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재는 말 그대로 붉은 흙 투성이었다.
한양에서부터 숨가쁘게 걸어온 지함 일행이 황토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나절.
희미하게 남아 있던 몇 조각 노을마저 검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황토재는 그 어둠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제 붉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은 오십여 호쯤 되었다.
집집에서 풍겨나오는 구수한 쌀밥 냄새가 골목을 넘실거렸다.
마을 전체가 궁색하지 않은 살림살이를 꾸려 가고 있는 듯
집집마다 연기가 오르지 않는 집이 없었다.
여느 시골이라면 간신히 보리죽으로 때울 춘궁기인데도.
"안 진사라는 이가 제법 덕이 있는 모양이군요."
지함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걸 어찌 아는가?"
"보십시오.
집집마다 연기가 오르지 않는 굴뚝이 없고,
이밥냄새가 진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고향에 있을 때 농사짓는 이들과 가까이 지내본 적이 있습니다만
요즘이 가장 힘든 시기이지요.
제 고향은 바다가 가까이 있어 초근목피로 연명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고기를 잡아도 하루 두 끼를 채우기가 어려웠지요.
만석지기라면 이 동네 사람들 모두 안 진사의 땅을 빌어 부치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굶주리지 않는다면 안 진사의 덕이 높은 게지요."
"그럴 듯한 얘길세.
그렇다면 우리 같은 객들도 그냥 내치지는 않겠구만."
안 진사의 집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어귀의 성황당을 조금 지나자 단출한 농가들 사이에
그리 크지 않은 기와집이 들어서 있는 게 보였다.
사람을 위압하는 커다란 솟을대문 대신 드나들기 편한 작은 대문이 한쪽에 나 있고,
다른 쪽에는 수레가 드나들 수 있는 큰 사립이 있었다.
일행은 안 진사 집 대문을 두드렸다.
조금 전 지나온 부연 길마저 어느덧 어둠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고 있었다.
"뉘십니까?"
"이분은 전국을 유람중이신 송도의 화담 선생님일세.
안 진사께 그렇게 전하게나."
박지화가 화담을 가리키며 근엄하게 말했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노비의 말씨는 아주 유순했다.
몸가짐 또한 공손했다.
지함 일행이 노비가 안내해 준 방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어둠을 밟아오는 힘찬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안 진사였다.
"화담 선생님이시라구요?
산골에 묻혀 사는 한낱
이름 없는 선비올습니다만 선생님의 고명은 저도 익히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렇게 누추한 곳을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안 진사는 마흔서넛쯤 되어보였다.
둥그스름한 얼굴,
초승달 모양의 갸름한 눈.
위엄서린 선비의 모습이라기보다 들판의 농부처럼 소탈해 보였다.
각자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어느새 준비를 했는지 저녁상이 들어왔다.
보리며 조가 적지 않이 섞인 밥과 시래기국,
김치와 된장 찌개,
밑반찬 서너 가지에 자반 구이가 한 접시 올랐을 뿐
만석군 살림 치고는 간소한 상차림이었다.
여염집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시장기가 돈 지함과 박지화는 얼른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화담은 상을 받고도 먹을 생각을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선생님, 진지 잡수십시오."
박지화가 숟가락 쥔 손을 상 밑으로 내리면서 화담에게 말했다.
"아, 아닐세. 난 생각없네.
주막에서 마신 술이 아직 거나하구먼."
"술도 안 드셨잖습니까?"
"향이 좋으면 향기로 마실 수도 있는 게지."
"선생님, 도력이 높으면 허기도 지지 않게 됩니까?
저는 아무리 애를 써도 배고픈 것은 이겨내기 힘듭니다."
"맛있게 들게.
난 그저 냄새만 맡아도 배가 부르이.
어서 들게나."
화담이 뒤로 물러나 앉으면서 말했다.
그제서야 지함과 박지화는 안 진사가 내어온 저녁을 들었다.
"안 진사께서는 전답(田畓) 말고도 하시는 일이 또 있습니까?"
화담이 안 진사에게 물었다.
"만석군이라는 소문을 들으신 모양입니다그려.
사람들이란 원래 남의 살림을 부풀리기 좋아하는 법입니다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함이 단단히 흥미를 느낀 듯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든 채로 안 진사에게 물었다.
"그렇지만 미륵뜰이 모두 진사님의 손에 있다 한들 수천 석에 지나지 않을 텐데요?"
"그렇소. 난 장사를 합니다."
"장사요? 양반이?"
입 안 가득히 밥을 문 박지화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논에서야 고작 몇 천 석을 수확할 뿐이지요.
장사로 얻는 이익이 농사로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큽니다.
그 때문에 이 근동 양반가에서는 저를 상종 못할 상놈으로 제쳐놓았습니다마는…"
"장사를 하더라도 그만한 이익을 남기기가 쉽지 않을 텐데 무슨 장사를 하시지요?"
장사라면 지함도 일가견이 있었다.
어머니 무덤 앞에 방죽을 쌓은 돈도 어린 나이에 소금장사를 해서 벌어들인 것이었고,
화담 산방에 갈 여비도 남대문 저자에서 나막신을 팔아 마련한 것이었다.
"장사란 결국 유통(流通)이지요.
이쪽에서는 많이 나고 저쪽에서는 안 나는 걸 이리저리 옮겨 이득을 취하는 것이 장사입니다.
장사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고,
저는 그리 큰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던하기만 해 보이던 안 진사의 선한 눈빛이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처럼 힘차게 일어서고 있었다.
"제가 하는 일은 고작해야 이곳 용인에서 나는 물산을 제 때에 사들여 저장했다가
철이 지난 후에 파는 일이지요.
이곳 땅이 온통 차진 황토라서 땅굴을 파면 제법 좋은 창고가 된답니다."
그건 바로 지함이 나막신을 팔 때 써먹었던 수법과 비슷했다.
일시적인 매점(買占)을 넘어서서,
제 철에 사 두어 저장했다가 철 지나 팔면 더 큰 이득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반농반상(半農半商)의 안 진사가 만석군이 된 비결이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물산(物産)은 우리나라에서 소비됩니다.
왜국에서 넘어오는 물산이 가끔 남쪽 부두에 닿는다고 하지만 소량이고,
명에서 건너오는 것도 보석이나 책자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쓰는 물산은 조선에서 나는 것으로 충당해야 합니다.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이 땅 안에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치로 물산을 골고루 분배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륙에 사는 백성들은 소금 한 말 사기가 하늘의 별따기이고,
이천에서 나는 도자기는 함경도나 경상도까지 골고루 미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막힌 상로(商路)를 잘 뚫어 놓으면 부르는 게 값이 정도로
높은 물건값을 낮출 수 있습니다.
저는 장차 큰 유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사는 천민이나 가난하고 무식한 양민이 할 일이라는
양반들의 생각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곡식은 농부들의 피땀없이 저절로 자라지 않으며,
생산되는 물산을 방방곡곡 옮기지 않으면
나라 살림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습니다.
나라도 임금도 살림이 잘 되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살림은 나라의 핏줄이올시다.
피가 돌지 않으면 사람이 죽고,
나라의 경제가 막혀 있으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집니다.
저는 여기 황토재를 전국의 물산이 들어오고 나가는 심장부로 만들 것입니다."
스쳐듣고 지나갈 만한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참으로 대단한 포부였다.
지함은 안 진사의 말에 공감했다.
당시 조선에는 물산 지역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현 안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조선의 군현(郡縣) 제도란 군현마다 자급자족하는 독자적인 경제 단위였으며
생활도 마찬가지로 제약되어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상황에서 공물(貢物), 진상(進上)도 자체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산간 지역에 자리잡은 군현에서도 해산물을 구할 수 있도록
바다까지 길다랗게 경계를 지어주기도 했고,
바다 쪽에 자리잡은 군현에는 토산물을 얻을 수 있도록
내륙까지 길게 경계를 이어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군현을 관장하는 수령이 물산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무능하면 자원을 개발하지도 못한 채 사장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현마다 잘 되는 곡식이 다르고 나는 물산이 다른데도
다른 현과 유통할 수 있는 길이 꽉 막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유한 현은 더 넉넉해지고 가난한 현은
어쩔 도리 없이 나날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연 유민(流民)이 생겨났다.
이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현에 가서도
제대로 붙박고 살 수 없었다.
그러니 자기 현을 떠난 이들은 이 현 저 현 떠돌아다니면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현과 현 사이에 관의 이름으로 물산을 교류할 수는 없었지만
장사꾼이 물건을 사거나 파는 것은 규제하지 않았다.
즉 소시(小市)는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허용되었지만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상행위,
즉 대시(大市)는 조정에서 직접 감독하고 통제하였다.
그래서 한양에서는 대규모 상가인 운종가(雲從街)를 두고 아흔한 개의 상점을 세웠다.
이들 상점에서 나오는 이익은 나라와 반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상점들에게도 한 가지 품목만 지정해주고 그 이상은 팔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대시는 평양, 송도 같은 데에나 몇 개 있을 뿐
작은 군현에는 소시밖에 없었다.
이같이 유통의 제한은 여기저기에서 부작용을 일으켰다.
안 진사는 그 틈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 진사.
말씀이야 어떻든 결국 안 진사는 매점매석(買占買惜)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것 아니오?
백성의 주머니를 털어서 얻은 재물은 아무리 많이 모은다고 한들,
결국은 백성들에게 빚을 지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화담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듣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비난으로 들을 수도 있을 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안 진사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에 차 있었다.
"그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몇 백 석, 몇 천 석 한다는 부자 치고
백성의 피땀을 훔치지 않은 자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어쩌면 양반, 상놈을 가르는 제도부터가
이미 양반의 도둑질을 눈감아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안 진사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화담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박지화는 곁에 들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안 진사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세상이 불평등한 바에야 저 역시 그걸 이용해서 돈을 벌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양반들은 양반이랍시고 제 몸은 하나도 놀리지 않고
그저 걷어들이고 있지만,
저는 그래도 제 수족을 움직여 벌어들이는 겁니다.
미륵뜰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 근동에서 제 땅을 빌려 농사짓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허나, 적어도 저는 그 사람들에게
하루 세 끼 밥은 건너뛰지 않도록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한테 도적이라고 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겠지만,
어쨌든 다른 도둑보다는 양심적이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뭐라 하실 말씀이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도둑질을 통해 돈을 벌어 굶주리는 백성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제 말이 틀렸다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화담은 아무 말없이 안 진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화담으로서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 물음일 터였다.
어딘지 불편한 기색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화담의 기분을 눈치 챘는지 안 진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로(遠路)에 피로하실 텐데 제가 그만 눈치없이 눌러앉았나 봅니다.
편히 쉬십시오."
화담은 안 진사를 붙잡지 않았다. 그
러나 지함은 안 진사의 뒤를 따라나섰다.
"결례가 안 된다면 창고 구경을 하고 싶습니다."
"결례랄 게 뭐 있겠소. 따라 오시지요."
어두운 달빛을 밟으며 안 진사는 후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널찍한 마당 끝에 높지 않은 언덕이 있었다.
그 언덕 아래에 창고가 있었다.
창고 앞에서 체구가 큼직한 장정 서넛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잡담을 주고 받다가
안 진사를 보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열게."
철커덕.
차가운 쇳소리가 긴 통로를 통해 메아리쳤다.
오래도록 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니 창고가 꽤 깊은 모양이었다.
"횃불을 이리 주게."
안 진사는 그리 큰 키가 아니었다.
그러나 횃불을 들고 앞장 선 안 진사의 모습은
준마를 타고 들판을 달리는 장수처럼 듬직해 보였다.
가운데에 웬만한 마차가 들락거릴 수 있을 만한 통로가 뚫려 있고
그 양쪽으로 창고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창고는 땅 속으로 점점 깊어 갔다.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파고들었다.
쌀을 가득 재놓은 큰 창고를 몇 개 지났다.
몇 가마니나 되는지 셀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쪽은 마늘과 인삼이라오.
용인의 특산물이지요.
마늘과 인삼은 보관이 간편하고 값이 비싸서 몇 배 이득이 남는다오."
지함은,
입술과 눈썹을 잔뜩 휘며 웃고 있는 안 진사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대단한 배짱과 자신감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장사꾼 집안도 아닌 양반 출신.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무릅쓰고 이만한 장사를 하려면
안 진사의 말마따나 경제의 흐름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화담을 찾아가기 위해 나막신을 팔았던
지함의 수단이야 초보적 잔재주에 불과했다.
"이쪽을 보시겠습니까? 감과 사과, 배라오.
저것들은 보관하기가 어렵다오.
내 나름대로 이런저런 시험을 해보았지만 신통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요.
그래도 부잣집 제사에 오를 만큼은 남는다오.
부잣집을 노리고 하는 것이니 이윤이 제일 많지요.
내 장사 중에 쌀을 빼고는 헐벗은 백성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는 거의 없다오.
이렇게 생각하며 나를 위로하고 있지요."
이야기를 주고 받을수록 지함은 안 진사의 깊이에 빠져들었다.
"이 창고를 짓는 데만도 돈이 엄청나게 들었다오.
지금은 이 창고 덕분에 몇 배 더 벌어들이긴 하지만…
이 선비라고 하셨소? 한 잔 더 하시겠소?"
"좋습니다."
두 사람은 창고에서 나와 사랑채로 건너갔다.
좀 전에 저녁상을 받았을 때 만석꾼 살림치고는 너무 조촐하다 싶었는데
사랑의 세간살이 역시 여느 선비들의 방과 다를 바 없이 질박했다.
불도 많이 지피지 않았는지 방안에 기분좋을 만큼 서늘한 기가 흐르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난초 치듯이 보리며 벼를 친 그림이 몇 장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선이 복잡하게 그어져 있는 그림이 섞여 있었다.
"이게 뭡니까?"
"아, 감과 사과, 배를 제대로 보관할 수 있을까 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설계를 해보던 중이오."
무슨 말인지 선뜻 와 닿질 않았다.
지함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자 안 진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해가 안 되실 게요.
몇 년 동안 물산을 저장하다 보니 품종마다
다 제 나름의 온도와 습기가 있어야 보관이 잘 되더군요.
그것을 알아내고 그에 맞는 환경을 만들어 주느라 숱하게 썩히기도 했지요.
땅을 깊이 파면 습기와 온도가 달라지지 않겠소?
혹 더 서늘하면 감을 제대로 보관할까 해서 창고를 더 파들어가려고 했던 거지요."
그제야 지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뜯어봐도 서글서글한 농사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안 진사가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진사 어른께서 그처럼 우리나라 물산의 흐름을 훤히 꿰뚫고 있으니 배울 바가 많습니다.
또한 과실 하나하나에도 그 기가 어떠한지 파악하고 계신 것도 놀랍습니다.
저도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궁리를 많이 해 보았습니다만
어르신의 높은 생각에는 미칠 바가 못 됩니다."
"이 선비께서는 벼슬을 안하실 생각이시오?"
안 진사는 자기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지함에게 호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벼슬 생각은 버린 지 오래입니다.
집안 대대로 가문의 체통이 서서 제 조카와 아들까지 부지런히
학문을 닦는 터이기는 하나 저는 뜻을 버렸습니다.
저의 형님도 지방 군수를 끝으로 모든 관직을 떠나 홀홀히 사시기로 하였습니다."
"허허.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나 여기도 은자 한 분이 나셨구만.
나도 진사에 합격은 했으나 벼슬에 오를 뜻은 버렸소.
그리고 양반들은 천한 짓이라고 손을 내젓는 장사에 뜻을 세웠지요.
그런데 이 선비께서는 무엇에 뜻을 세우셨소?"
지함은 그저 안개처럼 희미한 미소를 피워올릴 뿐이었다.
자신이 무엇에 뜻을 세웠는지,
너무나도 분명한 안 진사의 야망 앞에 서자
갑자기 생각조차 나질 않았다.
더구나 한때는 대과에,
그것도 장원 급제한 적이 있었다는 이력조차 무색해졌다.
"허허.
화담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셨다면 세운 뜻이 무엇인지 짐작하겠소.
그런데 학문을 하는 사람이 장사에는 왜 그리 관심이 많소?"
"학문이라는 게 대체 뭐겠습니까?
사람들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게 학문 아니겠습니까?
제가 경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주변에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진사 어른의 말씀을 듣고 나니 놀라운 점도 많습니다만,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군요."
"의문이라니요?"
"일단 물산의 흐름이 막혀 있는데서 오는 폐단은 저도 인정을 합니다.
그러니 그 물길을 터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셨지요?"
"그렇소."
"지금까지 말씀을 듣자니 진사 어른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장사를 하시는 건 아닌 듯합니다.
장사를,
이 세상의 잘못을 뜯어고치는 방책의 하나로 생각하신 듯합니다.
그렇다면 진사 어른께서는 우리 백성들이 굶주리는 까닭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안 진사는 별로 길지도 않은 턱수염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그의 작은 눈이 장난감을 앞에 둔 아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세상 일이란 학문처럼 단순하고 명백한 것이 아니오.
모든 것이 뒤섞여서
나같이 미천한 사람의 눈으로 원인을 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나도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해 봤소만,
내 생각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자신이 없다오.
이런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양반이란 사람들은
풍병 난 노인네처럼 몸을 떨면서 도망치기 바쁩디다.
내 얘기를 한 번 들어보시겠소?"
화담과 함께 마신 술도 제법 됐건만 안 진사는 거침없이 잔을 들이켰다.
그러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지함이야 지난 날 북창 정염한테서 도가 수련을 받았으니 그렇다 쳐도,
안 진사는 타고난 술꾼인 모양이었다.
지함의 질문을 알아듣지 못했을 리 없는데
수염 위로 흘러내린 술 방울을 툭툭 털어낸 안 진사는
뜻밖에도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안 진사의 이름은 명진.
황토재에 몇 대째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함양 안씨 집안의 종손이었다.
말이 양반이지 안 진사가 향시에서 진사가 된 것만도
집안의 커다란 경사일 만큼 벼슬길에는 올라보지도 못한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핏줄은 어쩔 수 없었는지 향시에 몇번 응시를 했던 모양이나
생원시(生員試)에 겨우 합격한 것이 고작이었다.
벼슬에 대한 꿈을 이루지 못한 그의 아버지가 매달린 것은 땅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몇 백 석 살림에 그악스럽게 매달린 아버지는
땅을 늘리는 데도 억척이었다.
보릿고개만 되면 창고에 있는 쌀을 꺼내어 농민들에게 돌리는 게 일이었다.
그래 놓고는 가을이면 5부도 넘는 고리와 함께 원금을 거두어들였던 것이다.
갚을 재주가 없어 뵈는 집에서는 땅 문서를 빼앗아 왔다.
땅이 없는 집에서는 기둥뿌리를 뽑아와 집칸을 늘려가는 데 썼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기둥과 서까래의 아귀가 제대로 맞지 않아
구멍이 숭숭 나 있는 방이며 창고가 해마다 늘어갔다.
철이 들면서부터 어린 명진이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진달래 꽃이 무성하게 피어나고 두견새 울음이 애간장을 끊을 무렵이면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보릿고개 때만 되면 소작인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와 쌀을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들에게 대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밤이 새도록 대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어느 해던가, 흉년이 들어 미륵뜰의 절반도 건지지 못했던 해였다.
어느 여인이 점심 나절부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아이에게 먹일 젖이 말라서 그러니 밥 한 술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밤새워 문을 두드리던 사이에
여자의 품에 안겨 있던 젖먹이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 때문에 실성을 한 여자는 그 후로 매년 두견새 울음과 함께 그의 집을 찾아오곤 했다.
한 번 오면 밤이고 낮이고 아이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며 집을 빙빙 맴돌았다.
명진은 그 질기디 질긴 울음소리와 함께 봄을 맞고 나이를 먹어갔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올라야 한다.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지."
아버지는 늘 이렇게 명진을 다그쳤다.
그의 집에 대대로 내려오는 상제라는 종이 있었다.
상제가 하는 일은 주로 농기구며 온갖 연장들을 만들고 고치는 일이었다.
어린 명진은 하루 종일 상제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상제는 일을 할 때면 곁에 명진이 있는 줄도 모를 만큼 열중했다.
그러다가 간혹 허리를 펴서 곧 눈물이 터질 듯이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도련님, 엊저녁에 그 소리 들으셨는가요?"
어느 날,
여느 때같이 일을 하다 말고 하늘을 한참 동안 올려다본 상제가 명진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
명진은 상제 옆에서 작은 막대기를 깎아 꼬챙이를 만들며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명진은 상제가 무엇을 묻는 건지 번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웬지 그 말에 냉큼 대답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 여자가 또 왔었구만요.
밤새도록 죽은 아이 이름을 부르지 않던가요?"
명진은 민망해서 먼산을 바라보았다.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산에는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도련님은 잠이 깊이 들었던가 보네요.
저는 그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명진이라고 못들었을 리 없었다.
가슴을 후벼파는 여인네의 울부짖음으로 명진도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이제 겨우 열 살,
소학을 얼마 전에 끝낸 명진의 얕은 생각으로도
부모를 나쁘다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여자의 울부짖음이나 상제의 슬픈 목소리는 듣기가 싫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자꾸만 아버지가 나쁜 사람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도련님은 모르실 거구만요.
이런 부자집에서 양반님네 외동 아들로 태어났으니 아실 리가 없겠지요.
저는 그 여자만 생각하면 일손이 잡히질 않아요.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찬 바람이 솔솔 부는구만요.
세상에 제 자식을 굶겨죽인 어미 마음이 오죽하겠어요.
사람 사는 게 뭔지…
저도 착하게 살면 다음 세상에는 도련님처럼 복을 타고 태어날까요?"
그때 명진은 일부러 상제의 말을 피해 딴 얘기만 했다.
명진은 하루종일 시늉으로만 글을 읽고 있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면 상제한테 달려가곤 했다.
상제가 들일을 하러 미륵뜰에 나가 있을 때면 명진도 그리로 갔다.
겉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일을 하는 상제의 비쩍 마른 등 위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뭔지 알 수 없는 슬픔이 명진의 가슴을 울리곤 했다.
손재주가 좋은 상제는 노래에도 제법 소질이 있었다.
상제의 목소리는 원래 처량한 봄비처럼 추적추적했다.
그러나 노래가락을 뽑을 때면 봄바람에 휘날리는 수양버들가지처럼 낭창거렸다.
그러다가 홍수로 불어난 강물처럼 거칠고 요란하게 넘실거리기도 했다.
찐득 찐득 찐득아
무얼 먹고 살았나
오뉴월 염천(炎天)에
쇠부랄 밑에
디룽대룽 달렸다가
길 가는 행인(行人)이
찔끔 밟아서
꺼먼 피가 찔끔 났다네.
울뚝 불뚝 이 머슴아
무얼 먹고 살았나
양반 구멍 똥구멍에
늘어 붙어서
방귀 뿡뿡 뀔 때마다
땅바닥을 뒤져뒤져
이러구러 한 세상
이내 목숨 끈질기네
피를 발라 눈물 발라
방아 찧고 까불러서
누구 입에 드나 보자
천석 만석 밥도 짓고 떡도 찧어
대감 먹고, 마님 먹고, 도련님 먹고
사또 입엔 백 석이오,
이방 입엔 오십 석,
서생(鼠生) 입엔 열 석이오
이내 목숨 질긴 목숨
머슴 입엔 빈 됫박
명진은 논두렁에 앉아 상제의 노래를 들었다.
상제의 노래를 들을 때면 명진은 자신이 양반의 자식이 아니라
천민의 자식인 듯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장가갈 나이가 되도록 명진의 공부는 진전이 없었다.
마침내 그의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때마침 나귀를 타고 찾아온 손님에게 거래를 청했다.
멀리 경상도 안동에 사는 친척이었는데,
그에게 상제를 팔아버린 것이다.
명진네가 상제를 내주고 대신 받은 것은 비쩍 마른 나귀 한 마리였다.
상제가 나귀 한 마리와 맞바뀌어 팔려간 것이다.
"저 녀석이 일도 잘하고 심성도 발라서 데리고 있으면 제 밥벌이는 할 것이오."
"아무리, 그래도 일 잘 하는 나귀 만할까?"
"내 아들놈 공부 좀 시키려면 떼어놓아야 합니다.
말 못하는 나귀 한 마리가 더 필요하지,
말하는 나귀는 필요 없습니다."
그 친척에게 아버지는 떠맡기다시피 해서 상제를 팔아버렸다.
빈 몸으로 떠나는 상제에게 아버지는 여비 한 푼 보태주지 않았다.
상제는 다 해진 가외옷 한 벌과 부엌일 하는 계집종이
아버지 몰래 싸준 주먹밥 한 덩어리를 고이 짊어지고 집을 떠났다.
"안돼. 가지 마."
명진이 비가 내리는 마당으로 내려서서 상제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어느새 아버지의 손이 명진의 목덜미에 척 달라붙었다.
"어서 가거라. 이제 네 주인은 내가 아니다."
아버지는 상제를 매정하게 떠밀었다.
명진은 힘없이 돌아섰다.
"아버지, 그깐 나귀가 뭐라고 사람을 나귀 한 마리에 파는 것이옵니까?
예? 아버지."
명진이 울음을 터뜨렸지만 아버지는 눈 하나 꿈쩍 않고
팔린 마소를 돌아보듯 떠나가는 상제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들썩거리는 명진의 어깨를 꽉 눌렀다.
그 무게를 명진은 먼 훗날까지도 잊지 못했다.
상제는 빗물이 질척하게 고여 있는 마당에 그대로 주저앉아
명진에게 큰 절을 올렸다.
"도련님, 이제는 맘 잡고 과거 공부를 하세요.
도련님 혼자 우리 같은 미천한 것들을 귀히 여겨주신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구만요.
세상이 그리 돼 있는 걸 어찌 하겠습니까?
멀리서라도 도련님이 과거에 급제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안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물림종 상제가 눈물을 뿌리며 명진에게서 떠나갔다.
상제가 팔려간 뒤로 명진은 기운을 잃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람을 나귀 한 마리에 팔다니,
명진은 그 생각만 나면 몸서리를 쳤다.
그런데도 상제가 떠나가면서 한 말이 명진의 머리 속에 남아
윙윙거렸다.
혼자 기를 써봐야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던
상제의 말이 명진을 깊은 절망에 빠트렸다.
하기야 명진이 특별히 이런 세상을 바꿔야 한다든지,
어떻게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제 같은 사람과 아버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 답답했을 뿐이었다.
상제가 떠난 뒤 명진은 몇 해가 가도록 마음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잘 하지도 못하던 술을 가까이 했다.
달빛이 밝으면 달빛이 좋아서,
가을비가 내리면 비에 젖어서,
살구꽃이 흩날리면 꽃에 취해서.
명진은 아버지가 꾸짖는 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늘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명진이 진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중풍으로 누운 늙은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되든 안 되든 죽기 전에 과거라도 한번 봐주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아버지의 청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명진은 스물이 넘어서야 수원에서 열리는 향시를 보러갔다.
거리에는 어디나 상제같이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로 붐볐다.
명진은 팔달문 부근의 허름한 객주집에 들었다.
명진은 독방을 청하지 않고 봉놋방에 짐을 풀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고 있을 때 장사꾼인 듯 싶은 패거리가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이봐, 김 가야.
난 아주 폭삭했는데,
자넨 어떤가?"
"난 운이 좋았다네.
진천에서 지고 온 대추 닷 말을 곱절로 이문을 남겼지.
이것 보게."
김 가라는 장사꾼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전대를 풀어보였다.
그는 한차례 빙 돌리면서 전대를 내 보이고는 이내 허리춤에 매달았다.
"자넨 왜 폭삭했다는 건가?"
"젠장,
내가 잉어 한 이십여 마리를 이고지고 오지 않았겠는가.
제기랄,
수원에는 잉어가 왜 그리 흔해 빠졌는지…"
"그걸 몰랐나?
여기서 한양이 멀지 않으니 진상하는 잉어를 모두 여기서 기른다네.
그래야 죽지 않은 싱싱한 잉어를 대궐까지 갖다바칠 것 아닌가.
그러니 이곳에 잉어를 기르는 양어장이 흔할 수밖에.
쯧쯧쯧."
"하이고, 내가 그걸 무슨 재주로 알았것는가.
우리 공주에서는 금싸라기보다 더 귀한 것이라서 응당 여기도 그러려니 하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 모아서 스무 마리나 샀는데…
여기쯤 오면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으려니 했건만…
잉어가 다 죽어가서 헐값에라도 팔아야 하는데…
애고 아까워라."
장사꾼들은 국밥을 앞에 놓고 후루룩 마셔대며 손해본 사연,
횡재한 사연을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명진은 장사꾼들이 하는 얘기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여기저기 고을 이름이 튀어나오고,
그때마다 특산물 이름이 나왔다.
뭐는 어디가 비싸고,
어디에서는 싸다는 얘기가 거침없이 줄줄 나왔다.
다음날 명진은 저자로 나가 보았다.
엊저녁 장사꾼들의 얘기에 흥미가 당긴 때문이었다.
코 앞에 닥친 향시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명진은 시장을
꼼꼼하게 훑고 다녔다.
그리고 이것저것 가격이며 산지 따위를 물어보았다.
워낙 물건값에 어두워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명진은 모든 게 흥미로웠다.
마늘이나 인삼 따위의 값이 용인이나 안성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물산들은 대부분 장사꾼들이 등에 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진은 달구지를 써서 대규모로 옮긴다면
웬만한 논 농사보다 나을 성싶었다.
게다가 저자의 물건이라는 것이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
전국의 산지와 물산을 파악하고 물량을 잘 조절한다면
얼마든지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진은 그때 처음으로 세상이 크긴 크다는 생각을 했다.
용인에 살면서는 흉년이면 흉년인가 보다 해서
덜 먹고 덜 쓰는 수밖에 없었다.
내 고장이 흉년이면 온 세상이 다 흉년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풍년이 들 때도 명진네는 그저 날이면 날마다 먹어 없애느라고 애를 썼고,
그래도 남아 썩을 것 같으면 장사꾼을 불러 헐값에라도 팔거나
빈민 구휼이랍시고 소작 부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장사꾼들의 얘기로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지방에서는 어느 작물이 흉작인데 어디에서는 풍작이었다.
고장마다 사정이 영 다른 것이었다.
명진은 그 넓은 세상의 여러 물산을 헤아려보았다.
모자란 건 많은 데서 가져오고,
많은 것은 모자란 데로 보낼 수가 있지 않은가.
그 일을 누가 할 것인가.
그렇게 큰일을 봇짐장수들에게 맡길 수야 없지 않은가.
그때 명진은 처음으로 장사를 해야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과거를 어떻게 치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명진은 장사에만 정신을 쏟다가 용인으로 돌아왔다.
명진은 용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용인의 특산물과,
생활에 꼭 필요하지만 용인에서는 나지 않는 것들,
즉 소금이나 생선 같은 것들을 조사하고 다녔다.
물론 아버지는 명진이 용인의 선비들과 어울려 시나 읊으러 다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일 년 동안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러고 다니면서 명진은 이들 내륙 지방의 소금값이 턱없이 비싸고,
또 한양에서는 몇 배나 비싼 값에 팔리는 마늘이나 인삼이
용인에서는 헐값에 팔려
농사짓는 사람들이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때마침 아버지가 오랜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혈육으로서 슬프지 않을 리야 없었다.
그렇지만 덕분에 명진은 오래도록 생각만 해오던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시작은 그런 뜻으로 했소만 결국은 내 주머니를 채운 꼴이 되고 말았소이다."
안 진사는 자신의 긴 이야기를 마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지함은 안 진사가 결코 자기 주머니만 채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건 동네에 들어오면서 본 마을의 상(象)에서 이미 알아차린 일이었다.
"어쩌면 그때 생각보다 더 큰 것을 보신 것이 아닌가요?"
지함은 두 손으로 안 진사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침침한 방 안 가득 그윽한 술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안 진사는 껄껄 웃으며 지함의 잔을 받아 들었다.
깊은 뱃속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안 진사의 독특한
웃음소리는 생긴 모습처럼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구려.
더 큰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새롭게 깨달은 것은 있소.
상제 그이의 말대로였소.
나 혼자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그토록 온화하던 눈빛이 어쩌면 이렇게 일순간에
매서워질 수 있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안 진사의 눈빛은 가을밤 막 떠오른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좀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게 되었소.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생각이오.
처음에는 장사를 때려치우고 한양으로 가서
성균관을 들어가든지 대과를 볼까 생각도 했지요.
그러나 차츰 장사의 폭을 넓히면서 세상을 바꾸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를 휘어잡는 것이란 생각이 듭디다.
이건 아직도 먼 훗날의 가정일 테지만 한번 생각해 보시오.
상놈들이 돈을 두둑히 번다면 어찌 되겠소.
상놈들이 양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양반이 무서워서가 아니오.
목숨줄이 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양반들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부쳐 먹을 땅을 한 뼘도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아무도 양반을 대접하지 않게 될 것이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위에서 세상을 개혁하려 하지만
나는 아래서부터 바꾸기로 한 것이지요."
"세상이 바뀌리라 믿으십니까?"
그건 안 진사에게만 묻는 말이 아니라 지함 자신에게도 묻는 말이었다.
화담 계곡에서 막막한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지함은 알지 못할 힘에 짓눌렸다.
그리고 인간의 왜소함에 끝없이 좌절하곤 했다.
한 인간의 힘으로 과연 이 복잡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인가?
저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개나 소와 다를 바 없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인간이 이 거대한 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그것이 진정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러는 이 선비는 왜 벼슬을 마다하고 떠돌고 있습니까?"
"제 견문이 얕은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은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벼슬을 마다하는 것은 그것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지요."
"나는 믿소.
언젠가 이 세상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오.
보시오. 세상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지 않소?
고작해야 육십 년을 채우지 못하는 인간의 눈에는 그 변화가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나,
물이 끊임없이 흐르듯 인간 세상도 변하고 있소."
"어떻게 변한단 말씀입니까?"
"보시오.
고려 왕조도 조선 왕조도 마치 자신들이 세상을 바꿔온 양 얘기하오.
그러나 왕조가 대체 세상의 변화에 무슨 일을 했소?
권력을 잡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을 뿐이오.
왕조는 바뀌어도 백성들이 살아가는 꼴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소."
환청일까.
지함의 귀에 명세의 음성이 낭랑히 들려오고 있었다.
"보게나.
왕조는 바뀌었어도 백성들은 똑같이 살아가고 있네.
그래서 사관은 왕에게가 아니라 백성 앞에 진실을 기록해야 하는 법일세."
지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온화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안 진사와 그윽한 술향기,
어느 틈으론지 새어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불빛뿐이었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아렷한 추억이 봄볕 물들은
먼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피어올랐다.
명세, 민이…
가슴을 쥐어뜯던 처절한 고통도
이제는 아련해지고 남은 건 막막한 그리움뿐이었다.
이렇게 세월은 흘러가는가.
남은 사람은 또 남겨진 대로 흘러가는가.
봄밤의 정취 탓일까,
가슴이 미어질 듯 온갖 상념이 지함의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백성들이 살아가는 이치가 뭐겠소?
모든 고통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오.
백성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첫번째 일이오."
지함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 진사의 열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고집 센 안명세나,
안 진사 모두 같은 안씨였다.
지함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눈 앞에 아른거리는 민이의 고집 센 얼굴을 털어버리기 위함이었다.
안진사는 몇 시간째 술을 마시면서도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고 갈수록 열변을 토했다.
지함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새삼스레 여몄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외다.
허나 의심하진 않소.
전국 방방곡곡 내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거외다.
발이 부르트도록 천지를 뛰어다니면서 물산의 흐름을 살피고
지역마다 다른 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있소이다.
내 두 눈으로 보고,
내 두 발로 직접 뛰면서 생긴 믿음이오.
전국 유람을 하는 중이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사람들,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기 위해서지요."
"그렇다면 사람들만을 보아서는 안될 것이오.
그들이 무엇을 먹고 입고 살아가는지,
경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시오.
금산에서 인삼이 나고,
한산의 모시가 유명하고,
전주에서는 한지가 많이 나오.
이천에서는 좋은 도자기가 많이 나고,
강진에서는 백자가 나지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저절로 나는 것이 아니라 땅을 보아 나는 것이오.
물산도 이럴진대 사람인들 안 그렇겠소?
그 땅을 보면 인물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거기에 아마도 이 선비가 찾는 답이 있을 거외다."
어느새 부옇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하인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마당을 오고가는 자잘한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두 사람이 모이면 그 중 하나는 스승이라고 했다.
비록 술자리이긴 했지만 지함은 안 진사와 나눈 대화가
화담의 강의를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지함은 안 진사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진사 어른 덕분에 궁금증이 많이 풀렸습니다.
그러면 진사 어른은 앞으로 무엇을 하실 생각이신지요?"
"한잔 더 드시겠소이까?"
지함이 잔을 내밀자 바닥이 난 술병을 완전히 기울여 술잔을 채우며 안 진사는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농사 기술을 더 익히려고 하오.
장사를 시작한 지 벌써 십여 년이 가까워오지만 장사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배운 것일 뿐이오."
웬일인지 말끝에 안 진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도 잔뜩 근심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왜 수심이 있어 보이십니다."
"해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해보지도 못하는 게 아닌가 싶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본시 양반이란 것들이 제대로 학식이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나마도 없을 땐 남의 험담 늘어놓는 것으로 소일하지 않소?
내 장사를 시작할 때부터 말이 많았지요.
그때야 뒷전으로 흘려버리고 말았지만 만석지기나 한다는 말이 나돌고부터는
사정이 좀 심각해졌소.
시기 정도가 아니라 모함이 따르기 시작하니까요."
기우만은 아닐 터였다.
세상살이란 어찌 이리 원칙이 없다는 말인가.
진실을 말하는 자가 죽음을 당하고,
백성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자가 무시당하거나 모함을 당하는 세상.
이런데도 사람들은 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 지함 자신부터.
"이제 물러가 봐야겠습니다.
진사 어른도 잠시 눈을 붙이셔야지요.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별 말씀을.
촌에서 늘 적적하게 지냈는데 이렇게 말이 통하는 이 선비를 만났으니
외려 내가 감사해야지요.
내가 너무 말이 많았나 보오.
이해하시구려.
먼 길에 피곤한 사람을 붙들고 실례가 많았소이다."
뜨락으로 내려서자 서늘한 새벽 기운에 조금씩 달아오른 취기가 일시에 사라졌다.
어둠이 가시고 여명이 깃들고 있었다.
지함은 갑자기 바다가 그리워졌다.
홍성현에 있을 때는 신새벽을 달려 바다를 보러가곤 했었다.
기실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민이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었지만.
바다를 보지 못한 것이 벌써 언제 적부터인가.
짙은 새벽 안개가 걷혀가는 잔잔한 바다,
늘 차분하던 정휴의 얼굴,
이제는 곁을 떠나버린 명세와 민이…
그리운 얼굴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지금껏 얘기를 나눈 겐가?"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화담이었다.
낯선 곳이라 잠에서 일찍 깬 모양이었다.
"벌써 기침하셨습니까?
편히 주무셨는지요?"
지함은 화담에게 아침 인사를 올렸다.
"안개가 자욱한 걸 보니 날씨가 좋을 모양일세.
이런 날은 봄이 달음박질로 오겠구만."
"새벽 공기에서도 제법 봄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 나와 함께 동리 구경을 하지 않겠나?"
"예."
두 사람은 안 진사의 집을 벗어나 소작인들이 사는 마을로 걸어나갔다.
"이곳엔 수기(水氣)가 많은 모양이구만."
"강도 없고 시내도 변변치 않던데요."
"보게나. 안개가 유독 진하지 않은가?
수기가 많은 곳에서는 안개도 짙은 법이지."
성황당에 걸린 만장이 칙칙하게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절을 하고 있었다.
"쯧쯧. 절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다구…
나무도 인간도 모두 기의 모임일 뿐,
그 무엇도 인간의 짐을 대신 덜어주지는 않는다네.
모두가 헛된 바람이지."
"그러나 선생님.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고통을 덜게 된다면
그 또한 고달픈 백성에겐 고마운 일 아니겠습니까?"
"마음의 고통을 던다는 게 뭔가?
임시 방편일 뿐 아닌가?
도의 흐름을 스스로 감지할 수 있을 때,
인간이 우주 만물과 하나임을 알아차릴 때,
그때에서야 비로소 온갖 고통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일세.
그렇지 않는 한 모든 것이 헛되고 고통스러울 뿐이지."
지함은 입을 다물었다.
가슴 속에선 뭔가 끓어오르는데 표현할 길이 없었다.
언제 적부터인가 지함은 화담의 이런 태도가 불만스러웠다.
화담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먹고 마시고 화내고 웃고 사는
인간의 삶이 대체 무엇인지,
기가 무엇인지 더 애매해지는 것이었다.
도건 기건 인간의 사소한 삶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든 것을 접어둔,
그것을 외면하고 돌아앉은 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안 진사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가?
안 진사의 얘기에 너무 빠지지 말게.
그가 예사 장사꾼이 아닌 것은 분명하네만
그러나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 사는 게 아닐세.
먹고 마셔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네만
인간은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기에
만물의 영장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선생님…"
"평소 자네의 고민이 많이 풀렸겠구만.
하지만 좀더 두고 생각해보세. 백성들의 입에 고기나 물려주고
쌀밥이나 넣어주는 게 궁극은 아닐세.
난 자네가 안 진사를 통해 더 큰 것을 보길 바라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안 진사는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을 위해 물산을 더 싸게 대줍니다.
적고 모자란 것은 더 많이 구해다 주려고 애씁니다."
"그 마음을 나무라는 것이 아닐세.
체(體)가 같다고
용(用)이 같은 것은 아닐세."
"그렇다면,
백성들이 잘 살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엉키고 맺힌 것은 비단 물산만이 아니란 말일세."
지함은 입을 다물었다.
엉키고 맺힌 것은 물산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또 엉키고 맺혀 있다는 것인가.
도대체 화담은 왜 유람을 권했단 말인가.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지함은 새벽 이슬에 바지를 적시며 잔풀이 돋은 논두렁을 천천히 걸었다.
발목의 서늘한 감촉이 신선하게 가슴을 적셨다.
밤 사이의 피로가 어딘가로 다 빠져나가버린 느낌이었다.
"매점매석이나 배워가지고는 쓸 데가 없네."
화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안 진사는 물산의 흐름을 바로 잡는 것이 경제라고 하였습니다."
"그건 장사꾼의 얘기,
도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네."
"그럼 뭐라고 합니까?"
"마음 장사를 해야지."
"마음 장사라구요?"
"제 마음을 들여다보아도 맺힌 곳이 있고,
풀린 곳이 있다네."
"갑자기 왜 장사에서 마음 이야기로 들어가십니까?"
"도인은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고,
장사꾼은 물산을 다스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네.
어느 지방에서는 어떤 물산이 많이 난다,
그러니까 모자라는 땅으로 옮겨 주어야 한다.
옳은 말일세."
"인물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땅을 보면 인물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지방에서 어떤 인물이 나는가,
그래서 물산이 이리저리 흐르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처럼 인물도 그렇게 하라.
물산을 잘못 유통시키면 부작용이 생기듯
인물이 너무 한쪽에 몰리거나
너무 적으면 반드시 일이 생긴다.
옳은 말일세.
그러나 이 또한 정치를 하는 대신들이나 할 말이네."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을 살펴야지.
사람마다 그 마음을 내는 밭이 다르니 마음도 다르네.
그것이 곧 운명일세."
"경제가, 인물이 운명이라구요?"
"백성의 마음이 어디로 흐르는가를 보게.
민심이 있는 곳에 하늘이 있다네.
우리네 마음 속에는
10간이라는 하늘이 있고,
12지라는 땅이 있네.
10간에 응하여 12지가 어떤 얼굴을 하는가 살피게.
그것이 마음을 유통시키는 장사꾼이네.
10간이 천문이요,
12지가 지리라면 그 지리에서 마음이 생산된다네.
그 10간12지가 조화를 부려 사람을 화나게도 하고,
즐겁게도 하고,
긴장하게도 하고,
포악하게도 하고,
착하게도 하네.
마음 하나에 이렇게 얽힌 사연이 많다네."
"어떻게 그 마음을 보리까?"
"그것을 살피게.
그 12지의 묘리를.
그래서 주유를 하는 것이고,
물산을 보는 것이고,
인물을 보는 것이라네."
"안 진사처럼 물산을 흐르게 하듯이 마음을 흐르게 하리까?"
"아무렴.
백성이 곧 하늘이라네.
그 이치를 알면 도에 이를 수 있네."
"천문, 지리, 물산, 인물, 하늘…"
"자네는 마음의 장사꾼이 되게.
그래서 용기가 나지 않는 땅에는 용기를 북돋워주고,
지혜가 필요한 땅에는 지혜를 주게.
그러려면 어떤 땅에 뭐가 많고 부족한가 알아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해가 돋는구만."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태양은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너른 들판을 온통 붉은 빛으로 적시었다.
태양은 조금씩 조금씩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산이 없어 허전한 들판을 일출이 채워주는구만.
그러고 보면 자연은 얼마나 조화롭고 넉넉한가.
무엇 하나 치우침이나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화담이 떠오르는 태양을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평야의 일출은 산중에서보다 더 붉고 뜨거웠다.
둥실 떠오르는 태양도 훨씬 크고 넉넉했다.
"사람도 그렇다네.
생김새도 성격도 제 각각이지만
그 본성은 마찬가지일세.
오묘하지 않은가."
지함은 궁금한 게 많았다.
화담에게 여쭐 말도 많았다.
그러나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찬란한 아침놀에 젖은 가슴이
모든 말과 감정을 잊게 했다.
새벽 안개까지도 아침 노을에 물들고,
화담의 흰 도포자락도 붉게 물들고 있었다.
화담은 안개에 옷이 축축히 젖을 때까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안 진사는 지함의 손을 붙들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이틀을 더 묵는 동안에 두 사람은 어느덧 형님 아우가 되어 있었다.
"아우님, 한양 가는 길에 꼭 한번 들리시게.
다음에는 아우님의 여행 얘기를 좀 들어야 하지 않겠나."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고 정분난 남녀처럼 두 사람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그만 떠나야겠네.
벌써 안개가 흩어지고 있구만."
황토벌을 가득 메웠던 안개가 햇살이 떠오르자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안개가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것을 연신 들여다보며
박지화가 길을 재촉했다.
안 진사는 꼭 쥐고 있던 지함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지함의 소매 속으로 돈꾸러미를 밀어넣었다.
"형님.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벌써 화담에게 노잣돈을 넉넉히 챙겨준 안 진사였다.
혹 지함이 돈을 되돌려줄까 싶었는지 안 진사는 저만큼 뒤로 물러섰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일세.
선생님이 돈이라도 잃어버리시는 날에는 어찌 하려는가.
성의이니 받아두게나."
그동안 안 진사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지함은 느낄 수 있었다.
장사꾼으로 나선 양반을 곱게 보아줄 양반이 물론 없거니와,
평민들조차도 안 진사를 괴이한 양반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자,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화담은 용인을 벗어나는 곳까지라도 가마를 태워주겠다는
안 진사의 호의를 끝내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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