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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용호비결 - 소설^토정비결(下-35)

토정의 예언은 적중했다.

다음해인 정묘년(丁卯年,1567) 유월 스무여드레,

명종이 서른넷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칠월 초사흗날 선조(宣祖)가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했다.
선조는,

명종의 동생이며

중종의 아홉째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의 셋째 아들이었다.

명종이 후사를 두지 못한 까닭에

결국 조선 왕조는 다시 정통으로 장자 계승을 하지 못하고,

방계의 후손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던 것이다.
임금이 바뀌고 조정이 어수선하던 때에

내의원에 있는 북창의 아우 정작이 토정에게 찾아왔다.
북창이 금강산으로 들어오라고 하니 가능한 한 빨리 상경하라는 것이었다.
"형님께서 전갈을 보내오셨습니다."
"뭐, 북창께서? 무슨 내용인가?"
"금강산으로 오시랍니다."
"나만?"
"아닙니다.

정휴 스님도 함께 오라십니다.

저도 같이 갈 것입니다."
"무슨 일이실까?"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서두르라고만 하시고는

이 서찰을 선생님께 보여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정작은 북창이 보낸 서찰을 토정에게 내보였다.
서찰에는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한평생 책 만 권을 다 읽고
하루에 술 천 잔을 마셨네.
까마득한 태고 시절 이야기만 했지
세속 이야기는 당초에 입에 담지 않았네
안자(顔子)는 서른에 죽었어도
아성(亞聖)이라 했거늘
선생의 목숨은 어찌 그리 길었는가

 

"선생님이 돌아가실 모양이네.

이건 임종시야."
"형님이 임종시를 직접 쓰셨다구요?"
"그런 것 같으이.

어서 길을 서두르세."
토정과 정작은 그때 잠시 광릉 봉선사에 머물고 있던  정휴를 찾아가 함께 길을 떠났다.

북창은 금강산 유점사 진여암에 있었다.
"어서 오게."
북창은 토정의 손을 맞잡았다.

정휴는 허리를 굽히며 합장으로 인사를 했다.
"형님,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 정말 힘들었습니다."
"다 알고 있다."
북창은 울먹이는 정작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제가 포천에서 현감 노릇을 하다가 그만 망신을 했습니다."
"알고 있네.

누가 간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나도 그곳 현감을 한번 지내보고는 벼슬아치 노릇을 영 집어치우지 않았던가.

어디 그곳 한 군데뿐이겠는가.

이 나라 어느 곳인들 백성이 편한 땅이 있던가?

하늘도 그저 보고만 있는데 그대인들 별 수 있으리."
"제가 안타까워 하는 것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구할 방법이 있는데 힘이 모자라 

그 방법을 동원할 수 없어서 속수무책이었던 것이 가슴 아픕니다."
"토정,

그보다 더 큰일이 눈앞에 닥쳐오고 있네.
곧이어 대환난이 시작되네."
"선생님께서도 내다보고 계셨군요.

개마고원에서 두무지라는 박수가

그걸 막기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천문에서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습니다만…"
"역술가들 사이에서 대환난이 종종 입에 오르고 있다네.

내가 그 소문을 따라 천기도 살피고 국운도 짚어보았는데

대환난이 틀림없이 다가올 것이라네.
지금 한가하게 포천현을 놓고 따질 때가 아니라네.
대환난을 막아야 하네.

그걸 막을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역술가 아니고는 그런 말을 곧이 들을 사람이 없지 않은가.

위정자들이야 그런 소리를 들어보았자

민심을 소란하게 하는 반역 행위라고 몰아댈 게 뻔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백성들에게 직소해보았자 민심만
흉흉해지지 달리 막을 방도가 생기는 것은 아니네.
자네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라네."
"명심하겠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제가 목숨 바쳐 할 일인 듯합니다."
그때 정휴가 나서서 말했다.
"형님,

형님은 상구보리보다도 하화중생을 먼저 하려고 하시는군요.

 

도대체 이 나라 백성들한테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이 있으시길래

끊임없이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내시는 것입니까?

벌써 나이가 많이 드셨습니다.

도를 구하기에도 모자라는 세월입니다."
그러자

토정은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정휴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자네는 불가에 있으면서 중생을 다 구제하기 전에는 깨닫지 않겠다며

지옥문을 지키고 서 있는 지장보살의 서원도 모르는가?

나는 이 백성들이 다 편안하게 되지 않고는 도에 이르지 않겠네.
그까짓 도가 무어란 말인가.

나 혼자 도인이 된다고 하여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가?

내가 그동안 천하를 주유하면서 보니까

고생하는 것은 백성들뿐이었네.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끼지 못한다네.
탐관오리가 자기를 아끼는 줄 아나?

그들은 백성을 괴롭힘으로써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일세.
자기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
토정은 당대에 생겨난 사건을 죽 열거하였다.
1510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나 사람들이 많이 다쳤고,
1511년에는 경상도 가덕도에 왜선 30척이 침입했다.
1512년에는 여진 백여 명이 함경도 무산진을 침입했고,

1520년에는 엄청난 수해로 곳곳에서 논과 밭이 유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잃은 백성의 수효도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피해가 극심했다.
뿐만 아니라 네 번이나 되는 사화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 화를 당한 사람도 많고,

목숨을 빼앗긴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1522년에는 황해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강도가 출몰하여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목숨을 잃는 등 피해가 속출하였다.

1526년에는 경기도, 강원도, 함경도에 열병이 만연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1537년에는 도성 안의 중과 무당을 요승과 요무라고 적발하여 모조리 처형하고

절을 마구잡이로 폐쇄시켰다.

1540년에는 전라도에 민란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1546년에는 함경도와 경기도에 질병이 만연하여 역시 마을마다 연일 초상을 치렀다.

1557년에는 황해도에 민란이 일어나고 이어서

1559년에는 토정도 관여한 바 있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

1562년에서야 평정되었다.
1561년에는 나주 토호 김응란, 김언림이 난을 일으켰다.
"어느 시대고 백성들은 이와 같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네.

내가 비록 내가 살아온 동안 보고 들은 일을 말했으나

다른 시대도 다 마찬가지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런 환난 속에서도 탐관오리들은

잘 먹고 잘 살면서 오히려 재산을 늘려가고 있네.
그들은 흉년이 들어도 배불리 먹고

심한 한파가 찾아들어도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네.
어쩌다 춥고 배고픈 산적들이 거리로 나와도 목숨을 잃거나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힘없는 백성일 뿐
세도가들은 사병을 길러 산적에 대적하니 아무 일이 없네.

임꺽정 같은 이가 난을 일으켜 가난한 백성들 잘 살게 해준다고 했지만

그 임꺽정 난으로 죽은 사람은 양반이 아니라

다 힘없는 농민이나 천민들이었네.
앞으로 있을 대환난이 비록 임금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잘못으로 불러들이는 화가 되긴 할 터이나
그 바람에 고통받고 피흘릴 사람은 임금도 대신도 아니네.

바로 무지렁이 백성들, 사화가 무엇인지,
동인이 뭐고 서인이 뭔지,

이기론이 뭔지 모르는 힘없고 무식한 백성들일세.
누가 그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가.

그런 백성들을 진정으로 보살피고 돌보는 사람이 참 군주인데

군주는 궁궐 안에서 간신 무리 속에 휩싸여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일세."
정휴는 토정의 이야기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
"내가 자네를 급히 오라고 한 것은,

임진 대환난 때문만이 아니라

책 한 권을 보이기 위해서라네."
북창은 책을 한 권 내어놓았다.

겉장에 <용호비결(龍虎秘訣)>이라고 씌여 있었다.
"무슨 책입니까?"
"도가 수련을 하면서 익힌 내용을 죄다 적어 두었네.

하늘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네.

인간의 몸이 바로 그 열쇠일세.

이 책을 읽으면 인간의 몸 하나만 잘 살펴보아도 하늘의
이치가 다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네.
이 책을 오늘부터 세 사람에게 강의할 것이니 유념하게.

토정 자네는 이것을 어디에 써도 좋네만
정휴 스님은 해탈하는 방편으로만 쓰시고,

정작이 너는 의술로만 써야 한다."
북창은 원로에 지친 세 사람을 앉혀놓고 곧바로 강의에 들어갔다.
"내가 도가를 수련하다 보니

선인들이 해온 것에 병폐가 있는 걸 깨닫게 되었네.

내, 그것을 경계하고자 하네.

중국의 도인들이 만들어 놓은 책들은

말만 화려하고 속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책 하나 변변하게 나온 게 없어

늘 중국서에 의존했는데 말일세.
그래서 수많은 학인들이 도가에 입문하기는 하나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었지.

심지어는 장생 불사의 비법을 구한다고 돌아다니다가

도리어 요절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네.

나도 책에 쓰인 대로 내 몸으로 직접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 보니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네."
"어쩌자고 몸소 다 실험을 해보셨단 말씀입니까?"
토정이 몹시 걱정스럽게 말을 했다.

북창이 그토록 오랫동안 도가 수련을 했는데도

이미 기를 놓치고 있음을 토정은 보았던 것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이 폐단이 언제 고쳐지겠는가.
내 한 몸 상해 후학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면 그것으로 족하이.

도(道)는

그 정(精)을 얻고 의(醫)는 그 조(祖)를 얻는 것이라네.

그리하여 나는 의로써 도가 수련의 새 길을 열고자 하네."
"그렇다면 도를 연구하신 것이 아니라 신(身)을 연구하신 것입니까?"
정휴가 물었다.
"도가 곧 신이고 신이 곧 도라네.

우리 정휴 스님 들어보시게.

석가가 육년 고행을 그만 두고 소젖을 마신 뜻을 생각해보시게.

육신을 괴롭히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일세.

자기에게 주어진 육신이 거추장스럽다고 해서

함부로 홀대해서야 되겠나?"
"그렇습니다, 선생님.

육신이라는 것도 운명과 같습니다. 끌어안고 보다듬어 주면서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
토정이 북창의 말을 긍정했다.

정휴는 잠자코 북창의 강의를 기다렸다.
"그래서 무조건 연단(煉丹)을 만들어 먹고

몸을 비튼다고 해서 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네.

몸을 잘 관찰하여 그 이치를 먼저 터득하면

천문도 지리도 다 알 수 있게 된다네."
북창은 신체의 한 부분,

부분을 들어가며 그 이치를 설파했다.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 신체의 오묘한 변화를

북창은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신체에 음양이 있고 오행이 있다는 것쯤은
자네들도 알겠지.

허나 십간 십이지에 따라 기가 움직이고

혈이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나?
별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도 움직인다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용하다는 의원이라도
시운(時運)을 맞추지 못해 낭패를 본다네.

자시에 기가 흐르는 곳,

신시에 흐르는 곳,

해시에 흐르는 곳.

그곳을 낱낱이 알아야 침이든 뜸이든 효험을 볼 수 있지.

자,

간지에 따라 오장육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세."
북창은 신체의 비밀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인간의 몸에 들어 있는 오행을 살펴보세."
북창은 또 음양 오행이 신체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내보였다.
"허파는 금(金)기를 띠었으니

음식으로 치면 고추, 마늘, 파 같이 매운 양념들일세.

콩팥은 수(水)기를 띠었으니

음식으로 치면 짠 소금일세.

간은 목(木)기를 띠었으니

식초처럼 신 것일세.

심장은 화(火)기를 띠었으니

주로 쓴맛을 내는 기름일세.

비장은 토(討)기를 띠었으니

꿀이나 엿 같은 단 음식일세.
사람이 일을 많이 하거나 오랫동안 달리다 보면
입맛이 쓰게 되네.

이는 심장이 흥분하기 때문일세.
그러므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사람은 짠 음식을 좋아하게 되는데

바로 그렇게 해야 심장의 불길을 누를 수 있기 때문이네.
콩팥이 허약하고 부실해지면

입맛이 늘 짜게 되네.
이걸 먹어도 짜다 하고,

저걸 먹어도 짜다고 한다네.
심한 경우에는 소금을 전혀 치지 않아도 짜다고 우기네.

콩팥이 약해지면

입은 단 것을 원하는데

이때 수(水)기를 돋구려면

매운 음식을 먹어야 하고(金生水),
과민한 것을 눅이려면

단 음식을 먹는 게
좋다네.(土克水)
오미(五味)의 속성은 그대로 자연의 이치일세.
임신부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던가?

바로 신음식이라네.

보통 사람은 잘 먹지도 못하는 신김치를

임신부들은 눈 하나 꿈쩍 않고 냉큼 먹어치우네.

왜 그런가.

임신부들의 입에는

그 신 것이

달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네.
바로 아이가 탄생하는 기운,

즉 목(木)기가 필요해서일세.

그러므로 신 음식을 많이 먹음으로써
필요한 기운을 얻게 되는 거라네.
이렇게 사람의 몸은 제가 알아서 필요한 것을 원하는 것일세.

입맛을 일부러 가꾸지만 않는다면
사람의 몸은 스스로 알아서 건강할 걸세.

이게 양생법의 기초일세."
북창은 도가 비전의 단전 호흡에 대해서도

사람에게 설파하고 직접 수련 모습을 보였다.
"단전호흡을 하려면

먼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야 하네.

다리를 겹으로 포개고 조용한 곳에 단정히 앉게.

그리고 눈을 아래로 깔아 코를 보고,

코는 배꼽과 나란히 자리잡게 하고,

숨을 들이쉴 적에는 가볍게 하면서

계속 신기(神氣)를 배꼽 아래 단전에 모아야 하는 것일세."
북창의 강의는 신체에서 지리로,

지리에서 천문으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북창의 강의는 한 달이 걸려서야 겨우 끝났다.
"자, 오늘이 마지막 강의일세."
세 사람은 조용히 북창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은 <용호비결> 강의가 아닐세.

도인은 이렇게 몸을 쓰는 법이라는 걸 보여줌세.

자,

이 설법을 잘 들어보게."
북창은 숨을 몇 번 고르더니 조용히 선정에 들었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북창의 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정휴가 작은 소리로 북창을 불러 보았으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형님."
정작이 다시 불렀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정작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쳐

북창의 코에 갖다대었다.
"아니?"
정작이 깜짝 놀라서 손을 거두었다.
"무슨 일인가?"
정휴가 놀라서 물었다.
"숨을 쉬지 않으십니다."
"그럼,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정휴는 얼른 북창의 코에 얼굴을 갖다대었다.

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휴는 북창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보았다.

맥도 움직이지 않았다.
토정은 묵묵히 앉아서

북창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님!"
정작이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정작의 애절한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정휴는 어느새

공주 용화사의 방장 명초를 생각하고 있었다.
북창의 시신이 고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후로 하겠다는 설법이 임종상이었던가.
토정은 그를 도가로 이끈 첫 스승

북창의 시신을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휴는

울고 있는 정작을 달래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선화하신 것이니 슬퍼 말게.

다비 준비나 하세."
정휴와 정작이

다비할 나무를 고르며 왔다갔다 하고 있는데

방에서는 한나절 동안 미동도 않고 앉아 있던
북창이 슬며시 눈을 떴다.
"여보게, 토정."
"아니, 선생님."
"쉿.

이 정도 속임수야 다반사라네.

자기 몸을 들락날락할 정도가 되면

도가에 몸 담은 값을 하게 된 셈이지."
"그러면 지금 살아계신 것입니까?"
"선인은 살아 있다,

죽었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네.
자,

내가 자네에게 부촉하니

대환난을 준비하게.

엄청난 재난을 막을 사람은

조정에도 없고 군영에도 없다네.

오로지 산간에서 수도를 하는

도인들만이 막아낼 수 있다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네가 떨쳐 일어나 그들의 기를 한데 모으게."
"명심하겠습니다."
"이보게.

운주사에서 지족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예?

지족 선사가?"
"자,

나는 가네."
"어디로 가십니까?"
"온 데로 가지."
"궁금합니다."
"궁금하긴.

자네도 곧 따라올 거면서.

땅에서 할 일이 있고,

하늘에서 할 일이 따로 있다네.

그만 가네."
북창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 앉아 울고 있던 정작이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정휴는 얼른 마당 한 켠으로 물러났다.
"아니,  형님.

돌아가신 게 아니었군요."
북창은 정작에게 빙그레 웃어보이더니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누웠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어서 내려오십시오."
정작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쳤다.

북창은 누운 채 부싯돌을 툭툭 치더니

불을 일으켜 장작더미에 붙였다.
"안됩니다. 형님!"
정작이 소리치며 장작더미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불은 회오리 바람처럼 휘몰아치면서 타올라

삽시간에 북창의 몸을 감쌌다.

 

"형님!"
정작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없이

불길은 하늘을 찌를 듯 거세게 타올랐다.
정휴는 또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토정은 북창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휴가 정작을 이끌고 다비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토정은 북창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현상을 겪었는데

어찌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정휴는 참담한 심정으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다비가 끝나자 세 사람은 북창이 머물렀던 진여암을 떠났다.
일행이 진여암을 나와 본사인 유점사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니, 이토정 선비님."
한 선비가 토정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율곡이었다.

벌써 서른넷,

장년이 되어 있었다.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조정에 있어야 할 인재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총명하였던 율곡은 벼슬길에 일찍 올라

그동안 호조 좌랑과 예조 좌랑을 거쳐 이조 좌랑 자리를 맡고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그리워 강릉에 갔던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간 지 십수 해가 지났건만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열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3년 동안 시묘를 하고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잊지 못해
열아홉 살 나던 해에 입산을 하기도 하였다.

1년 만인
다음 해 다시 하산하기는 했으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장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큰 듯했다.
"다시 입산했다는 말은 아닐 터…"
"도대체 죽음이 뭔지 알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어머님 돌아가신 지가 벌써 십수 년이 되었는데도

자애로운 모습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특히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릉엘 다녀오면
죽음에 대한 의구심이 더욱 깊어집니다.

죽음이 도대체 뭐길래 다정한 사람들을 이리도 갈라놓는 것인지…"
"나 역시 스승을 떠나보내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중이네."
"스승이라면?

화담 선생님은 선화하신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북창 선생께서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네."
"그분은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세간에 그렇게 알려진 지는 꽤 여러 해 되었지.
하지만 이곳 금강산에서 쭉 도가 수련을 하고 계셨었다네."
"그랬었군요."
"자네나, 나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어서 빨리 세상으로 나가게.

자네가 있을 곳은 이 산중이 아니네."
"얼마간 더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돌아가겠습니다."
정휴는 토정의 소개로 율곡과 수인사를 나누고 정작 역시 인사를 나누었다.
유점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정작은 한양으로 향하고,

토정과 정휴는 전라도 화순으로 발길을 잡았다.

화순으로 이르는 길목에 금성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늦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산 중턱에 웬 불빛이 보였다.

그리로 통하는 길은 끊어질 듯 말 듯한 오솔길이었다.

마을까지 가려면 아직 길이 멀고 해서

토정과 정휴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였다.
나뭇가지를 헤치고 겨우겨우 이르니 그곳은 신당이었다.

신당 한 채가 앞에 대문을 겸하여 가로막고 있었고,

그  뒤로 안마당을 지나 또 한 채가 이어서 있었다.

 

겉모습은 마치 절간처럼 꾸며놓았지만

신당 안에는 산신령 그림이 걸려 있었고,

꽃과 묵은 과일이 제단 위에 차려져 있었다.

 

불이 켜 있는 윗쪽 신당으로 올라가자

그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여인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이 신당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불이 꺼지면서 사방이 깜깜해졌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추어서서 안을 살폈다.

분명 누군가 안에 있어 불을 끈 것이 틀림없었다.

정휴가 재빨리 신당 벽으로 몸을 붙였다.

토정은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그 후 한참 뒤에야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바람소리야."
"그런가?"
여인의 말에 이어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나오더니

곧 거친 숨소리와

여인의 교태어린 신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다.

토정과 정휴는 숨을 죽인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그들은 큰숨을 몰아쉬며 등잔불을 켰다.

곧 어둠 속에서 사내가 나타나더니

누가 볼세라 소매자락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산을 뛰어내려갔다.
털모자를 깊이 눌러쓴 얼굴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동안(童顔)이었다.
사내가 내려간 지 한참 만에 정휴가 신당의 문을 가만히 밀었다.

그러자 안에서 뭔가 후다닥 몸을 숨기는 소리가 났다.

정휴는 그쪽을 향하여 찬찬히 말했다.
"놀라지 마시오.

우리는 길을 가는 나그네요.
사람이 있는 줄은 아까부터 알고 있었으니 굳이 숨지 마시오."
그래도 몸을 숨긴 여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휴가 계속해서 여인에게 말을 걸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오.

괜찮으니 불을 켜시오."
토정이 넌지시 점잖은 소리로 말하자 비로소 불이 켜졌다.

여인이 불을 켠 것이었다.

토정의 나이 든 목소리를 듣고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여인은 아직도 옷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치맛자락을 목까지 끌어올려 앞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어디 사는 여인이기에 이런 곳에서…?"
스무 살은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두 사람을 대하자 여인은 목을 떨구었다.
"아니 여기서 무얼 하고 있소?

무당이오?"
"···"
여인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시오.

산적에게 잡힌 거라면 우리가 집으로 돌려보내드리리다."
이 말을 듣고서야 여인은 조금스레 입을 떼었다.
"저,

저는 신처(神妻)이옵니다."
"신처?"
"예,

이 신당에 바쳐진 몸이옵니다.

이곳에서 신의 아내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요?"
"예,

저희 마을에는 예로부터 신당에

처녀를 상납하는 풍습이 전해져 온답니다."
"해괴한 일이로고.

자세히 얘기해보시오."
"이곳 출신으로

고려 고종 때 탐라를 정벌한 장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 공이 묵살되어 한을 품고 죽었답니다.

그런데 그 뒤 그 장사의 혼이 나타나 공을 인정하지 않으면

큰 재앙을 내리겠다고 했답니다.

나라에서는 겁을 집어먹고

이 금성산에 신당을 짓고 금성신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장사의 혼이 마을에 다시 나타나

젊은 여인을 신처로 들이지 않으면

마을 사람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했답니다."
그런 이유로

관에서 가난한 집 처녀를 사

신처로 들여앉혔다는 것이었다.

신처가 된 처녀는 매일밤 시신(侍神)을 해야 했다.

시신을 하려면 저녁 나절에 목욕 재계를 하고 나서 옷을 모두 벗고

신당의 신상 앞에 밤새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도 매일밤 옷을 벗고 이 앞에 누워 있었단 말이오?"
"예."
"그럼 죽을 때까지 그리 해야 하는 것이오?"
"아니옵니다.

원래는 초경이 있을 때까지만 있게 되어 있는데

요즈음은 그렇지 않사와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그리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내림굿을 해서 무당의 몸이옵고.
관에서 제가 여인의 몸으로 늙었다고 여기면

새로운 신처를 들이게 됩니다."
"그럼,

아까 여기서 나간 남자가 신이었던가?"
"···"
토정의 물음에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 여인,

신처는 무당의 딸이었다.

그의 어머니 역시 무당이었는데

바로 이 금성신사의 신처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지금의 이 신처는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태어나서

신당을 집으로 알고 자라났다.

 

토정은 여인의 사주가 궁금했다.

그러나

토정은 사주를 짚기 전에 먼저 처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인이 열두 살 나던 해에

신당에 들락거리던 어머니의 서방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서방은

신처의 딸에게도 욕심을 냈다.

결국 서방은

나이 어린 처녀의 몸을 취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무당 어머니와 딸을 번갈아가며 취하곤 했다.
한참 후에야 무당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분을 참지 못한 무당 어머니는 그 서방을 죽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신처로 팔아버렸던 것이다.
"이후로는

처녀를 신처로 들이는 것도 몇 번뿐
처녀를 대지 못할 것이 틀림없을 터,

종국에는 관기를 시켜 윤직을 들게 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는 인근의 산적이나 불량배들이

야음을 틈타 신당에 침입,

시신하고 있는 벌거벗은 기녀들을
추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일세.
이런 일이 있으면서부터 기녀는 기녀대로,

산적은 산적대로 그 일을 쉬쉬 하며

따분하지 않은 시신 풍습을 지켜나가게 될 것이고.

이런 일이 당연히 소문 안날 수 없어서

사족(士族) 부녀자들 가운데에서
일찍이 과부가 되었거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

신당에 기도를 드리러 간다는 구실로 은근히

그런 풍습을 원하여 이 금성산 금성신사는

하루가 다르게 혼교의 풍습으로 어지러워질 걸세."
토정이 먼훗날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토정이 신처에게 사주를 부르면서 맞느냐고 물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저를 아시는 선비님이시옵니까?"
신처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정휴도 놀랐다.

토정의 경지가 벌써 거기까지 닿아 있었던 것이다.

처녀의 목소리, 얼굴, 혈색,

그리고 살아온 이야기를 거꾸로 추적해서

사주를 바로 짚어냈던 것이다.
"형님, 어떻게 그렇게까지?"
"놀라지 말게.

화담 선생님은

사주로 전생까지 보셨다네."
일행은 그날 신당 아랫채에서 잠을 자고

화순 장터에서 비단을 구한 다음 운주사로 향했다.
운주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정휴는 운주사를 처음 가보는 길이었고,

토정은 두번째였다.
운주사에서는 토정이 처음 갔을 때

골짜기를 우렁차게 울렸던 망치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지족은 법당에 있었다.

그는 젊은 중 한 명 하고 참선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요사채에서 쉬고 있는데

법당에서 지족 선사가 나왔다.

그 뒤를 젊은 수좌가 따랐다.
"안녕하셨는지요, 스님."
"아니, 이렇게 먼 길을.

그래 화담 선생은 안녕하시고요?"
"세상을 뜨신 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지족은 이미 이가 빠졌는지

아래턱이 위턱에 바짝 붙어 있었다.

얼굴에는 이미 검버섯이 피어나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을 정도였다.
"저, 혹시 북창을 아십니까?"
토정은 북창이 이승을 떠나가면서

'지족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 말이 궁금해 물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이 교감을 한 것인가,

그렇다면

지족은 토정에게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것인가

또한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북창이라면,

도가 수련을 하는 그이 말씀이오?"
"예, 그러합니다."
"이름이야 전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지만,

만나본 적은 없소."
지족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면 무슨 뜻에서 북창은 토정을 지족에게 보낸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참, 소개가 늦었습니다."
토정은 말머리를 바꾸어 지족에게 정휴를 소개했다.
지족 또한 자신의 상좌에게 토정과 정휴에게 인사를 하도록 분부했다.

그러자 수좌는 합장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소승 현수(玄首)라고 합니다."
천천히 머리를 쳐든 현수 상좌는

토정과 눈이 마주치자 무엇엔가 깜짝 놀란 듯

다시 고개를 떨구고 시선을 피했다.

신당에서 도망치듯 나와 사라졌던 그 소년이었다.

비록 어둠 속에서 본 모습이었지만
토정은 그를 이내 알아볼 수 있었다.

정휴도 알아차린 듯했다.
지족은 토정과 정휴를 승방으로 안내했다.
지족은 현수 상좌에게 일러 찻물을 데워오도록 시켰다.
토정은 천불천탑을 묻고 싶었지만

지족이 먼저 얘기 꺼내기를 기다렸다.

토정은 두무지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토정의 눈치를 읽은 정휴가

실례를 무릅쓰고 지족 선사에게 말을 붙였다.
"저,

선사께서 쌓으시던 천불천탑은 어찌 중지되었는지요?"
그러자 지족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아마도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상좌가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상좌가 다기를 내어 씻고 찻물을 우려내는 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번 더 데우거라."
상좌가 뜨거운 물로 한번씩 더 찻잔을 덥히자 보고 있던 지족이 한마디 일렀다.

그러자 상좌는

다시 한번 찻물을 찻잔에 돌아가며 붓고는 다시 찻주전자에 따랐다.
"내가 애비 노릇까지 하며 데리고 있는 아이요."
상좌는 찻잔을 차례로 돌렸다.

토정과 정휴는 찻잔을 입술에 대고 향기를 맡으며

조금씩 목 안으로 넘겼다.

지족은 찻잔을 입에 대고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다가는

조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천불천탑을 쌓을 재목이 못 되오.

나무꾼 만한 신심도 없소.

그래서 그만두었소.

나무꾼이 마지막으로 조각한 모자불도 일으킬 재주가 없소.

모자불이 일어서면

이 나라에 미륵이 오신다고 했는데
도무지 일으킬 수가 없었소.
이제는 힘도 없소.

그래서 이 녀석을 들였는데 신심 없기로는 나하고 도토리 키재기요.

녀석,

밤마다 어딜 쏘다니는지…

선기도 뿌리가 깊지 못하고 공부도 짧아서

미륵을 모실 그릇이 못 되는 것 같구려."
상좌는 자기 이야기가 지족의 입에서 거칠게 흘러나오자

얼른 다기를 수습하여 방에서 물러났다.
토정은 뭔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상좌를 돌아본 후 곧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그러면 누가 천불천탑을 마저 쌓는단 말씀입니까?
스님께서 이미 연로하시니

이 일을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이 일은 국가 대사입니다."
토정의 국가 대사라는 말에 정휴의 귀가 번쩍했다.
그러나 지족은 태연히 말을 받았다.
"미륵은 국가 대사 같은 것으로 움직이지 않는다오.
중생이 다 죽는다 해도 움직이지 않소."
지족은 밤늦도록 가슴 속에 맺힌 말을 죄다 풀어놓았다.

그러나 토정은 두무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지족은 거짓말처럼 조용히 입적했다.
상좌 현수는

금강경과 열반경을 독송하면서 영가를 천도하기에 바빴다.

정휴는 상좌를 대신해서 장작을 패서 법당 앞에 높다랗게 쌓았다.
정휴가 한참 장작을 쌓고 있을 때

토정이 오더니 처음부터 다시 쌓으라고 일렀다.
"기왕 쌓는 것 목탑으로 쌓게나.

정성을 들여 쌓으면 될 것일세."
그래서 정휴는

맨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기단을 만들고

장작을 조심스럽게 쌓아올렸다.

그리고 그 중간에 상대석을 올려놓은 것처럼

탑신을 받치고 그 사이에 시신을 뉘었다.
다음날 정오,

상좌 현수가 다시 한번 극락 왕생을 비는 염불을 한 뒤에

토정이 불을 당겼다.

서서히 오르던 불길은 금세 지족의 시신을

한입에 삼킬 듯이 기세 좋게 치솟았다.
'북창은 무엇 때문에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일까?'
토정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북창의 속뜻을 헤아려보았다.
'지족 선사의 임종을 지키라는 뜻이었을까?'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형님,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함께 불길을 지켜보고 있던 정휴가 토정에게 물었다.
정휴는 그것이 궁금했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그것이.

물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은 적이 있긴 했다.

온 곳으로 간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데가 있으니 갈 데가 있는 것 아닌가.
정휴가 아는 바로는 이런 질문에 스님들은 이렇게 문답을 했었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느냐?
"가기는 어디를 가는가?

지금 죽었지 않은가?

죽었다는 말밖에는 모른다네.

그런 희망은 절에나 가서 가지도록 하게."
"죽으면 극락에도 가고 지옥에도 간다잖습니까?"
정휴가 재차 물었으나 토정은 냉담하게 말했다.
"그건 누가 지어낸 허깨비 소리란 말인가?

나도 그 말을 들어 알기는 하나,

그건 상상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 거라네.

극락에 가본 사람이라도 있고,

지옥에 가본 사람이라도 있다던가?

다 사람 머리에서 나온 허상에 지나지 않으니 너무 깊이 생각 말게.
사람이라는 게 하도 영악스러워서 죽어도 죽지 않으려고

별별 거짓을 꾸며 스스로 믿는다네.

스스로 위안을 받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짐짓 꾸며낸 말일 뿐일세.

어디 죽은 사람이 살아오던가?

죽으면 다 그뿐이라네.
그것은

그대가 아무리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제는 안 되는 것과 같다네.

하기사
이 세상 사람 치고 그런 말을 진짜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니 나무랄 일도 아닐세.

나 역시 그런 말을 믿고 싶은 생각은 똑같다네."
"그러나 형님,

화담 선생님은 현신까지 하셨잖습니까?"
"난 불가에서 이미 정해 놓은 사후 세계를 경계해서 하는 말이네.

한번 더 생각해보란 뜻일세."
"그래도 성현들이 이미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눈 밝은 도인들은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

오색이 있어 사람의 눈을 가리고,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오음이 있어 사람의 귀를 먹게 한다고 했네.

자네가 꼭 그 꼴이네."
"형님, 그

러나 엄연히 보이고 들리지 않습니까?"
"도는 볼 수가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것이라네.
그러므로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도가 무엇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은

실상 그것을 모르는 것일세.

그러므로

형상이 없는 데서 그것을 보고,
소리가 없는 데서 그것을 들어야 하네."
"그렇다면 죽어서도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꼭 그렇게

존재를 한다 안 한다 하는 식으로 규정해야 성에 차는가?

고래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조상들의 영에 둘러싸여 같이 살았네.

장독대에도 잿간에도 귀신을 모셔놓고 늘 정성껏 모셨지.

신명과 인간은 함께 사는 것이니

도가에서는 간다 온다가 다 한 가닥일세."
토정은 타오르는 불꽃을 올려다보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튿날 토정과 정휴는 운주사를 떠났다.
현수 상좌,

이제는 그가 운주사를 맡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천불천탑의 전설도 연기 속으로 날아가버린 지금

시주도 변변찮은 절을 지킨다는 것은
그대로 고생을 떠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토정은 현수 상좌에게 친근한 목소리로 몇 마디 일렀다.
정휴는 운주사에 머무는 동안

토정이 현수 상좌에게 보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당에서 신처와 몸을 섞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은 아닌 듯했다.

그저 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자연스런 행동으로 보였다.
한참 뒤에야 결국 그 까닭이 밝혀졌다.

북창이 운주사로 토정을 보낸 이유도.

그러나,

그때까지는 정휴도 토정도 그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운주사에서 나온 토정과 정휴는 즉시 한양으로 향했다.

한시가 급했던 것이다.
토정은 북창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박지화에게 전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조선의 대환난을 앞두고 그 비책을 세우려면

도인들의 기지를 모아야 하고

그러자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예언가와 역술가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러자면 조선 역술가들이 모두 모이는 커다란 모임을 가져야겠습니다.

거기서 대책을 논의하고 방비책을 준비해가야겠습니다."
토정과 박지화는 조선역술가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모이는 장소는 일찍이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겨레의 영산인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으로 정했다.
모이기로 한 날은 기사년(己巳年, 1569년) 6월 6일,
토정의 나이 53세 되는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