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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기방에서 찾은 법열(法悅)-소설^토정비결(上-5)

정휴는 물어물어 지함의 맏형인 지번(之蕃)의 가회동 집을 찾아갔다.

열네 살에 아버지 치(穉)를 잃고 열여섯 살에 어머니 김 씨를 잃은 지함은

맏형 지번을 부모처럼 따랐다.

학문도 그에게서 배웠고 신변 대소사도 모두 지번과 의논하였다.
정휴는 지번의 집이 커다란 양반가일 거라고 상상했었으나,

이조에 출입하는 정3품 부제조(副提調)의 집치곤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정휴는 문을 두드려 지함을 찾았다.

그러나
안에서는 지금 계시지 않다는 대답만 들려올 뿐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정휴는 다시 문을 두드리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나는 홍성에서 지함 도련님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오.

지금 안 계시다면 말씀이라도 전해주시오."
그러자 대문이 열리면서 하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뉘신가 했더니..."
문을 여는 하인은 옛적 홍성에서부터 낯이 익은 사이였다.

정휴가 홍성 지함의 집을 처음 찾았을 때
문전박대했던 바로 그 하인이었다.
"그래 어디를 가셨다는 건가요?

어째 이리 집안이 조용한가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셨군요.

지금 제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도 천행이올시다."
"어서 말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요?"
하인은 대문을 얼른 닫아걸고는 내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집안이 지금 풍비박산 났습니다."
"뭐라고요?"
"안명세 도련님 아시지요?

우리 도련님하고 맨날 붙어다니던 그 도련님 말이우."
"알고 말고요."
"그이가 참수를 당했습니다."
"예에?"
"그뿐만 아니라 그 댁 사람들은 모조리 주륙을 당했습니다.

내당 마님과 민이 아가씨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는데,

어디론가 종으로 끌려갔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우리 큰서방님도 금부도사가 들이닥쳐 잡아갔습지요.

그러더니 벼슬도 빼앗기고 몇 달이나 집 안에 갇혀 있다가

얼마 전에야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또 무슨 화가 미칠지 몰라서 큰서방님은 마님과 산해 아드님을 데리고

홍성집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지함 형님은요?"
"혼사를 눈앞에 두고 친구 잃고

혼약한 아가씨마저 잃었으니 정신이 온전할 리가 있나요.

연일 술타령이랍니다."
"그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인은 대문을 성큼 나서며 정휴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한참 길을 가던 하인이 문득 정휴를 돌아보면서 아래위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제사 승복을 한 정휴의 차림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어디 계셨길래 이 엄청난 소식도 듣지 못했단 말씀이오?"
"산중에 있었소."
"하필 이런 어수선한 세상에 출가를 하시다니.
하기야 어수선하니까 출가한다지만,

지나가는 중 붙잡아 흠씬 때려줘도 나무랄 사람 하나 없는 세상에
하필 그 천한 중노릇을."
하기사 하인들도 알 만큼 중의 지위는 형편없었다.
정휴는 하인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번 집의 하인과 함께 들어선 청진동 골목길에는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어디선가 애조띤 가야금 소리가 흘러나왔다.

간혹 젊은 처녀들의 간드러진 노랫가락이 담을 넘어 길까지 흘러나왔다.
"안 선비님이 끔찍하게 돌아가시고 나서 도련님이 완전히 달라지셨다오.

게다가 민이 아가씨마저 어디서 어떤 수모를 받으며

종살이를 하고 계신지 모르니 오죽 하실려구요.

벌써 몇 달째 기방에서 살다시피 하신다오."
정휴가 붙잡을 새도 없이 하인은 어느 집 대문으로 불쑥 들어가버렸다.
정휴는 문간에 멈칫 섰다.

그 집에서 처녀들의 간들간들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갔던 하인이 다시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그 말만을 남기고 하인은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온갖 감미로운 소리를 음미하듯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한동안 망설이던 정휴는 이윽고 대문을 힘껏 밀치고 들어섰다.
술상을 내어가던 여인네가 정휴를 돌아보았다.

곱게 분칠하여 희디흰 얼굴,

동백기름을 발라 반듯하게 쪽찐 머리,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아래로 둥그스름하게 부풀어오른 엉덩이.
정휴는 자기도 모르게 큰 숨을 들이마셨다.

"이 선비, 어디 계시오?"
"이 선비라니요? 어느 이 선비를 말씀하시는지요?
여기는 방마다 이 선비님이랍니다, 스님."
여인의 가느다란 눈썹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때 방문이 하나 열리면서 기생인 듯한 여인이 나왔다.
"이쪽으로 드십시오."
여인은 정휴를 기다리기나 하고 있었던 듯 자연스레 맞이했다.
처음 보았던 여인은 마루에 술상을 내려놓고
치맛자락을 살큼 추켜올리더니 엉덩이를 흔들며 마당을 가로질러 걸었다.
정휴는 여인이 열어주는 대로 방안에 들어섰다.
지함이 거기 있었다.
정휴를 안내한 여인은 지함의 옆자리로 가서 다소곳이 앉았다.
지함은 한참 만에야 고개를 들어 서 있는 정휴를 바라보았다.
"앉게나."
정휴를 바라보는 지함의 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절망에 젖은 눈빛 같기도 했다.

"역시 입산했던 게로군. 그래 금맥이라도 찾아냈나,
아니면 은맥이라도 잡은 겐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형님은 무엇을
찾으셨습니까?"
"나? 무엇을 찾았느냐고?"
느닷없이 지함은 정휴를 안내했던 여인을 부둥켜안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지함은 한동안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공허한 웃음소리만 방을 울릴 뿐,

지함의 눈도 입도 일그러져 있었다.
웃음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지함은 여인을 안았던 손을 풀었다.

"찾긴 찾았지.

바로 이 여자 선화를 찾았네.

이래 봬도 선화는 기쁨 덩어리라네.

언제나 나를 기쁨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지.

어떤가? 자네가 찾은 길보다 나은 셈이 아닌가.

자네의 길이래야 뼈를 깎는 고통과 수도와 절제만이 있을 테니까 말일세."
"그 대신 법열(法悅)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쾌락보다도 더 큰 것이지요.

형님의 기쁨은 밤이 지나면 사라지는 어둠과 같지 않습니까?"
법열(法悅),

정휴는 그런 것을 한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느낄 만한 자격도 갖지 못한 행자 아닌가.
정휴는 말을 해놓고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밤의 쾌락을 아는가?

자네는 숫총각이 아니던가? "
지함은 짓궂은 눈초리로 정휴를 탐색하듯 건네다 보았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샅샅이 겪어보아야만 진리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지함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선화라는 기생의 손을 잡아끌면서 입가의 미소를 거두었다.
"선화야. 네 안의 세계를 펼쳐보이거라."
선화는 자목련 빛깔의 저고리 앞섶을 만지작거리며 지함을 쳐다보았다.

별로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함의 말을 거부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진심으로 내린 분부인지 몰라서 미적거리는 표정이었다.
놀란 건 정휴였다.

도대체 지함은 안명세의 일로 얼마나 변했길래 이러는 것일까?
홍성현에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서 여자 얘기가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지함은 여자를 앞에 두고 기쁨을 찾았노라고 자신있게 얘기하고 있다.

게다가 아무리 기생이라지만 정휴가 있는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저 여인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기생이라 한들 남자 앞에서 옷을 벗는 일이 어디 예삿 일인가?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하물며 사랑하는 이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남자까지 함께 한 자리임에야.
그제야 정휴는 지함의 곁에 바싹 붙어앉은 선화라는
여자의 생김새를 자세하게 뜯어보았다.

빨아들일 듯한 눈빛,

착 감겨들 것만 같은 몸매,

무엇보다 남자의 피를 끓게 하는 색기(色氣)가 흘렀다.
"듣지 못했느냐?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게냐?"
꽃봉오리가 살짝 벌어지듯 기생 선화의 입에서 웃음이 살포시 피어났다.

황홀한 웃음이었다.
선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휴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휴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것
같기도 한 묘한 시선을 하고 선화는 서서히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소리도 없이 저고리 앞자락이 스르르 벌어졌다.
선화는 다시 꽉 동여맨 치마말기를 풀어 내렸다.
그러자 꾹꾹 눌려 있던 젖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는 모습이 하얀 속치마 아래에 드러났다.
정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에선가 급히 불끈 움직이는 기운이 느껴졌다.
온몸의 피가 마구 달려가듯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눈을 뜨게.

자네와 다를 것 없는 인간의 몸일세.
자네는 왜 진실 앞에서 눈을 감는 겐가?"
이것이 진실이라구?
정휴의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치솟았다.

지함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선화의 터질 듯한 젖가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뜨라니까."
지함의 고함에 정휴는 눈을 번쩍 떴다.
바로 눈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선화가 서 있었다.

아무도 없는 빈방인 것처럼 선화의 얼굴에는 한 가닥의 부끄러움도 거리낌도 없었다.

정휴의 얼굴만 화로를 뒤집어쓴 듯 화끈거릴 뿐이었다.
연한 복사빛이 자르르 흐르는 살결.

가슴 위로 봉긋 솟아오른 젖무덤.

툭 터져나올 것 같은 유방 한가운데에 젖꼭지가 오만하게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탱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이 세상에 이토록 가슴 떨리게 하는 것도 있었던가.
처음 대하는 것이지만,

오래 전부터 보아온 것처럼 다정해 보였고,

아름답기만 했다.
정휴의 시선은 차츰 아래로 향했다.
가슴에서 허리쪽으로 굽어드는 선이 물결보다 더 부드러웠다.
정휴의 시선은 저절로 더 밑으로 떨어져갔다.
꿀꺽.

정휴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정휴의 눈길은 곧바로 거뭇한 음부에 닿았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어떤 것인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정휴는 시선을 더 내렸다.
허리에서 물이 흐르듯 흘러내린 다리 하며 쭉 빠진 종아리선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정휴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눈길이 자꾸 그리로 향했다.
윤기 있는 털빛,

그 갈라진 사이로 내보이는 속살이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몸 어느 구석에 이런 힘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정휴는 자신의 남성이 힘차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온몸이 맹수를 만난 사냥꾼처럼,

아니 백척간두에 서서 한걸음 내딛는 것처럼 긴장되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힘의 축적이었다.
"이보게, 정휴.

여체를 누가 고뇌의 덩어리라고 했던가.

아닐세. 기쁨의 덩어리일세.

한번 손을 대어 만져보게나."
정휴는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무언가 맹렬한 기세로 자신의 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순간 정휴는 이미 그 방을 박차고 나와

길거리로 내달리고 있었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몸은 차디찬 겨울바람에도 좀처럼 식지 않았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염불이 정휴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차디찬 알갱이가 얼굴에 와 부딪쳤다.

눈발이었다.
눈이 녹는 것인지,

아니면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눈께가 축축히 젖어들었다.
골목길에는 가야금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하고,
기생들의 교성이 넘실대기도 하였다.
눈이 하염없이 내렸다.

머리 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정휴는 어느 집 담벼락에 머리를 찧었다.

그래도 선화의 나체가 춤을 추고 있는 환영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눈은 계속 내렸다.
떠나야 했다.

이런 미혹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었다.
떠나야 했다.
그러나 정휴는 그곳을 떠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무언가 강한 힘이 정휴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정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발길을 되돌렸다.
여기에서 물러나는 것은 지함의 말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지함의 유혹 앞에서 정휴는 무릎을 꿇고 만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자의 몸을 지함은 인간의 몸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휴는 인간이기 이전에 여자로 보았고,

한 마리의 수컷으로서 무너져버렸다.
지함의 말대로 그것이 단지 인간의 몸일 뿐일 수도 있었다.

지고한 진실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두 해 동안 산사에 있으면서 정휴는 세상의 모든 미련과 미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불목하니 노릇을 묵묵히 해왔다.

산중에 있을 때는 그까짓 속세의 미망쯤은 거의 다 벗어났다고 믿었다.

끊을 수 없는 구도자의 고뇌에 비한다면야 그까짓 세속의 일,

여색 같은 것쯤은 문제될 것도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몸 속 어느 구석에 그렇게 강렬한 욕망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온전히 자기의 것이라고 믿었던 몸과 마음이

처음 대하는 타인처럼 낯설기 짝이 없었다.
눈발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어둠에 잠긴 남산이 눈을 맞자 희끄무레하게 되살아났다.
눈을 허옇게 뒤집어쓴 정휴가 다시 지함이 있는 방을 찾았을 때,

지함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술을 들이키는 중이었다.

그러나 옆에 여자는 없었다.
정휴는 말없이 지함의 앞으로 가 앉았다.
지함 역시 말없이 술잔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휴는 술상 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지함이 건네는 술잔을 받았다.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얼마나 술잔을 주고 받았을까?
정휴는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술잔도 지함도 사방의 벽도 빙빙 돌고 있었다.
지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함이 흔들리는 것인지 정휴의 눈이 흔들리는 것인지,

지함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정휴는 벽에 몸을 기대고 스르르 무너졌다.

졸음이 몰려왔다.
사르륵. 사르륵.
눈 내리는 소리일까?

아니 아까 그 선화라는 기생이 옷 벗는 소리 같기도 했다.
눈을 떠야지, 눈을 떠야지.
그러나 정휴는 점점 더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타는 듯한 갈증에 정휴는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면 기다렸다는 듯 들려와야 할 방장 스님의 기침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용화사에서는 늘 방장 옆방에서 시자 노릇까지 도맡아 했기 때문에
한밤중에도 잠을 깊이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뒤통수가 빠개질 듯 아팠다.
자리끼를 찾으려고 팔을 움직이던 정휴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웬 여인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매끄러운 맨어깨가 이불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었다.
정휴는 방을 휘 둘러보았다.

이태백의 시구가 적힌 병풍이 한쪽 벽을 가리고 있었고,

원앙금침같이 물색 고운 이불이 방 한가운데에 깔려 있고,

그 안에 여인이 누워 자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휴는 엊저녁,

지함과 함께 한 술자리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지함이 밖으로 나간 후 벽에 몸을 기댔던 것만이 어슴푸레 기억났다.

그리고 눈 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었다.

선화가 옷 벗는 소리 같다고도 생각했는데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싸한 냉기가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가사를 모조리 벗고 있었다.

정휴는 부산하게 가사를 챙겨 입었다.
정휴는 여인의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여인의 하얀 어깨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대체 이 여인과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뇌리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꿈도 없이 깊은 잠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휴는 난생 처음 여인의 몸을 취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함이 보낸 여인임에 틀림없었다.
지함은 무얼 기대하는 것일까?

화두에 맞서서 도를 구하듯 여체에 맞서보라는 뜻인가.

도대체 무얼 얻으라는 것인가.

그는 그렇게 해서 무얼 얻었단 말인가?
여인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하얀 어깨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정휴는 떨리는 손으로 여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여인이 가녀린 손으로 정휴의 손을 감쌌다.

따뜻한 손이었다.
여인이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윽한 눈길로 정휴를 올려다보며 정휴의 손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럽고 따뜻한 여인의 살이 거기에 있었다.
여인은 정휴의 손을 잡고 제 몸을 어루만지게 했다.
불룩한 젖무덤이 한손에 들어왔다.

오똑 선 유두가 느껴졌다.

매끄러운 허리를 지나 푸근한 배 위에 손이 닿자,

여인은 거기에서 정휴의 손을 놓았다.
이번엔 정휴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두툼한 불두덩,

그리고 까실까실한 거웃.
정휴의 숨결은 걷잡을 수 없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아랫도리가 힘차게 일어났다.

폭풍처럼,

번개처럼.
정휴는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알 수  없었다.

진리를 깨쳐보겠다는 분발심(奮發心),

아마 그것도 지금 정휴의 몸에 솟구치는 욕망보다 더 강렬하지는 못하리라.
여인이 정휴의 가사 고름을 한 손으로 풀었다.
그리고 이불을 쳐들고 정휴의 몸을 잡아끌었다.
정휴는 여인이 이끄는 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인의 몸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법열(法悅),

그런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느낌이리라.

생사를 뛰어넘는 희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정휴는 그대로 여인의 몸 속으로 함몰해 들어갔다.
자신의 온몸이 여인의 몸 속으로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여인의 몸 위에서 몸부림을 치며,

생과 사를 넘나들며 모든 기력을 쏟아부은 정휴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여인의 젖무덤에 머리를 묻었다.
여인은 어린 아기를 보듬듯 한참 동안 정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팔을 떨어뜨린 채 어느새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정휴는 잠든 여인을 보며 조용히 가사를 챙겨 입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었다.
바깥은 온통 은색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여자를 접한 밤 사이 눈은 끊임없이 내렸던 것이다.
겨울 새벽의 짙은 어둠과 그 어둠을 감싸 안은 하얀 눈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세상은 더없이 고즈넉했다.
정휴는 아직 어느 누구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눈을 밟으며 마당을 거닐었다.

가지 많은 매화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연못이 눈을 뒤집어쓴 채 정휴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웬일일까.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이 허탈감은.

그리고 패배감은.
여인의 몸을 취하는 동안에는 그것이 이 세상 모든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여인과 떨어져 있는 지금은 허무하기만 했다.

스산한 바람이 가슴속을 훑고 지나갔다.
정휴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어느새 일어나 자리를 치우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동작으로 여인은 정휴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올렸다.
정휴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여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선화처럼 강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자그마하면서도 선이 고운 여자였다.

미처 단장하지 못한 맨얼굴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 시간, 지함은 눈을 뜨고 앉아 있었다.
정휴가 반드시 무슨 일을 벌이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괴로움으로 정휴까지 적시고 싶은 짓궂은 생각으로 그리 했을 뿐.
만취한 정휴에게 기생을 넣어준 지함은 옆방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종일 술을 마셨는데도 공부를 하다 밤을 꼬박 새운 새벽처럼 정신은 외려 맑았다.
요즘 들어 좀체 없던 일이었다.
허허. 내 괴로움으로 정휴를 적신 게 아니라

정휴가 산사의 정기로 나를 일깨운 겐가?
지함은 참으로 오랜만에 선화를 물리친 채 맑은 정신으로 밤을 보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일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생각만 하면 온몸이 저려오던 아픈 기억들이

마치 오래되어 빛바랜 서책처럼 담담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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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기(特定記) 사건-소설^토정비결(上-6)

서울에 올라온 지함이 형 지번의 퇴궐을 기다려 인사를 드리자마자 양반 체면에도 불구하고 한달음에 내달린 곳은 안명세의 집이었다. 안명세는 아직 귀가 전이었다. 다른 관리들이 모두 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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