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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특정기(特定記) 사건-소설^토정비결(上-6)

서울에 올라온 지함이 형 지번의 퇴궐을 기다려 인사를 드리자마자

양반 체면에도 불구하고 한달음에 내달린 곳은 안명세의 집이었다.
안명세는 아직 귀가 전이었다.

다른 관리들이 모두 퇴청한 후에도 혼자 대궐에 남아

늦게까지 일을 하곤 한다고 하인이 전해 주었다.
지함은 호롱불을 밝힌 사랑에 홀로 앉아 명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토닥토닥 가볍게 땅을 딛고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살짝 열렸다.

명세의 여동생 민이가 발갛게 상기된 뺨을 문 사이로 들이밀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민이의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이며

촉촉하게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을 지함은 보았다.

덥썩 달려가 손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을 지함은 간신히 억눌렀다.
"왜 이제야 오셨지요?"
반가움보다 노여움이 더 많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따지듯 덤벼드는 민이의 당돌한 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홀로 어두운 바닷가를 서성이며 그토록 그리워 애태웠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동안 저는 혼처를 정했답니다."
민이가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지함의 가슴이 덜컥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제가 아무리 싫다 해도 어머님이 막무가내였답니다.

제 나이 벌써 혼기가 지났는 걸요."
눈물을 뚝뚝 흘리는 민이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지함은 눈을 감았다.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가슴속에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처럼 거센 파도가 밀어닥칠 뿐이었다.

어느 틈에 민이가 사라졌는지,

어느새 명세가 눈앞에 와 앉았는지 모든 것이 지함에겐 꿈결 같고 찰나 같았다.
자신을 보고서도 멍하게 앉아 있는 지함의 손을
덥썩 움켜쥐며 명세는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게 얼마 만인가.

진작 좀 올라오지 않구서.
우리가 이렇게 떨어져 있어본 게 처음 아닌가.

이거 나만 속 태운 모양이구만.

나는 지아비 그리는 계집처럼 자네를 그리워했는데 말일세.

아니, 그런데 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무슨 일이 생긴 겐가?"
명세에 대한 그리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보다는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민이에 대한 지함의 마음을 모르는 명세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민이의 혼처를 다른 데로 정해버리다니.
"자네, 대체 왜 이러나?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답답허이. 말 좀 해보게."
"그렇게 시치미를 뗄 건가? "
지함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명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지함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정말 모르겠단 말인가? "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민이가 찻상을 받쳐들고 들어섰다.
"오라버니한테 소리지르셔 보았자 아실 리가 없지요."
이번에는 지함이 어리둥절했다.
민이는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따랐다.

은은한 차 향기가 방안에 감돌았다.
"그럼, 아까 한 말은?"
"제가 화풀이를 좀 한 거지요.

그렇게 연락도 없으셔 놓고

그럼 제가 아직 정혼하지 않았기를 바라셨단 말씀이에요?"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게냐?"
"아, 아닐세."
지함은 황급히 대답했다.
"제 혼처를 이미 정했노라고 말씀을 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저 야단이시랍니다."
"흠흠."
지함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하."
화통하게 웃어제친 명세는 웃음을 그치고는 정색을 하고 지함을 보았다.
"아끼는 친구를 매제로 삼았다가 이거 팔불출 만들겠는 걸.

여태 자네한테 떠맡기려고 민이 혼처를 정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당하기만 해서야 어디 불쌍해서 되겠나. 안 되겠네.

민이를 힘으로라도 당할 장사를 따로 찾아봐야지."
"오라버니, 그게 좋겠는 걸요.

사내 대장부가 저래서야 어디에 쓰겠어요?

혼처를 정했다니까 별수없이 그리 보내고 말 모양이던 걸요."
"자꾸들 그러면 나는 그만 가겠네."
지함이 일어설 듯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그제야 두 사람의 심술궂은 농담이 그쳤다.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매듭을 지으세.

내일이라도 내가 지번 형님을 만나서 말씀을 드리겠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민이와 지함의 눈길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민이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민이의 쏘는 듯한 시선에 빨려들며 지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함의 나이도,

민이의 나이도 이미 혼기가 지났고
두 집안이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왔던 터라 혼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정식으로 매파가 양 집안을 오갔고,

얼마 후에는 사주단자까지 건너왔으나 혼인날을 잡지는 못했다.

지함의 형 지번이 이번 혼사에 대해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함이 대과를 보는 것이었다.
대과를 보아 급제한 연후에 혼인하라는 단서를 달은 것이었다.

동생 지함이 조정에 나갈 생각은 아니하고 농사일이니 뭐니

양반사회에서는 금기시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니 짐짓 그리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함은 과거 공부에 매달렸다.

기왕 치러야 할 시험이었으니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실력으로야 웬만큼은 자신이 있었으나 급제란 실력뿐만 아니라

그날의 운이며 조정과 친분 관계까지 한 박자로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라,

지함은 낮이면 종일 서재에서 글을 읽고 밤이면 명세와 더불어
조정에서 소문난 젊은 선비들과 어울리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홍성에서 민이를 그리워할 때는 그토록 지리하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안명세가 심각한 얼굴로 퇴궐했다.
"여보게, 지함.

내가 오늘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전말을 정리하는 중에

마침 김종직(金宗直)의 처남 조위(曺偉)란 자의 아우 조신(曺伸)이라는 자를 면담했네.

그 자는 아직도 옥에 갇혀 있는데,
그에게서 한명회의 노회한 죄악상을 듣고 몹시 기분이 언짢네."
"그야 다 아는 소리 아닌가?"
"그렇게 넘길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닐세.

이 나라 역사를 바로 잡지 못하면 큰일나네.

그건 그렇고,

조신이란 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네가 재미있어 할 이야기를 하던데그려."
"뭔가?"
"조신 그 자가 그의 형 조위하고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 효종(孝宗)에게 조공을 갖고 갔는데,

그만 그 사이에 사화가 터져 매부 김종직 일파가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네.

한명회 같은 훈신들이 새로 세력을 얻어가는 사림(士林)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때를 만난 거지.

사건을 확대하여 김일손, 표연수, 정여창 같은 영남 출신 사림,

그리고 그동안 훈신들의 횡포를 두고

상소를 올리거나 불만을 가진 사림들은 모조리 이 사건에 엮어버렸다네.
당연히 조위도 그 사화에 연루되어 한양에 귀환하는 대로 참수를 당하게 되어 있었다네.

그래서 조신 그 자는 명나라에 그대로 눌러앉자고 형인 조위에게 말했으나,

워낙 성격이 대쪽 같던 조위는 귀국을 결심하고 말았다네.
그래서 보다못한 아우가 유명한 중국의 점술가를 찾아가 점괘를 뽑아보았더니

'천길 물 속을 뚫고 나가서,

바위 아래에서 사흘 밤을 잠
자네(千層浪裏飜身出 也銖岩下宿三宵)'라는 글이 나왔다는 것이야.
압록강을 눈앞에 두었던 하정사 일행은 마침내 강을 건너,

벌써부터 국경에서 칼을 뽑고 기다리던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에게 목을 내밀었다네.

그런데 이 금부 도사는 조위를 순천으로 귀양가라는 어명만 던져놓고 한양으로 떠났다네.

순천으로 귀양 가는 길에 포졸에게 물으니 전날까지만 해도

즉각 처형하라는 영을 받고 있었는데,

당일 아침 한양에서 달려온 파발이 다시 귀양을 보내라는 어명을 받아왔다는 것이었어.
그뒤 조위는 귀양지에서 잘 살다가 병사했는데,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또 일어나자 그 사건에도 다시 휘말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네.

그것도 갈갈이 찢겨진 시신을 상석(床石) 밑에 사흘 동안 버려두었던 것이야.

그제서야 점괘를 뽑았던

'천길 물속을 뚫고 빠져나가서 바위 아래에서 사흘 밤을 잠자네'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 되었던 것이지."
안명세가 이야기를 마치자 지함은 껄껄 웃었다.
"아니, 자네가 그 따위 점술 이야기를 귀담아듣다니,

거참 재미있네그려, 하하하.

점술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만 나와도 펄펄 뛰던 자네 아닌가?"
그러자 명세도 지함을 따라 웃었다.
"그러나, 이보게 지함.

난 아직도 이 조선의 역사가 하루 아침에 돌변하고,

뒤집히고, 쓰러지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네.

내 비록 조위란 자를 들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말했지만 그건 농담이고,

기실 그 사건을 깊이 파보고 있는 중이네.

참수를 면했다가

나중에야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점술가의 얘기 따위는 내 관심 밖이네.
물론 점술가의 말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고

단순하게 믿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관은 점술가가 아닐세.

점술가는 미래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관은 과거를 비쳐보아 미래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네."
지함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안명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왜 무오사화가 일어났는가,

왜 갑자사화가 일어났는가,

왜 기묘사화가 일어났는가.

을사사화가 일어났는가.

youtu.be/R2zrnkFhU_E?t=19

왜? 왜? 왜?

점술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모든 건 하늘에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노라고.
그러나, 천만에.

주체는 하늘이 아니라 사람일세.
사람이 사람의 운명을 만들어나가는 걸세.

김종직의 무리, 김일손, 표연수, 정여창.

그들을 누가 죽였는가?

하늘인가, 귀신인가?

아닐세. 한명회, 노사신, 서거정, 양성지 같은 훈구 대신들이었다네.
갑자사화? 그것도 사람이 저질렀네.

하늘도 귀신도 아닌 연산군이 바로 칼을 들었던 것이네.
기묘사화? 마찬가지네.

조광조의 독주를 불안하게 본 남곤, 심정, 김안노 같은 사람들이

사림의 지나친 독주를 경계하도록 중종을 꼬드겨 그렇게 저지른 것이네.

을사사화?

인종의 외할아버지 윤임(尹任)을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이 명종 즉위에 힘입어 축출한 사건이네.

https://namu.wiki/w/%EC%98%A5%EC%A4%91%ED%99%94

 

옥중화 - 나무위키

강선호(임호)겉으로는 포도청 부장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본래 신분은 체탐인이다. 박태수를 존경했으나 윤원형의 비밀스런 명령을 받아들고 고민한다. 포도청 다모 시험을 치러온 옥녀의 무예

namu.wiki

이렇게, 역사는 하늘이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네."
안명세의 말에 지함은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맞네. 자네 말이 다 옳으이.

그렇지만 운명이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운명인 것이지,

뻔히 예측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그런 말을 쓸 까닭도 없네.

사람이 역사를 짓는다,

그것 참 좋은 말이네만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하늘이 아니겠는가?"
"저런, 아직도 내 말이 씨아가 먹히질 않는군.

두고 보세."
"이보게, 명세.

자네가 사화(士禍)를 탐구하고 있는 모양이네만

남곤, 심정 두 사람이 조광조를 칠 때 어떻게 중종을 움직였는지 아는가?

조광조의 사주를 들어 역성 혁명(易姓革命)을 꾀할 자라고 고변한 것이
불쏘시개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네.
중종이 그걸 믿었기에 일어난 일이라네.

중종 임금의 사주가 음화(陰火), 즉 약한 불인데 조광조는 철철 넘치는 양수(陽水)이므로

조광조를 저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중종의 불이 다 꺼져버린다는 논리를 폈다네.

어떤가, 그럴싸하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중종의 눈에 조광조 대감 하는 일이 점점 지나친 것으로만 보이고,

급기야 임금 자신까지 집어삼킬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걸세."
"지함. 그 얘기는 누가 일부러 지어낸 것일 게야.
하등 들을 가치가 없는 얘길세.

그것은 사주 때문도,
운명이나 점술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닐세.

훈구 대신들의 탐욕과 신진 사림의 무모한 개혁이 빚어온 결과네.

중종 반정(反政)에 가담한 사람이 천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모두 정국 공신이니 원종 공신이니 하는 칭호를 얻고 노비와 토지를 상으로 받았었네.
사림이 이것을 놓고 부당하다고 지적했고,

그런 사림을 훈구 대신들이 미워한 것이네.

그러던 중 조광조가 조정에서 실권을 얻기 시작하자

절간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는 등 급진 개혁을 해나갔지.
그것을 곱게 바라보고만 있을 훈구 대신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정국 공신들 가운데 4분의 3을 가려 호칭을 다시 거두어들이고,

부상으로 주었던 토지와 노비도 몰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니,

어찌 그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런 때를 당했으니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서 적대 세력을 물리치려 하지 않았겠는가.
무고한 모함이든, 사주를 들어 고변했든 그것은 거론할 만한 게 못 되네.

단지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일세.

어쨌든 결국 조광조는 목을 잃고 말았네.

이렇게 잘잘못은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네.

결코 운명의 장난으로 돌려서는 안 되네."
"옳다네.

그러나 이 점도 아울러 생각해 보세.

만일 조광조라는 사람이 그 시대에 나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사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때에는 그런 인물이 나와야 할 만한 까닭이 반드시 있었던 것이네.

지금은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저 후대에 가서는 그 깊은 뜻이 드러날 것일세.
사관이 해석하지 못하는 큰 사건은 수백 년은 지나야 진실이 드러나는 법일세.

우리 같은 당대 사람들이야 길게 생각해 보았자 수십 년 안목밖에 없지만,

사관은 그래서는 안 되네.

사관은 수백 년,
수천 년을 내다보아야 하네.

하늘, 운명, 이러한 것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이네.
아무튼 그만하세.

이제 방이 훈훈해진 것 같으니
이로써 족한 듯하이."
"그러세."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어 토론으로 뜨거워진 열기를 식혔다.

홍성에서라면 이런 얘기 뒤끝에 훌훌 털고 나서서 약주라도 한 병 들고 뒷산을 찾거나,
저잣거리를 쏘다니며 이런 저런 구경으로 열기를 가라앉혔을 터였다.

그런데 홍성보다 훨씬 넓은 한양에서는 오히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서울로 올라와 지함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놈의 양반 행세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홍성에 있을 때나 서울에 있으나 지함은 똑같은 지함이건만

그때와 똑같이 처세를 했다가는

당장 양반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손가락질을 당할 처지였다.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들고 다녀도 흉이었고,

상민들과 어울려 술을 한잔 나누어도 입에 올랐다.
"이놈의 양반이라는 게 평생 옥살이를 하는 셈이지 뭔가."
명세도 지함과 똑같은 기분인지 착잡한 얼굴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러게 말일세.

그러나 수백 년간 내려온 전통을 어찌 하루아침에 바꾸겠나?"
과거 속에 파묻혀 사는 사관다운 말이었다.

하기야 사관이면 그래도 종팔품이니 홍성에서와 달리

처신에 조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벼슬길이 워낙 살얼음판이라 항상 주위를 경계하고

법도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벼슬길을 해나갈 일이 악몽 같네그려."
지함이 입맛을 다시자 명세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대과 급제는 따놓은 듯이 얘기하는구만.
산신령한테서 약속이라도 받아둔 겐가?"
"그럼. 장원급제할 것이라는 언질을 받아놓았다네.
허허허."
지함은 농을 해놓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도대체 조정에서 대신들이 하는 일이 뭔가?

배고픈 백성에게 곡식 한 되 더 줄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제 곳간 채우기에 급급하니...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사화를 끊임없이 일으키고,

서로 죽이고 죽는 꼴이 우습기만 하네그려.
생각해 보게나.

백성들을 어버이처럼 돌보아야 할 대신들이

어디 휘말려들어 피해나 당하지 않을까 하고 몸을 사리는 꼴을.

이런 형편이니 조정이 어찌 돼가겠나?

그러니 수많은 인재들이 청운의 뜻을 품었다가도

고린내나는 한낱 서책의 종이 되고 마는 것 아니겠나?

이러한 세상에서 무슨 도의를 펴고 진실을 말하겠는가."
"그렇다고 누가 진실까지 버리라고 했는가?

범을 잡으려면 그 굴로 들어가라고 했네.

자네, 굴도 찾기 전에 벌써부터 피해가려는 것인가?"
"그렇게 움켜쥔 진실이 무슨 힘이 있겠나?

무릇 진실이란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야 하는 법 아닌가?"
지함은 자못 불만스런 목소리였다.
"이 친구야.

벼슬길 올라서 할 걱정은 두었다 하고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끄게나.

일단 대과에는 합격을 하고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는 안명세의 얼굴 또한 어두웠다.
드디어 과거일이 가까워졌다.

12년 동안 네 번 치르는 대과 시험이 3년 만에 정식으로 공시되었다.

지함은 이 과거에 급제만 하면 한 달 뒤 민이와 혼인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가난한 시골 선비들은 괴나리 봇짐에 짚신을 매달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한양을 향했고,

행세깨나 하는 향반집 선비들은 말을 구해 한양으로 달렸다.

양반의 자제로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고 가문을
빛내는 것이 모든 선비들의 최고의 바람이기도 했지만,

아직 공부가 덜 된 선비들도 오랜만에 한양 걸음을 해

나라 안팎의 사정을 요모조모 살피기도 하고

소문난 선비들의 이런 저런 소문을 귀동냥하면서
세상의 흐름을 가늠하는 것이 당시 과거장의 풍속이었다.
지함은 눈앞에 닥친 대과 준비에 여념이 없어 명세를 만나러 갈 시간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세가 일부러 가회동 지함의 집을 찾아왔다.

어쩐 일인지 명세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러고 보니 형 지번 역시 요즈음 늘상 침울한 얼굴이었다.
"자네, 무슨 일이 있었나?"
명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저고리 앞섶을 뒤져 두툼한 문서를 꺼내놓았다.
"이게 뭔가?"
지함이 물었으나 명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술잔을 입에 털어넣다시피 급히 술을 마셨다.

그러고는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말했다.
"인종 임금은 독살되었다네."
"뭐라고? 독살?"
놀란 지함이 언성을 높이자

명세는 불안한 얼굴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쉿. 이게 바로 그 진상을 조사한 것이라네.

인종은 원래 몸이 약하시긴 했지만,

그리 쉽게 돌아가실 병은 아니었다네.

그런 것을 윤원형 일당이 약에다 독을 넣어 독살시킨 것이네."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자네 접때 네 차례 사화를 조사하러 다닌다고 하더니,

참말로 하고 있었구먼."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사실(史實)을 적는 것 아닌가.

내가 일일이 내의원에 가서 묻고 상궁들을 찾아다니며 캐고,

다른 이들에게도 확인한 것이니 틀림없는 사실이네."
"여보게, 잠깐.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나?"
"며칠 전에 지번 형님께 먼저 말씀 드린 것 외에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네만,

진실임이 드러난 이상 세상에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안 되네.

그렇지 않아도 수 차례 사화로 살아남은 사림이 몇 되지도 않는 판에

자네 목숨까지 위태롭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무슨 소리! 전에 자네가 한 말은 어떻게 된 건가?
진실이란 무엇에도 걸림이 없어야 된다는 말 말일세."
대꾸할 말이 없었다.

목숨을 걸지 않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명세의 목숨만이 아니라 일가 친척 모두의 목숨을.

그리고 민이마저도.
지함은 한숨을 내쉬며,

그늘진 얼굴로 생각에 잠긴 명세를 바라보았다.

명세가 벼슬길에 나가더니 전보다 패기가 줄고 조심성만 늘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짐작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지함은 깨닫고 있었다.
"하여튼 자네는 그런 줄이나 알고 있게.

이에 관해서는 대과가 끝나거든 다시 논의하세."
명세는 그날 사랑에 들러 지번을 만난 뒤 밤늦게야 돌아갔다.
지함은 며칠 남지 않은 시험이 걱정되었으나

자꾸만 명세가 한 말이 생각나서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번 대과에 떨어지면 다시 세 해를 기다려야 하니

지번 형님에게 낯을 들 수 없다는 것 또한 눈앞에 닥친 과제였다.
지함은 명세 생각이 나면 머리를 흔들어서 물리치고 책을 펼쳐들었다.

형 지번은 지번대로 연일 지함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독려했다.
이미 소과(小科) 생원, 진사 양시에 다 합격한 지함은 대과 중

문과의 관시(館試)에 할당된 인원 50명 안에 드는 시험을 치러야 했다.

초장(初場)에서 사서 오경 등을 치고,

중장(中場)에서 부(賦), 송(頌), 명(銘) 등을 하고

종장(終場)에 가서 대책(對策) 1편을 치러야 했다.
12년에 네 번,

즉 3년에 한 번 치는 시험이므로 응시생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림의 숫자 또한 엄청나기도 했지만

때로 매관(賣官)한다는 말이 돌기도 해서

지함은 공부를 하면서도 일말 불안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매관 매직이야 벌써부터 있어온 말이었지만

윤원형 일당이 집권을 하면서부터 더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다.
그런 때에 사림에 뿌리를 둔 지번은 그쪽에 아무 줄도 닿지 않았고,

따라서 지함은 곧이곧대로 시험에만 운을 걸어야 했다.

뽑는 숫자로는 쉰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몇 명을 뽑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험 날짜가 가까워지자 한양 저잣거리의 주막은
팔도에서 몰려든 선비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방에서는 밤새도록 나랏일을 둘러싼 격론이 붙기도 했고,

어떤 방에서는 각자 밤새워 마지막 정리를 하느라 불이 꺼질 줄 몰랐다.

대과를 일 년에 한 번씩 치렀다가는 한양의 기름이 다 바닥날 거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마침내 대과가 열리는 날 아침이 밝았다.

과거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지만 지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을 맞았다.
밤이슬에 젖은 수국이 가을햇살에 청량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이슬 몇 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소매깃을 파고드는 아침 바람이 싸한 게 기분이 상쾌했다.
"좋은 꿈 꾸었나?"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안명세였다.

아침부터 달려온 것이었다.

안명세를 따라온 하인 달득이 작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두 마리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비상하는 자수가 놓인 보자기로 싼 것이었다.
"이게 뭔가?"
"풀어보게."
보자기 속에 들은 것은 자그마한 대나무상자였다.
상자 뚜껑에는 분홍빛 조선종이에 싼 편지가 놓여 있었다.

민이가 보낸 것이었다.
안명세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돌리자,

지함은 멋적어하면서 편지를 읽었다.
"정성을 들인다고 제 손으로 떡쌀을 담그고 콩가루를 내서 만들었는데

맛이 제대로 날지 모르겠어요.

저는 저대로 밤새워 만든 떡이오니 맛있게 잡수시고 급제하셔요.

어젯밤에는 좋은 꿈을 꾸었사옵니다.

제가 어딘지 가고 있는데 지함 오라버님이 금의환향하는 행렬을 만났어요.

어사화를 꽂고 늠름한 모습으로...
그런데 저는 어디론가 자꾸 가고 있었어요.
오라버님과 멀어지고 있어서

아무리 오라버님께 달려가려고 해도 발길이 돌려지질 않았어요.
어쨌든 급제는 틀림없을 거예요.

부디 급제를 하시어요."
나무 상자를 열자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인절미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반듯반듯하게 썰어놓은 솜씨가 아주 예뻤다.
"찰떡같이 붙으시라는 민이의 엄명일세.

자, 나는 먼저 입궐할 테니 시험 잘 치르게나.

오후에 봄세."
지함도 곧 의관을 정제하고 과장(科場)으로 향했다.
과장은 성균관이었다.

하늘은 맑고 지난 여름의 위용을 마지막으로 과시하고 있는 햇살도 제법 따가웠다.
과장은 잔뜩 긴장해서 굳어 있는 선비들로 가득 찼지만

발걸음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지함은 중간쯤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 한 수가 절로 흘러나올 것 같은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사실, 공부한 양으로 따지자면 지함은 내세우잘 게 별로 없었다.

양반집 자제들이 대부분 철이 들면서부터 익히고 배우는 것은 모두 과거에 대비한 학문이었다.

그러나 지함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으니

시험 준비로 보면 그들에 훨씬 미치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도 지함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오늘 시제(試題)가 뭐가 될 것 같소이까?"
옆 선비들이 나지막이 소근거리는 소리에도 지함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멀리 둘러선 사람들 속에 형 지번과 명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조정에 출입하는 관리들 대부분이

호기심에 가득찬 얼굴로 멀찌감치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지번은 마치 자신이 시험을 치르는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은 모습이었다. 하

긴 어려서부터 늘 조상을 빛내는 건 영특한 지함의 몫이라고 말해 왔던 형이었다.
저만치 시험관들이 좌정한 쪽에 시제가 나붙었다.
지함은 기분 좋을 정도의 짜릿한 긴장을 느꼈다.
지함은 붓을 들었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글을 써 나갔다.

아침에 민이가 건네준 보자기의 용을 닮은 지함의 글씨가 힘차게 꿈틀거렸다.

한획 한획이 살아나 하늘로 솟구칠 것 같았다.
지함은 파지 한 장 내지 않고 단숨에 붓을 휘둘렀다.

마지막 글자의 획을 끌어당길 때는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지함은 벌떡 일어나,

아직 생각을 정리하고 있거나 이제 겨우 먹을 갈기 시작한

다른 선비들의 곁을 지나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과장의 감독관장은 좌의정 황윤(黃允)이었다.
명세에게 듣기로,

바른 소리를 잘해 여기저기 적이 많으나,

성품은 대쪽처럼 곧은 사람이라고 했다.
들은 대로 황윤의 눈씨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매서웠다.

적은 많아도 적들조차 그 앞에서는 꿈쩍을 하지 못한다는 명세의 말이 과장이 아닐 성싶었다.
"이보게, 어떤가?

좌의정 저 양반이 시험관으로 나온다는 얘길 미리 해줄 걸 그랬나?

하기사 나도 오늘 아침에야 알았네만."
글을 내고 나온 지함에게 명세가 농조로 물었다.
"허허. 시제(試題)가 사람을 가려 나온다던가.

누가 시험관이어도 내 답은 변함없었을 걸세."
지함이 여유있게 응수했다.
"그래, 시험은 잘 치른 겐가?

시제가 까다롭진 않던가?"
"나 같은 사람한테야 까다로운 게 차라리 낫지.
공자왈, 맹자왈, 입으로 외워 떠드는 것이야 나보다 잘할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래도 차분하게 다시 한번 들여다보지 그랬느냐.
아직 시간도 넉넉한데.

네가 제일 먼저 일어섰어."
늘 침착하고 차분한 형 지번이

제일 먼저 시험지를 던져놓고 나온 아우가 불안했던지 얘기에 끼어들었다.
"꼼꼼히 손질을 해야 할 글이 있고,

붓 가는 대로 휘둘러야 맛이 나는 글이 있지요.

이번에는 후자였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형님."
"대체 어떻게 쓰고 나왔길래 그리 큰소리야.

어디 한번 읊어보게나."
"허허. 자네야 어차피 나중에 다 보게 될 게 아닌가.

기다려보게나.

기다림이 커야 기쁨도 큰 법일세."
"형님.

이 친구, 급제는 따논 당상이라는 태도인데요."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성균관에서 수학한 선비도 수두룩한데..."
이른 아침에 시작한 시험은 해가 서산 마루에 기울 무렵이 되어서야 심사가 끝나고 발표가 됐다.

급제자 이름을 거의 다 발표할 때까지 지함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지번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명세까지 초조한 기색인데 지함만은 여유작작했다.
장원 급제자의 이름을 부르기 직전이었다.

해가 기울고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과장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싸고 있는데

지함이 느닷없이 힘차게 좌중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번도, 명세도,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다른 선비들도 눈이 휘둥그래 벌어졌다.
"아니, 저, 저애가..."
지함이 뒤에서부터 절반쯤 앞으로 걸어나갔을 때였다.

우렁찬 목소리가 시험장 안에 울려퍼졌다.

"오늘의 장원 급제. 이, 지, 함."
장원 급제자를 기다리는 풍악이 울렸다.

그때 이미 지함은 시험관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사람이로구만."
"저렇게 거만해서야 장원 급제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험관들도 놀랐는지 바로 앞에 와 서 있는 지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싶은 난감한 얼굴들이었다.
그때였다. 감독관장 황윤이 갑자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허허, 허허허."
지함도 빙그레 웃으며 황윤을 마주보았다.
"이번엔 제법 쓸 만한 호랑이를 하나 잡은 것 같구만그래.

자네는 얼마나 버티려나?"
무슨 말인지 선뜻 헤아리지 못한 지함이 대답을 하지 않자 황윤이 대성 일갈을 내질렀다.
"얼마 만에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될 거냐는 얘길세."
그제야 지함은 빙그레 웃었다.
"감독관장 어르신 이빨이 아직 성한 걸 보니 저도 앞으로 오십 년은 끄떡없겠습니다."
"하하하. 오랜만에 마음에 맞는 수재를 낚았구먼,
하하하. 응?"
순간 황윤은 얼굴에 가득 피워올렸던 웃음을 갑자기 거두었다.
지함이 고개를 돌려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포졸들이 우르르 과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운데 앞장서 온 포졸이 황윤에게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금부도사였다.
"역적을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있으셨습니다.

역적이 이 자리에 있다기에..."
"뭐라고?"
금부도사가 어명이 적힌 문서를 좌의정에게 내보였다.
"자세한 말씀은 따로 의금부 판사가 드릴 것이오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화급히 집행하라는 어명이 있으셔서..."
그 사이에 포졸들은 한 선비를 에워싸고 있었다.
도사가 황윤 앞에서 물러나자

포졸들은 그 선비를 묶어 말에 태우고는 흙먼지를 날리며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과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일시에 조용해졌다.
"아니, 저 사람이?"
순간적으로 뒤로 슬쩍 물러서는 안명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는 사람인가?"
황윤에게서 물러나 명세 옆으로 온 지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아닐세.

내가 사료 정리를 하느라고 잠시 만난 적은 있지만."
명세는 당황한 기색으로 부인했다.
"그만 가세. 죄 지은 게 있는 모양이지."

지함이 가회동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안은 이미 잔치 준비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정삼품인 지번의 녹이래야 자식들과 동생 지함, 내림종 두엇을 거두기에 빠듯해서

철따라 옷 한 벌 해 입히기도 힘든 형편이었는데,

어디서 돈을 구했는지 상 위에 제법 여러 종류의 음식이 올라 있었다.

장원급제 소식이 금세 퍼졌는지 집안엔 축하 손님이 가득했다.
지번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지함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며 명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까지 찾아와
장안의 선비가 다 모여든 것 같았다.
잔치가 끝나기가 무섭게 지함은 교동 명세의 집으로 달려갔다.

대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마당에 벌써 민이가 나와 있었다.

그 옆에서 명세가 웃고 있었다.
"이 사람아, 자네가 올 줄 알고 있었네.

어서 들어오게."
장모가 될 명세의 모친에게 가서 큰절을 올린 지함은 명세와 함께 사랑으로 나왔다.

민이도 따라왔다.
양쪽 집안에서는 벌써 혼삿 날을 잡아놓고 있었다.
지함은 물론이려니와 민이의 나이 역시 이미 혼기를 훨씬 넘어서,

양쪽 집안이 다 급했던 것이다.

사람의 궁합을 보아 9월 24일을 길일로 잡았다.
오늘이 아흐레니, 보름 뒤였다.

지함은 사실 대과 급제보다도 혼사가 더 기다려졌었다.
"아니, 이 좋은 날에 술상이 왜 안 나오는 거지?
내, 나갔다 옴세.

아무 짓 말고 있어야 하네."
명세가 짓궂은 말을 던지며 문을 열고 나갔다.
"허허, 이 사람.

알았으니 멀리 다녀오게."
"아이, 오라버니들도..."
민이가 금세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렸다.
명세는 술상이 나오지 않는다고 계속 투덜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달득이를 불러 말해도 될 것이었지만,
명세는 일부러 자리를 피해준 것이었다.
명세가 나가자마자 지함은 민이를 와락 껴안았다.
민이는 몸을 꿈틀거리면서 지함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그럴수록 지함은 더 힘껏 끌어안았다.

"민이..."
민이가 몸에서 힘을 빼면서 지함의 가슴께로 머리를 묻었다.
"꿈이 아니지요?"
"그럼, 이제 보름만 있으면 우리는 백년 해로를 시작하는 거야."
"백 년씩이나 같이 늙어요?

저는 모란처럼 활짝 피었다가 하룻밤 이슬에 후두둑 떨어지는 꽃잎이 좋아요."
"늙어도 같이 사는 게 좋지."
민이는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민이 꿈대로 오늘 대과를 잘 쳤어.

런데 꿈속에서 민이가 멀리 가더라고?"
"예, 저는 지함 오라버니께 돌아가려고 애를 쓰는데도 발길은 점점 더 멀리 가는 것이었어요.
이상하지요? 괘념치 마세요.

꿈이라는 게 늘 그렇지 않아요?"
"그럼, 그렇고 말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한껏 포옹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속삭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연정을 눅이고 있는데 문밖에서 명세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자, 나 들어가네."
명세가 문을 열자 이어 술상이 따라 들어왔다.
곧 민이가 돌아가고 두 사람만 남아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거나하게 마셨다.
지함은 밤이 이슥해서야 가회동으로 돌아갔다.
다음날부터 지함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원하는 부서에 배치되기 전에도 날마다 입궐해서 익혀야 할 게 번거로울 정도로 많았고,

게다가 혼인날이 코앞으로 바싹 다가왔기 때문에 준비할 일이 많았다.
대궐 안에서는 과장의 감독관장이었던 좌의정 황윤이 오조를 돌아가며

판서들에게 장원 급제자의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고,

지함에게 이것 저것 가르쳐주기도 했다.
황윤,

그는 주로 화담 산방에서 공부를 한 사람으로 이미 인종 재위 때부터 조정에 출입하였다.

그가 화담 산방 출신이라는 것으로,

명종을 둘러싼 윤원형 같은 외척은 신임을 단단히 두고 있었다.

사림이라면 벌써 체질부터 다른 사람들이라고 몰아세우는 외척 세력 윤원형이었다.

그는 도가와 성리학을 두루 섭렵한 황윤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선비라고 생각했다.
황윤은 정통 사림파와는 달리 따로 세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스승 화담 서경덕이 벼슬을 갖지 못한 야인이었기 때문에

조정에 뿌리를 둔 영남 사림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주로 승려와 도사, 천민들로 을사사화를 주도했던 윤원형에게

황윤은 안심할 만한 상대였다.
지함의 혼인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가회동 지번의 집은 홍성에서 올라온 친척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벌써부터 음식 마련으로 온 집안에 갖가지 냄새가 진동을 했다.
지번은 일단 신방을 가회동 집에 차려놓았다.
그리고, 남산골에도 지함의 거처를 마련해 두었다.
가회동에서 형 식구들과 몇 달 함께 살다가 남산골로 가라고 미리 일러주었다.
지번의 집은 목수를 불러 신방을 다시 꾸미느라고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내당 쪽에서도 잔치 준비로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이틀 후면 민이와 혼인을 치른다-.
이제 밤을 두 번만 새면 민이와 한몸이 된다는 사실이 지함은 믿겨지지 않았다.
지함은 멀거니 눈을 뜬 채 어두운 천장을 올려보며 민이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이토록 애절히 그리워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수 있다는
사실이 지함은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 언제 잠이 들었던 것일까,
이른 아침 누군가 급박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함은 잠이 깼다.

아직도 민이의 얼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서

지함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깜깜새벽에 문을 두드린 사람은 명세네 하인 달득이었다.
명세가 기어이 들키고 말았구나.

직감적으로 지함의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도련님, 어서 몸을 숨기십시오. 큰서방님두요."
달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냐, 명세가 어찌 됐느냐?"
"큰일났습니다.

의금부에서 나왔다는 포졸들이 집안에 들이닥쳐 집안 사람을 모조리 묶어갔습니다.
포졸들이 문을 열라고 대문을 두드리자,

명세 도련님이 저를 불러 급히 가회동으로 가서 두 분께 이걸 전하라고 했습니다."
달득이 사지를 덜덜 떨면서 소매에서 서찰을 끄집어냈다.
지함이 펴보니 붉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몹시 서둔 서체로 바람같이 날려 쓴 것이었다.
"특정기가 윤원형에게 발각된 것 같네.

편수관 정해봉이 밀고한 것으로 짐작되네.

일단 몸을 숨길 것,

절대로 형님과 자네 이름을 불지 않을 것이니
문초를 받더라도 전혀 몰랐노라고 끝까지 버티게.
민이를 보내네.

역적의 식구라 핍박이 심할 터이지만 자네가 거두어주게.

훗날 지하에서 만나세."
시간이 없다 보니 손을 깨물어 피로 서한을 쓴 모양이었다.
지함은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민이, 민이 아가씨 어디 있느냐?"
"쉿, 따로 숨어 있습니다."
달득이 지함에게 다가서서 귓속말로 전했다.

벌써 마당에는 지번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모두 몰려나와 있었다.
지함은 방으로 뛰어들어가 옷부터 걸쳐입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포졸들이 집을 빙 둘러 지키고 서 있는데

저는 그들보다 앞서서 날래게 담을 타넘어 도망친 것입니다.

어찌 됐든 도련님께는 미리 알려드려야 된다 싶어서..."
달득은 문밖에서 계속 상황을 보고하였다.
지함은 옷을 입으면서도 사건의 전말을 헤아려보았다.

정해봉. 춘추관 편수관으로 명세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아는 사람,

바로 윤원형의 오른팔 정순붕 그 자의 수하였다.
명세가 내의원이다,

상궁이다 찾아다니면서 인종의 죽음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고 다닐 때,

정 편수관은 이미 한 건을 노리고 있었다.

언제나 감시의 눈알을 부라리고 있던 그에게 안명세가 걸려든 것이었다.
정해봉은 즉각 정순붕에게 달려갔다.

이야기를 들은 정순붕 역시 즉각 윤원형에게 달려갔다.
"대감 마님,

이번 기회에 지난번에 처치하지 못한 자들까지 몰아서 해치우는 게 어떨지요?"
윤원형은 대찬성이었다.

다시 사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을사사화로 괴이한 말이 떠돌고,

삼강오륜이 어떠니 하면서 연일 상소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마다 윤원형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이번 기회에 그런 상소문을 상습적으로 올려보내는 유림까지 처치해버리겠다는 작전이 섰다.
"그 기사관(記事官) 놈 하는 대로 내버려두게.
그리고 다른 놈들이 모조리 걸려들게 만들게.

역으로 그 자가 찾아다니는 상궁이나 의원에게 미리 우리 쪽 줄을 놓아서

무엇을 묻고 다니는지 소상히 알아내도록 하게. 이번 기회에 뜨거운 맛을 다시 한번 보여주리라."
그래서 안명세가 사화의 진상을 조사하러 다니는 사이,

정 편수관은 그 뒤에 사람을 붙여 내용을 파악하게 하였다.

그리고 안명세가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명단을 적어 뒷조사를 해놓았다.
그러다가 안명세가 몰래 사초(史草)를 꾸며 특정기(特定記)라는 이름으로 끼워넣자,

정 편수관은 짐짓 모르는 척하고 그 사초를 사고(史庫)로 보내도록 하였다.

마침내 증거가 마련된 것이었다.
마침내 정순붕은 의금부에 밀명을 내려 사초 수레를 윤원형의 집으로 압송토록 했다.

결국 사초더미에서 특정기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아무도 발설하지 말고 누구누구를 잡아들일 건가 빈틈없이 준비하라.

어명은 필요없다.

내가 어명을 내린다."
마침내 윤원형의 집에서 거사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건에 연루시켜야 할 사림을 하나씩 거명하는 회의가 계속되었다.
그동안 윤원형의 집권에 불만을 가졌거나

노골적인 상소를 올린 선비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올랐다.
안명세의 집에 의금부 포졸들이 들이닥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

안명세는 그런 낌새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함은 서둘러 옷을 입고 마당에 내려섰다.
"같이 가보세."
"아이구, 도련님.

지금 가보셔야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갔다가 도련님까지 봉변을 당하시면 어쩝니까?

몸을 숨기시라는 전갈을 전하기 위해 소인이 목숨 걸고 달려왔는데

오히려 호랑이 굴로 가시겠다니요.

아이구, 내일이면 잔치 치를 집에 이게 웬 날벼락인지..."
지함이 달득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뛰어 마당을 가로질러가자 뒤에서 지번이 불렀다.
"지함아, 달득이 말을 듣거라.

이리 들어오너라.
달득이 너도."
지번은 급히 사랑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달득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어디 있느냐?"
지번이 달득에게 급히 물었다.
달득이 문을 열어 바깥을 한번 살핀 뒤 모기 만한 소리로 말했다.
"함께 나오다가는 둘 다 잡힐 것 같아서 집안에 숨겨 놓았습니다.

마침 김장 때 쓰려고 땅에 묻어 놓은 빈 독이 있어 그 속에 들어가시게 하고,

제가 뚜껑을 덮었습니다.

그런 뒤에 저는 나왔습니다."
"발각되지 않을 게 틀림없느냐?"
"예, 그곳에는 그것 말고도 독이 열 개나 더 있습니다.

그 위에 지푸라기를 흐트려놓아서 쉽게 발각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러고 나서 저는 곧바로 뒷집으로 담을 넘어 들어가

다시 옆집 담을 넘어 도망쳐 왔습니다.

한 발만 더 늦었어도 잡혔을 것이옵니다.

뒷집 담을 넘을 때 이미 포졸들이 그 집 대문을 들어서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오냐, 잘했다.

지함아, 내가 너를 분가시키려고 마련해 놓은 남산골 집을 기억하렷다."
"예, 형님."
"지금 당장 달득이와 함께 그 집으로 가서 몸을 숨겨라.

달득이는 명세네에서 포졸들이 물러가는 대로
아는 사람을 시키든 네가 직접 가든 해서 아가씨를 구해내거라.

지함아, 이미 새로운 운명이 닥쳐왔다.
네가 벼슬을 하고 결혼을 하고,

이런 순탄한 길은 이미 끝났다.

앞으로 어떤 운명이 닥치든 네가 알아서 꾸려나가거라.
내가 관련된 사실이 밝혀지면 우리 두 형제의 목숨을 보전키 어려울 것인즉,

너 하나라도 남아서 혈손이 되어야 한다.

명세가 고문에 못 이겨 모든 게 탄로나면 나도 잡혀갈 것이 뻔하다.

그렇다 해도 나는 여한없이 죽을 것이다.

어차피 이 나라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눈 감고,

귀 막아야 하니 차라리 잘 되었다.

나는 이 집안에 남아 있겠다.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몸 조심하고 잘 살거라."
지번은 더 이상 말을 할 시간이 없다고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촌음이 황급하다."
지함은 형의 손에 떠밀려 사랑방을 나와 담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담에 몸을 붙이고 조금씩 발을 떼어 옮겨갔다.

두어 집 담을 지나 골목길을 꺾어들었을 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이 지번을 잡으러 오는 포졸들이었다.

지함은 재빨리 달득의 어깨를 감아안고

비스듬히 열려 있는 남의 집 대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지번의 집이 멀기는 했으나 어렴풋이 지붕은 보였다.
지함은 머리를 낮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어서 가십시다.

이러다가 잡히면 큰일납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사태를 지켜보자."
곧 지번의 집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지함의 머리 속으로 형 지번, 형수 조카 산해의 얼굴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도련님, 어서요."
달득이 다시 지함을 채근했다.

그러나 지함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눈을 부릅뜬 채 형의 집을 바라다보았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포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지함은 숨었던 곳에서 뛰쳐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지함은 남산골 집에 몸을 숨겼다.

달득은 교동 명세네로 다시 갔다.

숨겨주었던 민이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날 해거름, 달득은 혼자서 남산골로 돌아왔다.
"어찌 되었느냐?

아가씨는 어쩌고 너만 혼자 돌아왔느냐?"
"아니 계셨습니다.

흑흑흑. 독이란 독은 모두 깨지고 아가씨를 숨겼던 독도 파헤쳐진 채 깨져 있었습니다."
"뭐라구? 포졸들은 물러갔더냐?"

"지킬 게 있어야 포졸들이 남아 있지요.

교동 댁은 하룻새에 쥐새끼 한 마리 없는 흉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함은 애를 태우면서 며칠을 남산골에 숨어 있었다.
대엿새가 지난 뒤 지함은 달득에게 가회동 지번의 집 동정을 살피고 오라고 시키고,

자신은 변복을 하고 교동 명세의 집으로 향했다.
어떻게 명세의 집까지 달려왔는지 지함은 기억이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멈추어서서 정신을 차렸을 때,
늦가을 바람에 삐그덕거리는 명세네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지함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문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방마다 문이 열려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방이고 마루고 온통 흙발이 지나간 자국 투성이었다.

문짝은 빠져 있거나 창호지가 몰골 사납게 찢겨져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었고,

창고고 어디고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은 다 헤쳐져 있었다.
민이가 숨어 있었다는 독을 보니 역시 달득의 말대로 다 깨어져 있었다.
무엇에 이끌리듯 지함은 내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안 명세의 집을 드나들었지만,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어느 방이 민이의 거처였을까?
지함은 문이 열린 이방 저방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대청 옆 건넌방에 방금 벗어놓은 듯한 여인네의 쪽빛 치마가

스르르 흘러내린 모습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민이가 갈아입고 떠난 옷이었을까?
보자기에 단정하게 싸인 보따리가 몇 개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혼수인 듯했다.

여기저기 혼사를 앞둔 집의 흔적이 보였다.
운명이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운명이 아닌가.
언젠가 명세와 조광조에 얽힌 사화를 얘기하면서 지함이 제법 의연하게 했던 말이었다.

그 말대로 운명은 전혀 예측하지 않은 곳에서 불쑥 찾아와
느닷없이 지함에게서 가장 가까운 사람 둘을 빼앗아 가버렸다.
후원에는 민이가 좋아하는 모란꽃 시든 대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곳에서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일까.

주위가 완전히 어둠에 잠기고 스산하던 바람이 점점 차갑게 바뀌어 옷깃 속을 파고들었다.
지함은 여전히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느낌도 없이 왔던 길을 되밟아 나왔다.
부엌 앞을 지날 때 무언가 물컹하게 발 밑에서 밟혔다.
지함은 천천히 구부리고 앉아 그것을 살펴보았다.
흐릿한 달빛에 드러난 것은 결혼식에 쓰려고 담가두었을 떡쌀이 땅바닥에 버려져 썩은 것이었다.
그제야 멈추었던 시간이 순식간에 내달리며,

지함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지함은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명세, 명세야."
목이 터져라 하고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꼼짝마라."
지함이 뒤를 돌아다보니 어느새 포졸 두 명이 지함에게 창을 겨누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이지함이렷다. 포승을 받아라."
"무슨 죄로?"
"안명세와 공모한 죄다."
"난 그런 적 없다. 물러가라."
지함이 호통을 치자 포졸들이 한꺼번에 지함에게 달려들었다.

지함은 몸을 날래게 움직여 포졸들을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포졸들의 몸도 꽤 날랜 편이어서 지함이 손을 털고 일어났을 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지함은 급히 명세의 집을 빠져나와 은신처인 남산골로 돌아갔다.

가회동 지번의 집 형편을 알아보러 갔던 달득이 이미 돌아와 있었다.
"도련님, 의복이 흙투성이이신데..."
"그래, 가회동 소식은?"
"저어, 형님께서는 의금부에 끌려가 호되게 문초를 당했답니다.

지금은 관직을 삭탈당한 채 집안에만 갇혀 있답니다."
"명세, 이 친구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구나."
지함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지번은 지함이 집을 빠져나오자마자 포졸들에 이끌려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

러나 포승에 묶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식솔들은 압송당하지 않았다.

다만 포졸 두 명이 남아 가족들의 집 밖 출입을 금지했다.
지번은 의관을 정제한 채 의금부 도사 앞으로 나아갔다.

벌써 의금부 뜰에는 이번 건으로 잡혀온 사람이 수십 명도 넘었다.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투를 잘린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춘추관 내의 사관 세 명, 독살 증언을 한 의원 두 명, 상궁 세 명,
그리고 관직을 알 수 없는 선비들이 줄줄이 포승에 묶여 있었다.

이 선비들은 윤원형 일파가 을사사화 때 미처 제거하지 못했던 사림들로,

이 사건에 붙여서 한꺼번에 잡아들인 것이었다.
지번은 혐의가 분명치 않았고 윤원형 일파와 적대적인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으므로

원래 체포 대상에서 제외되었었다. 그

러나 편수관 정해봉이 그도 잡아들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잡혀간 것이었다.
문초가 시작되었다.
"죄인은 듣거라, 여기 이 사람이 역적질에 가담했더냐?"
의금부 도사 앞에는 고문으로 초주검이 된 안명세가 묶여 있었다.
명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자 포졸 하나가 명세의 머리채를 홱 잡아채어 뒤로 젖혔다.
명세가 힘겹게 눈을 떴다.

순간 눈빛이 번쩍 했으나
명세는 이내 눈을 감았다.
"이 사람은 아니오."
"네 여동생과 이 부제조의 아우가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냐?"
"사실이오."
"네 여동생은 지금 어디 있느냐?"
"모르오."
"독한 놈, 모가지가 잘릴 걸 알고 있구나.

그년은 반드시 잡아내고야 말겠다."
"......"
도사는 지번에게 물었다.
"부제조는 저 죄인과 동향이오?"
"그렇소."
"저 죄인과 관련이 없소?"
지번은 멈칫했다.

명세는 고개를 떨구어 아예 땅바닥에 대고 있었다.
도사가 다시 한번 묻자,

지번은 그제서야 대답을 했다.
"없...소..."
"동향이고 잘 아는 사이이고,

양가가 혼사를 치를 사이인데 이런 역적지사를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지번은 머리를 수그리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도사는 종5품, 지번에게는 까마득히 저 아래에 있는 품계.

그러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말 한 마디로
포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포승을 던지게 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번은 다시 한번 나직하게 대답했다.
"없......소..."
"아우 이지함이 안명세와 죽마고우라던데 그래도 이 사건을 몰랐단 말이오?"
"내 아우는 어려서부터 역학 잡술에 관심이 많아 조정 일에는 관심이 없는 아이오.

대과를 준비하느라고 명세와는 만날 새도 별로 없었소.
대과가 끝난 지 겨우 며칠,

그후 며칠간은 혼사 때문에 서로 얼굴을 본 적은 있으나

특정기니 뭐니 이야기할 새가 없었소."
"거짓말 마시오."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버젓이 혼사를 준비했단 말이오?"
그때 안명세가 도사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보시오.

나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마시오.

혼자서 이 일을 했소.

무고한 사람들을 자꾸 잡아들이지 마시오.

내가 죽어서라도 그대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할 것이오.
나는 비뚤어진 이 나라의 왕통을 후손들에게 고발하기 위해 사초를 엮었을 뿐,

누가 나를 사주하거나 내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한 적은 없소.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

연산군의 왕위를 찬탈한 중종,

인종의 왕위를 찬탈한 명종,

나는 이 사실을 후대에 알려 다시는 피비린내나는 역모(逆謀)와
사화(士禍)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고자 한 것이오."
"죄인은 입을 닥치거라.

포졸들은 듣거라.

죄인의 목숨줄을 끊어도 좋으니 매우 쳐라."
도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포졸들의 곤봉이 안명세의 몸 위로 무수히 떨어졌다.
"으윽."
명세가 다시 땅바닥에 쓰러졌다.
곤봉이 떨어질 때마다 명세의 어깨며 등줄기를 타고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지번은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부제조에게 묻소.

저런 중죄인을 옆에다 두고 눈이 멀고 귀가 먹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니 참 딱도 하시오."
속에서는 불덩이가 욱 하고 솟구쳤지만,

지번은 한숨만 한 차례 크게 내뿜었다.
"이지함을 찾아내시오.

그 자는 틀림없이 죄인과 내통했을 것인즉."
옆에 서 있던 편수관 정해봉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는지 나도 모르오.

혼약을 한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그 아인들 정신이 있겠소? 나도 모르오."
"부제조 어른, 제가(濟家) 한번 서투십니다그려.
대과에 장원급제한 아우라서 숨겼소? 걱정 마오.

내가 잡아오리다."
"그 아이는 죄가 없소."
"그러면 부제조 어른이 죄를 대신 받을 것이오?
철저히 조사하여 역모가 드러나면 준엄하게 다룰 것이오.

어명을 기다리시오."
그날부터 지번은 집안에 갇혀 어명을 기다려야 했다.

집안 사람의 안팎 출입조차 의금부에서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이튿날, 부제조직에서 면직시킨다는 연락이 이조에서 날아왔다.

지함이 남산골에 숨어 있는 동안에도

세월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흘러 해가 바뀌었다.

달득은 사람들 눈을 피해 계속 가회동을 기웃거려 새로운 소식을 가져오곤 했다.
어느 날, 가회동에 갔던 달득이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의금부 판사가 특정기 사건의 전말을 명종에게 보고하였고,

명종의 입을 대신하여 윤원형이 결재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특정기를 직접 쓴 명세 도련님,

그리고 명종 독살 내용을 발설한 의원, 상궁,

그리고 을사사화 때 처리되지 않은 일부 사림 등 해서

모두 마흔 명을 참수케 하였답니다.

그리고 형님과 춘추관의 편수관 두 명, 기사관 세 명,

명세 도련님과 안면이 있으면서 윤원형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림들을 합쳐

모두 예순 명을 오지, 벽지로 좌천시켰답니다."
"참수는 언제 한다던가?"
"이월 스무닷새 날 운종가에 목을 건답니다.

장대에 높이 달아..."
"민이 아가씨 소식은 들리지 않더냐?"
"여자들은 모두 종이 되어 어디론지 끌려갔다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통..."
"으으으..."
지함은 주먹을 으깨지도록 꽉 쥐었다.
명세가 마침내 처형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얼마 후면 이 세상을 떠나고 말게 되었다.

죽어서도 사나운 꼴로 장대 끝에 매달려 운종가 네거리에 내걸려야 한다.
지함은 친구의 목숨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나가서 볼 수도 없었다.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제 목숨 부지하려면 남산골에 숨어 있는 것이 전부일 뿐.
게다가 민이의 소식도 감감하였다.

민이를 끌고간 사람이 누구인지,

어느 집의 종으로 넘어갔는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이런 때에 대과 장원급제 같은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함은 연일 한숨과 통곡으로 나날을 보냈지만,
남산골은 여전히 사람들 살아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특정기 사건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시끌벅적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담너머로 들려오는 삶의 소리에 지함은 더 번민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도 저렇게 서로 모르는 사이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서글펐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태어난다.

누구는 행복에 겨워 쇠똥을 보고도 즐거워하고,

누구는 꽃단풍을 보고도 근심한다.

이 순간, 윤원형 같은 외척 세력은 저들의 권력이 더 확고해졌음을 자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발밑에는 안명세, 의원, 상궁의 목이 뒹굴게 될 것이고.
지함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앞집이고 뒷집이고 때가 되면 밥하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행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나면 영락없이 개가 짖어댄다.
"하늘은 도대체 죽었는가,

하늘은 죽었단 말인가!"
지함은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처참하게 데려갈 목숨이었다면 왜 태어나게 했단 말인가."
지함은 방바닥을 두드리며 피눈물을 뿌렸다.

그러나 그래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명세가 참수당하는 이월 스무닷새가 되었다.
지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방문을 나서자,
그동안 바깥 동정을 탐문해다 알려주던 달득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도련님, 가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의금부 포졸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큰일나십니다."
"걱정 말게.

명세가 떠난 모습을 보아야겠네.
물러서게."
달득을 밀어대며 나가려 하자,

달득은 지함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도련님, 안 되옵니다."
"놓게. 어차피 명세는 죽었네."
지함은 달득의 손을 뿌리치고 남산골 집을 나섰다.
정오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청계천을 지나 운종가에 이르자 멀리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명세가 거기에 있었다.

머리 몇 개가 장대에 꽂혀 차가운 가을바람에 머리칼을 날리고 있었다.

가운데에 명세가 있었다.
사관으로서 올곧은 길을 가려던 젊은 선비 안명세.
무신년(戊申年, 1548) 2월 25일,

그가 서른한 살의 아까운 나이에 참수당했던 것이다.

지함은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끓어서 더이상 볼 수 없었다.
"내가 할 일,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지함은 남산골로 돌아갔다.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났는지 지번의 가회동 집을 막고 서 있던 포졸들도 돌아갔다.
얼마 후 지번이 남산골로 찾아왔다.

지번은 지함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지번의 양볼은 움푹 꺼지고 광대뼈가 불거져 흡사 해골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지함아. 네게 뭐라 할 말이 없구나.

대체 진실이란 무엇이냐?

나도 모르겠구나.

그저 모든 것을 떠나고 싶을 뿐이다."
지함은 형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멍한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허망하지요, 모든 것이 헛되지요.

진실이 뭐냐구요?
명세가 죽었다는 것,

민이가 누군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 단지 그것일 뿐이지요.
지함은 눈물을 삼키듯 속으로 말을 삼키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방황이 어느덧 일 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랜 추억에 잠겨 있던 지함은 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닥쳤다.

술에 취해 밤 늦도록 흥청거리던 취객들이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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