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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도가(道家) 입문-소설^토정비결(上-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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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정휴는 봉선사를 떠나기로 했다.

그 언젠가 한양으로 떠나는 안명세를 정휴와 지함이 배웅했듯이

이번에는 정염과 지함이 정휴를 배웅했다.
아직 동도 트기 전인 이른 새벽이었다.

새벽송 치는 소리에 벌써부터 눈을 뜨고 있던 정휴는 아침 공양을
기다릴 것도 없이 부랴부랴 길을 떠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정휴가 지함의 방에서 번민으로 밤을 지새는 동안,
지함은 정염의 방에서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정휴는 안명세가 한양으로 떠난 이후

그 빈자리를 자신이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에 은밀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출가한 몸으로 기방에 들어 지함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그런 기쁨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함은 정휴를 남겨두고 다른 이와 벗하여 떠났다.

지함이 남긴 빈자리를 정휴는 혼자 감당해내기가 힘에 겨웠다.
이제 지함은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지함을 처음 만난 정휴가 그랬듯이,

지함의 두 눈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과

새로운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불타고 있음을 정휴는 보고야 말았다.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왜 이다지 배신감이 느껴지는지 정휴는 알 수 없었다.
지함은 정휴에게 하나의 목표점이었다.

정휴는 지함이 있음에 공부의 목표와 양을 정하고 그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심으로는 그 목표를 추월하여 지함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가 달려오면 달려온 만큼 지함은 저만치 앞서가 있었다.

진실을 향한 지함의 열정을 정휴는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런 지함이 정휴는 부럽기도 하고, 가끔 가다 불쑥불쑥 시기심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함은 이제 정휴를 그런 동생이나 제자로서도 별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일까?
정휴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정염을 따라

슬쩍 옆방으로 가버린 지함이 정휴는 못내 서운했다.
지함이 단지 옆방으로 갔을 뿐인데도 정휴는 지함이 엄청나게 먼 곳으로 가버린 듯

까마득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도량송(道場頌)을 외는 행자승의 낭랑한 목소리,
그리고 커졌다가는 작아지고 작아졌다가는 커지는
목탁소리가 정휴의 가슴속을 더욱 휘저었다.
정휴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바랑을 들고 뛰쳐나와 정염의 방으로 갔다.
정염의 방에서는 정휴가 지함을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격정적인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보게, 벼슬 따위는 생각하지 못한 게 오히려 다행이라네.

내가 웬만한 벼슬은 다 해보았고,
조정에서도 대신들 하는 일을 다 구경했는데 하나도 부러워할 것 없다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일세."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몸소 겪으셨으니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여튼 그런 아버님을 두시고도 홀홀 떠나오신 것이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사람은 떠나는 때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오.
그렇지 않고는 큰 세계를 볼 수가 없소.

부모에게서 떠나고, 고향에서 떠나고.

그리고 여자에게서 떠나고,
벼슬에서 떠나고, 욕심에서 떠나고."
"버리라는 말씀이시군요.

친구에 연연해 하고,
정혼했던 여자를 못 잊어하는 제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정휴는 안에서 들려오는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으로 꽂혀드는 것 같았다.

버려야 할 것은 정휴 자신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지함이나 정염도 양민이고 천민이고 하는 계급에서 떠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대화에 올릴 필요도 없이 하찮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인가.
정휴가 신분으로 고뇌할 때 지함은 기방에 몸을 던져놓고도 다른 생각을 했었다.

더 큰 신분, 생명 가진 모든 것으로 사고를 넓혀 온 만물이 다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지함과 정휴의 차이였다.

지함은 원래 양반으로 났으므로 천민이니 양민이니 하는 고민 따위는

멀리서 관망하는 것으로도 부족함이 없었을 터였다.
지함과 정염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목소리는 기운차게 울렸다.
정휴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 정염의 방문을 열었다.
"형님, 그만 가보렵니다."
정휴가 문을 열고 아뢰자 지함은 말을 멈추고 정휴를 빤히 건네다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 전까지와 달리 부연 안개가 걷히고,

광채가 나는 것을 정휴는 알아챘다.

그리고 지함이 자신에게 듣기 좋은 따스한 말 한마디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금강산 어느 암자라고 했나?"
지함은 정염과 하던 대화가 잠시 중단되는 것조차 몹시 아쉬운 듯

미적거리며 정휴를 배웅하기 위해 신발을 꿰찼다.
"모릅니다. 선사 법호만 들고 갑니다."
"언제쯤 나오려는가?"
지함은 예사스럽게 물었다.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으로 나오면 뭘 하겠습니까. 집착과 번민만 쌓이는 걸요.

그만 들어가십시오."
정휴 자신도 모르게 퉁명한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런 감을 못 잡았을 리 없건만 지함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금강산엘 가신다구요?

저도 언젠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만,

다시 만날 날이 있겠군요.
그럼..."
지함 대신 정염이 무성한 수염을 쓰다듬던 큼직한 손을 내밀었다.

정휴는 그 손을 못 본 체하고 돌아섰다.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싱겁기 짝이 없는 이별이었다.

지함은 한 순간에 다 타버리는 불꽃처럼 만남에도 헤어짐에도

아무런 미련이 없는 사람 같았다.

정휴가 처음 찾아갔을 때도 토정은 그렇게 쉽게 문을 열어주었고,

이제 정휴가 떠나겠다는데도 역시 쉽게 길을 터주고 있는 것이다.
정휴는 그의 냉정함이 사무치도록 가슴 시렸다.
"집착과 번민이 버려야 할 미망만은 아닐세.

그것을 붙잡고 끝까지 파헤치다 보면 거기에 진실이 있을 것이야.

부정하지만 말고 한번 뛰어들어 보게."
지함의 말이 뒤통수를 후려쳤지만,

번뇌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정휴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정휴는 똑바로 앞을 보았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걸어가야 할 길이 왜 이다지도 먼가.
정휴는 그만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가야 했다.
등골을 파고들던 추위가 가실 만큼 걸어와서야 정휴는 뒤돌아보았다.

어둠에 잠긴 희끄무레한 숲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정휴가 금강산으로 떠나가자마자 지함은 정염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지함은 정염을 북창이라고 불렀다.

그가 그렇게 불러주기를 원했고,

지함 또한 그에게서 더 이상 정순붕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북창의 방에는 지함이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북창이 보란 듯이 그 책들을 방바닥에 죽 늘어놓았다.

사서삼경은 자취도 없었다.

아니 아예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참동계(參同契)>, <황정경(黃庭經)>,
<옥추경(玉樞經)>, <음부경(陰符經)>,
<포박자(抱朴子)> 등이

3동 4보(三洞四輔, 道藏의 기본 체계를 이루는 도교 경전)에 섞여 있었다.
'왜 같은 하늘 아래에 살면서 나는 여지껏 이런 세상을 몰랐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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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의 전적과 양생론(養生論)

도교의 전적과 양생론(養生論) 도교의 수련은 건강을 유지하여 장수를 누리기 위한 방법이므로 그것은 곧 양생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은 이론상으로는 불로장생을 꾀하는 것을 반박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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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세상이 어쩌면 이렇게 넓은가.'
지함은 크게 놀라면서 책을 한권한권 차분히 들추어 보았다.

세상의 학문이라고는 사서오경에 성리학뿐이라고 배워온 지함에게

그 책들은 하나하나가 놀라운 세상이었다.
이따금 들리는 말로 금강산이나 지리산에서 수도하는 도인들이 이런 책들을 읽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북창에게서 얻어볼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었다.
책을 앞에 둔 지함은 가슴이 벅차서 연신 큰 숨을 들이쉬었다.

어려서부터 은근히 관심이 쏠리고 알고 싶어했던 내용이 죄다

이 책들 속에 들어 있을 것이었다.
정순붕,

그는 도대체 지함에게는 어떤 의미란 말인가.

사랑하는 단 한 여인,

그 민이를 첩으로 삼고
세상에서 가장 친하다고 여기며 마음 붙여온 친구 안명세의 목숨마저 앗아간 사람.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지함은 민이와 혼인을 올리고 조정에 출입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명세와 함께 이 세상과 역사와 미래를 논하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지함의 운명을 뒤틀어버린 그가

이제는 큰아들 북창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가문이 중요할 것은 없다.

부모가 중요할 것도 없다.

부모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오도록 몸을 빌어주는 것뿐이다.

부모와 자식은 아주 다른 개체이다.

정순붕은 정순붕이고 북창은 북창일 뿐이다."
인간의 운명이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하루 앞도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란 이를 두고 이른 말임에 틀림없었다.
그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지함은 사서오경도 아니오,
세상살이 부귀영화와 관련 있는 것도 아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책들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다.
"자네도 도인(道人)이 되어보겠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느새 열한 살 더 많은 북창이 지함에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북창 정염.
병인년(丙寅, 1506년), 충청도 온양에서 났다.
산수, 미술, 중국어에 능통하여 아버지 정순붕은 그를 끔찍이도 위해 길렀다.

중국에도 여러 차례 드나들며 외국의 문물을 접했다.

그런 덕분에 일찍부터 장낙원(掌樂院)의 주부(主簿)를 거쳐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의 교수를 지냈다.
정순붕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칼에 묻은 피를 씻을 새가 없던 시기에는 포천현감을 지냈다.
그러다가 현감직을 던져버리고 부자 관계를 청산한

과천 관악산에 들어가 마음 가라앉히는 공부를 했다.

정염이 도가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은
관상감에서 일하는 동안 눈여겨 보아두었던 게 있어서였다.

그러다가 공부의 장소를 바꾸어 양주 봉선사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한 줄기 도가 따로 있다네.

그것은 천축(天竺, 인도)의 불교도 아니고 공맹(孔盟, 공자와 맹자)의 유교도 아니라네.
일찌기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풍류도(風流道)라 일컬었던 것, 곧 선(仙)일세."
"그런 게 있었습니까? 과문하여 처음 듣습니다.
어찌 한 하늘 아래에 이토록 다른 세상이..."
"난 이미 선도(仙道)에 입문한 몸,

자네가 뜻을 같이 한다면 그동안 내가 배워 알게 된 것을 모조리 토해 놈세."
"이미 벼슬도 버린 몸입니다.

일신의 부귀영화는 더 이상 저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천하를 떠돌면서 질긴 목숨이나 닳아 없앨 생각입니다."
지함은 북창에게 바짝 다가앉으면서 각오를 밝혔다.
"허허허, 천하를 떠돌겠다고?

그게 바로 선가(仙家)의 풍류(風流)라는 걸세.

예로부터 도인이라는 사람치고

천하를 두루 돌아보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네.

신라의 화랑들이 다 그러하여

산천경개를 두루 감상하는 것을 가장 큰 공부로 여겼고,

근조에 이르러서는 김시습(金時習)과,
내 스승 대주(大珠) 큰스님이 그러했다네.

나도 한 바퀴 돌아왔다네.

명산에 가서 하늘에 기도를 하고,
단전 호흡으로 신체를 단련하여 도력을 높였지."
"선도에 들면 무엇을 공부하게 됩니까?"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장자의 <남화경(南華經)>,

열자 등 도가서(道家書)를 읽고,
역리(易理), 음양(陰陽), 오행(五行), 참위(讖緯),
의술(醫術), 방술(方術), 부적(符籍), 주술(呪術),
천문(天文), 지리(地理)를 익히고,

단전 호흡과 단약(丹藥) 제조 비방을 배우고 나면

비로소 도인의 대열에 드는 거라네.

이렇게 튼튼한 줄기를 갖고 힘차게 뻗어내려온 도맥(道脈)을

자네도 이어보지 않으려나?"
"전 워낙 천학 비재한 몸이라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한두 가지만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한 가지 먼저 짚어두고 공부를 시작하세.

자네를 야인으로 몰아부친 그 사건을 공부해보세.

나는 내가 이 삶을 선택했지만

자네는 운명에 이끌려서 이렇게 된 것 아닌가."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와 안명세 사관,

그리고 정혼했었다는 여인(민이),
내 아버지(정순붕).

각자의 운명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살펴보세.

이해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운명은 언젠가는 같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네."
"사주(四柱)를 보신다는 것인가요?"
"그렇다네.

아는 대로 사주를 대주게."
지함은 기억을 되살려 안명세와 민이의 사주를 대었다.

명세의 생일을 기억할 수 있었고,

민이는 사주단자가 양가를 오갈 때 외워두고 있었다.

그리고 지함 자신의 사주도 불러주었다.
북창은 지함이 불러준 사주를 받아 적고는 아버지 정순붕의 사주를 마저 적었다.
북창은 한참 동안 글을 적어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어.

이보게, 지함.

이 사주를 보게.
안명세는 이 나이에 명이 끊겨 있네.

여기서 명을 잇기란 여간해서는 어렵다네.

내가 여러 사람 사주를 보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영락없이 끊기고 만다네.
그리고 자네와 정혼했던 이 사람을 보게.

정실이 될 수 없어.

첩이 될 운명이야.

그런데 이게 뭔가.

명도 길지 않군. 머지않았어.

이건 우리 아버지 사주일세.
첩이 여럿 있는 거야 그렇다 쳐도,

살(煞)이 이렇게 많다네.

아니, 명이 여기서 끊기는군. 이상하군.
아버지와 민이 두 사람이 비슷한 때 세상을 떠나는군."
"그런 것까지 다 나옵니까?

어떻게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알아볼 수 있는지요?"
"글쎄, 무슨 이치로 이렇게 맞아들어가는지,

하늘의 오묘한 뜻이 어떻게 사람의 지혜에 잡혔는지 나도 의문일세.

관상감에 있을 때 배워둔 지식일세.

하여튼 자네에게서는 관운(官運)이 보이질 않네.

한곳에 오래 붙어 있을 사주가 아니야.

여기저기 떠돌아 다닐 운명일세.

자네와 안명세,

그리고 정혼했던 여인의 성격까지 얘기해줌세."
북창은 지함이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까지 짚어내었다.
그리고 안명세가 몇 살에 부친을 잃었고,

몇 살에 결혼했다는 사실도 말했다.

북창은 안명세의 성격까지 하나하나 밝혔다.
"내가 이 사람들의 사주를 밝히는 것은

자네가 그 사람들에게서 아주 떠나오기를 바라기 때문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알았네. 함께 가보세.

이 길이 어디로 이어졌는가."
그러나 그 길을 시작하기도 전에 봉선사에 와 있던 학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둘 다 절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간신배의 무리와는 함께 공부할 수 없다."
"도대체 간신배의 무리를 감싸는 녀석은 어떤 놈이냐?"
그러나 북창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함도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학인들도 정순붕이 살아 있는 한 심하게 굴지는 못했다.
문밖은 여전히 소란했지만 북창은 지함과 함께 도가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북창은 신선이 되는 길을 낱낱이 드러내보였다.
그가 관상감에 있으면서 배웠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 관악산에서 승(僧) 대주에게서 전수받은 내용까지 남김없이 쏟아냈다.

그것은 폭포처럼 지함에게 쏟아져내렸다.
지함은 인생이 완전히 새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세상이 갑자기 넓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디에 이런 신비한 학문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어디서 기다리다가 불쑥 나타나 나를 송두리째 휩싸는 것인가.

그것도 원수 정순붕의 아들을 통해서.

운명은 이렇듯 얄궂은 것인가.
다음날부터 지함은 아예 북창의 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북창의 방문을 열 때마다 지함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북창은 하얀 연기를 피우면서 환단을 만들고 있거나,

이상야릇한 향을 피워놓고 가부좌를 하고 있기가 일쑤였다.

어떤 때에는 몸을 좌우로 비틀어대면서 숨쉬기를 했고,

어떤 때에는 주술을 외우고 있기도 했다.
"자네가 세상을 주유하게 되거든 반드시 명산에 들러 하늘에 기도를 하게.

사람은 신통(神通)해야 모든 능력이 열린다네.

예전부터 무당들이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도하고 수도했다는 소식 못 들었는가.
무당이 바로 도인일세.

이제는 석가에 쫓기고 공맹에 시달려서 무당도 옛무당이 아니고,

이처럼 은자가 되어 살아가고는 있지만.

이제 그 모습은 국가적으로는 관상감에서 일부 찾을 수 있고,
소격서(召格署)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라네."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나 세상을 버린 사람들만이 찾는 꼴이 되었군요."
"그렇다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네.

근엄하게 성리학이나 따지는 조정에서도 공공연히 도가(道家) 의식을 행한다네.

내가 관상감의 교수로 있을 때에는 여름철 토왕일(土旺日)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단(丹)을 만들어 임금께 올렸다네.

그러면 임금은 그것을 신하에게 각기 세 개씩 나누어주곤 했다네.
게다가 관상감에서는 주사(朱砂)로 벽사문을 찍어 민간에 나누어주기도 했으니,

나라에서 도를 편 것이지.

소격서에서는 강화도 마리산에서 해마다 제천 의식을 집행하여

하늘에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도했다네."
북창의 유수 같은 달변에 넋을 빼앗긴 지함은
안명세도 민이도 잊고 오로지 도서(道書) 공부에만 열을 올렸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에 비해 북창이 가져다주는

세계는 깊이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바다,

바로 홍성에서 보았던 바다와 같이 크고 넓었다.
북창은 마치 아버지가 지함에게 지은 죄를

대신 갚으려는 듯이 지함을 쉴 새 없이 공부에 몰아붙였다.
북창은

풍류, 천문, 지리, 역학, 의학, 관상, 호흡 등을 차례로 강의해 나갔다.

자기가 배우면서 들였던 공보다 더 뜨거운 열의로 지함을 가르쳤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생각지도 아니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지함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공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풍류.
지함은 정신을 올곧이 갖고 경청했다.
"조선의 정신이라네.

지금 우리나라에서 글깨나 읽었다는 선비들이 쓰는 글을 보면

시와 사(詞)가 모두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네.

이는 몸만 조선에 살고 있지

혼은 중국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네.
자나깨나 아는 건 공맹(孔孟)이라,

우리나라 선조들이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네."
"중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지함이 궁금해 하자 북창은 중국에서 보고,

듣고 온 문물에 관해 상세히 얘기해 주었다.
"고을만 달라도 백성들의 성정이 다르고 풍습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나라가 다름에야."
북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쪽에서도 성리학이 승합니까?"
"공맹을 가지고 죽고 못사는 것은 오히려 우리라네.
우리는 중국에 중독되어 제 정신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네.

중국은 조선을 영 다른 나라로,

그것도 아주 보잘것없는 소국으로만 여기고 있는데

오직 조선만이 중국에 스스로 예속되어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착각하고 있다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공맹 만한 철학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도 저 단군 시절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정신이 있다네.

우리나라 민족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사상일세.

어느 나라고 그 나라만의 사상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는 그만 우리 것을 잃어버리고

중국 것을 우리 것인 양 외우고 있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것일세."
북창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사상을 찾는 것이 조선을
일으키는 큰 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 조선의 선비라면 사화(士禍) 같은 세속적인 사건에 연연해 할 때가 아니라네.

내가 학인들의 매를 주저하지 않고 맞을 수 있는 것도

다 조선의 혼을 찾아내려는 열정 때문이라네.

자네라면 사화의 충격을 딛고 오히려 더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네."
"조선의 정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산중에 숨어 세상을 등지고 사는 도인들이 그것을 쥐고 있네.

그것을 찾아 세상에 펴지 않고는 사화 같은 격변을 막아낼 수 없네.

딴 나라의 정신으로 사는 것은,

인간이 짐승의 혼으로 사는 것이나 다름없네."
북창은 조선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도가를 살리는 것이

조선을 바로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수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북창은

음양론(陰陽論)을 설명했다.
"오늘은 음양론에 대하여 이야기하세.

일찍이 화담 선생은 기 철학을 설파하셨는데,

우리는 음양을 논해야겠네.
음양을 낳은 것은 무엇인가?

태극(太極)이라고 한다네.
태극, 도대체 태극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게 그 모습일까?

성현들이 일컫기로 만질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고 했네."
"불가(佛家)의 불법(佛法),

정법안장(正法眼藏)이 다 같은 이치입니까?

선도(仙道)니 무위(無爲)니 하는 것도 다 같은 말 아닙니까?"
"그렇다네.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그 본질은 변할 게 없다네.

'똥 젓는 막대기'라고 부르면 어떻고
'썩은 감자'라고 부른들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태극이 변하기 위해서는 오직 기(氣)만 필요할 뿐이네.

그 기 작용에 따라 음양(陰陽)이 생산되는 것이라네.
그런데 어찌하여 기는

음기(陰氣)와 양기(陽氣)로 변화하는가,

이것을 밝히는 것이 참으로 하늘을 여는 열쇠가 아니겠는가.

이 세상 어떠한 물건이나 생명체도 음양으로 나뉘지 않는 게 없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하지 않을 수 없다네.
그것을, 나는 '하늘'이 그렇게 이치를 정한 까닭은 변화에 있다고 생각하네.

하늘은 정지되어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네.
사람도 남자와 여자로 갈라서 서로를 좇게 만들어
계속 아이를 생산해 나가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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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쓰기] 쫓다/좇다

다음 중 올바른 표기를 찾아 보자. ① 범인의 뒤를 쫓다 / 범인의 뒤를 좇다 ② 귀신을 쫓다 / 귀신을 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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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묘한 이치,

왜 남자는 여자를 그토록 따라다니고,

여자는 왜 남자 없이는 살지를 못하는가.
그것은 결론적으로 생식(生殖) 때문이라네.

사랑, 사람들은 사랑이란 추상적인 말로 그것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것도 음양에서 나오는 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네.
하늘은 남자와 여자같이 분명히 구분되는 물체만 음양으로 가른 것이 아니라,

남자 속에도 음양이 있고,

여자 속에도 따로 음양이 있으니

바로 양 속에 음이 있고,

음 속에 양이 있는 이치라고 보네.

오행으로 보자면 목과 화는 목이 양이고 화가 음 역할을 하지만,

화가 토를 만나면 화가 양이고 토가 음이 되는 것이니

이렇게 상황에 따라 역할이 변화하는 것이라네.

이 세상에 고정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

역시 무상(無常)의 도리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하네.
이 음양의 이치는 땅에서도 그렇고

하늘에서도 그렇게 이루어지네.

그러니 해가 있고,

달이 있잖은가.
이 음양론을 오래도록 궁구하다 보면

세상의 이치가 저절로 열리게 되어 있다네.

음양론 하나만 오로지 뚫어져라 생각하기를,

미련한 선자(禪者)가 공안(公案) 하나 붙들 듯이 하다보면

활연개오(活然開悟)할 날이 저절로 찾아들 것이네."
"오행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오행도 태극에서 나왔지.

그것을 밝히려면 이런 이야기부터 해보세.

자네는 세상의 온갖 지혜가 다 어디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나?"
"인간의 생각입니다."
"인간의 생각?

물론 그렇겠지만 그 이전에 있어야 할 것이 무언가 보세.

시 한 수를 읊는 데도 영감이라는 게 필요하네.

하나의 태극에서 만물이 나왔다면

바로 그 만물에 하나를 나타내는 상이 있을 걸세.

그걸 물상(物象)이라고 하지.

물상은 곧 하늘의 말씀일세.

하늘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지."
"천문, 지리 같은 것입니까?"
"그렇다네.

태호 복희씨가 있었네.

 

https://ko.wikipedia.org/wiki/%EB%B3%B5%ED%9D%AC

 

복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태호 복희씨(太皞伏羲氏) 또는 포희씨(庖犧氏)는 중국 삼황 중 하나이다. 전설에서 복희는 인류에게 닥친 대홍수 시절에 표주박 속에 들어가 있던 덕분에 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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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오천 년 전이었지.

세상의 이치를 알려고 집을 나섰네.

나무가 자라고 풀이 자라고 구름이 흘러다니는 들판으로 나갔지.

그는 물상을 두루 살피면서

그 속에 숨겨 있는 하늘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했지.

그러다가 황하까지 가게 되었다네.
황하에서 흐르는 물을 보던 중

우연히 용마(龍馬) 한 마리를 보았다네.

용마인지 뱀인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네만 머리와 꼬리를 사리고 있는 모양을 보고는
그 유명한 하도(河圖)를 발명했다네."

 

http://sisa-news.com/news/article.html?no=115755

 

[풍수인문학] '하도'와 '낙서'의 원리를 알아야 풍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시사뉴스 정승안 교수] 복희(伏羲)황제는 용마에서 ‘하도(河圖)’를, 주문왕(周文王)은 신령스런 거북에게서 ‘낙서(洛書)’를, 공자(孔子)는 역 ‘계사전(繫辭傳)’을... 세 분의 성인이 지은 �

www.sisa-news.com


"그러고 보니 하도는 짐승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물상에서 천기를 읽어낸 거지.
자, 하도를 보세."

 

"보게. 이걸 보고 있으면 뱀이나 도마뱀이 연상되지 않는가?

복희는 여기에서 태극을 발명해내었다네."
"하도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하도는 오행의 상생(相生) 원리를 밝혀낸 것이네.
우주가 창조되는 과정이 이 그림 속에 그려져 있지.
이 그림에서 수(數)도 생겨나고 음양이 나오고 오행이 나온다네.

천수(天數)는 1, 3, 5, 7, 9로 나가서 양(陽)을 이루고,

지수(地數)는 2, 4, 6, 8, 10으로 나가서 음(陰)을 이룬다네.

천수와 지수가 변화해가는 모양이 곧 태극이네.

이걸 보게."
"천수 1, 3, 5, 7, 9를 합하면 25인데

여기에서 그 본체인 1을 빼면 24가 된다네.

이것이 태양의 24가지 기운이니 무엇인가?"
"24절기입니다."
"그렇지.

지수 2, 4, 6, 8, 10의 합은 30으로
태음인 달의 날수인 30일이 되었다네.

그 천수와 지수를 합한 하도의 수는

모두 55가 되는데 이것을 선천수(先天數)라고 하네."
"오행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도를 이루는 힘의 원천인 5와 5의 다른 모습인
10을 토(土)라고 한다네.

이 토가 처음 생(生)한 것이 천수로는 1이요,

장(長)한 것이 3이요,

성(成)한 것이 5요,

멸(滅)한 것이 7이네.

그리고 이 토가 처음 생한 지수로는 2요,

장한 것이 4요,

성한 것이 6이요,

멸한 것이 8이라네.

천수의 생 1은 지수의 성 6과 짝이 되어 수(水)가 되고,

천수의 장 3은 지수의 멸 8과 짝이 되어 목(木)을 이루고,

천수의 성 7은 지수의 생 2와 화(火)이루고,

천수의 멸 9는 지수의 장 4와 금(金)이룬다네."
"그래서 복희는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의
상생의 이치를 알아내어 태극을 발명해내었던 것이군요."

 

"그러나 세상은 창조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지.
창조되었으면 파멸의 원리도 있을 것이 아닌가.
복희로부터 천 년이 지나 순임금에게서 왕위를 이어받은

하(夏)의 우(禹) 임금이 낙수(洛水)라는 강에 갔네.

낙수에 간 사람이 우가 처음인 것은 아니었지만

우만이 필요한 물상(物象)을 볼 수 있었네."
"거북이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네.

거북이 등을 본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우 임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낙서(洛書)가 발명된 것이네.

이 그림을 보게."
북창은 책에 그려진 그림을 손으로 짚었다.
"하도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지가 돌아가는
창조의 원리인데 반하여 낙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파괴의 원리를 보이고 있네."
"상극의 원리는 어떻게 보입니까?"
"토극수(土克水)하여 1이 되고,

수극화(水克火)하여 7이 되고,

화극금(火克金)하여 9가 되고,
금극목(金克木)하여 3이 되고,

목극토(木克土)하여 5가 되는 것이네.

이렇게 양수가 나오고

사이사이에 6, 2, 4, 8의 수가 끼어 있는 것이지."
"그런데 수의 이치가 하도와는 많이 다르군요."
"그렇다네. 이걸 보게.

이게 '마방진'이라는 건데
기묘하지 않은가?"
북창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가로, 세로 어디에서 더해도 합은 15가 나오는데
이걸 마방진이라고 한다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B0%A9%EC%A7%84

 

마방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방진(魔方陣)은 n2개의 수를 가로, 세로, 대각선 방향의 수를 더하면 모두 같은 값이 나오도록 n × n 행렬에 배열한 것이다. 마법진(魔法陣), 낙서(洛書)라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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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수는 천도 변화 24절기의 한 마디인 15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행이 세 번 생(生), 장(長), 성(成)하는 이치이지.

낙서의 수는 모두 45인데,

일년 360일이라는,

태양이 그리는 원의 8분지 1로 8괘 중 한 괘에 해당한 수라네.
하도수 55와 낙서수 45를 합하면 100이 되는데

하도는 체(體)요, 낙서는 용(用)이라네."
"북창 선생님,

하도에서 태극과 오행의 상생이 나왔고,

낙서에서 오행의 상극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오행 하나하나의 뜻을 풀어주십시오."
북창은 이어서 오행론(五行論)으로 이야기를 옮겼다.
"나는 오행을 하늘에서 땅으로 날아드는 빛에서 찾았다네.

햇빛이 해가 뜨면 날아드는 것이라지만
사람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똑같은 햇빛을 받고서도

열매가 저마다 모양도 다르고,

맛도 빛깔도 다를 수 있겠는가.
소리도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게 있고,

들을 수 없는 게 있다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치인가."
"개나 박쥐가 사람은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데 벌써 알아듣고

마구 짖어대거나 깜깜한 동굴을 잘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함이 북창의 이야기를 긍정하듯 말을 받아주었다.
"햇빛이 비쳐야만 사물의 빛깔이 드러나고,

햇빛이 사라지면 빛깔도 사라지니

정녕 햇빛 속에 이런 색깔들이 숨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일세.

하기사 기(氣)를 본 사람이 누가 있으며,

바람을 본 사람이 누가 있는가.

목기(木氣)는 새봄에 만물이 처음 일어서는 생(生)의 기운이고,

화기(火氣)는 한여름에 무럭무럭 자라는 장(長)의 기운이네.

금기(金氣)는 가을날에 토실토실 결실을 하는 염(斂)의 기운이고,
수기(水氣)는 겨울의 휴식으로 드는 장(藏)의 기운이네.

목화(木火)와 금수(金水)를 잇는 것이 바로 토기(土氣)이니

이 토기가 참으로 묘한 것이라네.
목화가 양이고,

금수가 음인데

토는 바로 그 중간의 기운을 띠고서

오행의 전체 운기(運氣)를 조절한다네."
"사람에게도 오행이 나타납니까?"
"그렇다네.

성씨별로 나뉘는 것이 있는데 이걸 보게나.

여기에 내가 적어놓은 것이 있네."
북창이 적어놓은 책에는 성씨가 오행으로 잘 분류되어 있었다.

지함은 그것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금성(金姓):

서(徐), 황(黃), 한(韓), 성(成),
남(南), 유(柳), 신(申), 안(安), 곽(郭), 노(盧),
배(裵), 문(文), 왕(王), 원(元), 양(梁), 방(方),
두(杜), 하(河), 백(白), 양(楊), 편(片), 경(慶),
장(張), 진(晋), 소(邵), 반(班), 음(陰), 장(蔣)


목성(木性):

 

김(金), 박(朴), 조(趙), 최(崔), 유(兪),
홍(洪), 조(曺), 유(劉), 고(高), 공(孔), 차(車),
강(康), 염(廉), 주(朱), 육(陸), 동(董), 노(虜),
주(周), 연(延), 추(秋), 고(固), 정(鼎), 간(簡),화(火)


수성(水性):

 

오(吳), 여(呂), 우(禹), 기(奇),
허(許), 소(蘇), 마(馬), 노(魯), 야(也), 여(余),
천(千), 맹(孟), 변(卞), 상(尙), 어(魚), 경(庚),
용(龍), 모(牟), 모(毛), 남궁(南宮), 황보(皇甫),
선우(鮮于), 동방(東方), 고(皐), 매(梅)


화성(火性):

 

이(李), 윤(尹), 정(鄭), 강(姜),
채(蔡), 나(羅), 신(愼), 정(丁), 전(全), 변(邊),
지(池), 석(石), 진(陳), 길(吉), 옥(玉), 탁(卓),
등(鄧), 설(薛), 함(咸), 구(具), 진(秦), 당(唐),
선(宣), 단(段)

 

토성(土性):

 

송(宋), 권(權), 민(閔),
임(任), 임(林), 엄(嚴), 손(孫), 피(皮), 구(丘),
도(都), 전(田), 심(沈), 봉(奉), 명(明), 감(甘),
현(玄), 목(睦), 구(仇), 동(童), 공(貢), 도(陶),
우(牛), 염(廉)

 

"오행을 나타내는 것을 여러 가지로 나누어 보겠네.
우선 별로 나누면

목은 목성, 화는 화성, 토는 토성, 금은 금성, 수는 수성일세.
짐승으로 보면

목은 청룡(靑龍), 화는 주작(朱雀),토는 구진(龜辰), 금은 백호(白虎), 수는 현무(玄武)라네.
또 맛으로 나누면

신맛은 목, 쓴맛은 화, 단맛은 토, 매운맛은 금, 짠맛은 수라고 하네.
사람 몸 속의 오장으로 보면

간이 목이고, 심장이 화고, 비장이 토, 폐가 금, 콩팥이 수라네.
계절로 치면

봄은 목이고, 여름은 화고, 가을은 금이고, 겨울은 수라네.

토는 계절을 계속 돌게 하는 힘이니 여기서는 빠지네.
방위로 보면

동쪽이 목이고, 남쪽이 화, 중앙이 토, 서쪽이 금, 북쪽이 수가 되네.
색깔로 보면

파랑이 목, 빨강이 화, 노랑이 토, 하양이 금, 검정이 수라네.
소리로 치면

각이 목, 치가 화, 궁이 토, 상이 금, 우가 수에 해당되네.
사람의 감정도 오행으로 나눌 수 있으니 보게.
기쁨이 목이고, 쾌락은 화, 욕망은 토, 성냄은 금, 슬픔은 수라네."
북창의 열강에 지함은 계속 귀를 기울였다.
"오행이란, 동물에서도 나누어볼 수가 있다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제각기 품고 있는
성정(性精)이 다르니 한번 들어보게.
목기(木氣) 중에서도 양성(陽性)을 띠는 것에는 능잉어, 뱀, 용이 있다네.

잉어, 방어, 송사리, 미꾸라지는 음성(陰性)을 띠고 있다네.

화기(火氣) 쪽으로 보면 양성으로는 기러기, 닭, 봉황, 학이 있고
음성으로는 매, 새매, 제비, 참새, 부엉이, 하루살이 벌레 들이 있네.

그리고 토성(土性)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면 두꺼비, 누에, 사람이 양성이고,

거미, 지렁이, 뱀장어 같은 것은 음성이네.

금기(金氣)를 보면 양성에는 사슴, 말, 기린이 있고,

음성에는 호랑이, 소, 돼지, 송충이같이 털이 많은 벌레가 있다네.

그리고 수기(水氣)를 띤 것으로는 참게, 바닷게, 거북이가 양성을 띠고,

새우, 조개, 굴이 음성을 띠네.
이런 내용은 자부선인(紫府仙人)이
<금쇄경(金鎖經)>이라는 책에서 주장한 것이네만
앞으로 자네가 계속 분류를 해나가 보게나."
"색깔을 보면 그 물이 가지고 있는 오행의 성질을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면 사람의 병에 맞는 약초를 고르는 것도

색소를 보면 일차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고,

미심쩍으면 맛을 보면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다 같은 햇빛을 받아 이루어진 물이 저마다 다를 때에는

다른 이치가 있는 것이라네.

자네가 후일 이런 것을 파악해 보게나.

아까 사람을 성씨로 나눈 것 같은 것은 내가 아직 시험해보지 못한 것이니

자네가 점검해 보이.

다만 조선의 사과가

중국의 사과와 같지 않고

또 왜의 사과와 같지 않으니,

그런 이치를 염두에 두고 사물의 성정을 분류해 보게.

천지 자연의 작용이란 이렇게 끝이 없네."
"북창 선생님.

변화의 작용이라는 것이 참으로 오묘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땅에서 나타납니까?"
"그렇지는 않네.

변화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천(天)과 지(地)의 작용이네.

반드시 햇빛 같은
천(天)만으로, 땅같은 지(地)만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네.

천기의 작용은 상(象)을 나타내고

지기의 작용은 형(形)을 나타낸다네.

그러므로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다는 뜻은 아니네.

하늘이라는 것은 허공일 따름일세.

그러므로 일월과 목화토금수
다섯 별이 우리는 하늘에 있다고 하는데

사실은 허공 중에 떠 있는 것이네.

오행이 땅에서 작용하여 나타나는 것은

오행으로 나뉘는 만물을 지상에서 다 볼 수 있기 때문일세.

그러나 허공이라는 것은 다만 하늘에 응하는 정기인

해와 달과 목화토금수 다섯 별을 달아놓은 것이요,

지라는 것은 생성하는 형질을 만들고 있는 것뿐이네."
"그렇다면 땅이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땅이 아래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땅은 어디에 의지하고 있습니까?"
"허공이 들고 있네.

그렇기 때문에 춥고 덥고 바람 불고 마르고 습함(寒暑風燥濕)이

서로 갈아들이면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네.

이러한 이야기는 이미 황제(皇帝)와 기백(岐佰)이

수천 년 전에 나눈 문답에서 나오는 이야길세."
"오행은 이제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만물을 온통 오행으로만 보아야 합니까?"
"이 오행도 따지고 보면 음양의 기운이 살짝 변화한 것이니

아직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닐세.

10간12지를 나아가야 더 분명한 모습이 나타나지.

 

이제 간지론(干支論)으로 옮겨보세."

북창은 온 정성을 다 해 지함을 가르쳤다.
"간(干)이란 하늘의 기운을 나타내는 것인데 모두 열 가지라네.

지(支)란 땅의 기운을 나타내는 것인데 모두 열두 가지라네.

이것은 모두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운기(運氣)에 따라 벌어진 것이니,
그 기가 하늘로 뻗쳐올라간 것이 10간이요,

땅으로 가라앉은 것이 12지라네.

그래서 햇수는 10으로 세어나가고,

달 수는 12로 세어나가는 것이라네.
10간12지의 간지론에 이르면

이른바 모든 사물의 명운(命運)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니

사람의 사주팔자(四柱八字)도

여기 간지론(干支論)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게 되는 것이라네. "
"간과 지가 서로 씨줄과 날줄로 오가면서 세상을 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그러니까 간을 알고 지를 알면 그 이치를 꿰뚫어낼 수 있는 것이네."
"음양 오행이 간지에 이르면

눈 밝은 사람에게는 보이기 시작하겠군요."
"그렇다네.

여기에서부터 철리(哲理)가 드러나기 시작한다네."
"간과 지를 나누어 말씀해 주십시오."
간은 천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북창은 관상감 천문학 교수였다.
"천문을 알지 않고는 도인이라고 할 수 없네.
하늘의 움직임을 살핀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살피는 것이지.

국가 대사에서 인간의 길흉화복에 이르기까지 다 하늘의 글로 적혀 있다네.

천문(天文)은 하늘의 글일세.

하늘의 글, 하늘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들어야 지혜를 세울 수 있으니

하늘을 알지 못하고 세우는 지혜는 올바른 지혜라고 볼 수가 없네."
"간(干)을 이르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간만 따로 떼어서 밝히는 학문이 천문이라네.

하늘의 뜻을 헤아리자는 학문이네."
"그렇다면 지는 무엇입니까?"
간이 천문이라면

지는 지리에 속하는 것이었다.
북창은 각종 지리서를 펴보이며 말했다.
"천하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찮은 미물도

다 저 살 땅에서만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네.

어떤 고을에 가면 감나무를 아무리 심어도 잘 자라지 못하고,

설사 자랐다 해도 열매가 맺지 않고,

또 어떤 고을에서는  배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네.
또 어떤 고을의 하천에서는 잉어가 잘 자라는데
어떤 고을의 연못에는 아무리 잉어새끼를 갖다 넣어도 자꾸 죽는다네.

이렇게 작물이며 물고기도 다 제 자리가 있는 법인데

사람이 사는 곳에 그런 이치가 없을 리 없지 않은가.
이런 이치로 하여 섭생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병을 다스릴 수 있으니 이치가 무언가.

사람의 몸 속에도 음양 오행이 제 각각 들어 있고,

먹는 음식도 제 각각 음양오행이 다 다르니

어떤 것은 이롭게 작용하고,

어떤 것은 해롭게 작용하여

질병도 일으키고

기운을 돕기도 하는 것이라네.
아이를 갖고서 당나귀와 말고기를 먹으면

달이 지나 아이가 태어나고 난산하기 쉽다네.
개고기를 먹으면 아이가 말을 못한다네.
토끼고기를 먹으면 언챙이를 낳는다네.
비늘없는 고기를 먹으면 난산한다네.
게를 먹으면 아이가 죽게 된다네.
양고기를 먹으면

아이가 평생 액운을 벗어나지 못한다네.
닭고기와 달걀에 찹쌀을 섞어 먹으면

아이에게 기생충이 생긴다네.
오리고기와 달걀을 함께 먹으면

아이를 거꾸로 낳고 심장이 차가워진다네.
참새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

아이가 자라 음탕하고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네.
자라고기를 먹으면

아이의 목이 자라처럼 짧아진다네.
생강 싹을 먹으면 아이의 손가락이 많아진다네.
율무를 먹으면 낙태할 위험이 있다네.
마늘을 먹으면 태기가 소멸한다네.
산양고기를 먹으면

아이가 병치레를 많이 한다네.
버섯을 먹으면

아이가 경풍이 많고 요절하기 쉽다네."
"지(支) 열두 가지를 헤아리면 그렇게까지 나오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천문과 지리, 간과 지를 말했으니
그것이 두루 나타난 것이 생명이란 사실도 미루어 짐작하겠지?

나무고 풀이고 저마다 성정(性情)이 다르고

빛깔이 다른 것은 바로 두 가지가 날과 씨로 오가며 빚은 결과일세."
"이제 음양 오행과 간지를 밝혔으니 사람에 미치는
세세한 영향을 간파하는 눈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네, 욕심이 벌써 뻗치는군.

무슨 말인지 알겠네."
북창은 운명론을 말하였다.
"운명론(運命論)을 말함세.

운명론이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장차 어떻게 변화할지 운기(運氣) 방향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이미 지나온 길을 더듬어갈 수도 있는 것이라네.
운명론이야말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천기(天機)에 해당되는 부분이니

여기서부터는 참으로 한마디 한마디가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되고 만다네.
운명이란,

자기의 명을 나르는 것이니

바로 기(氣)가 경락(經絡)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네.
만일 세 갈래 경락이 있는데

두 군데는 이미 막혀 있고,

한 군데만 뚫려 있다면 그 기는 뚫려 있는 곳으로 갈 것이네.
허나 사람은 막힌 것도 뚫을 줄 알고,

할 수 없는 것도 해내고 마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곧잘 맞아떨어지질 않는다네.

아무리 타고난 운명이 파란 만장한 사람이라도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에 몸을 담아 수련에만 힘 쓰다보면

어느새 그런 운명의 힘이 없어지고 만다네.

왜 그런가 하면,

기라는 것은 주변에 있는 사물과 부딪치면서

일어서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는 법,

처자도 없고, 부모도 없고, 세속 인연도 다 버려 이런 저런 욕망을 다 떨쳐버렸으니
아무리 기가 막힌들 나아갈 길은 한 군데밖에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산중에서는 그토록 고고하고 덕 높던 선사도
산에서 내려와 세속에 묻히면 금세 운명의 파도에 휘말려들기 시작한다네.
운명의 기운을 크게 쓸 것인가,

작게 쓸 것인가는 당사자가 판단할 일이요,

역학자가 거들어서는 안 되네.
흔히 힘없고 배움이 짧은 백성들의 사주를 살펴보면
사주 그대로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네.

자기 감정대로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백성들에게는 운명의 묘리가

한 치 오차도 없이 척척 맞아들어간다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운명 감정을 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지

자학하는지 알면

그만큼 감정하기가 쉬워진다는 것일세.

그러니 어떤 사람의 명운을 감정하기에 앞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아는 게 퍽 중요하다네."
"명심하겠습니다."
지함은 북창이 퍼붓다시피하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느라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어떤 때에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북창이 주는 책을 읽기만 한 적도 있었다.
날이 갈수록 지함의 공부는 깊어만 갔다.

북창 정염,

그는 쉬지 않고 지함을 가르쳤다.
관상감 교수답게 그는 순서를 잃지 않고 차근차근 가르쳐 나갔다.
그러기를 여러 달,

지함이 대강 도장(道藏)을 읽어낼 무렵이었다.
열기를 뿜어내던 여름해가 산너머로 숨어든 이른 저녁,

북창이 갑자기 떠날 채비를 했다.
"나는 내일 떠나려네."
"아니, 어디로?"
북창이 방에 들어서는 줄도 모르고
<황제내경(皇帝內經)>을 정신없이 읽고 있던 지함은
북창의 뜻밖의 말에 책을 놓았다.
"글쎄나.

금강산으로 들어가볼까 생각중일세.

정휴 행자처럼 금강산 정기나 받으면서 수도를 해볼 생각이네.

기왕 도를 구할 바에야 더 처절하게 싸워서 얻어야 하지 않겠나."
지함은 북창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직 제 공부가 짧습니다.

지금 가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머물러 주십시오."
북창과 만난 지도 벌써 여섯 달이 넘었지만 도가의 공부는 너무도 깊고 깊어서

이제 지함은 겨우 <옥추경(玉椎經)>까지만 읽었을 뿐이었다.
"아닐세. 자네는 이미 모든 것을 다 배운 것이나 다름 없네.

도란 누가 알려주는 것이 아닐세.

스스로 지극한 정성을 모아 자신을 들여다볼 때 얻어지는 것이지.

이제 자네 혼자 할 일이 남았을 뿐일세.
도에 이르지 못하기는 자네나 나나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한 이야기는 이미 책에 다 나와 있고,
선인들이 이미 이르렀던 길일세."
북창의 말이 옳기는 했다.

북창이 하는 말은 이미 그가 준 책 속에 다 들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지

지함으로서는 막막하기만 했다.
웬일인지 북창의 얼굴은 어두웠다.
봉선사에 온 이후로 늘 솔잎, 생콩, 생쌀 등
선식(仙食)을 하고 단전호흡을 한 북창의 얼굴은
갓난아이처럼 투명해졌는데

오늘은 눈이 퍼붓기 직전의 하늘처럼 잔뜩 흐려 있었다.
"자네와 나의 연도 매듭을 지을 때가 왔나보네.
언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걸세.

그때는 아무래도 내가 자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일세."
"무슨 말씀을...

그나저나 떠나시고 나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답답할 때는 누구를 찾습니까?

어디 계실 것인지 말씀이라도 해주시면

정 답답하거든 찾아나서기라도 하지요."
"책은 다 두고 떠날 테니 그 공부를 마치고 나거든 송도로 가보게나.

그곳에 화담 서경덕 선생이 계시네."
"화담 선생이요?

그분은 이미 돌아가시지 않았나요?"
지함도 화담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함이 과거 공부에 한창일 때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하하하.

화담 선생께서 일부러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내신 거라네.

화담 산방이 유명해지니까 한양의 선비들이 워낙 많이 찾아들어서.

그들이 추구하는 게 뭐겠나?

과거 급제 아니겠나?

화담 선생은 산방이

과거 시험공부 장소로 바뀌는 게 안타까워서 그런 소문을 내신 거라네.

그러고 나니까
화담 산방에는 한양 선비들의 발길이 뚝 끊겼지.
알음알이로 찾아오는 사람 외엔 없다네.
그분은 나 같은 천학으로는 감히 잴 수도 없을 만큼
가르침이 높은 분이니 큰 도움이 될 걸세.

나는 자네를 채우려 했다면

그 분은 비우려 하실 걸세."
서경덕. 율곡이 말하던 바로 그 화담 서경덕이었다.
지함이 한양에 있는 형 지번의 집에 다니러 갔을 때
마침 가회동에서 이웃해 살고 있던 율곡을 만나

명세 다음 가는 말동무로 사귀었었다.

그때는 율곡이 아홉 살 나던 해였는데

이웃간에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여 지함도 자주 그 아이를 보러 다녔다.

그런데 마침 의정부의 좌찬성으로 일하던 그의 부친 이원수가
이조에 출입하던 형 지번과 서로 이웃하여 내왕이 잦았다.
지함이 서경덕의 이름을 들은 것도 바로 율곡의 집에서였다.
마침 지함은 율곡과 산해의 학문을 시험하며 놀고 있었다.
"율곡아, 너 천자문을 한숨에 다 왼다며?"
"그럼요. 들어보세요.

천지현황(天地玄黃)."
"벌써 끝인고?"
지함이 율곡에게 묻자 옆에 있던 산해가 나섰다.
"천지현황 넉 자 속에 천자문의 이치가 다 들어 있는데

구태여 천자를 다 읽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지함은 율곡과 산해 두 아이의 재치에 깜짝 놀랐다.
그때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퇴청했다.
이원수는 허엽(許曄)이라는 젊은 선비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 자리에서 이원수는

지함과 율곡, 산해를 허엽에게 소개시켰다.

허엽은 지함과 동년배로,

바로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을 한 선비였던 것이다.
화담산방은

조선 최초의 서원(書院)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세워지기 훨씬 전에 있었으므로,

그때까지도 명문 수학 기관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원수도 이따금 아들의 공부를 살필 겸 해서 허엽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화담산방 출신의 귀재이니 자네가 내 아들을 가르쳐주게.

이 아이가 비범한 구석이 많다네."
"나이가 더 차면 화담산방에 보내서 서경덕 노사(老師)의 지도를 직접 받으면 좋으련만..."
그때 지함이 얼핏 들었던 그 이름,

서경덕을 북창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담산방에 들어가려면 실력도 높아야지만

화담 선생의 문답을 통과해야만 한다네.

그러나 일단 그분 문하에만 들어가면 여기서 내게 배운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네.

그분의 가르침으로 말하자면 바다와 같다고나 할까,

비루한 시정의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데도

그곳 출신들은 거의 다 영달을 하고 있으니 이상도 하지 않나.
자네가 기왕에 도학에 입문했으니

그 끝을 볼 욕심도 있을 터인즉 반드시 그분을 만나야 할 걸세.
나도 나이만 이렇게 들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네."
그러나 그렇게 말은 차분히 해나가면서도 북창의 얼굴은 어두웠다.
무슨 일일까?
왜 갑자기 절을 떠나겠다는 것인가.

그동안 학인들의 심한 냉대와 모함에도 꿋꿋이 버티어온 북창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북창이 자기 자신의 공부를 위해서

그런 수모를 끝까지 견디며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봉선사에서 한 일이란 지함을 가르치는 일뿐이었다.
"얼굴빛이 좋지 않으십니다."
북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이 오늘밤을 넘기지 못하실 것 같으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동안 북창의 책을 빌려 읽으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을 읽어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귀절을 읽긴 했지만
북창의 말은 놀라웠다.
"핏줄의 육감이라고 해두세."
북창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북창은 천문, 역서, 지리 등 가지고 있던 책을 모두 빌려주고 가르침을 주면서도

사람의 운명을 읽어내거나 미래를 점치는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지함이 비술 쪽으로 빠지는 것을 막고 도를,
진리를 깨우치는 학문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베풀어주는 배려라고 지함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북창 자신은 도의 비술까지 익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지함으로서는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어쨌든 지함의 생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정순붕,

그가 죽는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런데도 지함은 이제 그런 느낌마저 생기지 않았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하늘은 살아 있는 것이다.

이튿날이었다.
첫닭도 울기 전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북창의 방으로 누군가 들어갔다.

북창의 말이 옳았던 것일까.
지함은 어둠 속에서 옆방을 향해 귀를 바짝 세웠다.
잠시 후 지함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관을 차려 입은 북창이었다.

파발이 올 것을 미리 내다보고 의관을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몇 시간 전에 운명하셨다네.

왜 언젠가 우리가 사주를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게 현실로 다가온 것일세.

그럼, 나는 금강산으로 가네.

한양에 다시 가거들 랑 이 정염은 죽었노라고 말해주게.

세인들이 영원히 나를 잊어버리도록...

아버지 장례는 알아서 치르라고 아우들에게 일러두었네.

내가 그 불쌍한 아비의 영혼을 위해 기도 좀 해주어야겠네."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겠지."
언제 만날지 모르는 북창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지함은 넋을 잃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정순붕, 그는 지함의 스승마저 데려가버린 것이다.
문득 비바람이 몰아치는 홍성현의 바다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세상을 뒤흔들며 다가오던 집채만한 파도...
그 성난 파도가 자기에게 덮쳐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함은 눈을 꽉 감았다.
한 인간의 삶이 어찌 이리도 곡절이 많단 말인가.
이것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어떤 때에는 도반(道伴)처럼,

또 어떤 때에는 스승처럼 여기고 지내오던 북창이 봉선사를 떠났다.
정휴도 금강산으로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지함 혼자였다.
서서히 햇살이 비껴드는 승방에 지함 홀로 앉아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지함 혼자였다.

몸살에 걸린 듯 몸이 떨려오며 진한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문득 북창의 말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도란 누가 가르침을 준다고 얻어지는 게 아닐세.
스스로 정성을 지극히 모아 정진할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
지함은 모든 상념을 털어버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마침 글읽기 좋을 만한 햇살이 창호지에 배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잠시를 놓치지 않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지함이 방문을 열자 벌써 북창이 떠난 걸 안 학인들이 대여섯 명 서 있었다.

북창이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심하게 굴지 못했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눈빛이 달랐다.
"이제 떠나시오.

그런 놈을 감싼 사람하고는 같이 있을 수 없소."
학인들은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으나,

재촉하는 눈길로 묵묵히 버티고 서 있었다.
"알았소. 곧 떠나리다."
지함은 문을 닫았다.
이제는 봉선사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학인들이 아니어도 떠나는 게 옳았다.
누가 있는 것인가?

왜 나를 끝없이 몰아가는가?
하늘은 왜 한시도 나를 가만두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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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이의 죽음-소설^토정비결(上-9)

세월은 그야말로 흐르는 물이었다. 어느새 봄이었다. 몇 년 만에 오는 가회동은 개나리와 진달래 꽃더미에 파묻혀 혹 무릉도원이 아닌지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볼 정도였다. 형 지번은 청풍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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