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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방장 명초의 비밀 - 소설^토정비결(中-15)

공주 고청봉의 용화사에서는 마침 방장 명초의 설법이 열리고 있었다.

수좌 여남은 명,

그리고 그 뒤로 신도 몇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휴는 설법이 열리고 있는 법당의 문을 열었다.
설법을 하던 명초와 법당에 들어서던 정휴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정휴는 합장을 하고 삼배를 올렸다.
정휴를 잠깐 돌아본 명초는 설법을 계속해 나갔다.
"환신(幻身)이 나고 죽는 것을 따라 옮겨다니는 것이 사람의 한 평생이라.

평생 싸움질만 하다 가는 것 같소이다.

업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오고 나는 악착같이 도망치려 하고…잘들 있으시오.

내가 죽은 뒤에 요란하게 장사를 치르거나

세속에서 하는 대로 예를 갖추지 말아주시오.

슬피 울며 눈물을 흘리거나 남의 조문을 받아서도 안 되오.

그런 사람은 내 제자가 아니니…"
명초는 죽음을 앞두고 최후 설법을 하고 있었다.
정휴는 고개를 뚝 떨구었다.

화담 산방을 떠날 때 들었던 예감이 맞은 것이다.
명초는 정휴를 깨우치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던가.
정휴는 지난 날 명초가 휘둘렀던 매서운 채찍이 그리웠다.

그러나 명초는 지금 대중에게 임종을 고하고 있었다.
한 수좌가 일어나 명초에게 문답을 청했다.
"큰스님,

돌아가시면 어디로 돌아가시는 것입니까?"
"생도 사도 없는 곳,

시작도 끝도 없는 곳,

그런 곳이라고 이르는 게 고인들의 말씀이었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네.

평생 공부만 하고도 성불을 하지 못했으니

어느 신도집 황소로나 태어나야겠네.

그래서 이생에서 평생 시주만 받아먹고 살며 지은 빚을 갚아야 할 걸세."
제자들은 죽음을 선언한 명초에게 다투어 질문을 퍼부었다.
한 수좌가 나섰다.
"큰스님, 보따리를 다 풀고 가십시오."
"내가 가진 보따리를 다 풀으라고?

이리 오게.
자네에게만 몰래 전해 줌세."
질문을 던졌던 수좌가 법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명초가 그의 귀에 입을 대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놓고 수좌에게 물었다.
"들었는가?"
"예? 아무것도 못들었는데요?"
"자, 그럼 다시 한번 들어보게."
명초는,

이번에는 그 수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꿈쩍거렸다.
"보았는가?"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말씀을 해주셔야 듣고,
무언가 내보이셔야 보지요."
"예끼, 이놈!"
명초가 주장자를 들어 그 수좌의 등줄기를 철썩 내리쳤다.
"자, 그만들 두거라. 설법을 마치련다."
명초는 법상을 내려 섰다.

시자승이 어깨를 부축하여 법당을 나갔다.

명초는 법당을 나서다가 뒤를 돌아보면서 정휴를 찾았다.
"못난 것.

방장으로 오너라."
명초가 방장으로 돌아가자 수좌들은 다비 준비다 제물 준비다 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정휴는 방장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래, 서암에게서 도를 구했느냐?"
"아직 미망이 깊습니다."
"못난 녀석.

내가 갈 길이 머니 네 녀석에게 말해 주마."
"···"
"난 네 삼촌이니라."
"예?"
"놀라지 말고 들어보거라.

끝까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만,

기왕에 네 녀석이 여기에 나타났고,
또 서암이 지극하게 가르쳐주는 도마저 받지 못하는
찌그러진 그릇이니 할 수 없이 토설한다.

신분에 연연하여 제 공부 하나도 못 하는 어리석은 녀석.
네가 심충익을 알렷다."
"예. 저의 주인이셨습니다."
"주인? 네 주인은 너니라."
"하오나…"
"그 자는 너의 원수니라."
"예?"
"중종 반정이라고 들어보았느냐?"
"연산군을 몰아낸 사건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

정민(丁民),

네 아버지의 함자다.

의금부 도사였던 네 아버지는 그때 모반 사건을 알고 대궐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연산군을 지키려는 사람이 없었다.

신하들이 일제히 돌아서버린 것이다.
그러나 네 아버지는 끝까지 왕에게 충성해 연산군을 지켰다."
"···"
"그때 중종의 인척인 심충익,

그러니까 너의 옛주인인 그가 반역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반역, 그렇다.

그때까지는 그것이 반역이었다.

아버지는 끝까지 싸우다 심충익의 칼에 맞아 죽었다."
"···"
정휴는 그의 출생 비밀이 풀리고 있다는 놀라움과
아버지 정민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감정이 뒤엉켰다.
"그 뒤 심충익은 오히려 우리 집안을 반역의 무리라고 지목하여 모두 잡아들였다.

그때 나는 이미 입산한 몸이라서 잡혀가지 않았다.

그러나 너와 너의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모두 끌려가 종이 되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느 집인가 권신의 집에 하사되었는데

아직도 어디 계신지 찾아내지 못했다.

이미 이 세상을 뜨신 지 오래 되었을 게다.
너와 네 어머니는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십수 년 만에야 찾았다.

내가 용화사에 있으면서 시주를 다니다가 우연히

보령에서 너희 모자를 보았던 것이다.

네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네 어머니 얼굴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뒤로 보령에 자주 다니면서 네 소식을 물어보곤 했다.

네가 심충익의 배려로 공부를 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너도 알아야겠기에 하는 말이지만…"
"무엇 말씀이십니까?"
"심충익의 막내딸을 아느냐?"
"아옵니다. 심명 애기씨요."
"그 아이는 네 동생이니라."
"예?"
"그걸 심충익이 말해 주지 않더냐?

네 어머니도 말하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인들 말했을 리 없다만…
그래도 심충익 그 사람이 대인은 대인이니라.

원래 종에게는 성도 내리지 않는 법인데,

그 이가 네 이름은 원래 쓰던 대로 내버려두었다.

또 네 동생의 이름은 네 아버지가 쓰는 대로 외자로 지어주었으니 하는 말이다."
"그래서 심충익 대감이…"
"그 이가 무슨 언질을 주었더냐?"
"아닙니다.

심 대감이 임종을 눈앞에 두고 저를 불러서는 막내딸을 따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을 하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가 하여 미진했었는데 지금 듣고 보니…"
"심충익이 네 어머니를 취하여 그 딸을 두었느니라."
명초가 눈을 감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노승이건만 조금도 쇠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정휴와 마주앉은 명초는 서슬퍼런 방장의 기개는 간 데 없고,

인자한 삼촌의 얼굴로 정휴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야."
"예. 큰스님."
"삼촌이라고 부르거라."
"… 삼촌."
명초의 두 눈에 물기가 비쳤다.
"이 일을 들어 행여 무슨 일을 도모하지는 말거라.
네가 누구의 자식이든,

누구의 조카이든 그것은 다 환영에 불과하니라.

너는 단지 너일 뿐이다.

자, 그만 하자.

나는 더 이상 세상에 머물 수가 없구나.

나를 따라오너라."
명초는 주장자를 들고 일어나 방장을 나섰다.
정휴도 명초의 뒤를 따라 방장을 나왔다.
용화사는 명초의 임종을 준비하느라 몹시 분주했다.
명초는 경내의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자."
명초는 고청봉으로 올라갔다.

가는 길에 커다란 바위를 만난 명초는 바위 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휴야. 난 이 산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이 산의 덕을 그렇게 많이 본 게지.

내가 비록 신도집 황소로 태어나서 일을 하겠다고 말하였다만

그건 다음 생의 몸이고,

이번 생의 몸은 따로 보시할 데가 있다."
"임종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렇다."
"물은 강으로 바다로 흐르고,

나는 내생으로 흐른다."
"그러면 어디에서 임종하실 겁니까?"
"산으로 올라가 반석이라도 있으면 누워 있을란다.
그러면 까마귀도 와서 나를 먹을 것이고,

벌레도 와서 나를 먹을 것이다.

고청봉에 터를 잡고 사는 온갖 짐승들이 와서

나를 먹고 주린 배를 조금이나마 채울 것이다.

그게 참으로 보시다운 보시니라."
"삼촌."
"마지막으로 내가 너에게 오계를 내리마.

이로써 비구 250계를 받아라."
"하오나…"
"하오나, 뭐냐?

어리석은 것.

아직도 미망을 떨치지 못해서 주저하느냐?

평생 행자로 보낼 것이냐?

계를 받겠느냐,

받지 않겠느냐?"
정휴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휴의 머리 위로 명초의 오계가 준엄하게 떨어져내렸다.
"첫째, 생명을 죽이지 말라."
"예. 받들어 지키겠나이다."
"생명을 죽이지 말라 함은 함부로 정을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다.

하늘이 낸 생명은 저마다 업을 가지고 있는 것,

제 스스로 존재하는 이치가 있으니 함부로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된다.
호랑이가 짐승을 잡아먹는 것도 제 이치이고,

악한 사람이 착한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도 다

저희끼리 이치가 있는 법,

함부로 나서서 생명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생명의 문제는 절대로 소홀히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네 손으로 생명을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렇게 지키겠습니다."
"심충익의 집안에 원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예."
"둘째, 훔치지 말라."
"예. 받들어 지키겠나이다."
"훔치지 말라 함은 네 죄를 쌓지 말라는 것이다.

아닌 것은 하나도 가질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네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네 업이 자꾸 무거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네가 가질 것이라곤 도밖에 없다.

나머지는 다 쓸데없는 것이니라.

다른 것을 지니면 그것은 도적질이니라."
"그렇게 지키겠습니다."
"그 다음 세번째. 음행하지 말라."
"예. 받들어 지키겠나이다."
"마음이 삿되어 행하는 것은 다 음행이니라.

목이 말라 물을 찾고,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것도 지나치면 음행과 다를 바가 없느니라.

제 여자가 아닌 사람을 취하는 것만이 음행이 아니다.

남녀의 교접이란 번식을 하기 위함인즉,

그것을 쾌락으로 쓰는 것은 다 음행이니라."
"그렇게 지키겠습니다."
"다음 네번째. 거짓말하지 말라."
"말을 거꾸로 하거나 뒤집는 것만이 거짓말이 아니니라.

제가 터득하지 못하고 남이 깨달은 것을 입으로만 전하는 것도 다 거짓말이니라."
"예. 받들어 지키겠습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술을 마시지 말라."
"예. 받들어 지키겠나이다."
"이는 한 순간도 정신을 놓지 말라는 것이니라."
"그렇게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계를 금강 같은 의지로 지키겠느냐?"
"예. 명심하여 받들어 지키겠나이다."
"이로써 비구 250계를 준 것으로 한다.

그만 내려가거라.

나는 간다."
"스님."
명초는 산꼭대기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정휴는 두어발 따라가다가 그만두었다.
명초는 이미 자기가 죽을 날까지 알고 스스로 육신 보시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명초의 숭고한 뜻을 하찮은 인간의 정으로써 방해할 수는 없었다.
정휴는 명초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마침내 명초가 숲속으로 사라지자,

정휴는 용화사 계곡을 내려갔다.
용화사에 이르자 주지가 정휴에게 달려와 방장 명초의 거취를 물었다.
"이보게, 정휴 행자.

큰스님은 어디 계신가?"
"저도 모릅니다."
"모르다니.

자네하고 함께 고청봉으로 올라가셨다는데?"
"그래도 저는 모릅니다.

큰스님은 떠나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 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아주 가셨단 말인가?"
"돌아오시지 않습니다."
정휴의 말을 듣고 난 주지는 허겁지겁 수좌들을 불러모아 고청봉으로 올려보냈다

. 명초의 시신이라도 찾으려는 것이었다.
정휴는 승방으로 들어가 바랑을 풀었다.

아무래도 내년 봄까지는 용화사에서 나야 할 것 같았다.

지함이 운수를 떠났다고 덩달아 다닐 수도 없었다.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용화사에서 차분히 경전이나 탐독하다가

때가 되면 화담 산방으로 올라가리라 하고 작정했다.
밤이 늦어서야 고청봉으로 올라갔던 수좌들이 빈손으로 내려왔다.
이튿날, 주지는 또다시 수좌들을 고청봉으로 올려보냈다.
정휴는 승방에 앉아 <육조단경(六祖檀經)>을 펴놓고 읽었다.

그러나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고,
억지로 몇 줄 읽어도 뜻이 파악되지 않았다.
수좌들은 여전히 명초를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명초는 열흘이 지나도록 발견되지 않았다.
그동안에 정휴는 경전을 보아도 심란하고,

좌선을 해도 잡념만 계속 들어 마음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명초가 어디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짐승의 밥이 되었는지,

열흘이 지나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정휴의 머리 속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심충익과 심충익의 막내딸 심명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다.
그때 문득 정휴는 화담 서경덕이 지함에게 전해주라던 책이 머리에 떠올랐다.

책의 주인이 비록 따로 있긴 했지만 정휴는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하기도 하고,

자신의 혼란스런 마음을 가라앉혀 보리라 생각해 조선종이에 꼭꼭 싸두었던 책을 꺼냈다.
'<홍연진결(洪然眞訣)>,

이지함에게 주는 책'이라고 겉장에 씌여 있었다.
정휴는 책의 겉장을 넘겼다.
그때였다.

갑자기 경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뭐라고? 큰스님 유골이라고?"
주지가 깜짝 놀라서 큰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정휴는 얼른 <진결>을 바랑에 다시 싸넣고 승방을 나왔다.
대웅전 앞 뜰에 웬 처사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주지는 그 사람들 하고 이야기를 하는 참이었다.
"연천봉 근처에서 발견했습니다.

주장자를 보아 하니 명초 스님인 것 같아서 뫼시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렇게 뼈만 남아 있더란 말인가?"
"돌아가신 지가 오래 된 모양입니다.

그 사이에 산짐승들이 그냥 두었겠습니까?

이게 웬 떡이냐 하고 포식했겠지요."
대웅전 앞에는 처사들이 수습해다 놓은 명초의 유골이 놓여 있었다.

살이란 살은 모두 온데 간데 없고 하얀 뼈다귀만 남아 있었다.

그것도 짐승들의 이빨자국이 나있는 통뼈들이었다.

잔뼈 정도는 짐승들이 다 씹어먹은 모양이었다.
주지는 그래도 다비식을 해야 한다면서

부지런히 수좌들을 몰아 장작을 쌓고 제사 올릴 준비를 했다.
명초의 유언이 있었던지라 주지는 간소하게 다비식을 치렀다.

주지는 정휴를 행자로 보고 의식에 끼지 못하게 하였다.

대신 뒤에서 심부름을 하도록 시켰다.
다비가 끝나자 정휴는 승방에 들었다.
가까운 혈육이 떠나갔는데도 왜 눈물이 나지 않는지
정휴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다비식을 하는 동안 내내 <진결>만 눈에 어른거렸다.
정휴는 <진결>을 다시 펴들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명초의 유골을 수습해온 두 처사가 들어왔다.
"스님,

주지 스님이 이 방으로 들라기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하루만 묵었다가 다시 신원사 계곡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시오."
정휴는 등을 돌리고 앉아 <진결>을 읽기 시작했다.
<진결>은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씌어 있었다.
정휴는 한문으로 된 문장은 읽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웬일인지 화담의 <진결>은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이렇게도 읽어보고 저렇게도 읽어보았지만

정휴는 단 한 줄도 읽어내지 못하고 책장만 마구 넘겨댔다.
"스님, 무슨 책인데 읽지는 않으시고 그렇게 책장만 넘기십니까?"
"아, 아니오."
정휴는 얼른 책장을 덮었다.
"<홍연진결>?"
그 중의 한 사람이 책의 겉장에 적힌 제목을 보고 말했다.
"<진결>이라? 그렇다면 비결서 아니오?

아니, 스님께서 비결서를 읽으십니까?"
"비결서를 우리 같은 술사(術士)들만 읽으라는 법이 있나?

절간에서 더 많이 읽힌다네.

그나저나 그 책은 누가 지은 것이오?"
"그, 그게… 어쨌든 이 책 주인은 따로 있소."
"스님, 그러지 말고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전우치(田禹治)라고 하오.

계룡산에 들어와 벌써 십 년이 넘었건만 앞이 까마득하기만 하오.

차라리 명초 스님 문하에서 공부나 할 걸 그런 것 같소이다."
"난 남궁두(南宮斗)요.

역학에 관심이 많아 그쪽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직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소이다."
정휴는 하는 수 없이 이름을 댔다.
"난 정휴요.

법명은 자성.

난 원래 이 절로 입산했지만 여기저기 떠돌다가 한 보름 전에야 돌아왔소."
"그동안은 어디 계셨구요?"
전우치가 물었다.
"금강산에 있었소."
"금강산이면 산기운이 좋아서 우리 술사들이 몹시 좋아하는 산인데,

한소식 하신 모양이지요?

그런 책도 다 구하시고?"
이번에는 남궁두가 말했다.
정휴는 <홍연진결>을 꼭 붙잡고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스님, 비결서라는 것은 흔한 것이오.

하물며 이름없는 비결서까지 합하면 그 수가 엄청날 것이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닐 터이니 한번 구경만 합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보여드리리다."
남궁두가 그의 짐에서 책을 몇 권 꺼냈다.
<신읍지(神邑誌)>, <궁을천가(弓乙遷歌)>, <답천보록(踏千寶錄)>이었다.
"이것 말고도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비결서라는 이름으로 민간에 유포된 책은 흔한 것이었다.

세종대의 서운관(書雲觀)에서 소장하던 것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세종은 이러한 음양서,

참위서가 너무 많이 돌아다니면
민심이 흉흉해진다고 하여 모두 분서(焚書)하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했었다.
그후 세조 때에도 근절되지 않자 세조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設)>,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선비기(道詵秘記)> 등

열일 곱 종을 금서로 묶어 단속했다.

그리고 그뒤 성종은 열두 가지를 더 금서 목록에 추가했다.
이러한 비결서는 신라 적부터

고려, 조선 시대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민간에 유포되어 왔다.

더구나 갖은 질병과 기아가 극심했던 조선 중기에는

그러한 비결서가 더욱 많이 나돌 수밖에 없었다.
정휴도 화담의 비결서가 궁금하기는 했다.

도대체 처음부터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적혀 있는 글이 답답하기만 했던 것이다.

정휴는 그들이라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강만 살피시고 주시오.

이 책은 분명히 주인이 따로 있소이다."
정휴가 가지고 있던 책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남궁두가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음,

파자(破字) 해자(解字)를 해야 알겠군.

한참 보아야 무슨 말인지 알겠는 걸.

첫줄은 알겠군.

후천 대환난? 이게 무슨 말인가?"
"글쎄, 찬찬히 보아야 알겠군.

워낙 어려운 내용이라서."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책장을 넘겼다.
이윽고 책을 다 넘긴 두 사람은 정휴에게 책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런 다음 남궁두가 정휴에게 말했다.
"스님, 지금 당장에는 뜻을 풀기가 영 난해하군요.
제가 앞장 몇 줄만 따로 베꼈다가 해석해 보겠습니다.
비결이 원래 주인만 읽을 수 있도록 써놓았다지만
한참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풀게 되면 알려드리지요."
정휴는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책을 넘겨주는 것도 아니고 몇 줄 적어 뜻을 풀기만 하는 것쯤은
화담에게도 지함에게도 그리 누가 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시오."
남궁두는 <진결> 첫장을 베꼈다.
"나중에 인연 닿거든 알려주시오.

난 이 절에 오래 묵지는 않을 것이오."
정휴가 말하자 남궁두가 받았다.
"우린 신원사 계곡에 있으니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오.

그런데 스님은 어느 절로 가시렵니까?"
"절이 아니라 고향에 한번 갈까 합니다.

제 동생을 찾아…"
"원 스님두.

출가를 하셨으면 그만이지 속가는 왜 찾습니까?

허허허. 괜한 소릴 제가 했군요."
"두 분 이제 쉬십시오.

노사의 유골을 짊어지고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터이니…"
"그렇지 않아도 졸음이 새록새록 밀려옵니다."
전우치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는 눕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런 민한 친구.

병법에는 그렇게 재주가 많아도 수마(睡魔)에는 꼼짝 못하는군.

스님. 저도 그만 쉬겠습니다.

아참,

그런데 그 책의 주인이라는 분은 누굽니까?"
"예, 홍성 사람 이지함이라고 합니다.

화담 산방의 학인이었는데 화담 선생이 몹시 아끼는가 봅니다."
"그래요? 화담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런 분이 아끼는 제자라면 대단한 분이겠군요.

그런데 화담 선생은 지금?"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면서 이 책을 이지함,

분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제가 이 선비와 잘 아는 사이라서…"
"그렇습니까?

저희 두 사람은 스승도 없이 계룡산 골짜기에서 하늘만 바라보며 수련을 하고 있답니다.
여기저기서 책을 구해다가 읽고 있지만 도무지 진도가 없습니다.

이러다가는 늙어 죽기 전에 아무것도 못 이룰 것 같습니다.

비결서까지 전해주는 스승이 있는 이 선비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선비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팔도를 유람중이랍니다."
"저도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화담 선생이 총애하는 제자라면 필시 도력이 깊을 터이고…"
"실은 내가 승복을 입고는 있으나 나도 그분의 제자나 마찬가지지요.

벌써 오래 전부터 그분이 아니고는 마음이 불안하여 글 한줄 읽혀지지 않고,
아무리 훌륭한 스님을 은사로 두어도 도무지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저도 어서 빨리 뵙고 싶군요.

언제 뵙게 됩니까?"
"내년 삼월이나 되어야 뵙게 될 것 같소이다."
남궁두는 거듭 지함에 대해서 물었다.
정휴는 남궁두가 묻는 대로 지함의 이력을 말해주었다.
"그분은 복도 많소이다.

북창 같은 이는 우리 술사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높은 분인데

그런 분을 스승으로 두고 또 화담 산방에도 들어가셨다니…"
남궁두는 거듭 정휴에게 청을 했다.
"스님, 꼭 약조를 하셔야 합니다.

저희 두 사람도 이지함 선비의 문하에 입문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십시오."
"그러지요.

내년에 제가 화담 산방으로 올라갈 때 아예 같이 가십시다.

제가 어차피 보령에 갔다가는 이곳 용화사로 돌아와야 할 터이니."
"고맙소."
어느새 두 사람은 말까지 놓아가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튿날 남궁두와 전우치는 신원사로 떠나가고 정휴는 보령으로 떠났다.
"정휴 스님, 잘 다녀 오시게나.

스승님 뵙고 못 뵙고는 스님 손에 달려 있다고 너무 위세 마시게.
하하하."
남궁두가 섭섭한 듯 발을 떼지 못했다.
"걱정 말게.

보령에 갔다가는 곧 돌아올 것이니.
내가 일차 신원사 계곡으로 찾아가리다.

그간 베끼신 거나 잘 들여다보시게나. 허허허."
"원, 두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리도 정이 깊어졌담."
전우치가 불퉁거리자 남궁두와 정휴가 껄껄 웃으면서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정휴는 공주에서 칠갑산을 넘어 청양으로 갔다.
청양에서는 장곡사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청양에서 대천 가는 길을 잡아 꼬박 하루를 걸은 끝에 정휴는 보령 땅을 밟았다.
보령은 정휴에게는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렇게 여기고 살았었다.

삼촌인 명초가 그의 내력을 이야기해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었다.

아버지도,
얼굴은 비록 보지 못했지만 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행여 금부의 도사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자신의 신분이 밝혀졌다 한들 무슨 대수가 있을까.

같은 배를 빌어 태어난 심충익의 막내딸을 만나는 것도 하등 의미가 있을 게 없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고,

그대로 묻어두는 것이 그 동생에게도 마음 편한 일일지 몰랐다.
그러나 핏줄이 자꾸 당겼다.

조선 천지에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

그 혈육이 보령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휴의 발걸음은 저절로 그리 향했다.
정휴가 심 대감 집의 대문을 두드리자 낮익은 종이 나와 문을 열었다.
"아니 정휴 아닌가?"
"그렇소, 형님."
"아이구, 이놈아.

면천을 했으면 멀리 가서 잘 살 일이지 왜 중은 되었냐?"
"제 소견이 이렇게 좁지 않았습니까."
"쯧쯧쯧. 그래 여긴 웬일인가?"
"마님 뵌 지도 오래 됐고,

어머니 산소도 찾을 겸 해서…"
정휴는 동생 이야기를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들어오너라.

내당에 마님이 계시다."
정휴가 내당에 들어서자 문이 열렸다.
심 대감 부인이었다.
"마님."
정휴가 합장을 했다.
"자네, 스님이 되었군.

어째 명초 스님이 안 오신다 했더니 자네가 대신 오는군."
"명초 스님이 있는 용화사에 출가했었습니다.

명초 스님은 보름여 전에 열반하셨습니다."
"저런. 우리 집안을 잘 보살펴 주셨는데…"
정휴는 동생의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종도 물러가고,

마침 내당에는 심 대감 부인과 단둘이 있게 되었다.

심 대감 부인은 회갑을 치른 나이라서 내당에 들어도 흉이 될 리 없었다.
정휴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입을 떼었다.
"저, 마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런가? 들어오게.

남녀칠세 부동석이라지만 할망구와 스님 사이인데 누가 뭐랄라구?

호호호."
정휴는 내당으로 들어가자 곧 심 대감 댁 막내딸 이야기를 꺼냈다.
"마님, 명(明) 아가씨가 안 보입니다."
"출가했다네."
"예? 어디로요?"
"홍성으로 갔다네."
"누구한테요? 뭐하는 사람인가요?"
"지금 홍성현에서 현감 노릇을 하고 있다네."
"그렇습니까?"
"그런데 명이는 왜 묻나?"
"궁금해서지요. 안 보이길래…"
정휴가 우물쭈물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부인의 눈초리가 갑자기 매서워졌다.
"자네, 명초에게서 무슨 얘길 들은 게로군."
"···"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지.

그 요망한 중이 입 하나 봉하지 못하고 발설하다니."
"그러면 명이 아가씨가 제 동생이 맞습니까?"
"그게 명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내가 본시 그 아이를 귀여워해 주지는 못했어도 그 아이를 망치고 싶지는 않네.

알겠는가?"
"하오나, 마님.

제겐 하나뿐인 혈육입니다.

다 죽고 이제는 저희 남매밖에 없습니다."
"아비가 다르느니라."
정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래도 명이 아가씨는 제 동생입니다."
"무슨 망발이냐.

너 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다.

애를 망치지 말거라."
"왜 관계가 없습니까, 마님."
"첩 없는 양반이 어디 있더냐?

그 아이는 엄연히 대감께서 낳은 아이이니,

한 점 혈육에 대한 정이 있다면 그 아이를 괴롭히지 말거라."
"만나고 싶습니다.

만나서 제 동생이란 사실을 알리고 싶습니다."
"씨가 다르면 같은 밭에서 나는 곡식이라도 다 다른 법이야.

밭이 한밭이면 보리가 벼가 되고,

무우가 배추 된다더냐!"
정휴는 조용히 자리를 물러났다.

가슴 속에서 진한 눈물이 밀려나오고 있었다.
정휴는 어머니 무덤으로 갔다.
잡초가 무성했다.

정휴가 돌보지 않았으니,

무덤에 벌초를 해 줄 사람이 따로 있었겠는가.
"어머니, 왜 제게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

종노릇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왜, 왜 숨기셨습니까?
심 대감 딸을 낳았다는 게 뭐가 그리 대죄라고…"
정휴는 어머니의 산소에서 내려와 홍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홍성. 그의 운명이 새로이 열리고 새 삶이 시작된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