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39]에서 발췌^편집
점심 나절이 되자 토정의 아들 산휘가 방에 들어와 앉았다.
산휘도 아버지의 임종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신시(申時)가 되자 희수 여인이 가벼운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그것을 들이밀자 토정이 빙그레 웃었다.
"여보시오, 이걸 먹다가 체하면 어쩌라고 내오는 거요?"
희수 여인이 당황했으나
토정은 더 껄껄 웃으면서 그 여인의 손을 잡아들였다.
"아니오. 이젠 먹을 필요가 없는 시간이 되었다는 말이오.
내게 품었던 한이나 원이 있으면 이제 다 푸시오.
내가 죽으면 그나마도 누구에게 말하겠소."
여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현수 수좌를 불러주오."
토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면서 젊은 중이 방으로 들어왔다.
옛적 화순 운주사에서 보았던 지족 선사의 상좌였다.
"아니?" 정휴가 현수 수좌를 보고 놀라자
토정이 정휴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맞네.
이 수좌가 해사에서 낳은 아들 규철이라네.
내가 그때 운주사에서 의심스럽게 보았었는데
나중에 사주를 짚어보고 이 아이가 있을 만한 곳을 수소문한 끝에
바로 운주사의 그 상좌승이 바로 내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불러온 것이라네.
지난 달에야 만났다네."
현수 수좌는 어머니 희수 여인 곁에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았다.
"아버님."
산휘가 지극한 정으로 담고 아버지를 불렀다.
"오냐."
토정 역시 정을 담뿍 담은 목소리로 산휘의 부름에 대답했다.
"아버님."
이번엔 현수 수좌, 아니 규철이 아버지를 불렀다.
세상에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것이었다.
"오냐. 내 아들아."
토정이 팔을 뻗어 규철의 어깨를 잡았다.
울음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규철의 어깨가 심하게 들먹였다.
토정이 산휘와 규철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형제이니라.
규철은 기왕에 출가했으니 후사를 두지 말아라.
너희는 내가 가장결에 이른 대로 가계를 꾸려 가면서 임진년을 준비하거라.
내 일은 이미 다 끝났다."
"아버님, 하늘에 올라가셔서 어머님을 만나게 되시거든…"
"오냐. 네가 장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전해주마."
아버지의 말에 산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보게 정휴." 토정이 정휴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자네가 있어서 이 생은 외롭지 않았네."
"형님!"
"벗을 홀로 남겨두고 가려니 마음이 아프이."
토정이 말에 정휴의 가슴 속이 꽉 메었다.
평생 동안 의지하고 따랐던 토정, 정휴의 토정이 떠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정휴의 온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휴는 내색을 않으려 애를 쓰면서 토정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청했다.
"한 말씀 해주십시오."
벌써 문 밖 대청으로 현의 관리들이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조금씩 흐느끼고 있었다.
마당에도 사람이 가득했다.
그리고 멀리 대문 밖으로도 울먹이고 있는 백성들이 보였다.
토정은 그런 바깥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내가 어디 남을 위해 살았던가, 다 나를 위해 산 거지.
세상을 위한다고? 백성을 위한다고? 다 거짓일세.
이 세상은 내 세상, 내가 이 꼴이라서 세상도 이 모양 아닌가.
이제 내 세상, 내 우주는 문을 닫는다네.
나도 죽고, 그대들도 죽고, 우리 모두 죽는 것이라네."
말을 마친 토정은 피곤하다면서 아들 산휘에게 자리를 깔라고 했다.
산휘가 자리를 마련하자 토정은 그 위에 누웠다.
현수 수좌가 베개를 받치고, 희수 여인이 삼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희수 여인은 손부채를 들고 토정을 향해 천천히 부쳤다.
토정은 몇 번 눈을 껌벅이다가 감았다. 침묵이 흘렀다.
여름해가 길어서 신시(申時)가 넘어 유시(酉時)가 되어가는데도
해는 서산마루에 아직 높이 걸려 있었다.
창문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이윽고 유시(酉時)가 되었다.
의원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희수 여인이 숨죽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어 산휘와 현수가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관리들이
그제서야 토정의 임종을 알아차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를 따라서 마당에 모여 있던 아산현의 백성들이 울기 시작하였고,
다시 바깥에 있던 백성들도 곡을 터뜨렸다.
곡소리는 한동안 아산현에 진동했다.
1578년(戊寅年, 62세), 선조 11년 음력 7월 17일이었다.
토정이 돌아가고 며칠 뒤 희수 여인도 그의 뒤를 따랐다.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고 걸인들을 돌보던 희수 여인은 어느날 밤 잠에 든 뒤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 사후를 처리하느라 남아 있던 산휘와 규철 형제는
희수 여인의 장례를 치른 후 토정의 묘가 바라다보이는 앞산 양지바른 곳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아산현에는 곧 새 현감이 부임했고, 산휘는 한양으로 돌아갔다.
현수는 그가 머물던 절로 다시 돌아갔다.
정휴 역시 온 세상을 잃은 허탈한 심정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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