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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땅거미가 내렸다.
"아니, 아직도 안 오셨나?"
남궁두가 낮잠을 실컷 자고 나서 하는 말이었다.
"안 오셨네."
정휴는 가슴을 졸이며 계속 두륜산 쪽을 바라보고 있었건만 지함 일행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걸음이 늦어도 장사꾼들이 지나간 지가 벌써 얼만데 아직도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길이 갈린 것 같네."
"뭐라고? 그럴 리가."
남궁두가 낭패한 얼굴로 말했다.
전우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어쩌는가? 만나기는 아주 틀렸는가?"
"아니네. 방법을 찾아보세."
"그래도 하룻밤은 여기서 지내보세.
혹 아는가.
늦게라도 이 길을 지나가실지."
정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더 기다리자고 하자,
두 사람도 따르기로 했다.
내일부터 걸어도 크게 늦을 일이 아니었다.
노숙을 하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성싶은 초여름 날씨였다.
밤새 정휴가 눈을 붙이지 못하고 길손을 일일이 살폈으나
지함은 이튿날 날이 밝도록 지나가지 않았다.
"틀렸네.
다른 길로 가신 게 틀림없네."
전우치가 아쉬워하는 정휴에게 말했다.
"그러니 이제는 어쩌겠는가?
어디로 갔는지 무슨 재주로 안단 말인가?"
정휴가 낙담하여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자 남궁두도 손으로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생각을 하던 남궁두가 손뼉을 딱 하고 쳤다.
"됐네. 만약 그 노인이 화담 선생이시라면."
"화담일 리가 없네.
여기 책이 있지 않은가?"
정휴가 남궁두의 말을 자르면서 <진결>을 꺼내보였다.
<홍연진결> 겉장에는 틀림없이 화담이 이지함에게 준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정휴가 화담이 살아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내게 좋은 수가 있네.
화담 선생님이 틀림없다면
다음에는 분명 지리산으로 가실 걸세."
남궁두가 자신있게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예측하는가?"
전우치가 묻자 남궁두가 대답했다.
"화담 그분하고 지리산 산천재의 조식 선생하고는 막역한 친구 사이라네.
두 분이 어찌나 친한지 한번 만났다 하면
밤이 되는지 해가 뜨는지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셨다네.
그것도 모자라서 지리산에서 한번 만나고,
그 다음에는 속리산에서 한번 만나고 그런다네.
그러니 화담이 여기까지 왔다면 지리산에 가지 않을 까닭이 없네.
거기 가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걸세."
세 사람은 지리산으로 가서 화담 일행을 기다리기로 했다.
정휴는 이지함과 함께 다니는 사람이 화담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별 다른 수가 없어 남궁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함을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엄청난 내용이 적힌 화담의 <진결>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화담이 살아서 돌아다니는지야 아직 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지만,
화담이 지함에게 준다는 글이 적힌 책이 엄연히 있는 바에야
그런 것은 따질 필요도 없었다.
어부의 말로는 이틀이면 갈 수 있다고 한 화순이었다.
그러나 해사 마을을 돌아오느라 꼬박 하루 반이 더 걸렸다.
화순땅은 그저 평범한 지세였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들이 동서남북을 걸쳐
병풍처럼 두르고 서 있어서 더 아늑해 보였다.
지금까지 거쳐온 강진이나 보성과는 달리
평야라 부를 만한 변변찮은 들조차 보이지 않았고,
어디나 고적한 산속 같았다.
산은 제법 웅장하고 험준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위압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이 깃들어 살기에 마침 맞은 정도였다.
험준한 고개를 몇 개 넘어 능주현에 도착한 것은 점심 때가 약간 지나서였다.
고적한 뻐꾸기 울음소리 사이로 드문드문 돌쪼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불천탑을 깎는다는 스님이 내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산이 질박한 것처럼 절도 대웅전 하나에 요사채 하나만 있었다.
별로 높지 않은 대웅전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떠받치듯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스님. 스님."
운주사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선 일행이
몇 번 스님을 불러 보았지만 응답이 없었다.
지함 일행은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쓸쓸한 향내가 가득한 법당엔
자그마한 미륵불 한 좌가 고적한 어둠을 지키고 있었다.
무심코 미륵불을 쳐다보던 지함은
이상한 생각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바라보았다.
여느 사찰에서는 보지 못한 특이한 불상이었다.
가사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가사는 미륵불이 깔고 앉은 범종 위에 얹혀 있었다.
자비가 철철 넘치는 다른 불상들과 달리 얼굴을 반쯤 찡그리고 있었고,
그 얼굴 가득 세상사 번뇌를 담고 있었다.
"선생님. 미륵불인 것 같은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처음 보는 형상인데요."
"흠. 그렇군."
열린 문 사이를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미륵불의 고뇌에 찬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는 바람에
미륵의 고통이 더욱 선연히 드러났다.
"언젠가 이 불상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예서 만나게 되는구만.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건 신라 때 만들어진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일세.
석가불 다음에 세상에 나타나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이지."
화담이 미륵불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륵불은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크나큰 뜻을 세우고 이 세상에 내려왔지만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네.
내가 미륵불이다 하면서 도탄에서 건져주려 했더니
외려 중들은 미륵불을 알아보지 못하고 달려들어 죽이려 한 것일세.
그러니 미륵불은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 거지.
그래 화가 치민 미륵불은 온 절에서 아침 저녁으로 자기를 불러내던 범종을
종각에서 끌어내렸다네.
그러고는 미륵의 형상인 가사를 벗어 종 위에 얹어놓고
그 위에 다리를 꼬고 올라앉았지.
도대체 이 불쌍한 중생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하나,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이 미륵불상일세.
어떤가?
신라적 조상들의 상상력도 상상력이지만
그 생각의 깊이가 천길 만길 깊지 않은가?
타락한 불교를 이렇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꼬집을 수 있다니
가히 놀라운 기지일세."
성리학자인 화담은
지금껏 단 한번도 불상 앞에 절을 하거나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화담은 정중하게 옷깃을 여미고 향통에서 길다란 향을
세 개 뽑아 불을 붙인 뒤 허리를 굽혀 세 번 예를 올리고 향로에 꽂았다.
화담이 사룬 향은 짙은 향기를 뿜으며 타올랐다.
지함도 고뇌하는 미륵불에 대한 진한 애정으로 절을 올렸다.
도가 통하지 않는 세상,
구원을 거부하는 중생을 포기하지 않고
미륵은 깊은 고뇌로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다.
중생이 거부하는 도란 이미 도가 아닌 것을 미륵불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세상의 도를 얻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를 찾아 고뇌하는 모습.
무릇 도를 찾는 이의 자세란 이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 점심 때 만난 젊은 농부의 불퉁스런 말이 떠올랐다.
그는 화담이 수십 년간 닦은 도를 말하자 단 한마디로 깔아뭉개버렸다.
모든 기는 한 뿌리이며 평등한 것이라는 화담의 말이,
하루하루 차별을 느끼고 살아가는 그 젊은이에겐
한낱 한가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선비님도 굶어보시오."
이 말로써 그 사내는 화담을 비웃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화담은 이미 그런 속세의 고뇌쯤은 예전에 떨쳐버린 사람이었다.
지함이 산방에 있을 때 다른 학인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다.
어느 날 강문우라는 학인이 쌀을 짊어지고 산방에 갔다.
그 날도 화담은 하루 종일 낯빛 하나 흐트리지 않고 강설을 했다.
강의가 끝나 쌀을 내어놓으니 화담이 빙그레 웃으면서
'너 본 지가 언제더냐' 하고 물었다.
화담은 벌써 나흘 째 끼니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을 가르친 허엽도 그런 화담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갑자기 장마비가 내려 학인들은 산방에 갈 수가 없었다.
계곡의 물이 불어서 감히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아
아무도 계곡 건너에 있는 산방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장마는 엿새나 계속되었다.
비가 그쳐 허엽이 산방에 가니 화담은
엿새 동안 끼니를 잊고 혼자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런 화담이었다.
그런 화담이 오늘 미륵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지함은 조용히 법당을 나왔다.
자그마한 법당 뜰엔 가꾸지 않아도
제 스스로 자라는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문득 민이가 내밀던 꽃다발 향기가 코끝을 스쳐갔다.
민이는 늘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들꽃을 부러워했었다.
집안에 갇힌 여인네의 암담한 처지에 대한 반항이었을까.
들꽃의 자유를 그리던 민이.
누군지는 모르나 산을 울리며 돌을 쪼는 저 스님도
민이처럼 자유를 그리워하는 사람일 것이다.
스님은 무엇에 갇혀 있어 자유를 꿈꾸는 것일까.
지함의 혼잣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정소리가 뚝 그쳤다.
벌써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저녁과 더불어 산사에 휴식이 찾아온 것이다.
잠시 후 자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정 소리를 내던 중이 산을 내려왔다.
그는 무거운 연장이 든 걸망을
짊어지고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나타났다.
노승의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돌을 깎기엔 너무 연로해 보이는 중이었다.
노승을 마주 한 지함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올렸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겸허의 마음이
우러나오게 하는 위엄이 서린 얼굴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법당에 외로이 놓인 미륵불과 마찬가지로
짙은 고뇌에 잠긴 표정이 너무도 절절해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지나던 길손이온데 하룻밤 묵기를 청하고자 합니다."
노스님 역시 조용히 두 손을 마주 모았다.
그리고 걸망을 내려 다시 쓸 연장들을
갓난애 다루듯 조심스레 꺼내 꼼꼼하게 챙겨놓았다.
그때였다.
"아니, 이게 뉘시오?"
법당에서 나오던 화담이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노승이 천천히 화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화담의 놀란 목소리가 무색하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화담 선생이시군요.
우리 인연은 정말 질긴가 보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안으로 드시지요."
두 사람이 안으로 들고 나서 지함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박지화의 옷깃을 붙잡았다.
"뉘신데 선생님이 저렇게 놀라십니까?"
"지족 선사일세."
"예? 이태 전에 송도에서 사라졌다는 그 지족 선사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참 세상은 넓고도 좁구만그래."
지함은 늦게 화담 산방에 입문했던 터라 지족 선사를 만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지족과 황진이에 얽힌 그 유명한 얘기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황진이 때문에 삼십 년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송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지족이
이곳 운주사까지 와서 천불천탑을 조성하고 있을 줄이야.
"선비님들도 안으로 드시지요."
저녁 종소리처럼 투명하고 적막한 지족의 음성에 이끌려
두 사람은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땅은 넓어도 죄인이 도망칠 곳은 없다더니만.
세속 말이 다 일리가 있는 모양입니다그려.
지족을 버리고 이름없는 석공으로 새 도를 쌓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지족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다시 만나게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손님치고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겠군요."
"허허허."
지함의 짓궂은 말에 지족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로는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런 것 같질 않았다.
"아니오. 오히려 고마운 손님들이올시다.
다른 사람은 나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
손님들을 통해 내가 과연 지족을 버리는데 성공했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은 부처의 현신인 셈이지요."
지족은 이미 과거의 지족이 아니었다.
천불천탑을 쌓는 거대한 원을 세운 석공으로서 그들 앞에 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시장하실 텐데 좀 기다리십시오."
운주사에는 밥 지어주는 보살도 불목하니도 없었다.
하루종일 돌을 쪼다 온 지족은 자그마한 부엌으로 나갔다.
지함과 박지화가 따라나서려 했지만 지족은 굳이 마다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뜻밖에 지족을 만난 화담은 눈을 내리감은 채
어둠과 같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지족 선사는 송도에서 이름 높은 선사였다.
그 높은 이름 때문에 지족은 황진이의 첫번째 표적이 되었다.
황진이는 제 스스로를 송도 삼절 가운데 하나라 일컬을 정도로 오만하고 도도했다.
원래 송도 관기의 딸로 누군지 이름도 알 수 없는 양반의 씨를 받아 태어났고,
장성해서는 제 어미를 따라 관기가 되었다.
조선 사회에서 기생이란 백정이나 장인과 다를 바 없이 천한 신분이었다.
종과 다름없는 그가 스스로를 송도 삼절이라 해도
누구 하나 그 말을 과하다고 탓하지 않았다.
그만큼 황진이는 뛰어난 여자였다.
사내들의 뼈를 녹이는 방중술만으로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수려한 미모도 그렇거니와 천상의 선녀를 연상케 하는 춤솜씨를 갖추었고,
내노라 하는 선비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학식이 깊었으며
시심(詩心)은 고개를 절로 숙일 만큼 탁월했다.
만약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비록 종의 신분이더라도
무엇인가 세상을 위해 큰일을 이루어냈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자도 아니었고 양반도 아니었다.
여자로 태어났으며 더우기 몸을 팔아야 하는 기생 신분이었다.
비록 기생이었지만 황진이는 한낱 사내의 노리개에 머물기를 거부했다.
소문난 명기 황진이를 첩으로 앉혀보려고 명문 사대부들이
금은보화를 싸들고 줄을 이어섰지만,
황진이는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스스로 기생으로 남았다.
사람이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욕심이 더 크다는 말이 맞긴 맞는 듯했다.
좀처럼 얻기 어려운 황진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전국 각지의 사내들이 송도로 모여들었다.
황진이의 집앞은 늘 그런 사내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황진이가 송도 장사치를 모두 먹여살린다는 말이
항간에 파다하게 퍼질 정도였다.
황진이는 기생이면서도 기생이 아니었다.
황진이는 남자의 부름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여자인 황진이 마음대로 남자를 청하고 놀이를 즐겼다.
그런 황진이가 야심한 밤에
지족을 찾아갔던 것이다.
비 내리는 밤이었다.
도롱이도 받쳐 입지 않고 우산도 쓰지 않은
한 여인네가 빗속을 더듬어 계곡을 오르고 있었다.
여인네의 얇은 비단 저고리는 비에 흠뻑 젖어 고운 몸을 감춤없이 내비쳤다.
한발자국 떼어놓을 때마다 여인의 부드러운 살집이 물결치듯 탄력있게 출렁였다.
밤늦은 술시(戌時),
송악사 스님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고색창연하게 비를 맞고 있는 송악사도 함께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황진이는 몸에 착 달라붙은 저고리의 물기도 짜내지 않고 방장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선정에 들어 있던 지족 선사가 발을 제치고 나타났다.
모두 잠든 그 시간에 지족은 홀로 철야정진중이었다.
황진이는 지족의 얼굴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소년처럼 피부가 투명한 노승의 얼굴을 보고
그가 지족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지족은 청아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단 한 치의 틈도 없이 매섭고 날카로웠다.
"야심한 시간에 웬 아낙이오?"
기생의 신분으로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큰스님이었다.
"저어,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만…"
황진이는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속살이 다 드러난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젖은 옷 사이로 살색 투명한 육체가 관능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들어오시오."
송악산에 여자가 밤 늦게 들어올 일이 없었다.
길을 잃을 일이 없는 것이다.
황진이가 한눈에 지족을 알아본 것처럼
지족 역시 황진이를 금세 알아보았다.
몸으로 달려오는 이 여인네가 그 유명한 황진이임을 몰라볼 리 없었다.
황진이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지족은 그에게 낡은 가사 한 벌을 내주었다.
"입으시게."
가사를 받아든 황진이는 지족 앞에서 젖은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하얀 여체가 희미한 등불 아래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의 탄탄한 엉덩이를 닮은 몸이었다.
황진이는 스스럼없이 옷을 벗어던졌다.
지족은 난생 처음 여자의 몸을 바라보았다.
황진이는 춤을 추듯 요염하게 몸을 틀며 천천히 가사를 걸쳤다.
얇은 가사도 무르익은 여자의 몸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스님, 춥사옵니다."
황진이는 바들바들 떨며 무릎걸음으로 지족에게 다가왔다.
황진이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작고 도톰한 입술에서는 묘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추위에 견디지 못하는 신음소리 같기도 했고
절정에 다다른 여인의 교성 같기도 했다.
지족은 담담하게 황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만일까.
지족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워 이불 한 장을 내려 황진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벽을 향해 가부좌를 틀었다.
"시자야!
요사채 빈 방에 불을 지피고 이부자리를 마련하거라."
지족이 흔들리는 음성으로 시자를 불렀다.
"불을 지피고 나면 방이 따뜻해질 것이고,
그러면 몸도 따뜻해질 것인즉.
건너가 편히 쉬게."
여전히 벽을 향해 앉은 지족의 말이었다.
"저를 겁내시는 겁니까?
도가 높은 스님께서 겁내시는 것도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악도 다 스승이라 하셨거늘
스님은 무엇을 겁내고 소녀를 내쫓으시려는 겁니까?"
당돌한 대꾸에 지족이 놀랐다.
문득 몸을 돌려 황진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부딪쳤다.
가사 앞섶이 벌어지면서 황진이의 가슴이 그대로 내비쳤다.
그런데도 황진이는 여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족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빤히 응시했다.
지족의 부름에 잠이 깬 시자가 문 앞에서 어른거렸다.
"됐다. 들어가 자거라."
법랍 사십 세,
속세의 나이로는 쉰인 지족,
열 살 때 입산한 이후로 여자를 가까이 해본 적이 없는 지족이었다.
경전을 읽고 염송을 하면서 색(色)은 이미 오래 전에 떠나보낸 것이었다.
젊은 한때에는 밤마다 끓어오르는 육체의 욕망에 잠 못 이룬 밤도 많았다.
그래서 탐진치(貪瞋癡) 세 가지 독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읽고 염불을 했던 지족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비내리는 산사에 찾아든 이 여인.
여인은 소문대로 천하절색이었다.
하늘이 내린 만유 중에 가히 최고라고 할 만한 게 여자 아닌가.
지족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족은 선정을 접고 촛불을 껐다.
그리고 황진이가 누운 이부자리 윗목에 누웠다.
지족은 눈을 뜨고 태초와 같은 어둠을 보았다.
다 끊어냈다고 믿었던 욕망이 몸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족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욕망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대체 여자란 무엇인가?
이 질긴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참담한 절망 속에서 지족은 욕망의 불길을 잠재우기 위해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찌기 고려 스님 진각 국사가 공안 1700가지를 모아 선가(禪家)에 전했지만
여자 문제는 그 속에 전혀 없었다.
뜨거운 여자의 몸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욕망의 사슬에 휘감긴 지족은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불덩이 같은 손길이 지족의 몸에 와 닿았다.
순간 모든 생각이 일시에 사라지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전율로 지족은 온몸이 떨려왔다.
지족은 왜 몸이 꿈틀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 속에서는 온갖 부처의 명호가 날아다니고
온갖 화두가 들락거렸지만 몸은 따로 있었다.
황진이는 남자의 전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진이는 더욱 부드러운 손길로 지족의 떨리는 몸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황진이의 가슴 속은 허망하기만 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이 이름 높은 지족까지 무너지고 마는가.
차라리 예서 그만두고 지족이 자신의 도를 지키게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황진이의 골수에 깊이 박힌 절망이 자신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었다.
"스님,
소녀는 처녀도 아니옵고
지어미도 아니옵니다.
뭇남자들이 왔다가 지나가는 그저 기생일 뿐이옵니다.
스님께서 저를 가까이 하신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니
죄 짓는다는 생각은 조금도 마시옵소서."
"아!"
지족의 입에서 끈적끈적한 탄성이 터졌다.
황진이의 그 말이 왜 그토록 살갑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황진이는 지족의 품 안 깊숙히 파고들어 지족의 가사 고름을 풀고 있었다.
여인이여,
당신의 업은 오로지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오.
지족은 다시 눈을 흡뜨고 어두운 천정을 쳐다보았다.
이 여인은 제 입으로 기생임을 밝히며 색에서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수십 년간 이루어온 것은 무엇인가.
"스님.
부처님께서도 야수다라비와 꿈같은 밤을 나누었답니다.
그러니까 아들도 낳았겠지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명색이 황태자였는데,
어떤 여인인들 겪어 보지 않으셨겠어요?
부처님이야 이미 온갖 종류의 색을 경험해 보시고 나서 한 말씀이지만,
스님께서는 한번 겪어보시지도 못하고 부처님이 저 놈이 적이다 하고 정해 놓으니까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니옵니까.
스님 몸으로 직접 겪으시고 정말 계율로 다스려야 할 것이라면
그때 가서 다스리십시오.
저는 후회도 않고 미련도 안 가집니다.
날이 새면 그저 떠날 뿐입니다."
오,
어찌 내게 비수를 들이대는가.
허공,
오로지 뜨거운 여인의 숨결만이 허공을 메우고 있었다.
지족의 가슴에 올려놓은 황진이의 고운 손에서 피가 송긋송긋 뛰었다.
지족은 사십 년 동안 닦아온 도가 와르르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이미 네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대중에게 설법중 경계하는 말을 할 때 네 이름을 들어 말한 적도 있느니라."
"저도 중생입니다.
스님께서 저를 안아주시면
저 또한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는 인연을 짓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누추한 집이라도
왕이 한번 거처하면 귀한 집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스님 같은 대덕의 손길을 한번 받으면
소녀 같은 기생도 불심(佛心)을 가질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지족은 황진이의 마음이 그렇게 열려 있지 않음을 알았다.
황진이는 자신의 재주로 세상을 비웃고 시험하는 것일 뿐이었다.
"무엇이 더러운지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여자란 더러운 것입니까?"
이 말에는 한 가닥 진실이 배어 있었다.
그렇구나.
여인이여.
당신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알겠소.
그러나 각자의 몸이란 전생의 업이오.
결코 뿌리칠 수 없는 것,
당신이 몸부림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아닐세.
나 역시 남자일진대 어찌 여자를 더럽다 하겠는가."
지족은 가슴에 놓인 황진이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가슴이 금시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고행을 하다 간간이 작은 깨우침을 얻을 때 느끼던 희열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야릇한 흥분으로 온몸이 긴장되었다.
지족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을 추스릴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무너져 보리라.
알 수 없는 이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너져 보리라.
설령 무(無)밖에 남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내 발로 끝을 향해 걸어가 보리라.
교접술이란 태초에 인간의 몸과 함께 주어진 것일까.
어디서 배운 것도 본 바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족은 경험 많은 뭇사내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손을 놀렸다.
지족은 여자의 몸을 취하고 있었다.
쓰다듬다 보면 머물러 만져야 할 것이 저절로 솟아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뿌리는 서로를 강렬하게 끌어당겨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황진이는 지족의 손길을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받아들였다.
뭇사내가 스쳐간 몸이지만
더없이 고결하고 순결한 처녀처럼 부끄러움과 자랑으로 빛나고 있었다.
황진이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의 몸은 언제나 본능적으로 남자를 원했다.
그렇지만 지족은 역시 사십 년을 선만 닦아온 큰스님다웠다.
그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깊고 그윽한 손길로 작은 기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지족은 황진이를 쓸고 닦았다.
평생 단 한번의 교접에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모두 내던질 듯이.
지족은 서서히,
그리고 집요하게 희열의 극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빗소리는 끈질기게 문풍지를 두드렸다.
아침이 밝았다.
지족은 황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진이의 얼굴은 그대로 완전했다.
그렇게 지족의 눈에서 살아 움직였다.
세상에서 더없이 평화롭고 맑고 정결했다.
황진이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찍 일어났다.
지족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가
새벽송으로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새벽송을 따라도는 동자승들이 키들거렸다.
늦은 밤에 웬 여인이 방장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족은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지족이 방장으로 돌아왔을 때
황진이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이불도 어제 그 자리에 정갈하게 개켜져 있었다.
황진이가 다녀간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
지족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족은 바랑을 꺼내 짐을 꾸렸다.
지족이 떠난 뒤 송도에는 지족에 관한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지족이 황진이 앞에 무릎 꿇었다더라.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도력 깊은 지족 선사가 무너졌을 리 없다.
아니다. 그때 충격을 받고 절을 떠났다.
그게 아니다, 파계한 스승을 수좌들이 내쫓았다.
아니다, 황진이를 찾아나선 것이다.
소문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가 속절없이 스러졌다.
김치에 나물 한 가지뿐인 단촐한 식사가 끝나자
부산하게 밖으로 나간 지족은 술상을 차려왔다.
"웬 술입니까?"
"허허. 일이 워낙 고돼서 입에 대기 시작했소.
지금은 꽤 늘었습니다."
술이 한 순배 돌았다.
"화담 선생님도 한 잔 드시지요."
지족이 화담에게 술잔을 건네었다.
"아니오. 난 술은 안 할라오."
"저, 선생님은 아무것도 잡숫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한잔 더 하십시오."
지함이 얼른 술잔을 잡아 지족에게 권했다.
박지화와 지함은 황진이와 지족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선사께서 천불천탑을 쌓고 계실 줄이야,
정말 뜻밖이외다."
"아니올시다.
내가 일으킨 일이 아니올시다.
내가 이곳에 들렀을 때 그분은 이미 세상을 뜨고 없었소.
소승도 소문이야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터,
우연히 들렀다가 절을 지키는 이도 없이
비바람에 스러져 가고 있길래 소승이 뒤를 이었을 뿐이지요."
"처음에 쌓던 분은 돌아가셨군요."
"글쎄요.
그렇다고 하는 말도 있고,
중도에 어디로 가셨다는 말도 있고…"
박지화는 지족의 얘기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황진이 얘기를 꺼내고 싶어 하는게 역력했지만
너무도 담담한 지족의 태도에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저 불사(佛事)는 언제나 끝나게 됩니까?"
"그분이 구백불 구백탑을 조성했으니
제 몫은 백불 백탑입니다. 난 이미 기력이 쇠해가고 있소.
여생 동안 끝을 낼 수 있을런지 모르겠소이다.
우둔한 머리로 금생 성불(成佛)은 이미 때를 놓쳤으니
내생 인연이나 지어놓고 떠날 생각입니다."
"선사께서 그처럼 불사에 노심초사하니
반드시 이루어내시겠지요.
설령 못하신들 또 어떻습니까?
누군가 선사의 뒤를 잇겠지요.
그런데 구백불 구백탑이나 쌓은 분은 누구시길래
저런 엄청난 불사를 일으켰답니까?"
화담이 계속 말꼬리를 이어갔다.
"가난한 농사꾼이었답니다.
땅만 파서 먹고 사는 무지렁이 백성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해 겨울 이 운주사 뒷산에 땔나무를 베러 왔었지요.
그때 미륵의 현신(顯身)을 만났답니다.
미륵이 지금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을 툭 던져 놓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내 이미 신라 적에 이 땅에 다녀갔다.
그렇지만 불법을 받을 중생이 없어 헛수고만 하고 돌아갔느니라.
여태껏 내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나가야 할지
생각만 하다가 하도 답답해서 내려왔다.
그런데 자네 뜻이 금강 같고,
끈기가 강물 같아서 내 맡길 일이 하나 떠올랐다.'"
"미륵이 나타나셨다…
거 참 신기한 일이로군요."
"미륵이야 이미 여러 차례 세상에 났었지요."
"그래요?"
"여러 모습으로 여러 세상에 나셨지요.
하지만 지혜를 지키려는 중생의 힘이 너무 약했지요.
미륵을 알아보기는커녕
때려서 내쫓거나 죽이려고 덤벼들기나 하더랍니다.
그래서 나무꾼에게 나타나 천불천탑을 쌓으라고 했지요.
미륵이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는 중생의 염원을 모으라 한 것이지요.
석가의 도수(度數)가 시작되어야 할 때인데
아직 미륵의 시대도 열지 못했으니
미륵의 마음이 급하셨던 게죠.
미륵이 오지 못하면 석가의 시대도 없고 중생은 도탄에 빠지고
업장은 더욱 두터워져 극락 정토의 꿈도 꾸지 못할 테니까요."
"그래서 자꾸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건지…"
박지화가 혀를 찼다.
"그래서 그 나무꾼이 천불천탑을 쌓기 시작했군요.
벌써 선천(先天), 후천(後天)이 얘기되고 있었군요."
화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필이면 미륵은 왜 무지렁이 농사꾼을 골라 현신하셨을까요?"
지함의 물음에 지족은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미륵의 현신을 바라는 중생의 마음을 모으는 일인데
무지렁이 농사꾼만큼 적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절밥을 먹어보았습니다만
중생의 마음을 제 마음처럼 헤아리는 스님들이 많지 않지요.
중생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준비하라는
미륵의 깊은 자비 아니겠습니까?"
지함은 그제사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법당에 놓인 미륵 불상이 그래서 그렇게 중생과 같은 고뇌에 잠겨 있는 거로군요.
벌써 저 먼 신라적부터."
"그럴 테지요.
그 미륵불이 바로 현신하신 미륵이 농사꾼에게 던져준 불상이랍니다.
선사는 미륵이 현신한 터에 법당을 짓고
천불천탑을 쌓기 시작했지요.
언젠가 미륵이 오실 날을 위해서 말입니다."
토정은 사화가 끊일 새 없는 조정을 보고
분기를 토출하던 것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벌써 천년 전에 그렇게 고민하고 걱정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미륵이든,
석공이든 그네들은 이미 중생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깊었던 것이다.
그것이었다.
화담이 이곳 운주사로 지함을 데려온 뜻은.
"그런데 저,
선사께서 송악사를 떠나신 후 들리는 말이 하도 여럿이라서 도무지…"
박지화였다.
박지화가 잠시 말이 끊긴 틈을 타 지족에게 번개같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천불천탑 얘기보다
지족과 황진이에 얽힌 소문에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지함도 화담도 궁금한 얘기이긴 했다.
그렇지만 지족의 묵은 상처를 건드릴까 싶어 모르는 체 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어떻게든 알고 지나야 발을 뻗고 잠을 자는 박지화가
그만 눈치없이 물어버린 것이었다.
지함은 자못 긴장하면서도 호기심을 어쩌지 못하고 지족을 응시했다.
"허허.
오늘 아무래도 못된 손님을 치르게 된 것 같습니다.
기다리시지요.
과실이란 저절로 익어 떨어지게 마련이고
꽃도 시들면 지게 마련이랍니다."
지족은 술을 제법 능숙하게 들이키고는 손가락으로 김치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무엇을 알고 싶으신 게요?
설마 고명한 화담 선생의 제자께서
세속 사람들의 호기심으로 묻는 것은 아닐 테지요."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말에 박지화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재미 섞인 호기심이 없지 않았던 지함까지도 얼굴이 붉어졌다.
화담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박지화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세속 사람들의 입방아가 아마 대부분 옳을 것이오.
자,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시오?"
박지화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람의 호기심이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오.
내 말 한마디에 중죄인처럼 쩔쩔맬 것 없소.
설령 그대가 단순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해도.
호기심이란 무엇이요?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욕망이 아니겠소?
내 그대에게 자신을 의심할 기회를 잠시 준 것뿐이오."
지함은 술 몇 잔에 조금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녁 어스름을 등지고 나타났던 지족의 그림자만 보고도 손을 모았던 것처럼.
"그렇소.
내 입으로는 누누히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되뇌어 왔지요.
그러나 막상 색을 눈앞에 대하고 나니 사십 년 수도가 그야말로 공(空)이었소.
그 아이가 내게 말합디다.
당신은 부처가 누군가를 가리켜 도적이라 하면,
알아보지도 않고 그에게 손가락질부터 하겠느냐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 당신 발로 직접 걸어보라고 합디다.
내가 사십 년 수도를 통해서도 깨닫지 못한 것을
한낱 기녀인 그 아이는 알고 있었던 게지요.
내가 육체의 욕망 때문에만 무릎을 꿇었던 것은 아니오.
그쯤이야 뿌리칠 수도 있었소.
그 아이의 말이 내 가슴을 찌릅디다.
부처가 색즉시공이라고 했을 때는
나처럼 색 앞에 눈을 감으라는 뜻은 아니었을 게요.
색을 색으로 볼 줄 아는 것도 진리가 아니겠소.
색을 색으로 이겨보려고 했던 거지요.
그러나 남은 건 외려 공입디다.
나는 그날 그 아이를 통해서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의미를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오."
호기심으로 빛나던 박지화의 눈빛이 어느새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도 나직한 지족의 말에 빨려들고 있었다.
"내가 떠난 뒤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소.
그러나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하겠소?
어쩌면 나는 소문대로 그 아이를 찾아 떠난 것인지도 모르오.
그 아이의 육체가 아니라,
그 아이가 눈 뜨게 해준 진리를 찾아서 말이오."
지족은 마지막 남은 술 한방울까지 쥐어짜듯 남김없이 잔에 따랐다.
그리고 마치 부처가 내린 감로수라도 마시듯 정성스레 들이켰다.
"때로 나는 그 아이야말로 미륵의 현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오.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헛된 미망에 사로잡혀
도 아닌 도를 쫓아 평생을 허비할 뻔했소.
그 아이가 내게 온 것은 아마 부처님의 높으신 뜻이었을 거외다."
지함은 문득 화담을 찾아왔다
홀로 화담 계곡의 적막을 밟아가던 황진이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 쓸쓸한 웃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지족은 색인 줄 알면서 그녀를 받아들였다.
화담은 그날 황진이를 기로 다스렸다.
황진이의 색을 받아들인 지족은
환골탈태(換骨脫胎)하는 변신을 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쌓는 석공이 된 것이다.
그리고 화담,
그는 황진이가 다녀갔어도 언제나 그렇듯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함은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색이 곧 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 아닌가.
사람이란 색에 끌리고 집착하면서 평생을 보낸다.
그 색이 곧 공임을 깨닫는 것,
그것은 공허한 말이 아니다.
색을 극복하는 그 자리에 공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색을 알지 못하고
어찌 공을 알 수 있겠는가.
색 없는 공은
그야말로 헛된 공일 뿐이다.
"황진이도 선사께서 떠나시고 얼마 후 송도를 떠났습니다."
황진이의 이름이 나와도 지족은 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황진이가 화담에게 들렀었다는 얘기를 더 꺼낼까 했으나 지함은 입을 다물었다.
지족과 화담의 차이를 아직 확연히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내게 머물며 나를 깨우쳤소.
정작 도를 깨쳤다는 나는 그 아이에게 준 것이 없소이다.
그 아이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어쩌는 수 없이 색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소.
그 아이만큼 절실하게 진리를 찾는 이도 없을 것이오.
그 아이의 뜨거운 몸짓은 색이 강해서가 아니었소.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찾아보려는 몸부림이올시다.
혹 모르지요.
그 아이도 나를 통해 색의 무상함을 느꼈는지…
그렇기를 바라고 있소만…"
지족의 표정이 점점 법당의 미륵불을 닮아갔다.
지함은 둔중한 쇳덩이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아찔했다.
그 충격이 지함의 온몸 구석구석을 짜릿하게 훑어내렸다.
그렇다.
고통 없이 어찌 공을 알겠는가.
무릇 세상사란 고뇌의 덩어리다.
도를 얻으려면 천길 나락 같은 고뇌 속을 헤매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 없이 얻은 도는 단지 도의 그림자,
허상일 뿐…
고뇌하는 미륵불,
고뇌하는 지족의 모습은 바로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그만큼 진실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송도에서는 사람다운 사람이 다 빠져나갔군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화담은 시선을 먼 곳으로 향한 채 아득하게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 아이가 나를 찾아왔습디다.
선사가 떠나신 뒤 얼마 후였을 겝니다."
화담 역시 황진이를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참으로 절색이더군요.
나야 불가와 달리 교접을 계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를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저도 그 아이가 단지 색을 밝히는 계집이 아니라
무언가를 절실하게 갈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를 나누었지요.
그 아이가 넘쳐나는 기로 허덕이는 것을
제가 다른 기로 꺼주었습니다."
"기로 끄시다니요?"
"불을 다스리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물을 끼얹어 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맞불을 일으켜 그 불을 쇠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늙어 물을 길어낼 기운이 없어서
맞불을 일으켜 그 아이의 불을 끈 것이지요."
"허어.
화담 선생께서는 그렇게 해서 그 아이의 색을 다스리셨군요.
내 색은 그 아이가 깨뜨렸건만
정작 그 아이의 색은 화담 선생님이 깨주셨군요…
아프오이다.
가슴이 아프오이다."
"선사께서도 그것을 깨지 못한 것은 아니오.
오히려 정으로 그 아이를 도닥거려 주신 거지요."
촛불이 일렁거리며 검은 그을음을 남겼다.
문이 닫혔건만 어디선가 바람이 새들어오고 있었다.
술이 떨어진 지 벌써 오래 되었다.
밤은 깊어만 갔다. 그러나 누구도 침묵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지족 선사님.
그래서 그 뒤로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성질이 급해 오래 참지 못하는 박지화가 또 나섰다.
답답한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이었다.
"지족이라니…
그가 누구요?
나는 그를 알지 못하오이다."
또 한방을 얻어맞은 박지화는 꽁하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송악산을 내려온 순간
지족은 이미 이 세상에서 없어졌소이다.
그저 땡초 하나가 이 절 저 절로 떠돌며 불목하니로 지냈지요.
그러다 예까지 흘러와 석공으로 인연을 맺게 된 거지요.
여기 앉아 있는 사람은 이름 없는 석공일 뿐이오."
화담이 소리없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지함도 화담의 뒤를 따랐다.
화담은 뜨락에 내려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맞이꽃이 달빛을 머금고 활짝 피어나 있었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선생님."
"내 별을 보고 있었다네.
저기 태사성이 보이지 않는가?"
어느새 태사성은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자세히 눈여겨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았다.
"어쩐지 쓸쓸해지네그려.
대체 나는 무엇이었던가.
내가 잡으려 했던 도는 무엇이었던가.
사는 것이 다 이런 것이려니…"
운주사 계곡에서 밤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담의 쓸쓸한 모습에 지함은 잠시 말을 잊었다.
희디흰 달빛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선생님!"
지함은 무엇에 이끌리듯 화담을 불렀다.
그러나 지함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굳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늙어버린 성싶은 스승이 안타까웠다.
화담은 지함의 속내를 알아차린 듯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함은 발소리를 죽여 자리를 물러났다.
잠깐 눈을 붙였다 뜬 듯 싶었는데
벌써 이른 새벽빛이 창호지에 하얗게 젖어들었다.
아직은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아침이었다.
범종이 울린 지는 꽤 오래 된 시각이었다.
이 산사에 중이라곤 지족밖에 없으니
그가 기침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벌써 정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 우리도 이만 화순을 떠나세.
가까운 담양에 만나볼 사람이 있네."
어느새 일어났는지 화담이 짐을 꾸리고 있었다.
"아직 식전인데요?"
박지화가 잠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유달리 아침잠이 많았다.
"가난한 절 살림 우리가 축내서야 되겠나?
어제 우리를 대접한 것만도 얼만가.
지족 선사가 앞으로 며칠은 굶어야 할 걸세.
그냥 떠나세.
배가 차면 사람이 게을러지는 법이라네."
화담 일행은 짐을 꾸려 운주사를 떠났다.
주인에게 온다간다 말을 고하지도 않았다.
멀리 돌을 쪼는 지족의 뒷모습이 보였다.
신새벽,
지족은 흡사 어둠을 깨고 있는 듯했다.
망치질을 할 때마다 낡은 가사자락이 펄럭였다.
세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적막을 깨뜨렸다.
지족은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지족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화담 일행은
무거운 걸음으로 운주사 계곡을 벗어났다.
지족의 정소리는
계곡 끝까지 아침을 밝히며 뒤따라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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