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은 명종의 명을 받자마자 포천으로 갔다.
부인과 아들 산휘를 데리고 함께 갔다.
포천현에 도착하자 마중 나온 관리들이 새 현감을 영접했다.
관리들은 나발을 울리면서 신임 현감의 부임을 소리높여 외쳤다.
그 소리에 길을 가던 백성들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하나같이 궁기가 흐르고 병색이 짙은 사람들이었다.
토정은 나발소리를 거두라고 명하고 환영 행사를 물리쳤다.
그리고 조용히 관아로 향했다.
논을 내려다보니 물이 메말라 그런지 벼가 잘 자라지 못하고 있었고
밭에는 누렇게 뜬 채소가 힘없이 자라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 손으로 흙을 한 줌 집어보니 모래흙이 버석거렸다.
용인땅의 차진 흙과는 영판 다른 흙이었다.
생명력이라곤 전혀 없는 흙이었다.
신임 현감 토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이 땅과 백성에게 어떤 처방을 내려야
생기를 일으킬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하였다.
토정은 포천에 처음 간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두어번 지나가기는 했으나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었다.
다만 토질이 척박하고 산이 험해서
산물이 적어 가난하리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다.
"사또 나리."
이방이 토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ㄹ다.
"저,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경주 김 씨 종가에 먼저 들러야겠습니다."
"무슨 말이오?
현감이 관아로 갈 일이지 일개 백성의 집엔 왜 들른단 말이오?"
"워낙 세도가 당당해서 미리 예를 갖추어놓아야
고을 다스리시는데 훼방을 받지 않습니다.
새로 부임하는 사또마다 늘 그렇게 했습니다."
"가지 않으면?"
"조정에 줄을 놓아 해임을 시켜버립니다."
"포천현에 오려는 현감도 있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현감이 어떤 자리인데…"
"고을 백성이 굶고 병들어 지쳐 있는데
현감이란 자리가 무에 좋을 게 있겠소?"
"잠시 얼굴만 보이면 되오니…"
"난 자리에 연연한 사람이 아니오.
관아로 곧장 갑시다."
관아에 도착한 토정은 베옷에 짚신으로 갈아입었다.
때가 되자 저녁상이 들어왔다.
상다리가 휘도록 진수성찬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토정이 수저도 들지 않고 물끄러미 상을 내려다보자
아전들은 상이 빈약해서 그러는 것으로 짐작했는지
황급히 상을 물리고 더 큰 상을 차려왔다.
그래도 토정은 밥상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먹을 만한 게 없소."
관리들이 어쩔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그러자 토정은 넌지시
잡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을 가져오라고 하여 그것을 달게 먹었다.
밥상을 물리기도 전에 이방이 다시 들어와 아뢰었다.
"아무래도 경주 김 씨 댁에 가셔야겠습니다.
사또께서 벌써 관아에 도착하신 걸 알고 몹시 화가 나 있다 합니다."
포천.
명나라에 가거나 한양 이북 지방을 가려면 꼭 지나가는 길목,
한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은퇴한 양반들이 즐겨 살았는데,
경주 김 씨라는 세도가도 그런 집안이었다.
토정은 이방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관아를 나갔다.
포천현 내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곳곳을
시찰하고 백성들의 의견을 들을 참이었다.
관아를 나서자마자 나이 사십쯤 되어 보이는 여인을 만났다.
그의 하소연은 토정의 가슴을 후벼팠다.
"집에 메마른 밭이 조금 있는데
지난 해에는 흉년이 들어 아침 저녁 두 끼마저 놓쳐버렸습니다.
점심은 무슨 말인지 잊은 지 이미 오래되었구요.
남편이 굶주려 피골이 상접했길래 차마 볼 수 없어
풀을 뜯어다가 삶아 주었더니
남편은 차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다고 하며
음식을 아이들에게 밀었습니다.
남편은 그 뒤 열흘 만에 굶어 죽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먹을 게 있을까 하여 이렇게 나다니고 있습니다.
관아에 있는 쌀이라도 조금 빌려가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됩니다."
토정이 여인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몰려왔다.
그리고 토정을 둘러싸고 제각기 사연을 털어놓으며 하소연을 했다.
다른 여인도 굶주림을 호소하며 흐느꼈다.
"제가 끼니를 제대로 찾아먹지 못하다보니
젖이 나오지 않아서 마침내 갓난아이가 배고파 혼절했습니다.
그래서 가마니를 털어서 낟알 몇 개를 찾아내었습니다.
그것을 급히 씹어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더니
조금 뒤에 아이의 숨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앞으로 며칠이나 더 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토정은 이방에게 일러
그들에게 창고에 있는 쌀을 한 말씩 내어주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이방이 몹시 주저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포천현은 창고에 있는 쌀을 닥닥 긁어야 수십 가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길목을 지나가는 조정 대신들 대접할 것 하며,
관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줄 것도 부족합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수십 가마가 있지 않소?
그 중에서 덜어내시오."
"그러다가는 사또께서도 굶으셔야 합니다."
"백성이 굶는데 현감이라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겠소?"
이방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사람들을 데리고 창고로 갔다.
토정은 포천의 현황을 세밀히 분석했다.
그 결과 땅이 비옥하지 않아서 굶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흙이 척박하여 아무리 씨를 뿌리고
김을 매어 가꾸어도
비옥한 땅에서 씨만 뿌려두고
가을까지 손 한번 안댄 것보다 소출이 적었다.
따라서 포천 내에서는 아무리 농사를 힘들여 지어도
자급 자족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토정은 포천현의 가난을 떨칠 방도를 궁리하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을 독려하고
농사법을 일러주면서 부지런히 일했지만
당장 눈에 띄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경주 김 씨가에서 토정을 호출했다.
"직접 찾아오시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토정은 몹시 화가 났지만 그 세도가라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한번 보자면서 이방을 따라 경주 김 씨가로 갔다.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들어서니
이미 경주 김 씨의 일족이 다 모여
험한 얼굴을 하고 토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가 신임 현감이오?"
"그렇소이다."
"그런데 인사가 몹시 늦었소이다?"
"공사가 바빠서 아직 이곳까지는 들르지 못했소이다.
할 일이 많소이다."
"현감이 뭐 그리 대단한 벼슬이라고 바쁘다는
핑계로 예조차 갖추지 않는 것이오?"
"대단하지 않아서 감히 사대부집 어르신들 하고는 상종을 못하고,
가난하고 배고프고 병든 백성들을 먼저 만났소이다."
"건방지기 짝이 없군.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 알고 그리 거만을 떠시오?"
"거만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감으로서 하는 이야기요.
포천현에 산다면 포천 현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시오."
"조선에 살면 조선 정승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시오."
"누가 정승이시오?"
"···"
토정의 일갈에 경주 김 씨들은 말문이 막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실상 지금 누가 정승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에 정승을 지낸 사람이 한 명 있어서
그때를 믿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므로 당장 누구를 내세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승이 있다면 이 좁은 포천현에서 현감과 권세 저울질이나 하지 말고
조정에 나아가 정승일이나 충실히 하라고 이르시오.
이 포천현은 높으신 정승 대감이 다스리기엔 너무 작은 고을이오.
이 고을은 현감이라는 낮은 직책으로도 충분하오."
"......"
"난 일이 바쁘니 돌아가오."
토정은 몸을 홱 돌려 걸어나왔다.
토정이 대문을 나선 뒤에야 뒤에서 그를 욕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면했을 때는 토정의 당당하고 빈틈 없는 자세에 눌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으나
지나고 나니 모욕 당한 것에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토정은 김 씨가를 나와 건너편 산으로 올라가 김 씨가의 풍수를 살폈다.
"음, 저 산이로군.
저 산 이름이 무엇이오?"
"잠두산(蠶頭山)이라고 합니다."
뒤따르던 이방이 대답했다.
"내일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겠소."
잠두산 허리를 감돌면서 뽕나무가 무성했다.
김 씨가의 권세가 그곳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토정은 부역을 공고하여 집집마다 사람들이 나오도록 했다.
그러나 김 씨가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양반이 부역에 나올 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신 하인은 내보내는 게 상례였다.
그러나 하인조차 얼씬하지 않았다.
토정은 포졸을 보내 김 씨가의 하인을 끌어오도록 시켰다.
그러자 김 씨가가 발칵 뒤집혔다.
당장 사람을 한양으로 보내 현감의 모가지를 잘라낸다,
그럴 것도 없이 관아로 쳐들어가 현감을 요절내고 만다고 기고만장했으나
토정의 기세에 눌려 목소리만 클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토정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물길을 틀어 잠두산 아래로 흐르게 해놓고,
그 위에 제방을 쌓았다.
그리고 제방 위에는 옻나무를 심었다.
옻잎은 누에가 먹기만 하면 죽는 극약이었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산의 형세가 바뀌었다.
김 씨가 만을 편안하게 감싸고 있던 산이 포천현 전체를 감싸안고
, 김 씨가에만 집중된 생기가 고을 전체에 고루 퍼지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토정에게 반감을 품은 경주 김 씨가에서는
연일 토정을 성토하는 소를 조정으로 보냈다.
그러나
김 씨가에서 보낸 소에 대해서 조정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토정이 물길을 잡아 튼 것이
김 씨가에 서서히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후에 있던 대과에
김 씨가에서 단 한 명도 급제를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향시에서조차 급제자를 내지 못했다.
경주 김 씨가의 쇠락은 눈에 띄게 나타났으나 물길의 변화로 생기를 얻은
백성들의 사정은 그리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았다.
토정은 한양으로 사람을 보내 삼개나루에서 쓰다
남은 돈을 모두 포천으로 가져오도록 했다.
그것으로 우선 가난한 백성들의 빚을 탕감하고 아쉬운 대로
목숨이 경각에 붙은 사람들에게 쌀말이라도 돌려서 한숨 돌리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가 금세 옛날로 돌아갔다.
아무리 검소하게 현을 관리하고
백성들을 독려해도 더이상 나올 소출이 없었다.
토정은 마침내 조정에 소(疏)를 올렸다.
포천현의 고질적인 곤궁은 토정 혼자서 치유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척박한 자연 환경 때문이라는 선천적인 것과
불합리한 제도가 가세를 해서 빚어낸 결과였던 것이다.
조선조에서는
경제 단위가 현별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방에 가서 경제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즉
장사가 아닌 다음에는 그 지방에서 소금도 만들고 고기도 잡고
곡식도 심어서 자급자족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현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현은 더 부자가 되어갔다.
그래서 토정은 그런 폐해를 뜯어고치고
백성을 살릴 수 있는 계책을 적어 조정에 올린 것이었다.
- 엎드려 아뢰옵니다.
신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자란
한낱 어리석은 백성일 따름이옵니다.
하온데
주상께서 과분한 은혜를 내리시어 포천 현감이 되었사옵니다.
포천에 부임하고 보니 포천은 너무나 척박하고 가난한 땅이더이다.
배고파 우는 백성,
몸이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백성으로 신음소리가
하늘 높아 하루도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옵니다.
가난하고 척박한 땅이 어찌 포천뿐이겠습니까마는
이 사정을 들어보시옵소서.
일할 수 있는 장정은 현내에 모두 수백 명에 지나지 않는데
인구는 만 명이 넘사옵니다.
토지가 척박하여 자급자족이 안 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일수록 굶는 일이 허다하고
행여 나물죽이라도 끓여먹을 수 있으면 행복한 축에 드옵니다.
더구나 관에서 곡식을 꾸어다 쓰고 갚지 못한 채
죽거나 타지로 달아난 사람이 많아 관곡마저 자꾸 줄고 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포천은 국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들이 지날 때마다
양곡을 내어 대접을 하고 온갖 편의를 대어주다보면
참으로 그 소비를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옵니다.
올해만도 줄어든 곡식이 백여 석에 이르옵니다.
현의 총재산이라야 오천 석에 지나지 않는데 앞으로
이런 식으로 지내다 보면 십 년이 지나면 천 석이 손실될 것이옵니다.
지금 창고의 지붕마저 온전치 못해서
비가 새어들어와 남은 곡식마저 썩고 있으며,
무기도 전부 낡고 녹슬어 급할 때에 쓸 수 없게 되었으니
큰 걱정이옵니다.
저렇게 곤궁한 백성을 동원해서 보수하고 수리하자니
정말 어렵기 그지없사옵니다.
거기에다 관청은 낡고 감옥은 헐어서 곧 무너지려 하니
어느 겨를에 보살필 수가 있겠사옵니까.
이렇게 간다면 수십 년이 못 되어 이 현은 빈 마을이 될 것이옵니다.
엎드려 청컨대
포천의 백성들이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다른 지방에서 놀고 있는 땅을 저희들이 개간하여 물산을 생산하게 해주시옵고,
바다를 개척하여 해산물을 마련하게 해주시옵소서.
이 땅 어디를 가나 주상 전하의 땅이 아닌 곳이 없사옵니다.
모든 산물은 다만 그 고을에서만 취하여 쓰고
다른 고을에 있는 것은 항상 금지하여
취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옵니다.
비록 타도나 타관일지라도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는데,
이를 분별하여 경계를 두니,
잘못된 제도로 인하여 불쌍한 백성들만 굶주릴 뿐이옵니다.
제가
팔도를 주유하면서 살피니
전라도 만경현의 양초주라는 곳이 있는데
주인 없이 노는 땅이더이다.
만약 몇 해만이라도 그곳을 포천현에 빌려 주신다면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아서
수 년 안에 수천 석의 쌀을 모을 수 있사옵니다.
또한 황해도 풍천의 초도정이라는 곳 역시 주인 없는 땅이옵니다.
이곳을 빌면 소금을 구워 팔아
양식을 수천 석이라도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옵니다.
바다는 땅처럼 주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옵니다.
씨를 뿌리지 않아도 거둘 것이 무진장한 보고(寶庫)이옵니다.
그래서 주인 없는 바다에 나아가 식량을 수확해 오겠다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하여 포천현이 기운을 얻은 뒤에는
양초주와 초도정을
저희같이 열악한 재정에 놓인 다른 현에 빌려주어
자급자족하도록 해주신다면
주상의 백성으로 굶는 이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을 것이옵니다.
고기 잡고 소금 굽는 데
부역할 사람은 자원하는 자를 모집할 것이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이익을 나눈다면 국가에서 한 섬의 곡식도 소비하지 않고
인부 한 사람의 힘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만인의 목숨을 살릴 수 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포천 고을은 백 년의 계책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신이 다만 염려되는 것은 세월이 쉽게 가서,
틈사이를 지나 달리는 말 같은 시간을 잡아맬 수는 없다는 것이옵니다.
만약 일을 다잡아 하지 않고 흥청거려 이루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근심할 만한 일이옵니다.
눈으로 보기에 더러운 약이 병에 적합한 것이 있고,
귀로 듣기에 더러운 말이 때에 맞는 것이 있사옵니다.
하늘이 있으면 반드시 별이 있고,
땅이 있으면 초목이 있사옵니다.
이와같이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인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 참말로 알 수 없는 게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보기 드문 성군이라고 여기저기에서 칭송이 대단한데,
어찌하여 인재를 잘 등용하여 쓰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사옵니다.
해동청에게는 꿩을 잡으라 하고,
닭에게는 아침을 알리라 하고,
말은 수레를 끌게 하고,
고양이는 쥐를 잡도록 시키는 것이 전하의 일이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지금 하시는 일을 보건대,
천하의 해동청을 데려다가 쥐나 잡으라고 시키시고,
닭에게 수레를 끌라 하시고,
말에게는 꿩을 잡으라고 하시고,
고양이에게 아침을 알리라고 하시옵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주상 전하의 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하지 못하신다면 그것은 죄악이옵니다.
그 만한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상 전하 스스로에게는 아무렇지 않을는지도 모르나
백성들에게는 수많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일이옵니다.
한번 귀찮다고 고개를 돌리시는 사이에 수십 명이 죽고,
놀이에 눈을 파시는 사이에 수천 명이 굶사옵니다.
엎드려 원하오니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신이 용렬하고 고루하다 하지 마시옵고
잠시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그러나
토정의 소는 한번 의정부로 들어간 뒤로 깜깜 무소식이었다.
토정은 백성들과 함께 먹고 일하고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며 어명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한양에서 달려온 포졸들이 당장 입궐하라는 어명을 가지고 나타났다.
기다리던 소에 대한 답신이 아니었다.
압송이나 다름 없었다.
토정이 포천 현감으로 내려온 지 일 년 만의 일이었다.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떠나가는 토정의 앞에 엎드려 통곡했다.
비록 그들의 형편을 활짝 피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어주던
어진 현감이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했던 것이다.
그때 토정이 한양으로 가는 것을 애태우며 바라보는 포천 백성들 중,
몹시 안타까운 눈길을 보내는 여인이 있었다.
시선을 느낀 토정이 고개를 돌려 잠깐 그 여인과 눈이 마주치긴 했으나
여인이 먼저 얼른 고개를 떨구어
토정은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관내를 순찰하는 중에도 토정은
몇 번 등뒤에서 시선을 느껴 돌아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토정은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조정에서는 무엇을 준비해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토정은 착잡한 기분으로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대는 아직도,
앞으로 내게 후사가 없을 것이고,
머지 않아 대통을 승계시켜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소?"
명종은 토정이 올린 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전에 봐주었던 사주에 대해 물었다.
"전하,
그렇사옵니다.
정묘년이 특히 고비이옵니다."
"뭣이?
정묘년이라면 바로 내년이 아니던가?
내년이래야 이제 며칠밖에 안 남았거늘."
명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감히 그런 말을 함부로,
한번도 아니고 재차 쏟아내도 괜찮다고 생각하오?"
명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신들 사이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저런, 능지처참할 죄인이!"
"그때 잡아들여 죽였어야 했어!"
"전하,
당장 어명을 내려 저 자를 참수케 해주십시오."
그러나 명종은 좌우를 진정시키고 말했다.
"그대가 현감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소.
세상을 손아귀에 넣은 듯 기고만장하더니
일개 현도 다스리지 못하여 끙끙대다가 제도가 잘못되었느니
어쩌고 하는 상소나 올리는 것이오?"
대신 하나가 명종을 대신하여 토정을 힐난하고 일어섰다.
"이렇게 돼서 나는 곧바로 현감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네."
토정이 정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그만 하기 다행입니다."
"내 몸 다치고 안 다치고,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닐세.
포천을 구할 수 있는 계책이 있는데도
조정에서는 기존의 제도에 얽매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답답했다네.
내가 포천에 가서 한 일은 겨우 백성들 괴롭히는
김 씨가의 세도를 누그러뜨린 일밖에 없네.
세상 일이란 이렇게 혼잣몸으로는 바꾸기 힘든 것이더군."
"포천 백성들에게는 그래도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임금의 사주를 그대로 이실직고한 것이 불찰이었네.
그렇지 않았다면 임금이 내 상소를 받아들여
제도를 고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네."
포천 백성을 생각하면 토정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처음 역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그 바다 같고 태산 같은 지혜에 감동하여
이 세상 사람으로서 운명을 바로 안다면
불행하거나 가난한 사람도 모두
행복하고 부자로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운명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치유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문제였다.
토정은 운명을 아는 것보다
이제 운명을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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