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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豫言者(Prophet) - 소설^토정비결(上-3)

山境圖
十勝地

정휴는 점심때가 조금 지나 홍성현에 도착했다.
정휴는 몸을 쉴 곳도 마련하기 전에 이지함이라는
젊은이를 먼저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령을 떠나던 차림 그대로 이지함의 집을 찾아 나섰다.
지함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애나 어른이나 지함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긴 이웃 보령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이니

근동에서야 당연한 일일 터였다.
지함의 집을 찾아가는 동안 정휴는 지함에 관한 소문을 여러 가지 들었다.

소문이라는 것이 본래 옮겨지는 동안 한두 켜씩 말이 덧붙여지기 마련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로 한 고을 사람의 이야기인데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너무 허황한 얘기가 많았다.

지함은 지체 있는 양반집 자제인데도 신분간에 격의를 두지 않는다,

농부들과 술잔을 들기도 하고 
들에 나와 올해는 이 작물을 심어라 저 작물을 심어라 하고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지함의 말을 들은 농민들이 큰 이익을 봤다-.

여기까지는 에누리없이 그대로 믿어준다고 해도

지함이 앞날을 읽어 방죽을 쌓았다는 얘기는 너무 허무맹랑하다 싶었다.
지함의 가문은 홍성현에서는 유서깊은 양반가이지만
지함은 어려서 부모를 다 잃고 형의 손에서 큰 모양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바다가 바라보이는 야트막한 동산에 어머니 묘를 썼다고 한다.

물론 지함이 어려서의 일이지만 지함이 제법 나이가 들자
어느날 갑자기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갔다가

몇 달 만에 그야말로 큰돈을 벌어왔다.

러고는
뜬금없이 인부들을 사서 어머니 묘 앞에 방죽을 쌓았다는 것이었다.

후일 무덤까지 바다가 될 터인데
어머니의 무덤이 물에 잠겨서는 안된다는

효심의 발로였다는 것이다.

방죽을 쌓은 것이야 물증이 분명히 있는 이상 사실일 테지만

나머지는 정휴로서는 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어쨌거나 공사를 하고 남은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거나,

지함이 신분에 연연해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정휴로서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종이라면 맞상대도 하지 않는 것이

세도당당한 양반의 일반적인 세태인 세상임에야.
지함이란 사람이 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정휴는 조바심치며 단숨에 지함의 집까지 달려갔다.

그런 정휴를 웅장한 솟을대문이 가로막고 섰다.
그제서야

정휴는 남루한 자기 행색을 돌아보았다.
이 행색을 보고 지함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것으로 미루어 이지함의
인격을 평하리라 마음먹으면서 정휴는 기세좋게 문을 두드렸다.

곧 이어 하인의 부산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육중한 대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뉘십니..."
허리를 깍듯이 숙이던 하인배가

정휴의 다 닳은 짚신짝을 보더니 고개를 벌떡 들었다.

어디로 보나 천출임이 틀림없는 작자라는 표정이었다.

하인의 언성이 대뜸 높아졌다.
"나는 또 도련님 찾아온 어르신인 줄 알았네.

무슨 일이오?"
"가서 이르시오.

보령(保寧) 청라동(靑羅洞)에 사는
정휴라는 사람이 세상을 구할 지혜를 논하러 왔다고..."
그러자 하인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여보시오,

이 집이 뉘 집인 줄 알기나 하시오?
행색을 보아하니 나와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인 것
같은데 감히 누굴 만나겠다는 것이오? 제기랄,

세상을 구할 지혜 좋아하네.

세상은 뒀다 구하고 옷 한 벌 구할 꾀부터 내야 할 형편에..."
하인은 더 이상 시비도 없이 누런 이빨 사이로 침을
퉤 하고 내뱉으며 바지춤을 추켜올렸다.
"경전이나 교리에 얽힘이 없다는 주인 밑에서 배운것이 
고작 그 정도요?

냉큼 가서 내 말을 이르기나 하시오."
해진 옷소매 사이로 맨 살이 내비치는 초라한 행색이건만

정휴의 말에는 조금도 비굴함이나 동요가 없었다.
정휴의 나이 열여덟.

몸집은 큰편이 아니나

얼굴에서 제법 나이깨나 먹은 어른 티가 났다.

약간 왜소하다 싶게 갸냘픈 몸집,

희고 깨끗한 피부는
남루한 옷차림과 묘한 대조를 이루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왠지 모르게 비장한 느낌이 들게 했다.
"아따, 이 사람

까마귀도 안 돌아볼 행색을 하고는 제법 큰소릴세.

우리 도련님이 없는 놈들한테 인심을 쓴 뒤로는

개나 걸이나 쥐뿔도 없는 것들이 이렇게 꼬여든다니까."
그때였다.

대문을 마주보고 있는 사랑의 문이 열리면서 스물네댓이나 되었을까,

갓도 쓰지 않고 의관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젊은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정휴는 그가 이지함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뉘신데 나를 찾소?"
지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휴는 성큼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저는 이웃 보령에 사는 정휴라고 합니다.

이 선비의 고명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하하하.

저같이 미숙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무엇을 배우시겠단 말이오?

그나저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하인도 한눈에 알아본 정휴의 행색이 지함의 눈이라고 보이지 않을 리 없건만

지함은 꼬박꼬박 공대를 했다.

항간에 나도는 소문이 근거없는 뜬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랑에는 이지함 혼자가 아니었다.

의관을 절도 있게 차려 입은 같은 또래의 선비 한 사람이 지함과 마주 앉아 있었다.
"여기 술상을 다시 차려주게나."
정휴에게 세상 구할 지혜보다 옷 구할 꾀나 먼저 내보라던 하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뜸을 들이며 서 있다가 물러났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지함은 술상이 나오자

비로소 웃는 얼굴로 술을 권했다.
"자, 한 잔 드시지요."
정휴는 어려운 스승 앞에 선 제자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대문 앞을 버티고 선 하인에게 큰소리를 탕탕 치기는 했지만,

정휴는 사실 몸가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기만 했다.
"편히 앉으시지요."
지함이 다시 정휴에게 말했다.
"인사나 나누시지요.

이쪽은 이번에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뽑혀

한양으로 떠나게 된 안명세(安名世)란 친구요.

저와는 죽마고우지요.

마침 이별주를 나누던 중입니다."
"저는 보령 청라동에서 온 정휴라고 합니다.

행색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보령 심충익 대감 댁의 종이었습니다.

대감께서는 보잘것없는 제 글재주를
어여삐 여기시고 종살이에서 풀어주셨지요."
세 사람은 그제사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나누었다.
안명세도

천출과 인사를 나누는 데 별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동작이나 표정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 친구 집은 대대로 사관을 지냈다오.

이 친구, 생전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을 것처럼 초연한 체 하더니만

내게 한 약조를 어기고 저 혼자 달아나는 중이라오."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는 먼저 다 따놓고
뜸을 들이면서 내 흉을 보는 겐가?"
지함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명세가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러자 지함이 껄껄 웃으면서 술잔을 들었다.
"이왕 역사 얘기를 하던 중이었으니 우리 함께 계속해 봅시다."
정휴가 오기 직전까지 제법 논의가 뜨거웠던 모양이었다.

정휴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빨려들어갔다.
먼저 안명세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씨의 씨를 말린 날부터
이 나라에는 망조가 든 거나 다름이 없네.

보게나.
역사는 역사를 먹고 자란다네.

태종이 아버지를 본받아 혁명을 하고,

세조가 그러했고 중종이 그러했잖은가.

앞으로 또 왕위 찬탈전이 얼마나 많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네.

이 병든 왕조를 누가 치료할 수 있겠는가."
안명세는 어딘지 심충익을 연상케 하는 생김새였다.
파리한 얼굴색도 그렇고,

병약해 보이면서도 강단 있어 뵈는 몸집도 그러했다.

지함이 생김새부터 느긋하고 소탈한 반면

안명세는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선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안명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이 정휴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지 백여 년,

입에서 입으로
역성(易姓) 혁명의 뒷얘기가 흘러다니고는 있었지만
조선 왕조는 이제 튼튼하게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특히나 세도를 누리고 있는 양반이라면 모두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신흥 사대부거나

적어도 고려의 멸망을 좌시한 사람들이었다.
안명세나 이지함의 집안 내력도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을 터였다.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조선 왕조에 대한 비판이

거침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늘 해온 얘기인 듯 별 거리낌이 없었다.
"자네는 과거를 사는 사람이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어쩌겠는가.

언제나 현실이 중요한 법이지.
미래는 더욱 중요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시험을 치른 친구가 옛날 이야기로 금조(今朝)를 마구 힐난하는가?

과거(科擧) 보더니 과거(過去)에 아예 묶여버렸구먼."
지함이 빙긋이 웃으며 안명세의 말을 농으로 받았다.
"무슨 말인가.

과거 없이 어떻게 오늘이 있을 수 있는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몸일세.

과거를 버리고 현재만을 보는 눈이 더 위험한 걸세."
"바로 그걸세.

고려 왕조는 망해도

고려 백성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네.

조선 백성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다스리는 자가 망한다고 백성까지 망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역사란 그런 백성을 위해
과거의 지혜를 남겨주려는 것 아니겠는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리산에서 보록이 한권 발견되었다네.

거기에는

목자(木子) 곧 이(李)씨가 왕이 되고

삼존삼읍(三尊三邑) 곧 세 사람의
정(鄭) 씨가 그 왕을 보필한다고 되어 있다네.

또 단군조선 때의 선인(仙人) 신지(神誌)가 지은
<신지비사(神誌秘詞)>와

신라 때의 중 도선(道詵)이 지은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에도

한양 길지설(吉地說)이 적혀 있다는군.

오행으로 보자면 신라는 금덕(金德)에 해당하고,

고려는 수덕(水德)에 해당된다네.

금생수(金生水)

즉 금이 수를 도와 고려가 있으니

다음에는 당연히 수생목(水生木)하여
목이 나타나는 거지."
"자넨 어려서부터 주역을 꽤나 좋아하더니
기서(奇書), 참서(讖書)에도 밝구먼.

그러나

그따위 것들은 창칼이 일어설 때마다

그 창칼을 손에 쥔 자들이 민심을 수습하려고

일부러 퍼뜨린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네.

국운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것,
하늘이 다 알아서 정하는 이치대로 살아가는 게
순리라는 그런 숙명론에 난 승복할 수 없네.
조선이 일어난 것은 하늘이 시킨 것도 아니요,
참서가 요술을 부린 것도 아닐세.

이성계가 칼로 쳐서 세운 것일 뿐,

다른 말은 다 거짓이네.

역사는 오직 진실만을 추적해야 하네.

그런 맹랑한 얘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역사는 사람이 짓는 것이지 하늘이 짓는 것이 아니라네."
분위기가 점차 격앙되어 가고 있었다.
지함과 안명세는 침울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지함은 안명세의 고조된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듯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휴. 사관으로 떠나는 내 벗을 위하여 한 말씀 안 하시겠소?"
정휴는 토정의 갑작스런 제안에 어리둥절했으나,
달아오른 분위기를 바꾸려면 무슨 말이든 한마디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기(史記)>에서 사마천(司馬遷)이,

공자가 춘추를 짓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춘추를 지을 당시 공자는

노나라의 사구(司寇) 노릇을 하고 있었답니다.

사구라면 법을 펴고 지키는 형조판서쯤 되는 자리인데

제후나 대신들이 공자를 중상하고 방해하여

일이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답니다."
정휴는 말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 모두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공자는 자신의 주장이 채용되지도 않고 도를 행할 수도 없다고 느끼자

그로부터 22년 동안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역사를 썼답니다.

거기서 공자는 옳지 않았던 것은 옳지 않다고 했고,

현자를 현명하다고 했고,

불초한 자를 불초하다고 썼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추상적인 말만으로 가르치는 것보다는

구체적인 실례로써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진실하며 명백하기 때문에'

춘추를 직접 썼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공자는 멸망한 나라를 부흥시키고
단절된 전통을 재생시키고,

폐단을 보충하고 황폐한 것을 다시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일로 볼 때 역사를 적는 사관의 임무는 실로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안명세가 무릎을 탁 치면서 말을 받았다.
"바로 그렇소.

단절된 역사를 이어주는 것,

죽은 역사를 살려내는 것이 바로 사관이 해야 할 일이오.
불의를 불의라 하고,

정의를 정의라고 말하는 사람은
당대에는 오직 사관뿐일 것이오."
정휴는 안명세의 응답에 용기를 얻어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마음껏 제 속마음을 이야기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벌써 사관이 되어 한양으로 떠난다는 선비와,

그 유명한 신동 이지함을 앞에 놓고서.
"사관은 오직 붓 그 자체입니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사실대로 적는 것입니다.

천년을 살아가는 바위처럼 흔들림 없이."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정휴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잃었다.

<사기>나 <춘추> 쯤은 벌써 몇 번씩 읽어본 것이었다.

그러나 지함이나 안명세는 정식으로 배운 사람들이므로

자기 견해가 그들 앞에서 그다지 신선한 의견이 되지 못할 것은 뻔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얘기는 이미 자신의 생각을 몇 단계 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안명세가 응답을 해주고 지함이 경청을 해주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시리 열등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지함은 정휴의 답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침울한 얼굴로 술잔을 들이키던 지함은 한참 후에야
취기가 도는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네.

이 사람, 명세.

자네는 곧은 사람이야.

조정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권 다툼으로 늘 회오리 바람이 불고 있다네.
꼿꼿하기만 한 자네가 그 바람을 피해갈 수 있겠는가?"
"꺾여야 할 때 꺾이는 것이 자연의 이치 아닌가?
초야에 묻혀서 자네와 세월을 논하느니보다

나는 회오리바람 부는 조정을 택하겠네.

우리가 눈 감는다고 해서 사라질 환영(幻影)이 아닌 담에야
누구든 그 더러운 물에 뛰어들어 맑혀야 하지 않겠나.
지함, 자네는 어쩔 셈인가?

앞으로도 이곳 농부들의 일이나 봐주면서 살아가려나?

대과는 언제 볼 것인가?"
지함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은 정휴뿐이었다.
술 기운으로 온몸의 피가 더워져도

정휴의 머리 속은 차갑게 식어갔다.

눈을 내리뜬 채 말이 없는 지함이나, 그

런 지함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는 안명세나,

정휴로서는 이 두 사람이 부럽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은 가슴속에 세상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정휴의 가슴속에는 비굴한 열등감만이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정... 과거...
정휴는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고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미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정휴는 지함과 명세의 고뇌까지도 한없이 부러웠다.

그들이 넓은 가슴으로 국가의 미래와 백성의 운명을 고민할 때

정휴는 한낱 끼니 때울 걱정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세상을 논한다구?

제 옷 한 벌 구할 걱정부터 해야 될 처지 같구만...

문을 열어주던 하인의 비웃음이
비수가 되어 정휴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정휴가 보령 심충익 대감 댁을 떠나 천민이 아닌 양인으로 하루를 보낸 다음날,

안명세는 아침 일찍 한양길을 서둘렀다.
정휴와 안명세는 뜨겁게 손을 마주 쥐었다.

만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사이였지만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것이 

남녀 사이만을 두고 하는 얘기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훗날을 기약하며 아쉽게 손을 놓은 두 사람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형님. 부디 곧은 사관이 되십시오."
"아우님도 잘 계시게나.

지함이 옳은 스승이 되어줄지는 모르겠네만

옆에 있어 해될 일은 없을 걸세."
"이 사람 이거,

벼슬길에 먼저 나간다고 말이 너무 심한 걸."
지함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한양으로 떠나가는 친구의 등을 두드렸다.

대문 밖까지만 배웅한다는 것이 어느새 마을 어귀까지 당도하였다.
"그만 들어가보게."
마을 어귀 성황당에 걸린 붉은색 깃발이 희뿌연 여명을 받으며 음산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던 안명세가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섰다.
"이보게, 친구.

내가 가고 나면 섭섭하겠네.

우리 집을 맘대로 드나들지 못해서 자칫하면 속병 나겠구만.

허허허.

내가 넌지시 말이라도 건네줌세.
잘 있게나."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안명세는 어딘지
쓸쓸한 여운이 있는 웃음을 뿌리면서 휘적휘적 길을 갔다.
안명세의 말에 지함은 웬일인지 허둥지둥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예끼, 이 못된 친구.

알았으면 진작 좀 나서줄 일이지."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안명세의 등뒤에 대고 지함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안명세의 자그마한 체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지함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무릎을 치며 정휴를 돌아보았다.
"이보게, 아우님.

이왕 세상 얘기로 밤을 샌 김에 우리 새벽바다나 보지 않겠나?

날이 흐릴 것 같기는 하네만 같이 한번 보고 오세."
바닷가라면 지함이 방죽을 쌓았다는 그곳일까.
호기심이 발동한 정휴는 밤을 꼬박 샌 피곤함도 잊고 설레는 마음으로 지함을 따라 나섰다.

기사
홍성현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니 그제 아침부터는 꿈 같은 일만 벌어지고 있었다.
꿈에서도 속박이 되었던 종문서를 받아 쥐어 어엿한 평민이 되었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재주 많고 총명한 젊은 선비 이지함을 만났다.

그리고 사관이 되어 벼슬길에 오르는 안명세도 만나

셋이서 잠 한숨 안 자고 토론했다.

종이었다면,

아니 이틀 전이었더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모든 게 꿈만 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바다를 가자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바다가 아니라도,

세상 그 어디라고 해도

그곳은 정휴에게는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정휴는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사람의 인생이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정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보령현에서 홍성현까지 고작 하루면 닿을 거리였지만

남의 집에 매인 신세였으니

한나절 제 몸을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도 구속되었던 까닭이었다.

책 속에서만 태산을 보고

양자강을 보고
바다를 보았을 뿐

정휴는 이때껏 청라동 밖의 세상에 나와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책 속에서 읽은 지리는 중국의 지리였다.

책 속에는 조선의 산천이 나오질 않았다.

천문도 중국에서 본 하늘일 뿐

조선의 것이 아니었고,

나오느니 중국 사람이었고,

중국 산이었고,

중국 강이었다.

중국의 옷을 입지 않고는 학문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바다인들 조선의 바다를 알 리가 없었다.
바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바다.

정휴는 새로운 흥분으로 가슴이 더워오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가 지척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법 술을 많이 마신데다 밤까지 샌 두 사람은

어둠이 걷히는 새벽 바다를 볼 기대로 부지런히 발을 놀렸지만

반도 가지 않아 날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햇살도 없는 아침이었다.
날이 밝고서도 한 점(點)은 족히 걸었을 성싶었다.
자그마한 둔덕을 옆으로 끼고 돌자 불쑥 꿈결처럼 망망한 바다가 나타났다.

그때 흐린 하늘이 기적처럼 순식간에 걷히면서 투명한 햇살이 바다로 쏟아졌다.
"아!"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저것이 바다인가.
한겨울의 추위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보리밭처럼
깊이가 없이 짙은 푸르름,

끝이 없는 막막함.
끊임없이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

바다는 멈추어 있는 듯하면서도 쉼없이 꿈틀거렸다.

정휴는 너무도 감동스러워 그 자리에서 혼절할 것만 같았다.
"자네를 반기는 것 같구만.

오늘 따라 물결도 잔잔하고

구름까지 걷히지 않는가.

썰물 때가 되면 저 앞의 섬까지 물이 빠진다네.

그러면 저 푸르른 바다가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검고 질퍽이는 갯벌이 드러나지.

글줄깨나 읽은 선비들은 세상을 제 손아귀에 쥔 것처럼 큰소리를 쳐대지만,

나는 모르겠네.

저 광활한 바다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왜 저렇게 끊임없이 일렁이는 것인지.

눈앞에 보이는 자연의 이치 하나 꿰뚫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가.
여기에 올 때마다 나는 저 바다로 배를 띄우고 싶다네.

그리고 가보고 싶네.

바다의 끝, 거기엔 또
무엇이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네.

여기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자연,

그건 인간보다 위에 존재하는 힘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네.

인간사 다 부질없어지고,

어떤 때에는 삼강이니 오륜이니 하는 말이 우스워지기조차 한다네."
지함의 말은,

정휴에게는 그다지 귀를 세우고 들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인간되기가 소원이었던 그가
이제야 이틀째 종이 아닌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데,

기쁨을 다 누리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인간 위의 존재를 논하고 있다니...
지함은 눈도 부시지 않은지

은빛으로 부서지는 바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냉기를 머금은 햇살 한 줄기가 지함의 머리 바로 위로 내리 꽂혔다.

지함이 갑자기 수천 수만 갈래의 빛으로 변했다.

강렬한 그 빛 때문에 정휴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조금 전에 신비롭게 내리꽂힌 광채는 어느 틈에 사라지고 지함은

수평선 저 멀리 바라보며 가슴을 활짝 열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인가

주위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둥그스름하게 휜 아득한 수평선,
은빛으로 퍼덕이는 푸른 바다,

그리고 온 바다를 뒤덮을 듯 낮게 내려앉은 하늘만이

정휴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지금까지 정휴를 괴롭혀 왔던 고뇌와 고통이 모두 씻은 듯 스러졌다.

엊저녁에 그토록 정휴를 휘어잡았던 열띤 논의도,

그때에 느꼈던 열등감도

이제는 정휴의 가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막막한 두려움만이 밀려들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뚜렷하게 정휴의 뇌리에 파고드는 건,

자신이 더이상 종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만 가보세.

지금쯤 집에선 나를 찾느라 야단일 걸세."
정휴는 바다를 처음 본 강렬한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쉬운 심정으로 돌아섰다.
나지막한 오르막길을 타던 정휴의 눈에 왼편 저만치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제법 넓은 땅이 거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형님. 저게 뭡니까?"
"소금일세."
"아, 그럼 저게 염전입니까?"
"염전은 아닐세.

바다를 막았더니 시간이 지나 저절로 물이 말라서 소금이 드러난 게지."
전날 들었던 소문이 정휴의 머리 속에 퍼뜩 떠올랐다.

"저것이 형님이 막았다는 방죽입니까?"
"그렇다네."
"소문이 사실입니까?"
"무슨 소문 말인가?

내가 앞날을 읽는다는 소문 말인가?"
말끝에 지함은 짧은 웃음을 흘렸다.
"소문이란 두 사람만 건너도 몇 배로 부풀려지기 마련일세.

자네도 그 소문을 믿었던 겐가?"
"그건 아닙니다만 어쨌든 방죽을 쌓은 거야 사실 아닙니까?

소문이 본시 허황한 것이긴 해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습니까?"
"쓸데없는 짓이었네.

내 어머니의 무덤이라고 수천 년을 고이 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이란
가고 나면 그만인 것을,

어리석은 욕심이었어."
"앞날을 읽긴 읽으신 거군요."
"글쎄, 그

것도 앞날을 읽은 거라 할 수 있겠는가.
서해 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높아서

나가고 들어오는 물의 높이가 많을 때는 30척이나 된다네.
그래서 이곳만 해도 썰물 때 드러난 갯벌을 보면
수십만 평도 더 된다네.

그게 썰물 때는 드러났다가 밀물 때는 완전히 잠겨버린다네.

그러니 어머니 무덤인들 안전할 리가 있겠는가.

해일이라도 들이닥치면 수백 척이나 물이 높이 들어오고,

그런 때면 바닷물에 잠기지 않던 논밭까지도 휩쓸리고 만다네.

그런데

내가 가만히 관찰하니 해마다 밀물의 높이가 높아졌다네.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산 바로 앞 바닷가에 자그마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비록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해마다 바닷물이 조금씩 높아져
바위를 삼켜오고 있었지.

그래봐야 십 년 동안에 어린애 새끼 손가락 한 마디쯤 잠겼을까.

그러나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을 보고 미루어 짐작했을 뿐

앞날을 읽는다는 말은 얼토당토하지 않네."
십 년 동안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쯤 변한 것을
지함은 어떻게 안 것일까?

사람이란 흔히 보는 것은 무심코 지나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함은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스쳐가지 않는 듯했다.

바닷가의 바위 하나를 허투루 보지 않는데 사람이야 오죽할 것인가.
"그 얘기는 그만 하세.

어린 시절의 치기였네.

뒤 오래지 않아 해일이 들어 어머니의 무덤께까지 바닷물이 들긴 했지만

내가 그걸 미리 알고서 방죽을 쌓았다는 것은 거짓말일세.

괜히 신동 하나 만들어보려고 말 많은 선비들이 지어낸 것일 뿐.
그나저나 자네는 어찌할 텐가?"
대답하기 막막한 물음이었다.

바다를 본 충격이 어쨌건 정휴에게 당장 급한 건 한 끼 밥과 잠자리였다.
정휴가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데
앞에서 마주오던 노인네가 지함을 보더니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또 바다를 보러 오신 게구만요."
양반 앞인데도 노인네의 태도나 말씨는 손주를 대하듯 거리낌 없고 다정했다.
"예. 아침 바다를 보면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답니다."
그러고 보니 누구에게나 공대를 하는 것이 지함의 습성인 모양이었다.
"참, 도련님두.

우리네 못사는 백성들은 그저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족한데,

그런 걱정 하나도 없을 양반가 도련님께서

늘 가슴속이 답답하다고 하시니
그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참, 도련님.

방죽 안을 보셨지요?

그새 또 소금이 몇 가마는 족히 나올 것 같습니다.

그걸 어쩔까요?"
"하던 대로 하십시오.

앞으로는 제게 묻지 마시고 동네 어르신들끼리 의논해서 하십시오.

일간 한번 들르겠습니다.

올 농사 의논이나 해봐야지요."
지함은 노인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정휴를 돌아보았다.
"아직 생각해 둔 게 없다면

이 동네에 잠시 머무는 게 어떻겠는가.

여기 우리 땅이 조금 있다네.

거처야 혼자 몸이니

동네 어르신들한테 부탁을 하면 될 테고.
늘 바다도 볼 수 있고 좋지 않은가.

봐 하니 바다에 푹 빠지신 모양인데...

한번 겪어보시게.

농사일이 없을 땐 어선도 탈 수 있을 걸세.

바라보는 바다와는 또 다르지."
"그렇게 배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농사철도 다가오니,

거처가 마련되는 대로 바로 농사 준비를 해야겠군요."
"알겠네. 내가 알아봄세."
지함은 그날로 정휴가 기거할 방을 마련해 주었다.
지함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정휴와 지함의 오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자주 찾아갈 수 없는 정휴의 처지를 알아준 것인지,
지함이 주로 정휴의 거처에 찾아왔다.

세상 밖으로 처음 나온 정휴에게야 지함이 유일한 지기였지만,
안명세를 한양으로 떠나보낸 지함에게도

정휴는 단 하나뿐인 말상대였다.
정휴의 처소로 올 때마다 지함은 정휴에게 줄 책을
하인의 손에 한보따리씩 들려 왔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책을 아예 손에서 뗀 모양이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왜 이리 답답해지는지 모르겠네.

밑바닥도 보이지 않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야.

마치 뻘밭처럼 말일세.
집안에서는 대과를 치르라 하고

나는 마음이 뒤숭숭하기만 하니,

걱정일세."
그러나 아직도 정휴에게는 책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특히 정휴는 금강경을 늘 끼고 살았다.

계급도 없고,
그래서 귀천도 없는 세계가 장엄하게 펼쳐진 경전이었으므로

정휴는 늘 위안삼아 금강경을 들여다보곤 했다.

이미 그 버릇은 심충익의 집에서 종으로 살 때부터 그랬다.
정휴가 금강경을 손에 쥐게 된 것은

심 대감 댁에 시주를 받으러 들렀던 중과 우연히 마주친 덕분이었다.
정휴가 들일을 끝내고 막 돌아오는데

웬 중이 대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청하고 있었다.
정휴가 문에 들어서자 그 중은 정휴에게 절을 하면서 경을 외웠다.
정휴는 자기가 종인 줄도 모르고 절을 해대면서
시주를 구걸하는 중에게 쏘아붙이다시피 냅다 한마디 던졌다.
"종한테서까지 시주를 얻습니까?"
그러자 시주승은 절을 한 번 더 하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신분에 무슨 귀천이 있습니까?

중이나 종이나 다 같은 천민이지만

소승은 한번도 자신이 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천하다고 하면 천민이지만,

내가 천하지 않다는데 누가 감히 천하다고 하겠소이까?

제가 비록 유림들을 만나면
두들겨 맞고,

서당 꼬마들까지 '중 봐라, 중 봐라'
하면서 돌을 던져 쫓겨다니고는 있지만

불심(佛心)만은 한 번도 맞은 적도 없고,

쫓긴 적도 없소이다."
"그런다고 천민이 양반이라도 되는 겁니까?"
"허허허,

참 젊은이도.

한번 마음 돌리면 부처가 되는데 양반이 대체 무슨 소용이고,

천민이 대체 어떻다는 말입니까?

선종(禪宗)의 마지막 조사(祖師)이신 육조 혜능(慧能) 선사도

원래는 중국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업신여기고 깔보는 오랑캐였습니다.

땔나무나 하면서 어렵게 살던 그분이
어느 날 금강경 한 귀절을 얻어듣고 발심(發心)하여
국왕도 오르지 못하는 대선사가 되셨고,

큰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그런 분 앞에서는 국왕도 머리를 조아립니다.

마음이 문제일 뿐 계급도 재산도 외모도 아무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중은 시주 보따리에서 금강경 한 권을 꺼내 정휴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틈틈이 읽으면 확연하게 떠오르는 글귀가 있을 거외다.

그 말을 꼭 붙잡고 의심해 보십시오.
금강경에서 말하기를,

누가 부처님을 찾을 때 생김새로 찾으려 하거나,

목소리로 찾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부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되어 있소.

이 세상 모든 것이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에 비친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날이 새면 말라 없어지는 이슬 같기도 하고

금세 사라져버리는 번개 같기도 한 것이니 마땅히 마음을 보아야 할 것이오.
내 겉모양을 보고 중도 종처럼 똑같은 천민이라고만 생각하였다면

그야말로 참으로 불쌍한 생각이오."
그때 정휴는 그 중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우 입에서 떨어진 말이라고는 어느 절에서 왔느냐는 질문뿐이었다.
"그거야말로 상(相)에 매인 말이오.

사람이 어느 절에 있고,

어떤 집에 살고,

어떤 가문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오.

그러나 물으셨으니 말씀은 해드리지요.

소승은 계룡산 고청봉에서 왔습니다."
"어찌 그리 먼 데서?"
"백성이 모두 헐벗고 굶주리는데,

한곳에 편히 앉아 시주를 받는다면 도적이지 그게 어디 중이겠소?
이보시오, 젊은이.

이제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소.

지금 젊은이가 여기에 있을 뿐이오.

소승은 물러가오."
그러고, 그 중은 떠나갔다.
그 뒤로 정휴는 그 중이 주고 간 금강경을 틈틈이 읽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막혀도 자꾸 읽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한두 마디 문리(文理)가 트이면
기뻐서 하루 종일 그 귀절을 콧노래마냥 흥얼거리며 일을 하기도 했다.

지함이 있건 없건

정휴의 허름한 방에서는 밤새도록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책을 읽어서 어쩔 것인지 따위의 고민은 뒷전이었다.

정휴는 무궁무진한 학문의 세계로 미친 듯 빨려들고 있었다.

아니, 학문에 대한 열정이 고민을 뒤로 미루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신분의 벽에 대한 절망이

반사적으로 책에 매달리게 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굶주린 사람처럼 아무리 미친 듯이

책을 파고들어도 빛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 속에 지식이 쌓여갈수록

지함의 말처럼 밑도 끝도 없는 미궁으로 자꾸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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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소설^토정비결(上-4)

정휴는 지함이 내준 땅을 거두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낮이면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고, 밤이 되면 등잔을 밝히고 지함이 가져다준 책을 읽었다. 심 대감 댁에서 농사일을 해보긴 했으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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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x0KTEc4sA68

금강경은 내용이 3백 송(頌) 정도 되기 때문에 삼백송반야(三百頌般若)라고도 부른다.

특히 금강경은 선종의 6조 혜능(慧能)이 크게 깨달은 경전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의 대목이 그것이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

금강경의 핵심과 요체가 들어 있는 문구라 할수 있다.

일체의 집착에서 해탈초월한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