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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민이의 죽음-소설^토정비결(上-9)

세월은 그야말로 흐르는 물이었다.
어느새 봄이었다.
몇 년 만에 오는 가회동은 개나리와 진달래 꽃더미에 파묻혀

혹 무릉도원이 아닌지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볼 정도였다.

형 지번은 청풍 군수가 되어 임지로 떠나 있고

가회동 집은 형수와 조카 산해가 지키고 있었다.
나지막한 옆집 담장 너머로 개나리 가지가 휘어져 있고

그 틈으로 어린 율곡이 책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군데군데 흙이 내려앉은 담장은 빈한한 살림살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나마 화사한 개나리 꽃더미가 있어 애처로움을 덜어주고 있었다.
지함은 대문을 밀다 말고 옆집 율곡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문을 두드리자 하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사랑에서 글을 읽고 있던 율곡이 벌써 알아차리고 반색을 했다.
율곡을 가르치고 있던 허엽도 지함을 돌아다보았다.
"오랜만이오.

그래 그동안 봉선사에서는 공부가 많이 깊어지셨소?

이제 벼슬길에 올라야 하지 않겠소?
대과에 장원 급제한 수재께서 자꾸 떠돌기만 해서야 되겠소이까?"
허엽이 반갑게 맞으면서 덕담을 건넸다.
"공부가 워낙 짧아서 아직 벼슬은 생각하지 않고 있소이다.

그래서 허 선비께서 배우셨다는 화담 산방에 입문할까 하고 있소이다.

 

"화담 산방이오? 거긴 폐쇄되었는데요.

선생도 이미..."
"하하하. 알고 있소이다.

화담 선생이 과거 공부
때문에 몰려오는 학인들 내치려고 짐짓 그리 하셨다는 걸."
지함의 말에 허협은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이거, 미안하오이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장이가 되어버렸소이다.

기왕 마음을 정하셨다면 제가 서찰을 한 통 써드릴 터이니 그걸 가지고 가십시오."
"고맙소이다."
지함은 허엽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율곡에게 말을 건넸다.
"율곡, 공부는 잘 되어가나?"
"율곡이 지지난 해, 열셋에 벌써 진사시에 합격했소이다."
율곡 대신 허엽이 자랑스레 대답했다.
"장하구나."
지함이 율곡의 어깨를 두드리자 소년티가 물씬 나는 율곡이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스승께서 잘 이끌어주신 덕분이지요.

저는 따라가기만 하면 저절로 공부가 되는 듯합니다."
"아니라오.

내당에 계신 대부인께서 워낙 가르침이 출중해서 난 가르칠 것도 없다오.

매번 와서는 놀라고만 간다오.

뭘 좀 가르치려고 하면 벌써 알고 시치미를 뚝 떼곤 나를 놀리기가 일쑤라오,

허허허."
내당의 대부인이라면 사임당 신씨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허엽이 먹물을 듬뿍 바른 붓으로 화담에게 보낼 서찰을 쓰고 있는 동안

율곡과 지함은 마당으로 내려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율곡아,

너도 이 세상에 공맹뿐이라고만 생각 말고 다른 것도 두루 공부하거라.

내가 지금 신기한 공부를 많이 하고 오는 길이다.

허엽, 저 선비도 화담 산방에서 배웠으니 그런 걸 많이 알고 계실 거다.
틈틈이 지루할 때마다 여쭈어 보거라.

다른 도도 가르쳐 달라고..."
허엽이 서찰을 다 써서 한지에 말아 지함에게 건네주었다.

지함은 그것을 받아 가슴에 지니고는 남산골 자기 집으로 향했다.
반쯤 열린 대문을 열고 지함이 집안으로 들어서자
여인네의 품에 안겨 대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아이인데도 낯이 익었다.

아이가 뭐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지함을 알아챈 여인네가

화들짝 놀라 마루에서 일어났다.

이제 얼굴도 희미하게 잊어버린 자신의 아내였다.
아이는 낯을 가리는지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반쯤 얼굴을 가리고,

그러나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한 눈으로 지함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두 살쯤 되었을까. 제법 총명한 기가 있어 봬는 아이였다.
"산휘입니다. 아주버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인사드려라. 네 아버님이시다."
핏줄은 당긴다고 하더니만 그래서 낯이 익어보였는가.

아이는 아버지라는 말에 배시시 웃으며 지함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다리를 부둥켜안은 아이를 어쩌지 못하고 멋적어 하던 지함은

잠시 후 아이를 번쩍 안아올렸다.
아이는 터질 듯 부푼 분홍빛 뺨을 지함의 얼굴에 마구 부벼댔다.

지함은 기쁨인지 슬픔인지 헤아릴 수 없는 묘한 감동이 솟구쳤다.

간절히 원하지 않아도,
사랑으로 결합하지 않아도 생명은 탄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을 쏘옥 빼닮은 또다른 자신이었다.
생명이란 시초부터 슬픈 것이로구나.
아이를 내려놓으며 지함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년 만에 지아비를 만나고도 아내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하기사 애정이 없기로는 지함만이 아닐 터였다.

얼굴도 모르고 시집와 섬기게 된 지아비,

혼인한 이후로 단 한번도 정겹게 안아주지 않고 집안을 내팽개치고

기방에나 빠져 살던 지아비에게 어찌 정이 가겠는가.
사나이인 지함이야 밖으로 돌면서 이것저것 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여자인 이상 어쩌지도 못하고 저렇게 무감동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리라.
죄스러운 마음에 지함은 아내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의 마음에 드는 지아비가 되고자 남은 공부를,

이제야 시작한 공부를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저 아내의 처지를 이해한 것만으로 죄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볼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여인은 민이보다도 더 서글픈 운명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함이 명세와 민이를 잃고 폭음으로 날을 지새고 있을 때 홍성으로 낙향하면서

형 지번이 억지로 짝을 맺어놓고 길을 떠난 게 그 시작이었다.

아마도 지번은 그렇게 해서라도 지함을 잡아보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지함은 한 달도 더 머물지 않고 집을 뛰쳐나가 기방에만 얹혀 살았다.

그 뒤로 그 여인, 아내에게 소식도 연락도 주지 않았다가

광릉으로 떠나면서 잠시 들른 것이 고작이었다.
지함은 그의 아내라는 여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얼굴이 낯설었다.
지함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내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녀자 혼잣몸으로 고생이 많았겠소.

나는 한 열흘 묵었다가 송도로 떠날 것이오."
아내는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지함은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어딜 좀 다녀오겠소."
집을 나선 지함이 찾은 곳은 교동 명세의 집이었다.
명세가 세상을 뜬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으니

그 집에 명세나 민이의 흔적이 남았을 리도 없건만

지함은 천천히 추억을 되새기며 집 주변을 한바퀴 비잉 돌았다.

어린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 골목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지함은 슬며시 발뒤꿈치를 들고 담장 안을 넘겨보았다.

민이가 정성을 들이던 화단은 새 주인이 통 돌보지 않았는지 잡초가 무성했고

꽃 한 송이 제대로 피어 있지 않았다.

민이가 좋아하던 모란만이 무더기로 짙푸른 잎을 피우고 있을 뿐이었다.
모란꽃 옆에 앉아 있던 민이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저 사랑방문을 열고 빼꼼 들여다보던 민이의 눈은 또 얼마나 반짝였던가.

저 사랑에서 명세와 주고받았던 수많은 말들...

그 그리운 날들은 이제 영원히 다시 올 수 없을 테지...
지함은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지함이 물어물어 정순붕의 집을 찾은 것도 한양을 떠나기 전

민이를 혹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한가닥 희망에서였다.

민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지나간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지함의 발길을 정순붕의 집으로 향하게 했다.
정순붕이 죽은 지금 그의 첩이 되었다는 민이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지함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멀리서 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진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으련만...
정순붕의 집을 향해 걷는 지함의 발길은 무겁기만 했다.
정순붕은 죽었건만 아직 집안의 세도는 당당한 모양인지 집안 단속이 잘 되어 있었다.
없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지함은 정염을 찾았다.
당연히 없다는 대답이었다.
"아우되는 분들은 계십니다만..."
"아니오."
차마 이 댁 주인의 첩을 만나러 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민이를 만난들 무얼 어쩌겠는가.
북창이 아니라면 감히 이 집에 올 생각도 내지 못했을 터였다.

대문 앞까지는 왔지만 북창도 없는 집에서 민이를 만나볼 요령이 없었다.
지함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대문을 나섰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지함을 불렀다.
"저, 혹시 선비님의 함자가 지자, 함자 아니신지요?"
문안에서 대문 밖을 살피던 소년이 뛰어나왔다.
열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북창의 아우인 듯 싶었다.
"저어, 함자가 맞으시지요?"
"그렇네마는..."
그러자 소년은 자세를 고르고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저는 정작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아버님이 돌아가겼을 때 형님께서 제게 은밀히 서신을 주셨습니다.

선비님이 찾아오실 거라고..."
찾아올 줄을 알았다고?
북창은 지함이 왜 이곳을 찾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리 오십시오.

형님께서 선비님께 보여드리라고 한 것이 있습니다."
정작은 앞장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후원 쪽으로 향했다.

그제사 지함은 부끄러움에 낯이 뜨거워졌다.
북창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함이 아직도 민이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아직도 지난 일에 매어 있음을.

그리고 이곳에 다시 나타나리라는 것까지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방을 선비님께 보여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후원의 조그만 별당에 있는 아담한 방이었다.
마루엔 부연 먼지가 끼어 있었고 문풍지는 몇 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안을 보시겠습니까?"
지함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정작이 문을 열었다.
경대와 몇 가지 가구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을

방은 을씨년스럽게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이 방은 왜 보여주는 건가?"
"아직 모르셨나요? 이 방을 쓰시던 분이 누구인지?"
"형님께서 말씀하셨나?"
"예, 선비님과 정혼한 적이 있다는 그분의 방입니다.

그런데 서운하시겠습니다. 돌아가셨으니."
"죽었단 말인가? 언제?"
지함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민이가 죽었다니, 민이가 죽었다니...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떴습니다.
염병에 걸렸습니다.

아버님도 염병으로 돌아가셨지요."
지함은 정작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이.

이 세상 어느 하늘 밑에선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함에게 살아갈 힘을 주고 있었던 민이. 그 민이가 죽었다니,

이 세상에서 떠나갔다니...
광릉에서 북창과 도가 공부를 하면서

지함은 민이에 대한 그리움을 깨끗이 지워버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양으로 올라오니 옛정이 다시 살아나고

정이 이곳까지 지함의 발길을 끌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민이가 죽었다니...
"한양까지도 염병이 쓸고 지나갔군."
그러나 지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정작의 말을 받았다.

북창이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짐짓 태연을 가장한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염병이 제 발로 아버지를 찾아든 것은 아니지요.

그이가 아버님에게 전염시킨 거랍니다."
"전염시켰다고?"
"아버님은 그이의 방에서 살다시피 하셨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

아버님 베개에서 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팔뚝이 나왔지요.

그이가 어디서 그걸 구해다가 아버님의 베개 속에 몰래 숨겼던 겁니다.
그래서 두 분 모두 염병에 걸린 것이지요.

염병에 걸리면 다 죽게 되는 것이고."
그랬었구나.

결국 민이는 그렇게 해서 복수를 하였구나.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같은 하늘 아래에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한을 풀어주지 못한 나를...
이 방에 앉아 민이는 원한으로 사무친 밤들을 보냈을 것이다.

때로는 지함을 그리워하며 기나긴 밤을 눈물로 적셨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부질없이 지나가버린 옛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함의 눈시울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후원 곳곳에 무리를 지어 자라는 모란이 보였다.

모란은 아직 때가 일러 피지 않았다.

 

지함은 그것도 필시 민이가 가꾸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작정한 순간에도 민이는 삶에 대한
한가닥 애착을 모란을 통해 피워낸 것인지 몰랐다.
지함은 오래도록 눈물 고인 부연 눈으로 모란을 보고 있었다.
"이 방을 쓰시던 분이 심어놓으신 겁니다.

오월이면 후원이 온통 붉은 모란으로 가득 차지요.

그래도 썩어빠진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곳이랍니다."
정작의 말투는 영락없는 북창이었다.
안명세와 민이는 그들이 목표로 하는 일을 목숨을 바쳐 이루어냈다.

그러나 지함은 목숨을 바치면서라도 해내야 할 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들의 불행을 맞아 기방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세상을 비관한 것뿐이었다.
지함은 가슴이 저려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쓸쓸히 발길을 돌려 힘없이 대문을 향하는 지함을 정작이 불러세웠다.
"이 선비님. 선비님께서는 송도로 가실 것이지요?"
북창이 그것까지 일러준 것일까?
지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서는 금강산으로 들어가신다고 하시면서 제게도 송도로 가라 하셨습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몇 살인가?"
"이제 열 여덟입니다."
"사서는 배웠는가?"
"일별(一瞥)은 했습니다만... 꼭 데려가 주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계모도, 이복 형제들도 보기 싫습니다."
그래서 얼굴에 그늘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별 가지고는 안 되네.

모든 것은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법,

좀더 공부를 하게.

사서를 제대로 뗀 다음에 오게.

그게 좋다네."
정작은 금세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이 없었다.
계모와 이복 형제들 속에서 형 정염의 말을 믿고
지함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공부가 부족하니 아직 떠날 때가 아니라는 말은 핑계였다.

지함은 정작과 함께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 정순붕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민이의 생명을 앗아간 정순붕,

그 자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함은 정작과 함께 가기가 싫은 것이었다.
내가 아직도 정순붕에 대한 원한을 떨쳐버리지 못했구나.
지함은 북창에게서 도가를 전수받으면서 모두 떨쳐버렸던 것으로

생각했던 원한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장부란 쉽게 떠나지 않는 법일세.

참고 견디는 것,
그것도 장부의 일이야."
지함은 변명하듯이 정작을 데리고 가지 않는 이유를 둘러댔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하면서도 정작의 말투나 표정에는 아쉬움의 빛이 역력했다.

정순붕의 집을 나와서야 지함은 송도로 떠날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얼핏 본 집안 살림으로는 길 떠날 여비조차 궁할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있는 돈을 다 챙겨보라고 일렀으나 역시 생각했던 대로였다.

아내는 종도 하나 없이 집안의 궂은일까지 혼자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기사 형 지번이 유배나 다름없는 청풍군수 노릇으로

두 집안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부인이 전 재산이라고 내놓은 돈은 송도까지 가는 여비로 쓰는 데에도 간당간당할 정도였다.

그것마저 쓸어갔다가는 두 모자가 굶어죽을 판이었다.
낙담한 지함은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책만 읽어댔다.
다음날 아침,

지함은 아내에게 받은 돈 전부를 들고 집을 나섰다.
"벌써 떠나십니까?"
아직 열흘이 되지 않은 걸 두고 아내가 이르는 말이었다.

사대부 집안의 교육을 제대로 받은 탓인지

집에 돈 한 푼 남겨놓지 않고 다 들고 나가는데도
부인은 지함의 행동에 대해 일체 말이 없었다.
"아니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소.

저물기 전에 들어올 것이오."
집을 나온 지함은 남대문 밖 저잣거리로 향했다.
농사 준비로 농부들은 여념이 없을 때였지만 그래도 저잣거리는 제법 북적거렸다.

옷감이며 농기구며 과일이며 여인네들의 패물에 이르기까지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나무를 한 짐 내려놓고 흥정을 붙이는 나무꾼,
가져온 물건을 다 팔고 술을 한잔 걸치고는 시비를 걸고 있는 중늙은이,

봄나물을 한 소쿠리도 안 될 만큼 펼쳐놓고는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노파,
비단을 사라고 외쳐대는 비단 장수.

저잣거리는 생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지함은 늘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홍성에 있을 때도 구태의연한 선비들보다

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즐거웠는데,

바로 이런 분위기 탓이었다.
이들은 비록 사회적으로야 출세길이 막힌 평민이거나 천인들이지만

삶의 자잘한 재미와 슬픔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다리가 아프도록 저잣거리를 쏘다닌 다음에야 지함은 나막신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가는 봄비 정도야 나막신 없이도 다닐 만한 터인데다가

제철이 아닌 봄이어서 나막신 장수들은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지함은 가져온 돈을 다 털어 그날 나온 나막신 가운데

질 좋고 무늬를 곱게 놓아 제법 공을 들인 것을 모두 사들였다.

 

"이 많은 걸 다 어디다가 쓰시려는 겁니까?"
사가는 사람도 없는 마당에 물건을 떨어주니 군소리없이 팔면서도

나막신 장수들은 지함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긴 이런 봄날에 한두 켤레도 아니고

달구지 그득히 나막신을 사가니 이상할 법도 했다.
지함은 그저 빙그레 웃고는 나막신을 달구지에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입이 벌어진 것이야 당연했다.

달구지에서 부린 나막신이 마루를 가득 채웠으니.
"그 돈으로 이걸 사오신 겁니까?"
"그렇소."
부인의 입에서 낙담한 듯한 한숨소리가 새나왔다.
신나는 건 아들 산휘뿐이었다.

산휘는 나막신을 신어보기도 하고 집어던지기도 하며

제 어미의 한숨에는 아랑곳없이 즐거워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많은 나막신을 어디다 쓸 것인지 물어볼 법도 하건만

아내는 한숨을 내쉴 뿐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지함도 군소리없이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쳤다.
북창이 주고 간 책들을 독파는 하고 한양으로 왔으나
가르침이 높다는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자면
아직도 한참 부족한 실력이라 여겨진 탓이었다.
나막신을 사온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먹장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더니

아침밥을 막 먹고 났을 즈음부터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한동안 가문 뒤끝이긴 했지만 봄비치곤 매우 거센 빗발이었다.

기세 좋아봐야 봄비가 하루 이상 가겠느냐고 다들 느긋해 했지만

비는 여간해서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지함은 도롱이를 받쳐 쓰고 남대문으로 나갔다.
길마다 물이 고여 나막신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다.
상인들은 금세 지함을 알아보았다.
"아니, 나막신을 다 쓸어간 양반 아니시오?

그 많은 나막신은 어디다 두셨습니까?"
나막신 장수들은 물건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막신을 더 사러 왔소."
"세상에.

남대문의 나막신이란 나막신은 모조리 사가놓고

무슨 나막신이 남아 있다고 그러십니까?
나막신을 찾는 사람은 한둘이 아닌데 물건이 있어야 장사를 하지요.

한 켤레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아십니까?

부르는 게 값입니다.

그런데도 장사를 할 수가 없어요.

물건이 있어야 팔기도 하고 이문도 볼 거 아니겠소."
"그래 한 켤레에 얼마나 하오?"
"세 배로 뛰었어요.

닷푼 하던 게 지금은 한냥 반이랍니다.

그나마 없어서 못 팔지요.

이러다간 두 냥도 더 나갈 판입니다.

나막신 깎는 게 어디 쉽기나 하나요.

한 사람이 온종일 깎아대야 몇 개를 만들까말까 한 걸요."
나막신 장수들은 지함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지함만 아니었으면 이 기회에 한몫 챙길 수 있었을 텐데 싶은 모양이었다.
허허. 지함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전처럼 장에 나막신이 있었더라면 지금같이 값이 뛰었겠는가.
"나막신을 팔러 나왔소."

 

"예?"
상인들은 지함의 차림새를 아래위로 훑어내렸다.
차려입은 건 분명 양반인데 나막신을 팔겠다니

그런가 아닌가 하고 살피는 눈치였다.

양반이 돈 버는 일에 관여했다가는 큰 흉이 되는 세상이니 그럴 만도 했다.
상업이란 천민이나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두 냥은 받아야겠소.

비는 내일도 그치지 않을 테니 파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상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뭔가 쑥덕거리더니

달구지를 한 대 불러 지함을 따라 나섰다.
"그런데 선비님은 어떻게 비가 올 줄 아셨습니까?"
"허허. 가물면 비가 오는 법이지요."
"하지만 봄비가 이렇게 많이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요.

나막신 장사 몇 년 만에 봄에 물건이 이렇게 달려보기도 처음이구요."
"운이 좋았다고 해둡시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질 좋고 무늬를 곱게 새긴 나막신만 골라서 사가신 것입니까?

다른  것은 값이 너무 싸서 장사가 안 될까봐 그러셨나요?"
"허허허. 양반들 돈 좀 빼앗아보려고 그랬소이다."
상인들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두 냥이나 값을 불렀는데도 선뜻 따라나선 것이

내일까지 비가 멈추지 않을 것이란 지함의 말을 그대로 믿는 모양이었다.
지함은 천문을 읽었을 뿐이었다.

비가 많이 오리라는 것은 여기저기서 그 흔적이 있었다.

구름의 빛깔이 그러했고,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까지 그랬다.
벌써 북창의 천문은 그런 곳까지 닿아 있었다.
음양오행으로 양수(陽水)가 콸콸 쏟아지는 날이 겹쳐 있었던 것이다.
지함은 처음 집에서 가져간 돈의 네 배를 아내에게 내놓았다.
아내의 눈동자에 얼핏 물기가 젖는 것 같더니

이내 아내는 고개를 들고 원망스러운 눈길로 지함을 쳐다보았다.

아차 싶었다.

먼저 보인 눈물이야 처음으로 집을 생각하는 남편의 마음씀에 감동한 것일 테지만,

나중의 눈길은 며칠 만에 이만한 돈을 버는 능력을 갖고서도

지금껏 가족을 내팽개쳐온 남편에 대한 원망이었다.
어쨌거나 산휘와 부인이 한동안 먹고 살 돈을 건네주고 나자 지함은 마음이 한결 편했다.
지함은 아직도 아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잘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이의 영상을 다 지워버리지 못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고,

새로운 운명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지금,

지함은 이 엄연한 사실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민이가 아닌 다른 여인이 아내가 되어 있고,

아들이 있고,

그리고 살아 움직이는 자기 자신이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며칠 뒤 지함은 보던 책과 돈만 챙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또 얼마 만에 돌아오게 될지 모르는 기약없는 이별이었다.

그러나 부인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산휘만이 지함의 소매끝에 매달려 애처롭게 눈물 젖은 목소리로 떼를 썼다.
"싫어요, 싫어요."
며칠 만에 정이 든 것일까.

어머니가 나무라며 잡아떼는데도

산휘는 어린 팔로 악착같이 지함의 소매를 잡고 놓지 않았다.
지함의 가슴이 아려왔다.
"울지 말아라.

아버진 금세 돌아오실 게다."
아내가 아이를 달랬다.

아내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본능적으로 긴 이별을 예감하는지 어머니의 말에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아내가 간신히 아이를 떼어내고는 발버둥치는 어린 것을 꽉 부둥켜안았다.
등뒤로 자지러지는 산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함은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지함이 곁에 있는다고 산휘가 짊어져야 할 삶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닐 터였다.

어차피 삶이란 이런 이별과 고통의 연속인 것을...
산휘야.

너는 조금 더 일찍 이별의 고통을 겪는 것뿐이다.
그러나 좀처럼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골목길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오장육부를 다 긁어내는 듯한 산휘의 울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사이로 들려오는 아내의 소리없는 울음을 지함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운명이 지함을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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