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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 소설^토정비결(上-11)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거든

구뷔구뷔 펴리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01936

 

황진이 서화담 아무 일 없었을까?

오 마이 섹스3 - "나는 프리섹스를 원한다"

www.ohmynews.com

 

화담 계곡에 가을이 깊었다.
지함이 화담산방에 입문한 지도 어느덧 반 년이 되었다.
물은 더욱 짙은 청색으로 바뀌어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산방 앞의 은행나무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누렇게 물든 잎을 안타깝게 떨구고 있었다.
강의를 듣고 산을 내려올 때면 이른 어둠이 송악산 계곡에 밀려오곤 했다.
은행나무에 잎이 한두 개 외로이 남아 있을 즈음이었다.
공부를 끝내고 산방을 나서던 지함은 은행나무에 기대선 한 여인을 발견했다.
여인은 산방 쪽을 등진 채 계곡을 향해 서 있었다.
서러운 저녁노을처럼 짙은 자줏빛 치마가 간혹 불어오는 바람결에 휘날리고 있었다.

학인들이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여인은
학인들이 은행나무 곁을 스칠 때까지 그렇게 숙연한 자세로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담 산방에 여인네라니, 묘한 일이었다. 그

것도 여염집 여자 같지 않게 화려한 차림의 여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학인 한 사람이 슬쩍 곁눈질을 했다가

화들짝 놀라면서 곁에 있던 지함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보게. 송도 삼절 황진일세."
그때였다.
"여보세요."
막 앞을 지나가는 학인들을 여인네가 불러세웠다.
"여기가 화담산방 맞나요?"
그제야 학인들 모두 호기심에 빛나는 눈길로 일제히 여인을 돌아보았다.
과연 천하절색이라는 말이 나올 법한 미인이었다.
당돌하게 뭇 남자를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꼬리가 활처럼 휘어 있었다.

가느다란 눈썹은 말 그대로 초승달이었다.

진분홍빛으로 빛나는 도톰한 입술이며 발그레한 뺨,

나무를 짚고 선 길고 가는 손가락까지 솜씨 좋은 석공이 빚어놓은 작품 같았다.

 

"맞습니다."
"화담 선생님을 뵈오려면 어떻게 해야지요?"
목소리까지 이른 아침의 꾀꼬리를 닮은 듯,
높디높은 창공으로 솟구치는 종달새를 닮은 듯 맑고 투명했다.
"지금 산방에 계십니다."
학인들의 눈이 모두 황진이의 거동에 쏠렸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황진이는 치마꼬리를 사려쥐고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깃털처럼 가벼운 황진이의 걸음에 은행잎 바스라지는 소리만

가을 햇살에 저물어가는 산을 울렸다.
학인들 중 어느 누구도 발길을 떼지 못한 채 황진이의 요염한 뒷자태만 넋을 잃고 응시했다.
문 닫힌 산방 앞에서 황진이는 두어 차례 헛기침을 했다.
"뉘시오?"
"소저, 황진이라고 합니다."
산방에만 묻혀 사는 화담이지만 그 유명한 기생 황진이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화담의 대답은 태연하다 못해 쌀쌀했다.
"무슨 일이시오?"
"선생님의 고명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들어오시오."
황진이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거침없이 산방으로 들어갔다.

황진이가 산방으로 들어가자 학인들의 입방아가 시작되었다.
"이보게.

저 여인이 지족(知足) 선사를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것만으론 부족했나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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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와 서경덕, 지족선사의 사랑 이야기

황진이와 서경덕, 지족선사의 사랑 이야기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황진이는 용모가 출중했고 뛰어난 총명성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춘 여성이었다. 노래 뿐만아니라 학문에도 정통했��

blog.daum.net

이제는 우리 스승님까지 황진이의 덫에 걸려들었구만."
학인인 유형원이 혀를 차며 탄식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함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닐세.

이번에는 황진이가 참패를 당할 걸세."
"천만의 말씀.

40년 간 수도에 정진했다는 지족 선사도 황진이 앞에 무너지고 말았네.

저 고운 자태를 보게나.

더욱이 황진인 글에도 웬만한 선비보다 능하다 하지 않던가."
유형원의 답변이었다.

다른 학인들 역시 유형원과 비슷한 생각인지 어두운 표정들이었다.

지함만이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지족 선사야 있는 걸 무조건 부정했던 사람 아닌가.

있는 걸 없다고 눈 감았으니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넘어갈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스승님은 다르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우주의 기이며 그 기의 결합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걸 누누이 말해오지 않으셨나.

분명히 그 기의 쓰임새도 잘 아실 걸세."
그러나 유형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론이야 어찌 됐든 스승님도 남자가 아닌가?
생명을 가진 남자라면 저만한 여자 앞에서 어찌 태연할 수 있겠나.

한양의 내노라하는 선비들까지 황진이와 하룻밤을 갖지 못해서 안달이 아니라던가?"
"지금까지 공부는 무엇하러 했는가?

단지 알기 위해 공부를 한 건 아닐세.

앎으로 변화하는 것이 진리를 깨치는 이유가 아닌가?

입으로만 진리를 말한다면 어찌 진리를 깨쳤다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스승님이 황진이에게 무릎을 꿇으신다면 나는 당장 이 산방을 떠나겠네.

그러나, 나는 스승님을 믿네."
"이보게. 그러면 우리 내기를 하세."
학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박계순이었다.
"지는 쪽이 술을 한 잔 내게나.

다들 오랫동안 술에 굶주렸을 것이니 이번 기회에 회포나 한번 풀어보세."
유난히 술을 좋아하는 유형원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함도 찬성이었다.
"좋네, 그럼 누구 나와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 없나?"
"나도 자네에게 걸겠네.

나는 자네 같은 확신은 없네만 그러길 바라는 마음일세."
그동안 맞장구도 치지 않고 잠자코 있던 박지화가 지함 쪽으로 다가왔다.
학인들은 숨을 죽인 채 지함이 쌓은 돌탑 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산방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께서는 기로써 세상이 움직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의 연정도 다 기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가는 목소리인데도 황진이의 말은 돌탑 있는 데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화담은 황진이의 가시 돋친 말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기만 했다.
"그럼 남녀가 서로를 찾는 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입니까?"
황진이는 화담의 앞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직선적으로 말을 던졌다.
"물론일세.

남녀의 만남이 있고 나서야 사람이 생기지 않는가.

그걸 어찌 부끄럽다 하겠는가."
"그럼, 선생님. 저를 안아주십시오.

저는 선생님과 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황진이는 촉촉하게 젖은 눈길로 애원하듯 화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화담의 얼굴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오래 된 고목나무처럼 차분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보게.

소문이야 늘 부풀게 마련이지만 자네는 소문보다 못한 모양일세. "
황진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새초롬하게 토라진 얼굴이 한결 더 매혹적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음을 들여다보게.

 

남녀의 교접이 생명을 탄생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닐세.

태어난 생명이 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건 이미 생명이 아닐세.

자신의 기를 이 세상의 이치에 맞도록 잘 운용하는 것이 각자의 일이네.

그런데 자네는 자네의 소중한 기를 쓸모없는 일에 버리고 있구만."
화담의 뼈 있는 말에 황진이는 발딱 일어섰다.
그리고는 한껏 요염한 자태로 화담을 응시하며 서서히 옷고름을 풀었다.
숱한 남자들이 스쳐갔건만 처녀의 것처럼 수줍은 가슴이 둥그스름하게 솟아 있었다.

저녁놀이 문풍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지를 타고 들어온 붉은 노을이 황진이의 살갗을 더 붉게 비추어 주었다.
황진이는 부러질 듯 가느다란 허리를 틀어 치마끈을 풀렀다.

자주색 치마자락이 황진이의 미끈한 다리를 휘감으며 흘러내렸다.

오뉴월 파닥이는 은어처럼 매끄럽고 싱싱한 두 다리 사이로

은밀하게 숨은 무성한 숲이 바로 화담의 눈 앞에 있었다.
"선생님. 마음 대로 하옵소서."

 

착착 감겨드는 목소리였지만 황진이의 얼굴에는
자존심을 다친 여자의 숨겨진 발톱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황진이는 낙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담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담담한 눈빛으로
황진이의 맨 몸을 바라보며 숨결 하나 거칠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느 남자나,

심지어는 지족 선사까지도 황진이의 벗은 몸 앞에서는 거친 숨을 몰아쉬지 않았던가.

그런 남자들을 비웃어주는 것이 황진이의 낙이었다.

그런데 지금 담담하게 앉아 있는 화담에게만은 묘한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옷을 벗고 있다는 수치심은 아니었다.
"과연 듣던 대로 아름다운 몸일세.

그러나 육신이 우리에게 무엇이던가.

자네의 아름다운 몸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흙으로 돌아가고 말 걸세.

왜 거기에 집착하는가."
화담의 말은 점점 매서지워지고 있었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지요.

무엇하러 누구에게나 닥치는 죽음을 두고 벌써 두려워합니까?
모든 남자들이 탐내던 몸이옵니다.

선생님은 탐나지 않으십니까?"
정작 그렇게 말하는 황진이조차 자신의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낯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화담의 말이 옳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함은 황진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황진이.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다.
글재주는 있었지만 여자였고 더욱이 몸을 파는 기녀였다.

아무리 시를 읊어봐야 기생의 신분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내노라 하는 양반들을 발 아래 엎드리게 하는 건

실상 황진이에게 아무런 기쁨도 주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한 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양반들의 우스꽝스런 겉치레를 놀려주기라도 하듯 잠자리에서

대담하고 요염한 종마가 되어 소리를 지르고 펄펄 뛰어다녔지만

그야말로 일순간인 폭풍이 걷히고 나면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회한과 허무가 밀려왔다.
어쩌면 그렇게 황진이는 남자들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혀 온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 속에서 한줄기 구원의 빛을 기다렸다.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그러나 모든 남자가 그녀의 몸에 눈을 빛낼 뿐

이상은 관심이 없었다.

몸에 대한 집착은 너무도 분명한 끝이 있음을 황진이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몸에 대한 남자의 집착이 끝나기 전에

먼저 그들을 내어찬 것일 뿐이었다.
지족 선사가 조금 다르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커서

황진이의 고통이나 바람을 치유해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화담은 알아준 것이다.

기생이 아니라,

몸이 아니라

무언가 진실을 알고자 허우적대는

자신의 본심을 알아준 것이다.
"허허.

정 그대의 생각이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골랐네.

그대 같이 영특한 사람이 어찌 그걸 모르는가.

어린아이와 노인은 남자가 아닐세.

그저 사람일 뿐.

그대의 이름을 듣고 비록 여인이지만

제법 빼어난 기운이 있다 여겼더니만…"
"만일 선생님께서 젊으시다면 저를 취하시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늙었다고 예전의 화담 선생님이 아니시옵니까?"
"그런데?"
"잠자고 있는 춘기(春氣)를 깨우십시오."
"허허허. 춘기를 깨우라고?

허허허."
"제가 깨워드리겠습니다."
황진이가 화담에게 다가갔다.

황진이의 둥그런 젖가슴이 화담의 코앞에서 출렁거렸다.

빙 한 바퀴 돌았다.

풍만한 둔부가 매혹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러나 화담은 표정 하나 흐트리지 않았다.

 

靑山裏 碧溪水야

水易感을 자랑마라

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난 아닐세."
화담의 음색(音色)은 겨울 빙판처럼 차가웠다.
이미 옷을 다 벗은 황진이는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한편으론 화담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한편으론 알지 못할 오기가 치솟았다.
달아오른 얼굴로 황진이는 한동안 그린 듯 앉아 있었다.

계곡에서부터 밀려올라온 어둠이 어느새 산방까지 스멀스멀 기어들고 있었다.
화담은 굳이 시선을 떨구지 않고 잔잔한 미소를 띄우고 황진이를 바라보았다.
"몸이 비록 늙어 내 몸으로 자네를 취할 수는 없지만

내 기로는 자네의 기를 취할 수는 있으니 그대로 앉아 있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마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런 채 한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한동안 화담의 눈을 주시하던 황진이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혔다.

허리가 움찔움찔 움직이며 황진이의 이마에 땀이 송송 배어나왔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낮으막한 신음소리가 고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학인들은 초조해 했으나 그뿐이었다.
마침내 황진이는 고개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자줏빛 옷고름으로 이마에 배인 땀을 훔쳐냈다.
황진이는 화담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이제 우리의 기(氣)가 통했으니 이(理)가 통할 날도 있으리라."
돌아서서 산방문을 나오는 황진이의 등 뒤로 화담이 부드럽게 말했다.

돌탑 옆에 무리지어 앉아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학인들에게는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등잔불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만 창호지에 내비칠 뿐이었다.
두 사람은 별 대화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가 황진이가 화담에게 큰절을 하더니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학인들을 봤을 법도 하건만 황진이는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어둠을 빨아들이듯,

아니 어둠 속에 빨려들 듯 천천히 계곡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술을 사야 할 학인들은 오히려 싱글벙글 웃고 있는데

지함과 박지화만은 점점 짙어가는 어둠을 마신 듯 고뇌 서린 표정이었다.
"이보게. 술을 사더라도 기분은 좋네.

이런 술이야 열두 번도 사겠네."
유형원의 떠들썩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지함은 뛰다시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이보게, 이보게, 어디 가는가.

술 안 마실 텐가?"
유형원의 목소리가 뒤로 점점 멀어져갔다.
황진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을 걷고 있었다.

지함의 다급한 발소리에도 황진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보시오. 잠깐 기다리시오."
그래도 황진이는 못 들은 체 걸음을 계속했다.
간신히 황진이를 따라잡은 지함은 숨이 차서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이제 어디로 가시겠소?"
지함은 황진이가 더이상 송도에 머무리지 못할 것이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제?"
아침 첫 햇살에 연꽃이 벌어지듯 황진이의 아름다운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서렸다.
"짖궂은 분이시군요.

제가 어쨌게요?"
"......"
"제가 화담 선생을 꺾지 못했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런 말은 저만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께도 누가 됩니다."
황진이가 방그레 웃었다.
"제가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금방 함박꽃처럼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았던 황진이는 쓸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함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 여인을 왜 ㅉ아왔던가.

화담을 정복하지 못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인가?

대체 어디로 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답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모르는 것을 선비님이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발 닿는 대로 떠나볼까 싶습니다.

선비님의 따스한 마음은 받아두도록 하지요."
생각보다 그릇이 큰 여자였다.
어딘가 그늘이 서린 웃음을 띤 채로 황진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참, 선비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존함이나 알아두어야지요."
"이지함이라고 하오."
"그럼, 이 선비님.

기생 황진이는 죽었노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소식이나 전해주십시오."
멀어져 가는 황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지함은
문득 정휴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지 걱정스러워졌다.
정휴가 금강경을 보고 감동에 젖어 있을 때 뭐라고 했던가.

사람이란 자신의 처지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고…

물론 그건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어땠는가.
인간 누구에게나 고통이야 물론 없을 리 없지만
지함은 적어도 날 때부터 신분의 제약으로 고통받지는 않았다.

먹고 자는 것이 날 때부터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휴는 제 손으로 밥을 벌어 먹어야 했으며,
황진이는 몸을 팔아 먹고 살아야 했다.
신분이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휴에게 매정하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정휴가 좀더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지만,
정휴가 그 말로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황진이나 정휴는 자신들이 선택하지도 않은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허우적대고 있는데,

지함은 그들이 올바른 것을 보지 못한다고 무턱대고 비판만 한 것은 아닌가.
지함이 그렇게 큰 시련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연일 기방에서 참담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나,

북창이 아버지 정순붕의 죄를 대속한다면서

매를 자청한 것이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게 다 정휴나 황진이가 몸부림치는 것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지함과 북창은 마음만 돌리면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자리가 늘 있었다.

지함이 기방에서 온통 세상을 비관하고 있을 때에도 양반가인 가문,

과거에 장원 급제한 경력, 그

리고 그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었다.
북창이 그렇게 야인으로 떠도는 순간에도 세도 등등한 그의 집은 멀쩡했다.

오히려 한양땅에 으리으리하게 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휴나 황진이가 돌아갈 곳이란 자신들이 떠나왔던 바로 그 자리,

천하디 천한 자리밖에 없었다.

언제나 현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바로

지금 그 순간뿐이었다.

백척간두에 선 사람들,

그들은 한발 나아가면 바로 벼랑이고 뒤로 물러나도 벼랑인
송곳같은 자리에 몸을 세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지함은 점점 부끄러워졌다.
여인의 몸으로 황진이가 어디를 갈 것인가.

가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친구 명세의 죽음만으로 자신의 삶은 이렇게 변화했다.

정휴나 황진이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다.

만일 자신에게 그들만한 고통이 날 때부터 있었다면

아예 그 수렁에서 벗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또다시 지함의 고민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체 신분 질서란 무엇인가.

누구는 종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양반으로 태어나는가.

대체 그 차이가 무엇인가.

왜 그런 구분이 필요한가.
지함이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애초부터 사람에게
그런 그릇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양반이고 종이고 기생이고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것을 황진이와 정휴가 알려준 것이다.
"이봐. 여기서 뭘 한 게야.

황진이와 은밀히 만나기로 약조라도 한 겐가?

아무래도 이 친구 푹 빠진 모양일세.

눈 좀 보게나.

그러나 자네 정도는 황진이와 상대가 안될 걸.

지족 선사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구.

일찌감치 꿈 깨게나."
뒤따라온 박지화의 말이었다.
"맞습니다. 그런 모양입니다.

저보다는 몇 수 위입니다."
농담조로 유쾌하게 놀려대는 박지화의 말에 지함은 정색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어디에도 황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체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황진이, 인간이고자 했던 여인,

그 여인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관세음보살 같은 미소를 담고서.
학인들은 우르르 산방 아랫 동네 주막으로 몰려내려갔다.

그러나 지함은 발길을 돌려 산방으로 돌아갔다.
화담이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지함이 인기척을 내자 화담이 천천히 눈을 떴다.
"들어오게."
지함이 산방으로 들어가 화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화담이 먼저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지혜로운 학인들에게는 그토록 많이 가르치신 선생님께서

어찌하여 그 여인에게는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않으셨습니까?"
지함은,

황진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벗은 몸으로 자리에 앉아 있을 때

화담이 아무런 방도도 취하지 않고 내처 버려둔 것을 탓하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서 안을 엿보고 있던 학인들에게는 꽤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황진이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화담이 여인의 몸을 취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그런 마음을 낸 여인에게 가르침이라도 주었어야 하지 않은가.

화담은 여인의 자존심은 안중에도 없이 계에 얽매인 중처럼

자기 몸만 깨끗이 보전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선생님,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했습니다."

 

"선생을 나무라는군."
"그 사람에게는 신분이 천하다는 열등감이 뿌리를 깊이 박고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은 색(色)밖에 없습니다.

그 여인에게 있어서 색이란 단 하나의 무기요 마지막 방법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여인의 무기를 단숨에 꺾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의 자존심이자 그 여인을 지탱해 주는 힘입니다.

선생님이 그것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떠나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신이 죽었다고 세상에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에게 이런 절망을 가져다 준 것이 누구입니까?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이 자신의 체면과 세상의 평판을 위하여 그 사람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그 정도입니까?
성리학이 아무리 좋은 학문이어서 삼강오륜이 거기에서 나오고 인륜도덕이

다 그곳에서 일어난다고 하지만 천민이 당하는 고통,

저 여인이 색으로밖에 자신을 내세울 수 없는 고통은 누가 풀어줍니까?"
"나는 늙었네.

자네들이 생각하는 젊은 몸이 아니네.

나는 이제 인간의 몸에서 진짜 나로 옮겨가고 있는 중일세.

지함, 자네는 내 뜻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여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는 기를 나누었다네."
"그것은 무엇입니까?

황진이를 취하신 것입니까?"
"암, 그렇고 말고.

나는 황진이의 기를 받고 황진이는 내 기를 받아갔다네.

그동안에 폭풍우나 천둥보다 더 큰 소리가 났을 터,

자네는 그것을 듣지 못했는가?"
"......"
지함은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화담이 황진이의 육체를 취한다면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던 자신이,

이제 와서는 화담이 황진이를 물리쳤음을 탓했다.

그런데 화담은 그녀의 몸을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은 것이다.
"선생님의 기는 약해지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황진이 같은 여인과 기를 나누실 수 있었습니까?"
"내게서 골수를 빼어내겠다는 심사로군."
"가르쳐주십시오."
"인체 내의 기가 어떻게 활동하는가 생각해 보았는가?"
"의술에서는 기의 흐름을 바로 잡는 게 병을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지함이 북창에게서 들은 것을 대답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의론(醫論)이 아닐세.
기론일세."
화담은 지함을 똑바로 응시했다.

화담의 눈에서는 형용하기 어려운 광채가 빛났다.
"오늘 황진이와 내가 기를 나누었다 함은 무엇인가.
내가 혈기 왕성하고 학인들 같은 젊은이였다면 어떠 했을까.

황진이 같은 절색을 보고 양기가 뜨겁게 솟구쳤을 거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내가 늙었다 함은 양기가 쇠잔해졌다는 것이니
누구나 노쇠하면 그렇게 되는 자연적인 이치라네."
"그렇다면 어떻게 기를 나누셨습니까?"
"기가 어디 양기뿐이던가?"
그제서야 지함은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지함의 머리 속에 기생 선화를 처음 만나던 날이 떠올랐다.

지함이 남산골에 숨어 비탄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형 지번은 억지 혼사를 꾸며 지함에게 신방을 차려주었다.

그러나 지함은 오래지 않아 기방으로 빠져나가 기생 선화에게 의탁했다.

아내에게서는 여자를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민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내를 똑바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기생 선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선화가 지함을 어떻게 끌어들였던가.
지함이 기방에 들어선 날,

지함은 정말 딱 한번만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그가 기방에 들어가자 주안상이 들어오고 이어서 우아하고 예쁜 기생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기생의 얼굴이 예뻐서 한번쯤 품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함은 술만 마셨다.

지함이 그렇게 술만 마시고 있는 동안 그 기생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한참만에 지함이 기생에게 이름을 물었다.
"선화라고 하옵니다."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선비님으로 보이지 아무려면 도둑으로 보입니까?"
"난 그대가 여자로 보이지 않네.

아무 감동도 없네.
향기없는 꽃,

색깔없는 꽃을 보고 있는 것 같으이.
예전 같으면 예쁜 여자라고 할 만한 그대를 보고도…"
선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날 선화는 지함이 술상을 밀자 곧바로 금침을 깔았다.
"난 생각이 없네."
지함이 그렇게 말하는데도 선화는 지함의 의관을 벗기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선비님께서 저를 취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선비님을 취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저는 기생이옵고,

선비님은 기방에 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지요?

호호호."
선화가 웃어댔지만 지함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벗은 몸이 오히려 불편했다.
"가만히 계시옵소서.

제가 선비님의 몸에 불을 지펴드리리다.

제 음기로 선비님의 꺼진 양기를 일으켜 드리리다."
그렇게 시작한 기생 선화의 애무가

끝내는 지함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지함의 남성이 서서히 살아났던 것이다.
지함은 스스로 놀랐다.

순간적으로나마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날, 선화를 취한 지함은 오랜 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잘 수 있었다.

화담이 지함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한 젊은이가 한 처녀와 마주하여 앉아 있다고 하세.

서로 기를 당기는 사이라고 해야지.

남자의 몸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기가 움직인다네.

기가 승발하면서 핏줄이 뛰고 힘줄이 불뚝 일어서지.

몸의 양기는 단전 아래 회음부에 집중된다네.

움직임은 누구나 느낄 수 있지.

기력을 보충하려고 외기(外氣)을 받아들이느라 숨이 가빠진다네.
여기까지의 과정이 누구의 짓인가.

하늘의 뜻인가,
아니면 그 젊은이의 뜻인가."
"그 젊은이의 뜻은 아닙니다.

신체는 저절로 그렇게 움직입니다.

그 주체는 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가 주체는 아니네.

여러 가지 기를 움직이는 기관이 따로 있다네.

그 기관은 아직 의론에서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라서 이름도 없다네.

물상(物象)을 관찰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다네."
"어떤 물상입니까?"
"반드시 용마를 보아야만 하도가 발명되고,
거북이를 보아야만 낙서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네.
이걸 보게.

바깥에 있는 성황목에 날아든 씨앗이라네.
이 씨앗은 손톱으로 누르면 깨지고 물에 넣으면 필시 썩고 마네.
그러나 이 씨앗이 자라 이파리가 나오고,

꽃이 피어 수십 년 수백 년을 자라면 저렇게까지 자라서 신목(神木)이 된다네.

이 씨앗 속에 그 힘이 숨어 있지.

이 씨앗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저
나무에서 떨어진 씨앗은 어떤 것이나 마찬가지지.
수기(水氣)를 어느 정도 받고,

온기(溫氣)를 어느 정도 받으면 껍질이 열리고 싹이 나네.

그런 다음에는 뿌리를 내리는데,

흙이 약하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암석에 막히면 돌아서라도 뿌리를 내린다네."
"그렇습니다.

때가 되면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나오고 이파리가 무성해집니다.

또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씨앗을 만들어냅니다.

봄이 되면 잎을 내고 가을이면 떨어뜨립니다."
"나무 한 그루가 사는데도 그만한 이치가 있거늘
사람이야 얼마나 복잡한 이치가 숨어 있겠나.

바로 그 이치를 수백 년간이나 잊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여

목숨을 지켜나가는 저 나무의 지혜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씨앗 속에 숨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네.

처녀와 마주 한 젊은이가 온 몸의 기운을 다 모아 분출하려고 집중하는 것도

씨앗을 뿌리려고 하는 것과 같네.

비록 그 젊은이의 눈에는 처녀의 예쁜 몸과 부드러운 살결이 들어오겠지만 그건 눈속임이지.

젊은이의 몸과 처녀의 몸은 씨앗 하나 만들자고 긴장해 있는데

머리는 다른 생각만 하고 있다네.

그 무엇인가가 환각을 만들어 놓은 거겠지.
두 사람이 교접을 하여 남자의 정기(精氣)가 여자의 자궁으로 분출되면,

일은 끝나고 말지.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 탐하는 마음을 내지 못한다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마주하여 야릇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은

생식(生殖) 때문에 기 스스로 조화를 부린 거지.

환관처럼 남자의 정기를 생산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천하절색의 미인을 보더라도
사람이 암캐나 암소를 보듯 음기를 느끼지 못하네."
"그 이치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이옵니까?"
"그런즉 자네가 돌탑을 쌓는 동안에,

 

몸속 어딘가에 깊숙히 뿌리박고 있던 미망이 하나둘 버려진 것도 같은 이치네.

마당의 돌을 캐어내듯 그러한 미망이 하나둘 뽑히어 돌탑을 이룬 것이지.

자네가 정혼했던 그 여인을 잊지 못하는 것도 그런 기가 모여있다가
갑자기 응어리가 져서 나타난 것이고.

세월이 가면 응기가 풀리고,

그런 뒤에는 기억만 남게 된다네.
술을 더 좋아하는 사람,

고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
여름에는 힘을 못 쓰다가도

겨울에는 펄펄 기운이 나는 사람,

그 반대인 사람.

같은 약을 써도 어떤 사람에게는 잘 듣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효험도 없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독이 되기도 한다네.
이게 다 기가 모이고 엉키고 흩어지고 없어지는 데서 생기는 모습이라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기를 다스려야 합니까?"
"기의 흐름을 잘 알아서 몸을 자연스럽게 두는 게지.

기에 매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도가의 단법이고,

선가의 참선이네.

유가처럼 삼강이네,
오륜이네 하면서 기는 잡지 못하고 혼만 잡으려 해서는 안되네."
"인간만 그러한 것이옵니까?"
"천문, 지리가 다 그러 하고, 삼라만상이 다 이 이치라네."
"어떤 기가 뭉치고 흩어지며, 어떤 기가 승하고 약한가를 알면

그 사람의 성정도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기의 변화를 놓고 따지는
추명학(推命學)이 바로 그것일세."
"어떻게 보아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자네가 이미 북창에게서 체(體)를 배웠으니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네.

나는 용(用)을 이야기하겠네.

다른 사람의 운명이나 품성을 감정할 때에는

훈장이 학동의 심성을 보아 학문의 단계를 주고,

천문학 교수가 천문을 읽듯,

풍수학자가 지리를 보듯,

농부가 땅을 보아 씨앗을 가려 뿌리듯

정성으로 살펴야하네.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의 기를 조화시킬까 살피어,

기가 흘러갈 방향을 잡아주어야 하네.
조선에는 조선인이 쓴 운명학이 아직 없다네.
자네가 그걸 쓰게.

내가 기초는 알려줄 터이니.
오늘은 늦었네."
화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산방의 문이 열리면서 유형원과 박지화가 불쑥 들어왔다.
"선생님, 오늘 강의는 끝난 줄 알았는데요?"
박지화가 심통난 얼굴로 말했다.
"자네들은 웬일인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리는데 지함이 오질 않아서."
유형원이 대답했다.
"지함에게만 특별히 해주실 강의가 따로 있습니까,
선생님?"
박지화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과거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니 물러가게."
"제가 과거 보자고 온 게 아니잖습니까?"
박지화가 화담에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대들 듯이 물었다.
산방의 학인들은 대부분 대과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이었다.

다만 이지함과 박지화는 원래부터 도가를 수련하기 위해

화담 문하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로서 화담이 지함에게만 남몰래 강의를 하는 것에 시샘이 날 것이 당연했다.
"형님."
"그만 두게.

자네가 혼자서만 들어야 할 강의가 있단 말인가?"
지함이 팔을 잡아당기자 박지화는 홱 뿌리치고 산방을 뛰쳐나갔다.
"선생님, 제가 따라가서 위로하겠습니다."
"그럴 것 없네.

지화는 성미가 원래 불 같아서 조금 지나면 저절로 수그러든다네.

하여튼 술자리가 있다니 어서 가보게.

여보게, 유형원."
머뭇거리던 유형원이 뒤돌아섰다.
"예."
"대과에 나올 이야기가 아니니 섭섭히 생각 말게.
그저 황진이가 다녀간 것을 들어 이지함이 묻길래 대답한 것일 뿐이네.

자네들도 과거란 짐을 벗거든 실컷 얘기하세."
"예, 알겠습니다."
이지함은 유형원과 함께 산방을 나섰다.
"여보게, 지함."
그때 화담이 다시 지함을 불렀다.
"오늘 이야기가 별 것 아니니 마음에 두지 말게.
세상 이치를 밝힌다는 것은 끝이 없다네.

그 몇 마디로 세상을 통째로 안다고 생각하지 말게나."
화담은 이야기를 하면서 지팡이로 산방 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지함은 산방을 내려가 학인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 주막으로 갔다.

박지화는 숨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함이 다가가 술 한잔을 가득 부어서 권하자 박지화는 못 이기는 척 받았다.
"형님, 황진이를 어떻게 했는지 여쭈러 간 것인데
그러십니다. 형님두, 참."
박지화가 지함을 쏘아보다가 술잔을 털어붓듯이 마셨다.
"이봐, 지함. 정말인가?"
"그럼요. 정말이 아니구요."
"그래 황진이를 어떻게 하셨대?

삼삼한 물건을 왜 그냥 보내셨다는 거야?"
"우리가 엿듣고 있었기에 그러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실없는 소리.

맘만 있으면 붙들어 두었다가 우리가 물러간 뒤에 같이 자면 되지.

보내긴 왜 보내나."
"아이구, 형님두.

그래서 서운하신 게로군요.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미 기를 나누었답니다."
"무슨 소리?"
박지화가 지함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학인들도 술잔을 들다 말고 지함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이 늙으셔서요.

그래서 마음으로만 취했답니다.

허허허."
"이런 젠장할.

그래도 그렇지,

한번 품기라도 해야지 굴러온 떡을 그냥 보내?"
박지화가 아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질펀한 음담패설이 오가고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박지화도 어느새 산방에서 있던 일은 다 잊고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술자리가 파하자 지함은 처소로 일단 갔다가

잠을 자지 않고 삼경이 되기를 기다렸다.

화담이 지팡이로 바닥을 세번 두드린 것은 삼경에 다시 오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삼경이 되자 지함은 깜깜한 계곡을 타고 산방으로 올라갔다.
역시 화담이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고 선정에 들어 있었다.
"선생님. 지함입니다."
"들어오게."
화담은 지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글이 빽빽히 적혀 있는 종이를 펼쳐놓고 있었다.
"내가 자네에게만 전할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이보게 지함.

정휴 행자가 읽는다는 금강경의 공(空)이 바로 기(氣)라네.

기가 한번 움직이면 색이 나오고,

색이 돌아오면 기가 되네.

일묘연(一妙衍)
만왕만래(萬往萬來)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이라고 했다네.
하나에서 우주 삼라만상이 다 시작된 것이어서 나갔다가 들어왔다 한다는 것이라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모양으로 하나가 변해도

그 근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네.

바로 이 하나와 삼라만상이 색즉시공일세.

하나가 공이라면 삼라만상이 색이라네.

그러면 이 하나는 무엇인가.
태극이고 기라네.
하나와 삼라만상이 씨줄 날줄처럼 얽혀 북질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힘으로 이루어지는가.

바로 기라네."
"그렇다면 삼라만상은 알겠는데 하나인 근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화담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자네에게만 은밀하게 말해주는 것이니 정신차려 듣게.

다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곧 알게 되네.

그건 그렇고,

자네가 물은 것부터 대답해 줌세.

하나인 근본이 어디냐?"
"......"
"내가 오늘 그걸 말해줌세."
"명심하여 듣겠습니다."
"색즉시공이라고 했지 않았는가?

바로 삼라만상을 알고 있으면 하나도 알고 있는 것,

삼라만상이 하나 아닌가.

선가(禪家)의 공안중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인가?"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공안입니다."
"맞네.

<천부경(天符經)>으로 들어가세."
"<천부경>이 무엇이옵니까?"
"선후천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라네.

이 땅에 생명이 나고 나라가 서던 때부터 있었던 하늘의 책이지."
"설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하늘이 하는 말이니 한 마디도 놓쳐서는 안 되네.

천부경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하고,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난다네."
"시작했으나 시작하지 않았고,

끝났으나 끝나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들어보시게.

자네가 묻는 그 근본은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시작됨이 없고,

끝이라고 하지만 끝남이 없는 것이라네."
"그것이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의 이치이옵니까?"
"그렇다네.

정휴나 황진이가 색을 보았다면

자네는 공을 보았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전한 하나는 아닐세."
지함은 화담의 말에 넋을 잃어갔다.
화담은 붓을 들어 천부경 여든한 자를 바람처럼 써놓았다.
화담은 진지하게 천부경을 설했다.

일시무시일 석삼극 무진본
(一始無始一 析三極 無盡本)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일적십거 무궤화삼

(一積十鉅 無櫃化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대삼합육 생칠팔구
(大三合六 生七八九)
운삼사 성환오칠
(運三四 成還五七)
일묘연 만왕만래 용변부동본
(一妙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본심 본태양앙명 인중 천지일
(本心 本太陽昻明 人中 天地一)
일종 무종일

(一終 無終一)

지함은 고개를 들어 눈을 번득이며 화담의 강의를 들었다.
만물이 비롯되고,

혼이 비롯되고,

모든 학문이 비롯된 원천이라는 천부경.
화담은 학인들에게는 한번도 가르친 적이 없는
경전을 놓고 지함에게만 설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는 우주 만물의 시원.

이 하나의 시원은
무(無)하여 자연히 본래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지.

어느 무엇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네.
그러므로 어느 무엇에 의해서도 없어지지 않는 게지.
쪼개고 쪼개다 보면 작용이

각기 다른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기는 하겠지.

그러나 그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네.

변하게도 하고 변하지 않게도 하는 것,

속에 기가 작용하는 것이라네.
셋으로 나누어진 것은 하늘이 그 하나이고 첫번째네.

땅이 그 하나이고 두번째요,

사람이 그 하나이고 세번째라네.
우주의 시원인 하나가 여러 가지 활동으로 주름을 잡아 삼라만상으로

수없이 불어나도 근본인 하나는 줄지 않고 얼마든지 불어나게 할 수 있지.

불어나게 하는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천지인(天地人) 셋이라네.

이 셋이 서로 관련된 작용을 하여 그리 되는 것일세.
천지인 셋이 어떤 관련을 가지며 작용하는가?
천지인 셋에도 각각 음양이 존재하네.

이에 따라 두 기(氣)가 있어 서로서로 음과 양이 어울리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면서 작용하게 된다네.
그러니까 크게 보면 천지인 셋이지만

천이라는 하나 속에도

음양과 천지인 삼극(三極)이 다시 포함되어 있어서

천을 나누면

천천(天天),

천지(天地),

천인(天人)으로 되어 있네.

이것은 지와 인에서도 마찬가지라네.

지천(地天),

지지(地地),

지인(地人)이 있고

인천(人天),

인지(人地),

인인(人人)이 있는 것이지.
천이 지와 어울릴 때,

천 속에 잘게 나누어진 천천(天天)의 양과

지(地) 속의 그 지천(地天)의 음이 서로 끌어당겨

인(人)속의 인천(人天)을 발동시켜 함께 어울리게 되네.

인(人) 속의 인천(人天)이 한몫 끼게 되자마자

천인(天人)과 지인(地人)이  움직여서,
인인인지(人人人地)와 천지와 지지도 다 따라 관련을 가지게 되지.
이렇게 어울리는 경우에는 이 세상에 성인이 나타나 크게 활동하는 때가 될 것이네.
이것은 하나의 예를 간단히 든 것이지만,

삼극이 각기 특정한 작용을 하여도 하나가 움직이면 다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일세.

왜 그런가 하면 근본이 하나이기 때문일세.
그러므로 우주 속의 모든 것은 그 근본의 몸이 하나라네.

하나 하나의 움직임이 서로 빠짐없이 영향을 주고 받게 되어 있지.

이런 점을 살펴보면 근본이 하나이기 때문에

인과 응보의 법칙이 있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만하고,

순간적인 생각 하나도 함부로 할 일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야.
크게 쪼갠 것으로 볼 때 3이지만

음과 양으로 나누어 볼 때는 6이 된다네.

이 6에 천지인 중에서 또 어느 하나가 먼저 변화의 활동에

관련을 갖는 그 순간에 7이 생하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8과 9가 생하게 되네.

물질의 성질과 모양과 가지수가 불어나는 것을 간단히 밝힌 부분이라네.

9에 하나가 또 더해지면 10이지.
이제까지는 수량이 많아짐을 말하였네.

이제 나타나게 된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3과 4가 하고,

완성되어 여물게 하는 일은 5와 7이 한다네.
10까지의 수가 나타나면 나타난 그 수가 또 일을 하게 되네.
3과 4는 기계적 조직과 순차적 차례에 작용하여 움직이게 하는 일을 맡는다네.

사람의 몸으로 치면
상중하의 3절과

팔다리의 4지가 있어 움직이게 하고,
일년을 보면 3개월씩 4절기로 돌아가고 있지 않는가.
5와 7은 성장 발전하여 내용을 여물게 하는 일을 하지.

예를 들면 사람에게 오장이 속에 있어 안의 일을 맡아 하고

얼굴에 두 눈, 두 귀, 두 콧구멍, 한 입,

이렇게 하여 일곱이 있지.

이 일곱이 사람의 밖의 일을 하여

하나의 인격을 성숙시켜가는 것과 같은 것일세.
우주 속의 물질에는 오행의 원리가 들어있고,
태양의 빛에는 7색이 그에 관련하여

만물을 성숙시키고 변천시키는 것도 그 한 예일 것이야.
하루를 새벽, 오전의 낮, 점심, 오후의 낮, 저녁으로 나누어 쓰지.

그 사이를 새벽에 일어나 아침 먹고,
오전에 일하고 점심 먹고,

오후에 일하고 저녁 먹고
잠을 자는 일곱 마디로 살아감으로써

삶을 여물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5와 7을 쓰는 이치라네.
일묘(一妙)는 삼극(三極)의 근본.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인 하나를 말하는 것일세.

표현하기 힘든 것을 묘라고 하지.

이 일묘가 활동을 펴서 만번 되풀이 변화를 일으켜 사라져가고,

또 그렇게 변화를 일으켜 나타나서 작용은 변하여도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네.
어느 무엇에 의해서도 늘지도 줄지도 않는 이치인 것일세.
본(本)은 마음(心). 사람의 마음 속 마음인 참마음이 우주의 본인 하나(本心)라네.

태양도 그 마음의 밝은 특성을 본받아 밝은 광명을 내는 일을 하게 된 것이야.

그러니까 마음은 사람(人)의 알맹이(中).

천과 지에서도 그 본바탕을 찾아보면 '하나'인 것이지.
하나는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없어지더라도 남게 되는 마지막이라네.

그러니 영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하나는 곧 마음이니 만물의 본일세.

이 하나는 어느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네.

본래 그냥 그대로 스스로 있는 것이야.

그러니 다른 무엇이 그것을 없앨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고 변질시킬 수도 없다네.
모양이 없으면서도 영원히 살아 있는 것.

모양이 없으면서도 모양 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고,

모양이 없으면서도 모양이 없으면서라고 말도 할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천부경>이라네.
수(數)의 변화는 물상(物象)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
봄과 여름까지는 역수(逆數)로 자라고

가을과 겨울에는 순수(順數)로 수장(收藏)하는 것이네."
"이것이 선천과 후천을 가르는 이치이옵니까?"
"그렇다네.

여기에서 수가 나오고 만물이 나오네.
이 속에 자네의 친구 안명세가 있고,

정혼했던 여인이 있는 것일세.

그들의 후천 세계를 바라보게.

헤아리고 헤아리다 보면 언젠가 보일 날이 있을 것이네."
크게 감동을 받은 지함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화담에게 큰절을 올렸다.

화담의 강의는 그렇게 고개숙인 지함의 머리 위로도 계속 떨어졌다.
산방에 돌탑을 쌓으라는 시험으로

지함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미망을 털어낸 스승 화담 서경덕.
그는 지함이라는 큰 그릇에 도를 가득 담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