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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신라에서 찾아온 아내 - 소설^토정비결(中-17)

일행은 며칠 사이 놀랍게 무르익은 봄들로 나섰다.
사람의 영혼을 홀릴 듯 아지랑이가 들녘에서 아른거렸다.

세 사람은 바쁠 것도 없었으므로 아지랑이에 흠뻑 취하며 천천히 걸었다.

길 가의 꽃송이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며 더 짙은 봄을 찾아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용인을 지나자 바로 안성이었다.

사람들의 느릿느릿한 말투나 거칠 것 없는 풍경이 용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용인에 비해 야트막한 산들이 좀 더 많았고,

그에 따라 당연히 들은 좁았다.
"용인이나 안성은 땅빛깔에 황색이 많다네.
수(水)가 많은 게지.

이 지방은 웬만한 한발에도 먹을 물 걱정은 안할 듯하지 않은가."
화담이 누런 황토를 한 줌 집었다.

손바닥에 금세 황톳물이 배어 들었다.
"선생님, 흙의 성질도 저마다 다릅니까?"
지함이 묻자 화담이 대답했다.
"아무렴.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는 법이니 흙도 마찬가지라네.

토(土)가 토토(土土)만 있다면

질그릇은 무엇으로 만들고,

주춧돌은 무엇으로 놓겠는가.

목토(木土), 화토(火土), 금토(金土), 수토(水土)가 다 다르다네.

이 흙은 수토(水土)라 할 수 있다네.

그러니 경기미 맛이 좋고,

안성배가 별미 아닌가."
"사람도 마찬가지겠군요.

양양(陽陽)한 남자는 너무 뻣뻣해서 못쓰고,

음음(陰陰)한 여자는 너무 가늘어서 못쓰는 이치입니까?"
"그렇다네."
"선생님,

양음(陽陰)과 음양(陰陽)이 더불어 있는 사람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혹 남자의 성기가 달린 여자가 있다고도 하는데…"
박지화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강양약음(强陽弱陰)의 남자라야 그 기품을 살릴 수 있고,

강음약양(强陰弱陽)의 여자라야 그 아름다움이 돋보이지.

강양강음(强陽强陰)이나 약양약음(弱陽弱陰)인 사람은 큰 구실을 못하는 법…"
화담의 말에 박지화가 껄껄 웃었다.
"선생님, 이제 어디로 가지요?"
"예까지 왔으니 천안 삼거리를 지나

자네를 낳은 땅 홍성 좀 구경하세.

천안 삼거리는 삼남의 호걸들이 운집하고 온갖 물산이 다 모이는 길목이니

재미난 볼거리도 많을 테고,

홍성 땅은 무슨 기를 품은 땅이길래

안명세 사관이나 자네같은 반골을 생산해 냈는지 보고 싶네."
"참, 선생님두.

저는 반골(反骨)이 아니라 정골(正骨)입니다."
"아무렴.

사시(斜視)로 보면 다 비뚤어졌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맞네, 자네 말이 맞네.
허허허."
일행은 해거름에 천안 삼거리에 도착했다.
주막에 들러 짐을 풀자 앳된 처녀가 밥상을 디밀었다.

열대여섯 살이 될까 싶은 어린 처녀였다.
화담이 그 처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녀도 화담의 눈길을 굳이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곳에서 일하는가?"
"아니옵니다.

아버님이 군역을 받아 한양 가시던 길에 몸이 불편한

저를 이곳에 의탁시켜 주셨습니다."
"아버님의 이름자를 대보게."
"박(朴)자, 구(九)자, 전(全)자. 아홉 구에 온전할 전입니다.

소녀는 고요할 정에 구슬 옥, 정옥(靜玉)이옵니다."
"허, 참. 알겠네.

이만 물러가 보게."
처녀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왜 그러시옵니까, 선생님."
"글쎄, 나도 모르겠네.

내가 망령이 난 듯하이.
갑자기 정분(情分)이 솟구치니 나도 알 수 없네.

거, 참… 내 바람 좀 쐬고 들어오겠네."
"아니, 진지라도 잡숫고…"
박지화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화담이 문을 나섰다.
"참, 이상하네. 그렇지 않은가?

한양을 떠나면서부터는 음식을 전혀 들지 않으시니…

지금도 굳이 마다하실 이유가 없는데.

저렇게 자리를 피하시는구만.

용인을 떠난 지가 얼만데…"
지함은 그제서야 퍼뜩 그 사실에 의심이 생겼다.
박지화의 말은 사실이었다.

화담은 밥상을 앞에 놓고도 계속 딴전만 피우고,

술잔도 드는 듯 마는 듯 하다가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내려놓곤 하였다.
"도력이 깊으시니까 그러신 게지.

우리나 드세."
박지화가 어정쩡하게 결론을 내리고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단정할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단전 수련이 깊고 생식(生食)을 하는 화담이라 할지라도

물 한모금 먹지 않고는 그렇게 오래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식(小食)을 하거나,

며칠 동안 절식(切食)하는 것이야 지함도,

박지화도 능히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기(氣)만 잡숫고도 저렇게 원기왕성하신 건가?"
지함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지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지.

선생님이 도가 수련을 한 지도 40년이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신선술(神仙術)에 다 나오는 섭생(攝生)이니 믿어두세."
"그러지요.

그런데 아까 그 밥 나르는 처녀에게 이름은 갑자기 왜 묻고,

또 왜 허둥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아무리 드셨어도 젊은 처자를 보면 그럴 법도 한 게 아닌가?"
"아닙니다.

천하 절색 황진이를 만나서도 저토록 흥분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흥분이 뭡니까,

목석 같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참 이상하시지요,
형님?"
"그러게 말일세.

이따 여쭤 보세."
"그러지요."
화담은 땅거미가 짙게 깔려서야 주막에 돌아왔다.
"이제 오십니까?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박지화와 지함이 일어나며 화담을 맞아들였다.
"내가 기이한 인연을 다 겪네그려.

자네 지함이,
나가서 아까 그 처녀 좀 들어오라고 하게."
"예? 예, 그러지요."
지함이 남새를 다듬고 있던 정옥이란 처녀를 불러왔다.
처녀가 방으로 들어와 앉자 화담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처녀는 나를 보고 느끼는 바가 있으렷다?"
처녀는 금세 얼굴이 빨개지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고 모기 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예, 저도 모르게 어디서 뵌 듯하고,

오랫동안 그리던 임을 만난 듯 반갑기도 하고,

한켠으론 서럽기도 하고…"
"허허허. 나도 그러하다네.

허허허, 세상 이치가 오묘하다 하였거늘 이럴 수도 있을까.

그래, 처녀의 사주 좀 들어봅시다."
처녀는 화담에게 연월일시(年月日時)를 또박또박 일러주었다.
화담은 붓을 들어 널찍한 한지에 처녀의 사주를 옮겨 적고 생각에 잠겼다.

지함은 멀찍이 앉아서 화담이 쓴 처녀의 사주를 내려다보았다.

庚申 戊寅 丙申 癸巳

수기(水氣)를 가진 남자가 셋이나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12년만에 차례로 바뀌는 것이었다.
주막에 몸을 둘 팔자임에 틀림없었다.

비록 미색(美色)이긴 하나 남자 손을 많이 타서 중심을 잃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알았네.

자네 아버님이 내년이면 돌아오긴 하겠네만 오른쪽 다리를 잃겠구먼.

군역(軍役)을 나간다는 게 본디 알 수 없는 일,

그간 이곳에서 잠자코 기다리면 돌아오실 걸세."
처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줍은 웃음을 살짝 띠며 일어섰다.
지함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주를 보았으면 짤막한 덕담이라도 해 주어야 할 것을,

화담은 엉뚱한 말을 던지고는 처녀를 내보냈던 것이다.
처녀가 나가자 지함이 화담에게 여쭈었다.
"선생님, 바람 잘 날 없는 뒤웅박 팔자이옵니다."
"인간지사(人間之事) 다 뒤웅박 신세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그 처녀에게 유달리 마음을 쓰십니까?
인물이 곱긴 해도 절색(絶色)은 아니옵고,

그렇다 한들 천하의 화담 선생님께서…"
지함이 말끝을 흐리자 화담이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보게들, 내가 한 가지 일러둘 게 있네.

화담 산방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이네.

사주를 본다는 게 뭔가?

그 사람의 맺히고 풀린 것을 더듬어 보자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선생님.

그것은 마치 물산이 넘치고 모자란 것을 다스리는

경제(經濟)와 같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완도에서는 김이 많이 나나 완도 사람들은 그 김을 다 먹지 못하네.

제주에서 말이 많이 나니 제주 사람들이 다 타고 다녀도 남네.

이렇게 고을마다 제각기 특산물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곧 토질(土質)이나 기후(氣候) 때문일세.
그 고을에 어떤 기운이 많이 뭉치어 있느냐에 따라서 잘 자라는 게 있고,

잘 크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네.

이것은 단지 곡식이나 짐승뿐이 아닐세.

사람도 그 기운을 받아 품성이 달라지니 도별(道別) 인심이 다르고

성정(性情)이 다른 게 다 그 소치라네."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 이치를 안 진사도 알고 있었습니다."
지함이 화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용인의 안 진사를 자네들에게 보인 것은 그 한 예를 알려준 것이네.

일국(一國)의 왕은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것이 제일이고,

치산(治山), 치수(治水)를 잘 하는 것이 그 다음이라.

왜냐하면

물산이 잘 흐르지 않으면 곤궁한 백성이 많이 나기 때문일세.
게다가 물산이 한곳으로 괴면 돈도 함께 뭉치는데,
돈이 뭉치면 그 해악이 인명(人命)에 미치므로 경계해야 하네."
"예, 그 말씀은 알겠습니다마는…"
'내가 안 진사를 보인 것은'이라니?

지함은 더럭 의심이 생겼다.

안 진사는 용인으로 가면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안 진사란 존재를 처음 안 것이 꼴깍재 주막에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화담의 말은 무엇인가.

지함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화담의 속내를 얼른 짚어내지 못했다.
"그 처녀의 일은…?"
박지화가 넌지시 화담의 말길을 틀었다.

화담은 박지화의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그 사연을 밝혔다.
"저 아이는 지난 날 나와 인연을 나누었던 여자일세.
젊은 날이었지.

나는 나이 열네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을 시작하였다네.

집안이 무척 곤궁하였기 때문이었지.

소작을 붙이는 신세였으니 한가하게 글 읽을 시간이 나지 않았지.
같은 마을에 역시 소작이나 붙이는 가난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한 처녀가 있었네.

나는 그 처녀와 정분이 나서 좋아 지냈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학문에 힘쓰면서

그 처녀와 필경에는 혼인하리라 작심하고 있던 터에 그만 일이 틀어졌다네.
그 집이 어찌나 가난한지 그 처녀를 송도의 권세가에게 첩으로 팔아버렸다네."
"저런…"
박지화가 혀를 찼다.
지함은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처녀는 첩으로나마 편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네.

머리 올린 지 닷새만에 대감이 정변에 얽혀들어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네.
졸지에 서방을 잃은 이 사람,

얼마 안 가서 그 집안에 내려오는 하인하고 눈이 맞아 정을 나누었는데,

그만 일이 터지고 말았지.

아이를 생산했던 게야.

그래서 체통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그 가문에서 그 사람과 하인,

그리고 핏덩이를 한꺼번에 죽여버렸다네."
"그렇게 살다 죽는 사람도 있군요."
박지화가 혀를 끌끌 찼다.
지함은 화담의 말끝으로 올라앉은 민이를 또 생각하고 있었다.

혼사를 눈앞에 두고 역적의 가문으로 낙인 찍혀 식구들이 이리저리 찢어지고,
혼자 남은 몸으로 첩이 된 민이.

그러다가 원수와 함께 염병에 걸려 분연히 자결해버린 민이.

'그렇게 살다 죽는 사람'은 화담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얘기를 굳이 왜 꺼내는 것인지 지함은 화담의 속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도대체 그것이 지금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선생님, 그렇다면 이 주막의 처녀가 그때 그 처녀하고 닮은 데라도 있다는 것입니까?"
박지화가 몹시 궁금한지 화담을 채근했다.
"닮은 게 아니라 바로 그 여자일세."
"예?"
"예?"
이지함과 박지화가 모두 깜짝 놀랐다.
"아니, 이미 죽었다면서요?

어떻게 다시 살아났지요?"
박지화가 마치 괜한 농을 한다는 듯이 화담을 흘겨보았으나

화담은 정색을 하고 차분히 말했다.
"그 처녀의 환생이 바로 아까 그 정옥이란 처녀일세."
"예? 전생의 여인이 돌아왔다구요?"
박지화가 놀라면서 반문했다.

지함은 그제서야 화담의 말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차리고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 처녀와 아이까지 낳았던 하인이 바로 저 사람의 아버지로 인연이 맺어졌다네."
"처녀를 첩으로 들였던 양반은요?"
"곧 나타날지 이미 나타났는지 모르겠네.

함께 죽은 핏덩이도 다시 나타나겠지.

그렇게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니 인생은 손해도 없고,

이익도 없는 것 아닌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

남는 것은 오로지 정신 하나일세.

백척 간두(百尺竿頭)에 서도 그 하나만 꼭 잡고 있으면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네."
"선생님, 저 처녀가 젊은 시절의 그 처녀였다는 걸 어떻게 보셨습니까?"
박지화가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이 또 물었다.
"자네도 머지 않아 숙명통(宿命通)이 열릴 걸세."
"선생님,

그렇다면 그 처녀와 나누었던 더 먼 옛날의 사연까지 짚으실 수 있으신지요?"
지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야 그럴 수 있지.

정옥이란 저 처녀,

내가 젊어서 만났던 이름은 가희였네만,

실은 내가 신라 적에 함께 산 적이 있었다네.

그때나 지금이나 가난은 떨어지지 않아서,

그때도 몹시 가난한 서라벌 백성으로 혼인을 했지.

고려 적 송도만큼이나 서라벌도 처녀들이 드세었지

. 한참이나 좋아지내다가 겨우 혼인을 하여 몇 밤이나 잤는지,

그 여인이 그만 알지 못할 돌림병으로 횡사했다네.

그 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네.
인연이란 이렇게 질긴 것이고,

사람이 맺은 인연으로 가장 길게 이어지는 것은 연정(戀情)일세.
남녀 화합처럼 오래가는 업(業)이 없으니

이생 저생 옮겨다니면서도 울고불고 함께 가는 게 이 인연이라네."
지함과 박지화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화담이 강설인지 푸념인지 모를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내가 저 아이를 보니 지난 일이 어렴풋이 짚이는 게 있었다네.

그래서 사주를 보자고 한 것이었지.

49일만에 환생하였으니 사주가 들어맞았다네.

게다가 지함 자네도 보았지만

그 애 사주에 남자 셋이 도사리고 있지 않던가.
지함 자네가 그 사주를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목숨인지 살피는 동안 난

그 반대로 더듬어 올라갔네.

이 사주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전생이 어땠길래 이런 사주가 나온 것일까.
이 사주의 전생은 무엇인가.

그러다 보니 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가희라는 비운의 여인이 나타났던 게야."
"스승님, 사주로 전생을 헤아립니까?"
지함이 놀라 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의 운명을 감정한단 말인가.

그가 지나온 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앞날을 논하면 안 되네.

어떤 사주를 놓고 운명을 감정할 때,

이렇게 하여 재물을 모으고 저렇게 하여 귀해질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렇게 하는 것은 위험한 짓일세.
남의 운명을 감정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살피는 데 먼저 애를 쓸 것이요,

언사(言辭)는 뒤에 풀어도 늦지 않는다네."
"그렇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전생에는 무엇을 경험했고,

무엇을 발원하던 사람인가.

운명을 감정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 사람의 목표는 부귀인가 영화인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가를 각별히 살펴야하네.
사주(四柱)란 모름지기 업(業)을 풀이하는 것이요,
업이란 전생(前生)의 열매일세.

그 열매 속에 들어 있는 씨앗이 사주라는 것일세.

지나간 생에 맺은 열매대로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온다네.

어떤 싹을 틔우고 어떤 잎을 피우고,

어떤 꽃을 피울지 이미 그 열매 속 씨앗이 다 갖추고 있네.

우리는 그 씨앗을 보고 이건 대추나무로군,

이건 사과나무로군,

이건 아욱이고

저건 배추로군

하면서 감정을 하는 것이라네.
그러므로 지혜로운 도사(道師)는 그런 데까지 생각을 뻗쳐야 하는 법,

자네들도 이를 명심하게.
내가 실없이 주막의 아녀자를 희롱하고자 사주를 본 것은 아닐세."
이튿날 아침 화담은 이른 새벽부터 지함과 박지화를 깨워 길을 떠났다.

화담은 어제 만난 그 처녀를 다시 볼 생각도 하지 않고 훠이훠이 걸음을 재촉했다.

더는 인연을 이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일행은 천안에서 온양, 예산을 지나 저녁 나절에 홍성에 이르렀다.
홍성.

지함이 태어나고,

명세가 태어나고,

민이가 태어난 땅이었다.

화담이 무슨 생각으로 홍성을 찾는 것인지 지함은 알 수 없었다.

갈림길에서 지함은 잠시 망설였다.

곧장 가면 명세의 집을 거쳐 지함의 집이 나오고,

돌아가면 좀 멀기는 하나 명세의 집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돌아가자는 마음과 달리 지함의 발길은

어느새 명세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명세가 서울로 떠나기 전까지는 무던히도 드나들었던 집이었다.
멀리 기울어가는 봄 햇살에 명세네가 살던 집의 지붕이 보였다.

잡초가 무성하게 나 있었다.

지함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용인에서만 해도 지나가버린 고통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막상 명세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집에 들어서자

그때의 상처가 조금도 아물지 않은 채 예리하게 쑤셔왔다.

잊은 듯하면 다시 살아나고,
잊은 듯하면 다시 떠오르고…

그렇게 평생토록 찾아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새 잎을 돋아낸 잡초가
지붕을 녹색으로 물들이며 물결쳤다.
역적의 집이라고 아무도 들어와 살지 않은 것일까,
명세네가 한양으로 떠난 다음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던 듯했다.

버려진 집은 자신의 주인들에게 닥친 고난의
세월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허망하게 스러져가고 있었다.

민이가 늘 곁에 붙어서서 먼 산을 바라보던 자그만 후원문도

바람과 비에 삭을 대로 삭아서 간신히 형체만 유지하고 있었다.
지함이 손으로 살짝 밀치자 문은 쉽게 열렸다.
무엇엔가 이끌리듯 지함은 후원으로 들어섰다.
바닥이 훤히 드러난 연못은 그 위로 흙먼지가 켜켜이 쌓여

연못이었다는 것조차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초췌해져 있었다.

민이가 그토록 정성을 들여 손질하던 후원에 꽃은 간 데 없고 잡초만 무성했다.
아, 지함은 불현듯 발걸음을 멈추고 탄성을 내질렀다.

마른 연못가에 훌쩍 자란 모란이 여느해
봄처럼 고결한 붉은 꽃잎을 활짝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까르르 웃어대는 민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민이의 웃음소리를 따라 지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후원의 정자였다.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살짝 밟아 올랐다.

바람이나 쏘일까 싶어 명세를 찾으면 명세는 언제나 이 정자에 앉아

글을 읽거나 꽃이 만발해 있는 뜨락을 내려다보곤 했었다.
민이의 냄새, 청초한 들꽃 향기…
"이보게. 게서 뭐하는 겐가?"
지함은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네가 잡초를 밟고 서서 지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이는 어디로 갔을까?

들꽃은? 민이가 읊어주던 옛 시자락이 아직도 귓바퀴를 타고 돌았다.
"빈 집으로 들어가더니 나올 생각을 않더구만.

예가 누구 집인가?"
낯선 노인의 모습이 점차 익숙한 형체로 다가왔다.
화담이었다.

그래도 지함은 민이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소리없이 바람이 일었다.

커다란 모란 꽃잎이 그 바람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오후인데도 지함은 난데없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한기를 간신히 참으며 낡은 나무계단을 내려온 지함은 모란꽃 앞에 섰다.

민이가 그토록 좋아하던 모란,

이 후원 가득 붉게 타오르던 모란…
"봐요, 오라버니. 당당하죠?

진달래처럼 수줍지도 않고 개나리처럼 요사스럽지도 않아요.

한여름의 뜨거움을 예감하는 붉음으로 저 홀로 당당하고 조용해요."
그래. 민아. 사람은 가고 없어도 꽃은 해마다 피고 지는구나.

네가 쏟은 정이 아직 남아서 이 모란은 여전히 꽃을 피우는 것일 테지.
지함은 후원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걸었다.
방마다 문살은 부서지고 찢겨진 창호지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처마 밑에 길게 늘어진 거미줄을 보며 지함은 마침내 참았던 눈물을 한방울 떨구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명세와 민이의 모습은 생시 그대로 맑고 뚜렷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추억이 깃든 것들이 모두 누추하고 쇠락한 것이 지함은 서글펐다.
"선생님, 모든 기(氣)는 서로 통하고 연결되는 모양입니다.

사물과 생명 사이에도 말입니다.

잡초가 돋은 지붕,

먼지 끼고 무너져 앉은 정자,

들풀이 무성한 후원,

그 모든 것들이 이 집 주인의 지나간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집도 그저 집이 아니군요.

사람의 얘기가 담긴 집이 어찌 그저 사물일 뿐이겠습니까?"
"그렇네. 바로 그것일세.

사람은 우주 만물과 어울려 살며 결국은 우주가 되는 것일세.

어느 하나도 저 혼자 버려진 것은 없다네.

내가 곧 우주이며 이 집 또한 우주일세."
세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의 풀들이 바닥에 누워 자그마한 길이 되었다.

언제고 지워지지 않을 지함 가슴 속의 깊은 상처처럼.
민이와 명세가 없는 홍성현은 이제 지함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고장이 되고 말았다.

지함의 어린 시절이 묻어 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 시절은 명세 남매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다.

그 시절의 꿈마저 모두.
화담은 이런 나를 미리 보고 정옥이란 어린 처자를 보여준 것일까.

전생에서 찾아온 사람,

그이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얼굴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예전에 대한 기억조차 모두 잊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다 제 정분을 찾아다니는 것이라네."
화담이 지함에게 말했다.

지함은 깜짝 놀랐다.
화담은 지함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
"가세. 그런 정이 바로 업을 일으키는 씨앗이라네."
화담이 지함의 등을 밀었다.
지함은 그가 살던 옛집으로 갔다.

집에서 여장을 푼 지함은 홍성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혼자 집을 나섰다.
그리움이 너무 깊으면 남아 있는 추억마저 바래버리는 것일까.

마을 초입의 늙은 느티나무며 길 가의 돌멩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눈에 익지 않은 것이 없건만 꿈결인 듯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너무나 서먹해서 정말 고향에 온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병들어 자리에 누운 당숙 어른은 지함이 큰 절을 올리는 데도

팽 하고 돌아눕더니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워낙 괴팍한 양반이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당숙모가 민망해 하며 변명을 했다.
한양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문중에서 지함을 가장 아끼던 당숙이었다.

생각해 보면 얄팍하기만 했던 지함의 지혜를 높이 사 문중을 크게 일으켜주길
기대했으나 거렁뱅이가 다 돼 떠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으니 실망이 클 만도 했다.
그러나 당숙이나 문중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을 만큼

지함 자신의 삶이 넉넉하지 않은 것을 어쩌겠는가.
문중 어른들은 예전과 달리 지함을 뜨악하게 대했다.

그래도 지함은 문중 어른들을 빠짐없이 찾아뵙고 인사를 여쭈었다.

고향도 오래 있을 곳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품처럼 늘 포근하기만 하다고 여겨오던 고향이었다.

그런데 다 자란 지금에 와서 고향은 그저 낯선 고을보다도 더 생경할 뿐이었다.
"명리를 따지다 보면 고향을 떠나야 되는 사람이 많이 있네.

고향의 기가 이미 충분히 그 사람에게 배어 들었기 때문이지.

고향이 줄 게 없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주었기 때문이라네.

더 받을 게 없으니 반가울 게 없는 게지.

고향을 원망하지 말게."
어깨가 축 늘어진 지함을 화담이 그렇게 위로했다.
"저는 어머님, 아버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남달리 생각했는데…"
"부모님도 마찬가지라네.

그분들이 일찍 돌아가셔서 자네에게 정을 주지 못한 것 같지만

자네는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은 것이라네.

더 그리워하지 말게나.

사람 사는 이치를 너무 따지다보면 성정이 메말라진다네.
가야 할 앞길을 두고 자꾸 지나온 뒷길을 돌아보지 말게나.

자네가 길을 가지 누가 대신 가겠는가?"
지함은 화담이 왜 홍성에 오자고 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화담이 여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나를 자꾸만 새로운 인연 속으로 빠뜨리는 것일까.
박지화는 그저 유람이나 하도록 내버려두면서 내게는
쉴새없이 이것저것 문제를 던지는 화담.

그의 속뜻이 무엇이란 말인가.
화담은 오랜만에 바다나 구경하자며 지함과 박지화
두 사람을 이끌고 바다로 나갔다.
마침 바닷가에는 고기잡이배 한 척이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부는 화담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백발 노인이었다.

그는 큰 그물을 혼자서 거두고 있었다.
"여보게들,

이왕이면 고기잡는 구경도 해보는 게 어떻겠는가?"
화담이 어부가 그물을 말아 배에 싣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노인장, 노인장!"
화담은 지함과 박지화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어부를 불렀다.

무릎 위로 바지를 걷어올린 어부는 낑낑거리며 배를 밀고 있었다.
"아니, 선생님. 뱃길을?"
박지화가 화담에게 물었다.
"뱃길 한번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일세."
"선생님, 하루 이틀이라도 이곳에 더 머무르면 어떻까요?"
지함이 그대로 홍성을 떠나기에는 아쉬워서 머뭇거렸다.
"고향과 부모는 떠나 사는 게 사람 사는 이치라네.
여보시오, 노인장!"
화담이 다시 소리치자 어부가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좀 태워주지 않으시려우?"
"그야 맘대로 하시오만 이 배는 멀리 떠납니다.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백발이 무색하게 우렁찼다.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전라우도 해남으로 간다오."
"마침 잘됐습니다그려.

저희도 그쪽으로 가려던 참인데."
화담은 있지도 않은 말까지 해가면서 지함과 박지화를 재촉했다.
화담은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쉽기는 했으나 지함은 배에 올랐다.
세 사람이 배에 오르자 노인은 서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서로 편한 대로 자리를 잡고 각자 자신의 바다를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에 떠나온 육지가 어느새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세상에는 끝없이 너른 바다와 배 한 척,
그리고 태양뿐이었다.

흰 구름 몇 점이 천천히 흘러갔다.

자그마한 돛이 육지에서 불어오는 잔바람에 배를 잔뜩 부풀렸다.

깊이를 알 수 없이 검푸른 바다는 파도도 없이 잔잔했다.
이따금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노인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탁하고 무거운,

그러나 힘찬 울음을 토해내곤 했다.
화담이 갑자기 홍성을 떠나자고 한 이유야 어쨌든 지함은 피곤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이건만 오히려 마음만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봄빛이 다사롭고 바람조차 없는 바다,

지함은 까무룩히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