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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歷史^文化

청와대 까부수러 왔수다(2) - 124 軍부대 - 김신조 목사

(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의 증언)

 

『1967년은 유달리 남침 사례가 많아 휴전선 철책부터 보강하기로 했습니다 .

그때까지 휴전선 철책이란

휴전 당시 남북한 군인들이 직접 설치한 원형 철조망 서너 가닥이 전부였습니다.

새빨갛게 녹이 슬대로 슬었고, 가끔씩 보수공사를 한다고 갈아주기는 했지만

인적이 드문 비무장지대에다 예산부 족으로 改修할 생각을 못했지요.

이것을 美 국방성에 부탁해 자재를 공급받 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철책선을 만든 겁니다.

이 공사는 그 해 겨울, 249km의 휴전선 全지역에서 완성을 보았습니다.

단 미군 지역 4km 정도만 제외되었지요』

 

美 2사단측은

鐵柱(철주)를 박고 전기 철조망을 쳐 對敵하려는 한국군의 대 응자세를 못 미더워하면서

자신들이 보유한 전자 감응 경보기 등으로 대처 하겠노라며 공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김신조가 1968년 1월 17일 22시 25사단 남방철책선을 뚫고 침투한 곳을 보이고 있다. '김신조 목사 제공'

1968년 1월18일 오전 5시,

은밀침투로 법원리 뒷산에 도착한

31명의 무장공비들은 지쳐 있어 이날 밤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공비들은 假眠(가면)상태 로 휴식하고 있었고 5명이 교대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thestory.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1/21/2011012100879.html

 

'김신조 침투 루트' 되밝으며 안보 돌아봅시다

▲ 43년 전 "박정희 목을 따러 왔다"며 우리 군의 경계와 포위를 뚫고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했다가 전향한 김신조(69)씨가 당시 무장공비들이 ..

thestory.chosun.com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해 들어온 시각에

朴正熙 대통령은 연두순시에 여념이 없었다.

1월18일에는 외무부, 문교부, 공보부 에 들러 1968년도 시정방침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1월19일,

與野 총무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국회가 2월 중순까지 空轉(공전) 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朴正熙 대통령은 법무 국무 교통 등 3개 부처를 순시했다.

그는 국군장병의 처우개선,

호남선 複線化(복선화)계획 촉진 및 호 남지방 고속도로 계획을 수립할 것을

관계부처에 지시하고 있었다.

이때가 오후 2시경.

 

바로 그 시각,

파주군 초리골에 살던 禹聖濟(우성제·현 파주경찰서 보안계장)를 포함한 네 형제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벼랑 아래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경계병과 마주쳤다.

『국군 대위 한 명, 소위 한 명, 그리고 사병 계급장을 단 3명 등 모두 5명 이었죠.

우리 국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은 검은 농구화였고

총은 개 머리판을 접을 수 있는 AK소총이었어요.

한 눈에 공비라고 알아 보았지만 도망가기엔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qq9447.tistory.com/644

 

[오늘] 돌격소총 AK-47을 만든 마하일 칼라시니코프 떠나다

[역사 공부 ‘오늘’] 2013년 12월 23일, 칼라시니코프 94세 일기로 사망 지난 반세기 동안 AK47 돌격소총은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퍼진 살상 도구로 자리를 잡았다. 내구성, 저렴한 가격, 조작 편

qq9447.tistory.com

禹씨 형제를 본 공비들은 태연을 가장하고 불러 세워 담배를 권하더니

갑자기 기관총으로 등을 밀며 벼랑 쪽으로 몰았다.

禹씨 형제들이 벼랑 밑으로 와 보니 일개 소대 병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禹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 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 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31명의 공비들은 禹씨 형제들에게

지서의 위치와 문산 동두천 의정부로 가는 방향을 묻기도 하는 등 이런 저런 말을 붙여왔다.

 

金新朝(現 충남 예산 군 성결교회) 목사의 증언.

『원칙으로는 작전 도중 만나는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무조건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원들 중 일부가 「죽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며 반대를 했습니다.

투표를 했는데 역시 살려두자는 의견이 많았 습니다』

禹씨 형제는

벼랑 아래 덤불 속에서 네 시간여 동안 공비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풀 려날 수 있었다.

공비들 중엔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손목시계를 꺼내 선물 로 주며

『만약 비밀을 지키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면

우리 후속 부대가 내 려와서 너희 마을과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릴거야』라고 위협했다.

禹씨 형제들은 빈 지게를 지고 돌아 나오면서 자꾸만 뒤가 꺼림칙했다고 한다.

『혹시 쏘지나 않을까 겁이 났지요.

우리가 한참 걸어 나오다가 힐끗 돌아 보니 깜깜한 데 뭔가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이동중이란 걸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마을 입구 가로등 밑에서 미행이 없는지 살핀 뒤

언제 신고를 하느냐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이들은 丹陽 禹씨 종가집으로 달려가 어른들과 함께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이때가 1월19일 밤 9시경.

 


국가간의 전투력은 戰場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1·21 사태는 6·25 이후 15년 만에 남북한 전투력을 비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金新朝를 포함한 중무장한 인민군 1개 소대병력은

휴전선을 넘어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국군 초계병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나뭇군 禹씨 형제와 우연히 부딪친 것을 제외하면

前方 거주 주민들에게 거동수상자들로 몰려 신고된 적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對간첩 작전능력도 6·25 이후 별로 改善된 적이 없는 상태였다.

통신 계통은 특히 전근대적이었다.
金新朝와 30명의 무장공비 목격 사건은

禹씨 4형제에 의해 1월19일 밤 9시 경 파출소에 신고 접수가 되었지만,

인근 군부대에 전달된 시각은 9시30분 경이었다.

對간첩작전 대책본부가 설치될 합동참모본부에는

세 시간이 지난 자정무렵에 이 정보가 도착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자만심 같은 게 있었어요.

훈련을 받을 때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매일같이 하면서 교관들은 우리에게

「동무들은 세계 최강의 용사다.

국방 군들이 동무들 을 비행기로도 못 쫓아 오게 만들어 주겠다」며 혹독한 훈련 을 시켰거든요』

1월19일 오후 8시경 禹씨 형제들을 살려 보낸 뒤 거의 동시에 金新朝 일당은 법원리 뒷산을 출발,

서울을 향해 급속 산악행군을 시작했다.

급속행군 이란, 약 30㎏의 짐을 진 重무장한 군인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구보이 다.

당시 한국군의 경우 급속행군은 산악이 아닌 오직 도로 위에서만 가능 하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군의 군사적 상식으로는 야간 산악행군일 경우 시 간당 4㎞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金新朝 일당은 시간당 평균 10 ㎞씩 주파하면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중앙정보부 康仁德 과장은 이날도 자신의 분석이 들어맞지 않아 실망한 채

관사로 퇴근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머리 속은 온통 북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1월20일 토요일 새벽 두 시 경,

전화 벨 소리에 선잠에 빠졌던 康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강인덕 과장입니다』

『과장님, 새까맣게 들어왔습니다』

『몇 명이나 돼?』


『잘 모르겠지만 3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康仁德 과장은 「게릴라전이 시작됐다.

이젠 정치가 아닌 군사력이 대응해 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이때 金新朝 일당은 앵무봉을 지나 경기도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 능선을 타고 있었다.

새벽 4시경엔 노고산을 주파한 뒤

서울의 경계선이자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眞寬寺( 진관사)를 통과했다.

오전 6시경엔 북한산 碑峰(비봉)에 도착했다.

10시간 동안 거의 휴식없이 全力질주를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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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태」 무장공비 은신장소 / 북한산

북한산 비봉에서 사모바위를 향하여 가다보면 사모바위 가기전 우측으로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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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0일 토요일 오전 9시,

金聖恩 국방부 장관은 청사로 출근해서야 이 사 실을 보고받았다.

오전 9시30분경,

金장관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朴正熙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어디로 들어왔소?』라고 물었다.

『임진강 상류 고랑포 쪽입니다. 얼음이 얼면 건널 수가 있는 곳이지요』

『그놈들이 뭣하러 들어왔을까?』


『각하, 지난해 놈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각종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주한미군의 주둔지 시설 파괴나 테러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군 부대나 주요시설도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휴전 후 연간 最多 도발 횟수인 170회를 기록한 1967년 한해 동안 전방지역 에서는

전쟁에 준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이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감행됐다.

1월19일에는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순찰중이던 한국 해군 56함 당진호가

두 척의 북한 砲艦(포함)으로부터 피격받아 침몰했고,

4월12일에는 중부산악 지대 휴전선을 북한군 90여명이 침범해 들어와 국군 7사단과 교전을 했다.

이때 7사단의 3개 포병대대가 북한지역에 휴전 후 최초로 585발의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4월22일에는 북한군들이 서부전선으로 침투해

미군 막사를 폭파, 두 명의 미군이 숨지고 19명이 부상하는 사건도 있었고

5월27일에는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근해에서 작업중이던 한국 어선단에 포격을 가해

한국 해군이 25분 간 엄호사격을 하기도 했다.

8월7일에는 침투한 북한군이 판문점 남방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미군 트럭을 습격해 3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사흘 뒤엔 서부전선에서 한국군 트럭이 습격당해 아군 3명이 사망했다.

8월 28일,

북한군은 판문점 동남쪽 30여m에 위치한 미군 막사를 기습, 미군 3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다.

9월5일에는 경원선 열차 폭파사건이,

13일에는 경의선 열차 폭파사건이 있 었고

동해상에서 조업중이던 어선을 여러 차례 납치하는 등

진행속도가 완 만할 뿐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하던 金聖恩 국방장관은

그 순간까지도 침투한 무장 공비들이 지난해와 유사한 작전을 펼칠 것으로 짐작했을 뿐

청와대가 목표 인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이날 오전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을 전화로 불러내 예비사단까지 동원해서 서울 외곽에 집중 배치토록 지시했다.

6·25 당시 해병 전투단장(여단장)으로 한국군 1사단 지역이던 문산 지역에서

美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수행했던 金聖恩 장관은

金新朝 일당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당 지역의 지리를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었다.

金 前 장관은 당시 자신의 추론이 어긋나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金新朝 일당이 나무꾼들을 풀어 준 지점에서 서울 眞寬外桐(진관외동)의 眞寬寺(진관사)까지

산악 코스로 행군을 하면 해병대도 이틀은 족히 걸리 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眞寬寺를 거쳐

北漢山 碑峰의 僧伽寺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기겁했지요.

중무장 하고 야간 산악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건

제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1968년 1월20일 토요일 오전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 주변의 병력배치 상황을 보기 위해

金聖恩 장관과 朴鐘圭 경호실장을 대동하고 청와대 정문까지 내려왔다.

이틀 후 월남을 방문하기 위해 전날 청와대에 들러 朴대통령에게 보고차 인사를 했던

崔宇根(최우근·육사3기) 수경사 사령관이 청와대로 달려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복 차림의 朴대통령이 정문에 서서 수경사 30대대 병력들이 배치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후부터 朴대통령은 감기를 앓아야 했다.

崔사령관의 인사를 받은 朴대통령의 얼굴엔 긴장감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곁에 섰던 朴鐘圭 경호실장이

『정보부장보다 빨리 오네?』하며 농담을 했다.

오후 2시경,

6군단 예하 3개 사단과 金載圭(김재규) 중장의 6관구 병력이 동원되어

전방에서부터 서울 외곽에 이르는 수십 겹의 방어선이 구축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장공비들이 이미 통과한 다음 병력을 배치한 것이었다 .

공비들은 자신들이 놓아준 禹씨 형제들의 신고보다 빨리 포위망을 벗어난 셈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에게

『주간에는 정밀 수색을 실시해 흔적을 찾고 야간에는 매복을 하라』고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金聖恩 장관과 점심을 함께 들며

『임진강이 겨울에도 얼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오』라며 아쉬워 했다.

金장관은 오후 2시경,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접했다.

받아 보니 북한산 북쪽 자락의 경기도 송추 유원지 부근에서

무장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실탄과 탄창 및 흘린 듯한 음식물 약간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거기까지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철통 같 은 방어선을 펼쳤는데

하루 만에 그 지역을 통과하면서 유실물 흔적을 남겨 두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朴대통령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보분석을 함께 하고 있었지요』

이때 金聖恩 장관은 결과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결정을 내렸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화로 蔡元植(채원식) 치안국 장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역에 甲種 비상을 걸도록 하고

세검정에서 정릉과 창동에 이르는 축선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월6일 「原州회의」에서 결정된 비상 경계령을 처음 적용한 것이었다.

甲種 경계령이 내려진 서울에서는 경찰들이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이무렵 무장간첩들은 북한산 僧伽寺 아래 기슭에 모여 휴식에 들어갔다.

계획대로라면 이날 오후에는 청와대 뒷산인 北岳山까지 가 있어야 했다.

 

金新朝 목사 의 증언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4일 동안 강행군했기 때문에 지쳐버렸던 것이죠.

원래 루트는

다음날인 21일 오후까지 북악산을 지나 밤 8시경에는 세검정 쪽으로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북악산을 타려면 공격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허리까지 눈이 쑥쑥 빠지고 발밑은 미끄럽고

더 이상 산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고 판단해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남은 산 하나를 둔 채 휴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碑峰 에서 세검정 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날 밤 金聖恩 국방부장관 은 저녁 늦게까지 朴대통령과 환담했다.

朴대통령은 감기가 조금 심해지는 듯 밤이 깊을수록 기침을 자주 했다고 한다.

金장관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한남동 공관으로 돌아왔다.

1월21일 일요일 오전,

金聖恩 국방장관은 청와대로 곧바로 출근해 任忠植 합참본부장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지도를 펴놓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金炯旭 정보부장이 드나들었지만 對간첩 작전권이 국방부로 이첩되고

사건 성질상 자신이 개입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별 말이 없었다는 것이

金聖恩 前 국방장관의 증언이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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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까부수러 왔수다(3) - 124 軍부대 - 김신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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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까부수러 왔수다(1) - 124 軍부대 - 김신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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