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joins.com/article/23920181
124군부대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반대 급부가 있었나.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을 안 때리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국군 현대화’란 반대 급부를 얻어냈다.
공군의 F-4 팬텀 전투기와 육군의 T-1 전차와 해군 잠수함이 들어온 것도 그때다.
당시 미국은 최신예 F-4 팬텀 전폭기를 이스라엘에는 판매하고 있었지만,
우리한테는 절대 팔지 않았다.
결국 우리도 보복계획 이후 F-4 팬텀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냈다.
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131100006
[김신조 특수부대의 1.21 사태. 실록 ] ~ 유용원의 군사세계
1967년 10월 초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康仁德(강인덕·북한국장,통일부 장관 역임·68) 중앙정보부 분석 과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서 제목은 「최근 북한의 對南침투에 관한 분석-북한의 冬季 게릴라 침투 豫想報告」.
朴대통령은 보고를 들으면서 밑줄을 치고 때때로 메모를 했다.
결론 부분에 이르자 朴대통령은 한 문장에 밑줄을 두 번이나 치고 있었다.
「북괴는 내년부터 冬季작전에 돌입하여 본격적인 인민전쟁이 시작될 것입 니다」라는 부분이었다.
북한의 동계 게릴라 침투작전을 예상한 보고가 끝 나자
朴대통령은 인터폰으로 『국방부 장관, 각 軍 참모총장들 다 들어오라고 해』라고 지시했다.
『康君, 이건 게릴라戰이라 중앙정보부 통제능력에서 벗어나는 거야.
그래서 좀 모이라고 했으니까 자네가 다시 한번 설명하게』
이날 오후
국방부 장관과 육해공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 앞에서 康과장의 설명이 끝나자
朴대통령은
『내가 조만간 全軍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 과 기관장들을 다 모아 놓고
對간첩작전 회의를 해야겠으니 자네는 이 내용 을 설명할 준비를 하게』라고 했다.
대통령은 金聖恩 국방장관에게는
『국방부에 對간첩 작전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할 테니 준비하시오』라고 했다.
「북한의 冬季 게릴라 침투 豫想報告」는 그때까지 중앙정보부에 속했던
對간첩 작전의 권한들을 대부분 국방부로 이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康仁德 과장이 이런 보고를 하게 된 것은
1967년 1월초 휴전선을 침투해 들어온 3인조 간첩을 체포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들은 서울 시내에서 소매치기를 하며 지내다 경찰의 불신검문에 의해 체포되었고
신원조회를 하는 과정에서 특이점이 나타나 對共수사기관에 이첩된 경우였다.
(康仁德 前 통일부 장관의 회고)
『세 명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지 않고 내려 왔습니다.
그저 서울에서 소매치기를 하며 돈을 쓰다가 신분증만 몇 개 구해서 월북하라는 것이 전부였는데,
당시로서는 특이한 경우였지요.
특히 6.25 이후 겨울에 휴전선을 통해 3인조를 내려 보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눈밭에 발자국이 남기 때문에 북한은 극력 피하던 방식이었거든요.
「왜 내려 보냈나」하는 의문을 가지고 다각도로 분석해 보니 冬季작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겁니다』 5·16 당시 康仁德 해병대 중위는
전략정보관으로 해병대 사령부에 근무하 다 중앙정보부에 차출된 경우였다.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군복을 벗고
분석국 과장, 부국장을 거쳐 1970년 12월 북한국장이 된 뒤 1978년에 퇴직했다 .
그는 매월 한 차례씩 북한 동향을 분석 보고하는 과정에서 朴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1967년 9월 초
金聖恩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북한이 게릴라 부대 를 만들었다는 보고를 접했다.
(金聖恩씨의 증언.)
『9월 초쯤 방첩대장 尹必鏞(윤필용)이
해안으로 침투하던 공비를 생포해 심문했더니
이런 정보가 있더라면서 보고를 해 왔습니다. 「124군 부대」였 지요.
정확한 규모나 위치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북한이 군사도발을 강 화할 것이란 판단을 했습니다』
방첩대의 정보는 비교적 정확했다.
북한은 1967년 8월12일 민족보위성 정찰 국 직속의 對南 공작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124군 부대」란 명칭을 가진 이 집단은
2400명에 이르는 부대원을 300명씩 8개 基地(기지)로 나누어 對南 유격훈련을 시작했다.
각 基地는 남한의 일 개 道를 담당했으며
제 6기지는 경기도와 서울 지역을 담당했다.
이해 가을 제 6기지 부대원 중 정예요원 35명이 선발되어 서울 침공 계획 훈련에 돌입했다.
이 중 제1조 15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고
나머지 4개조(각 5명)가 각기 다른 목표를 동시에 타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제2조는 美대사관저를 습격하여 대사와 그 가족을 살해할 동안,
제3조는 육 군본부를 폭파해 將星들을 살해하고
제4조는 서울 교도소 정문을 폭파하여 죄수들을 탈옥시키며,
제5조는 서울 서빙고동에 있는 방첩부대의 간첩수용 소를 급습하여
간첩들을 구출해 함께 월북한다는 계획이었다.
훗날 생포된 인민군 金新朝 소위는 자신이 선발되었을 때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임무가 실패하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부대원들에게는 당과 수령을 위해 죽는 것이 최대의 영광이었으니까요』
kookbang.dema.mil.kr/newsWeb/m/20110124/2/BBSMSTR_000000010023/view.do
1968년 1월6일 오전 10시,
朴正熙 대통령은 특별 기동차 편으로 강원도 원주역에 도착했다.
이날 야전군 상황실인 1군사령부 회의실에서 열린 「對간 첩 非常治安회의」에는
丁一權 국무총리와 全 국무위원, 金炯旭 중앙정보부 장, 任忠植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 사단장급 이상 지휘 관, 知事, 檢事長, 경찰국장 등
173명의 각급 기관장들이 참석했다.
개식사에서 朴대통령은
『북괴 만행을 봉쇄하고 무장 간첩을 섬멸하는 데 있어 유의할 일은
軍官民이 혼연일체가 되어 상호협조체제를 확립하여 汎국민적 對간첩작전을 펴야 한다』고 강조하고, 『정부는 이를 위해 향토방위 법의 제정을 서두르고 있으며 앞으로 이 법을 잘 운용하여
지방 주민의 勝共정신을 강화하고 지역적 방위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말했다.
이 회의에 중앙정보부 康仁德 분석과장도 참석했다.
그는 석 달 전 청와대 에서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참석자 전원에게 다시 한번 설명하면서
『이번 1월부터 시작될 북한의 동계 작전은 종래와 다른 대규모 게릴라 작전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對간첩 작전시 각종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들어가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날 특히 朴대통령은
참석한 金炯旭 부장을 향해 중앙정보부의 越權(월권)행위를 거론하며 질타했다.
(金聖恩 당시 국방부 장관의 설명)
『서해 바다에 간첩선이 나타나면
정보부(김형욱)가 해군을 지휘해서 해군 사령관 노릇을 하거나,
육지에서 공비가 나왔을 때는 해당 지역 中情 지부장이
軍 사령관 머리 꼭대기에 앉아 병력을 여기 배치하라,
저기 배치하라는 식으로 월권행사를 하는 모양인데 …
중앙정보부는 그런데 나가는 게 아니고
북괴의 정보를 수집해서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요.
앞으로 軍 작전에 정 보부는 일체 개입하지 마시오』
이날 金炯旭 中情부장은 얼굴이 벌개져 회의 내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고 한다.
『첫째, 朴대통령은
金炯旭이 지휘하여 수사한 「동백림 사건」이 심각한 외교문제를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知識人들을 고압적으로 수사하는 정보 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듯합니다.
두 번째는 그 날 대통령도 지적 했듯이
對간첩작전이 벌어지면 현지에서 중앙정보부의 월권행위가 하도 심해
군인들이 작전을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비 두 세명만 출몰해도
군, 경찰, 정보부, 방첩대 등이 서로 다른 명령 계통을 가지고
현지에서 대립하다 초기 대응을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공비가 나타날 경우 상황에 따라 비상경계령을 甲, 乙, 丙 세 가지로 분류하기로 했다.
甲種 비상령은 경찰력만 동원해도 되는 상황 ,
乙種 비상령은 군·경찰이 합동 대응해야 하는 상황,
丙種 비상은 전적으 로 軍이 통제권을 가져야 하는 상황으로 구분했다.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으로 對간첩 작전 기구를 2월 초까지 구성하기로 했다 .
이 기구는 軍을 중심으로 경찰과 정보부가 협조하는 체제로 결정됐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날 오후 6시 회의를 마친 뒤 헬기 편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원주회의」에 참석하고 돌아 온 康仁德 분석과장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자신의 분석대로라면 북한의 동계침투작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전방에서 는 아무런 기미가 없었다.
답답해진 그는 매일 아침 출근하면 국방부에 나가 있던 정보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야, 들어오냐?』라고 물었다.
그때 마다 『아직 별 일이 없습 니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康과장은 속이 탔다.
이 무렵 金新朝가 포함된 124군 부대 35명은
각자 임무에 따른 반복 훈련을 거듭하며 출동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1월13일,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金正泰(김정태)는 공격 목표가 너무 분산되었다면서 기존의 계획을 수정,
공격목표를 청와대로 한정시키고 朴正熙 대통령만 살해하는 임무로 축소시켰 다.
인원도 35명에서 31명으로 줄였다.
공격시점은 1월21일 20시 정각.
공격목표와 날짜가 정해지자 청와대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주요 지점별 공 격조를 나눠 훈련에 돌입했다.
청와대 습격 D데이에 임박해서는
사리원에 있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청사를 대상으로 실전 연습을 하기도 했다.
북한의 암살목표로 결정된 朴正熙 대통령은
1월15일 오전 10시부터 11시40 분까지 청와대에서 年頭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는 경제건설과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부문의 성장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사물에 대해 긍정적이고 善意的 인 관찰과 비판을 하는 것이
제2경제(경제의 윤리적 측면)의 요체』라고 말 했다.
예정시간인 1시간보다 40분이나 길어진 이날 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여유있게 미소를 섞어가며 답변했던 朴正熙 대통령은
13개의 질문 중 꼭 한번 金正濂(김정렴) 상공부장관의 조언을 얻었을 뿐
정확한 통계수치를 들며 혼자서 답변했다.
朴대통령은 5·16 혁명 이후 4번째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對월맹정책에 대해 서는 평소의 강경론을 다시 강조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기의 월남관계 문서 관련^파일)
dams.pa.go.kr:8888/dams/DOCUMENT/2013/12/17/DOC/SRC/0104201312179126700091267013434.PDF
이날 오후 朴대통령은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초도 순시를 했다.
오후 4시20 분부터 6시30분까지 재무부에서는 徐奉均(서봉균) 재무부 장관이
재무행정의 9大 목표를 브리핑하는 가운데 京釜고속도로 재원 조달 방안을 보고했다.
1968년 1월16일 朴正熙 대통령이 농림부, 건설부, 상공부를 연두순시하며
특용작물의 중점 지원, 서민 주택 건설에 주력하라고 각 부별로 지시를 하 던 시각,
金新朝 일당은 한국군 25사단 마크가 부착된 국군 복장에
개머리 판을 접을 수 있는 接鐵式(접철식) AK소총과 수류탄 및 對戰車(대전차) 수 류탄으로 무장하고
황해도 연산에 주둔한 부대를 출발했다.
이들은 자정 무렵 開城에 도착,
다음날인 17일 새벽 비무장지대內 최남단 초소가 있는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이곳 에서 야간 침투를 위한 僞裝(위장)을 했다.
이날 국방부는 「原州 회의」에서 朴대통령이 내린 특별지시에 따라
분산된 對간첩 작전을 일원화시키는 새 기구안을 마련해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새 기구안은 대통령 직속으로 對간첩작전을 총지휘하며,
정책을 마련하는 중 앙협의회와 정책을 실천하는 대책본부를 두고
대책본부는 합동참모본부에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월17일 밤 8시,
무장공비들은 美 2사단 지역의 正面(정면)을 향해 포복으로 접근하기 시작,
10시 정각에 철조망이 가설된 철책선에 도착했다.
이들 은 절단기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넘어 은밀 침투를 시작했다.
124군 부대 무장공비들은
軍 GP들이 요소 요소에 있는 휴전선 남방한계선 부터 임진강을 건너기까지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은밀 침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나 냄새까지 죽이며
지형의 그늘진 부분을 이용해 이동 하는 特殊戰(특수전) 기술이다.
초소나 경비병 근처에서는 땅에 납작하게 붙어
한 시간에 수 m 정도만을 이동할 정도로 인내력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
金新朝를 포함한 무장공비들은 이미 훈련과정에서 이런 능력을 배양했고 ,
야간 침투중 인기척을 느꼈을 경우 부동자세로 한 시간 동안 버티는 훈련 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둠속에서 상대방이 이 쪽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 게 하는 훈련이었다.
이들은 美 2사단 구역을 통과하여 고랑포에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약 10km의 구간을 엎드리고, 기고, 달리고, 숨고 하며 먼동이 틀 때엔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파주군과 법원리 사이의 작은 산 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경비병이나 지뢰밭을 만난 적도 없었다.
이들이 선택한 침투로는 임진강과 휴전선이 가장 근접한 지역일 뿐 아니라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서해바다로 연결된 임진강의 중·하류가 시작되는 임진각 부근은
海水가 滿潮(만조)때마다 밀 려 올라와 얼음이 비늘처럼 솟아오르고,
얼지 않은 바닷물이 곳곳에 고여 있어 도보로 건널 수가 없는 곳이었다.
대신 고랑포 지역은 상류에 속해 海水의 영향이 없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얼어 있어 이들이 침투로로 선정할 수 밖에 없었다.
휴전선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루트가 美軍이 관할하는 지역이란 점도 고려되 었다.
미군 지역에서는 무장침투 간첩을 한국군으로 誤認(오인)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군 지역 철책이 舊型(구형) 철조망이었기 때 문이었다.
^2부에서 계속^
https://jbk1277.tistory.com/333?category=1066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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