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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화담이 살아 있다 - 소설^토정비결(中-18)

정휴는 부지런히 걸어서 홍성에 이르렀다.

갈 곳은 옛집밖에 없었다.

옛집에는 친구 재청이 살고 있었다.
농사채도 없이 날품을 파는 그에게 정휴는 용화사로 떠나면서 전답을 넘겼었다.
"아니, 정휴 자네?"
"재청이, 자네 여전하군."
"이 선비 하고 같이 내려온 겐가?"
"아닐세. 혼자 왔네."
"그래? 이 선비도 지금 홍성에 와 있다네."
"아니, 홍성에 들렀단 말인가?"
"쯧쯧. 모르고 있었군."
"지금 이 선비는 어디 있나?"
"집에 있을 걸세."
"가 보겠네. 내 곧 다시 옴세."
정휴는 뛰다시피 하여 지함의 옛집으로 갔다.
그러나 빈 집이었다.
정휴는 옆집으로 달려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지함의 친척이 사는 집이었다.
"이지함 선비가 지금 어디 있소?"
"방금 바다로 갔습니다.

저희 집에 들렀다가요."
정휴는 황급히 바다로 향했다.

지함이 가는 바다라면 뻔했다.
두 사람은 가끔 바다로 가서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었다.

지함은 그 바다가 그리웠던 거라고 생각하면서 정휴는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나 바닷가에는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만 몇몇 있을 뿐이었다.
"아니, 어디로 갔을까?"
정휴는 어부들에게 가서 물었다.
"저, 혹시 이지함 선비가 여기에 왔었습니까?"
"예. 그런데 세 분 모두 배를 타고 떠났다우.

저기, 저기 보시우.

배가 손톱만하게 보이지 않소?"
수평선을 타고 출렁이는 배가 한 척 있었다.

누가 탔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어디로 간답디까?"
"전라우도 해남이라고 하더이다."
전라도 해남.

홍성에서는 뱃길로도 까마득한 곳이었다.
그런데 세 분?

정휴는 어부가 세 분이라고 말한 게 생각났다.
"저, 세 분이라고 하셨소?"
"맞소. 세 분이었소."
"어부까지요?"
"원, 스님두.

이지함 선비,

그리고 젊은 사람 또 한 명,

그리고 노인네 한 명,

그리고 어부가 탔다우."
"노인이라구요?"
"예. 그 노인이 자꾸 배를 타자구 해서 떠나들 갔지요."

 

"···?"
일행이 셋이라?

정휴는 지함이 박지화와 함께 유람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또 한 사람이 합류한 듯했다.

누구일까?

어부들이 노인이라고 지칭한 그 사람은 누구일까?

정휴는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지함을 놓친 정휴는 할 수 없이 재청에게 돌아갔다.
"만나지 못했나?"
"벌써 떠났다네."
"급하긴.

그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음 내키면 잠시도 기다리지 못한다니까."
"여보게. 이 선비가 누구하고 왔었는가?"
"어떤 노인하고 젊은 사람 한 명,

그렇게 셋이었다네."
"정말인가?"
"정말이지 않고?"
"노인의 풍모가 어떻던가?"
"하얀 도포를 입고,

머리도 하얗고,

수염도 하얀 노인이었지."
풍모로 보면 화담과 비슷했다.

그러나 화담일 리는 없었다.
"누굴까?"
"글쎄… 난 잘 모르겠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하긴 그렇네."
정휴는 공연히 마음이 켕겼으나 지함과 일행이 된
노인에 대한 의문을 애써 지워버렸다.
정휴가 홍성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지함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생 명이를 만나는 것이었다.
"저어, 재청이.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
"뭔가?"
"홍성현에 아는 사람이 있는가?"
"아전을 아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말해서 내 편지 좀 전해주겠나?"
"그러세.

그 대신 그 녀석에게 술값은 좀 두둑히 내놓아야 할 것일세."
"여부가 있나."
정휴는 서찰을 적어 재청에게 건네주었다.

현감 부인이 되어 있는 동생 심명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 그대는 내 동생이오.

알고만 있으시오.

내 말을 믿는다면 서찰을 보내 주시오.

정휴는 그 이유를 서찰에 낱낱이 적어 재청에게 주었다.
"난 주막에 있겠네."
"내 집에서 묵지 그러나."
"아닐세.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네."
정휴는 관아 근처의 주막에 여장을 풀었다.
이틀이 지나자 재청이 주막으로 찾아왔다.
"미안하이. 많이 기다렸지?"
"그래, 서찰은 전했나?"
"전하기는 했는데 답신은 아직 받지 못했네."
정휴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었는데 누가 선뜻 믿으려 할 사람이 있겠는가.
"어쨌든 고맙네."
"그런데, 이 선비 말일세.

아주 거지가 다 되었더군그래."
"무슨 말인가? 거지라니?"
"아, 그 안명세 도련님이 참수당하고 민이 아가씨하고 정혼했다가 깨졌다면서?

그래서 그만 머리가 돌아버렸나보지 뭐."
"머리가 돌다니?"
"그렇지 않구서야 벼슬도 못하고 그렇게 거지처럼 쏘다니겠나?"
"자네도 참.

그이의 뜻은 워낙 깊어 나도 모른다네.
함부로 힐난하지 말게."
"어디 나만 그러는 줄 아는가?

홍성 사람이 다 입방아질일세.

어려서는 신동이라고 소문났던 선비가 벼슬도 못하고 거지꼴이 되어 떠돌아다닌다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정휴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정휴 스님, 혹 계시오?"
정휴가 문을 열고 보니 남궁두와 전우치였다.
"아니, 자네들 여기 웬일인가?"
"아이구, 여기서 찾게 되는구먼."
"어서 들어오게."
"그럼, 난 그만 가네.

답신이 오면 곧 가지고 옴세."
"그러게. 수고해 주게.

일간 나도 한번 자네 집에 들름세."
재청이 떠나가자 정휴는 두 사람을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래, 예까지 무슨 일인가?

내게 볼 일이 있는가,
아니면 우연히 들렀는가?"
"일부러 찾아왔다네."
"무슨 일로?"
"내가 그 <비결>을 풀었네.

보세. 여기 있네.

하도 놀래서 보령까지 단숨에 갔다가

자네가 홍성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이리로 달려왔네.

주막이란 주막은 다 뒤졌네.

마침 주막에 들기 다행이지 다른 데 있었더라면 만나지도 못할 뻔했네그려."
남궁두가 내민 종이에는 화담의 <홍연진결>을 푼 내용이 적혀 있었다.

- 두 차례 병란이 차례로 올 것이니

첫째 병란에서 수백만 명이 죽을 것이요,

둘째 병란에서 또 수백만 명이 죽으리라.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갈 것이며,
한양의 궁궐에는 왜구가 앉을 것이다.

오랑캐의 발 아래 우리 왕이 엎드리로다.
병란은 그치지 않아서 이 두 병란보다 더 큰 난이 이어지리니…"

"내가 베껴가서 풀은 내용은 여기까지일세.

다음에는 더 큰 난이 일어난다고 되어 있었네.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어서 이지함 선비를 찾아가 이 책을 보이든가,

아니면 우리라도 읽어 풀어서 대환란에 대비해야 할 걸세.

자네는 이 책에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가 적혀 있는지 모르네."
남궁두가 몹시 흥분하여 떠들었다.
"두가 흥분하는 것은 나도 이해하네.

만일 이 책에 왕조의 흥망과 정세의 부침이 자세히 나왔다면 보통 책이 아니네.

그것이 또 화담 선생이 쓴 것이라면 허투루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전우치도 남궁두를 거들었다.
"그 책을 가지고 이지함 선비를 찾아가세."
"안 되네. 화담 선생님은 내년 삼월에 전하라고 했네."
"일부러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하라는 말씀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 전이라도 이지함 선비를 만나면 전해줄 수 있는 게 상식 아니겠는가?"
"그렇긴 하네만,

미리 전할 바에야 화담 선생께서 지함 형님이 당신 밑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

줄 수도 있었을 것이네.

그때 전해야 하는 이치가 따로 있을 것이네."
"원, 답답한 사람.

화담이 돌아가시면서 지함이 산방에 언제쯤 온다고 한 것은

기다리면 그렇다는 것이고,

쫓아가서 주면 그게 그거 아니겠는가."
그도 그럴 듯하다고 정휴는 생각했다.
"그러세.

이 책이 그렇게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세.

마침 지함 형님이 이곳 홍성에 왔다 갔다고 하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걸세."
"혹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보여주게.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나 우리가 풀 수는 있다네."
"안 되네.

반드시 지함 형님에게 전해야 하네.

내가 약속한 것이네."
"알았네.

어서 이지함 선비에게 전하기로 하세."
세 사람은 곧 의견을 모았다.
"허나, 하루만 더 여기서 묵고 떠나세."
"왜 그러나? 당장이라도 떠나지 않고?"
남궁두가 재촉하였다.
"아니네.

내 여동생을 꼭 만나고 가야 하네.

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내세."
세 사람은 <진결> 이야기로 다시 들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포졸들이 주막에 들이닥쳤다.
"역적은 포승을 받아라!"
"이게 무슨 짓인가?"
"물을 게 있으면 관아에 가서 물으시오."
세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오라에 묶여 관아로 끌려갔다.
세 사람을 앞에 꿇어앉힌 현감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너희가 진정 역적 모의를 했더냐!"
"역적 모의라니요?"
"왕이 한양을 떠나고,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너희가 떠들지 않았느냐?"
아마도 주막에서 세 사람이 하는 얘기를 누군가 엿듣고 밀고한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우린 단지 책 한 권을 놓고…."
"무슨 책이더냐?"
정휴는 하는 수 없이 화담의 비결서를 내놓았다.
"이런 괘씸한 것들.

요망한 중과 술사들이 모여서 민심을 교란하고 있구나.

당장 하옥하라."
정휴와 전우치,

남궁두는 꼼짝없이 하옥되었다.
"도대체 무슨 벌을 주려고 이런담. 자

네, 남궁두.
우리 일진 좀 짚어보게.

이러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는 건 아닌가?"
"재수 없는 소리 말게.

난 겁이 나서 내 일진은 못 짚겠네.

그냥 기다리세."
"젠장.

제 것은 보지도 못하면서 남의 것은 어찌 그리 잘 봐."
"제 눈으로 제 얼굴을 보는 놈도 있나?"
이튿날 세 사람은 다시 마당으로 끌려가서 문초를 당했다.
결국 책은 빼앗기고 세 사람은 각각 곤장 열 대씩을 맞고 풀려났다.
역적 누명은 벗었지만 지함에게 전해야 할 책이 없어진 것이었다.
정휴는 난감했다.

책을 도로 찾아야 했지만 찾을 길이 막막했다.
재청이 주막으로 다시 찾아왔다.
"아직도 전갈이 오질 않네."
"그간 난 죽을 뻔 했네."
"웬일로?"
"지함 형님에게 전하라고 화담 선생이 내게 맡긴 책이 있는데,

그걸 현감에게 빼앗겼다네."
"그런가?

그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이 선비와 함께 돌아다니는 노인 말일세."
"새삼 그 노인은 왜?"
"누군지 알아냈네.

이 선비에게 책을 전해주라고 했다고?

화담 그 양반이?"
"그렇다네."
"이 선비와 함께 다니면서 왜 자네에게 그걸 전해주라고 했다는 건가?

잃어버려도 괜찮을 듯 싶네."
"무슨 말인가?"
"화담이라고 말했지 않은가?

그분이 이 선비하고 함께 이곳에 왔었다네."
"뭐라고? 화담 선생이 이곳에 오셨다고?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나야말로 무슨 말인가 도통 못알아 듣겠네.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돌아가셨다니…"
"화담 선생은 돌아가셨다네.

내 손으로 묻기까지 했단 말일세."
"허 참, 이곳 사람들에게 물어보게.

본 사람이 나만이 아닐세.

자네가 하도 이상하게 여기길래 내가 누군가 하고 알아보았더니 다들 화담이라고 하더군."
"이보게, 재청이.

자네하고 입씨름할 시간이 없네.
어서 이 서찰을 현감 부인에게 전해주게.

이번에는 실수가 없어야 하네."
"그러지.

그런데 자네가 왜 자꾸 현감 부인에게 서찰을 띄우는지 알 수 없네."
"그럴 일이 있으니 전해만 주게."
"알았네. 난 가네."
재청이 물러가자 정휴는 재청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화담이 지함과 함께 홍성에 왔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죽은 사람이 무덤을 가르고 다시 나왔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묻은 사람이 딴 사람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책은 무엇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화담은 분명히 죽었다.

<홍연진결>을 지함에게 전해주라고 이르고 세상을 뜨지 않았던가.
"여보게, 정휴.

자네 무슨 생각으로 현감 부인에게 서찰을 보낸 겐가?"
남궁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두고 보세."
이튿날 재청이 화담의 <진결>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서찰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현감 부인이 자네 편지를 전해준 그 아전에게 이걸 전하더라네."
"서찰은?"
"그렇지 않아도 그걸 물었더니 책이나 전하라고 하더래."
정휴는 현감 부인이 그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믿어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감이 빼앗은 <진결>을 빼돌릴 리가 없었다.
"편지는 받지 않아도 되네.

서로 알고만 있으면 되네."
"무슨 말인가?"
"아니네.

하여튼 재청이, 자네.

고생 많았네.
수고해 준 그 아전하고 술이나 나누게."
정휴는 엽전 꾸러미를 재청에게 건넸다.
재청이 나가자 정휴는 남궁두와 전우치에게 길을 떠나자고 했다.
"형님이 해남으로 떠나셨다네.

우리도 그리로 가세.
부지런히 걸으면 만날 수 있을 걸세."
"어서 가세."
세 사람은 해남을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