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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화담 산방-소설^토정비결(上-10)

송도에도 비가 내렸는지 연록색 잎을 펼치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한결 싱그러워 보였다.

고려 왕조 475년의 도읍이었던 송도에 이제 옛 영화의 흔적은 자취도 없었다.
과거는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흘러가버리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무는 자라고 꽃은 피고 있었다.

고려의 나무로도, 조선의 꽃으로도 구분되지 않고 언제나 한 얼굴을 하고서.
보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조금 볼 수 있을 뿐 고려가 있던 그 자리에서

이제 조선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송도는 더이상 고려의 수도가 아니었다.

송도 사람들은 한때 영화롭던 도읍지였다는 사실에 자위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열등감만 부추길 뿐이었다.
그러나 민이와 명세의 죽음이 지함의 삶 전체를 변화시켰듯,

쇠락한 듯 보이는 송도도 옛시절의 그림자를 어딘가 품고 있을 터였다.
송도는 한양만큼이나 넓은 땅이었다.

군데군데 손보지 않아 허물어진 옛 성벽들이 방치돼 있었다.
어디쯤 궁궐이 있었을까.

태조가 불태워버린 궁궐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몇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이미 이백 년이 가까워오는 옛일을 사람들은 벌써 잊고 있었다.
그러나 화담 산방만큼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화담 산방이오?

거긴 문을 닫은 지 벌써 몇 해 되었는데..."
송악산은 송도를 병풍처럼 둘러친,

제법 산세가 거친 산이었다.

아름드리 전나무가 꽉 들어찬 숲은 오후인데도 햇빛 한 줄기 새어들지 않았다.

전나무 숲 사이로 굽이치는 계곡을 따라 지함은 송악산을 올랐다.
송악산 중턱에 있다는 화담 산방은 제법 멀었다.
진달래가 피어나는 봄이건만 지함의 등줄기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계곡 왼편 산기슭으로 자그마한 암자의 처마가 숲 사이로 내비쳤다.

송악사(松岳寺)의 말사(末寺)인 상적암이었다.

그렇다면 화담 산방도 거진 다 온 셈이었다.
계곡을 따라 얼마나 더 올라갔을까,

계곡이 없어질 듯 물길이 가늘어진 곳 오른편에 제법 널찍한 평지가 나타났다.

화담 산방은 거기 있었다.

산방이라고 해봐야 덜렁 초가집 두 채였는데

지붕도 새로 잇지 못했는지 초가지붕이 썩어가는 듯 거무스름했다.
그 초가집 뜨락에 수염이 허연 노인 하나가 쭈그려 앉아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함은 인기척을 내지 않고 조용히 노인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노인의 손끝에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노인과 얘기를 나누듯 지저귀고 있었다.
노인이 팔을 길게 내뻗자 하늘로 날아올랐던 새는 다시 노인의 어깨 위로 날아와 앉아 퍼득거렸다.
"허허. 그만 가거라.

오늘은 너와 놀아줄 시간이 없구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풍모였다.

새한테 말을 건네는 것하며 인적 없는 산중에 홀로 있는 것이며,
허연 수염, 깊은 눈동자가 마치 신선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새를 휘휘 ㅉ아보내고 일어서던 노인이 지함을 발견했다.
"뉘시오?"
"저는 홍성에서 온 이지함이라고 합니다.

혹 화담 선생님이 아니신지요?"
"맞소이다만, 어쩐 일이시오?"
"선생님의 고명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그렇게 거창한 말을 늘어놓을 필요 없소.

우리 산방은 오는 이 아무도 막지 않고,

가는 이 아무도 말리지 않소.

오고 싶으면 언제든 들어와도 좋고,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 떠나도 좋소.

그러나 내가 가난하니 재워줄 수도 없고 먹여줄 수도 없소이다.

먹을 것을 가꾸는 것도 이제는 힘겹다오.

그런 것들이 해결되면 오시오."
허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다.

그는 화담 산방의 관문을 뚫기가 어지간히 힘들다고 말했다.

그래서 소개하는 서찰까지 써주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화담은 지함에게 아무것도 시험하지 않았다

. 허엽의 말이 공연한 엄포는 아닐 듯 싶었다.
대과를 보는 과장에서 보았던 화담의 제자 좌의정 박순 같은 이의 얼굴에서도

그의 스승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쯤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성리학의 대가가

몇 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지함의 입문을 허락한 것이다.

입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함은 별 걸림없이 산방에 들어간 것이었다.
지함은 허엽이 써준 서찰을 화담에게 내밀었다.
화담이 서찰을 받아 읽어보더니 고개를 돌려 지함을 뚫어져라 하고 바라보았다.
"자네는 입문하기가 어렵겠구먼."
"예? 이미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미망이 깊어.

잡념이 많은 사람이 무슨 공부인가."
허엽이 서찰에 무슨 내용을 썼길래 화담의 태도가 돌변한 것일까?

지함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화담의 말을 받았다.
"그런 것들은 이미 다 버렸습니다."
"내게는 왜 찾아왔는가?"
"깊은 뜻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걸 배워서 어디에 쓰려나?"
"예?"
"그걸 배워서 어디에 쓰겠느냐고 물었네."
"......"
어디에 쓰겠느냐?
지함은 생각하지 않았었다.

단지 안명세와 민이,
그리고 벼슬을 버리고 대신 찾은 길일 뿐이었다.
"자네는 욕심이 많군.

학문이란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려가는 것이라네."
"제가 배운 것을 다 버리오리까?"
"물러가게.

아직 산방에 들어오려면 멀었네."
화담은 처음에는 누구나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말인가.

산방에 들어오려면 멀었다고?
지함은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저를 시험하십시오."
"대과에 급제한 솜씨로 나를 이겨볼 셈인가?

생원시도 보지 못했으니 한번 해보시게나."
"선생님."
"좋네.

정, 산방에 들어오고 싶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그럴 수 있겠는가?"
"예."
"저기 느티나무가 보이는가?"
화담은 산방 마당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가리켰다.

장정 서넛이 팔을 둘러야 겨우 손이 닿을 만한 거목이었다.
"이 자리는 원래 송도에서도 유명한 사당이 있던 곳이네.

고려가 망하면서 사당도 망했지만 저 나무는 그대로 있네.

그러나 아무도 성황목으로 알아주지 않으니

자네가 그 아래에 커다란 돌탑을 쌓아 정성을 들여주게.

 

성황목이 기뻐할 걸세."

"돌은 어디에서?"
"이 마당에 있는 걸 캐어 쌓게나.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돌을 내가 마당에 깔아놓은 걸세.

마당에 있는 돌로 꼭 석 자 높이로 쌓아야 하네."
화담은 그 말만 이르고는 산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지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기(氣) 철학인가.

세상의 이치가 돌탑에 있단 말인가?
지함이 바라는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북창에게서 배운 뒤를 이어 더 심오하고 깊은 학문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화담에게서 물러나온 지함은 산을 내려가 계곡 바로 옆 마을의 맨 첫집으로 들어갔다.

묵을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사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당 한구석에 있는 절구통에 무엇을 빻고 있는지 여인이 허리를 숙인 채 매달려 있었다.
"계십니까?"
여인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스물도 안됐을 성싶은 얼굴이었다.

머리를 틀어올린 걸 보니 결혼은 한 모양이었다.
"뉘신지요?"
남정네의 얼굴을 감히 바로 보지 못하는 한양의 여염집 여자들과 달리

여인은 똑바로 지함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저는 화담 선생님께 공부를 배우러 온 사람인데,
거처를 구하고자 왔소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여인은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본채와 떨어진 사랑채로 지함을 이끌었다.
"요즈음에는 학인을 받지 않는 줄 알았는데...

방도 누추하고 식사도 변변치 않아서 선비님이
유하시기에는 여러 모로 불편하실 텐데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바깥어른은..."
"장사를 하러 나갔습니다."
"바깥어른의 승락이 없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여인은 잘라 말했다.

한양보다 개성의 여인들이 훨씬 자유로운 모양이었다.

집안에 친척도 아닌 남자를 들이는 일이라면

한양에서는 여인 혼자 결정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세월이 벌써 이백 년 가까이 흘렀다지만 고려 시절 여장부들이
휘두르던 풍속은 쉽게 없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려였다면 얼마나 당연한 일이었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는 지함이 오히려 쑥스러운 것이었다.
나무를 해서 송도에 내다 판다는 남편은 저녁을 먹을 때쯤 돌아왔다.

비쩍 마르고 성깔 있어 봬는 용모였다.

그에 비해 여인의 체구는 굵직굵직했고 억세 보였다.

아무래도 여인의 기가 남자를 누르겠다 싶은 한 쌍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지함은 대장간에 가서 괭이와 삽을 사 들고 화담 산방으로 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카랑카랑한 화담의 목소리가 계곡의 물소리를 누르고 있었다.
지함은 가지고 온 곡괭이로 마당에 박힌 돌을 캐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어렝이에 담아 느티나무 아래에 갖다 부었다.

마당은 마치 두더지가 지나간 것처럼 흙이 파헤쳐졌다.
점심나절이 되자 화담의 오전 강의가 끝났다.
학인들이 산방을 나왔다.
"누구신가? 산방에 종을 두었나?"
"무슨 소린가? 의관으로 보건대 양반인데."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거요?"
학인들이 모두 지함을 이상하게 바라보면서 말을 던졌다.
지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돌을 파냈다.
그러자 학인들은 고개를 흔들거나 혀를 차면서 계곡을 내려갔다.
지함은 학인들이 계곡을 다 내려갔는데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을 캐어 날랐다.

한 어렝이를 더 갖다 붓고 잠시 앉아 쉬는데,

화담이 산방문을 열고 한마디 던졌다.
"가서 점심을 먹고 오게."
"예."
지함은 괭이와 삽을 돌무더기 위에 올려놓고 어렝이로 덮었다.
지함이 점심을 먹고 툇마루에 앉아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학인이 지함을 알아보고 들어왔다.
"이보시오. 산방에 왔으면 화담의 강의를 들어야지 웬 돌을 캐고 있소?"
"아직 입문을 허락하지 않으셔서..."
"뭐라구요? 입문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구요?
허허허."
"왜 그러시오?"
"그런 건 처음이오.

누가 찾아와도 입문을 허락하시는 분인데,

뭘 밉보였단 말이오?"
"이 산방을 나와 벼슬하고 있는 어떤 선비의 서찰을 보였더니..."
"참 이상하군요.

참, 나는 박지화요."
지함보다 너댓 살 위로 보이는 선비가 통성명을 해왔다.

서글서글한 눈이며,

둥글둥글한 얼굴 생김새가 퍽 선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지함이오."
"그래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박지화와 함께 온 선비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돌탑을 쌓고 있답니다."
"돌탑? 그걸 왜 쌓으라고 하실까?

그걸 다 쌓으면 입문을 허락하신답디까?"
"예."
유형원이라고 밝힌 그 학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산방으로 올라갔다.
세상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지금, 그리고 한달 전, 일 년, 이 년 전. 서로 아무 관련도 없는 것 같은 삶이었다.
지금 돌을 캐어 돌탑을 쌓고 있는 사람.
일 년 전 북창에게서 도가를 전수받던 사람.
이 년 전 민이와 안명세를 잃고 방황하던 사람.
그리고 대과에 급제한 사람.
당장 한양으로 떠나가면 그만이었다.
금강산에 가면 북창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그와 함께 수련을 한다면 더 빨리 도를 이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함은 화담이 무엇을 원하든지 끝까지 버티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지함은 다시 마당에 뿌리박은 돌을 캐기 시작했다.
산방에서는 화담의 강의가 계속되었다.
지함은 아무리 듣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강의 내용은 저절로 귀에 들어왔다.

보지 않으려 해도 산방 안의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산방에는 선비 다섯 명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화담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경전도 없는 것인지 화담 앞의 작은 탁자에는 책 한 권 놓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화담의 말은 청산유수로 끊이지 않고 있었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곡식은 수천 년을 두고 심어도 계속 자라고 열매가 맺힌다네.

와도와도 다함이 없으니 대체 그 오는 곳이 어디란 말인가.

해마다 수많은 사람이 곡식을 먹어치우고 여기저기서 썩고
불태워지는데도 다음 해면 또다시 곡식이 열린다네.
대체 그것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산방에서는 침 넘기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계곡의 물소리,

작은 새들의 지저귐마저 멈춘 듯했다.
지함은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돌을 캐었다.
"노자는 무에서 유가 생긴다고 했네.

이것은 허(虛)가 곧 기(氣)인 줄 모르는 데서 나온 말이라네.
무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면 그 무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네.

이 세상은

무시(無始), 무생(無生), 무종(無終) 무사(無死)인 것이네."
무시 무생(無始無生)이라...
지함은 화담의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삶도 죽음도 없다니.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고 죽으며,

곡식도 봄이면 자라나서 가을이면 거두지 않는가.

눈에 보이는 것이 생과 사를 거듭하고 있는데 어찌 시작도 끝도 없다는 말인가.
화담의 놀라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선가(禪家)에서 중들이 말하기를 세상은 마치
바다에서 한 물거품이 잠시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하네.

그래서 진공(眞空)이니 완공(頑空)이니 하는 말로 표현들 하지.

이것이 기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네."
"선생님."
누군가 번쩍 손을 들었다.

박지화라는 학인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간들의 삶과 죽음은 무엇입니까?

그 기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무한하다지만

그 기가 발현된 각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가장 큰 문제가 아닙니까?"
"공자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난 그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네."
대과에 장원 급제한 지함이 그 말을 모를 리 없었다.

공자의 제자 한 명이 그런 질문을 공자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그 질문 자체를 무시해 버렸다.

세상은 그런 질문을 할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앞을 보다 말고 뒤를 돌아다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삶, 죽음.

명세와 민이가 떠난 날부터 한시도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은 말들이었다.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공자의 말을 지함 역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리학을 뛰어넘었다는 화담이 겨우 공자의 말로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의 답을 대신하다니.
화담 산방 학인들에게는 그 이상의 진리가 필요없기 때문인가?
화담의 강의가 끝나자 학인들이 산방을 나왔다.
학인들이 지나가면서 이상한 눈초리로 지함을
쳐다보았지만 지함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함이 보름여 마당을 판 끝에 석 자가 되는 돌탑이 올라갔다.
학인들이 모두 내려간 저녁나절이었다.
지함은 계곡을 내려가 화담의 처소로 갔다.

화담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돌탑을 다 쌓았습니다."
"그런가? 거기 기다리게.

마저 마시고 올라가 봄세."
화담은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술을 마셨다.
손님은 밤이 이슥해서야 화담의 집을 떠났다.
"자, 그럼 가보세."
화담은 비틀거리면서 산방으로 올라갔다.
화담은 지함이 쌓은 돌탑을 보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정성을 들이지 않았어.

흙이 묻어 있지 않는가.
내가 돌탑을 쌓으랬지 흙무덤을 쌓으랬던가?"
"......"
화담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러 돌탑을 무너뜨렸다.

우르르 돌탑이 무너져내렸다.
돌탑은 지함의 가슴 속에서도 무너졌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다시 쌓게. 서둘러 쌓게."
화담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계곡을 내려갔다.
지함은 무너진 돌탑 위에 앉았다.
속에서는 계속 무언가 치밀어올랐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함은 밤을 새워서라도 돌탑을 다시 쌓으리라 결심했다.
지함은 달빛으로 희미한 성황목 아래,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렝이에 돌을 담아 냇가로 가져갔다.

하나하나 물에 씻어 다시 어렝이에 담았다.
밤새도록 돌을 닦아 다시 쌓았으나 한 자도 오르지 않았다.
이튿날도 지함은 계속 돌을 씻어 날랐다.
산방 강의는 매일매일 계속되었다.

기 철학자답게 화담 서경덕은 역시 기론(氣論) 강의를 주로 하였다.
"오늘은 기(氣)를 이야기하세.

기를 논하지 않고는 학문에 들 수 없으니 내가 한번 뜻을 풀겠네.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네.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

그러니까 계란이 부화되기 전이랄까,

그때는 그저 혼돈이라고만 했다네.

그 혼돈의 우주에 기(氣)가 생겼다네.
그래서 그 기의 맑고 밝은 성격을 따라서 하늘이 나타나고,

흐리고 무거운 기는 아래로 뭉쳐 땅이 되었네.

자, 이 때 나타난 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닭이 계란을 품는 것을 보자면 암탉이 계란을 품기 전에는,

계란은 그저 계란일 뿐이지. 그

러나 암탉이 가슴에 알을 안고 따뜻하게 데우기 시작하면

스무하루 만에 그 계란을 깨고 병아리가 나온다네.

바로 세계가 형성된 거라네.

그러면 계란을 병아리로 변화시켜준 기는 무엇인가?

바로 어미의 따뜻한 기운이라네."
"그러면 따뜻한 게 기입니까?"
한 학인이 물었다.
"아니지.

따뜻하고 차가운 걸 나누지 말고 그저 그런 것을 다 일컬어 기라고 부르세.

그것을 가리켜 온도라고 부르지 않는가.
만물은 봄이 되면 저절로 생육되는데 그것은 왜 그런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네.

그 비밀은 겨울의 수기(水氣)와

봄의 온기(溫氣)에 있다네.

마르고 습한 수기와 차고 더운 온기가

적절하게 씨앗이나 뿌리를 문질러주면 생명이 깨어난다는 걸세.

바로 기(氣)가 생명을 여는 열쇠라는 것일세.
그러므로 닭이 계란을 품어 병아리로 깨어나게 하는 것은

오직 계란에 내재해 있던 수기와 어미닭이 불어넣어주는

따뜻한 기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네.

어미닭이 차고 더운 기운을 스무하루 동안 적절하게 쏘여주어서 얻은 것이니,

봄이 되어 만물이 일어나는 것도 같은 이치라네.

겨울을 나지 않은 씨앗은 따뜻한 봄의 기운을 받아도 싹을 틔우지 못하는 이치,

봄이 되어서도 어떤 씨앗은 이르게,
어떤 씨앗은 늦게 싹을 틔우는 것이 다 이런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온도의 조화가 곧 기이고,

기가 곧 태극입니까?"
"온도의 조화가 기라는 말은 일단 수긍하세.

그러나 기가 곧 태극이라는 말에는 다른 의견이 있네.

노자 도덕경에 이르기를 '도(道)에서 하나인 기(氣)가 나오고,

그 하나인 기가 다시 둘로 나뉘어져 음(陰)과 양(陽)이 생긴다'고 했네.

그런 다음에 어떤 형상이 이루어져 비로소 만물이 생성된다는 말이지만,

일단 도에서 기가 나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기야말로 이 천지 우주간에 가득 차서 없어지지도 않고 더 생겨나지도 않으면서

순환하는 것이니 어떤 실체를 들어 규정해버릴 수 없다네."
"그럼 이름 붙일 수도 없습니까?"
"이름이야 붙이든 떼든 인간의 소치이고,

자연의 이치에는 닿지 못하는 것이지."
"공기 같은 거 아닌가요?"
"공기야 움직이면 바람이 되니 실체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네.

이 기(氣)에 이(理)를 다시 부쳐 논쟁을
일으킨 사람이 있으니 바로 주자(朱子)라네.

그가 이기론(理氣論)을 어떻게 폈느냐 하면,

'한 기(氣)가 움직여 회전하기를 되풀이 하는 동안에,

맑고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되었으며,

무겁고 탁한 것은 아래로 내려가 땅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렇게 기가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그것이 바로 이(理)의 작용이라고 한 거지.
<회남자>에 하늘은 기를 토한다고 적혀 있는데,

기는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것이니,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이(理)라고 굳이 내세울 것은 없는데

이게 그만 시끄러운 실마리를 내준 꼴이 되고 말았지.
우리는 일단 이(理)는 접어두고 기(氣)만 이야기하세.

기가 하늘에 닿아 빚어낸 것이 천간(天干) 열 가지요,

땅에 닿아 빚어낸 것이 지지(地支) 열두 가지라네.

하늘의 열 가지 기운과 땅의 열두 가지 기운을 조절하는

큰 기운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오행(五行)이라고 부르네.
여기에서 천문(天文)과 지리(地理)가 생기고

사주추명학(四柱推命學)이 나온 것일세.
그래서 천간에 따라 숫자는 열을 단위로 세는 것이고,

계절은 열둘로 나눈 것이네.

그래서 이 모든 기의 움직임을 운기(運氣)라 이르고,

운기법(運氣法)에서 모든 학문이 유래하는 것일세.
자, 그러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인데 사람은 무엇인가.

사람은 기 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가.
하늘은 천문이요,

땅은 지리인데 인간이라고 없을 수 있는가.

바로 의(醫)라네.

그래서 천문을 일러 점성술이라 부르고,

지리를 일러 풍수지리라고 하듯이 
의도 의술(醫術)이 되었다네.
<좌전(左傳)>에서

의화(醫和)는 '하늘에 기가
있는데 그것이 다섯 가지 맛과 색깔과 소리를 빚어낸다.

그런데 그 절도를 잃으면 바로 여섯 가지 병이 생기는 것'

이라고 하여 의술 자체가 바로 기술(技術)로 시작되었다네.
<장자(莊子)> 달생편(達生篇)에도

'기가 흩어져서 돌아오지 못하면 생기(生氣)가 부족하게 된다.

기가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으면 성을 잘 내게 된다.
반대로 기가 내려갔다가 올라오지 못하면 건망증이 심해진다.

그리고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면 그것이 바로 병으로 화한다'고 했네.
그후 도가(道家)에서 아주 중히 여기는 <황제내경(皇帝內經)>이 출현하였는데,

이때 침술이 나타났네.

침이란 체내에 흐르는 기를 잘 흐르도록 막힌 곳을 뚫어주는 것이네.
사람의 몸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름이 있는가 살펴보세.

내경(內經)에는 기명(氣名)이 예순일곱 가지나 나온다네.

형기(形氣) 혈기(血氣) 진기(眞氣) 정기(正氣)
정기(精氣) 대기(大氣) 거기(巨氣) 경기(經氣)
신기(神氣) 생기(生氣) 온기(溫氣) 상기(上氣)
중기(中氣) 하기(下氣) 곡기(穀氣) 식기(食氣)
청기(淸氣) 탁기(濁氣) 인기(人氣) 동기(動氣)
피기(皮氣) 근막지기(筋膜之氣) 혈맥지기(血脈之氣)
기육지기(肌肉之氣) 골수지기(骨髓之氣)
흉중지기(胸中之氣) 두각지기(頭角之氣) 오기(五氣)
복기(腹氣) 부기(浮氣) 백기(白氣) 한기(悍氣)
삼백육십오절기(三百六十五節氣) 이십칠기(二十七氣)
기도(氣道) 기문(氣門) 기혈(氣血) 기맥(氣脈)
기골(氣骨) 종기(宗氣) 영기(營氣) 위기(衛氣)
내기(內氣) 외기(外氣) 표기(表氣) 이기(裏氣)
원기(遠氣) 근기(近氣) 객기(客氣) 동기(同氣)
산기(散氣) 취기(聚氣) 유기(兪氣) 맥기(脈氣) 낙기
천기(天氣) 지기(地氣) 천지지기(天地之氣)
오행지기(五行之氣) 장기(藏氣) 분기(分氣)
분간기(分間氣) 수기(水氣) 화기(火氣) 원기(元氣)
원기(原氣) 왕기(王氣)

이런 가운데 몸 안에서 기가 돌아다니는 길을 찾아냈는데,

경혈(經穴)이 바로 그것이네.

침을 놓는 침자리인 것이지.

그 수가 일년 365일처럼 365개나 366개라고 씌어 있다네.

그래서 종아리 바깥쪽의 무릎 아래 세 마디쯤 되는 족삼리(足三里)라는

침자리에 침을 놓으면 밥통이 꿈틀거리게 되고,

엉덩이에 난 치질을 치료하려면 머리의 침자리에 쇠바늘을 꽂게 되는 것일세.
이러한 까닭에 옛날의 대의원들은 내경(內徑)을
독파하고 도인들은 기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고,

산중 선비들이 다 그렇게 단전호흡을 한다,

내공을 한다 하는 것이네.
양생법(養生法)도 따지고 보면 다 기를 다루는 운동이었다네.

그러나 양생법에 으뜸가는 것은 해 뜨면 일어나 움직이고,

해 지면 잠 자는 것이니

봄에 봄일을 하고,

여름에 여름일을 하고,

가을에 가을일을 하고,

겨울에 겨울일을 하는 것이 바로 양생법일세.
그래서 얻는 것은 장생(長生), 연명(延命), 불로(不老)라.
그리하여 도가(道家)에서는 밥을 먹지 않고 기를 먹는다고 한다네.

그러다 보니 환단(丸丹)이 나오고,
단전호흡, 체조 같은 술법이 출현하였다네."
화담의 강의는 북창의 강의만큼이나 열기가 대단했다.

학인들의 질문도 뜨거웠고,

화담의 강의 역시 뜨거웠다.
화담은 역시 지함이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를 열어보였다.

대과의 장원급제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지한 소치인가를 지함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장원급제, 그것은 이런 대학자들에게는 한낱 웃음거리밖에 될 게 없었다.
그러나 지함에게는 여전히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돌탑을 쌓아야 했다.

그래야만 산방으로 들어가 정식으로 그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강의를 엿듣는 동안에도 돌탑은 조금씩 올라갔다.
돌을 씻기 시작한 지 나흘이 지나 다시 돌탑이 제 모습을 갖추었다.
지함이 다 쌓았음을 아뢰자 화담이 나와서 돌탑을 보았다.
"모양이 좋지 않네.

자네, 이런 돌탑을 본 적이 있는가."
처음 쌓는 돌탑이라서 예쁘게 올라가지 않았던 것이다.
"정성이 부족해. 다시 쌓아보게."
화담은 지팡이를 지함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자네가 무너뜨리게.

잘못된 것은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게 좋지."
화담의 지팡이를 받아든 지함의 손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화담이 매서운 눈으로 지함을 쏘아보았다.
지함은 지팡이로 돌탑을 힘껏 밀쳤다.
돌탑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지함의 가슴이 벌떡벌떡 뛰었다.

숨도 거칠어졌다.
화담은 지함의 그런 변화쯤은 모르는 척하고 산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왜 내가 돌탑을 쌓아야 한단 말인가.
돌 따위가 학문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함은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분기를 꾹꾹 누르고 다시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기단을 튼튼히 해야 돌탑이 높게 올라갈 수 있었다.
지함은 냇가에서 큰 돌을 들어다가 받침돌로 썼다.
그리고는 그 위에 차례차례 돌을 쌓았다.

방향을 바꾸어서 앞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보아가며 동그랗게 모양이 나도록 세심히 애를 썼다.
다시 쌓기 시작한 지 사흘 만에 돌탑이 완성되었다.
화담이 또 나왔다.
"모양은 되었네. 그런데 이 돌은 무언가?"
"예, 받침돌입니다."
"어디서 가져왔는가?"
"냇가에서..."
"내가 뭐라고 했는가?

마당에서만 캐어 쓰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네,

개울에 있는 돌까지 전부 뽑아오고 싶던가?"
"......"
"이 받침돌을 빼내게."
화담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산방으로 들어갔다.
아득했다.

받침돌을 빼내라는 것은 다시 허물라는 말과 같았다.
지함은 더 이상 화가 치밀지도 않았다.

허무하기도 했으나 마음은 묘하게 편해졌다.

체념이었던 것이다.
지함은 다시 돌탑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다시 사흘.
지함이 돌탑을 또 쌓았을 때 화담은 지함의 입실을 허락했다.
"이걸 읽어보게."
화담과 지함, 단 둘이 마주앉았을 때였다.

화담은 허엽이 써준 서찰을 내밀었다.

- 선생님,
유능한 젊은이가 있어 학인으로 천거합니다.
성명은 이지함으로,

대과에서 장원 급제한 수재입니다.
그 해에 있었던 사초 사건으로 친구를 잃고,
정혼했던 약혼녀를 잃었습니다.

양주 봉선사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도가에 입문했다고 합니다.

본시 영명하니 스승님께서 바로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옵니다.-

"이젠 내 뜻을 알겠는가?"
"짐작할 만 하옵니다."
"자네가 비록 북창이라는 사람에게서 도가를 배워 아픈 과거를 잊었다 하나,

자네 머리에서만 지워졌을

가슴속에는 깊은 원한의 덩어리가 여지껏 풀리지 않고 뭉쳐 있었네.

내 말이 틀린가?"
"맞긴 하오나 어떻게 북창의 이름을 아시옵니까?"
허엽의 서찰에는 분명 북창의 이름이 없었다.
"북창이 사신으로 중국에 드나들 때 두어 번 만난 적이 있었네.

그 사람이 자네를 큰그릇으로 키워놓았네.

나는 그저 다 만들어진 그릇에 채워넣기만 하면 되니

어디까지나 그이가 자네 스승일세."
화담은 지함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자네 마음 속 미망을 캐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여겨주게."
지함은 화담에게 큰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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