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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38]에서 발췌^편집
그날도
토정은 걸인청에 나가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오는 유민인지
마흔이 넘어보이는 한 여인이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걸인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인은 금방 쓰러질 듯 비칠거리면서 걸인청 문을 들어섰다.
때마침 토정이 그걸 보고 여인에게 달려갔다.
내게 몸을 의지하시오.
내, 안으로 부축해드리리다."
토정은 여인이 가슴에 품고 있는 보퉁이를 받아들었다.
토정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들어 토정을 바라보았다.
남루한 옷차림, 굶주림과 병에 찌든 얼굴에 유난히도 까만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그 눈은 토정의 다정한 눈길과 마주치자 금세 생기를 잃었다.
순간 여인은 눈을 스르르 감더니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토정은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진 여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 눈, 그 까만 눈. 토정은 그 당돌하게 빛나던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희수,
그대가 여기에 어쩐 일이오?"
토정이 이름을 부르자 여인이 감았던 눈을 떴다.
여인은
자신의 온 생명력을 눈동자 속에 집중시킨 듯 눈에서 광채가 났다.
"선비님,
저를 잊지 않으셨군요."
희수의 눈에 눈물이 그득 고였다.
"잊을 리가 있겠소."
희수, 해사의 여인 희수.
운명의 사슬에 매여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하룻밤을 바치고
평생을 독수공방해야 했던 여인 희수.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하룻밤을 함께 보냈던 여인 희수가
마흔이 넘은 병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토정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희수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다시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었다.
토정은 몸소 여인을 들쳐 메고 객사로 옮겼다.
의원을 불러 진료를 하고 서너 시간이 지나서야 희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다시 눈을 뜬 여인은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듯
근심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토정의 얼굴을 뚫어져라 하고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었던가.
지아비도 아닌 남자를 평생을 바쳐 찾아다닌 것이…
캄캄한 밤중에 만난 밝은 등불 같았던 분,
그분을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이었다.
토정은 토정대로 얼마나 그리워한 여인이었던가.
민이를 저 세상으로 보낸 이래
세상을 등지고 살아온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맺어진 인연.
이제 그 여인이 토정에게 다시 운명처럼 나타난 것이었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언제 그 열매가 맺어지는지 하늘의 계절은 길고 짧음을 잴 수 없었다.
십 년, 이십 년 심지어 백 년, 이백 년이 되어야 나타나는 인과응보도 있으니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 깊은 뜻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터였다.
"내, 다시 해사를 찾아갔었소.
그대는 이미 그곳에 없더구려."
"···"
"그래, 그동안 어찌 살아왔소?"
토정이 그윽한 목소리로 묻자 희수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득 고였다.
마을 풍습대로 알지도 못하는 나그네에게 첫 정을 바쳤지만
희수는 그 첫 정이 도무지 잊혀지질 않았다.
처음 겪는 남녀 화합으로 만리장성을 쌓았대서가 아니었다.
희수는 토정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느꼈고,
처음으로 사람으로 태어난 기쁨을 느꼈다.
토정이 해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 속을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서 희수는 생명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고 남자를 느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뜻밖의 감정으로 희수는 혼란에 빠졌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살을 맞대고 토정을 받아들였으나,
한 사람의 사내가 그토록 살갑고 소중하게 느껴져 본 일은 처음이었다.
희수는 토정이 잠에 들었을 때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토정이 자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울 지경이었다.
어찌나 행복했는지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월이,
아니 그날 일어났던 일조차 까마득한 옛날 같았다.
희수는 잠든 토정을 내려다보면서 초저녁부터 일어난 일들을 반추해보았다.
그날 굴을 따던 희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갓바위쪽에서 날아왔다.
생각해보면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파도소리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희수의 운명을 바꿔놓는 신호였다.
"희수야,
굴 그만 따고 이쪽으로 나오그라."
희수는 어머니의 부름에 따라 바구니를 팔목에 걸고 개펄을 걸어나갔다.
갓바위에 이르는 동안 어머니는 내내 손을 저으며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희수는 무슨 큰일이 있는가보다 하면서 좀더 빨리 걸어갔다.
갓바위에 이르자
어머니는 희수가 손에 든 바구니와 호미를 나꿔채고는 희수의 엉덩이를 밀었다.
"어서 집으로 가서 목욕허그라."
"무슨 일인데요?"
"가서 얘기하마."
열일곱,
익을 대로 익어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던 희수에게 드디어 '운명'이 다가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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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서둘러 목욕을 하였다.
무슨 일일까.
목욕을 하고 나서 어디 신당이라도 간단 말인가?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것일까?
갑자기 목욕은 웬 목욕이람.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어디서 구했는지
깨끗한 치마 저고리 한 벌을 내놓았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속곳들도 잘 개켜져 있었다.
"입그라."
"무슨 일이어요, 어머니?"
"가면 알어. 이걸 입고 따라오니라."
희수는 어머니의 재촉에 서둘러 새 옷으로 갈아입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벌써 해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서쪽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토담 밑에 곱게 피어난 봉숭화가 한껏 멋을 부리고 있었다.
희수가 간 곳은 일 년에 두어 번 손님이 찾아올까 말까 한 주막이었다.
희수는 어머니를 따라 뒷문으로 들어가 별채 마당으로 갔다.
마당에는 친구 명옥이도 제 어머니를 따라 와 있었다.
"어머, 희수야. 너 여기 웬일이여?"
"몰라, 엄마 따라서 왔어."
"큭큭큭!"
명옥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명옥은 무슨 까닭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무슨 일인데?"
"쉿!"
명옥이 손가락을 세우면서 희수의 말을 막았다.
이윽고 주모가 나타나더니 희수의 어머니와 명옥의 어머니를 데리고 별채 쪽으로 사라졌다.
어른들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명옥이 입을 열었다.
"너 오늘 머리 얹는구마."
"무슨 말인데?"
"바보야.
객사에 든 남자들 말이여. 남정네들이 있지라."
"그래? 그런데?"
"그런데가 뭐여? 남자 씨를 받아야제.
우리 동네에는 남정네가 없으니 지나가는 나그네 씨라도 받아야지라.
너희 엄마가 벌써 주모한테 말해놨었다구.
오늘 밤 우리는 저쪽 별채에 있는 남자들하고 잔단 말이여."
"뭐여?"
"놀라긴? 남자가 뭐 짐승이디야?"
희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로만 들어왔던 남자를 이제 보게 된 것이다.
이따금 주막에 들른 남자들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성숙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같이 잠을 자야 한다니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난데없이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혔던 것이었다.
희수는 숨이 가빠졌다.
"너 떠는구나. 계집애, 내숭은? 아무것도 아니여.
엄마가 그러는데 겁낼 거 없대.
오히려 좋은 거래, 계집애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모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고는 희수와 명옥에게 방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희수와 명옥은 주모가 가리킨 방으로 들어갔다.
"너, 잘해야 하니라."
안심이 안 되는 듯 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 나 무서워요."
"무섭긴. 엄마도 이렇게 해서 너를 낳았다.
너도 아기를 가져야 돼여.
우리 해사 마을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조차 갖지 못한단 걸 알고 있잖는가.
처녀로 늙어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세상에서 이것이 첫 남자이고 마지막 남자라고 여기그라.
더이상 남자는 없다 이 말이구마."
어머니는 밖으로 나갔다.
창문에 땅거미가 스물스물 기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닭이 때늦은 울음을 길게 뽑아내고 있었다.
"명옥아, 이리 따라 오그라."
주모는 명옥을 먼저 데리고 나갔다.
희수는 오들오들 떨면서 방에 혼자 남아 있었다.
"희수야." 주모는 이번엔 희수를 불렀다.
희수는 벌떡 일어났다. 현기증으로 몸이 비틀거렸다.
"이리 따라 오그라."
희수는 주모를 따라 뒷채에 있는 방문 앞에 가 섰다.
방문을 연 주모는 희수를 방 안으로 밀어넣었다.
방 안에는 용모가 수려하고 점잖은 선비가 앉아 있었다.
희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룻밤 만에 끝날 인연이라는 걸 알면서도
희수는 가슴 속에 그 선비의 모습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튿날 토정 일행이 해사를 떠나고 나자, 희수는 일도 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하룻밤 쌓은 정이 깊은 그리움이 되어 마침내 병이 되었던 것이다.
마냥 즐겁게 뛰어놀고 일하던 장난꾸러기 처녀 희수는
어느새
그리움에 애간장을 태우는 여인으로 성숙하게 되었던 것이다.
달아 님께 아뢰어다오
서방 정토까지 비치어 아뢰어다오
님 곁으로 가기를 손 모아 비는
이 몸이 있다고 아뢰어다오
아으, 이 몸 버려두고
먼저 48대원(大願) 이루시오면 어이하랴
아으 어이하랴
희수는 날이면 날마다 눈물과 한숨으로 보냈다.
같은 밤에 같은 일을 겪은 명옥은 그런 희수를 안타까워했다.
그런다고 어찌 할 방도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어쩌냐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희수의 상사 증세는
매달 찾아오던 달거리가 없으면서부터 점점 더 심해졌다.
희수는 매일 실성한 여인처럼 넋을 놓고 지냈다.
그러면서도 열 달이 차자 희수는 아이를 낳았다. 사내아이였다.
명옥은 하루 늦게 아이를 낳았다. 계집아이였다.
희수는 아이에게 규철(圭澈)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토정이 일러준 이름이었다.
아이에게 정을 붙인 희수는 병세가 많이 나아졌다.
일도 찾아다니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가 두 살 나던 해에
희수는 아이를 동냥승에게 붙여 해사에서 내보냈다.
음기가 센 마을에서 요절하는 것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뒤 희수도 해사 마을을 떠났다.
그 선비, 이지함을 찾기 위해서였다.
찾아본들, 희수를 알아볼 리도 없건만,
그저 얼굴이라도 한번 보아야만 살아갈 기력을 찾을 것 같아서였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살 수만 있어도 희수는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희수는 무작정 해사를 떠났다.
희수는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니면서 잡일도 거들고 장사도 해가면서 이지함을 찾아다녔다. 그렇다고
이지함의 성명을 함부로 입에 올리며 찾지는 않았다.
혹여라도 자신이 찾아다니는 일이 그 선비에게 누가 될까봐 저어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지함을 찾는 일이 더욱더 힘들었다.
그렇게 떠돌던 끝에 희수는 마침내 삼개나루에서 토정을 찾았다.
그러나 감히 토정에게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희수는 동막골 새우젓 장수들 틈에 끼어 일손을 거들고,
바느질을 하면서 매일같이 토정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먼 발치서라도 토정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꼭 보아야만 돌아갔다.
그 뒤 토정이 포천 현감으로 제수되자 희수는 포천까지 따라갔다.
그러나
언제나 토정에게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포천에서 희수는 굶기를 밥먹듯이 했다.
그러나 백성들 문제로 노심초사하는 토정의 모습을 한번 보기라도 하면
그런 고통쯤은 말끔히 잊을 수 있었다.
토정이 포천에서 일을 마저 마치지 못하고 조정에 송환되었을 때에는
정한수를 떠놓고 무사를 비는 기도를 간절히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토정이 금강산을 다녀와 임진 방비차 팔도를 주유할 때에도
그림자처럼 토정을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토정이 어디론가 은둔하면서 그만 토정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토정을 찾아 전국을 헤매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희수는 마침내 병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토정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힘겹게 아산현까지 흘러들어온 희수는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거들면서
밥술이나 얻어먹기를 청했다.
몸을 잠시 의탁하며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다시 토정을 찾아나설 참이었다. "병든 몸으로 그럴 게 아니라 걸인청에 가보오.
거기 가면 병자들도 쉽게 할 수 있는 일거리도 있고,
밥 먹는 거 하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오."
"아직은 거지가 아니니 일을 맡겨주세요.
힘 닿는 대로 열심히 하겠어요."
"일을 못할까봐 하는 소리가 아니라오.
병자한테 힘든 일을 시키기가 민망해서 그러는 게지."
"괜찮아요. 주막일쯤은 거뜬히 할 수 있어요."
희수는 주모에게 사정을 하여 주막에서 일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때 주막에 와서 술을 먹고 있던 사람들의 말에 희수 여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심결에 들어 넘기던 대화 속에서 몽매에도 그리던 이름 석 자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우리 현감은 세상에 둘도 없이 어진 분이셔."
"그러게 말이야.
그 어른은 원래 기인으로 유명하신 분인데 저렇게 백성을 잘 보살필 줄은 나도 몰랐다네."
"나도 그 분이 지은 <토정비결>이라는 책을 보았는데
하여튼 그걸 읽으니 살 맛이 절로 나더구만."
"아무튼 이지함 어른은 하늘이 낸 분이시네."
주막에서 들려오는 남정네들의 말소리 가운데에서
'이지함'이라는 이름 석 자가 불쑥 튀어나왔던 것이다.
희수는 주모에게 넌즈시 이지함 그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아니 그 유명한 토정 선생도 모르단 말이우?
그이로 말하자면 우리 아산 현감이라는 직분이 너무 작아서
도무지 빛이 날 수 없는 큰 인물이라우."
주모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던 주당들이 목청을 돋우었다.
"아, 타관에서 오신 손님네야 아실 리 없지.
토정 이지함,
그분은 세상일을 훤히 다 꿰뚫고 있어서 무소불능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는 분이라오."
희수는 그 길로 걸인청으로 달려갔다.
마침 그곳에는 사또 이지함이 순시를 나와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순간 수십 년 기다려온 희수의 인내는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희수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모두려 안간힘을 쓰며 걸인청으로 들어섰다.
희수가 비칠거리며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토정이 달려나와 부축했다.
아, 꿈에서도 그리던 그분이 희수를 달려와 맞은 것이었다.
그분의 그윽한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희수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토정은 희수 여인의 손을 꼬옥 잡았다.
기구한 인연이었다.
"선비님…"
"고생이 많았소.
그렇지 않아도 어딜 갈 때마다
가끔 나를 심상치 않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는 걸 느낀 적이 많았소.
그게 그대일 줄은…"
"선비님…"
"그러지 말고 차라리 모습을 드러냈더라면…"
토정은 눈을 지그시 감고 여인의 사주를 다시 열어보았다.
이윽고 토정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대가 나를 찾은 게 이생만은 아니었구료."
"···"
"미안하오. 세세생생 그대에게 눈물만 흘리게 하다니."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이제야 화담 선생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소.
천안 삼거리에서 선생님은 신라에서 찾아온 아내라며 어떤 처녀를 지목하였었소.
그리고
두륜산에서 갑자기 해사 마을로 길을 바꾸시길래 어찌 그러시나 했었소.
후에 정휴 일행이 우리를 기다려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것만도 아니었구료.
선생님은 벌써 우리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오."
"저희 마을에 오시던 적 얘기시옵니까?"
"그렇소.
그대와 인연이 있음을 아시고 그리로 인도해주신 것이오.
그대는 먼먼 옛날부터 나를 찾아 헤매었소.
이제는 내 곁에 머물면서 편히 쉬시오.
원(願)도 갖지 말고, 원(寃)도 갖지 말고…"
토정은 희수의 손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때부터 희수는 걸인청에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손수 맡아서 했다.
토정을 만났다고 해서 더 가까이 모시는 것도 아니었다.
토정 또한 희수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다만 자주 걸인청에 나가 희수가 하고 있는 일을 돌아다보면서
세세생생 품어 왔을 희수의 그리움을 눅여주었다.
그러다 토정이 과로로 쓰러져 이질에 걸리자 희수는 그의 머리맡에서 시중을 들었다.
토정은 그것을 말리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사연은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다들 무슨 깊은 뜻이 있으려니 하는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에 어머니를 잃은 산휘는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는 희수 여인을 어머니처럼 극진히 받들어 모셨다.
www.youtube.com/watch?v=aLfJurQB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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