는 독선에 빠져 있었다.
언론, 학술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육조(六曹)의 기능과 재상(宰相)의 역할을 무시했다.
또 이학(理學)을 지나치게 존중하였다.

이황 같은 이가 이학을 존중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화담과 화담 산방 출신 학자들과는 여러 모로 생각이 달랐다.
그래서 대명(對明) 외교에 필요한 사장학(詞章學)이나
부국 강병(富國强兵)에 필요한 기술학을 천시하고 배척하였다.
게다가 여진과 왜구가 자주 출몰해 백성들을 유린하는데도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기습 공격하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닌
궤도(詭道)라고 하며 이를 반대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었다.
만나기만 하면 왕도가 어떻고 무엇이 어떻고 사변을
늘어놓는 조광조를 중종은 몹시 피곤해 했다.

중종은 훈신들과 차츰 동조자가 되어갔다.

결국 남곤, 심정, 김안노 같은 훈구 대신들이 들고일어났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이로써 조광조를 비롯한 기호 사림이 죽음을 당하거나 오지로 유배되었다.
이 문제는 벌써 안명세가 지함을 만나기만 하면

끝을 낼 줄 모르고 떠들어대던 이야기였다.
이 조광조와 송순은 어떤 관계였던가.
송순은 스무 살 나던 해에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조광조가 송순의 글을 보고 감탄하여 나중에 크게 쓰리라고 약조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승문원(承文院), 예문관(藝文館)을 거쳐
성균관(成均館)에서 직강 노릇을 했다.
그런데 조광조는 그가 그토록 아끼던 송순을

제대로 요직에 기용하지도 못하고 그만 죽어버렸던 것이다.
미관 말직에서 훗날을 도모하던 송순은 그만 앞날이 아득해졌다.

그대로 버티어도 자리에서 쫓아낼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송순은 죄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리도록 사주한 김안노(金安老)의 전횡은 참기 어려웠다.

그런 속에서 묵묵히 일에 빠져보려고 애쓰던 송순은 끝내 낙향하고 말았다.
그때 성균관 학생이었던 화담과 직강 송순이 만났던 것이다.
"면앙정은 수재 중의 수재라네.

그런데 그만 조광조 대감이 사사(賜死)되고 나서

세상 인연이 박하다고 수십 년 동안 은둔중이라네.

자네 같은 사람이지."
따지고 보면 화담이 굳이 벼슬을 마다한 것도 이러한 사화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야 지화 형님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 그런 얘기는 그만두세.

오히려 전화위복 아닌가?

세상 인연이 박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런 풍류를 누릴 수 있겠는가.

아첨하고 모함하는 정상배 속에서

그 모진 갈등을 이겨내느라 번민하고 있었을 걸세."
태양은 다사롭고,

흰구름은 뭉게뭉게 일어나 하늘을 유유히 흘러갔다.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어디선가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끼가 풀을 갉아먹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적막한 산사에 눈 쌓이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지함은 낯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서 나는 소릴까?
지함은 일어서서 한낮의 단조로운 침묵에 잠긴 들판을 둘러보았다.
멀리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 이상한 소리는 대나무숲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대나무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작고 곧은 몸을 조금씩 뒤척이고 있었다.
대나무 숲이 일렁거리는 소리도 한여름의 매미소리처럼

가슴 속에 시원하게 젖어들었다.
대숲 사이로 길이 길다랗게 나 있었다.

지함 일행은 그 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까투리 한 마리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노곤한 햇살에 잠이 들었다가 사람의 발소리에 놀라 달아난 것이었다.

까투리가 날아오르자 대나무 몇 그루가 탄력 있게 몸을 흔들었다.

댓잎들이 갓 잡아올린 생선비늘같이 반짝이는 햇살을 털어냈다.
대나무 잎의 울음을 들으며 걸은 지 한참 만에 대숲이 끝났다.
곧 길고 낮은 돌담이 이어졌다.

오래도록 손질을 하지 않은 듯했다.

담장의 기와에 돋아난 파란 이끼,
돌틈을 비집고 뿌리내린 잡초가 무성했다.
돌담을 지나자 자그마하고 정갈한 정자가 나타났다.
정성을 들여 가꾼 흔적이 없었다.

오히려 거친 재목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정자를 더욱 멋스럽게 하는 듯했다.
정자 한가운데에 체구가 작은 선비가 혼자 앉아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합죽선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면앙정이 면앙정에 홀로 있구만."
화담은 중얼거리며 정자 위로 올랐다.

그러고 보니 정자에 걸린 현판에 조촐한 글씨로

'면앙정'이라 씌여 있었다.
화담이 인기척을 냈다.

그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송순이 화담 일행을 돌아보았다.
"아니, 이게 누구시오?"
화담을 본 송순이 반색을 하며 손을 잡았다.
"어쩐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다 찾아오셨소?"
"죽기 전에 팔도 유람이나 할까 싶어 돌아다니던 중에

담양까지 오게 됐습니다그려.

예까지 와서 면앙정을 안 보고 갈 수 있겠습니까?"
"여하튼 반갑소.

이게 얼마 만이오.

그래, 나보고는 조정에 남아 계속 일을 하라고 떠밀어 놓으시고는,
이렇게 홀로 유유자적하고 다니시니 좋으십디까?"
"허허. 사람이란 다 제 쓰일 곳이 있는 법입니다.
아무튼 고생이 많으셨소이다.

그래, 저를 원망하며 세월을 보내시던 중입니까?"
화담과 송순은 서로 마주보며 파안대소했다.
"허허허, 그럴 리가요?

날씨가 하도 기막히게 좋아서 그냥 보낼 수 있어야지요.

외진 곳이라 친구도 없고 오늘따라 찾아오는 이도 없길래

나 혼자 신선 흉내를 좀 내본 것이지요.

아침 나절에 까치가 울어 반가운 사람이 오려는가 보다 했지요.

그런데 화담 선생이 오실 줄이야… 정말 뜻밖이외다."
"우리 산방의 학인들이올시다."
화담의 소개에 지함과 박지화가 송순에게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화담의 제자라니 저으기 두렵소이다.

허허허."
화담과 송순,

두 사람은 비슷한 연배로 뜻도 통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사뭇 달랐다.

출신만 따져도 송순은 화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양민이긴 했으나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화담,

그리고 지체 있는 양반집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과거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란 송순.
벼슬을 향해 가는 길만으로 보면,

송순은 태어나면서부터 벌써 화담보다 절반은 앞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송순이 서당에 앉아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을 때

화담은 아침 저녁으로 논밭의 이슬을 털며 오갔던 것이다.
송순은 체구는 작지만 다부졌다.

그리고 달변인데다 번득이는 눈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지함은 그 눈길에서 세속에 대한 열망을 읽어내었다.
송순의 말소리는 이따금 도전적으로 들렸다.

아마도 오랜 야인 생활 때문에 그러리라고 지함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지함에게도 그런 면모가 있었다.
특정기 사건을 겪고부터 일어난 변화였다.
벼슬아치들이 혐오스러워지자 그 사이로 그런
반발심이 스며들어 뿌리를 깊게 박고 있었다.
"팔도유람이라면 금강산으로 묘향산으로 소문난 곳이나 찾으실 것이지,

이 머나먼 남쪽까지 어인 걸음이시오?"
"지리를 보고,

물산을 보았으면 그 다음에는 인물을 보아야지요.

아무리 빼어난 경치라고 한들 사람 좋은 것만 하겠소?"
"허허. 화담 선생도…"
송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이렇게 한적한 초야에 묻혀 계시는데도 한양 소식이 들립니까?"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들을 건 다 듣고 있답니다.

이따금 산천재에 들르면 천하 소식을 다 듣게 되지요."
"야인들끼리 조정을 무참히 짓밟고 있겠소이다."
"조정에서 호남 선비라면 무조건 박대합디다."
그 옛날 백제 땅이었던 호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아

통일신라의 눈에는 미운 가시 같은 존재였다.

옛 백제를 그리며 늘 반역을 꿈꾸는 자들을

통일신라에서 요직에 등용할 리가 없었다.

그 악습이 고려를 거쳐 조선 왕조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을 때 가장 늦게까지

고려 왕조에 저항한 것도 바로 이 호남 사람들이었다.
"귀양지 많기로는 호남이 으뜸이지요.

야인도 많구요."
지함이 한마디 거들었다.
"어디 나뿐이겠소.

전라도 땅 곳곳에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이라오.

공부를 마치면 야인이고…

젊은이 이름이?"
"이지함입니다."
"이 선비 말대로요.

이곳에 귀양살이 온 사람들은 이곳 백성들의 환대에 곧잘 마음이 풀리지요.

그래서 서당도 열고 이런저런 일들을 벌이지요.

때로는 귀양살이가 풀려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사는 사람들도 있다오.

서로 한이 깊어 잘 통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보게, 지함."
화담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면앙정의 사주를 한번 짚어보게."
지함 혼자 역학 공부를 꾸준히 해온 것을 아는 화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풀어보라고 시키는 것은 처음이었다.

해남 고개에서 장사꾼들 사주를 보아주자 화담은

지함의 행동에 시큰둥한 태도를 취했었다.
"지금 면앙정 이 사람,

인종이 물러나고 명종이 왕위를 이었으니

다시 세상 밖으로 용트림을 해볼까 어쩔까 고민이 많을 걸세.

면앙정,

평생 일을 해야 할 팔자이니 당장 올라가라고 하고 싶소만

일단 사주를 한번 봅시다."
"허허, 이 사람.

남의 속을 다 읽고 계시는구만.
다음부터는 마음문에 빗장을 걸고 만나야 되겠소이다그려."
"그대가 그토록 싫어하는 김안노가 이제 한양에 없소이다.

이미 마음을 돌려놓으시고는 시치미는…"
송순이 껄껄 웃었다.

화담이 그의 속마음을 제대로 짚어낸 것이었다.
그제야 지함은 붓을 들었다.

송순이 사주를 부르자 지함은 오행도 맞추고 운성(運星)도 떼었다.
이윽고 지함이 고개를 들었다.

지함은 빙그레 웃었다.
"어떻소?

내 나이 벌써 쉰이 넘었는데 무엇을 더 할 수 있다고 나옵니까?"
송순은 자못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아주 좋은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탄탄대로이니 어서 한양으로 올라가십시오."
지함의 말에 송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환갑이 지난 나이는 덤이라고 했다.

환갑을 넘어 살기가 어려운 시절,

송순의 나이 이미 쉰을 넘기고 있었다.

비슷한 연배의 화담 역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여보게. 늙은이를 놀리지 말게나.

내가 살면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산다고 그러나.

기껏 한두 해 어디 말단에서 봉직하다 세상을 뜨면 그걸로 족한 것을,

탄탄대로라니…"
송순은 지함의 말을 그저 기분 좋으라는 덕담으로만 여기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도 몹시 기분이 들뜨는 것이 표정에 역력히 나타났다.
"화담과 달리 출세를 꿈꾼 적도 있었네.

김안노가 죽고 나서 고개를 북으로 돌려보기도 했지.

세상이 흉흉하여 이를 바로잡으려면

나라도 한양으로 올라가야 된다고 생각을 했었다네.

허나 그렇게 큰 욕심을 내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이어지더군.
이젠 아예 꿈도 꾸지 않는다네.
어쨌든 자네,

제법 배포가 크구만그래."
"무슨 말씀이십니까?

면앙정 선생께서는 저보다도 더 오래 사실 분이십니다."
"점점… 아예 이 늙은이를 망령난 사람으로 몰아가는구만."
"허허허.

오래 산다는 데 뭐가 그리 싫으신가?"
화담이 껄껄 웃으며 끼어들었다.

화담이 유쾌하게 말을 받았지만,

지함은 괜한 소리를 했다 싶어 후회가 들었다.
"이보게, 화담 선생.

내 환갑 넘어 산 노인치고 망령들지 않은 늙은이를 보지 못했네.

창창한 이 선비보다 내가 더 오래 산다니

나보고 망령이나 들으라는 얘기가 아니고 뭔가 그래?"
자그마한 정자가 무너져내릴 듯 웃음꽃이 피었다.
지함은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분명히 아흔을 넘도록 천수를 누리실 겁니다.
되도록 말에 치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말(馬)은 양화(陽火)이니 선생님의 음수(陰水)와는 상극입니다.
허나 어쨌든 천수를 다 누리시고 떠날 것입니다."
"거 듣기에는 좋은 소리구만.

그러나 사람 목숨 긴들 어디에 쓰겠소?"
"아닙니다.

선생님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까지는 일을 할 길을 닦아오신 것뿐입니다.
이후에 한번쯤 귀양갈 일이 생길지 모르겠으나

고생은 하지 않으실 겁니다.

명종과 썩 어울리는 사주여서 대체로 왕과 가까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저희를 모르는 척이나 마십시오."
"자네를 잠룡(潛龍)이라 이르는군.

너무 오래 기다린 용이 급히 하늘에 오르다가 잘못돼

이무기나 되지 않을까 걱정이군.

허허허."
화담도 송순도 껄껄 웃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운명이란 느닷없이 찾아와서 사람의 일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제 하고 싶은 대로,

제 생각대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시에 찾아오는 운명을 대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함이 사주를 짚는 이유였다.
"하여간 모처럼 덕담을 들었으니 내 선물을 하나 함세."
송순은 정자 한 켠에 놓여 있던 가야금을 집어들었다.

손가락이 쉰 살 먹은 노인의 것답지 않게 매우 고왔다.

그 손가락이 줄을 타자 고운 음률이 잔잔히 흘러나왔다.
뒤란 댓잎이 가야금 음률을 타고 바스락거리는 듯했다.

돌담의 이끼 하나하나까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날 듯했다.
어디선가 두루미 한 마리가 날아와 연못가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두루미는 목을 길게 빼고 정자쪽을 돌아보았다.
바람도 멎고 세월도 멎고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추고

가야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행은 하룻밤을 송순의 처소에서 지냈다.

정휴와 전우치, 남궁두는 부지런히 길을 걸어서 지리산으로 남명 조식을 찾아갔다.
조식은 산천재(山天齋)에 있었다.
"선생님,

저는 자성이라는 중이옵니다만 혹 산천재로 화담 선생이 오지 않으셨는지요?"
"화담의 제자요?"
"그렇지는 않으나 화담 선생의 제자를 압니다.

화담 선생께서 돌아가시면서 그 제자에게 전해주라는 책이 한 권 있는데,

아직 전하질 못했습니다."
"화담이 죽었단 말이오?"
"예. 지난 봄에 그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화담이 여기에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건 또 무슨 말이오?"
"예. 화담 선생님을 뵈었다는 사람이 있어서…"
"이상한 일이로군."
"저도 그게 이상하여 여기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찾아 왔다?

거참, 이상하군.

도대체 스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난 알아들을 수가 없소.

하여튼 아직은 이곳에 오지 않았소."
"허나 해남에서 며칠 전에 묵으셨다고 하니 근일에 이곳에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묵으면서 기다려 보시오.

화담이 온다면야 내가 더 반가울 일이고."
그렇게 해서 정휴 일행은 산천재 한 켠에 짐을 풀었다.
이튿날 조식이 정휴를 불렀다.
"어젯밤 늦게 이 서찰이 왔소이다."
정휴가 조식의 서재로 들어가자 조식은 서찰 한 통을 내보였다.
정휴는 조식이 내미는 서찰을 읽어보았다.

- 자네에게 가려다가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한양으로 올라가네.

인연 닿는 대로 다시 옴세.

화담 서찰은 분명히 화담이 보낸 것이었다.
화담이 살아 있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서찰은 무엇인가,

정말 화담이 보낸 것이란 말인가.
"보시오.

화담이 보낸 편지요.

스님 말이 틀린 것이오."
"아닙니다.

틀림없이 제가…"
그러나 정휴는 뒷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서찰의 글씨가 틀림없이 화담의 필체였기 때문이었다.
정휴는 하는 수 없이 남궁두와 전우치에게 그 말을 전했다.
"우린 인연이 없는가 보네."
남궁두와 전우치는 화담을 만날 기회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몹시 서운해 했다.
"아니, 그런데?"
"왜 그러나?"
"누가 내 바랑을 만졌나?"
"글쎄. 모르겠네.

우리가 자는 새에 누가 들어왔었나?"
정휴는 얼른 바랑을 집어들어 안을 살펴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홍연진결>이 없었다.
"<홍연진결>이 없어졌네."
"무어라고?

<홍연진결>이 없어졌다고?

그렇다면 누가 훔쳐갔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걸 어쩌나?

홍성에서도 그 고생을 해서 다시 찾았는데..."
정휴의 안색이 금세 새하얗게 변했다.
"가세.

빨리 한양으로 가세.

화담 선생이 한양으로 간다고 했으니 일행은

틀림없이 가회동 지번 형님 댁으로 갈 것일세.

가서 빨리 전하세.

화담 선생이 살아 계시다면 그분에게 알려야 하네.

그래야 책을 찾든지 다시 쓰든지 할 게 아닌가."
정휴가 두 사람을 잡아끌었다.
"잠깐. 침착하게 생각해 보세.

남명 선생께 이 사실을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순서 아니겠나?"
"그러세.

그러면 학인들을 탐문해서 혹 찾아낼 수 있을지 아는가?"
그래서 세 사람은 조식에게 책을 도둑맞았다고 고했다.
"책을 잃어버렸다?"
"예.

화담 선생이 이지함 선비에게 전해주라는 책입니다.

<홍연진결>이라고 합니다."
"이지함이라면 화담 하고 함께 다닌다는 선비 말이오?"
"그렇습니다."
"예끼, 이 사람들.

늙은이를 놀리지 마시오.

이제 보니 영 정신이 나간 사람들이로군.

아니 화담이 그 선비와 함께 다닌다면

구태여 책을 당신들한테 전해 달랄 게 뭐가 있소?

자기가 직접 주면 될 것을…"
"화담 선생님이 돌아가시면서 제게…"
"그만들 두시오.

어서들 나가시오.

머리만 혼란스럽소.

이거 원,

도깨비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조식은 역정을 내며 정휴 일행을 물리쳤다.

정휴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산천재를 물러나왔다.
정휴의 머리 속은 의구심이 가득 차 터질 지경이었다.
"뭔가 있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리가 없네.

당장 한양으로 달려가세. 가서 알아보세."
정휴는 진실을 꼭 밝히고야 말리라는 오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러세."
세 사람은 또 허탕을 치고 산천재를 떠났다.

이튿날,

화담 일행은 송순과 함께 지리산 산천재로 향했다.

지리산에 있는 산천재는

영남의 선비들이 모여 시론(時論) 도담(道談)을 나누는 곳이었다.

그곳에 주석하는 남명 조식은 학덕이 워낙 높아

'경상우도의 퇴계 이황', '경상좌도의 남명 조식'으로 불리며
영남의 2대 거유(巨儒)로 손꼽혔다.
더불어 호남까지 명성이 뻗쳐 호남의 선비들도 산천재에 많이 찾아들었다.

호남의 대유학자인 기대승(奇大升) 같은 이도

도반이 그리우면 찾아오곤 했다.

면앙정 송순도 가끔 들러 한양에서 흘러내려온 소식을 들었다.
화담 일행이 산천재에 오르자 조식은 깜짝 놀라서 뛰어나왔다.
"아니, 몸이 불편해서 한양으로 간다더니?"
"괜찮아졌다네.

예까지 와서 자네를 못 보고 가려니 억울해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더군.

그래 억지로 걸음을 옮겨보았네."
"하여튼 잘 왔네.

자네들은 잠깐 여기 있고,

화담 자네만 잠깐 이리로 와보게."
조식은 화담의 소매를 잡고 그의 처소로 들어갔다.
"어제 어떤 중이 여기에 왔다 떠났는데,

화담 자네가 죽었다고 하더군.

자기 손으로 시신을 직접 파묻었다는 걸세.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남명, 소미성(少微星)은 안녕하신가?"
"왜 딴소리인가?"
"소미성도 보아 하니 때가 되어 가더군."
"소미성을 보고 예까지 내려온 게로군.

나도 태사성을 보았다네."
"저런,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다더니 이렇게 들키고 마는군."
"허나 소미성은 아직 살아 있지만

태사성은 이미 빛을 다 잃었네.

그렇다면 자네 이 몸이 환영(幻影)인가?"
"남명은 천문만으로 수를 누리시는가?

내겐 천수(天壽)에 지수(地壽)까지 있다네.

허허허."
화담과 조식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껄껄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는 산천재로 나왔다.
조식이 지함과 박지화를 불렀다.
"허허허.

들어오시오.

영남과 호남의 걸출한 인재들이 여기 다 모여 있소.

면앙정,

자네도 어서 들어오시게."
화담 산방에 비하면 산천재는 시설이 훌륭했다.
청기와 지붕에 반들반들한 마루,

시원한 발에 이르기까지 산천재는

여러 사람이 드나들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번듯번듯했다.
화담이 먼저 지함과 박지화를 조식에게 소개했다.
뒤이어 조식은 산천재 학인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선생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조식이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는 중간에

홍안의 선비가 앞으로 나서면서 화담에게 안부를 여쭈었다.
"그래, 고맙군."
"서찰은 받아서 잘 처리했습니다."
"무슨 서찰을 또 보냈나?"
조식이 화담에게 물었다.
"자네에게만 서찰을 띄울 수 있나.

정개청, 이 사람이 내 제자 아닌가."
"저런, 그랬었지."
정개청(鄭介淸)은 기축년(己丑年, 1529년) 생.

이제 열여덟이었다.

나주 금성산 아랫마을에 살면서 아전 노릇을 했다.

초시에 합격하기도 했으나 벼슬길이 열리지 않아 아예 세상을 등졌다.
그는 제주로 건너가 한라산에 토굴을 파고 용맹 정진하였다.

그러다가 머리를 삭발하였다.

중이 된 것이다.

그뒤 여기저기 떠돌면서 풍수지리를 익혔는데
팔도 지리를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보성에서 한 여종을 만나 가사를 벗어버리고 장가를 들었다.

그때부터 다시 유학에 뜻을 두어 기대승을 찾아갔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학보다 기학에 기울어 있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박순을 찾아갔다.

박순은 화담을 찾아가보라고 일렀다.

그래서 화담 산방에 입실,

해를 머물다가 산천재로 내려온 것이었다.
정개청이 고개를 숙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 사람은 서치무,

역술에 관심이 많다오.

주역에 푹 빠져 있지요."
조식은 마지막으로 서치무를 소개했다.

역술, 주역에 관심이 많다는 말에 지함은 서치무를 자세히 보았다.

기골이 장대한 젊은 선비였다.

텁수룩한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이 사내다웠다.

선비라기보다 힘께나 쓰는 장사 같아 보였다.
조식이 한양 이야기를 꺼내면서

화담, 송순, 박지화, 지함이 모두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화가 점점 무르익어가자 지함이 한마디 나섰다.
"남명 선생님.

이 좋은 산천재에서 학인들과 더불어 계시니 재상이 부럽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화담이 호랑이 한 마리를 끌고다니는군.

솔직히 고백함세.

내가 세상에 나가지 않는 것은 세상이 싫어서가 아닐세."
"임천(林泉) 선비께서 한양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어떤 이치입니까?"
"이거 늙으막에 할퀴고 찢기고 상처만 나게 되었구려."
화담이 조식에게 농을 던졌다.
"변명을 하지 않으면 큰일나겠구먼.

나는 내 학문이 완성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래서 이렇게 산천재를 열고 팔도의 유생들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네.

내가 강의를 한다고 하나 그것은 내게 강의를 하는 것이오,

내가 무엇을 말한다고 하나 내게 하는 말에 지나지 않네."
"아직 공부가 덜 된 때문이옵니까?"
"아무렴.

그러니 지리산에서 속리산으로 자네 스승과 어울려 쏘다니기도 하지 않았겠는가.

아직은 나 하나 깨우쳐내기도 어렵네.

그게 임천하는 우리네의 속사정이라네.

그러다 보니 한양에서 들려오는 소식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네.

왜냐하면 한양도 늙은 이 몸이 살고 있는 내 나라 땅이기 때문일세.

자네도 그렇지 아니한가?"
"그만 하세.

거유 남명이 그렇게 변명하지 않아도 흠날 것 없다네."
다시 화담이 나서서 논쟁을 말렸다.
그러나 지함은 모를 일이었다.
지함, 화담, 송순, 조식, 남명, 정개청, 서치무…
다 벼슬길을 뒤로 하고 임천에 뛰어든 사람들 아닌가.
지함의 길은 숲이나 계곡 같은 곳에 있지 않았다.
그의 길은 백성 사이로,

제 목숨 하나 부지하고 살기에도 버거운 사람들 사이로 나 있었다.
산천재에서는 화담과 조식의 토론이 사흘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학인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대학자들의 도화 법담에 귀를 기울였다.

한양에 올라간 정휴 일행은 가회동으로 달려갔다.
"지번 형님,

혹시 지함 형님이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정휴는 지번에게 인사를 할 사이도 없이 지함이 왔느냐는 물음부터 던졌다.

지번과는 홍성 시절에 만나고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아니, 자네 정휴로군.

언제 입산했는가?"
"몇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함 형님은?"
"급하긴.

지함이는 왜 찾는가?

유람 떠난 지가 벌써 언젠데?"
"제가 해남으로 지리산으로 찾아다녔습니다.
지리산에서 화담 선생이 몸이 안 좋다고 한양으로 갔답니다."
"하여튼 화담이든 지함이든 아무도 안 왔네."
"우리가 너무 빨리 온 모양일세."
남궁두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지함이 오기로 했다면 사랑에 묵으면서 며칠 기다리게나.

걸음이 늦어도 하루 이틀 후면 도착하겠지.

그런데 지함이는 왜 그렇게 찾아다니는가?"
"예. 화담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화담 선생이 돌아가시면서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금강산에서 나와 송도에 가보니 화담 선생이 돌아와 계셨습니다.

몸이 불편해서 그냥 돌아오셨다구요.

그러다가 얼마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사월 초닷새 청명일이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겐가?

사월 초닷새 청명일이라면 그때는 화담 선생이 우리집 별당에 계셨다네.

사흘인가 내방객도 모두 물리치고 그 방에 혼자 계시면서 수도를 하셨다네."
"혼자 계셨다구요?

그런 다음에는요?"
"사흘 만에 별당에서 나오셔서는 수원 쪽으로 길을 떠나셨다네.

그땐 이미 청명일이 지난 때지.

그러니 자네 말이 이상하지 않은가?"
"허 참.

저 역시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답답하기만 할 뿐입니다."
"답답하긴 이 사람아.

내가 답답하네그려.

화담을 본 이가 어디 나뿐이던가?"
정휴는 머리 속이 뒤죽박죽된 듯했다.
"형님, 가겠습니다."
"아니 지함이를 만나야겠다면서 가긴 어디를 가나?"
"송도로 가겠습니다.

가서 화담 선생의 묘를 파 보겠습니다.

화담 선생의 묘를 열어 제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제가 묻은 분이 화담 선생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었는지…"
정휴는 씩씩거리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답답함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전우치도 남궁두도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답답해 하는 정휴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참게나.

며칠 있으면 이리로 올라온다면서?
그때 만나서 화담인지 아닌지 얼굴을 직접 들여다보면 될 게 아닌가?"
"그러세. 정휴.

그게 좋겠네.

아, 도를 닦는다는 스님이 그렇게 조급해서야 되겠는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려보세."
하는 수 없었다.

기다리면 모두 밝혀질 일이었다.
답답한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송도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정휴는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정휴, 남궁두, 전우치 세 사람은 지번과 세상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랑에서 화담 일행이 도착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