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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원수의 아들을 스승 삼다 - 소설^토정비결(上-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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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도인이 남긴 용호비결(북창)

양주 불곡산 <용호비결>을 지은 북창선생 묘소 기인 정북창 조선시대 도가(道家) 내단(內丹)사상, 즉 단학(丹學)의 비조(鼻祖)이며,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함께 조선 3대 기인으로 불리는

blog.daum.net

"그만 떠나세."
지함이 나와 있었다.
지함은 이미 의관을 깨끗이 차려 입고 있었다.
기방을 아주 떠날 결심인 모양이었다.

정휴는 간밤의 일을 모두 털어버리듯

몸을 후루룩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함을 따라나섰다.
흰 눈이 소복히 쌓인 마당 한가운데로

가지런한 발자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얀 눈밭이 어둠을 희끄무레 밝히고 있을 뿐

아직 여명도 없는 깜깜한 새벽이었다.
두 사람은 어둠에 휩싸인 골목을 빠져나갔다.
긴 골목 끝에서 지함은 무슨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 멈추어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선화가 대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떠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화도 이것이 마지막임을 예감한 것일까?

지함은 손 한번 들어보이지 않고 뒤돌아섰다.
그러나,

등뒤에 머무는 따스하고 애절한 눈길을

정휴는 오래도록 느낄 수 있었다.
지함은 목적지도 말하지 않았다.
사뭇 걷기만 하던 지함이 수많은 발자국으로

흰 눈을 밟아온 다음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디로 갈 텐가?"
"금강산으로 갈까 합니다."
"거기는 왜?"
"계룡산 명초 스님이 일러주었습니다.

그곳에 제 스승으로 삼을 선사가 있다고 하면서 찾아가 보라 하셨습니다."
정휴는 명초가, 네 마음은 한양에 가 있구나 하면서 지함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듯 하더란 말은 하지 않았다.

산사에서도 지함에게만 향하던 자신의 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였다.

멀리서 한없이 그리워했던 지함인데도 그 앞에 서서는

그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싶지가 않았다.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했고,
그럴수록 자신이 더 초라해지게 될까봐 저어하는 마음도 있었다.
"광릉에 들렀다 가지 않겠나?"
"광릉에는 무슨 일로요?"
"마땅히 갈 곳도 없으니 그곳에서 세월이나 보낼까 하네.

지번 형님이 홍성으로 떠나시면서,

그곳에 가 머리나 식히라고 책과 짐을 미리 보내놓으셨다네.
자네도 이왕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렀다 가도 괜찮지 않겠는가?"
굳이 지함과 길을 함께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휴는 선뜻 지함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했다.

지함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하려면

자신이 함께 있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좋은 핑계거리가 생각났다.

지함은 정휴가 찾아간 다음날로

오랜 기방 생활을 끝내고 떠나오지 않았는가.

이렇게 자위하면서도 정휴는 지함을 기방에서 꺼낸 것이

과연 자신의 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함은 광릉으로 떠나기 전에 남산골 집을 먼저 들렀다.
집안에 있던 여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후덕한 얼굴 때문인지 처음 보았는데도

자주 대했던 사람마냥 친숙감이 드는 여인네였다.
"내, 양주로 떠날 것이니 그리 아시오."
그뿐이었다.

지함은 대문 안에 들어서지도 않고 곧바로 돌아섰다.
"형님, 저 부인은 누구시지요?"
분명 민이는 아니었다.
"내가 혼인을 했다네. 

형님이 낙향하시기 떠나기 전에

내 마음을 잡아보시겠다고 억지 혼사를 치러주셨네마는,

한 달도 같이 살지 못하고 기방으로 도망갔지.

저 사람이 싫어서는 아니네.

내 마음을 잡아줄 끈이 이미 끊어졌으니 어디에고 붙일 수가 있어야지..."
"굳이 기방을 찾을 건 무엇입니까?"
"그 사람에게 죄스러워서... 그 다음은 묻지 말게."
한참 말없이 길을 가던 지함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한번 말을 꺼내자 지함은 그동안 쌓고 쌓아 몇 겹을 억누른 말,

아니 피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권력을 놓고,

왕 자리를 놓고 궁궐에서는 끊임없이 음모가 펼쳐지고 있네.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논쟁에 휘말려

귀양을 떠나고 사약을 마시지.

그것이 다 무엇 때문인가?

무엇을 위해서인가?
공자를 읽으면서,

맹자를 읽으면서

나는 세상을 알았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그 속에 세상을 다스리는 법은 있지만,

왜 그렇게 다스려야 하는지는 쓰여 있지 않았네.
기방에 머물면서

나는 옛어른들의 위선과 아집을 깨달았지.

공자는

여인네를 소인배라 하며 가까이 하지 못할 미물로 취급했지.

그러나 그렇지 않았네.
남자건 여자건 그 소인배의 배를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고

밤이면 그 소인배와 더불어 쾌락을 탐하지 않는가.

선비들은 밤이면 여인네와 더불어 쾌락을 즐기고 그에 겨워 신음하면서도,

낮이면 버젓이 의관을 차려 입고 앉아 여인네와는 맞대면도 하지 않네.

이런 것은 거짓일세.

위선이야.

결코 진실이 아닐세.
자네를 보게.

자네도 한때는 하찮다는 종이었지만
나와 똑같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인간이 아닌가?
여자도 마찬가지야.

여자도 인간이야.

음,양이 다르다
뿐이지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란 말일세.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은 그야말로 허상에 불과했네.

나는 이 세상에 숨어 있는 진실을 알고 싶네.

명세도 세상의 반쪽만을 본 것이야."
"왜 안 선비가 반쪽만 보았다는 것입니까?"
정휴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왕조의 정통성,

그에 대한 지조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닐세.

남자만이 인간인 줄 알고 사는 양반들처럼,

안명세는 정의만 본 것일세.

정의, 정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불의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빛나는 것일세.

이 세상에는 악의 역할도 있는 것이라네.

선이 양이라면 악은 음이라네."
"그래서 음의 소굴인 기방에 가셨습니까?"
"허허허,

이야기가 또 그쪽으로 또 흘러가는가?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건 아닐세.

이제 보니 그렇다는 것일세.

다만, 이런 말은 자신있게 할 수 있네.

선화 그 기녀도 자신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명세, 그 친구는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닐세.

그의 세상까지 죽인 것이네.

그가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진실,

그것을 펴지도 못하고 그의 세상은 그와 함께 목이 잘려나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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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내 세상이고,

 

옥중화 5회-1

에브리온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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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정휴 자네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네의 세상이고... "
"제게 기생을 넣어준 것도 그 이치에서 입니까?"
"내가 기생을 자네 방에 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네가 하기 나름,

나는 그 이상은 관여치 않겠네."

"제가 여색(女色)에서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체를 넣어주신 것입니까?"
"왜 여색뿐이겠는가.

자네가 모든 미망에서 떠났으면 싶지.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같은 것이라는 데에서도..."

이 세상 모든 것에 다 불성이 있다는 말에서도 떠나란 말인가.

지함은 기방에서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절망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참담한 기분이었다.
정휴는 오늘 아침,

지함이 들여주었다는 그 기생을 취하고 나서 내내 참선을 했다.

그리하여 여색을 끊을 힘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지함은

이미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정휴로서는 까마득하게 먼 곳,
손을 내밀어도 잡히지 않는 먼 곳으로 먼저 달려가버린 것이다.
똑같이 겪은 여자 문제에 대한 해답이 이렇게 다를 수가...
정휴에게 여자는 무엇이었던가.

여자는 욕망이며 집착이며 쾌락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함은 여자를 통해

이 세상의 위선을 읽고 있었다.
정휴나 지함이나 글 읽은 것으로 따지자면야 거기서 거기일 터였다.

지함은 제대로 배웠고

정휴는 어깨너머로 배웠다는 것이 다를 뿐.

그리고 지함에게는 자신의 희망에 따라 얼마든지 열리는 세상이 있었고,

정휴에게는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세상문이 굳게 닫혀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정휴는 그 닫힌 세상에서나마 진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데 반해,

지함은 열린 세상에 숨어 있는 진실을 찾아 절망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부정을 해보아도 지함이 찾은 이 세상의 위선이

진실임을 정휴는 부인할 수 없었다.

지함이 진실을 발견하는 동안

자신은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찾은 것인가?
정휴의 얼굴이 참담한 패배감으로

어둡게 젖어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지함은 그동안 저 무수한 말을 어떻게 참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계속 쏟아내고 있었다.

지함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가

지함의 입술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화라는 아이를 통해 인간 세상의 모순을 깨달았지만

나는 여전히 벽에 부딪치고 말았네.
공자나 맹자의 학문은

이 세상을 올바로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 치고 일단 제쳐 놓아두세.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그리고 무엇을 향해서 움직이는가?
하늘은 무엇이고 땅은 무엇이고 별은 무엇인가?

저 나무는 왜 땅에서 솟아나 봄이면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잎을 떨구는가?

저 바위는 이 넓은 땅 가운데서 왜

하필 이곳에 뿌리박고 있는 것인가?
나무를 나무이게,

인간을 인간이게,

바위를 바위이게
하는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나는 알고 싶네.

속속들이.
자연의 섭리가 무엇이며 왜 생겨났으며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그 속에서 인간의 위치란 과연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네.
자네는 아는가?

내게 대답해줄 수 있나?"

지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정휴를 바라보았다.
지함의 눈은 한여름의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눈빛이 너무나 강렬하고 뜨거워서 바라보는 사람을 녹일 것 같았다.
정휴는 힘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나 가슴속에서는 지함의 눈빛과 다를 바 없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것은 진실을 향한 열망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지함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가에 대한 열패감,

심충익 대감도 노스님도 인정하고 아껴주었던

자신의 재주와 총기가 지함 앞에서는 얼마나 무기력해지는지에 대한 좌절감,

그리고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지함에 대한 질시까지,

무어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마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삭막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무것도 아닌 그를 홀로 남겨두고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가버릴 듯 세찬 바람이었다.
정휴는 눈을 감았다.
마른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이 성을 내며 한바퀴 휘익 돌더니 멀리 사라졌다.
지함의 빠른 발자국 소리가 바람보다 더 강하게 정휴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정휴는 자신이 바짝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몸은 작아지다 못해 마침내 발이 땅 속으로 숨어들고,

몸이 가라앉고,

머리까지도 땅에 파묻히고 있었다.
정휴는 눈을 감은 채 지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눈을 떠보니 지함은 정휴의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휘적휘적 팔을 저으며 길을 가고 있었다.
지함.

평생 그대는 나의 길을 앞서가며 나를 좌절시킬 것인가.

보지 않으면 그뿐일 것을,

나는 패배감에 통곡하면서도 왜 그대 곁을 떠나지 못하는가.

내 가슴 깊이 숨어 있는 한가닥 진실에 대한 열망 때문인가,

아니면 언젠가 기어이 그대를 뛰어넘고 싶다는

부끄러운 열등감 때문인가.

한나절도 채 걸리지 않아 두 사람은 광릉을 지나 봉선사에 도착했다. 

한양의 선비들이 과거 공부를 하러 오는 곳인 듯 

절에서는 방방마다 글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 밤이었다. 

지함과 정휴는 봉선사 요사채 방 한 칸에 등을 지고 앉아 

서로 벽을 바라본 채 침묵에 잠겼다.
정휴의 머리 속에는 오직 어서 금강산으로 떠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지함과 함께 있음으로 해서 겪어야 하는 혼란과 열패감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날이 밝으면 떠나야지.
정휴는 갖가지 상념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사람들이 뒤얽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내에서 싸우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학인들일 것이라고 생각한 정휴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땅바닥에 쓰러뜨려 놓고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 더러운 역적의 자식.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이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느냐? 

도대체 너희 부자가 죽인 목숨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나 있느냐."
"올커니, 맞아 죽어도 괜찮다는 뜻이렷다."
"네 놈은 아비 덕에 포천 현감질도 해먹었다며?
그래 실컷 해처먹고 우리마저 죽이거라."
밑에 깔린 사람은 발길질을 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그런데도 땅바닥에 엎드린 채 꼼짝도 않고 맞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지함이 

밖으로 뛰쳐나가 발길질하고 있는 선비를 잡아채어 옆으로 밀고, 

땅바닥에 깔린 사람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지함의 도움을 뿌리치며 뇌까렸다.
"놔 두시오. 난 맞아야 합니다."
"......"
"댁이 뉘시길래 싸움판에 끼어드는 것이오?

당신은 학인이 아니오?"
학인들이 싸움을 말리는 지함에게 큰소리로 항의했다.

지함은 다시 달려들려고 하는 학인들을 떼어내고

매맞던 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젠장, 맞아 죽어도 아깝지 않은 놈을

뭐가 불쌍하다고 감싸고 드는 게야?"
"저 자들도 한통속 아니야?"
정휴가 서둘러 문을 닫아걸자 밖에서 학인들이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함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바깥에 있는 학인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뭇매질을 당한 사람의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정휴는 천에 물을 적셔

그의 얼굴에 흐르고 있는 피를 닦아주었다.
"전 나쁜 사람입니다.

제게 이렇게 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두 사람의 도움을 극구 사양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매를 맞고 있는데

우리더러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이시오?"
지함이 혀를 찼다.
"아니오, 그래도 나는..."
"여기 조금만 더 계시다 가시오.

학인들이 산사에 공부하러 와서

싸움질이나 하니 조정이 잠잠할 새가 없지.

조정이나 사찰이나 온통 싸움판이로군."
지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만 폐를... 어이쿠."
일어서던 그는 비틀거리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나를 잡으시오."
지함이 얼른 일어나 그를 부축해주었다.
"고맙소.

잘 쉬었다 갑니다.

저는 정염 이라고 합니다."
그는 방문고리를 잡으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마흔너댓 되었을까?

나이가 적지 아니 들어보였다.
커다란 몸집에 걸맞게 사내대장부다운 얼굴이었으나,
그 얼굴에 세월의 그늘이 어지간히 드리워져 있었다.
"연세가 많으신 듯한데,

과거 준비를 위해 이곳에 머무르시는 중입니까?"
지함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정염을 붙들고 물었다.
"아닙니다.

이미 벼슬은 지내보았습니다.

이제 저 하고 싶은 공부나 하려고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벼슬을 지내셨다구요?"
"정순붕을 아시오?"
정순붕.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지함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한 그를.
"알다마다요."
"내가 그의 큰아들이오."
"......"
지함은 순간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정순붕,

그는 을사사화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소윤 윤원형의 수하였다.

명세의 목을 칼로 치라고 직접 명한 자였다.

그마저 부족하여 일족을 멸하고,

민이와 대부인을 종으로 보내버린 자였다.
이 사람이 정순붕의 장남이라니...
지함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윤원형과 정순붕 일당의 세력 기반은 주로 승려나 무당,

떠돌이 장사꾼 같은 천민들이었다.

그래서 사림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고,

사화 때 사림을 줄줄이 엮어 처치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림들의 사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떨어져 있는 판국에,
정순붕의 아들이란 사람을 직접 대하게 되자

학인들이 끓는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매질을 가했던 것이다.
사실,

아직도 한양 하늘에서 그 칼이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는 실력자의 장남을

폭행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학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정순붕의 장남 정염이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주고

욕을 하면 욕을 하는 대로

얻어 먹기만 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것을.
지함은 정순붕의 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의관이 남루하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그 얼굴 어딘가에 세상을 비웃는 듯 빈정거리는 표정이 흐르고 있었다.
눈두덩께는 벌써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고

머리에는 주먹만한 혹이 돋아올라 있지만,

그는 아픈 기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왜 이런 곳까지 와서 매를 맞고 있는 것일까?

세도가의 아들이 어째서 이런 산간에 제발로 찾아와

학인들 앞에 신분을 드러내 매를 자청한단 말인가?
"정순붕은 내 죽마고우의 목숨을 빼앗았고,

나와 정혼한 여자를 종으로 보내버렸지요.

그와 함께 내 앞날마저 송두리째 사라져버렸지요."
지함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지함의 두 눈에서는 푸른빛이 튀고 있었다.
정염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정염이 입을 열었다.
"이 땅 어디를 가나 내 일가를 늑대나 승냥이 보듯하여

이제는 아예 목을 내놓고 다니고 있습니다.
내가 얻어맞는 것으로 아비가 지은 죄를 대속할 수 있다면야 오죽 좋겠소?

몇 생을 다시 태어나도 다 갚기 어려운 죄를 짓고서도

제 아비는 지금도 피묻은 칼을 마구 휘둘러대고 있습니다그려.

내가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죽을 때까지

대신 얻어맞아서 용서되는 죄라면 차라리 내가 갚고 말겠소.

허나 그럴 수도 없는 것.

그래서 나도 부자지간을 결연히 끊어던지고 벼슬도 팽개쳤소."
"그런데 매는 왜?"
정휴가 끼어들어 물었다.
"나는 내가 정순붕의 아들이라는 게 끔찍하오.
그러나 사실은 사실,

내가 정순붕의 장남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지워버릴 수는 없는 것이오.

그래서
학인들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한양에서 왔다고 대답했고,

부친이 뉘시냐고 묻길래 정순붕이라고 대답했소.

바로 그 을사년의 정순붕이냐고 또 물어오길래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소.

그 때문에 매를 맞았던 것이오.
그것이 오히려 편하오.

내 뜻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에 연루되어

내가 이토록 참담한 꼴을 받는 것,

나는 그 까닭을 알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야 했던 이유,

나는 그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나는 죄인의 아들이 아니라 내 자신이 죄인입니다."
"......"
지함은 잠자코 정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 그가 정순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불끈 치솟았던 격정이 어느 결에 누그러지고 있었다.
"두 분 함자라도...?"
정염이 피묻은 손을 옷자락에 비비며 지함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지함은 무거운 얼굴로 대답을 않고 있었다.
"저는 정휴라고 합니다.

승복만 걸쳐입었을 뿐 아직 행자 노릇도 변변히 끝내지 못한 처지입니다."
정휴는 얼른 자기 소개를 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염은 정휴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으로 지함을 바라보았다.
"홍성현에서 온 이지함이라고 합니다."
"홍성현이라..."
정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눈을 번쩍 뜨더니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탄식했다.
"그렇군.

이번 특정기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사관이 있었소.

그가 아마 홍성현 출신이었을 거요.

이름이 뭐였더라 ... 안..."
"안명세였소."
"그가 바로 죽마고우였던 게로군요?"
지함도 정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염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제 알겠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명세라는 사관도 이 선비와 비슷한 또래라고 들었소.

꽤 절친한 사이였던 모양이군요.

그러고 보니 이 선비가 대과에 장원급제해놓고도

홀연히 사라져버린 바로 그 선비로군요."
지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릿발 내린 겨울 들녘처럼 차디차고 쓸쓸한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죄에 대해 내가 대신 사죄를 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안명세라는 젊은이나 우리 아버지나
이제 내게는 스쳐가는 바람과 같은 존재일 뿐이오.
그들의 삶과 죽음을 남은 우리가 뭐라 할 수 있겠소."
그들의 삶과 죽음?

정염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들이라니요?

그럼 정 대감도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지함이 격정을 억제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계시지요.

그러나 하늘의 업보란

사람이 알든 모르든 때가 되면 제 발로 찾아드는 법이지요.

머지 않았을 겝니다."
마치 정순붕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사람의 생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 같으시군요.

정순붕이 아무리 악인이라지만,

그 피를 받아 태어난 분으로서 너무 무심한 말씀 아닙니까?"
"내 아버지임을 내가 부인하지 않았듯이

그분이 악인이라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그분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미 벼슬도 버리고 세상도 버리고 아버지도 버리고 처자도 버렸습니다.

저에게는 이제 저밖에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 정순붕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끊을 수도 지울 수도 없습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아니 죽어서도 정염은 어디까지나 정순붕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그 사실을 잊어보고자 제가 호를 다 지었답니다.
북창(北窓)입니다.

저를 다시 보시거든 북창이라고만 불러주십시오.

그저 북쪽 하늘이나 바라보며 살 작정이지요."
정염은 지함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도

타박없이 허허 웃더니 말을 이었다.
"안명세에게 젊은 누이가 하나 있었지요.

그 여인이 제법 얼굴이 고왔던 모양이오.

삼족을 멸하라는 윤원형의 추상 같은 명령조차 거역하고

내 아버지가 그 여인을 데려간 걸 보면."
지함의 낯빛이 금세 흙빛으로 변했다.
"민이,

민이를 정순붕이 데리고 갔단 말인가?"
지함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새나왔다.
민이?
정휴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그 여인의 이름이 민이가 아니었습니까?"
"이름은 모르겠소.

나야 관심없는 일이니까."
정염은 아비의 죽음을 예언하던 때와 같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가 뜻밖에도 자기 가족을 멸한

철천지 원수인 내 아버지의 첩이 되어 있습디다.

하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 아이가 더 적극적으로 아버님을 따랐다고 합디다.

세상에 알다가도 모를 일이 음양의 이치라지만 ..."
지함의 눈에 시퍼런 불꽃이 피어올랐다.

정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 여인이 바로 ..."
정휴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그 여인이 바로 이 선비와 혼약을 한 사이라는 겁니까?"
정염이 지함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
"그렇답니다.

혼사를 하루 앞두고 그만..."
정휴가 지함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분노로 일그러졌던 지함의 얼굴은

어느새 침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함은 민이를 생각할 때면 침울해 보이기도 하고,
정신을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정휴가 지함을 처음 만난 다음날 새벽,

서울로 떠나던 안명세가 밑도끝도없는 말을 한마디 남기자,

밤새도록 유창하게 열변을 토했던 지함이

갑자기 당황하고 어눌한 목소리로 답했던 기억이 정휴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내가 떠나면 자네 우리 집에 들르지 못해 서운하겠구만...'
'몹쓸 친구.

알았으면 진작 좀 나서줄 일이지.'

민이를 두고 한 말이었구나.
정휴는 이제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홍성에서 정휴와 헤어지던 날 지함은

자신이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했었다.

진리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때부터 이미 지함의 가슴속에선

"민이"라는

구체적인 '진리'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함의 그리움이었던 여인이

자기 오라버니를 죽인 정순붕의 첩이 되어 있다니...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 않는가?
"그렇지만 나는 그 어린 여인의 눈빛에서

그 까닭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정염이 민이에 대한 얘기를 계속하였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시지요."
격한 감정을 눌러 참는 듯 지함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미안합니다.

보아하니 이 선비의 묵은 상처를 건드린 듯 싶소만,

그럴 작정으로 말을 꺼낸 건 아니었소.

사람의 삶과 죽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느냐는

이 선비의 나무람에 뭔가 해명을 하고 싶었을 뿐이오."
남의 상처를 들쑤셔놓고 태연하기로는 정염도 지함 못지않았다.
"그 얘기와 민이 얘기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하인배들은 그 아이를 두고 계집의 사악함을 논합디다만,

나는 그 아이에게서 쉽게 꺾이지 않을 집념을 읽었소.

정말 사악한 계집일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소."
창밖으로 스쳐가는 바람에 문풍지가 섧게 흐느꼈다.
죽음 같은 침묵이 방을 휘감고 있었다.
그 아이의 집념을 읽었다구?

그게 무슨 뜻일까?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미 깨어진 혼사,

벌써 한 해가 넘은 그 엄청난 아픔을 되돌릴 필요가 있는가.
지함의 가슴속에서는 소나기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함의 눈앞에 홍성현에 있을 때 보았던

"민이"의 해맑은 모습이 두둥실 떠올랐다.

민이는 별로 수줍음을 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양갓집 딸로서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소녀였다.

오래비 친구라면 감히 고개를 들어 맞대면을 할 수 없는 사이임에도,

민이는 당돌하게 똑바로 고개를 쳐들고 이것저것 물어대기 일쑤였다.

그때문에 어머니에게 말도 많이 듣던 민이였다.
아름다움으로 따지자면야 민이는 그리 뛰어난 미모는 아니었다.

지함의 가슴을 뒤흔든 건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여느 여인네와 다른 당돌함,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런 것들이 지함에게는 한없이 어여뻐 보였다.
민이 역시 지함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안명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민이가 사뿐 치맛자락을 걷어올리며 정자로 올라왔다.

어디선가 불어온 봄바람이 치맛자락을 휘감고 지나가자

민이의 하얀 종아리가 살큼 드러났다.
민이는 가슴에 한아름 안고 있던 들꽃더미를 지함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냐?"
"보고도 모르십니까?

저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들꽃이지요."
"이것을 왜?"
"화단의 매화보다 아름답지 않사옵니까?

저야 세상으로 나다니지 못하는 처지이옵니다만

이 들꽃은 제 스스로 피어 천지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햇빛을 마음껏 마시고 살지요.

아침나절 내내 꺾어온 것이랍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내게 주느냐?"
"홍성현에 이름난 오라버님도 별수없으시네요.

뜻을 모르시옵니까?

예전에 어느 늙은이가 수로부인을 위해 절벽의 꽃을 꺾으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지요?

자줏빛 바위 끝에
잡으온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려 하시면
꽃을 꺾어 바자오리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라는 사람이 부인과 함께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일행은 점심나절이 되어 차려온 음식을 꺼내어 맛있게 먹었다.

태수 부인 수로(水路)가 봄꽃 만발한 주위를 돌아보다가 우연히
병풍같이 깎아지른 절벽 위에 흐드러지게 핀 빨간 철쭉을 보았다.
"저렇게 예쁠 수가.

누가 저 꽃 좀 꺾어오겠는가?"
수로 부인이 하인과 호위꾼들에게 말했으나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그대로 황천길로 갈 절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로 부인이 안타까워할 때 길 가던 노인이 그 광경을 보았다.
암소를 끌고 가던 이 노인,

수로 부인에게 다가가
'나를 아니 부끄려 하시면 꽃을 꺾어 바자오리다'
하고 자원했다.
몸은 비록 늙어서 거동이 부자유스러웠지만,

노인은 아름다운 수로 부인을 위하여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노인은 겨우겨우 벼랑에 올라 바위 틈에 핀 철쭉을 한아름 꺾어 내려왔다.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수로 부인은

노인이 건네주는 빨간 철쭉꽃을 받아들고 한없이 기뻐하였다.
남편인 태수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사이,

노인은 다시 암소를 끌고 가던 길을 갔다.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으며

민이는 지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을 하늘을 담은 듯,

겨울 바다를 담은 듯 맑은 눈이었다.

그 눈에 빠져들 것 같아 지함은,

꽃잎을 다 떨구고 연한 잎을 피워내고 있는 화단의 매화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그 노인의 붉은 마음을 제가 담아드립니다."
그때 마침 명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지함은 민이를 덥썩 껴안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 순간 동그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민이의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세상의 무엇에도 거침없는 순수한 모습,

모든 허위를 벗어던진 자연의 모습이었다.
"너는 또 여기서 무슨 수다를 떨고 있는 게냐?"
"수다라니요?

여인의 말은 다 쓰잘 데 없는 수다라는 말은 누가 지어낸 것입니까?

저 위대한 공자님의 말씀입니까?

그가 여인이 못 된 이상,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여인의 가슴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움도 진실도 바라보지 못하는 법이지요.
오라버님은 옛날 옛적 늙은이들의 말씀에 매달려

저를 소인배 취급하시는 것입니까?"
안명세의 말에 뾰로통해져서 민이는 홱 돌아섰다.
민이의 분홍빛 치마 위로 다사로운 봄 햇살이 한 웅큼 쏟아져내렸다.
"허허. 저 놈의 수다는 끊기지도 않네.

내버려두면 저렇게 하루 종일 재잘거리지.

가끔은 뼈 있는 말도 제법 하네만 아직은 어린애랄세."
동생의 말 많음을 탓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실은 명세도 지함만큼 누이를 아끼고 있었다.

민이는 단순한 누이동생이 아니라 지함과 명세의
말동무이기도 했고 총명한 제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게 언제 적 얘기던가? 그렇다.

명세가 고향을 떠나기 일 년 전이었다.

명세네 집안이 한양으로 다 올라가기 전까지는 지함 자신도

민이에 대한 그리움이 그리 깊은 것인 줄 생각하지 못했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그토록 휘어잡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민이가 떠난 자리는 너무나 컸다.

정휴도, 지함이 그토록 좋아했던 광활한 바다도

민이가 차지했던 마음자리를 조금도 채워주질 못했다.
한양으로 떠날 결심을 굳힌 것은 이제 너도 대과를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형 지번의 권유나 명세의 간절한 편지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민이의 얼굴을 보겠다는 것,

그것만이 한양으로 향하는 지함의 가슴속에 꽉 들어찬 생각이었다.
민이는 홍성에 있을 때처럼 여러모로 여전했다.
그때보다 훨씬 숙성한 얼굴이 총기를 더해주고 있을 뿐.
지함이 왔다는 소식을 하인에게 들었는지 민이는
지함이 있는 사랑까지 토닥토닥 뛰어왔다.
발갛게 상기된 민이의 뺨을 보는 순간 지함은 가슴에 품고 있던

간절한 그리움이 녹아내리기는커녕 더 크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이제야 오셨어요?

오라버님이나 저나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는 걸요.

고향에선 가끔 문밖 출입도 할 수 있었는데 여긴 감옥같아요.

양반집 규수들은 문밖이 산인지 강인지도 알아서는 안 된다나요.
흉난다구요.

바깥 얘기를 해달라고 졸라도 오라버님은 늘 춘추관 출입에 바쁘시고 늘 저 혼자였어요.

친구도 사귈 수 없으니 정말 숨이 막힌다구요."
그동안 얼마나 말을 참아왔던 것일까.

민이는 지함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봄하늘의 종다리처럼

새 없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몇 해 전 봄날처럼 눈을 빛내면서.

명세의 가족 모두 몰살을 당하고 누군가 세도 있는
사람이 민이를 데려갔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뜬구름 같은 얘기여서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함은 그 소문을 믿고 싶었다.

어딘가 살아 있다면 언젠가 만날 날도 있을 테고,

부부는 될 수 없을지라도 같은 하늘 아래 민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함은 커다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민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 반가운 순간,

왜 가슴속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기생 선화와 몇 달을 함께 지내면서 지함이 깨달은 것은

여인에게 지조가 생명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선화가 비록 뭇남자에게 몸을 파는 기생이었지만,

기생도 하나의 인간이었다.

가난한 살림이 그를 기생살이로 내몰았을 뿐.
선화는 두 눈이 멀쩡하게 달려 있고

두 귀가 멀쩡하게 열려 있었지만 그 눈,

그 귀로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이 조선이 열어놓은 여인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선화에게는 정말 귀한 눈과 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굳이 청하지 않아도 뭇남자들이 알아서 찾아와

바깥 소식을 본 대로 들은 대로 토해놓고 가는 자궁이었다.

자궁은 웬만한 바깥 소식쯤은 힘 안들이고도 모조리 주워들을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선화의 눈이고 귀였다.

기생 선화는 자기가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세상,

남녀라는 성의 만남을 통해 제 나름대로

세상의 진리를 터득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함이나 정휴가

삶의 진실을 향해 가는 지난한 노력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생 선화는 자신에게 정을 주던 사내가 떠나버린다고 해서

그 이별의 슬픔에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녀의 만남을 하룻밤의 쾌락만으로 생각하는 사내,

기생을 성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사내들 때문에 울었다.
선화에게 남녀의 성이란,

세상이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하늘과 땅이 만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남자와 몸을 나누는 것을 언제나 신성한 것으로,

온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선화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지함은 아직 판단할 자신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것으로부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녀의 결합을 쉬쉬 하는 양반 세상과 달리,

그것을 세상의 근본적인 이치로 여기는 기생 선화의 세계는
지함에게 있어서 또다른 충격이었다.

기생 선화를 통해 지함은 여자에게 족쇄처럼 채워져 있는

순결이나 정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남정네의 이기심의 산물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 지함이기에,

사랑했던 여인이 다른 남자 더구나 원수인 정순붕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사라는 것이 인간의 간절한 원과 별 관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민이와 지함이 그렇게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헤어져야만 하는

알지 못할 운명의 권위가 지함을 서럽게 한 것이었다.
민이에게,

명세에게 이런 날들이 오리라고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알 수 없는 힘이 예고도 없이 찾아와 
사람의 앞길을 제멋대로 흔들어놓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 힘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 지함은 비통하고 참담했다.
한양 구경을 하고 싶어 안달을 했던 민이,

지함에게 들꽃더미를 안겨주었던 민이.
지함은 당장이라도 그 민이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자신은 이미 다른 여자의 지아비이며 민이 역시 이전의 민이가 아닌 바에야.
그러나...
지함은 고개를 저었다.

정염의 말로 미루어보아 민이는 지금 제 방식으로 알 수 없는

힘에 도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 어찌 되든 그것은 민이의 선택이었다.

옳든 그르든, 민이의 의도대로 성사되든 성사되지 않든 그것은 민이의 운명이었다.
민이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했던가?
지함은 안개에 휩싸인 듯 부연 기억을 찬찬히 더듬었다.

명세네 집을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이 언제였더라.
지함이 과거에 장원급제했던 날이었다.

집에서 축하 잔치를 마친 지함은 명세네 집으로 달음질쳐 갔다.
그때 지함과 민이만 남겨놓고 잠시 자리를 피해주었던 명세는

다시 방에 들어와 앉자마자 민이부터 물리치려 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거라.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얘기 자리에 민이가 끼는 일이야 종종 있는 터였지만,

명세는 그날 얘기가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저도 다 아는 얘기이옵니다.

인종 임금님이 독살당했다는 말씀을 하려는 것이지요?

임금님도 별수없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모양이군요.
천명(天命) 때문이 아니라 사람 손에 죽다니...
하기사 인간의 세상만 그런 것도 아니지요.

우리 집 고양이도 쥐를 죽이는 걸요.

나뭇잎도 가을이면 떨어지고..."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해서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놀랍게도 민이의 눈동자가 촉촉히 젖어 있었다.

다른 때라면 기어이 나가지 않고 대화에 끼었을 성도 싶은데,

민이는 더 이상 말없이 물러갔다.

성숙했다는 표시일까,

핼쑥해서 오히려 청초한 매력이 더해진 민이의 볼 위로

눈물이 한 줄기 흐르는 것을 지함은 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본 민이의 모습이었다.
명세가 변을 당한 뒤로 마음을 잡지 못하고 기방 출입이나 일삼는 지함의

마음을 돌리려고 지번은 지함의 혼인을 서둘렀다.

아무개의 자손이라는 것 외에 아는 것도 없이 장가를 들고

그 여인을 품에 안으면서도 늘 민이의 모습이 떠올랐고,

기방에서 선화라는 기생을 만났을 때도 민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어제 헤어진 기생 선화의 얼굴도

어떻게 생겼는지 좀체 기억나지 않는데,

민이의 모습은 바로 곁에 있는 듯 또렷하게 떠올랐다.
명세...
너는 참으로 많은 것을 뒤흔들어놓고 떠나갔다.
나의 삶까지.

네 죽음은, 네 선택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민이에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운명을 가져다 줄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었는가?
나는 모르겠네. 명세.

모든 것이 뒤죽박죽 혼란스럽기만 하네.
한참 만에야 지함은 눈을 떴다.
정염이 지함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하고 맑은 눈빛이었다.
"정 선비께서는 이곳에 무슨 공부를 하러 오신 겁니까?

과거 공부를 하러 오신 것은 아니라고 하셨지요?"
지함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민이의 모습을 지우며 다시 물었다.
"을사사화는 안명세의 목숨을 거두었고

이 선비의 연인과 우정을 거두어 갔고,

내게서는 세상을 거두었소.

나는 얼마 전까지 아버님의 후광으로 포천현감을 지냈소만 그만두어버렸소.

아버님께는 후세에 부끄럽지 않도록 진실을 숨기지 말라고

거듭 간청을 드렸소만 번번이 거절당했지요. 그

래 수도하는 기분으로 이런 저런 공부나 해볼까 하고 이곳에 찾아온 것이오.
그러는 이 선비는 장원으로 급제한 대과도 다 물리고 무엇을 준비하시는 게요?"
"모르겠습니다.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마음이 서질 않습니다.

정 선비님이 하시는 공부는 대체 어떤 것입니까?"
정휴가 물었을 때는 말을 돌리던 지함이 이제
정염의 물음에는 자기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고 있었다.

그만큼 마음이 정리된 것일까,

아니면 정휴가 마음을 논할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정휴의 마음은 좀처럼 편치 않았다.
"글쎄올시다.

이것 저것. 천문이나 지리나 역학이나 도가의 수련서 같은 것들이오.

입신양명에는 별 필요가 없는 책들이지요.

어차피 입신양명으로 허망한 것들만 보았으니 내 공부 좀 하렵니다."
천문, 지리?
지함의 눈이 번뜩거렸다.
천문, 하늘의 이치를 공부한다는 것인가?
"책을 좀 얻어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벼슬에 마음을 안 두셨으니 공부도 수월할 겁니다."
어느새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지함의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어두운 과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그를 참담하게 만들었던 지난 일들이 모여 더 큰 힘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지함은 벌떡 일어섰다.
"이 선비, 성질도 급하시오."
정염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러나 싫지 않은 듯 지함을 따라 일어섰다.
정휴는 내심 흥미가 당기면서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뭐랄까,

맛있는 것을 주면서 어머니가 한 번 더 권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정염과 지함은 정휴에게 아무런 권유도 않고

벌써 정염의 방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호롱불이 일렁이는 방안,

정휴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에 젖어 불빛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정휴는 기막힌 악연임에도 개의치 않고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원수의 아들에게 책을 얻으러 가는 지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일까.

몇 달 동안 기방에서 술만 퍼마셨다는 그가,

그러면서도 민이 한 사람만을 눈에 그리며 살았을 그가 어떻게 자신의 여인을 앗아간
원수의 아들을 따라 지혜를 구하려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휴는 또, 아버지가 지은 죄의 늪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정염의 용기가 한없이 부러웠다.

정휴는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인생을 살아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주인댁 도령이 책을 읽을 때 어깨너머로 몰래 읽은 것,

면천 후 지함에게 찾아갔던 것,

계룡산 고청봉의 명초를 찾아갔던 것, 그리고는 없었다.

그런 일들마저 그리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휴는 종에서 양민으로 한 계급 올라섰다.
그런데도 늘 종이었다는 기억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 정염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라 안에서 둘째 가는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사람,

그 정도의 세도 가문에서 양반으로 태어나 벼슬까지 해본 사람.
그런 그가 권력에서도 벼슬에서도 훌쩍 떠나와 한적한 산사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이지함, 북창.
이들이 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진리를 향해 한발한발 나아가고 있는데도 진리는커녕 신분에서 오는

좌절감에 끄달려 그 벽을 허물지 못하고 연연해 하고 있는 나.
정휴는 그러한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그래서 정휴는 어서 금강산으로 떠나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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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창정염선생의 일대기와 생애

유불선 아우른 조선 도맥의 정수   북창(北窓) 정렴 정재서 정북창은 조선 시기의 선도 인물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기이한 행적과 일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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