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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다시 찾아온 두무지 - 소설^토정비결(下-39)

힘을 잃어가는 구곡성을 보는 순간 토정의 죽음을 직감하고 아산현으로 달려온 정휴는

걸인청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다시 토정에게 갔다.
정휴는 간밤에 토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줄로만 믿고 있었는데 토정은 그때까지도 꼿꼿했다.

토정의 곁에는 역시 희수 그 여인이 앉아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정휴가 방에 들어서자 여인은 옷가지를 챙겨들고 밖으로 물러갔다.
"편히 쉬었는가?"

"예, 워낙 먼길을 걸었더니 잠이 깊었습니다."
"용우는 자네가 데려가주게."
"예."
"자네도 이제는 불도에 더 깊이 들어가게.

공연히 나를 따라다니느라 헛수고만 많았으니…"
"형님…"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어서 묻게."

토정은 숨을 약간 거칠게 쉬긴 했으나 음성은 한가닥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휴는 그동안 궁금히 여겼던 것을 끄집어내어 토정에게 물었다.

"형님께서 임진년 준비를 갑자기 거두시고 아산 고을로 내려오신 뜻을 헤아려보았습니다."

"그래,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토정이 자못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인간이 천리(天理)를 거스르지 못하므로…"
"하하하!"
정휴가 말끝을 채 마무리하기도 전에 지함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아닐세.

율곡이 임금에게 십만양병을 주장했으나 허사가 되어버려,

내가 땅을 치며 아쉬워한 것은 이미 알고 있겠지?"
"예."
"그리고 내가 개마산을 지나면서 두무지라는 박수를 만났다는 얘기도 했을 터."
"그러셨지요."
"내가 율곡을 내세워 정병 십만을 길러야 한다고 임금에게 누차 상소했으나

조정에서는 들은 척도 아니하여 낙심해 있을 때 홀연히 두무지 그이가 나타났다네."
"목을 매고 돌아가실 때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더니 그 약조를 지켰군요."
"그런 셈이지. 그 약속을 지키러 나타난 거였지."
토정은 눈을 감으면서 두무지가 다시 나타났던 때를 회상했다.

토정은 십만 양병을 비롯한 임진 대환난 대비책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민에 빠졌다.

운명의 검은 구름은 시시각각으로 몰려오고 있는데,

그것을 물리칠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일러줘도 도무지 알아차리지를 못하였다.

사태는 점점 위급해져 갔으나 토정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일이 아니었다.

역사(易士), 술사(術士) 들이 동분서주하면서 토정을 돕고는 있었으나

토정은 그것이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토정 역시 개마산 천지봉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하던 두무지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토정은 하루도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다른 계책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시(子時)가 되자 홀연히 방안이 밝아지면서 그 빛을 타고 두무지가 나타났다.

천지봉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두무지 선사(仙師)!"  "맞소. 나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를 오셨습니까?"
"자네가 너무 부질없는 일에 진력하고 있어서 왔지."


            "부질없다니요? 어르신께서도 그토록 걱정하시던
          문제입니다."
            "한때는 나도 그랬었지."
            "한때라구요? 어르신께서는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주겠다고 목까지 매셨습니다."
            "그랬지.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네. 내가
          자네에게 그 짐을 벗도록 해주겠네."
            "제 짐을 벗겨주시겠다구요?"
            두무지는 몹시 애처로운 눈길로 토정을 바라보면서
          그의 천계 이야기를 시작했다.

            - 내가 목을 매자 홀연히 천계가 열렸네.
          태극궁(太極宮), 나는 이렇게밖에 그곳을 설명할 수
          없네. 그토록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왜 그리
          멀다고만 생각했는지, 그곳은 잠자다 일어나 마주친
          세상처럼 낯익었다네.
            나는 몹시 흥분해서 조물주를 찾아다녔지.
          조물주라면 내가 한번쯤 호되게 따져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네.
            그러나 천계를 아무리 뒤지고 다녀도 조물주를 찾을
          수가 없었다네. 하도 허무한 생각이 들어 좌절하여
          길바닥에 앉아 있었지. 그때 누군가 나에게 나타났네.
            그런데 내게 나타난 것은 조물주가 아니었다네.
          지리산이나 금강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인의
          모습을 한 노인이었다네. 그는 진한 황색 도포에 감색
          두건을 쓰고 있었다네. 노인은 달빛을 받은 구름처럼,
          햇빛을 받은 솜처럼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
            나는 그가 조물주가 아니라서 섭섭하긴 했으나
          무릎을 꿇고 호소했지. 하늘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거든.
            "천사(天師)님, 저를 굽어살펴주옵소서. 내 나라
          조선의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져주십시오. 고려
          말에서부터 시작된 이 백성들의 피폐는 이제 극에
          이르러 질병만 한번 쓸고 지나가도 수천 수만의
          목숨이 파리처럼 떨어져나가고, 기근이 한 차례만
          들어도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때에 임진 대환난이라는 엄청난 병겁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조선 하늘에 밀려드는 먹구름을
          거두어주소서."
            내가 그렇게 도탄에 빠진 조선 백성의 고통을
          호소하자 노인은 빙긋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네.
            "나는 조물주의 명을 받드는 태극궁의 백성
          진무사(震舞沙)요. 나는 조선에 새 사직을 세우려고
          왔소."
            "새 왕조를 세워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늘은 땅일을 놓고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오."
            "그러면 새로운 사직을 세운다는 것은 무슨
          뜻이옵니까?"
            "조선에 세울 사직은 고려도 아니고 신라도 아닌데,
          하물며 이씨 조선이겠는가. 태극궁이 세우는 사직은
          선천 사직 하나에 후천 사직이 더할 뿐이라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는 그대가 미륵을 만나고부터 천불천탑을 쌓던
          이야기며, 지리산에서 숯을 구워 팔던 숯장수라는
          사실, 그리고 개마산 천지봉에서 연일 우리 태극궁을
          힐난하던 박수였다는 것까지 낱낱이 다 알고 있소.
            그대가 목숨을 바쳐서까지 풀어보려 했던 조선
          민족의 수난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소.
          그렇게 답답해 하는 그대에게 나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소. 조선에서는 앞으로도 사화 당쟁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재난이
          찾아들기 위해 줄을 잇고 있소."
            나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도. 그러나 그곳에 내가 있고
          그 진무사 노인이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네.
            눈을 돌려 주위를 돌아보니 그 상(相)이 아주
          가관이었다네.
            태극궁에 이르는 문 앞에는 계룡(鷄龍)이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고, 백학(白鶴)은 날개를 접은
          채 하염없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네.
            "계룡이 꿈만 꾸고 있고, 백학이 날개를 펴지
          못하는 것은 진방(震邦) 안에서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이라오. 또한 이것은 천국에서 준 선천
          명수(命數)를 다 쓰고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두무지 당신은
          하늘만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오."
            "저는 지금 진무사 어른께서 하시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도대체 제게 천불천탑을
          쌓도록 시킨 미륵은 어디 있고, 제가 수없이 많은
          나날을 피맺힌 목소리로 기도를 해도, 단 한마디
          응답조차 안하신 조물주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진무사는 두무지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지금 조선은 술에 취하고 불이 타오르는 형상이오.
          취한 자가 도덕이나 윤리를 알 바 없고, 타오르는
          불길이 태울 것, 안 태울 것을 가릴 리 없소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사대부와 백성들이 예의와 범절을
          지킬 리 없고,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구분할 리가 없습니다. 다만 불길이 만물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취기가 올라 기고(氣高)하기가
          만장(萬丈)이나 된 사람처럼 방약무인한 것은
          시대적인 추세이며 우주의 명수(命數)인 것이오."
            "왜 조선만이 그러합니까?"
            "조선은, 나무로 치자면 근간(根幹)이라오. 세계의
          가운뎃자리란 말이오. 땅이 숨쉬는 단전의 자리.
          그러므로 선천의 역사가 제일 먼저 시작된 곳도
          조선이었듯이 선천 말세에 가장 먼저 그 기가 빠지는
          곳도 조선이라오.
            지금 근간은 선천의 운이 다하여 몹시 허덕이지만
          줄기나 잎은 아직 그 소식을 모르고 있소. 뿌리가
          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썩고 난 다음에야 줄기가
          썩고, 그 다음에 이파리에 단풍이 든다오.
            그 이파리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이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것은 늦게 피는 아름다움일 뿐 곧
          사라질 것이오."
            "그러면 지금은 근간만 썩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오. 그래서 조선이 썩어가고 있다오. 조선
          땅으로 내려간 기가 이미 소진했다오."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합니까?"
            "지금이 선천 말세(先天 末世)라오."
            "선천 말세에는 어떤 일이 생깁니까?"
            "남자만큼 여자의 위세가 오르기 시작하고, 사물은
          세분(細分)의 절정에 이르러 나뉘고 또 나뉜다오.
          일이 나뉘어 분업(分業)이 되어, 아무도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지 못하게 된다오.
            심지어 낫이나 괭이 하나도 혼자 벼릴 줄 아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또한 부패와 타락은 못된 사람의
          계책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하늘은 그것을 왜 못 본 척하는 것입니까?"
            "선천운이 끝나고 후천의 통일운이 시작하는
          마디이기 때문이라오. 천하의 사물은 이 마디에
          이르러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라오. 목에 줄을 맨
          개나 토끼처럼 몸부림을 하는 것이오.
            그래서 부귀와 빈천, 사랑과 구원, 범죄와 죄악에
          큰 혼란이 일어나면서 혼돈 속으로 빠진다오."
            "그런 혼란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죄없는
          조선 백성들이 수없이 죽어 없어지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씀입니까?"
            "그런 속에서 또다시 새로운 정신과 생명이
          탄생한다오. 그대도 그러한 혼란에서 시작되었고,
          나도 그러하고, 조물주 또한 그러하다오. 그런데
          두무지 그대는 이것을 몰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곳에까지 온 것이오."
            "조선의 역사는 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안타깝고 서글펐습니다."
            "슬퍼하지 마시오. 지금까지 조선이 걸어온
          5400년은 생장(生長)의 역사를 창조하는 기간이었소."
            "진무사 어른, 선천 말 후천 초에 종교가 말세를
          예고하며 여자가 득세하게 되면, 사람들이 저마다
          각각 분화의 극점으로 달려가고 부패와 타락이
          극심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말세상(末世相)을 이야기해주겠소. 우주의
          말세는 이방(離邦) 말엽(末葉)부터 이루어진다오. 그
          말세상은 후천 초에 나타나오. 그러므로 이것을
          말세라고 한다오.
            세상 사람들은 말세, 말세 하고 있지만 그 참뜻을
          잘 모른다오.
            말세라는 말은, 태극궁에서 빚어낸
          음양수(陰陽水)가 기를 잃고 물거품이 될 만큼
          세분되는 날, 물이 물의 본성을 잃게 된다오. 물을
          갈라서 물이 아닌 것으로 만들 듯이 이 세상 모든
          사물이 모두 그러하고, 생각마저 그렇게 될 것이오.
            그러므로 그러한 사회상을 말세라고 하오. 옛적에
          '말(末)' 자의 상(象)을 그릴 적에 목(木)에 일(一)을
          올려 '미(未)'와 같으면서도, 목(木) 속에 들어 있는
          일(一)을 '미(未)'보다 ㅉ게 그린 것은 진실로
          목(木)의 기본인 수(水), 즉 생명력이 극도로 결핍한
          상을 취하여 이같은 모습으로 그려놓은 것이라오.
            그런데 이같은 모습은 물이 아직까지 그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방(離邦)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오히려 그 명맥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에 일어나는
          것이오. 그런데 이같은 위기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
          후천 통일의 법도요, 신명양성(神明養成)의
          성도(聖道)요, 극락 창조의 지도(至道)요,
          무극성진(無極成眞)의 요도(要道)인 것이오.
            그런데 이 길의 시초에서 잠깐 동안 만물상과
          사회상은 분별없는 혼돈 상태를 빚게 되오. 종교는
          이것을 말세라고 한다오. 인구의 밀도나 만물의
          세분화는 우주의 본원을 창조하기 위해서 자연의
          융합을 준비하는 현상이오.
            그러므로 이때에는 상상 가능한 것은 다 이루어지게
          된다오. 부패와 타락의 심화는 물의 유동(流動), 즉
          정신력의 약동이 휴식하는 곳에서 자연히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오.
            그러므로 이같은 후천의 법도가 행할 때에는
          통치자나 도사의 자격부터 다르다오. 선천은 지(知)와
          힘(力)으로 통치하지만 후천은 신(神)과 명(明)이
          아니면 다스려내지 못한다오.
            선천에는 지력(知力)이 있지만 후천에는
          능력(能力)이 있다오. 선천 분열은 쉽게 이루어지고
          후천 통일은 간단하게 이루어진다오. 권력은 만사를
          쉽게 처리할 수 있으나 거기에서는 반드시 모순이
          반발하고, 능력은 만사를 간단하게 처리하므로
          여기에서는 평화가 생기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우주가
          운행하는 역간(易簡)의 법도라오.
            그런데 나는 지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권력은 있지만
          신명을 마음대로 통일할 만한 능력이 없다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5천4백 년 동안 분화(分化)를
          지도할 수 있는 능력만 조물주 태극왕에게서 받은
          것이고, 통일을 영도할 능력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오.
            그러므로 권력은 능력에 비하면 그 자격에 있어서
          반수(半數)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오. 나는 다만
          그때까지 내 임무에 충실하다가 후천의 법도를 따라서
          다시 태극궁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이것은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오.
          누구든지 종법도 행법도(從法度 行法度) 하는 사람은
          다같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오. 천국의
          논공행상은 부귀와 영화에 있지 않다오."
            그때 진무사의 이야기를 듣는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네.
            "말세운이 아직 미치지 않은 서방 제국의 문물이
          비록 휘황하다고 할지라도 두 눈을 막고 거기에
          구애되지 마시오. 단풍이 비록 아름다우나 곧
          떨어지고 말 낙엽이라는 것을…"
            나 두무지는 공평 무사한 우주 운동을 마치
          원수처럼 생각했던 스스로의 무지를 통렬하게
          깨달았다네. 또한 오묘하기 이를 데 없는 신비의
          진면목을 알게된 데 대한 기쁨이 가슴을 난자하여
          놓았네. 나는 다시 문답할 용기를 잃었다네. -

            "그래서 나는 그만 두무지의 환영 앞에 무릎을
          꿇었지."
            "두무지는 그렇게 사라졌습니까?"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내 가슴 속에 맺힌 말을 꺼내어 두무지 선사께
          보였다네."
            "무엇이었는데요?"
            "화담 선생님을 묻고, 안명세를 묻고, 민이를
          물었지."
            "형님도 참. 아직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군요."
            "나이가 들어가니까 옛 생각이 점점 더
          깊어지더군."
            "그랬더니 그 어르신께서는 뭐라시던가요?"
            "묵묵부답이었네. 다만 빙그레 웃으시더군. 그래서
          한번 더 애원하였지. 그랬더니 두무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궁금합니다."
            "하늘의 일은 하늘이 하고, 땅의 일은 땅이 한다-.
          이 말뿐이었네. 그러니 내가 하늘에 가서 직접 물어볼
          수밖에, 허허허."
            이야기를 마친 토정은 크게 웃음을 지었다.
            "형님, 그러나 백성들은 끊임없이 굶고 병듭니다."
            "후천을 여는 징조일세. 내가 그런 물상(物象)에만
          사로잡혀 큰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일세. 정말 큰 것은
          하늘에 있네."
            "천즉불인(天卽不仁)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하늘은
          그렇게 잔인한 것입니까? 그래서 형님도 잔인해진
          것입니까?"
            "비인부전(非人不傳)하게. 이 말을 함부로 하지
          말게. 날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일세."
            "그래서 임진 대환난 준비를 그만두셨군요."
            "전쟁 대비만 그만둔 것이라네. 나는 대환난에 대한
          준비를 따로 하고 있었던 것이네. 바로 <토정비결>이
          그것이네. 백성들의 마음을 위무해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준비한 방책이었네.
          삼개나루에 있을 때 쓴 <천기비전>으로 화담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었다고 생각했었네만 그게 아니었네.
          이제서야 그 말씀을 받들게 된 것이지."
            "세상은 이대로 내버려두실 겁니까?"
            "무슨 소린가? 해마다 정초가 되면 온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한 해 신수를 볼 것일세. <토정비결>을 볼
          것이란 말일세. 그게 무엇인가. 그저 잘 되었으면,
          우리 식구 모두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밝은 마음 아닌가. 그렇게 온 나라 백성이
          염원하며 밝은 마음을 내면 후천 세계는 빨리 열릴
          것일세."
            "후천은 그렇게 천천히 준비되는 것입니까?"
            "앞으로 수백 년간 계속되네. 그런 질곡 속에서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살아가려면 <토정비결> 속에
          있는 희망을 가져야 하네. 선후천이 갈리는 때에는
          마음 공부가 최고라네."
            토정은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뇌었다.
            "전우치, 남궁두, 정개청, 서치무, 남사고. 모두 다
          그리우이."
            정휴는 토정의 숙연한 자세에 고개를 떨구었다.
            "돌아갈 시각이 다가오고 있네."
            토정이 나직하게 말했다.
            "예, 유시(酉時)입니다."
            "내게 할 말 없나?"
            "형님께서 평생을 바쳐 미친 사람마냥 팔도를
          휘젓고 다니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백성을 수
          없이 만나고 도와주기도 많이 하셨습니다. 벼슬도
          걷어차고 세상을 버렸다는 분이 왜 그토록 세상에
          미련이 많았습니까? 미련만으로 보자면, 아니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보자면 여느 고관 대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할 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두무지 어른에게서 그런 말씀까지 들었더라면
          끝까지 금강산이나 지리산에 들어가 수도나 하실
          일이지 뭣하러 가난뱅이, 거지, 병자를 떼거리로
          몰아다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약을 지어주십니까?
          그런다고 그네들의 운명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의 운명이 바뀌는 것도 역시 아닌데 말입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해는 다시 떠오르고
          달은 날마다 찹니다. 그것은 하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두무지의 말을
          듣고서도 아산 백성이 그토록 불쌍하셨단 말입니까?"
            토정이 껄껄 웃었다.
            "내가 언젠가는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네. 자네 운명(運命)이란 말을 생각해보았나? 다
          쓰는 말이니 모를 리 없겠네만 운명이란 명을 나르는
          것, 즉 자기의 목숨을 나르는 것이지. 자네가 자네의
          몸을 지금 이 순간 이곳으로 끌고 온 것, 이것이
          운명일세.
            그러므로 운명이란 자기 자신에게 어떤 경험을
          시켜주느냐 하는 것일세. 내가 사람들을 도와주러
          찾아다닌 게 아니라 내게 경험을 시켜주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뿐이네."
            "아산 백성을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라 형님 자신을
          위해서 하신 일이라구요?"
            "그렇다네. 내가 늘그막에 내 욕심 채운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네."
            "자신에게 시켜준 경험으로는 지나칩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경험도 많이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필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 수발하는 경험을
          택하셨습니까? 형님 자신은 정작 권력의 핵심에
          있었잖습니까?
            조카가 조정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고, 친구가
          역시 영의정을 지냈고, 화담 산방에서 같이 공부를 한
          사람들이 다 정승 반열에 있잖습니까? 기왕 경험을
          하실 요량이셨다면 한 나라 전체를 다스려 보시든가
          하지 겨우 작은 고을에서 현감 노릇이나 하시는 게 큰
          경험을 하는 것입니까?"
            "이제 임종이 임박했으니 그 정도 의문이야 내
          마땅히 풀어주고 가는 게 옳을 것 같으이. 난 전생의
          업보가 남보다 두텁고 끈질기다네. 내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보면 나 자신도 뭐 이따위 인생이 다 있었나
          싶네.
            그래서 그저 빚이 많으니 빚을 갚으러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인생이라고 밖에 달리 뭐라 할 게
          없었다네. 이제 난 사주가 뭔지 약간 눈을 떴다네.
          사주 팔자, 그게 바로 전생의 생김새 그대로라네.
          그걸 보면 그 사람이 전생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네.
            그래서 가만히 내 사주를 들여다보면 글쎄 내 인생
          돌아가는 모양이 척 들어맞지 않는가 말일세. 나도
          깜짝 놀랐다네. 내가 친구 안명세를 잃은 것과 내가
          지금껏 못 잊어 하고 있는 민이 그이와의 전생 인연을
          보니 역시 그러하고, 여기 있는 희수 여인 또한
          이생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더란 말일세.
            내가 겪은 경험 가운데 털끝만큼 작은 일도 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더란 말일세."
            "그 말씀에는 저도 느끼는 게 많습니다. 천지
          만물이 나고 죽는 데에는 나름대로 다 이치가 있으니
          사람의 삶에 이치가 없을 리 없지요. 전생과 금생과
          내생이 그러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처럼 모두 인과
          관계를 맺어 함께 맞물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정 그 분을 만나서 배운 게 하나 더 있지.
          삼귀의(三歸依)라고 있잖은가? 그 중에 세번째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變誓願渡)'란 말에서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알았다네. 중생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끝까지 구제를 하겠다. 그 마음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러나 도를 구하는 사람은 우선
          상구보리(上求菩提)부터 해야 중생 구제에 나설 수
          있는 것, 인간으로서는 누굴 가르치려는 것보다는
          스스로 길을 밝히는 수도 생활을 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난 중생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중생 속으로 들어간
          것일세. 나 자신 한 중생이니 중생과 어울려 한바탕
          살아본 것일세.
            이제 생각해보면 한때나마 세상을 건져내어
          사람들이 다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을까
          노심초사하던 것이 부끄럽네. 알고 보면 난 그저 내
          빚을 갚으러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것일 뿐이네.
          아직도 그 빚이 많이 남았으니 언젠가 이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겠지."
            "다시 오면 무얼 하시게요?"
            "또 떠돌이가 되어 방랑하겠지. 앞으로 시절없이
          지팡이 짚고 삿갓이나 눌러쓰고 다니는 나그네를
          보거든 혹시 나 아닌가 여겨보시게, 허허허."
            점심 나절이 되자 토정의 아들 산휘가 방에 들어와
          앉았다. 산휘도 아버지의 임종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신시(申時)가 되자 희수 여인이 가벼운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그것을 들이밀자 토정이 빙그레 웃었다.
            "여보시오, 이걸 먹다가 체하면 어쩌라고 내오는
          거요?"
            희수 여인이 당황했으나 토정은 더 껄껄 웃으면서
          그 여인의 손을 잡아들였다.
            "아니오. 이젠 먹을 필요가 없는 시간이 되었다는
          말이오. 내게 품었던 한이나 원이 있으면 이제 다
          푸시오. 내가 죽으면 그나마도 누구에게 말하겠소."
            여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현수 수좌를 불러주오."
            토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면서 젊은
          중이 방으로 들어왔다. 옛적 화순 운주사에서 보았던
          지족 선사의 상좌였다.
            "아니?"
            정휴가 현수 수좌를 보고 놀라자 토정이 정휴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맞네. 이 수좌가 해사에서 낳은 아들 규철이라네.
          내가 그때 운주사에서 의심스럽게 보았었는데 나중에
          사주를 짚어보고 이 아이가 있을 만한 곳을 수소문한
          끝에 바로 운주사의 그 상좌승이 바로 내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불러온 것이라네. 지난 달에야 만났다네."
            현수 수좌는 어머니 희수 여인 곁에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았다.
            "아버님."
            산휘가 지극한 정으로 담고 아버지를 불렀다.
            "오냐."
            토정 역시 정을 담뿍 담은 목소리로 산휘의 부름에
          대답했다.
            "아버님."
            이번엔 현수 수좌, 아니 규철이 아버지를 불렀다.
          세상에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것이었다.
            "오냐. 내 아들아."
            토정이 팔을 뻗어 규철의 어깨를 잡았다.
          울음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규철의 어깨가 심하게
          들먹였다.
            토정이 산휘와 규철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형제이니라. 규철은 기왕에 출가했으니
          후사를 두지 말아라. 너희는 내가 가장결에 이른 대로
          가계를 꾸려 가면서 임진년을 준비하거라. 내 일은
          이미 다 끝났다."
            "아버님, 하늘에 올라가셔서 어머님을 만나게
          되시거든…"
            "오냐. 네가 장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전해주마."
            아버지의 말에 산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보게 정휴."
            토정이 정휴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자네가 있어서 이 생은 외롭지 않았네."
            "형님!"
            "벗을 홀로 남겨두고 가려니 마음이 아프이."
            토정이 말에 정휴의 가슴 속이 꽉 메었다. 평생
          동안 의지하고 따랐던 토정, 정휴의 토정이 떠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정휴의 온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휴는 내색을 않으려 애를 쓰면서 토정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청했다.
            "한 말씀 해주십시오."
            벌써 문 밖 대청으로 현의 관리들이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조금씩 흐느끼고 있었다. 마당에도 사람이
          가득했다. 그리고 멀리 대문 밖으로도 울먹이고 있는
          백성들이 보였다.
            토정은 그런 바깥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내가 어디 남을 위해 살았던가, 다 나를 위해 산
          거지. 세상을 위한다고? 백성을 위한다고? 다
          거짓일세. 이 세상은 내 세상, 내가 이 꼴이라서
          세상도 이 모양 아닌가. 이제 내 세상, 내 우주는
          문을 닫는다네. 나도 죽고, 그대들도 죽고, 우리 모두
          죽는 것이라네."
            말을 마친 토정은 피곤하다면서 아들 산휘에게
          자리를 깔라고 했다. 산휘가 자리를 마련하자 토정은
          그 위에 누웠다. 현수 수좌가 베개를 받치고, 희수
          여인이 삼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희수 여인은
          손부채를 들고 토정을 향해 천천히 부쳤다.
            토정은 몇 번 눈을 껌벅이다가 감았다.
            침묵이 흘렀다. 여름해가 길어서 신시(申時)가 넘어
          유시(酉時)가 되어가는데도 해는 서산마루에 아직
          높이 걸려 있었다. 창문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이윽고 유시(酉時)가 되었다.
            의원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희수 여인이
          숨죽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어 산휘와 현수가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관리들이 그제서야 토정의
          임종을 알아차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를
          따라서 마당에 모여 있던 아산현의 백성들이 울기
          시작하였고, 다시 바깥에 있던 백성들도 곡을
          터뜨렸다. 곡소리는 한동안 아산현에 진동했다.
            1578년(戊寅年, 62세), 선조 11년 음력 7월
          17일이었다.
            토정이 돌아가고 며칠 뒤 희수 여인도 그의 뒤를
          따랐다.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고 걸인들을 돌보던
          희수 여인은 어느날 밤 잠에 든 뒤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 사후를 처리하느라 남아 있던 산휘와 규철
          형제는 희수 여인의 장례를 치른 후 토정의 묘가
          바라다보이는 앞산 양지바른 곳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아산현에는 곧 새 현감이 부임했고, 산휘는
          한양으로 돌아갔다. 현수는 그가 머물던 절로 다시
          돌아갔다. 정휴 역시 온 세상을 잃은 허탈한 심정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