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함과 박지화는 화담산방으로 화담을 모시러 갔다.
화담은 산방 처마 밑을 유심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벌써 제비가 날아와 부지런히 흙과 지푸라기를 물어다가 집을 짓고 있었다.
"생각도 없는 저런 미물들이 때를 알고 제 집을
찾아드니 신기하지 않은가."
삼월 삼짇날, 어느새 봄이었다.
화담계곡의 얼음도 모두 풀려 잔잔한 물소리가
산방을 그윽하게 두르고 있었다.
산 아래쪽의 나뭇가지들은 새 잎을 틔우고 부지런히 물을 빨아올리며
긴긴 겨울의 잔해를 털어버리고 여린 연두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그만 떠나시지요.
부지런히 걸어야 내일 해지기 전에 한양에 도착할 텐데요."
"재촉하지 말게.
떠날 때가 되면 다 떠나게 되어 있는 게 인생 아닌가.
자네는 준비를 다 했는가?"
"준비라고 특별히 한 것은 없지만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이제 큰 공부를 하는 걸세.
물산(物産)과 지리(地理)와 인물,
이보다 큰 것은 없네."
"어서 떠나시지요."
지함이 화담을 채근했다.
이제 영원히 떠나려는 산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문턱에 앉아 있던 화담은
가벼운 봇짐을 짊어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생명의 기운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인지
늘 투명하던 화담의 얼굴빛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그렇게 앞장 선 걸음만은 지함이나 박지화 못지 않게 날렵했다.
개나리며 진달래가 며칠간 내린 봄비에 짓물러
진흙탕 길을 붉게 물들일 때 송도를 떠났는데,
한양에는 아직 봄은 오지 않고
안개 같은 봄빛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봄기운에 휘감긴 골목마다 푸근한 저녁 햇살이 따사하게 내리고 있었다.
한양에 들어서서는 한양 지리를 잘 아는 지함이 앞장섰다.
지함은 가는 길목이기도 하고 혹 형 지번이 청풍에서 돌아와 있을까 싶기도 해서
가회동 형의 집부터 들러보았다.
송도에서 화담문집을 정리하려고 선비들을 찾아다니던 중에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지방으로 좌천되었거나 귀양갔던 사람들 가운데
한양으로 복귀하거나 풀려난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은 까닭이었다.
대문을 두드리자 지함이 양주 봉선사로 길을 떠나고,
형 지번이 청풍으로 떠나고,
형수와 조카들마저 홍성으로 떠난 빈 집을 혼자 지키고 있던 하인이 달려나왔다.
하인은 지함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였다.
화담과 박지화를 사랑으로 모시게 해놓고 지함은 내당으로 갔다.
문이 열리더니 형 지번과 형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사이 세월이 흐른 탓일까,
지번은 핼쓱한 얼굴이었다.
지함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지번이고 보면 이제 쉰도 멀지 않았다.
많은 나이차 만큼이나 얼굴에 세월이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지함은 지번에게로 갔다.
지번이 청풍으로 떠날 때도 보지 못했으니 근 사 년만인 셈이었다.
"그래, 어떻게 지냈느냐?"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부모처럼 지함을 돌봐주던 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함의 실력을 높이 사,
자신은 말단 관직에 그칠 만한 작은 그릇이지만,
지함은 본래 큰 그릇이니 지함이 집안을 일으켜야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러면서 지함이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부족함 없이
뒷바라지 해주던 형이어서 지함은 자못 죄스럽기만 했다.
과거를 작파하고 대체 무엇을 할 거냐고 호통을 칠 법도 하건만
지번은 그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고 그동안의 안부만 물었다.
"형님께서는 별고 없으셨습니까?"
워낙 조용하고 은근한 성품이긴 했지만 지함에게만은 가차 없던 지번이었다.
특히 공부에 관해서는 더욱 그랬다.
그 지번이 자신과 상의도 없이 과거를 작파하고
사라져버린 지함에게 아무런 말도 없었다.
"늘 그렇지.
너는 어떠냐?
벼슬도 마다 하고 돌아다녔다니 그래,
뭐라도 찾은 게냐?"
"찾았다기보다는 찾고 있는 중이지요."
"그래.
나도 명세의 죽음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은데 너야 오죽했겠느냐.
요즘은 네가 부럽구나.
나도 훌훌 다 벗어던지고 떠나버렸으면 싶구나.
사는 게 왜 이리 구질구질한지.
백성을 이끌어야 할 벼슬아치들은 죄다 제 탐욕에 눈이 벌겋고
자리만 탐내고 있으니 과거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긴 명세의 죽음이 지함에게만 상처를 남긴 것은 아닐 터였다.
말수가 적고 조용한 지번이지만 마음만은 지함이나 명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명세처럼 불의에 대해 죽음으로 항거하지는 못했어도
지번은 벼슬길에 대해 환멸을 느낀 것이었다.
과거에 급제만 하면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을 것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번이 입궐하여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피비린내 나는 살륙뿐이었다.
그 사이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여기저기서 죽어가고,
유랑민이 먹을 것을 찾아 길을 가득 메워도
조정에서는 아무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전염병이 크게 돌아 나무토막 쓰러지듯 백성들이 곳곳에서
나자빠져도 조정에서는 훈구 대신과 사림의 싸움만 계속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배고픈 백성,
가난한 백성을 쥐어 짜 세금을 거두어들여서 호의호식하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숨을 죽이고 일만 해온 지번은 늘 고뇌 속에 빠져 있어야 했다.
싸움이 일단 끝나면 지방에서 올라오는 대신들은 세금이 적다느니
진상품이 형편 없다느니 하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고을 이름에 해(海)자나 도(島)자라도 들어가면
무조건 해산물을 진상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래서 충청도 진천의 해산(海山) 같은 고을에서는 나지도 않는 조기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러 해안까지 가서 조기를 사다가 진상하는 진풍경도 생겨났다.
그런 것을 본 지번이 분기탱천한 명세의 혈기를 따라
특정기를 지어 실록(實錄)에 넣는 것을 도왔다가 지방 군수로 좌천당하였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명세는 지번이 관련된 것을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도
비밀로 해 지번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풍파를 겪은 지번이 동생 지함의 속사정을 모를 리 없어
대과에 급제하고도 방랑하는 동생을 굳이 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문의 흥망이란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느냐.
세상이 이 지경인데 그 흙탕물 속에 빠지지 않는다고
욕할 조상님도 없으실 게다.
너는 네 뜻대로 살거라.
너야 총명했으니 부지런히 공부하다 보면 뭔가 잡히는 게 있을 게다."
"형님은 어쩌시렵니까?"
"나야 늘 이렇게 사는 것밖에 길이 있겠느냐.
불만은 많다만 너처럼 그것을 박차고 나올 기개는 없으니 이대로 숨죽여 살 밖에.
네 처자는 걱정 말거라.
호의호식은 못해도 굶주리게 하지는 않을 테니...
돌이켜보면 참으로 처량하구나.
작은 재주나마 벼슬길에 올랐을 때는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뭔가 해보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었는데
이제 벼슬길이 밥벌이밖에 되지 않는다니 말이다."
"형님."
"물러가 쉬거라."
요 몇 년 사이에 지번은 몇 십 년을 건너뛰어 부쩍 늙어버린 것 같았다.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며 지번은 벌써부터 그의 인생을 정리하는 듯했다.
지함은 조용히 지번의 방을 물러나왔다.
지번의 말이 옳았다.
뛰쳐나올 기개가 없으니
지번은 그 안에서 홀로 절망하고 고뇌하는 수밖에.
그러나 뛰쳐나온 자신은 또 뭐란 말인가.
자신 앞에 기다리는 것 역시 지번과 다르지 않은 고통이었다.
지번과 지함이 다른 점이 있다면 지함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반면
지번은 미래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었다.
화담이 지번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지번의 집은 연일 한양의 이름난 선비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화담산방에서 공부를 한 좌의정 박순은
화담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산방을 폐쇄했다는 이야기를 두고는
몹시 섭섭해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선생님께서 일신을 보전치 않으시고 제자들을 돌보심이 너무 지나치셨습니다."
그러나 화담은 박순에게도 빙그레 웃으면서 웃음으로 화답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 같았다.
"선생님,
주기론이니 주리론이니 성리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많습니다.
한 말씀 해주십시오."
"내게는 아무 말도 묻지 마시게.
이제 나는 명을 다 하고 한가로이 유람이나 다니는 객일세.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그물에서 벗어났다네."
그뿐,
화담은 내방객들의 질문에 일체 응답하지 않았다.
이틀간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가자,
화담은 지함에게 말을 해서 한적한 후원에 나가 별당에서 쉬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사흘만 쉴 터이니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게나.
음식도 소용치 않으니 자네도 오지 말게나.
내가 할 일이 좀 있네."
화담은 그렇게 말하고 별당에 들어가서는 사흘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박지화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여 별당 앞으로 가서 인기척을 내보았으나
화담은 묵묵부답이었다.
혹시나 그러다가 임종을 하면 어쩌나 하면서 노심초사했으나,
그래도 지함과 박지화는 화담이 도가 수련을 하기 위해서
그러고만 있을 것이리라고 믿었다.
사흘 동안 화담을 찾아온 선비가 몇몇 더 있었으나
아무도 화담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사흘이 지나자,
화담이 스스로 별당에서 나왔다.
사흘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은 화담이었건만 혈색도 그대로고 기운도 정정했다.
별당에서 나온 화담은 곧바로 지함을 불러 여행을 재촉했다.
"내가 한가하게 성리학에 중독된 학자들 하고
공론(空論)이나 하러 예까지 온 것은 아닐세.
어서 길을 떠나세."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화담 일행은 지번의 집을 떠났다.
지함이 한양에 온 소식을 전해들은 아내가 아들 산휘를 데리고 지번의 집으로 왔다.
그러나 지함은 막 길을 떠나는 중이었다.
이제 제법 의젓해진 아들 산휘는 공손하게 인사를 여쭐 뿐 지난번처럼 매달려 울지는 않았다.
어린 아이지만 매달린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알아버린 까닭일까,
아니면 밤손님처럼 불쑥 왔다가 홀연히 가버리는 아비에게 정이 들지 않은 탓일까.
한양을 벗어나 수원 쪽으로 길을 잡자 탁 트인 들판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밭 둑에는 여린 새 싹이 마른 풀들을 헤집고 나와 고개를 쏙 내밀고 있었고,
먼 들판에는 아지랑이가 한들거리고 있었다.
지함은 가슴을 활짝 열고 대지의 기운을 모두 빨아들일 듯 힘차게 숨을 들이쉬었다.
구수한 땅냄새,
용솟음치는 나무의 신선한 냄새가 온 몸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아지랑이 속에 둥둥 떠 있는 아스라한 길을 세 사람은 급할 것도 없이 천천히 걸었다.
띄엄띄엄 서 있는 초라한 농가에선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개들이
인기척에 느릿느릿 주위를 둘러보다가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다 싶었는지
맥없는 울음을 한 번 토해놓고 다시 까무룩히 잠이 들고,
바지개에 갇힌 노란 병아리들이 애처롭게 삐약거리고 있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겨우내 통통하게 살이 오른 황소를 끌고 논을 가느라 분주했다.
사람도 자연만물처럼 겨울의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농부들을 보고 있자니 지함은
화담 산방에서 보낸 지난 세월이 마치 꿈결처럼,
그림 속의 먼 산처럼 아득하게 여겨졌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지.
따뜻해서 돈없는 사람에게야 좋은 겨울이었지만
그때문에 더 추운 올 겨울을 보내게 될걸세.
모름지기 겨울은 추워야 하는 법. 보게나,
지금 싹이 돋고 잎이 나오지만 힘이 약하지 않은가.
여름 태양을 받아 이롭게 쓰려면 그 힘을 받아 이길
만큼의 힘이 있어야 되는데 수기(水氣)가 약했으니 걱정일세.
수기가 약하면 화기에 눌려 더 오그라드는 법인데...
게다가 수기가 약하면 전염병이 돌기 쉽다네.
화기가 적수없이 마구 날뛰니 그럴 수밖에."
그러고 보니 화담계곡을 찬란하게 물들이던 작년 봄에 비해
더 화사해야 할 남녘의 봄이 어딘지 맥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지함이나 박지화로서는
그 미묘한 기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해마다 오는 봄인데도 그때마다 난생 처음인 듯
물오르는 나뭇가지가 신비롭고,
먼 들판의 아지랑이에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질 뿐이었다.
박지화가 숨막힌 듯한 나즈막한 탄성을 지르더니
길가에 수줍게 피어난 진달래 꽃잎을 따들었다.
멀리서 오는 봄을 기다리다 못해 성급하게 뛰쳐나온 놈이었다.
"참 신기합니다, 선생님.
이 꽃이 겨우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사 나오는 것인지..."
마흔이 가까운 나이,
건장한 체구에 턱수염이 무성하게 돋은 박지화가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물주의 신비로운 주머니를 여는 열쇠꾸러미가
수기와 온기에 숨어 있다네."
"그렇다면 수기와 온기 아니고는 만물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얘깁니까?"
지함이 끼어들었다.
"그렇고 말고.
겨울을 나지 않은 볍씨는 싹이 돋지 않거나 돋는 힘이 약하다네.
콩이고 팥이고 진달래고 들가의 풀이고 모든 만물이 다 그렇다네.
그저 봄이 되었으니 저절로 피는 것이 아니라
겨울의 수기를 통해 성장을 시작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만물의 생을 주관하는 수기란 무엇입니까?"
세 사람은 조금 전 봄기운에 취했던 기분을 다 잊어버리고
날카로운 질문을 주고 받으며 느릿느릿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들길을 걸었다.
"수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얘기할 새가 있을 걸세.
정말 수(水) 속에 파묻혀서."
잠시 말이 끊겼다.
지함은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바로 앞의 돌부리에 채여 쓰러질 듯 휘청거리더니 고개를 번쩍 들면서 화담을 보았다.
"선생님.
그렇다면 언제라도 수기와 온기가 맞으면 씨앗이 나온다는 얘깁니까?
봄에 피는 진달래를 가을에 피게 할 수도 있겠군요?"
박지화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화담은 생각에 잠겨 묵묵히 앞만 보고 길을 걸었다.
"그래,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우리가 방에 불을 지펴서 따뜻하게 하듯이 좀 더 큰 공간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면
그 공간 안에 있는 만물을 봄처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함의 눈은 마치 신들린 무녀처럼 광기로 번득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아주 오랜 옛날에는 온돌도 없이 살았던 시절이 있다고 말씀 하셨지요?
그때였다면 한겨울에 따뜻한 방에서 콩나물을 길러 먹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라도 겨울에 콩나물을 기르고 있지요.
아주 먼 미래에,
우리가 죽고 없어지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우리가 불가능이라고 믿던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함은 자신의 몸이 마치 높은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짜릿한 긴장으로 팽팽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렇게 엉켜서 보이지 않던 혼란이
그 긴장 속에서 삽시간에 부연 안개를 뚫고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마경에 사람에 따라 일초를 그저 일초로 느낄 수 있는가 하면
그 찰나의 시간을 몇 억 년의 시간으로 느낄 수도 있다고 하더니,
지금 지함은 바로 그 엄청나게 긴 찰나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보게, 지함.
그건 천기를 누설하는 것이 아닌가?"
가당치 않은 말이라는 듯 웃음을 터트리던 박지화가
지함의 말이 스쳐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정색을 하고 물어왔다.
"아니, 아닙니다."
지함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빌지 않았다면 삶과 죽음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저 들녘의 황소를 보십시오.
힘들여 일을 하면서도 소는 제가 왜 일을 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소는 감각은 있되
생각은 할 수 없는 미물이지요.
그러니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계절이 오는 대로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제 머리로 생각할 줄을 압니다.
추우면 불을 지피고 솜옷을 해 입습니다.
천기를 알아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천기를 누설하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박지화는 놀라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지만
화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옳은 말일세.
천기(天機)란 언젠가 누설되는 법,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해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잘못 쓰고 잘 쓰고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요.
선생님.
기란 흐르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로 겨울로,
시냇물에서 바다로,
모든 기는 어디론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세상을 움직이는 기는 어디로 흐르고 있습니까?
만물이 그저 혼돈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흐름이라면
인간의 흐름 역시 그 속에 숨은 기의 질서가 있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천기를 알아 그 흐름을 올바르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함은 더이상 화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침묵에 잠겨 지함은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걸었다.
화담계곡에서 밤마다 하늘을 보고 느꼈던 절망의 한가닥이 풀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가도 인간은 남는다.
내가 설령 이 세상의 이치를 완벽하게 깨닫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뒤에 올 누군가가 나를 딛고 넘어서서 나아갈 것이다.
나는 겨우 그 디딤돌의 하나,
수없이 연결된 가닥의 하나를 이루어 내면 된다.
부처는 모든 것을 순환으로 보았고
그 윤회의 덫을 깨고 나오는 것을 해탈이라 했다.
도 역시 모든 것을 기의 흐름이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순환인가.
아니면 끝없이 위를 향해 가는 발전인가?
"선생님.
사물의 이치가 인간에게는 어떻게 작용합니까?"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산을 감싸안고 들판의 나무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화담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지함이 물었다.
"사람에게도 계절이 있다네.
사람의 계절은 다소 다르긴 하지만
대개 10년을 1년으로 하여
봄도 있고 여름도 있고 가을도 있고 겨울도 있다네."
차분하게 가라앉은 화담의 답이었다.
화담의 끝말이 채 봄바람 속으로 잦아들기 전에
지함의 물음이 꼬리를 이었다.
"사람마다 다 다른 계절이겠지요?"
"그렇지. 나는 이제 겨울 아닌가?
쓸쓸하고 희망도 절망도 없는 한겨울의 나목이 된 것이지."
"봄이 되어도 잘 자라지 못하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사람도 그렇습니까?"
"물론일세.
겨울을 잘 지내야 큰 봄을 맞을 수 있는 거지.
사람의 대운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야.
봄이야 저절로 오지만
그 봄에 어떤 나무든 다 잘 자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겨울을 잘 못 보내 얼어죽는 나무도 있고
힘이 약해져 싹을 틔워내지 못하는 나무도 있는 법일세.
준비가 있어야 기회를 맞는 거지.
이러다 한뎃잠을 자야겠네.
자, 얘길랑 뒤로 접어두고 부지런히 가세."
준비가 있어야 기회를 맞는다?
봄이야 평등하게 만물에게 다가오지만 사람의 조건이란 각기 다르다.
황진이나 기생 선화나 정휴가 그렇다.
그 불평등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그들 개인의 탓이 아니다.
사회와 제도의 굴레이다.
그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개개인의 준비만 있다고
봄이 다 같은 봄은 결코 아닐 터였다.
만물의 하나로서 세상의 부조리와 한 인간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지함의 머리 속엔 황진이의 쓸쓸한 뒷모습이며
기생 선화의 자조적인 웃음이며
정휴의 발버둥 같은 것들이
동시에 뒤얽혀 깊은 그늘을 만들었다.
부지런한 걸음으로 양지현을 지나 꼴깍재에 올라서자
저녁놀을 받아 불그스름한 미륵뜰이 눈앞에 훤하게 펼쳐졌다.
살아서 진천,
죽어서 용인이라더니
그런 말이 나올 법하게 용인 전체가 편안한 구릉지대였다.
미륵뜰은 제법 넓고 기름져 보였다.
"땅이 이만하면 큰 갑부가 있을 만하군요."
"자네 장기가 나왔구만.
자네처럼 물산에 관심이 많은 선비는 또 처음일세."
홍성현에서 농부들과 얘기를 자주 나눈 뒤로
지함은 늘 물산에 관심이 많았다.
농부들이 워낙 양반들에게 빼앗기는 양도 적잖았지만
더 큰 문제는 물산이 부족하고 현끼리 교통이 잘 안된다는 점이었다.
물산을 잘 알아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면서도
그때의 버릇 때문인지 어느 고장 말만 나오면
그곳 물산이 뭐고 소출량은 어떤지 유심히 살피게 되곤 했다.
꼴깍재 길을 따라 조금 비껴돌자
마루턱에 자그마한 주막 하나가 외로이 저녁놀을 지키고 서 있었다.
지함 일행은 잠시 목이라도 축이고 이곳 소식도 들을 겸 바쁜 걸음을 멈추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돋기 시작했지만
살집은 아직도 탄탄해 보이는 중년의 주모가 나타났다.
그가 서둘러 갖다주는 막걸리를 한사발 들이키고 나자
지함은 대뜸 주모에게 물었다.
"주모. 미륵뜰에서 제일 가는 갑부가 누구요?"
"저 황토재 안 진사지요."
주모의 목소리는 체구답게 굵직한 게 언뜻 들으면
힘께나 쓰는 장부의 음성 같았다.
"몇 석거리나 된답디까?"
"들리는 말로는 만석군이라고 한답디다만
난 그 집 구경도 못했수."
만석군은 하늘에서 낸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 만석군이란 전국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드물었다.
아무리 미륵뜰이 넓다지만 만석에는 부족할 텐데
뭔가 이상하다고 지함은 생각했다.
저 너른 미륵뜰보다 더 많은 땅을 가진 살림이란 게
지함으로서는 본 적이 없고 상상도 가지 않았다.
"선생님,
만석이라는 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상상이 안 됩니다.
이런 땅에서도 그런 거부가 나올 수 있습니까?"
지함이 못내 궁금하여 화담에게 물었다.
"있을 수 있지.
나는 물산만 보지 말고
그 물산을 움직이는 건 사람이라는 걸 한번 생각해보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미륵뜰이 비록 넓기는 하나 그것으로 만석이 안 된다면
그 이는 딴 방법으로 그런 물산을 모으는 것 아니겠는가."
"물산을 모은다구요? 그러면..."
"허허허,
그만 가보세.
가보면 알 수 있을 터이니."
화담은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지함은 주모에게 길을 물었다.
"황토재 안진사 집까지 예서 얼마나 걸립니까?"
"황토재까지는 이십 리니까 사내들 걸음으로야 금방이지요."
그래도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른 봄해는 짧아서 아직은 붉은 노을이 하늘을 덮고 있지만 금세 어둠이 닥쳐올 터였다.
"자, 그만 일어서지요."
지함과 박지화는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화담도 들었던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한 잔 가득한 막걸리가 조금도 줄지 않은 채였다.
"참, 선생님은 약주 한 모금 안 드셨습니다."
"목이 마르지 않으니 그렇지..."
박지화가 화담에게 물었으나 화담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청명이 지난 산하는 온통 연록색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연록색은 조금씩 짙어져갔다.
단풍색깔이 하루가 다르다고 하더니
봄의 신록은 시시각각이 달랐다.
산등성이 하나만 넘어도 색깔의 차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죽음이 머지 않은 화담은
일행의 맨 앞에 서서 들의 정취를 흠뻑 들이마시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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