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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바다를 읽는 어부 - 소설^토정비결(中-19)

가도가도 바다는 끝이 없었다.

검푸른 바다와 하늘과 간혹 황혼 속으로 떼지어 나는 갈매기.

그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고 나면 배는 어둠 속으로 흘러갔다.

바람이 일 때마다 돛이 펄럭이는 소리가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람조차 없을 때에는 소리도 빛도 없는 바다의 밤.
도인들이 말하는 무극(無極), 바로 그것이었다.
막막한 바다를 떠돌기 열흘째,

갈증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뭍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민이에 대한 그리움마저 하찮은 것으로 여겨질 만큼

바다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뼈에 사무쳤다.
처음엔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애처럼 흥에 겨워 떠들어대던 박지화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말을 잃어갔다.

은빛으로 퍼덕이는 생선을 잡아 올려 회를 먹던 짜릿한 감동도 사라졌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에는 배가 요동을 하여 심한 배멀미에 시달리기도 했다.

수십 년 묵은 가슴 속 찌꺼기가 남김 없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폭우가 내리는 날이면 지함과 박지화는 아무 데라도 꼭 잡고 버티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늙은 어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돛을 느슨하게 늦추었다
팽팽하게 당겼다 하면서 여유있게 배를 부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화담이었다.

화담은 바람이 몰아쳐도,

비가 들이쳐도 놀라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굵은 빗줄기를 맞으면서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뱃바닥에 그대로 앉아 있기도 하였다.
지함이나 박지화는 이따금 그런 화담을 보곤 깜짝깜짝 놀랐다.

두 제자는 그래도 괜찮으시냐고 걱정했지만 화담은

늘 자네들이나 조심하게 하면서 태연했다.

그러면 제 몸 하나 추스리기도 힘에 겨워 두 사람은 더이상 묻지도 못했다.
바다는 제멋대로였다.

어떤 때는 배를 한입에 집어 삼킬 듯 으르렁댔고

어떤 때는 순한 소처럼 얌전하기도 했다.

검은 구름이 몰려와 폭풍우가 몰아치다가도

금세 구름이 걷혀 맑은 하늘이 드러나기도 했다.
때로 불쑥 튀어나온 육지의 끄트머리가 거무스름하게 떠올랐다.

육지 한 조각만 보아도 땅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졌다.

물을 빼앗긴 열병 환자처럼 육지에 대한 그리움이 자꾸만 깊어져갔다.
수십 년간 짠 바닷바람과 싸워온 늙은 어부의
얼굴은 파도가 일지 않는 바다처럼 잔잔했다.

화담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지함과 박지화가 난간을 붙잡고 누런 위액을

토해낼 때도 본 체 만 체 하던 어부였다.

어부는 내내 말을 잊어버린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집스럽게 침묵했었다.

그런 어부가 방금 사라져버린 육지 쪽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지함에게 뚬벅 물어왔다.
"아무것도…"
마침 맞게 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득 안은 돛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무뚝뚝하던 어부가 웬일로 입가에 커다란 주름을 접으며 웃었다.
"그럴 게요.

바다에 나오면 처음엔 뭍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 된다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잡념이 모두 없어지지.

꼭 내가 바다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오.

그렇지 않소, 젊은이?"
어부가 박지화를 보고 장난스레 물었다.
"글쎄요.

아직은 그런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모양입니다.

노인장께서는 늘 이렇게 혼자 다니십니까?"
"웬 걸요.

과년한 딸 애가 하나 있어 그 놈과 늘 함께 다니지요.

고기를 잡을 때는 같이 다니는데
이번에는 짐을 나르는 길이라 해남에 내려놓고 왔지요."
"노인장께서는 어디 사십니까?"
"이 배가 내 집이라오."
어부는 낡은 뱃전을 거친 손으로 어루만졌다.
"이놈도 이젠 나처럼 늙었구려.

지금은 원귀가 된 집사람을 만나 몇 년을 씨름하며 이 배를 지었는데…
그 뒤로 한시도 이놈과 떨어져 본 적이 없소.

이놈이 나를 먹여 살렸지요.

이놈이나 나나 이제 갈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소이다만…"
그러나 아직 어부의 어깨는 건장해 보였다.

노를 젓는 팔뚝심도 젊은이 못지 않았다.

깊은 주름이 잡힌 얼굴도 아직은 혈색이 붉었다.
"무릇 생명 있는 것이 다시 어둠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모든 사물의 이치이지요."
멀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바다만 바라보고 있던

화담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렇소.

그러니 아쉬울 것도 미련을 둘 것도 없지요.

고기를 낚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과 같은 이치라오.

농부가 정성을 기울여 씨를 뿌리고 하늘의 도움으로 열매를 거두듯이

어부도 하늘의 도움을 입어야 하고 고기에게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지요.
고기를 잡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어부라지만 어부만큼

고기를 아끼고 바다를 아끼는 이도 또한 없을 것이오.
내 평생 부끄러움 없이 정성으로 살아왔으니 죽음인들 두렵겠소.

때로 죽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오."
어부는 뜻밖에도 달변이었다.

화담도 스승의 말을 새겨듣는 학생처럼 어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옳습니다.

죽음은 꼭 다른 생명 하나를 잉태하고 키우지요.

씨앗이 죽어 새로운 생명을 자라게 하고 고기가 죽어 사람을 살찌우듯이 말입니다."
어부와 화담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죽음을 앞둔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교감이었다.
"그래 어디를 가는 중이시오?"
"팔도를 유람하고 있습니다."
"좋겠구만요.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별로 가본 데가 없습니다.

물건을 실어나르느라 마포나 제물포를 몇 번 가본 적은 있지만 그런 일감도 흔치는 않지요.
내가 본 세상은 이 바다가 전부올시다.

세상이 바다인지 바다가 세상인지 요즘은 그것도 잘 모를 지경이오.

잔잔할 때나 성난 파도가 밀려올 때나 나는 그저 이 배의 난간만 꼭 붙들고 견디어왔소.
세상 사는 일이 그와 다를 바가 무어 있겠소?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폭풍우도 있고 맑은 날도 있고,
애를 쓰며 견디다 보면 한 세상 가는 거 아니겠소?
사람의 한평생이란 게 결국은 바다 위를 떠도는 돛단배입디다."
화담은 미소를 빙그레 머금었다.
"바다 위에서 평생을 보내셨다더니 노인장,
수(水)를 그대로 닮으셨구료."
"수(水), 수(水)라. 그렇지요. 

그런데 이 수(水)는 좀 별납니다.

다른 수 하고 다르지요."
"수면 수지 다른 수도 있습니까?"
박지화가 물었다.
그러자 어부가 대답하기 전에 화담이 먼저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다네.

목수(木水)가 있고,

화수(火水)가 있고,

금수(金水)가 있고,

토수(土水)가 있다네.
바다는 수수(水水)지.

순(純) 수(水)란 뜻일세.
순수(純水)는 도(道)를 닮아서 옛 현인들은 물을 관(觀)하는 것으로 수도를 대신했지."
"순수(純水), 참 말도 잘 지으십니다.

난 그런 말은 모르오. 단지 뭍에서 흘러드는 제 각각의 물줄기가

얼굴을 버리고 하나가 되어 바다를 이룬다는 것을 알고 있을 따름이오."
"제 얼굴을 버리고 하나가 된다,

그것이 도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화담이 뱃전에 밀려드는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의 수론(水論) 강의가 시작되었다.
"물이 흘러가는 모양을 놓고 옛 사람들은
'법(法)'이라는 글자를 생각해냈습니다.

법(法)이 무엇인가.

천지(天地) 우주(宇宙)가 흘러가는 이치올시다.
물에도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생장염장(生長斂藏)이 있습니다.

물은 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땅 속으로 스며든 물은 시내를 이루기도 하고 조그마한 샘물이
되기도 하여 마치 어린 아이가 자라는 모양과 같습니다. 강이 되기까지 자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다에 이르러 하나가 되기까지,

바다라는 것으로 모일 때까지 염(斂)을 하는 것이지요.

장(藏)이란 바다 그 자체입니다.
물도 죽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물은 어떻게 죽는가.

물을 그릇에 담아 햇볕에 내어놓으면 줄어들지요.

그것을 물이 죽는다고 합니다.
물이 죽는다면 영원히 죽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모양이 변하는 것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비가 되어 다시 태어납니다.

환생(還生)하는 것이지요.

물이 윤회(輪廻)하는 것입니다."
"물은 살아도 죽고, 죽어도 산다?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로군요.

하하하."
어부가 껄껄 웃었다.
"그렇소이다.

사람 사는 것도 바로 그 이치 아니겠소?"
"그걸 들켰구료.

나만 그 생각을 하나 보다 했지요.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갈까 그 생각을 했지요.

나는 어부이니 목숨줄이 닳으면 바다에 몸을 던질 생각이오.

바닷고기들이 나를 먹여 살렸으니 이제 내 몸으로 그놈들 한 끼 먹이가 될까 하오."
어부가 그렇게 말하자 화담도 지함도,

박지화도 모두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부의 얼굴에는 바다같이 깊고 깊은 미소가 잔잔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어부는 바다였다.

바닷바람과 내리쬐는 태양에 그을린 어부의 검은 얼굴은

바다와 같은 가없는 깊이와 고독을 담고 있었다.
어부는 불쑥 입을 열었던 것처럼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암청색 맑은 바다 위로 낚싯대를 드리웠다.

천길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니

한 줄기 바람에 벌떡 일어서는
만경창파(萬頃蒼波)  고요한 밤
물이 차서 고기 아니 무나니
공연히 배 한 척만 띄웠구나
빈 배 가득 달빛만 싣고
노를 저어 돌아가니
어디서 들려오나 갈매기 소리

어부가 천천히 시를 읊으면서 낚싯대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줄이 팽팽해졌다.

어부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힘차게 줄을 당겼다.

그러나 고기가 제법 큰지 낚싯대가 활처럼 휠 뿐 고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어부는 낚싯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서 줄을 당겼다.

기력이 쇠진해서인지 더 당길 힘을 내지 못했다.
드넓은 바다,

세상에는 오로지 땀을 뻘뻘 흘리며 낚싯대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어부 한 사람뿐인 듯했다.

어부는 줄을 당겼다 풀었다 하며 고기가 지치기를 기다렸다.
아무도 감히 어부를 도울 생각을 내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낚싯대가 무겁게 아래로 가라앉았다.

찰나, 어부는 온 힘을 모아 줄을 획 당겼다.

바닷물이 힘차게 출렁거리며 어린애 몸통만한

옥돔 한 마리가 저문 햇살에 번득이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놈. 제법 힘이 좋구나.

하마트면 내게 네게 잡힐 뻔했구나."
어부는 손주의 엉덩이를 토닥이듯 옥돔의 몸통을 두어번 툭툭 쳤다.
"허허. 어부께서는 고기하고도 얘기를 나누시는군요.

도인이십니다."
화담이 기분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음날부터는 견디기가 훨씬 수월했다.

멀리 육지가 바라보여도 더 이상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았다.
시시각각으로 표정을 바꾸는 바다.

그저 물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토록 더디 흐르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겨우 바다를 느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전라우도에 이르렀다.

해남이 지척이었던 것이다.
어부는 해안만 보고도 어디 쯤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배는 날이 밝자마자 잡아올린 고기로 만선이 되었다.
멀리 해남 부두가 보였다.

수십 척의 고깃배들이 잔잔한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부두가 가까워오자 어부는 돛을 내리고 노를 저었다.

부두가 큰 탓일까,

고기 썩는 냄새며 갯냄새가 섞여 비릿한 내음이 진동했다.

악취라고 하기엔 살갑고,

그렇다고 해서 향그럽지도 않은 냄새였다.
닻을 내리자마자 어디선가 젊은 처녀가 치맛자락을 걷어붙인 채 달려왔다.

큰 키에 넓은 어깨며 튼튼한 발목이 날렵했다.

바닷바람을 받고 자란 탓인지 얼굴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해남에 두고 왔다는 어부의 딸인 듯했다.
처녀는 어부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씩 웃는 것으로 인사를 마쳤다.

처녀는 별 말도 없이 싱글싱글 웃으며 어부가 잡아올린 고기를

부산하게 함지에 담았다.
처녀는 고기를 담은 함지를 머리에 이고 왔던 길을 달려갔다.
어부는 그물을 정리하고 배를 단단히 묶은 후 지함 일행을 돌아보았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화담은 두 손을 맞잡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덕분에 외롭지 않게 왔소이다.

구경들 잘 하고 가시오.

이 또한 인연이겠지요."
일행은 아쉽게 뒤돌아섰다.
그때였다.
"여보시오들,"
어부도 역시 이별이 아쉬웠던 것일까.

어부의 목소리가 일행을 불러세웠다.
"화순 운주사엘 들러보시오.

거기서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쌓고 있는 이가 덕이 높다고 들었소."
"화순이라구요?"
"예서 이틀이면 갈 수 있습니다.

사연도 기구하니 유람하는 사람들이 찾을 만한 곳이오."
"그렇지 않아도 어디로 갈까 고심하던 참이었는데
좋은 곳을 일러주시니 고맙소이다.

부디 몸조심하시오."
화담이 어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때마침 어부의 딸이 빈 함지를 옆에 끼고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왜 이리 빨리 오느냐?"
뚝뚝한 어부의 말투는 딸에게라고 다르지 않았다.
"고기가 좋아서 비싸게 불렀는데도 금방 동이 났어요."
처녀는 전대를 꺼내 어부에게 속을 보였다.
"웬 돈이 이렇게 많으냐?"
"부르는 게 값이었는 걸요."
딸은 아직도 가쁜 숨을 헐떡이며 신바람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어부지 장사꾼이 아니다.

가서 제값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고 오너라."
어부의 음성은 별로 크지 않았다.

노기띤 음성도 아니었다.

그러자 딸은 큰 입술을 비쭉 내밀어 보이더니 이미 가버렸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부둣가는 생선을 사고 파는 사람들의 악다구니와
걸쭉한 농지거리로 왁자지껄했다.

청량한 오월의 햇살에 함지박에 수북히 담겨 있는 생선 비늘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대들은 아무래도 선생을 잘못 찾은 모양일세."
느닷없는 화담의 탄식에 지함과 박지화는 무슨 말인가 하여 귀를 세웠다.
"저 어부 양반이 나보다 훨씬 도에 가깝지 않은가.
내가 스승으로 모셔야 할 분일세."
자조의 말이었지만,

말과 달리 화담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어부가 권해준 대로 화순으로 가보세.

일찌기 그런 소문을 들어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터,

가보면 좋은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한낮의 해가 제법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