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나 Internet 뉴스를 보면
정치인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싸울 때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의 이런 싸움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조정에 진출한 사림파가 세력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다
훈구파가 축출되고
사림파와 외척이 대립하였고,
조선 선조 대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훈구파의 탄압을 이겨 내고,
사림파가 정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최초의 붕당 대립 구도의 성립은
1575년(선조 8년)으로 이조전랑직 임명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심의겸을 추종하는 기성 사림인 서인과
김효원을 영수로 하는 신진 사림인 동인의 결집에서 비롯되었다.
심의겸이 서울 서쪽에,
김효원이 동쪽에 살았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HU37r3BEQg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25/2016012500446.html
동인 서인 나눠진 이유를 알아봅시다 (tistory.com)
조선시대 총정리(선종), 기축옥사, 동인과 서인/ 동인의 분열, 남인과 북인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연재소설-海帝어둔(3) - 하극상(下剋上) - 주객전도(主客顚倒) (tistory.com)
尹종친 파평 윤씨와 얽힌 은진 송씨…병자호란 350년 갈등 풀다 [e즐펀한 토크] | 중앙일보 (joongang.co.kr)
송강 정철은
돈녕부판관을 지낸 정유침(鄭惟沈)의 막내아들이다.
그의 큰누이는 인종의 후궁이 되었고
둘째누이는 종실인 계림군의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연루되자
큰형은 귀양길에 죽었고
아버지는 연일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송강은 열살 때 창평현 등에서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후에 창평현의 절경을 읊은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
정철은
27세이던 명종 1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다가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에 들어갔다.
당쟁의 와중에 동인에 들어갔던 정철은
다시 서인의 거두가 되어 이발(李潑)과 맞섰다.
그러다 밀려나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지은 것이 ‘관동별곡(關東別曲)’이다.
선조 때 잠시 우의정에 올랐으나
다시 동인에 밀려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귀양살이를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또다시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강화로 낙향한 뒤 병사했다.
사후에 김장생(金長生) 등의 상소로
관직이 복구되고 문정공(文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재미있는 성씨 이야기 40> 연일정씨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https://blog.naver.com/kjmbc_mbc/220236505655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가문이 된서리를 맞아 몰락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익산군수였던 정희증(鄭希曾)의 아들인 정여립은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하지만,
예조좌랑과 수찬이 된 뒤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편에 가담하였다.
이로 인해
선조의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그는 서인의 미움을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관직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동인에서는 영향력이 높았다.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지함두(池涵斗)·승려 의연(義衍) 등이 가담하였다.
하지만,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등이 모반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혔다.
그는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하였다.
이로 인해 처형된 동인 인사는 이발을 비롯하여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어쨌든 정여립은
대단히 혁명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이야기했다.
즉,
천하는 공물로 주인이 따로 없다는 것이며,
누구든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왕조시대에 상상할 수도 없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고,
전라도는 ‘반역향’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재미있는 성씨 이야기 38> 동래정씨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鄭汝立)은
1546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첨정(僉正)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대종회 족보에서 축출^삭제되었다고 함),
자는 인백(仁伯)이다.
그의 종조부는 우의정을 지낸 정언신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고려시대부터 대대로 판서직을 지냈고,
조선시대에도 판서, 대사헌을 지낸 집안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가 어린 시절부터
흉포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를 잉태할 때와
출산하는 날 밤의 꿈에 정중부가 나타났기에,
정희증은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불길하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어린 시절 새끼 까치를 토막내 죽이고,
그 짓을 본 여종이 아버지에게 일러바치자
그날 밤에
여종의 부모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여종을 찔러 죽였다고 한다.
이후 그 부모가 돌아와 울부짖고,
마을 사람들이 그 참혹한 현장을 보러 모여든 가운데,
어린 정여립이 나서서 태연하게 자신이 죽인 것임을 밝혔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정여립을 보고
'악한 장군이 태어났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여립은 스승 이이를 따라 서인에 속해 있었고,
"공자가 다 익은 감이라면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니,
언젠가는 다 익을 수 있을 것이다"라며 이이를 높이 받들었다.
그러나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 후에는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포함한 서인 인사들을 비난했다.
이런 급변의 원인은 확실치 않다.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그의 직정적(直情的)인 성격을 문제 삼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의 이런 그의 기질이
동인의 영수인 이발(李潑, 1544∼1589)과 좀더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는 스승을 존숭하던
당시의 풍토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였기에 많은 지탄을 받았고,
아무튼 그는 갑자기 당파를 바꿨고,
선조는 그것을 불쾌히 여기자 결국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비록 벼슬에선 물러났지만,
이발 등 동인 계열의 인사들과 인맥이 두터웠고,
정여립 본인의 학식이나 수완도 뛰어났기 때문에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정여립은 곧 전라도 지역의 명사가 되었다.
이후 정여립은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워 활쏘기 모임을 여는 등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조직을 만들고,
매월 15일 모여 활쏘기를 겨루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즐겼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죽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비운의 혁명가 정여립(鄭汝立) < 설중매 < 피플&라이프 < 기사본문 - 영남신문 (ynamnews.co.kr)
https://blog.daum.net/00000000000413/4719612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 전라도 < 요일특집 < 기사본문 - 광주드림 (gjdream.com)
억강부약(抑强扶弱) ^ 대동세상(大同世上) - 권선징악(勸善懲惡) ^ 부강부약(扶强扶弱) - 정여립 ^ 대동계(大同契) (tistory.com)
https://blog.naver.com/cbg6218/222622757341
'한반도 歷史^文化'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o is 廢主 연산군(燕山君) - 사헌부(司憲府) 폐지 ^ 檢搜完剝(검수완박) - 立法쿠테타 ^ 圍籬安置(위리안치) ^ 강화.교동섬 (0) | 2022.04.16 |
---|---|
노들섬 ^ 강변의 歷史 ^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 호압사(虎押寺)의 비보풍수(秘補風水) (0) | 2022.04.16 |
圃隱 정몽주 ^ 사림 - 三峰 정도전 ^ 훈구 - 붕당정치 胎動(태동) (0) | 2022.01.16 |
조계종 삼보종찰(三寶宗刹) 순례(2) - 양산 ^ 佛寶(불보)종찰 통도사 ^ 金剛戒壇(금강계단) - 자장율사(慈藏律師) - 不二門(불이문) (0) | 2022.01.05 |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 삼족오(三足烏) ^ 제철(製鐵)기술 - 신라와 일본의 교역 ^ 울산항 - 오키섬(島) ^ 이즈모市 (0) | 2022.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