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밝은 별빛이 화담계곡의 휜 굽이로 쏟아져내렸다.
얼음이 풀리기엔 겨울의 꼬리가 너무 길었다.
얼음장 밑으로 끈질기게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깊은 밤속으로 흘러들었다.
정월 보름이 얼마 남지 않은 달은 점점 제 속살을 채워올리며 둥글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아!"
계곡의 널찍한 바위에 앉아서 몇 시간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지함의 입에서 나즈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밤하늘을 보면 볼수록 지함은 이제까지 알아왔던 모든 것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먼지처럼
보잘 것 없이 저 막막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버리는 느낌이었다.
화담에게 천문(天文)을 배운 이후로 지함은 늘상 밤이면
짐승들의 처량한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계곡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하늘을 보고 또 보았다.
그동안 지함이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인간의 왜소함,
그리고 지함 자신의 무지였다.
저 광활한 우주의 시작은 어디이며 끝은 어디인가.
아무리 삼라만상이 한 법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가슴으로 안기에는 너무도 광활했다.
도대체 저토록 까마득하게 큰 세상을 빚어놓은 기(氣)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생겨났고 어디로 흘러가는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
그저 주어져 있으며 영원한 것...
지함은 이 말을 새기고 또 되새겼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 유한하다.
들판의 풀도 나무도 나면 반드시 죽으며,
날벌레 하나도 모두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발버둥친다.
하다 못해 끊임없이 흐르는 것 같은 계곡의 물도
바람에 마르고 햇볕에 말라 그 생명을 다 한다.
민이도 명세도 그 처음과 끝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지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
그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천문(天文). 하늘의 말.
하늘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꼭 배워야 한다면서
북창이 가르쳐주고 화담이 보태준 천문.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느라고
하늘은 저렇게 무수한 눈을 깜박거리는지 지함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 많은 말을 다 알아듣기도 어렵지만,
하늘은 왜 저렇게 할 말이 많은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저 광활한 하늘이 '나'와 근본이 같은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화담의 말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하늘은 광대무변한 얼굴로 지함을 들여다보았다.
해석되지 않는 얼굴,
알 수 없는 얼굴,
그것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요즘 들어 지함은 자신의 육체를 내던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육체가 있어 인간이 나무나 풀이 아니라 인간일 수 있는 것일 테지만,
인간이게 한 바로 그 육체가
이제는 또다시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북창을 만났을 때,
지함은 자신이 살아왔던 세상과 새로 맞닥뜨린 세상이
한 하늘 아래에 있으면서도 그토록 다르다는 사실에 전율했었다.
그리고 화담의 기론(氣論).
화담에 의하면 세상 만물의 이치를 주관하는 기는 무극이며 태극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형상을 한 누가 감히 태극을 알 수 있겠는가?
밤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을 보면서 지함은 끝모를 좌절감에 젖어들었다.
지함은 또다시 벽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과연, 석가는 알았을까?
공자는 알았을까?
그들은 고민하지 않고 흡족하게 살았을까?
화담은 그런 고민도 없이 살아가는 것인가?
그때였다.
제법 커다란 유성 하나가 빠른 속도로 동쪽 하늘을 비켜 흐르더니
태사성(泰史星)과 부딪치며 떨어져 내렸다.
유성과 부딪친 태사성은 잠깐 밝게 빛나더니 곧 희미하게 빛을 잃어갔다.
하기사 별이라는 것도 사람이나 다름없이
태어나고 죽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어느날 갑자기 보이지 않던 별이 희미하게 나타나면서 빛나기 시작한다.
또 어떤 날에는 떨어지는 유성만도 수백 개나 되었고,
초저녁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별자리가 새벽이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기도 했다.
별 하나 없어지는 것쯤 무슨 대수일 리가 없었다.
그만큼 새로 생겨나고 자라고 옮겨다니므로.
그러나 지함은 그날따라 태사성에 오래도록 눈길을 붙였다.
또 누군가가 죽어가는구나.
모든 것이 무극에서 나고 무극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인간은 왜 삶과 죽음에 그토록 연연해 하는 것일까.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집착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런 집착이 없다면 인간은 또 무엇이겠는가.
지함의 가슴과 밤의 정기가 함께 어우러진 것일까,
잔잔하던 숲 속에 돌연 음산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멀리 산방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화담이 혼자 있을 산방,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불을 밝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여느 날처럼 지함과 산방 학인들은 화담
앞에 다리를 포개고 화담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인지 허공을 향한 시선으로 오래도록 말이 없던 화담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오늘부터 산방을 폐쇄하겠네.
내 갈 길이 너무 급해서 갑작스럽게 정한 일이니
다들 남은 공부는 각자 마치도록 하게나."
문득 지함의 눈 앞에 빛을 잃어가던 태사성이 떠올랐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런 낌새가 없던 일이라 학인들은 몹시 수근거렸다.
유형원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화담에게 여쭈었다.
"아직 공부가 멀었는데 갑자기 산방을 닫으신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어제 천문을 본 사람이 있는가?"
"제가 봤습니다."
화담은 빙그레 웃으며 지함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무엇을 보았나?"
"태사성이 유성을 맞고 빛을 잃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태사성이 바로 날세."
학인들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긴장하지 않은 사람은 지함뿐이었다.
화담에게 기를 보내주는 별이 유성을 맞고 비틀거렸다면
그것은 곧 죽음이 멀지 않다는 이야기나 같은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 머물 날이 머지 않았다네.
내 갈 길이 급해서 이렇게 갑작스레 정한 것이니 분해하지 말게나들."
학인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선생님.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어디 가서 남은 공부를 마쳐야 합니까?"
수염이 덥수룩한 유형원이 볼멘 소리로 사정했다.
유형원이 치를 과거가 몇 달 남지 않은 때였던 것이다.
화담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우리와 함께 하진 않는다네.
그렇다면 우리가 구태여 힘들게 세상의 진리가 무엇인지 공부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모든 것이 그렇듯 우리에게도 헤어질 시간이 닥친 것뿐.
자꾸 과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네.
진리란 어디에나 있는 것.
내 스스로 찾아내는 것.
내게 더 배우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자네들이 진리로 한 발 더 바싹 다가가는 지름길일 수도 있을 터이니...
그만 물러들 가게나."
학인들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하직 인사를 올리고 자리를 떠났다.
머뭇거리던 유형원까지 떠나가고,
남은 사람은 지함과 박지화였다.
과거와 벼슬을 목표로 공부하지 않는 학인은 둘뿐이었던 것이다.
"선생님.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인간이 이별을 앞두고 이전의 정을 돌아보는 것이야 인지상정 아닙니까?"
박지화의 말에 화담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배움에 대한 욕심을 탓할 수는 없는 것.
어딜 가도 선생님과 견줄 만한 스승이 없으니
더욱 서운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덧붙인 지함의 말에도 화담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라니?
나는 지식을 가르친 것이 아닐세.
진리로 나아가기 위해 지식으로 가려진 눈을 틔우려 했을 뿐.
그런데 학인들은 눈을 틔우기는커녕
또다른 지식의 덫을 파고 있을 뿐이었나 보네."
화담의 말은 옳았다.
마지막까지 머뭇거리던 유형원이 그나마 가장 진지하고 열성적인 사람이었으나
그마저도 결국은 저 혼란의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에게는 그 세상에서 인정받고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가치였다.
"죽기 전에 세상이나 두루 여행하고 싶다네.
내가 소시적에 전라도와 경상도를 다니면서 일차 견문을 한 적은 있으나
깊이가 없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지금이라도 하고 싶네.
내 굳이 화랑이나 도인,
고승들을 흉내내려는 것은 아니고,
죽기 전에 한번 내 마음을 되비쳐보고 싶어서라네.
그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땅을 한번 돌아보고 싶은 것일 뿐.
나와 함께 팔도를 돌면서 이 땅을 둘러볼 뜻이 있는가?"
"선생님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가겠습니다."
박지화가 대답했다.
지함도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화는 지함보다 근 열 살이나 더 많았지만
모든 일에 있어서 지함보다 더 열심이었다.
이따금 지함에게 질투를 느끼고 서운해 하는 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감정 처리가 깨끗했다.
가끔 지함은,
마흔이 가까운 나이임에도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박지화를 보면서 가슴이 저려오곤 했다.
젊은 시절엔 누구나 무모하리만치 열정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가망 없는 일에는 열정이 움직이지 않고,
새로운 일에는 뛰어들고 싶지 않은 법이었다.
불혹이라는 나이,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든 나이에도 여전한 열정으로 진리를 찾아가는 박지화의 모습은
결과는 둘째치고 열정 그 자체만으로도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그대들은 벼슬이 탐나지 않는 것인가?"
두 사람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쯤은 화담도 잘 알고 있었다.
"벼슬을 구하려고 했다면 선생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지화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함은 입을 꽉 다물고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누구나 시작은 그렇지.
그러나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한,
세상을 완전히 뿌리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세.
불가에서처럼 부처라도 의지할 수 있다면 모르되,
우리가 찾아가는 길에는 내 자신뿐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더우기 우리가 살아 생전에 과연 도를 깨우칠 수 있을지도 의문 아니던가?
나야 그대들보다 세상을 버리기가 쉬웠던 셈일세.
원래 주어진 것이 없었으니.
과거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던 내 처지가 한때는 견딜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지.
그때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절망했었지.
그런데 그대들은 무엇을 믿고 주어진 것을 버리려 하는가?"
박지화도 지함도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을 쏘아보는 화담의 눈길은 거센 불길처럼 뜨거웠다.
"그대들은 무엇을 믿는가?
무엇을 믿고 세상을 버리려 하는가?"
화담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지함은 눈을 내리 감고 입술을 물었다.
사실 엊저녁,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절망했던 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화담산방에 온 이래 지금까지 단 하루도 의심없이 지나간 날이 없었다.
지함의 가슴 속에서도 뜨거운 불길이 솟구쳤다.
폭풍우 뒤끝의 화담계곡처럼 지함의 입에서
걷잡을 수 없는 말들이 거세게 흘러나왔다.
"아직 아무 것도 믿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완벽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믿어서,
처음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고고성을 터뜨리며 나온 것이 아니듯이.
인간의 출발은 의문과 의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지요?
제가 믿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안에서 시작하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따라 과거를 보고 급제를 하였으니
당장 조정으로 달려가 품직이라도 받아내게.
그러고 나서 그 안에서 의심하고 의문하면 되지 않는가.
자네는 대과를 스스로 버렸는가,
아니면 잃었는가?"
"아니오. 아닙니다."
지함은 단호하게 화담의 말을 잘랐다.
"저는 보았습니다.
세상 안에서 진실을 찾아보겠다던 제 친구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또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신분 질서에 갇혀
굶주리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 세상 안에서 무엇을 의심하지요?
그 안에서는 의심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의심하는 자에게는 죽음이나 절망이 기다릴 뿐이지요.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도가 구현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찾으려고 선생님께 왔고,
지금 그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 자네는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고 싶습니다.
제 하기에 따라서 찾을 수도 있겠지요.
아니 어쩌면 아무리 해도 못 찾을지도 모릅니다.
진리란 게 이 세상에 아주 없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 아닙니까?
저도 지함과 마찬가지입니다만,
제가 진리를 찾지 못한다 해도 좋습니다.
요즘은 불쑥 진리란 완벽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바쳐 찾아가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지함의 말을 자르고 툭 튀어나온 박지화의 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자들의 말을 듣는 화담의 얼굴이 밝아졌다.
"떠나는 날짜는 삼월 삼짇날로 하세.
내가 늙은 몸을 추스리려면 그 정도는 날씨가 풀려야 나다닐 수 있을 테니."
지함과 박지화의 말이 끝나고 한참 만에 입을 연 화담은
조금 전 자기가 그토록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문제는 다 잊어버린 듯 다시 언급이 없었다.
"날짜를 왜 그리 늦게 잡으십니까?"
삼월 삼짇날이라면 근 달반이나 남아 있었다.
"준비를 할 게 많다네.
사람 하나 왔다 가는데에 일이 없을 수 있나.
산방과 가재도구를 팔아 여비도 마련해야 하고.
그동안 써놓았던 책도 정리하여 문집으로 엮어야겠고.
내가 누울 자리를 살피는 동안 두 사람은 각지의 지형이나 물산,
인물 들에 대해 좀 연구를 해보게나.
자연 경치를 벗삼아 놀러다니는 게 아닌 바에야
미리 준비를 해서 빠짐없이 보고 오는 게 좋지 않겠는가?"
생각보다 준비해야 할 일이 꽤 많았다.
전국 각지의 지형만 해도 제대로 나와 있는 지도 하나 없었다.
하긴 작은 것은 보되 큰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
넓은 땅의 모양새를 제대로 그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어쨌거나
대충의 위치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박지화가 화담의 문집을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일거리는 점점 더 많아졌다.
자신의 글에 별로 애착을 갖지 않는 화담이라,
수중에 남겨둔 필사본 하나 변변히 없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지함과 박지화는 송도의 이름난 선비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그동안 그들이 화담에게서 배울 때 강의 내용을 적어 놓았던 글을
다시 빌어다 몇날 며칠이고 밤을 꼬박 새워 베껴야 했다.
화담 산방에 머문 지 고작 일 년이 넘은 지함으로서는 처음 보는 글들이 더 많았다.
누구나 자기 말과 글의 색깔이나 냄새가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화담은 말보다는 글이 훨씬 깊고 그윽했다.
일 년간 강의를 들어온 지함조차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지함은 간혹 부지런히 놀리던 붓을 놓고 생각에 잠겨들곤 했다.
화담의 나이 이제 쉰다섯.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 만한 깊이를 얻기까지
그가 겪어야 했을 고통과 절망이 가슴을 울렸다.
이만한 학식을 가지고도 신분 질서를 혐오하여 관직에 오르지도 않고
깊은 산중에서 제자들을 길러온 화담이 이루려고 하는 도는 무엇인가.
태사성. 유성. 여행. 그리고 삼월삼짇날.
모든 게 화담의 마지막을 알리는 말이었다.
태사성이 빛을 잃고,
따라서 화담이 죽어가고...
그런데 화담은 어떻게 여행을 하겠다고 나서는지 알 수 없었다.
일 년씩이나 수명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별이 화담의 정기를 맡고 있었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화담의 수는 이미 끊겨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 년여 동안 팔도를 돌아다니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지함은 북창을 만났을 때부터 팔도여행을 한 차례쯤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조선의 도인 치고 조선의 산천 경개를 두루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신라적 화랑(花郞)과 선화(仙花)는 이 산 저 산 옮겨다니며
산중에서 수도를 했다고 북창이 말했었다.
그런데 마침 스승 화담이 팔도주유를 떠나겠다고 하니 지함도 선뜻 나선 것이었다.
주유를 떠나기로 한 삼월 삼짇날을 며칠 앞두고 화담에게서 전갈이 왔다.
산방으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렇다네."
"자네에게 이를 말이 있네."
"말씀해 주십시오."
"자네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돋구어야 하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중생을 사랑하지 않는 부처는 부처가 아니지.
신분을 떠나 큰 마음으로 조선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게.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는
불가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위로는 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라는 말 아닙니까?"
"맞는 말일세.
도를 구하는 한편 백성을 보살피라는 말일세.
유가, 도가, 불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세.
도가를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니 이 말 명심하게."
"예."
"백성을 구제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네.
자네는 무엇으로 백성을 구제하겠나?"
"아직 그런 곳에까지 마음이 미치질 못했습니다."
"내가 이르겠네. 그
렇지 않아도 자네의 관심이 운명학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네.
그걸 철저히 연구하여 이 땅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 되게.
중국에서 운명학이 일어났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사람과 중국 사람은 본디 성정이 다르고
사는 지리가 다르기 때문에 맞지 않다네.
자네가 우리 백성을 위하여 바른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나누어주는 길을 열어보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북창이 웬만한 것은 가르쳤을 것인즉 내가 책을 하나 써줌세.
그걸 바탕으로 연구를 하게.
이번 여행을 하면서 지리와 물산,
그리고 인물을 자꾸 만나다 보면 저절로 깨우치는 게 있을 걸세.
지금 있는 책들은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없으니
조선 사람이면 쉽게 읽고 실천할 수 있는 운명서를 쓰게."
화담은 지함의 길을 가리켰다.
운명.
지함의 앞에 펼쳐질 새로운 앞날.
조선인을 위해 꼭 필요한 운명서를 쓰라는 화담의 말이 머리 속에 메아리쳤다.
지함은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차라리 머리 속이 뚫어져라 하고 낯선 세상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그런 낯선 세상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뛰어들고 싶은 것이 지함의 마음이었다.
지함은 그렇게 지함이란 한 인간의 몫으로 주어진 세월을 한꺼번에 써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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