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物 ^ 소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소설^토정비결(上-4)

정휴는 지함이 내준 땅을 거두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낮이면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고,

밤이 되면 등잔을 밝히고 지함이 가져다준 책을 읽었다.
심 대감 댁에서 농사일을 해보긴 했으나,

이제는 자기 스스로 일일이 생각하고 계획해야 했기 때문에
그것만도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어떤 밭에 어떤 씨앗을 뿌리는 게 좋을까,

또 언제 뿌려야 잘 자랄 것인가 등 이것저것 생각하고 궁리하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가곤 하였다.
정휴는 몸에 배다시피 했던 농사일이 새삼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뿌리고 가꾸고 거두면 그만이려니 했었는데,

이따금 지함이 일러주는 방식만 해도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었고,

그렇게 복잡하게 생장하는 작물의 오묘함에 더 놀랐다.

심 대감 댁에서야 이걸 저 밭에 뿌려라 하고 

시키면 그대로 하면 되었고,

김을 매라 하면 매면 되었고,
가을걷이할 때면 그저 들에 나가서 남들 하는 대로
거두면 되었던 것이 이제는 일일이 생각과 계산을
깊이 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함은 때때로 찾아와

이런 저런 말로 농사짓기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여보게, 정휴.

농부는 임금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네.

저 수수 한 그루,

감자 한 포기,

고추 하나가 다 백성이라고 생각하게.

매운 백성도 있고

백성도 있고

단 백성도 있다네.
모래를 좋아하는 백성도 있고,

진흙을 좋아하는 백성도 있다네.

이렇게 백성이 원하는 게 제각기 다르다네.

그렇지만,

이들은 알맞은 땅에 뿌리박게 한

그저 물을 듬뿍 주고 거름만 충분히 주면
저희들끼리 알아서 잘 자란다네.
내가 생각하기로

임금도

농부의 마음으로 백성의 마음밭을 갈아 간다면

태평성대가 저절로 이루어질 걸세.

사화(士禍) 같은 큰바람만 몰아치지 않는다면

곡식이야 무럭무럭 잘 자라겠지.

자넨 이밭 저밭,
경상도밭 전라도밭,

고추 백성 감자 백성 두루두루 잘 다스리게.

자넨,  임금이란 말일세,

허허허."
그러니 정휴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생각할 것이 많아졌던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복잡한데,

농사지으면서 백성을 다스리려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지함은 지함대로 따로 만든 농사 책력을 베껴다가 정휴에게 주었다.

써 홍성에서는 글을 읽을 줄 아는 농부들이

지함이 준 책력을 바람벽에 붙여놓고 농사철을 따진다는 것이었다.

입춘에서 대한까지 24절기 동안

언제 씨를 뿌리고 거름을 내며

논에서 물을 빼어야 하는지 등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이는 토정이 10년 동안 홍성의 기후와 날씨를 살펴
적어둔 기록을 통계내어 작성한 것이라고 했다.

뜨고 지는 시각이며,

조수 간만,

태풍이 불어오는
때까지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이 정도는 생각해야 할 걸세.

하든지 깊이 파고들어가다 보면

곧 도에 이르는 것 아니겠나?"
지함은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공부하는 틈틈이 들에 나가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세밀히 관찰하곤 했다.

쓱 지나가다가도 농부들에게 말을 걸어 한두 마디 농사 지식을 일러주곤 했다.

그런 그가 정휴에게 오면 잔소리가 많아질 것은 뻔한 이치였다.
"여보게, 정휴.

이 밭은 인분을 너무 많이 주었네.
내년에는 퇴비만 내게나.

그리고 저 밭에는 무우를 심지 말게.

무우하고 서로 땅이 맞지 않네.

곡식과 땅에도 다 궁합이 있는 법일세.

농사를 잘 짓고 못 짓고도 그렇지만

곡식도 제 땅을 만나야만 잘 자라는 것일세.

땅이 안 맞으면 아무리 거름을 내고 기음을 매고 가꾸어도

잎이 비실비실 자라다가 꽃이 한두 송이 피기 무섭게 지고,

설혹 열매가 맺혀도 시름시름 앓다가 낙과하고 말지."
정휴는 심 대감 댁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걸 계산하면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렇지만 지함의 말대로 이것저것 따져나가면서 논밭을 관리하다보니
소출이 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임금이 된 마음으로 농사를 지어라,

지함은 늘 이렇게 말했다.

세월은 빨리도 지나갔다.
정휴가 홍성에 와서 농사철을 몇 번 보내고 난 늦가을,

보령 심충익 대감 댁에서 전갈이 왔다.
대감이 위독하니 급히 오라는 연락이었다.
정휴는 소식을 받자마자 내쳐 뛰다시피 걸어 심 대감 댁으로 갔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정휴는 알 수 없었다.

옛적에 종으로 있을 때의 습성대로 주인이 오라는 것이니

그저 달려왔을 뿐 깊이 헤아릴 염이 나질 않았다.
정휴가 내당으로 달려가 기침을 하자 문이 열렸다.
방에 들어가보니 심 대감 댁 식구들이 다 모여 있었다.
심 대감은 얼굴이 창백했다.

눈을 감고 있던 심 대감이 정휴가 온 걸 알았는지

눈을 뜨고는 손을 들어 좌우로 저었다.

그러자 가족들이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가족들이 다 물러나자 심충익은 정휴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정휴가 심충익에게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자,

심충익이 곧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분부했다.
"네게는...

밖에 막내를 들어오라고 하게.

내가 너희 둘에게 이를 말이 있으니..."
정휴는 밖으로 나가서 심충익의 막내딸을 들어오라고 알렸다.

열다섯된 심충익의 막내딸이 울먹이는 얼굴로 들어왔다.

그동안 한 집안에 살면서도

정휴는 얼굴 한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막내딸이었다.
"아버님..."
막내딸이 심충익의 손을 잡았다.
"아니? 어머니. 어머니."
막내딸이 깜짝 놀라면서 밖에 나가 있던 심충익의 부인을 불렀다.

심충익이 운명한 것이다.
정휴는 방에서 나갔다.
심 대감의 식솔이 우르르 방안으로 몰려들어가더니
곧 곡성이 집안에 울려퍼졌다.
정휴는 장례가 끝나는 대로 홍성으로 돌아왔다.
심충익이 운명 직전에 왜 자신을 불렀는지,

막내딸을 왜 함께 불러 앉혔는지 정휴는 알 수가 없었다.

심충익은 분명 무슨 말인가 긴한 얘기를 할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죽음이 찾아오고 말았다.
막내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겠지.
그렇지만,

네게는... 하고 말을 하다 말고 막내딸을 불렀지 않은가?

그건 또 무슨 까닭이었을까?
정휴는 제대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심충익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심충익 대감이 하려고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막내딸을 들어오라고 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말을 해주려던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어디에
더 알아볼 방도가 없었다.
정휴는 머리를 세게 흔들어 자꾸 떠오르는 의문을 떨쳐 버렸다.

그래, 나는 나일 뿐이야.

심 대감이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정휴가 아닌 사람이 될 수는 없어.

나는 그저 내 인생을 살아가면 돼.
정휴는 금강경을 펼쳐 들었다.

지함을 만난 지 삼 년 쯤 되어가는 대한이었다.
잔뜩 흐려 있던 하늘이 점심 때가 지나면서 마침내
함박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어찌나 큰지 바로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감나무마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금강경을 읽고 있던 정휴는 책을 내던지고 바다로 달려나갔다.
바람 한 점 없어 눈은 휘날리지도 않고

직선으로 떨어져 소리없이 바다로 녹아들고 있었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은빛이었다.
바다란 어쩌면 이렇게 변화무쌍한지

정휴는 오로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삼 년 동안 쭉 바다를 살펴온 정휴는 비록 지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조수가 들락거리는 시간쯤은 대충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다와 친근해졌다.
바다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매일매일 얼굴이 달랐다.

어느 날은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요동치며 집채 만한 몸뚱이로 밀어닥치는가 하면

바로 다음날은 막 잠이 든 갓난아기의 얼굴처럼 더없이 평화롭기도 했다.
눈이 내리는 바다는 또 다른 빛깔이었다.

그것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과 함박눈이 소리 없이 쌓이는 날이 또 달랐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은 바다가 하늘을 향해 거센 항거의 몸짓을 보이는 듯했으나,
오늘처럼 함박눈이 오는 날은

바다가 제 몸을 열어 하늘을 그대로 받아들여 점점 하늘로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혼연 일체,

바로 그대로였다.
날마다 바다의 빛깔이 그리워 바다로 달려오면서도 정휴는 바다가 두려웠다.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이 세상처럼.
"그럴 줄 알았네.

여기 있을 성싶어서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오는 길일세.

오늘은 자네가 그리워서 온 것이 아닐세.

눈이, 바다가 날 부르더군."
인기척도 없이 지함이 다가와 곁에 서 있었다.
웬일인지 지함의 얼굴은 핼쑥하게 여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함도 바다와 비슷했다.

종잡을 수 없는 바다처럼 지함의 표정도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어느 때는 흡족한 촌부의 얼굴이다가

어느 때는 세상 다 산 노인처럼 초연한 얼굴이기도 했고,
어느 때는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처럼 격정으로 들끓는 젊은 선비의 얼굴이다가

어느 때는 수줍은 소년의 얼굴이기도 했다.
오늘 지함의 표정은 어떤가?

초연함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얼마 안 되는 밥을 닥닥 긁어 먹고 아쉽게 밑바닥을 살피는 어린아이 같다고나 할까,
아니 그보다는 장날 냉이 한 소쿠리를 캐 와서는 해가 기울어갈 때까지

마수걸이도 못하고 있는 노파처럼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공부는 잘되어 가나?

무엇이 잡히던가?"
정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요즘은 뭘 읽고 있나?"
"금강경을 읽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네는 거기서 길을 찾게 될 것이야.

헌데, 나는 어디서 길을 찾는다?"
가끔씩 지함은 뚱딴지 같은 말을 던져 궁금증을
잔뜩 부풀려 놓고는 뒷말을 싹 삼켜버리곤 했다.
지금도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한번 입을 닫으면 아무리 물어도 다시 입을 여는 법이 없는 지함인지라
정휴는 궁금증을 혼자 삭여야 했다.
"자, 나는 가네.

바다를 보고 나면 그리움이 풀릴 줄 알았더니 그도 아닌 모양이야.

그토록 책을 읽고도 내 그리움의 정체 하나 알아맞추지 못하고 있다네."
지함은 엉뚱한 말을 남겨놓고는 훌쩍 떠나가버렸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발길이 뜸하던 지함은 농사가
막 시작되어 정신없이 바쁜 어느 날 가는비를 맞으며
나타났다. 금강경을 다 읽고 난 정휴는 이래저래 할
말이 많았다.
"그래, 길을 찾았는가?"
"이미 길에 들어섰는데 길을 찾았느냐니요?

지금도 길에 있고 전에도 길에 있었고,

앞으로도 길에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길 위에 있어야 합니다."
"자네는 이제 세상을 달관한 소리만 하는군.
금강경의 효험이 나타나고 있구먼.

하여튼 나는 세상으로 나가네."
"벌써요?

하긴 벌써가 아니지요.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사람 사는 데는 항상 매듭이 있다네.

이때다 싶을 때 변화시키지 않으면 썩고 만다네.

나는 썩고 싶지 않네.

자네도 금강경만 읽고 있다가는 썩고 말 걸세."
"아닙니다.

금강경이 사람을 썩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썩게 된다면 사람 스스로가 썩어가는 것입니다."
정휴가 단호하게 말하자 지함이 껄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논하자는 게로군.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은
공이고, 공이 색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궤변인가?
이것도 저것이고 저것도 이것이고,

도대체 분명한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공하다는 것은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게는 오히려 세상이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늘 꿈을 꾸는 것 같던 정휴의 얼굴에 묘한 광채가 서려 있었다.

낮이면 남들과 같이 하루 종일 뙤약볕 밑에서 일을 해 얼굴은 검게 탔지만

총명한 기운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겨울이 되어 빈 밭을 공이라 하고,
여름이 되어 곡식으로 꽉 들어찬 밭을 색이라고 하면 되는가.

밭은 밭일 뿐

여름이어도 겨울이어도 변함이 없으니 들어맞는 말 아닌가?"
"세상 만물이 다 온전하게 있는 듯해도 언젠가는 없어지고,

또 아무것도 없는 듯하여도 언젠가는 다시
꽉 들어차는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이 말씀이 우리끼리 쉽게 비평해 버리고 말 만큼

허무한 말은 아니라고 나도 생각하고 있었네.

살다 보면 언젠가 그 깊은 뜻이 저절로 

우리에게 와 닿을 날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드네.

아무래도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이른 듯하이."
지함의 말에 정휴는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지함이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금강경 자체를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자네가 왜 금강경에서 길을 찾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게나.
내가 없이,

내 처지와 내 시각이 없이는 학문도 진리도 없다네.

자네는 늘 그것을 잊고 있더군.

내가 없는 진리란 없는 법일세.

그야말로 헛되고 헛된 것이야."
정휴는 입을 다물었다.

지함의 말이 정휴의 묵은 상처를 예리하게 들쑤신 것이다.

정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 처지라니요?

중요한 건 사람 그 자체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형님이 아니시던가요?"
"너는 종놈 출신이니

네게는 학문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하는 얘기는 물론 아닐세."
지함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사람의 생각이란 제 처지와 조건에 구애를 받게 마련이야.

그것마저 깨고 나와야 된다는 얘길세.
자네가 금강경을 그다지 애지중지하는 이유가 무언가?
양반도 양반이 아니고 종도 종이 아니고,

양반이 종이고,

종이 양반이라는 말 때문인가?

학문을 하는 데 사(邪)가 끼면 안 되는 것이라네.

어쨌든 이만 하세.

이 얘길랑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세."
할 말이 많은 듯 입이 반쯤 열린 정휴를 보면서 지함은 잘라 말했다.
잠시 말이 끊겼다.
정휴는 자신은 이제 종이 아니노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차피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 종으로 살아온 과거가 있는 것을.
그렇지만 이미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은 현재,

정휴는 면천을 하여 양민이 되어 있다.
막 잎이 돋기 시작한 나뭇잎에 가랑비 적시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오고 있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정휴가

마음에도 없이 불만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형님도 어쩔 수 없이 저를 비천한 종놈으로 보고 계시는군요."
문살 가운데 낸 유리문으로 봄비에 젖어가는

바깥을 내다보던 지함이 잔잔한 얼굴로 정휴를 돌아보았다.
정이 듬뿍 담긴 따스한 눈길이었다.
그 눈길이 정휴의 가슴에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정휴의 눈에 물기가 번져 나갔다.
정휴는 실상 자신의 처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신분이 비천했었다는 사실이 늘 정휴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지함의 말은 지나친 우려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난 일 년간 그를 제자처럼,

친동생처럼 돌봐준 지함에게  

투정을 부린 자신의 행동 또한 너무 지나친 것이기도 했다.
정휴가 금강경을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

그것은 지함의 말대로였다.

정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시주승이 마음 한번 잘 돌려쓰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육조 혜능이라는 선사가 원래는 오랑캐였다는 말을 들었을

정휴는 머리 속에서 번쩍하고 섬광이 이는 것을 느꼈었다.
"......"
지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묘한 섭섭함이,

아니 그보다는 지금까지 하나라고 믿어 왔던 지함과 자신이

너무나 분명하게 다른 것으로 떨어져나가는 아픔이 정휴의 목을 메이게 했다.
정휴는 눈물인지 슬픔인지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 후끈한 덩어리를 간신히 삼켰다.
지함이 홍성을 떠난다?

정휴는 떠나가는 지함을 앞에 두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정휴는 농사만 지으며 자리를 굳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기왕 세상에 나왔으니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가 아는 곳은 보령, 홍성뿐이었다.

그리고 한양이 있다는 것을 남의 말을 통해 알 정도였다.

정휴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떠나고 싶은 충동이 강렬히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함이 떠나기 전에 말을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정휴는 생각했다.

그때 정휴의 머리 속으로 번쩍 하고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저어, 저도 이곳을 떠나갈까 하고 있습니다."
"그래? 어디로 떠날 셈인가?"

"계룡산 고청봉(孤靑峰)에 아는 중이 한 분 계십니다.

그리로 가볼까 합니다."
"입산하겠다는 말인가?"
"꼭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공부나 좀더 하고..."
지함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휴는 아직 입산하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다만 그 중이 갑자기 생각난 것뿐이었다.
정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지함에게 물었다.
"형님, 세상으로 나가신다니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한양으로 가볼까 하네.

생원시, 진사시는 다 합격했지만 대과에 급제하려면 한양에 가서

정식으로 공부를 더 해야 할 것일세.

그러나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네.

그리움을 찾아가는 것인지,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인지..."
그리움이라니,

지난번에도 지함은 똑같은 말을 했었다.

진리에 대한 욕망을 그리움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인지
정휴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형님이 식구를 모두 한양으로 불러올렸네.
그렇다고 해서 올라가는 이유가 딱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네만...

여하튼 며칠 안에 떠날 것일세."
지함은 그윽한 눈길로 정휴를 바라보았다.
"자네 덕분에 지난 일 년 외롭지 않았네.
고마우이."
정휴가 하고 싶은 소리였다.

지함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정휴였다.
"저야말로..."
"자네가 찾은 길을 열심히 가보게.

생각 같아선 이별주나 한 잔 나누고 싶지만

붙잡는 것이 많아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영영 떠날 수 없을 것 같구만."
지난 삼 년간 나누어온 정에 비하면 너무나 싱거운 이별사였다.

지함은 말을 마치고 벌떡 일어났다.
"아직 비가 오는데, 비라도 그치시면..."
뭔가 해야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정휴는 지함을 붙들었다.

그러나 이미 지함은 댓돌 위의 신발을 꿰차고 있었다.

그리고는 언제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가는비 사이로 나서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마당 한귀퉁이에 서 있는 묵은 살구나무꽃이

비를 이기지 못하고 한 잎씩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지함의 등뒤로 살구꽃 몇 송이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정휴와 지함이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후였다.

똑같은 시간이 흘러갔지만 두 사람이 각기 겪은 세월은 너무도 달랐다.

누구나 자기가 겪은 세월이 가장 절실한 법이지만

정휴에게는 특히 그랬다.
정휴는 그동안 공주 계룡산 고청봉에 있는 용화사(用和寺)에 뿌리를 박고 살았다.

정휴가 물어물어 고청봉의 그 중을 찾아간 것은 지함이 한양으로 올라간 직후였다.

보령 심 대감 집에서 대면했을 때는 한없이 초라하고 힘없어 보였던 그 중이 기실은

용화사 선원(禪院)의 서슬 퍼런 방장(方丈)이었다.
용화사는 한때 청안 납자(靑眼 衲者)들이 몰려들어
연일 죽비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절이었다는데,
정휴가 찾아갔을 때에는 선승(禪僧)이 열 명밖에 없었다.

그래도 예전의 선풍(禪風)이 그대로 살아 있어 방장의 기개는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방장의 법명은 명초(明草).

그 명초는 정휴의 입문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법란(法亂)이 심할 때에는

신심(信心)이 금강(金剛) 같은 수좌(首座)가 아니고는 이겨낼 수 없다.

중 생활이라는 게 무슨 벼슬하는 것도 아니요,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아니다.

단지 마음 공부 한번 해보자는 것 아닌가.

날이면 날마다 관헌이 찾아들어
부역을 나오라고 하질 않나

군사로 빼어가질 않나
세금을 내라고 하지 않나,

여간 해서는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라네."
"알고 있습니다."
"중은 종이나 마찬가지야.

너는 면천했다면서 굳이 종으로 돌아가려 하느냐?"
"......"
"쯧쯧쯧.

중노릇이 종노릇보다 더 힘드느니라.

우선 나무 하고 물 긷는 일부터 돕거라."
명초는 일단 정휴를 행자로 받아들였다.

말이 좋아서 행자이지

땔나무를 마련해다가 선방이고 승방이고 차례로 불을 넣고,

세 때 공양 시간이 되면 밥을 지어야 하는 불목하니였다.

그래서 정휴는 낮에는 계속 다른 수좌들 뒷바라지만 하다가

밤이 되어 일이 다 끝나서야 겨우 참선을 잠시 할 수 있었다.
나라 안 여기저기서 사찰에 대한 탄압이 심해질수록
정휴가 해야 할 일도 그만큼 늘어났다.

사전(寺田)을 모두 압류당하고 나서부터는

탁발을 해 오는 것도 큰 일거리가 되었다.

마을에 내려가도 중을 보면 학동들까지 달려와 매질을 하려 했고,

부녀자들은 무슨 돌림병 환자라도 보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게다가 정휴는 아직 행자여서 머리를 깎지 못하고
승복만 입고 다녔으므로 다른 중보다 매질을 더 많이 당했다.
여름철에는 내내 부역을 나가 관헌이 시키는 대로 일을 했다.

부역에 나가면 징글징글하게 일만 하고 살았던 옛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다시 종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양반가에서도 더러 부역을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양반이 직접 나오는 일은 아주 드물고 하인들이 대신 했다.

아니면 가난한 농부나 천민들이 주로 부역에 끌려나왔다.

그들과 섞여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일을 하다 보면 종으로 살았던
보령 시절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 정휴를 괴롭혔다.
이렇게 힘든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이 되어야 다시 절에 돌아갈 수 있었다.
절 생활이라고 해서 부역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불목하니로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정휴는 그것을 불평하지 않았고,

명초 역시 정휴를 두고 고생한다느니 하는 위로 한마디 해주는 법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정휴는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이지함을 그리워하곤 했다.
입산한 지 두 해가 되자,

정휴와 함께 산에 들어와 행자 생활을 하던 도반 두 명이

비구계를 받고 정식으로 중이 되었다.

그러나 정휴에게는 비구계가 내려지지 않았다.
정휴는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휴가 다른 행자들하고 다른 점은 한 가지뿐이었다.

정휴는 천출이고 두 사람은 양민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비구계를 받지 못한 정휴는 자신보다 늦게 입산한 행자들과 함께

다른 중들의 뒷바라지를 계속해야 했다.

이른 새벽에 법당에 올라가 정수를 올리고

아침 예불 준비를 하는 것도 정휴의 몫이었다.

그동안 같이 허드렛일을 돕던 행자들은 어엿한 중이 되어

시간에 법당에 나와 염불만 하면 되었다.
참다못한 정휴는 방장으로 명초를 찾아갔다.

그리고 득도식을 치러 달라고 청했다.

물 긷고 밥 짓고 부역나가는 일쯤은

나면서부터 시작한 종살이로 할 만큼 한 정휴였다.
"큰스님, 이제 중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행자로 들어온 지 두 해가 넘었습니다."
그러자,

방장 명초는 정휴를 노려보며 주장자를 번쩍 치켜들었다.

깜짝 놀란 정휴가 뒤로 물러서자 명초가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밥버러지 같은 놈.

초발심(初發心)도 안 읽은 녀석이 무슨 중이 되겠다는 거냐?

이렇게 뻔뻔한 놈이 다 있나."
"큰스님,

제가 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읽을 새가 없었습니다.

부역질에는 제가 도맡아 나갔지요,
땔감이다 탁발이다 하고 나돌아다닌 것도 저였지요.
참선할 시간도 없었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한 줄 읽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아침 저녁 예불도 제가 도맡아 모시다 보니

아는 것은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예불문(禮佛文)에
<천수경(千手經)>, <반야심경(般若心經)>이 고작입니다.

저는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런 무지한 놈. 아직 멀었으니 물러가거라."
"저하고 행자 생활을 같이 했던 도반들도 초발심을
못 읽은 처지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는 계를 주고 제게는 계를 주시지 않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양민 출신이고, 저는 종 출신이기 때문입니까?"
"올커니, 네 놈이 그걸 따지러 온 게로구나.

못난 녀석, 너는 계 받을 자격이 없느니라."
명초는 정휴를 엄하게 꾸짖고는 그대로 돌아앉았다.
정휴는 할 수 없이 방장을 나왔다.
정휴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억울하기는 했지만 더 기다려보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라도 다른 중들처럼
금강경 강의다,

능엄경 강의다 하면서 강원(講院)으로 돌아다니거나,

하안거(夏安居)니 동안거(冬安居)니 하는 말 속에 파묻혀 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지긋지긋한 종살이의 기억을 완전히 떨쳐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휴는 행자 생활을 계속했다.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서 관아 보수 공사를 하였고,
절에 돌아와서는 겨울철에 쓸 장작을 패다 쌓아놓느라
이마에서 땀이 식을 새가 없었다.

참선 한번 제대로 할 시간이 없었다.

밤마다 참선을 하려고 다리를 틀고 앉아보기는 하였지만

졸음이 밀려와 아무 진전도 보지 못했다.
다시 행자 생활 두 해를 넘겼다.

그러나 정휴는 중이 되지 못했다.

그보다 늦게 행자가 된 사람은 계를 받았는데도.
다른 행자는 한두 해만 불목하니로 일해도 머리를 깎아주는 명초.

그런데 유독 정휴만은 아직
득도(得度)할 때가 아니라며 계를 내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정휴는 또 방장문을 두드렸다.
"스님, 저는 종이 아닙니다.

면천을 하고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는데,

이건 중이 아니라 영락없는 종입니다.

불법(佛法)을 가르쳐주십시오."
"네가 아직도 스스로를 종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바보 같은 녀석.

내가 너 같은 녀석을 여태껏 밥 먹이며 데리고 있었다니..."
"제 밥은 제가 탁발해다 먹었습니다.

제 손으로 나무를 베어다가 제 손으로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정휴는 선원이 떠나가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방장 명초는 겨우 알아들을 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승복은 누가 입혀주었더냐?"
"차라리 입산을 안 했으면 공부를 더 많이 했을 것입니다.

흑흑흑."
정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자 명초는 주장자를 들어 정휴의 등줄기를 철썩 내리쳤다.
"네게는 불법이 아니라 매가 필요하구나."

정휴는 주장자를 맞고도 꿈쩍하지 않았다.

정휴는 어느새 울음도 삼키고 있었다.
"못난 것.

옛다, 떠나가거라.

네 녀석 심지가 그렇게 얕은 줄 내 진작 알고 있었느니라."
방장이 정휴에게 뭔가 툭 던졌다.
"도첩(度牒)이니라."
"예?"
"네가 비록 아직 행자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혹여 딴 데를 가더라도 못된 유림에게 붙들려

다시 종이 되거나 맞아 죽기라도 할까 봐서 내가 만들어두었느니라.

법명은 자성(慈性),

알고만 있고 절대로 쓰지는 말거라.

너는 법명을 쓸 자격이 없느니라.
너는 아직 중이 아니니라."
정휴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것이 스승의 배려인지,

아니면 모욕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명초는 정휴가 떠나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첩까지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내준 것이었다.

그런 스승 명초의 깊은속을 정휴는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어디로 갈 작정이냐?"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못난 것.

네 마음이 지금 한양에 가 있는 줄 내가 알고 있다.

네 부처는 계룡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양에 있구나."
정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네 부처는 한양에 있다'니.

명초가 이지함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정휴는 명초의 일갈(一喝)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왜
용화사를 떠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무작정 한양에 가려던 생각이 간절했던 까닭,

진짜 이유를 그제서야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랬다.

명초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휴는 지함이 그리웠다.

양천(良賤)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아주는 이지함.

정휴에게 길이 되어 주고 등불이 되어 주었던 이지함.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휴는 자신이 아직도 지함의 그늘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벗어나고자 입산했고,

고된 행자 노릇을 하며 몇 해를 보냈으나 여전히 지함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정휴는 왜 자신이 지함을 그리워하는지,

왜 그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함,

그는 정휴에게 처음으로 생명을 준 사람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는 대단한 성리학자도 아니요,

큰소식 얻은 선승도 아니었다.

그는 정휴의 스승도 아니었고, 그

렇다고 친구도 아니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지함은 정휴에게 어느 무엇도 아니었다.
지함은 지함일 뿐이었다.

지함이 정휴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휴의 머리 속엔 항상 지함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금강산으로 가거라.

금강산에 가면 네놈에게 따끔한 말침을 놓아줄 스승이 한 분 계시느니라.
법호(法號)는 서암(瑞巖).

이곳 용화사는 머지않아 중머리 보기도 힘들어질 것인즉 어서 떠나가거라."
정휴는 용화사를 떠났다.

그는 불목하니로 보낸 세월이 진저리나도록 싫었다.

용화사 행자 생활이 종살이 열여덟 해를 애써 잊어가던 그에게

옛 기억을 생생하게,

한올한올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휴는 가사를 벗지 않았다.

중이 제대로 되지도 못했으면서,

법명을 받되 쓰지는 말라는 스승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가사를 벗지 않았다.
용화사를 떠나 한양길에 오른 정휴는,

지함이 홍성을 떠나 한양으로 가면서 마지막으로 던졌던 말을
머리 속에서 더듬고 있었다.
"자네가 왜 금강경에서 길을 찾았는지 생각해 보게."
정휴에게는 그 말이 바로 화두(話頭)인 셈이었다.
신분, 금강경, 심충익, 금강경, 이지함, 색즉시공.
공허한 상념이 머리 속에 가득 찼다.
찬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가사자락이 펄럭였다.
정휴는 고행하는 수도승인 양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음을 놓았다.

용화사를 떠난 지 근 한 달여 만에 정휴는 한양에 도착했다.

길을 가는 동안 탁발을 하여 남의 집 추녀 밑에서 허기를 때우고,

그곳에서 새우잠을 잤다.

어떤 때에는 유림(儒林)이 많이 사는 동네나 서원(書院)이
있는 곳은 일부러 돌아서 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정휴는 가사를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쉽사리 해내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답답한 노릇이었다.

가사만 벗어버리면 간단히 풀릴 문제인데
정휴는 그 속박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입고 다녔던 것이다.
도첩만 받았지 스승한테서 진짜 중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면서도

가사를 시원히 벗어던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휴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https://jbk1277.tistory.com/154?category=938387 

 

기방에서 찾은 법열(法悅)-소설^토정비결(上-5)

정휴는 물어물어 지함의 맏형인 지번(之蕃)의 가회동 집을 찾아갔다. 열네 살에 아버지 치(穉)를 잃고 열여섯 살에 어머니 김 씨를 잃은 지함은 맏형 지번을 부모처럼 따랐다. 학문도 그에게서

jbk1277.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