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어디로든 뻗어 있었다.
화순 가는 길을 잡자면 해남에서 강진, 장흥, 보성을 지나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높은 산도 없이 넓기만 한 들길은 어디를 밟아도 좋을 듯이 넉넉했다.
"힘이 하나도 드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선생님."
박지화가 휘적휘적 팔을 내저으면서 기운차게 걸었다.
"뱃길이 몹시 지루했던 게로군."
화담 역시 조금도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 품이 넉넉한 산이 하나 나타나자 화담이 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선생님, 산이 좋군요."
지함이 넌지시 화담의 의중을 떴다.
"그렇다네. 저 산은 왕조가 몇 번 바뀌어도 전란이나 변고를 겪지 않을 곳이야."
"무슨 산입니까?"
"두륜산일세.
전에 내가 지리산 산천재(山天齋)로 남명(南冥 曺植)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영남의 선비들이 그렇게 자랑하더군.
지금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면앙정,
그리고 우리 산방을 다녀간 정개청(鄭介淸)을 그때 다 만났지."
"남명이라면 선생님께서 젊은 시절에 법담(法談)을 나누셨다는 그분 말씀이군요?"
박지화가 물었다.
"그렇지.
방계들끼리 어울린 거지.
그 시절에 두륜산까지 와서 밤새 말씨름을 하고 간 적이 있었지."
"처음 오시는 곳이 아니로군요."
"도라는 것이 본시 구름이나 물을 닮아서
그걸 구하려는 사람 또한 이리저리 흘러다녀야 하는 법인데,
난 그렇지 못했네. 겨우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를 돌아본 정도라네."
"두륜산에서는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지함이 물었다.
"내가 남명을 만난 것은 내 나이 마흔이 훨씬 넘어서였지."
화담은 길을 걸으면서 천천히 자신의 옛 일을 풀었다.
서경덕이 마음 속으로 정혼했던 가희 처녀,
바로 천안의 객주집에서 만났던 정옥이란 처녀의 전생.
그녀가 대가집 첩으로 팔려가자 서경덕은 농사도 집어치우고 혼자 끙끙 앓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고뇌가 서경덕의 마음밭에 새로운 싹을 틔웠다.
서경덕은 그때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경덕은 그때 처음으로 책을 잡았다.
따로 서당에 나갈 형편이 못 되었으므로 혼자서 읽고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혹 뜻이 막히거나 분명하지 않을 때는 며칠이고 그 구절을 되뇌었다.
스승이 있었다면 금방 물어 보고 깨칠 수 있었지만,
스승이 없는 서경덕은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그 뒤 서경덕은 나이 마흔한 살이 되어 향시에 나갔다.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경덕은 향시의 생원과에 붙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때 이미 성균관의 직강(直講)이 되어 성균관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면앙정 송순을 만났다.
스승인 송순은 제자인 서경덕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어렸다.
송순은 벼슬길에 일찍 들어섰지만 날개 잃은 해동청이었다.
송순은 대과에서 그를 장원으로 뽑아주고 훗날을 기다리라던
대사헌 조광조(趙光祖)의 언약을 기대하고 있었다.
조정에 파벌간의 알력이 심해서 혼자 힘으로는
벼슬길을 순조로이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조광조가 사화로 실권을 잃고 유배지에서 끝내 사사(賜死)되었던 것이다.
그후 송순은 미관 말직에 오래 머무르거나 한직(閑職)을 전전해야 했다.
성균관 학인들과 본시 출신부터 달라서 성균관 공부에 영 취미를 못 붙이던 늙은 학생 서경덕,
그리고 높은 벼슬길에 오를 생각은 언감생심 내기도 어려운 신세가 되어버린 직강 송순.
두 사람은 강의가 끝나면 스승과 제자라는 형식적인 관계를 던져버리고
동년배의 벗이 되어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세상을 비판하고 시류를 걱정했다.
얼마 안 가 서경덕은 기어이 성균관을 자퇴하고 송도로 가버렸다.
송순은 그런 서경덕을 말리지 않았다.
송순 역시 권력 다툼에 진저리가 나 있어 머지 않아 한양을 뜨리라 마음 먹고 있던 중이었다.
송순도 끝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송순은 성균관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에는 성리학의 대가 남명 조식이 머무르고 있었다.
조식 역시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에 산천재를 차려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때 영남의 선비들은 물론,
이미 조식의 고명을 들은 호남의 대선비들까지 산천재에 몰려들어 있었다.
송순 역시 조식의 산천재에 머물면서 도학을 토론하였다.
송순은 조식에게 서경덕을 소개했고,
서경덕은 그 인연으로 지리산 산천재를 찾아가
조식과 학문을 논하고 법담을 나누었다.
그 이후 조식과 서경덕 두 사람은 더없는 지기가 되어
서찰을 주고 받으면서 교분을 쌓아갔다.
어떤 때는 지리산에서 나라를 걱정했고,
어떤 때는 속리산에서 만나 몇날 며칠이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던 중 조식이 앞장선 가운데 두 사람이 두륜산을 오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두륜산에서 남명과 나눈 얘기를 다 하자면 한 달도 더 걸릴 걸세.
머지 않아 그이들을 찾아갈 것이니 그때 가서 또 이야기함세.
저 산을 넘어야 해남이네."
화담은 길을 재촉했다.
일행은 두륜산 등성이에 올라섰다.
해남이 바로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올라온 나그네들의 땀을 식혀주었다.
고갯마루 나무 그늘 아래 장사꾼 차림의 사내 서넛이 짐을 풀어놓고 편하게 앉아 있었다.
"어디로 가시는 선비님들이시다요?"
그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 끝엔가 웃음꽃을 터뜨리더니 낯선 사람들에게 이무럽게 말을 붙여왔다.
"화순에 가오."
"여가 해남인게 아직 멀었구만이라.
초여름이라도 걷자니 덥지라?
근디 워디 사시는 선비님들이라요?"
장사꾼은 말끝을 살짝 말아올려 반말인지
존대말인지 구별이 안가게 은근슬쩍 얼버무렸다.
"팔도를 떠도는 나그네올시다."
"아따, 팔자가 좋은 양반님들이시구만요잉."
불쑥 말을 내뱉고는 실실 눈치를 살피는 품새가
양반 앞에서 말을 함부로 했다 싶은 모양이었다.
옆 사람의 난처한 처지를 감싸주려는 듯 곁에 앉아 있는 사내가 말을 냉큼 받았다.
"참말로. 마누라고 자식 새끼고 다 팽개쳐뿔고 더도 말고
한 일 년만 이 선비님들 뒤를 쫓아가 뿔끄나 어쩌끄나."
한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
옆에서는 청승맞은 노래가락까지 뽑아올리고 있었다.
정말로 자기네 신세가 한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할 일 없이 유람이나 하고 다니는 팔자 좋은
양반들에 대한 야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적의 가득한 눈길을 뒤통수에 받을 때처럼 지함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선비님들. 요 고개 이름이 뭔지 아시요?"
"초행이니 알 까닭이 있겠소."
"해남 사람들은 요 고개를 아침 고개라고 부르는디,
워째서 아침 고개냐 허먼,
선비님들이 지나온 길에서 오른쪽으로 쪼매 들어가먼 화내리라고
여흥 민씨들 마실이 있다 이것이요.
여흥 민씨 세도가 월매나 쎈지 해남 현감 모가지를 좌지우지 흔다요.
그래논께 현감들이 아침이먼 새복같이 요 고개를 넘어 여흥 민씨헌티 문안을
올릴라고 쌔가 빠지게 달려간다고 혀서 요 고개가 아침 고갠디,
해남에 오는 현감마다 다 고 모양 고 짝이니 현감들이 일을 지대로 헐 수 있것소."
"우리 양반님들 백성 다시리는 거시 다 고 모양이제 머.
워디라고 다르것는가.
내 전번에 화순으로 소금을 팔러 가다가 사람을 하나 만났는디
영광으로 굴비를 구하러 간다고 안 허것는가.
차림새를 봐헝께 영광꺼정 다님서 고런 귀한 생선 구해 묵을 처지도 아닌디 말이여.
그래 물어봉께 공물로 바칠라고 그런다등마.
공물이란 거시 뭔가.
고 지방서 나는 특산물을 나랏님헌티 바치는 것인디 원에 앉았는 것들이
즈그 마을서 머가 나는지도 몰르고 품목을 정했단 말이 아니것다고."
"누군지는 몰라도 그 위인 안돼얏그마이.
보나 안보나 불알 두쪽만 덜렁 찬 빈털터릴 것이 뻔하던디…"
"글씨. 그거시 내 말이시.
한 마실에 떨어진 공물인디 워쩌것어.
찢어지는 살림에 마누라 머리도 팔고 여름 넘길 보리쌀도 팔고
그래 갖고 돈을 모았다대."
"야야. 집어치거라.
그런 얘기 내동 해봤자 머리만 아프께.
힘없는 무지랭이가 워쩌것냐.
나 죽었다 글고 살아야제.
집어치고 또 가봐야 안쓰것다고.
팔자 좋은 양반님네를 만나 갖고 시간만 잡아묵었네.
자, 싸게싸게 가드라고."
장사꾼들은 서로 앞다투어가며 왁자지껄 자기네 신세를 한탄했다.
한동안 입담좋게 지껄여대더니 장사꾼들은 솜씨좋은 말만큼이나 잽싸게 짐을 꾸렸다.
"여보시오."
지함이 느닷없이 맨 마지막으로 꾸물거리며 일어나는 장사꾼을 불러세웠다.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사내였다.
"시방 지를 부르셨소?"
"그렇소이다."
"먼 일로 그럿라신당가?"
"생년월일을 한 번 대보시겠소?"
"뜬금없이 생년월일은 뭣에다 쓰실라고라우."
"내 사주를 좀 봐드리리다."
사주라는 말에 지게를 짊어지던 장사꾼들이 흥미가 당기는지 일손을 멈추었다.
"아니,
버젓한 사대부 집안의 서방님 같은디 사주를 다 보실 줄 아시요?"
"구미가 당기면 좀더 머물렀다 가시구려."
"지대로 사주만 짚을 줄 아신다면야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한들 아깝것소?"
"허허허, 믿어 보시구려.
제대로 짚지도 못하는 걸 나서겠소?
엉터리로 봤다가 가는 길에 내 욕을 얼마나들 해댈지 뻔히 알고 있소이다."
"웜매, 시방 이거시 되로 줬다가 말로 받는 꼴 아니드라고이.
선비 나리도 말심 좋기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시요이."
곁에 있는 양반들 들으라고 양반 욕을 실컷 했던
장사꾼들이 배실배실 웃으며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부텀 봐주실라요, 선비 나리?"
"아니오.
처음 물었던 양반부터 봅시다.
걱정이 많으신 듯 하니…"
"웜매? 사주만 짚는 거시 아니고 점도 보는갑네.
쪽집게요, 쪽집게."
본인은 정작 시름 깊은 얼굴로 말이 없는데 옆에 앉았던 점박이가 무릎을 치며 거들었다.
"아따, 쪽집게는 먼 쪽집게여.
나라도 이 친구 걱정 많은 것은 알것그만.
얼굴을 척 보라고.
시방 우리 집에 우환이 꽉 들어찼소,
그라고 안써졌는갑네."
팔자 좋은 양반님네라며 은근히 비꼬던 자그마한 사내였다.
그는 이미 지함에 대한 배타심을 버린 다른 사람들과 달리 깐죽거리고 나섰다.
"허허. 바로 그거요.
쪽집게가 달래 쪽집게겠소.
누구나 가만히 살피면 다 알 수 있는 일인데…
남들이 무심히 스쳐 지나는 것을 침착하게 알아보면 그게 바로 쪽집게지요."
지함이 너무 쉽게 자기 말을 인정해 버리자 사내는 좀 머쓱한지 숱이 적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따, 오래 살다 봉께 쓸 만한 양반을 볼 날이 다 있네이.
선비 나리 허시는 말씀 족족이 다 명언이구만,
명언이라."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오?"
"계유년 계해월 무자일 정사시그만이라."
지함은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생년월일을 써놓고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찢어지게 가난했구려.
기미(己未) 때 운이 돌아 치부를 하여 장차 거부가 될 상이오.
다만 화기(火氣)가 부족하여 고생할 것이니 화기를 생해주는 목(木)을 늘 곁에 두시오.
장사를 하더라도 나무나 종이를 다루는 것이 좋겠소."
"아따 징하게 좋은 소리구마.
그게 참말이다요?"
"참말이오."
"이보게나.
가야 할 때가 됐네.
벌써 해가 기울고 있구만."
장사꾼들 사주를 풀어주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지함은 화담이 부르는 소리에 그제사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해가 서쪽으로 꽤 기울어져 있었다.
동그랗던 그림자도 훌쩍 키가 커져 있었다.
햇살 때문인가,
어쩐지 화담의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시지라.
지들도 후딱 가봐야 쓰것그만이라.
그란디 선비님들은 워디워디 가신다요?
기왕 유람 다니시는 거라믄 지가 사는 강진에도 볼 것이 많은디요.
해남에서 멀지 않지라.
묵을 것이사 변변치 못혀도 지들이 심을 모다 정성껏 대접도 해드릴 것이고.
시간이 나먼 가는 길에 꼭 한번 들려주시씨요이.
지 이름은 오천석이구만요.
소금장시 오천석하먼 이름값도 못하는 장사꾼이라고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구만요."
사주를 짚었던 사내가 그동안 정이라도 들었는지 아니면 고마움 때문인지 아쉬움에 미적거렸다.
"시간이 나거든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내 말을 마저 듣고 가야지,
그냥 가면 안 됩니다."
"먼 말씀이시다요?
거부가 된다고 하셨응께 그걸로 다 됐지라."
"아니오.
축기(縮氣)만 알고 방기(放氣)를 모르면 거부가 되어도 돈에 치어 죽습니다.
뭐든지 과하면 불급만 못한 것.
그게 아무리 돈이라도 많으면 해가 되는 것이오."
"무신 말씀인지 도통 모르것네.
돈이사 많을수록 존 것이제."
길을 가자던 화담이 잠자코 지함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뭐든지 기가 과하면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금기도 그러하니 금이 과하면 목이 죽습니다.
이걸 잘 하는 사람은 저걸 못하고,
저걸 못하는 사람은 이걸 잘 합니다.
그렇게 이것저것 꿰어맞추다 보면 누가 더 잘난 것도 없고,
누가 못난 것도 없지요."
"고러코롬 어렵게시리 말씀허실 게 아니라 쉽게 해주시지라."
"방기를 잘 하라는 것이오.
들어오는 돈을 꼭 잡고만 있지 말고,
잘 쓰라는 말이오.
자기에게 부족한 쪽을 메꾸는 데 쓰시오."
"오매. 돈은 버는 것보담 쓰는 것이 더 중하다 이 말씀이시지라."
"그렇소. 돈은 누구나 벌 수 있는 것이오.
그러나 축기를 하고 방기를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오.
즉, 그것을 꼭 쥐고 놓고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오.
쥐는데 힘을 쓴 만큼 놓는데도 소홀히 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기에 치여 오래 살지 못합니다."
"명심하것소."
"그것이 거부가 가는 가장 높은 길이오."
"아이고, 선비님.
함자라도 알려주셔야 안 쓰것소."
짐짓 내리 대하듯 하던 선비 나리란 호칭이 어느새 선비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름을 알아서 무엇하겠소.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그래도 사람 정이 그런 게 아니구만요."
장사꾼들은 무거운 짐까지 다 짊어진 채 이름을
알려줄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기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성은 이씨, 이름은 지함이오.
그럼, 잘들 가시오."
장사꾼들은 떠들석하니 목청을 높이면서 고개를 내려갔다.
화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지함, 자네 제법일세."
"그저 선생님의 기론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그래도 돈을 벌고 쓰는 것을 축기다 방기다 하고 설명한 것은 아주 좋았네.
바로 그것일세.
백성들은 눈앞에 있는 것만 보아 모를 뿐 누구나 기를 쓰듯
하다 보면 부자도 될 수 있고 신선도 될 수 있는 거라네.
그것을 자네 같은 사람들이 이끌어야 하는 걸세."
화담은 처음으로 지함의 근기(根機)를 칭찬했다.
박지화는 내심 지함이 부러웠지만 화담의 말을 굳이 탓할 마음이 없었다.
다만 해가 저물어가므로 길을 어서 떠나자고 재촉했다.
"선생님, 서두르셔야겠습니다.
화순까지 갈 길이 멉니다."
"그러세. 우리도 그만 일어나세."
세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앞서 간 장사꾼들은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벌써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고갯마루를 내려가니 해남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산은 백번을 돌고 비단을 땅에 비뚜름히 두른 듯 물은 천 굽이 굽이치네."
지함은 저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읊조렸다.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가 해남 땅을 두고 읊은 시였다.
"김극기의 시구만.
저길 보게."
화담이 발 아래 펼쳐진 해남을 가리키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땅 생김이 어떤가?"
해남은 바다가 가까운데도 사방으로 기세좋은 산이 뻗쳐 있었다.
그리고 그 산 안쪽으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에 닿아 수기를 넉넉히 받으면서,
그 수기를 적절히 조절할 목기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 말씀이십니까?"
박지화가 찬찬히 둘러볼 생각은 하지 않고 성급하게 물었다.
그는 이론에는 밝았지만 덤벙거리느라 천문이나 지리를 제대로 짚지 못했다.
"산 이름이야 모르겠으나 마치 옥녀가 병풍을 둘러치고 앉아 비파를 타고 있는 형세로군요.
그러니까 둘러서 있는 산세를 청룡과 백호,
현무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네.
그러니 연안 이씨니 여흥 민씨니 하는 세도가가 발흥하는 것일세."
"그럴 법도 하군요."
"모든 게 기의 얽힘일세.
어떻게 하면 사람이 그 얽힘을 홀홀 벗어날 수 있겠나?"
화담은 질문을 던져 놓고는 앞장서 갔다.
"선생님."
지함이 앞서가는 화담을 불러세웠다.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도를 아는 것이지."
"저 많은 백성들이 언제 다 도를 닦아 벗어납니까?
이런 세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그러나 화담은 암벽 같은 뒷모습을 보인 채 대답이 없었다.
"선생님,
그렇다면 그동안 백성들은 끊임없이 고통에 신음해야 하는 것입니까?"
화담은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이보게나.
도를 아는 것조차 어렵다네.
그런데 온 백성을 구하는 법을 어찌 당장 알겠나.
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언젠가 때가 오지 않겠나?"
버티고 서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지함을 박지화가 잡아끌었다.
지함은 박지화의 손에 이끌려 앞서간 화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앞장서서 걷고 있는 화담의 발길이 두륜산 자락을 돌아 다시 해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생님, 화순은 강진으로 해서 가는 게 빠릅니다.
강진으로 가려면 이쪽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박지화가 화담에게 여쭈었다.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리 가자고 약조한 바가 있는 것도 아니니 돌아돌아 가세."
화담은 그렇게 말하면서 길을 바꾸어 들었다.
"그래도 이쪽으로 가면 한참 돌아야 할 텐데요?"
"빨리 가자고만 한다면 바로 송도로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네."
화담이 두 사람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길을 바꿔 걸었다.
"쳇, 언제는 우리 말에 귀 기울인 적이 있으시던가."
박지화가 나직한 소리로 지함에게 말했다.
"쉿. 선생님이 가자시는 대로 가보지요.
그러게 안 진사도 보고 어부도 만난 것 아닙니까?"
"그럼 여기서 갈라질 수도 없으니 따라가지 않구.
무슨 좋은 일을 꾸미시려구 번번이 길을 바꾸시는지."
"어서 따라가십시다."
지함이 부지런히 화담을 따라가자 박지화도 하는 수 없이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그때 정휴 일행은 해남 항촌 마을에 닿고 있었다.
홍성을 떠난 정휴와 전우치, 남궁두는 다시 보령으로 가서 거기에서 대천, 서천으로 갔다.
장항에서 금강을 나룻배로 건너 이리, 김제, 나주, 영암을 거쳐 해남에 들어섰던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빨리 걸은들 빠른 배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밤잠도 안 자고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정휴 일행이 항촌 마을에 닿았을 때였다.
그늘을 넉넉하게 드리우고 있는 정자나무가 있어 전우치가 잠시 쉬어가자고 청했다.
세 사람이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는데 두륜산을 넘어온 장사꾼 셋이 정자 나무 그늘로 들어섰다.
"워매, 이 양반들도 팔도 유람 나선 것이구마.
세월 참 조오타."
장사꾼 가운데 한 사람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도 정휴 일행을 힐끗 바라보면서 어깨에 메고 있던 봇짐을 내려놓았다.
정휴 일행은 지치기도 해서 아무도 장사꾼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이고, 말이 말 같지 않은개비요이.
남산골에서 오신 한량들이셔서 말씀도 없으셔이."
장사꾼이 계속 이죽거리자 정휴가 하는 수 없이 한마디하고 나섰다.
"여보게, 그만 하게나.
우린 사람을 찾느라고 바쁘고 또 지금 몹시 피곤하네. 어서 길을 가야 한다네."
"바쁘기사 우리만큼 바쁘실까?
기왕지사 쉬는 길에 쪼깨 말이나 붙여볼라구 그랬지라.
근디 워떤 사람을 찾는 행차시길래 세 명씩이나 몰려다닌당가요?"
"알 것 없소."
전우치가 불편한 심기로 한마디 던졌다.
"하이구. 매정도하시요잉.
두륜산에서 본 선비들 하곤 영 씨알머리가 다르구마.
안 그런가, 오천석이."
"고만 하드라구..
이 선비님 같은 분들이 쪼매 간 거라.
원래 상놈하고는 상종도 안 허는 게 양반의 도리 아니당가."
정휴는 오천석이라는 장사꾼이 이 선비라고 말한 것에 귀가 번쩍 트였다.
"지금 이 선비라고 했소?"
"그거야 우리네 일이고마.
왜 묻는 것이요이?"
"우리도 이 선비라는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
"아이고, 조선 천지에 쌔고 쌘게 이 선빈디 워떤 이 선비 말씀이지라?"
"정휴 스님, 그만 두고 길이나 떠나세."
전우치가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정휴가 장사꾼들에게 한마디 더 물었다.
"혹 두륜산을 넘어왔다면 노인 한 분 하고 젊은 사람 둘이서 다니는 걸 못 보셨소?"
"그냥 가자니까 그러네.
이 사람들하고 노닥거릴 시간이 없네. 어서 가세.
이러는 사이에 다른 길로 빠지면 어쩌는가?"
남궁두가 정휴를 끌었다.
"아이고, 그 선비님 성미도 급혀라.
시방 스님이 말헌 게로 생각이 나는건디,
쪼기 조 두륜산 마루에서 어떤 양반들을 만났는디 바로 그 말이라.
노인 양반 한 명, 그렇지.
선생이라고 부르더마.
그이하고 젊은 사람 둘.
그 젊은 선비 말인갑네,
자네 사주 봐준 그 선비 이름이 뭐랬더라….?"
"지자 함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라. 이지함 선비라고 했지라."
"뭐요? 이지함?"
정휴가 눈을 번쩍 떴다.
전우치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이가 지금 어디 있소?"
"이 선비를 찾는 게라우? 딱도 하셔라.
그렇다면 여그서 잠시 낮잠을 한 잠 팍 자뿌리면 저절로 올거시요.
우리네 걸음이 워낙 빠르니께 못해도 한 점쯤 있으면 이리로 올꺼구마."
"삼인행에 거 뭐시라.
필유아사라.
세 사람 가는 데에 선생 하나가 있어라.
이 말 아시지라?
정만 쪼께 나누어 쓰다보마 이런 일도 생기는 거구마.
자, 우린 가드라구."
장사꾼 일행은 다시 봇짐을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정휴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 그늘에 다시 앉았다.
"다행이네.
이 선비가 멀지 않은 곳에서 오고 있다니 해거름 안에는 만날 수 있겠네."
"그런데 노인이라는 분은 누군가?
이 선비 하고 같이 다닌다는 분 말일세."
남궁두가 물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네.
홍성 친구는 그이가 바로 화담이라고,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했는데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
"그래도 혹시?"
"혹시가 뭔가?
이미 돌아가신 분이 살아계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릴세."
"기다려 보세.
화담 선생인지 아닌지 곧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세 사람은 그늘에 앉아 이지함 일행이 오기를 기다렸다.
전우치는 벌써 그늘에 누웠고,
남궁두는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뻗었다.
정휴만 두륜산을 바라보면서 초조하게 지함 일행을 기다렸다.
화담이 살아 있다니…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화담은 분명 정휴의 손으로 직접 묻었다.
그런데 화담이 살아 있다니.
이 책도 엄연히 있지 않은가.
그분이 살아계시다면 굳이 내게 그 일을 부탁할 까닭이 없잖은가.
정휴는 기다리기로 했다.
이지함을 만나기만 하면 곧 풀릴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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